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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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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나의 파랑새 - 서주희
1985년 4월, 나는 열아홉 살의 봄을 맞아 땅을 밀고 올라오는 새순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그날을 늦은 봄의 어는 토요일 아침이었다. 분명히 버스를 타고 있었던 기억이 나는데 눈을 떠보니 종합병원 중환자실이었다. 부모님과 여러 친척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며 서 계셨다. 내 옆에는 산소통이 있고 목에는 검은 공같이 생긴 것이 달려 있었는데, 의사가 그것을 눌렀다 폈다 하고 있었다. 사고로 목뼈를 다치면서 모든 신경이 마비된 것이다. 그래서 호흡을 인공적으로 시키고 있었다.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현실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호흡 장애에 전신마비,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아무리 꼬집고 비틀어도 느낌이 없었다.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자유를 잃어 본 사람만이 그 소중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 남들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그 평범한 자유가, 가장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가 이제 내게서는 사라진 것이다. 오죽하면 당장 죽을지라도 한 번만 일어나게 해달라는 소원을 가졌을까. 왜 그토록 쉬운 것이 내겐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아직 어린 내게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이었다. 가망이 없다던 내게 가능성이 생긴 것은 사고 후 2개월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날은 할머니와 이모가 오셔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무심코 왼팔을 들었는데 팔이 쑥 올라가는 것이었다. '정말 내 의지로 든 것일까?' 가끔 나도 모르게 몸이 움직일 때가 있었기 때문에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들어 보았다. 정말로 내가 든 것이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했는데,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솟구쳤다. 기구한 운명이 슬퍼서 울던 내가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 그후 손가락과 다리, 발가락을 조금씩 움직였고 그러면서 아픔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해 가을, 나는 꼭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게 새로운 고통이 다가왔다. 40도가 넘는 고열과 함께 다리에 심한 통증이 온 것이다. 아버지가 밤새도록 다리를 주무르고 물수건을 머리에 얹어 주셨지만 좀처럼 낫지 않았다. 해열제도 소용이 없었고 다리도 계속 아팠다. 급기야 음식까지 먹지 못해 링거액과 물로 버티다가 결국은 코로부터 위장까지 연결된 고무 호스를 통해 주사기로 묽은 죽을 넣어야 했다. 정신이 말짱한 내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억지로라도 먹어 보겠다고 이틀 만에 호스를 뽑았지만 한 숟가락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뭐라도 먹게 하려고 시장으로 백화점으로 다니며 새로운 것을 사 나르는 일이 일과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과일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고 차츰 음식도 먹게 되었다. 모두가 아버지의 정성 덕분이었다. 그렇게 힘들었던 겨울을 무사히 넘기고 새 봄이 찾아왔지만 몸에 살이 붙어 있지 않아 내가 나를 봐도 낯설어 할 정도였다. 누가 봐도 이상한 환자였다. 전신마비의 불구자,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어도 이렇게 인공호흡기를 하고 전신마비이면서 팔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는 환자는 없었다.
그렇게 중환자실 생활을 끝내고 나는 1인실로 옮겼다. 희망은 점점 멀어지고 나는 자꾸만 나이를 먹었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흐른 1990년 여름, 나는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것은 너무 슬픈 것이었다. 어느 날 엄마가 갑자기 병실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희야, 왜 전화를 안 받니?"
"전화를 왜 안 받아. 안 오니까 안 받지."
"그것 참 이상하구나! 교환에서는 병실에서 받지 않는다고 하던데. 몇 번이나 전화를 해도 연결이 되지 않아서 걱정이 돼 집에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때까지도 나는 내 귀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면 듣지 못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다만 주위가 많이 조용해졌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소리를 잃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음악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나는 이럴 수는 없다고, 울고 또 울었다. 하필이면 내가 왜? 내 앞에 신이 있다면 묻고 싶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요. 왜 저는 이래야 하나요. 얼마나 더 있어야 불행이 끝날까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신가요. 제가 무슨 큰 욕심을 부렸던가요. 이렇게 소리마저 또 앗아가야만 하나요. 그래도 살아 있음을 기뻐해야 하나요. 아뇨, 이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정말 살고 싶지 않다구요.'
나는 결국 죽기로 결심했다. 여태껏 수없이 죽음을 생각했지만, 그동안 내겐 죽음의 자유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불면증 때문에 먹고 있는 수면제를 모을 수 있었다. 매일 먹는 분량에서 한두 알 씩 남긴 것이 어느덧 꽤 많은 분량이 되었다. 그날 밤 간호하는 동생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행동에 옮겼다. 서너 알씩 몇 번 약을 삼켰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다. '과연 이것이 진정 옳은 일일까? 이러지 않아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자살을 한다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 것인가. 나의 사고로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엄마에게 너무도 몹쓸 짓이 아닌가.'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묻고 오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엄마의 우는 모습이 자꾸만 나를 잡았다. 불효만 한 딸 때문에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그래, 자살을 해서는 안된다. 이 상태에서라도 끝까지 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엄마에 대한 최선의 도리이다.
