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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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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서른일곱 시간 만의 살아 돌아옴 - 하지애
1995년 6월 29일, 그날은 쉬는 날이었다. 그러나 휴일을 바꾸자는 선희 언니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탓에 출근을 해야 했다. 어젯밤 비디오도 보고 밤늦게까지 이야기도 나누며 함께 밤을 지샌 정원이와 손을 꼭 잡고 들어서는 백화점의 분위기는 여느 날과 다르지 않았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았고, 위층에서는 쿵쾅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 매장의 여직원들이 오르내리며 들은 바로는 4, 5층의 천장과 바닥에 균열이 생겨 수리를 한다고 했다. 오후 다섯 시쯤,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백화점 일이라는 게 하루 종일 서서 손님들을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간식을 들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었다. 간식을 먹고 근무 매장인 지하 1층 아동복 코너로 향했다.
근무하고 있는 아동복 매장에 들어서면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울긋불긋 밝고 화려한 색깔들, 그리고 앙증맞도록 작은 옷들을 보고 있으면 인형 나라에라도 온 듯 기분이 환해졌다.
"어휴, 에어컨은 왜 가동이 안되는 거야?"
더위를 이기지 못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아 들고 매장으로 들어섰다. 너무 간식 시간이 길지 않았나 싶어 시계를 보니, 시계는 다섯 시 오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건물이 무너진다. 도망 가!"
어디서 들리는지, 누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다급한 외침이 들려 왔다. 건물이 무너지다니...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언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뛸 뿐이었다. 어느 순간,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푹 꺼지더니 몸이 붕 나는 듯했다. 그리고 머리에 쇳덩이라도 와서 부딪치는지 둔탁한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 왔다.
내가 지금 눈을 뜨고 있는가, 감고 있는가,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앞이 깜깜하기만 했다. 손을 뻗어 허우적거려 봤지만, 무거운 것들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만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 난 거지? 정원이는? 여기는 도대체 어디야?"
빠르게 몇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매캐한 먼지들이 코로 입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마치 진공 상태처럼 아득하기만 한 속에서 가느다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살려 주세요! 여기 사람 있어요! 누구 없어요?"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애절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참을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하면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무도 없어요? 구해 줄 사람 없어요?"
나도 울음인지 외침인지 모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았다. 큰 통증이 느껴지는 곳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아우성들 속에서 언뜻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정 언니! 경분 언니!"
따르며 가장 가깝게 지냈던 언니들이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승현아, 괜찮니? 난 움직일 수가 없어."
언니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육중한 무게에 눌러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언니의 신음 소리가 계속될수록 몸도 마음도 점점 옥죄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해정 언니, 경분 언니의 소리도 점차 줄어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주 끊어져 버렸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칠흙 같은 어둠, 사라져 가는 신음 소리들 그리고 고요. 세상이 모두 사라진 한복판에 혼자 덩그마니 남겨진 것만 같았다. 처음 느껴 보는 무서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분식집을 하느라 늘 바쁘던 엄마와 아버지. 병원을 몰래 다니시는 것 같아 카드를 훔쳐보기도 했었다. 왜 좀 더 착한 딸이 되지 못했을까. 때로는 생활비를 대느라 부족해진 용돈 투정을 하기도 했었다. 목마름과 배고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섭고 암담한 상황에서도 허기가 느껴지다니, 얼핏 웃음이 나왔지만 배고픔이 강해질수록 정신도 아득해졌다.
'아냐, 난 살지도 모르잖아. 지금 이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그때부터 열심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정원이는 분명히 살아서 나를 찾고 있을 거야. 부모님도,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오빠도, 이제 중학생인 동생도 바로 내 머리 위에서 나를 향해 오고 있을지 몰라.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텔레비전에서 본 것처럼 우리 나리에서도 지진이 난 걸까. 아니면 폭탄이라도 터진 걸까.'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몇 시간이,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배고픔은 그만두고라도 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밖에는 비라도 오는지 그때 마침 얼굴 위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귀에 들리는 소리였다. 빗소리가 내 기분을 조금씩 바꿔 주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방울을 받아먹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 역한 냄새. 녹이 슨 철근에서 떨어지는 물이었는지 너무도 괴로운 냄새가 났다. 할 수 없이 스타킹을 벗어 물에 적셔서는 얼굴과 머리를 닦아 냈다. 훨씬 갈증이 덜해지는 것 같았다. 입에 고였던 먼지 덩어리도 뱉어 냈다. 주변을 더듬어 보니 쇠 파이프 것 같은 것이 만져졌다. 그것을 들어 얼굴 위의 천장, 몸 옆의 막힌 곳을 두들겨 보았다. 누워 있는 공간이 너무 작아 마음껏 휘두를 수는 없었지만 여기저기 꾹꾹 눌러 보기도 했다.