나는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뭔가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무리 한 생명이 바닷가의 모래알 같다해도 내가 이 세상에 살다갔다는 흔적만이라도 남겨야 할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도 쓰고 내 슬픈 이야기도 남기고 싶어졌다. 그러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글씨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이었지만 열심히 노력했다. 여러 달을 계속하니 글씨도 차츰 나아졌다.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되었을 때 병원에서 나는 첫 편지를 써서 가장 친한 친구에게 보냈다. 사고 후에도 한결같이 정다운 친구로 나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며 위로가 되어 준 소중한 친구였다. 친구의 결혼으로 예전보다 우리의 만남이 조금은 줄었지만 여전히 다정한 친구에게 내 마음을 글로 전했다. 그 친구에게서 곧 답장이 왔다. 서투른 글씨로 된 나의 글을 접하며 얼마나 힘들여 썼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였다. 그렇다. 아직 내겐 소중한 사람이 많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언제까지 슬퍼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인 내 운명이라면 더 이상 거부하지 말자. 7년의 아픈 세월을 잘 견뎌냈다고 나 스스로 대견해 하자. 먼 곳의 파랑새를 찾기보다는 내 주위의 모든 것이 기쁨이고 행복임을 알자.
다치기 전에는 숨을 쉬고 산다는 것조차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이젠 없어서 슬프기보다는 조금이라도 있음을 기뻐하고 싶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이에게 평범 그 자체, 자기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축복임을 이야기해 주고 싶다. 나도 내가 가장 불행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보다 덜 아픈 사람도, 더 많이 아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나 내가 느끼는 삶의 무게는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 속에서도 기쁨을 아는 내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제13회 올해의 인간승리상 본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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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2차대전 중에 열대 밀림 한복판에 있던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는 늘 짙은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전기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지독한 무더위와 살인적인 배고픔 때문에 포로들의 얼굴에는 이미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식량이 거의 공급되지 않았던 수용소에서 쥐를 잡아먹었다면 큰 행운이라고 부러움을 받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수용소 안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으로 가방 깊숙한 곳에 양초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친한 단 한 명의 포로에게 그 양초가 가장 위급할 때 중요한 식량이 될 것이라면서 이같은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친구에게도 꼭 나눠주리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포로는 그 뒤부터 혹 친구가 양초를 혼자 다 먹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밤마다 가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한 포로가 서글픈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군. 내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낼 수 있었으면......
그러나 배고픔에 지친 포로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밤, 양초가 든 가방을 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 포로는 친구가 부시시 일어나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서 양초를 꺼내들자 친구가 자기 혼자만 양초를 먹으려는 줄 알고 놀라서 숨을 죽이고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양초를 꺼내 판자 위에 올려 놓고 숨겨 놓았던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오두막 안이 환해졌습니다. 포로들은 작고 약한 불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어난 뒤 하나둘 촛불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촛불은 포로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은 없습니다."
촛불은 활활 타올라 점점 커져서 포로들의 마음까지 비추는 듯했습니다.
"우리 내년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집에서 보내자구."
누군가 또 이렇게 말하자 포로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 뒤, 서로의 소원을 얘기했습니다. 그 날 그렇게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던 포로들은 아무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갖지만, 희망은 언제나 실망과 맞붙어 있는 것이어서 실망하게 되면 풀이 죽고 만다. 희망을 질러 나아가고, 잃지 않게 하는 것은 굳센 용기뿐이다. (양계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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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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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자네들이 젊었을 때 실명한 이래 서로를 볼 수 없어서 이런 일이 생겼구먼. 사람이란 나이가 들면 쇠약해지고 얼굴에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자연의 이치라 피할 수가 없다네. 늙어서도 젊었을 때의 어여쁜 얼굴을 바라는 것은 마치 얼음 속에서 불을 구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라네. 도대체 왜 우는 것인가? 두 사람 다 지나간 세월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출요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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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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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순교한 조선의 최초의 신부 김대건(1822-1846, 25살, 처형).