유리 파편이 박혔는지 온몸이 따가웠다. 몸을 어렵게 구부려 옷을 벗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면 잠을 청했다. 그리고도 시간이 지나지 않으면 즐거웠던 일, 백화점에서 실수했던 일들을 떠올리며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설핏 잠이 들고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땐 큰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얼굴 위에 있던 천장이 점차 내려와 몸을 움직일 공간조차 없어진 것이다. 억지로 몸을 돌려 눕고 나니 또 무서움이 밀려들었다. 이러다 저 돌덩이들에 눌린다면... 죽음은 어떤 것일까. 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돌에 눌린다면 고통은 얼마나 클까. 죽은 뒤에 내가 발견되더라도 내 몸은 온전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다 또 잠이 들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어디선가 스님이 갑자기 나타났다. 아무 말없이 내게 사과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어디선가 멀리서 깡통 소리 같은 게 들려 오고 있었다. 간간이 들리는 그 소리는 멀어졌다가는 가까워지고 또 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가만히 들으니 사람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드디어 날 구하러 사람이 왔구나."
이젠 살았다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에 가슴이 벅차 올랐지만, 한편으론 그만큼 조바심도 났다. 저러다가 얼굴 위의 콘크리트가 아주 내려앉으면 어떡하나. 조금만 기다리면 난 살 수 있는데. 어느 순간, 깡통 소리와 사람들 소리가 지척에서 들려 오고, 환한 빛이 얼굴 위로 쏟아졌다. 그리고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사람의 목소리,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살아 있는 사람 있어요?"
나는 소리쳤다.
"살려 주세요. 여기예요."
"우리가 곧 구조해 줄 겁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름이 뭐예요?"
"박승현이에요. 오늘이 며칠이죠?"
이젠 정말 살았구나. 시간은 왜 이리 더딘지... 드디어 발 아래쪽에서 한 사람이 기어 들어오고 있었다.
"아저씨, 저 옷 하나도 안 입었어요."
담요에 내 온몸이 둘둘 말리고, 내 몸이 번쩍 들려지고 그리고 온몸이 흔들리고 나니, 병원이란다.
내 주위는 몹시도 시끄러웠다. 여러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눈을 가린 채 듣는 목소리 속에 정말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승현아!"
울음 섞인 목소리, 가장 그리웠던 목소리, 바로 엄마의 목소리였다.
"엄마, 나 살았지요?"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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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심을 포장한 선물
그는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잠에게 깼습니다. 새벽 4시. 그의 아버지가 항상 먼저 일어나서 우유 짜는 것을 거들라고 깨우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15세, 아직 아버지와 함께 농장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크리스마스 며칠 전의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보, 나로서는 아침에 마틴을 깨우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오. 그 애는 한참 자랄 나이니까 잠을 푹 자야 하거든. 내가 깨우러 갔을 때 그 애가 얼마나 곤하게 자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나 혼자서도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보, 그건 안 될 말이에요. 게다가 그 애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자기 몫을 해야 할 나이지요."
어머니는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정말이지 그 애를 깨우기 싫다니까."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눈뜨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늑장을 부리지 말아야지.'라고 그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후로는 잠에서 덜 깨어나 비틀거리면서도 일어났습니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 전날 밤, 그는 누워서 아버지에게 드릴 좀더 좋은 선물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는 해처럼 읍내의 상점에 가서 아버지께 드릴 목도리를 하나 샀으나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아침 일찍 일어나 암소의 젖을 몽땅 짜놓고 헛간도 깨끗이 청소해 놓는 선물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깊이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 번도 더 깨어났습니다. 1시, 2시, 2시 30분. 드디어 3시 15분 전에 소년의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갔습니다. 커다란 별이 헛간 지붕 의로 낮게 걸려 있었습니다. 암소들은 졸린 눈으로 놀란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소년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젖을 짰습니다. 일이 즐거워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헛간도 깨끗이 치우고 깨끗이 씻은 양동이는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소년은 허둥지둥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마틴, 얘야 일어나야지. 크리스마스라서 안됐다만."