순교자의 길을 걸어간 김대건은 오로지 신앙을 향한 일념으로 살다가 짧은 생애를 마감한 조선 최초의 신부이다. 그는 천주교 교인의 집안에서 태어나 다른 생각은 아예 해보지도 않은채 15살의 어린 나이에 신부가 되기로 작정하고 이역 만리 타국 땅으로 신학 공부를 떠났던 굳센 신앙인이었다. 그의 집안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참신앙으로 받아들여서 순조 원년의 신유년 교난부터 박해를 받아왔고, 이를 피하기 위해 고향에서 살지도 못하고 타지로 이주해야만 했던 독실한 천주교 가정이었다. 그는 집안을 신앙으로 이끌었던 할머니에 의하여 일찌감치 신부감으로 키워졌으며, 그 자신도 어린 나이에 이미 강한 신앙의 힘으로 무장하여 스스로 시련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 당시 조선의 실정으로는 일반 신도도 견디기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신부가 된다는 것은 고난의 단계를 넘어서 죽음을 예상해야 하는 형극의 길이었기 때문에 보통의 결심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 어떤 새로운 문물도 수용하지 않을 정도로 극히 경직된 보수주의 사회였던 조선에서 최고의 이단으로 손꼽는 천주교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발상은 아무리 신앙의 힘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가질 수 있는 생각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신앙인이기도 하지만 미지의 세계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능동적인 인간상의 표본이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전인미답의 미지의 세계를 향하여 자신만의 의지와 천주에 대한 신앙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흑암을 뚫고 나아간 것이므로 그 도전 정신만으로도 타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새로운 세계로 도전한 사람들에 의하여 발전되어 왔다. 그 시대의 일반적인 삶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자세이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타인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법이다. 김대건 또한 현실에 편안히 안주하기보다 가시받길일지언정 미지의 세계로 나갔기 때문에, 그는 참된 신앙인의 모습과 함께 적극적인 인간 정신의 발현으로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천주교 집안에서 출생
김대건은 조선 23대 왕인 순조 22년(1822년)에 김제준과 장홍 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이라는 산중 마을이었으며 본관은 김해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진후대까지 충남 내포에서 살았는데 둘째 며느리로 들어온 조모 이씨에 의하여 전 집안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의 조모는 일찍부터 교회를 만들고 충청도 일대를 전도하며 천주교의 교세를 넓혀나간 이존창의 질녀였다. 그러나 순조 원년(180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 때 증조부가 잡혀가 옥고를 치른 후 계속 감시와 박해를 받다가 순조 5년(1805년)에 또다시 붙잡혀 결국 해미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에 그의 조부 택현은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가족들을 데리고 용인 땅으로 숨어들었던 것이다.
조부에게는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 그의 부친 제준은 둘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친은 '이냐시오'라는 본명으로 이미 영세를 받았던 독실한 신자로 김대건을 천주교의 교리에 따라 양육했다. 그의 아명은 재복으로 일찍이 그의 집안을 전도했던 할머니는 그를 어려서부터 신부로 키우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 영세를 받지 않았다. 연이은 교난으로 집안이 불안하기도 하였지만 신부에 의해 정식 성세성사를 받기 위해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 교회는 아직 신부의 인도 없이 신도들 스스로 교리 연구회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으므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교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다. 말하자면 조선의 천주교인들의 신앙적 힘만으로 교세를 이어온 자생적 형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교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이들을 올바르게 지도해 줄 신부가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에 따라 중국 천주교단에 조선에도 신부를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러한 조선 교인들의 요청으로 청국인 신부 주문모와 유빠치피꼬가 입국했고 곧이어 프랑스 신부들도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의 실정과 말에 어두운 외국인 신부들로는 효과적인 포교가 용이하지 않자 조선인 신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프랑스 신부 모방도 이 점을 절실하게 깨닫고 신학생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이 대상자로 선발된 사람이 과천 지방의 회장(신도 대표) 아들인 최양업과 홍주에사는 최한지의 아들 방제였다. 이렇게 두사람을 선발하여 모방이 기초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때가 헌종 원년(1835년)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그 이듬해에 추가로 선택한 사람이 김대건이다. 모방은 자신이 직접 김대건에게 영세를 주고 상경시켜서 먼저 선발되어 공부하던 두 사람과 합류시켰다. 김대건은 선배 두사람과 교리 공부를 하며 중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하여 역관 유진길로부터 중국말을 배웠다. 이렇게 6개월 동안 기초를 닦은 후에 헌종 2년(1836년) 12월에 본격적으로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때 그들의 나이 15살 안팎의 어린 소년들이었다.
험난한 신학 공부
사실 신부의 길로 나설 작정을 한다는 것은 요즘도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어려운 일인데 유교적 전통이 강고하던 당시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우선 독실한 신자이어야 함은 물론이고 성직자가 되기 위한 확고부동한 신념도 있어야만 했다. 또 빗발처럼 쏟아지는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버텨낼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했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그때 신부의 길을 선택한 어린 소년들의 심중은 어떠했을까? 오로지 진리에 대한 목마름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신념이 없었다면 조국을 떠나 낯선 타국 땅가지의 장도를 이겨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의 조선은 외국인의 입국을 막았던 것은 물론 내국인의 월경도 철저하게 금지하였다. 나라 밖으로 나간다는 자체가 발각되면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는 중죄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내외의 어려움을 딛고 천신만고 끝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마카오였다. 당시 마카오에는 중국인을 위한 신학교가 있었고, 조선 선교의 책임을 맡은 파리의 외방 전교회 지부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로 조선을 떠난 지 8개월여의 긴 여행이었다. 이때 외방 전교회 경리 책임자였던 르그레스와 신부는 그토록 먼길을 걸어온 조선의 어린 세 소년을 보고 감동하여 청국인 신학교나 동남아의 다른 지역 신학교로 보내지 않고 마카오에서 전교회지부 책임 아래 직접 교육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의 세 소년은 이역 만리 마카오 땅에서 서로 의지하며 신학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정세도 극도로 혼미하여 민란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마카오에 도착한 지 두 달도 안되어 김대건 일행은 난을 피해 마닐라에 가 있기도 했다. 이렇듯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개획된 교육 일정에 따라 빠짐없이 공부하던 중에 최방제가 병을 얻어 죽고 말았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1년만의 일이었다. 대건과 양업은 의지하던 벗을 잃고 그를 이역 땅에 묻으면서도 슬픔을 삼키며 공부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조국에서 그들이 신부가 되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수많은 교인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을 떠난 지 4년째 되는 1839년 봄에 또다시 민란이 발생하여 마닐라로 피난했다가 그 해 11월에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였다. 한편 그때 조선 국내 정세는 천주교도들에게 더욱 고통과 박해를 가져다주고 있었다. 헌종 4년(1838년)에 조선 선교의 책임을 전담한 프랑스 신부 앙베르가 입국하여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외국인으로 한계에 부닥치자 전도의 효율성을 위해 김대건 등이 공부를 마치기 전에 조선 내에서도 신부를 양성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정하상 등 4명을 뽑아서 교육을 시켰지만 그 이듬해에 발생한 기해 박해로 이 모든 것이 무산되고 말았다. 이 기해년 박해로 프랑스 신부 앙베르, 모방, 샤스탕도 잡혀 처형되었고,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소위 척사윤음이 전국에 반포되고 5가작통의 압제가 철통같이 가해졌다. 이때 대건의 아버지 제준도 사위 곽가의 고발로 잡혀서 죽고, 어머니는 겨우 변을 피해 도망을 했다. 양업의 부모도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마카오에 있는 대건과 양업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학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귀국을 위한 진통
동양으로의 진출에서 영국보다 늦은 프랑스는 1842년에 세실 제독이 지휘하는 군함을 마카오에 파견하였다. 늦으나마 중국에 진출할 통로를 개척하고 극동의 다른 나라들도 개척하기 위해서였다. 마카오에서 정세를 살피던 세실은 중국과 이어져 있는 조선에 진출하기로 결정하고 지리를 알고 통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구하였다. 이때 신부 수업을 모두 마친 대건과 양업은 귀국할 채비를 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 배에 편승하기로 하고 그들의 통역을 맡았다. 대건은 지휘선 에리곤 호에 승선하여 세실의 통역이 되고, 양업은 보조함 파보리트 호에 승선하여 함장 바즈의 통역을 맡았다. 드디어 프랑스 함대는 1842년 2월에 마카오를 출발하여 마닐라에 들렀다가 대만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그 해에 아편전쟁이 끝나고 난경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본 세실은 중국에서 영국에게 선수를 모두 빼앗기자 작은 나라 조선으로의 진출을 포기해 버렸다. 결국 프랑스 인들을 따라 입국하려던 대건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다른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배에서 하선한 대건은 양업과 함께 프랑스 신부 한 명을 대동하고 육로를 통해 조선으로 향했다. 이리하여 그들이 요동반도 서남단에 도착한 것은 그 해 10월 말이었다. 그곳에서 입국 기회를 엿보던 중에 중국 상인을 통하여 비로소 기해년 박해 소식을 듣게 되었다. 피맺힌 소식을 접한 그들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귀국을 재촉하기 위해 의주로 통하는 변문 땅에 당도하였다. 변문에서 의주까지 140리 길을 달리듯이 걸어서 국경을 경비하는 군졸들의 눈을 속이고 압록강을 건넜으나곧 발각되어 다시 중국으로 도망쳐 나와야만 했다. 대건일행은 그 길로 몽고의 빠자스까지 들어갔다. 그곳에는 조선 선교 책임자로 다시 임명된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자스에서 한동안 머물던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에 따라 헌종 10년(1844년)초에 두만강변의 경원을 통해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빠자스에서 경원까지 2000리 길의 만주 벌판을 걸어서 도착한 것은 그해 구정 무렵이었다. 경원에서 2년마다 장이 서는 것을 기회로 삼아 조선으로 잠입하기로 하였으나 조선에서 온 안내자가 경원으로부터 입국하는 것은 의주로부터 가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만류하여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시 빠자스로 돌아갔다.
결국 프랑스 신부까지 대동하고 여러 사람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자 페레올 주교는 대건 혼자만이라도 입국할 것을 명령하여 헌종 11년(1845년) 정월에 드디어 대건은 의주를 거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실로 귀국을 시도한 지 3년만의 일로 대건 자신도 감개가 남달랐고 그를 맞은 신도들도 기쁨이 컸다. 그러나 그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거처와 소식을 몇몇 교회 간부 외에는 일체 알리지 않고 비밀에 붙였다. 그는 조선에 입국해서 신학생을 뽑아 교육을 시키면서 순교자에 대한 사료 수집에 나섰다. 1785년에 조선에서 처음 순교자가 나온 이래 아무도 손대지 못한 사업이었다. 이때 그는 추사 김정희가 입교 준비를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각지의 순교자의 수도 파악하였다. 이러한 와중에 갑작스러운 병을 얻어 한동안 극심한 병고에 시달리다가 겨우 일어나기도 했었다. 병석에서 일어나자 그는 페레올 주교를 조선으로 데려오기 위해 배를 구하러 다녔다. 외국인 신부를 육지로 입국시키기는 당시 조선 사정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최초의 신부가 되다.