"알았어요."
그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가마."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문이 닫히자 그는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불과 몇 분 후면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놈 봤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흐느끼는 듯한 묘한 웃음소리였습니다.
"누가 속을 줄 알고?"
아버지는 침대 옆에 서서 그를 더듬으며 이불을 걷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아빠."
그는 아버지의 허리를 끌어안았습니다. 아버지의 팔이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얘야, 고맙다. 아무도 이보다 더 흐뭇한 일은 못할 게다."
"아, 아빠, 난 아빠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다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의 가슴은 넘치는 사랑으로 북받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30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는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별들은 유난히 총총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크리스마스 새벽 동트기 전의 별들은 언제나 크고 밝게 보였습니다. 다른 어느 날의 별들보다도 확실히 더 크고 더 밝은 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별이 움직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날 밤 그 별을 보았을 때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아이들마저 다 떠난 지금 그는 오늘 아침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살아있는 것은 오랜 옛날,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것이 자기의 내면에 싹을 틔웠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일깨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축복받은 크리스마스 아침,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책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씨앗이 열매맺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랑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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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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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스물네번째 이야기 - 왕의 환생
아주 오랜 옛날 설두라건녕이라는 왕이 대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는 팔만사천의 소국과 팔십억 개에 이르는 마을을 통치하였으며, 이만 명의 부인과 시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자비심으로 모든 백성들을 보살피는 어진 왕이었다. 백성들 역시 그러한 왕을 마치 친아버지처럼 따르고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 혜성이 출현하자 천문관이 국왕을 찾아와 말했다.
"옛부터 혜성이 출현하면 십이년 간 큰 가뭄이 든다고 하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천문관의 보고를 받은 국왕은 수심에 잠겼다. '정말 그렇게 큰 가뭄이 들면 어쩌나? 그렇게 되면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려 죽을 텐데...' 곧이어 국왕은 여러 대신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세웠다. 그때 회의에 참석한 한 대신이 이렇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우선 시급히 전국의 인구와 비축되어 있는 양식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 조사해봐야 합니다 .그래야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국왕은 그 대신의 말에 따라 조사를 진행시켰다. 그 결과 아무리 최소 수준으로 배급량을 줄인다 할지라도 몇 년 버티지 못한다는 참담한 계산이 나왔다. 얼마 지나지않아 천문관의 예측대로 전국은 큰 가뭄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어 몇 년이 흐르자 마을마다 굶어죽은 백성의 시체가 산더미를 이루었다. 평소에 백성들을 끔찍히 아끼던 국왕은 이 일로 잠을 편히 이룰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왕은 수심에 잠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보려고 부인과 몇몇 시녀들을 데리고 근처에 있는 강을 찾았다. 국왕은 그녀들과 함께 강변을 거닐다가 홀로 조용한 곳을 찾아 생각에 잠겼다. '백성들이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이다지도 참담한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내가 부덕한 탓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이상 가뭄에 희생되는 백성이 없도록 해야 한다.' 생각을 마친 국왕은 강변의 한 언덕 위로 올라가 천지신명에게 기원했다.
"만 백성이 굶주려 죽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가 없습니다. 이제 제 몸을 버리나니 원컨대 커다란 물고기로 다시 태어나 그 살로 굶주리는 백성들의 배를 채워주게 하소서."
국왕은 기원을 끝내자 시퍼런 강물로 뛰어들었다. 잠시 후 국왕은 커다란 물고기로 환생하게 되었는데, 그 길이는 무려 오백 유순(유순은 인도의 거리 개념으로 멍에를 황소 수레에 걸고 하루에 갈 수 있는 거리를 말한다)이나 되었다. 그때 나무껍질을 벗겨 주린 배를 채우고 있던 다섯 사람이 물을 마시기 위해 강변으로 왔다가 큰 물고기를 보게 되었다. 큰 물고기는 그들에게 말했다.