드디어 길이 8미터, 넓이 3미터짜리 소형 배를 구해서 중국으로 향한 것은 그가 입국한 지 4개월이 지난 1845년 4월 말이었다. 서해의 험한 파도를 헤치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비로소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그 동안 신학 공부는 마쳤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고 경력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때까지 신부가 되지 못했는데 조선 선교의 막중한 임무 때문에 재입국하기 정에 신부로 승품되었던 것이다. 그는 금가항 신학교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어 만당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는 신부로 서품되자마자 그 해 8월에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데리고 떠나왔던 뱃길을 따라 다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목적지를 연평도로 정하고 출발했지만 도착한 것은 충남 강경 근처의 황산포였다. 해풍이 그들을 목적지보다 먼 곳으로 데리고 간 것이었다. 우선 강경의 신자들 집에 두 사람의 프랑스 신부를 은신시켜서 말을 배우게 하고, 그는 신부들이 거처할 집을 구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상경하여 집을 구한 후에는 신자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조직적인 연락망을 작성하여 체계적인 포교를 위한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그 동안 말이 잘 통하지 않던 외국인 신부들만 모셨던 신도들도 조선인 신부가 지도하고, 또 제대로 진행되지 않던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나가게 되자 모두 좋아하였다. 이렇게 상경하여 프랑스 신부들이 활동할 수 있는 터를 닦아놓은 그는 그 해 말에 페레올 주교를 한성으로 데리고 와서 본격적인 포교 활동에 나섰다. 이때쯤 프랑스 신부들도 어느 정도 말을 익혀서 간단한 의사 소통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상경한 페레올 주교는 자신이 한성교회를 맡기로 하고는 그에게 지방 선교를 명하였다. 그때 김대건은 어렸을 때 그가 살던 '골배 마실'에서 가까운 '은이' 마을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제야 유리 걸식하고 다닌다는 어머니를 수소문하여 모셨다. 그 동안 귀국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어머니를 찾아볼 여유가 없었던 그는 '은이' 마을에 머물던 5개월 동안 각지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포교 활동을 하면서 수소문을 하던 그는 겨우 어머니를 찾아내어 모자 상봉의 기쁨을 얻었지만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페레올 신부의 명에 의하여 또 다른 신부들과 최양업의 입국을 안내하기 위하여 다시 바다를 통해 출국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줄은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다.
순교자의 길
헌종 12년(1846년) 4월에 상경하여 중국으로 떠날 기회를 엿보던 그는 연평도로 떠나는 어물상선에 유람객으로 가장하고 편승하였다. 이번에는 직접 배를 구하여 여행을 하는 모험을 하지 않고 조기잡이 철에 조선 근해까지 출항하는 중국 배를 이용하기로 하고 연평도 부근에서부터 육지까지 항로를 확인하는 지도를 작성할 작정이었다. 그 해 5월 중순에 마포를 떠난 배는 연평도를 지나 5월말에 등산진에 닿았다. 여기서 중국 배를 만나 사례를 하고 페레올 주교의 서신과 자기가 그린 지도를 상해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부들에게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렇게 목적을 달성하고 그는 배가 돌아갈 때문을 기다리고 있던 차에 수상한 행색을 의심한 관리들의 불심 검문을 받고 갑자기 체포되고 말았다. 그의 수중에 있던 소지품을 통해 천주교 신자임이 발각되었고, 선원들의 밀고로 중국 배에 전달한 편지와 지도도 압수되었다. 그는 해주 감영에 이송되어 심한 문초를 받았다. 사태가 파국에 이르렀음을 안 그는 죽음을 각오하였지만 해주 감사는 그를 중국인으로 오해하고 자신이 함부로 처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한성으로 압송하였다. 김대건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을 때 자신은 조선 사람이며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신부임을 똑똑히 밝혔다. 취조 받는 과정에서 세계지도를 그려내고 각국의 말에 능통한 것은 물론 해박하게 세계대세를 논하면서 조선의 낙후성을 역설하자 문초관들도 아연하여 그를 쉬이 보지 못하였다. 또 천주교는 세계 강국에서 자유롭게 믿을 수 있는데 유독 조선만이 박해하고 신자들을 죽이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라고 당당하게 통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에 대한 문초가 한창 진행중일 때 프랑스의 세실 제독이 군함 3척을 이끌고 나타나서 천주교 탄압을 항의하면서 프랑스 신부를 죽인 이유를 확인하겠다고 시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느닷없는 사태에 직면한 조선 조정은 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김대건을 내세워 프랑스 신부를 처형한 이유를 해명하고 화의를 제의하기로 하였다. 김대건으로서는 사태가 급반전하여 살아날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세실 제독의 프랑스 함대는 항의 국서만 전달한 채 김대건이 교섭 대표로 나서기도 전에 떠나 버렸다. 김대건으로서는 만사가 휴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프랑스 함대가 별다른 적대 행위 없이 떠난 것은 8월이었는데 조선 조정은 9월에 접어들자마자 그를 처형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이제 정말 마지막임을 직밤하고 자기를 가르쳐 준 신부들에게 하직 편지를 쓰고 '전국 신자들에게 보내는 글'을 남겼다. 또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하는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신앙을 위해 자신의 피로 혈제를 드리게 된 그였지만 육친에 대한 걱정은 어떨 수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사형선고를 받은 그 다음날인 9월 16일에 처형되고 말았다.