"배가 고프면 어서 내 살을 먹도록 하시오. 그리고 살을 베어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 다른이들에게도 나누어주도록 하시오. 또 이이야기를 뭇 사람들에게 알려 배고픈 자는 모두 내게 오도록 하시오."
다섯 사람은 큰 물고기의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며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선 각기 물고기의 살을 한 덩이씩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이윽고 소문은 급속도로 퍼져 그 나라 모든 백성들이 큰 물고기의 살을 먹고 부지하게 되었다. 이 물고기의 살은 신기하게도 한 덩이를 베어내면 금방 다시 새 살이 돋아났다. 큰 물고기는 살점이 뜯겨나가 피를 흘리는 고통 속에서 가뭄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굶주린 백성들의 유일한 먹거리가 돼주었다.
곤경에 처한 백성들을 차마 그냥두고 볼 수 없어 자신의 몸을 버리면서 까지 커다란 서원을 세웠던 설두라건녕왕, 그의 환생인 그 신비롭고 커다란 물고기를 먹은 백성들은 마침내 천수를 다한 뒤에도 천상에 태어나는 복을 얻었다. <현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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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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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 막심 고리끼
26.
세월은 그날 그날의 꼬리를 물로 빠르게 흘러 어머니에게 메이데이에 대한 생각을 가질 여유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밤마다 소음에 지치고 세월의 무상함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뒤로 하고 잠자리에 들면 늘 가슴을 조용히 짓누르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날이 빨리 왔으면...)
새벽 어스름에 짐승 울음소리 같은 공장 사이렌이 울려대면, 아들과 안드레이는 급히 차를 마시고 빵 한 조각을 입에 물고서 어머니에게 몇가지 당부의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서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하루 온종일 점심식사 준비를 하고, 성명서를 위한 연보라빛 풀을 쑤느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안을 뱅뱅 돌았다. 간혹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빠벨에게 전해 주라며 쪽지를 그녀의 손에 건네주고는 그녀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서 총총히 사라지는 때도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메이데이 기념식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는 전단들이 거의 매일 밤 담장이란 담장엔 죄다 나붙었는데, 심지어 경찰서 정문에도 붙어 있곤 했으며 공장에도 매일 뿌려졌다. 아침이면 경찰은 욕지거리를 입에 달고서 공장촌을 휘젓고 다니며 담벼락에 붙어 있는 연보라빛 성명서들을 잡아뜯는다. 긁어낸다 하며 야단이었지만 점심 때가 되면 전단들은 다시 거리에 뿌려져 지나는 사람들의 발 아래서 나뒹굴었다. 시내에서 밀파된 사복 형사들이 길모퉁이에 웅크리고 서서 상기된 얼굴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점심 먹으러 갔다오는 노동자들을 세심히 살폈다. 모든 사람들은 경찰의 무력감을 본다는 게 신나는 일이어서 심지어 중년의 노동자들도 서로 웃는 얼굴로 수군대는 것이었다.
"뭔 일이 일어나고 말 걸, 안 그런가?"
가는 곳 어디서나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여서는 선동적인 격문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삶은 비등점에 다다라 올 봄엔 모든 사람들에게 전에 없던 각별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모든 사람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다가올 돌발사건에 염증을 느끼는지 모반자들을 심한 욕설로 매도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복잡한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고,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게 바로 모두들 들고일어나게 하는 힘이라는 걸 예리하게 의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빠벨과 안드레이는 거의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공장 사이렌이 울리기 바로 직전에야 지치고 피로하고 창백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숲속이나 소택지 어딘가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는 것과, 밤마다 말탄 경찰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공장촌 구석구석을 뒤질 뿐만 아니라 사복 형사들도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뒤 아 이 사람 저 사람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아들이나 안드레이도 모두 어느 날 밤엔 체포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내심 짐작한 그녀는 차라리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마저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것이 그들로 보아서도 나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기록계 이사이 살인 사건에 대한 수사는 이상하게도 시들해졌다. 한 이틀 지방 경찰이 동기다 뭐다 해서 사람들에게 꼬치꼬치 깨묻고 한 열명 심문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살인사건에 대해서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리야 꼬르수노바는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경찰의 견해도 은연중 비쳤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그렇듯이 경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관절 무슨 재주로 범인을 찾아내겠수? 그날 아침 이사이가 만난 사람만도 백 명이 넘을테고 그 가운데 적어도 아홉 명은 이사이를 쳤을 가능성이 있는데 말이우. 7년 남짓 누구 하나 그 사람한테 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라고..."
우끄라이나인의 모습이 눈에 띌 정도로 달라졌다. 수척해진 얼굴, 패인 양 볼, 천근만근이나 나가듯, 툭 튀어나온 두 눈을 반쯤 내리덮은 눈꺼풀, 게다가 인중엔 잔주름이 패어 있기도 했다. 그는 일상적인 잡다한 일에 대해서는 한결 말수가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미칠듯한 환희에 취하기만 하면 미래에 대해서, 자유와 이성이 승리하는 그날, 아름답고 찬연한 바로 그날의 축제에 대한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사이 죽음에 대한 수사가 시들해지자 떨떠름하면서도 비통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을 여는 것이었다.
"그자들은 민중들은 고사하고 민중들을 못살게 구는 데 개처럼 이용해 먹던 자들한테조차 일말의 동정심도 갖고 있지 않아. 그자들이 진정바라는 건 유다고 아니고 오로지 돈일 뿐이야..."
"그만 하면 됐어, 안드레이!"
빠벨이 단호히 말을 하자 어머니도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썩어빠진 고목을 한 방 치니까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버린 거야."
"어머니 말씀이 옳은 것은 알지만 그것으로는 위안이 되질 않아요."
우끄라이나인이 침통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을 했는데, 그의 입을 통해서 흘러 나오는 말들은 비록 신랄하고 거칠었지만 나름대로 특별하면서도 보편타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 드디어 그날, 5월 1일은 찾아왔다. 공장 사이렌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울부짖었다. 준열하면서도 고압적으로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어머니는 침대에서 일어나 어제 저녁부터 준비해 놓은 사모바르에 불을 지피고 늘 그렇듯이 아들과 안드레이가 자고 있는 방 문을 두드리려고 하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손을 내젓고 마치 이를 앓고 있는 사람처럼 턱에 손을 대고서 창가에 앉았다. 희뿌연 담청색 하늘에선 뭉실뭉실 뭉개구름이 장미 및 아침노을을 받으며 떼지어 유영하고 있었다. 마치 공명하는 짐승의 울부짖음에 놀란 새떼가 잔뜩 무리지어 날아가듯이. 어머니는 구름을 바라보며 자기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였다. 머리는 무겁기 그지없고, 꿈도 없는 밤을 태운 두 눈을 까칠까칠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의 평정이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고 심장의 박동은 규칙적이었으며 예나 다를 바 없는 잡다한 생각으로 머리는 꽉 차 있었다.
(사모바르를 너무 일찍 올려 놨어, 다 끓어 증발해 버리겠는 걸! 오늘은 잠이나 더 자도록 내버려둬야겠다. 둘 다 고단할텐데...)
발랄하게 뛰어놀던 어린애 같은 햇살이 창문으로 방안을 엿보고 있었다. 그녀는 한 손으로 햇살을 받쳐 들고 밝은 햇살이 손의 표면에 누워 있는 것을 느끼고, 다른 한 손으로는 조용조용 햇살을 더듬으며 다정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사모바르에서 증기 배출관을 벗기고 세수를 말끔히 한 다음, 정성스레 성호를 그으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면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은 밝아 오른쪽 눈썹이 때론 천천히 위로 치켜 올라가는가 하면 또 이내 내리깔리곤 했다... 두 번째 사이렌이 조금 낮게 울렸다. 그 떨림으로 볼 때 그렇게 자신 만만하지 못하고 그저 답답하고 눅눅한 소리였다. 어머니는 오늘따라 사이렌 소리가 길게 느껴졌다.
"빠벨! 듣고 있나?"
그들 가운데 하나가 맨발을 마룻바닥에 끌었고 또 누군가가 달디단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사모바르가 준비되었다!"
어머니가 소리쳤다.
"예, 곧 일어나요."