천주교에서 세상은 잠시 쉬었다 가는 여관 같은 곳이고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한 것처럼 그는 25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는 1857년에 교황청에 의하여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1925년에는 시복식이 거행되었으며 조선의 전 성직단 대주보로 정하여졌다. 그 후 그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라서 죽어서도 조선 천주교의 영원한 성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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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9. 사랑
<사랑을 그냥 묻어 두거나 계산하지 말라. 아까워하지 말라. 그러면 모두 잃을것이니. 사랑을 꽃피워 함께 나누라. 사랑은 나눌수록 커지는 것>
한 왕이 세 아들을 두었는데, 셋 중에서 후계자를 선택해야만 되었다. 한데 참곤란한 것이 세 아들 다 아주 영리하고 용맹스러워서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세 쌍동이였기 때문에 서로 닮았고 나이도 똑같았으니 뽀족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은 위대한 현자를 찾아가 물었다. 성자는 한 가지 묘안을 내놓았다. 돌아온 왕은 세 아들을 불렀다. 왕은 세 아들에게 각각 꽃씨를 한 줌씩 주며 말하기를, 자신은 이제 곧 순례의 길을 떠날 것이라 하였다.
<몇 해 걸리리라. 한 두 해나 어쩌면 몇 해 더. 이건 너희들을 시험하는 것이니까 잘 알아 둬라. 내가 돌아오거든 이 꽃씨들을 내게 도로 내놓아야 한다. 가장 잘 보관했다가 내놓는 사람이 후계자가 될 것이다>
왕은 길을 떠났다. 첫 번째 아들이 생각하기를,
<이 꽃씨들을 어떻게 할까?>
그는 단단한 금고 속에다 꽃씨를 숨겨 놓았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그대로 되돌려 주기 위해서. 두 번째 아들이 생각하기를,
<첫째처럼 금고 속에 숨겨 놓으면 꽃씨들이 죽을 테지. 죽은 꽃씨는 꽃씨가 아니야>
그래서 그는 장터로 나가 꽃씨를 팔아 돈을 마련했다.
<아버지께서 돌아오시면 다시 장터로 가서 이 돈으로 새 꽃씨를 사다 드려야지. 더 좋은 것으로>
세 번째 아들은 뜰로 나가 빈틈 없이 꽃씨를 뿌려 놓았다. 삼 년 후 아버지가 돌아왔다. 첫 번째 아들이 금고에서 꽃씨를 꺼내왔다. 꽃씨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게 뭐냐! 내가 너에게 준 꽃씨가 이거더냐? 그 꽃씨들은 꽃을 피워 좋은 향기를 뿜을 수가 있었다. 근데 이것들은 죽어서 고약한 냄새만 풍기지 않으냐. 이건 내 꽃씨가 아니다!>
아들은 분명 아버지께서 주신 그 꽃씨라고 주장하였다. 왕이 외쳤다.
<넌 유물론자구나!>
두 번째 아들은 재빨리 장터로 달려가 새 꽃씨들을 사가지고 와서 아버지 앞에서 내밀었다. 왕이 말하기를,
<근데 이건 다르지 않느냐. 네 생각이 첫째보단 좀 낫다만 아직 얼었다. 넌 심리학적이구나!>
왕은 세 번째 아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두려움과 함께.