빠벨이 유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해가 떠오르고 있어. 그리고 구름도 끼었고. 오늘은 구름이란 놈은 필요가 없는데..."
우끄라이나인이 말했다. 그들은 부엌으로 나왔다. 잠 때문에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었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넨꼬! 기분은 어떠세요?"
어머니는 그에게 다가가 귀에다 속삭였다.
"얘야, 안드류샤, 오늘일랑 빠벨 옆에 꼭 붙어 다니도록 해라."
"물론예요. 우리가 함께 있는 한 우린 어디고 붙어 다닐 거예요, 그점은 염려 놓으셔도 돼요."
"무슨 얘길 그리 속닥거리는 겁니까?"
빠벨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빠샤!"
"어머니께서 나보고 세수 좀 깨끗이 하라고, 처녀들이 볼 거라고 그러시네."
세수하러 현관을 빠져 나가면서 우끄라이나인이 대답했다.
<일어나라, 깃발을 올리자, 노동자들이여!>
빠벨이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제 빛을 발하자, 구름은 바람에 쫓겨 줄달음질 쳐 버렸다. 어머니는 찻잔을 준비하면서 하도 이상한 생각이 들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오늘 같은 날 아침 애들은 농담이 나오고 웃음이 나올까? 정오가 되면 무엇이 저희들을 기다릴는지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어머니 자신의 마음도 거의 기쁨이랄 수 있을 정도로 왠지 평온하기만 하였다. 그들은 시간을 빨리빨리 보내려고 차를 오래동안 마셨다. 그리고 바벨은 늘 하던 대로 설탕 한 숟갈을 차에 넣고 천천히, 꼼꼼하게 휘젓고는 자기가 좋아하는 빵 한 조각을 떼어 내 소금을 쳤다. 우끄라이나인은 탁자 아래서 두 발을 흔들었는데, 그는 한 번도 발을 편히 놓아 둔 적이 없었다. 그러면서 천장과 벽의 습기에 반사되는 햇빛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땐데, 한 열 살 남짓 되었을 거야. 그때 난 유리잔으로 태양을 잡고 싶었지. 그래서 유리잔을 들고 태양을 쫓다가 그만 벽에 부딪치는 바람에 쨍그랑 했지, 뭐! 손까지 베이고 그것 때문에 또 얼마나 맞았던지. 실컷 두들겨 맞고서 마당에 나갔더니 태양이란 놈이 이번엔 웅덩이 속에 있는 거야. 그래서 또 달려가서 발로 마구 짓밟았지. 바지니 뭐니 할 것 없이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는 바람에 또 맞았어... 그러고도 내가 어쨌는 줄 아나? 난 태양을 보고 이렇게 소리쳤어. <아플 줄 알지, 이 빨간 악마야! 난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리고 혀를 내밀어 놀려 주었지. 그랬더니 좀 위안이 되더라고."
"형은 어째서 태양을 빨갛다고 생각했어?"
빠벨이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 집 맞은 편에 대장장이 아저씨가 살고 있었는데 그 아저씬 빨간 턱수염을 기른 늘 쾌활하고 선량한 아저씨였어. 그래서 난 태양이 아저씨를 닮았으려니 생각한 거지..."
어머니가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 행진할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하냐?"
"일단 결정된 거를 얘기해 봐야 머리만 더 복잡해질 뿐예요. 만약, 우리가 모두 잡혀 가면 니꼴라이 이바노비치가 찾아와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를 어머니께 말씀드릴 거예요."
우끄라이나인이 죄송스러운 듯 대꾸했다.
"알았다!"
어머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린 그만 거리로 나갑시다!"
빠벨이 꿈꾸듯 중얼거렸다.
"아냐, 때가 될 때까지는 집에 있는 게 나아. 공연히 경찰 눈에 띄어 애태우게 할 필요가 있나? 그 놈들은 자네를 잘 알고 있단 말일세."
안드레이가 대꾸했다. 페쟈 마진이 양 볼이 벌개진 얼굴로 뛰어왔다. 그는 설레임과 기쁨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고, 그 때문에 기다림의 지루함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가 입을 열었다.
"시작됐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모두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얼굴이 한결같이 도끼 같은 얼굴이야. 공장 문 앞에 베소프쉬꼬프가 구세프 형제, 사모일로프와 함께 버티고 서서 연설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다고. 나가세! 시간이 됐어. 벌써 열 시야..."
"가야지!"
빠벨이 단호하게 말했다. 페쟈가 다짐을 두어 말했다.
"점심식사 시간이 지나면 공장 전체가 들고 일어날 거래."
그 말을 남기고 그는 달음질로 집을 나섰다.
"바람 앞에 등불 격이군!"
어머니는 나직한 말로 그를 배웅하고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어디 가시려고요, 넨꼬?"
"너희들하고 같이 갈란다!"
어머니가 대꾸했다. 안드레이가 제 콧수염을 잡아 당기며 빠벨의 눈치를 살폈다. 빠벨은 재빠른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서 어머니가 있는 부엌으로 나갔다.
"전 어머니께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어요. 그러니 어머니도 제게 아무 말씀 마세요. 됐죠?"
"오냐, 됐다. 주께서 너희와 함께하실 게야."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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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52. 회개
<회개는 아주 심원한 일을 일으킨다. 온몸의 세포 하나 하나에서 눈물 흘리게 한다. 아! 아름다운 변화>
위대한 수피 알힐라이 만소르.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만 만소르는 갈갈이 찢겨 죽었다. 만소르는 십자가에 못 박힌 다음 먼저 다리를 잘렸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다음엔 팔이 잘렸다. 다시 혀가 잘렸고, 양쪽 눈이 패였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몸통을 찢겼다. 그의 죄목은 오직 하나였다. 그가,
"나는 진리요, 신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만소르에게 돌을 던지며 조롱하였다. 만소르는 웃었다. 발목을 잘려 피가 넘쳐 흐르자 그는 양손으로 피를 받았다. 구경하고 있던 한 사람이 뭘 하는 거냐고 물었다. 만소르가 말하기를,
<어찌 물로 손을 씻을 수 있으리? 피로써 저지른 죄는 오직 피로써만이 닦을 수 있느니. 피로써 내 손을 닦고 기도하리니>
사람들이 손을 자르려 하자 만소르는 말하기를,
<잠깐만, 내 기도가 끝난 다음 자르라. 손이 없으면 기도하기가 어려우니>
만소르는 하늘을 우러르며 신에게 말했다.
<당신은 절 속일 수 없습니다. 전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서 당신을 봅니다. 살인자로 나타나셨고 적으로 나타나셨어도 절속일 순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셔도 전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제 속안에 계신 당신을 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미친듯이 돌을 집어 던지며 그를 조롱하였다. 만소르는 웃고 있었다. 웃고만 있던 만소르가 돌연 울기 시작하였다. 아,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시블리가 장미 한 송이를 그에게 던졌던 것이다. 사람들이 괴이쩍어 다시 까닭을 물었다. 왜 우느냐고. 만소르가 말하기를,
<돌을 던지는 사람들은 저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저 시블리는 안다. 신에게 용서를 구하기가 어려울 것임을>
훗날 누가 시블리에게 그때 왜 장미꽃을 던져느냐고 묻자 시블리는 말했다.
<난 군중들이 무서웠소. 내가 아무것도 던짖 않으면 군중들이 날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소. 난 만소르가 참으로 순진무구한 사람임을 알기 때문이오. 그렇다고 또 아무것도 던지지 않을 순 없었소. 난 겁장이었소. 그래서 꽃이 제격이라 생각했소. 만소르는 나의 두려움과 겁 많음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오>
만소르의 눈물은 시블리를 완전히 변화시켰다. 그 후 시블리는 십여 년 동안을 거지처럼 떠돌며 가슴 에이는 고통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나머지 인생 동안 끊임없이 회개하였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만소르를 죽였다. 적어도 나만은 그를 이해했었고, 그래서 그를 구할 수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군중들한테 동조했다. 아 나는 그에게 꽃을 던졌다!>
그대가 책임을 알기만 한다면 회개는 아주 심원한 일을 일으킨다. 그럴 때 자그마한 것일지라도 그대의 뿌리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두 눈에서만이 아니라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에서 눈물 흘리게 한다. 아, 아름다운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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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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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3 - 엄광용 엮음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다 <유경>
-"사람이 서로 싸움을 할 경우에도 멱살을 잡아쥐지 않거나 등판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에 도읍을 정하시는 것은 바로 천하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는 것이 됩니다."-
유경은 제나라 사람으로, 원래 그의 성은 누씨였다. 한나라 5년에 그는 농서의 수비병에 불과했었다. 어느 날 짐수레를 끌고 가던 누경은, 한나라 장군이 지나가자 다 헤진 양피옷을 입은 채 급히 달려가 소리쳤다.