<그래 넌 어찌했느냐!>
세 번째 아들은 아버지를 뜰로 모시고 나갔다. 뜰에는 온통 수많은 꽃들로 흐드러져 있었다. 아들이 입을 열기를,
<아버지께서 주신 꽃씨들이 바로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꽃들이 다 한껏 피어나면 씨앗을 모아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저 간직하고 축재하는 자는 삶을 이해할 수 없다. 타산적인 마음은 진짜 삶을 놓친다. 창조하는 마음만이 삶을 이해할 수 있다. 꽃은 아름답다. 꽃의 아름다움은 간직되어지는 게 아니다. 그건 신을 표현한다. 신은 간직되어질 수 없다. 그건 사랑을 나타낸다. 사랑은 간직되어지는 게 아니다. 사랑은 꽃과 같다. 사랑이 꽃피면 너도 나도 그 향기를 맡는다. 함께 나눈다. 그건 주는 것. 그대가 줄수록 사랑은 더 커진다. 더욱 커져서 사랑의 무한한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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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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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오물 먹는 위와 곡식 먹는 쥐는 다르다<이사>
- "아아, 사람의 현명하고 못난 것을 비유하면 저 창고 속의 쥐와 뒷간 속의 쥐가 처한 것과 같구나. 이 세상 모든 일이 스스로 처한 곳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이사는 초나라 상채 출신으로, 젊어서 군의 하급 관리로 있었다. 어느 날 이사는 아전 숙소의 뒷간에 갔다가 똥을 뒤지던 쥐들이 인기척에 놀라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뒷간의 쥐들은 몰래 다니며 더러운 오물만 주워 먹으며, 사람이나 개나 나타나면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것이었다. 더구나 고양이 앞에서는 꼼짝달싹을 하지 못한 채 바들바들 떨었다. 또 어느 날인가 이사는 창고에 들어갔다가 곡식을 먹는 쥐들을 보았다. 그런데 창고 속의 쥐들은 가득 쌓여 있는 곡식을 먹으며 짐짓 여유까지 부렸다. 물론 창고 속의 쥐들도 인기척에 놀라 도망치기는 하였지만, 잠시 후에 눈치를 슬슬 보며 구멍 속에서 기어나오는 것이었다.
"아아, 사람의 현명하고 못난 것을 비유하면 저 창고 속의 쥐와 뒷간 속의 쥐가 처한 것과 같구나, 이 세상 모든 일이 스스로 처한 곳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사는 조그만 군에서 하급 관리 노릇이나 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쥐에 비유하며 한탄하였다.
그 뒤 이사는 큰 마음을 먹고 순경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순경'은 바로 성악설을 주장한 유학자 순자를 일컫는다. 이사는 순자에게서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학을 배웠다. 학문을 다 배우고 난 그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당시 초나라 왕은 자신이 섬기기에 부족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육국은 약소국이어서 섬겨서 공을 세울만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당시의 강대국인 진나라로 가기로 하고, 스승 순자를 찾아가 하직인사를 하였다.
"때를 얻거든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열국들이 바야흐로 서로 다투는 때이기 때문에 제가 배운 학문을 써먹기 좋은 기회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가?"
순자가 물었다.
"지금 진나라 왕은 천하를 병합하여 제를 일컬으면서 열국들을 수하에 거느리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관직이 없는 선비가 출세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러한 때에 비천한 사람이 무엇인가 도모를 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금수가 고깃덩어리를 보고 탐을 내면서도 사람이 무서워 참고 있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곤궁한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습니다."
"그대는 그렇게도 곤궁한가?"
"저는 오랫동안 비천하게 살아왔습니다. 또한 곤궁한 처지에 있으면서 세상을 비난하고 영리를 미워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선비들이 또한 저와 같은데, 스스로 고상한 체하여 욕심이 없는 듯 행동하지만, 그것은 본연의 심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장차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그를 장차 천하를 호령하는 군주로 만들겠습니다."
순자는 제자를 붙잡을 수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사가 진나라로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내가 그대를 가르칠 때 욕심을 없애는 법을 깨닫게 하지 못하였구나. 자연의 이치는 차면 곧 기울고, 올라가면 곧 내려가고, 강성하면 곧 쇠약해지는 법이다. 그 차고, 올라가고, 강성해질 때를 늘 조심하도록 하라."
마침 그 무렵 진나라는 장양왕이 죽고, 그의 아들 정이 즉위하였다. 이사는 우선 진나라 정승인 문신후 여불위를 찾아가 식객으로 머물렀다. 여불위는 이사를 눈여겨보다가 현명한 인물임을 간파하고, 그를 낭관에 임명하였다. 그리하여 이사는 진나라 왕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큰 일을 성취하는 사람은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잔인하게 행동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옛날 진나라 목공은 패자가 되었으면서도 끝끝내 동쪽으로 6국을 쳐서 병합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제후들의 숫자가 많고 주왕실의 덕이 아직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다릅니다."
이사는 문득 진나라 왕을 쳐다보았다. 진의를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무엇이 다르다는 거요?"
"진나라 효공 이후 주왕실은 쇠퇴를 거듭하였고, 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나라를 병합하여 관동의 6국만 남았습니다 .반면 진나라는 승세를 타고 앉아 제후들을 다스려 온 것이 이미 6세나 되었습니다."
진나라 왕은 이사의 말을 듣고 따져보았다. 과연 효공 때부터 시작하여 혜문왕, 무왕, 소왕, 효문왕, 장양왕까지 6대에 걸쳐 진나라는 강국으로 제후국들에게 위엄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대는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거요?"
"지금 제후들이 진나라에 복종하는 것을 보면, 마치 제후국은 진나라의 한 군현과 같습니다. 진나라의 강성함과 대왕의 현명하심은 밥하는 하녀가 부엌의 솥뚜껑 위에 앉은 먼지를 쓸어내는 것보다 쉽게 제후국들을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만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 게을리하여 급히 성취하지 않는다면 제후들이 다시 강성해지고, 또한 서로가 합조를 하게 되면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사의 말에 진나라 왕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이사를 당장 비서실장격인 장사로 등용하였다.