"장군! 부디 폐하를 뵙게 해주십시오.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은 우장군이었다.
"그렇게 해주지. 그런데 옷이 너무 더럽군."
우장군은 누경에게 깨끗한 옷을 입혀 고조를 만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명주옷을 입었으면 명주옷차림 그대로 뵙고 누더기 옷을 입었으면 누더기옷차림 그대로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누경은 고집을 세워 거지차림의 양피옷을 걸친 채 고조를 만났다. 고조는 누경을 걸인으로 보고, 곧 음식을 내리게 한 후 물었다.
"그래, 짐을 만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인가?"
누경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혹시 옛날 주왕실의 융성함을 보고 낙양에 수도를 정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
"한나라의 수도로 낙양은 좋지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낙양은 천하의 중심이라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공을 하거나 노역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그 거리가 알맞아, 덕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제왕의 노릇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반면 덕이 없는 사람이 그곳에 수도를 정하면 패망하기 알맞습니다."
고조는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그대는 짐을 덕이 없는 사람으로 보는가?"
누경이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주나라가 이곳에 수도를 정할 때는 제왕이 덕으로써 사람들을 모여들도록 함과 동시에, 또한 험준한 지형을 믿고 교만하고 사치한 군주가 백성을 학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발상에서였습니다. 따라서 주나라가 융성하던 시절에는 천하가 화합하여 오랑캐들도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으며, 한 명의 수비병이 없어도 제후나 오랑캐가 주왕실을 넘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주나라가 쇠잔해지자 동서로 분열되고 천하에 입조하는 제후가 없었는데도, 주왕실에서는 그것을 제어할 능력이 모자랐습니다. 주나라가 무너진 것은 덕이 모자랐기보다는 지형이 견고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한나라 수도로 어느 곳이 좋다고 생각하는가?"
"주나라 시대와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진나라의 통치 시대를 거치면서 제후들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의 수도는 지형적으로 견고한 곳에 자리잡아야 합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신다면 혹시 산동이 어지러워지더라도 최소한 옛날 진나라의 땅만이라도 안전하게 지킬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 싸움을 할 경우에도 멱살을 잡아쥐지 않거나 등판을 후려치지 않고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관중으로 들어가 도읍을 정하고, 진나라의 옛 땅을 장악하시면 그것이 바로 천한의 멱살을 잡고 등판을 강타하는 것이 됩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다."
누경의 말에 고조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주왕조는 이곳 낙양에 도읍하여 수백 년을 유지했는데, 진나라는 관중땅에서 겨우 2대를 지냈을 뿐입니다. 낙양이 한나라 수도로 적합합니다."
고조는 일단 누경의 천도설을 유보시켰다. 그리고 가장 신임하는 유후 장량이 입조하였을 때 가만히 물어보았다.
"누경의 생각이 옳습니다."
다 듣고 나서 장량이 대답했다.
"짐도 그렇게 생각한다. 즉시 관중으로 천도를 해야겠소."
고조는 이렇게 하여 한나라 수도를 낙양에서 관중으로 옮겼다. 천하의 요새인 관중에 도읍을 정하고 나니 마침내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나서 고조는 누경에게 말하였다.
"진나라의 옛 땅에 도읍을 정하자고 한 것은 그대 누경이다. 누는 유와 통한다. 앞으로 그대 성을 짐과 같은 유로 부르겠다."
이렇게 하여 누경은 황제와 같은 성씨를 따서 '유경'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때 유경은 낭중의 벼슬에 올랐으며, 봉춘군에 봉해졌다.
진솔 : 진솔함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다. 애써 자신의 화려함을 내보이려는 사람은 자기 내면의 부족함을 가려보려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떳떳하게 행동한다. 그 떳떳함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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