이사는 진나라가 천하통일을 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제후의 명사들 중에서 재물로 매수할 수 있는 자에게는 많은 재물을 주도록 하였고, 말을 잘 듣지 않는 자는 예리한 칼로 찔러 죽여 제후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그런 다음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약화된 제후국을 쳐들어가 인정을 두지않고 짓밟았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사의 이러한 공략전술로 진나라는 제후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이 공적으로 이사는 객경의 벼슬에 올랐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으로 최고의 벼슬인 재상이 된 것이었다.
안목 : 큰 바다에 나가야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다. 높은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땅을 깊게 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안목이다. 사업을 시작할 때 업종과 상권을 선택하는 것이나, 학과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 모두가 안목을 필요로 한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는다<이사>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가장 높이 솟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하나 바다는 아무리 작은 시냇물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많은 수량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제후국들은 점점 강해지는 진나라가 두렵게 되었다. 제후국 중의 하나인 한나라는 진나라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정국이라는 사람을 몰래 파견하였다. 정국은 진나라 왕을 설득하여 관개용수를 만들게 함으로써 국고를 바닥나게 하였으며, 부역으로 백성들의 불평불만이 늘어나도록 하였다. 그 음모가 발각되자 진나라 종실과 대신들이 왕에게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제후의 나라에서 온 사람들 중에서 대왕을 섬기는 자들은 대체로 자기 나라를 이롭게 하는 계략만 내놓고 있습니다. 청컨대 모든 객인을 쫓아버리십시오."
이사도 초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대신들이 추방하라고 주청한 객인의 명단에 들어 있었다. 위기를 느낀 이사는 곧 진나라 왕에게 다음과 같은 상서를 올렸다.
'지금 종실과 대신들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추방하라고 주청한다 들었는데, 이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 목공은 인재 유여를 서쪽의 융 땅에서, 백리해를 동쪽의 완 땅에서 구했습니다. 또한 건숙을 송나라에서 맞아들였고, 비표와 공손지를 진나라에서 불러왔습니다. 목공은 진나라 출신이 아닌 이 다섯 사람을 등용하여 12국을 합병하고 마침내 서융에서 패자가 되었습니다. 효공은 위나라 출신 상앙의 법을 채용하여 풍속을 고치고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국가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혜왕은 위나라의 장의를 등요하여 그의 계략으로 삼천의 땅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파, 촉을 병합하였습니다. 또한 남으로 한중을 탈취하여 구이를 포섭함으로써 언, 영을 제어하고, 동쪽으로 성고의 험준한 땅을 발판으로 비옥한 토지를 탈취하여, 결국 6국의 합종맹약을 깨뜨려 이들로 하여금 진나라를 섬기게 하였습니다. 소왕은 위나라의 범수를 얻어 종실과 대신들의 권력확대를 막고, 제후들의 영토를 잠식함으로써 마침내 제업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네 군주는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을 등용시켜 나라를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여 진나라를 배반한다는 것은 잘못된 의견입니다.'
이사의 상서를 읽어내려 가던 진나라 왕은 머리를 크게 끄덕였다.
"옳은 소리야. 과인이 다른 나라 사람을 중히 쓰는 것에 대해 괜히 종실이나 대신들이 시기하고 있구먼."
진나라 왕은 계속 이사의 상서를 읽어 내려갔다.
'어찌하여 구슬이나 음악은 다른나라 것을 가져다 즐기면서 사람만은 별도로 취급하려 드는 것입니까?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지 않고 무조건 추방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사람보다 구슬이나 음악을 더 중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좁은 생각으로 어찌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이사는 과인을 아주 생각이 좁은 인간으로 몰아붙이는구먼."
이렇게 말했지만 진나라 왕은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사의 상서는 계속되었다.
'토지가 넓으면 수확량이 많습니다. 나라가 크면 사람들이 많습니다. 군대가 강하면 병사가 용감합니다. 큰 뜻을 품으려면 도량이 넓어야 합니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가장 높이 솟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황하나 바다는 아무리 작은 시냇물이라도 버리지 않고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많은 수량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왕자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어떠한 신분의 사람이라도 거절하지 않음으로써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백번 옳은 말이다."
진나라 왕은 상서를 읽어내려가다 말고 무릎을 탁 쳤다.
'이번 다른 나라 사람을 추방하려는 것은 천하의 인재가 진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런 조처야말로 적에게 병사를 빌려주고 도적에게 식량을 대주는 것입니다.'
이사의 이와 같은 상서를 읽고 진나라 왕은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한 추방령을 곧 철회하였다. 따라서 이사도 종전의 관직으로 복귀되었다.
활용 : 필요하면 활용하라. 유익하면 귀담아 들어라. 경쟁사건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이건 자신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감정에 얽매이지 말고 활용하라. 지연, 학연, 혈연에 우선하지 말고, 목표달성에 진정 누가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성공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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