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서예와 금석학의 거목 김정희(1786-1856, 71살, 노사).
김정희는 자신이 독창적으로 개척한 서법이 추사체로 일세를 충미한 서예가이다. 그는 금석학에도 일가를 이루어 국사학의 발전과 연구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실학 사상 형성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였다. 또 경학에도 통달하였고 당시에 접할 수 있는 모든 학문에서 상당한 수준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박학다식한 인물이다. 일찍이 청나라의 대학자로부터 '해동 제일의통유'라는 격찬을 받을 정도로 학문에도 출중하였으나 서예에서의 독보적인 경지만큼 경학에서는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결과를 남기지 못했다. 다방면의 관심이 천부적 자질을 분산시켰는지 모르지만 젊은 시절의 재기에 비하면 서예 이외에 다른 분야에서 별다른 업적을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느 분야이든 최고의 단계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은 평범한 사람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그의 성취를 낮추어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자기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요구되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한 각성을 갖게 한다. 다만 서예가 추사로만 알고 지나쳐 버리기에는 그의 재능과 젊어서 새로운 학문을 접할 수 있었던 그의 환경이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그가 젊은 시절의 선각적인 자세를 계속 지키고 발전시켜 나갔더라면 그 자신은 물론 조선의 모습도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존재는 실학 사상과 개화 사상을 연결시켜 주는 확실한 가교가 될 수 있었는데도,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역할은 그리 인정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그는 수많은 문도를 통하여 역사 인식의 단편적 편린이나마 후대에 전하여 주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시대로의 전이가 가능한 씨앗을 싹트게 해주었다. 그래서 젊은 시절의 선각적 자세가 나이가 들면서 현실에 안주하는 안일한 모습으로 바뀌어 갔지만 그의 글씨가 세상을 감동시킨 것처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고 창조했다는 점에서 그의 존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죽음의 그림자에 젖은 명문가의 자제
김정희는 조선 22대 왕인 정조 10년(1786년)에 유당 김노경과 유씨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곳은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였고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원추이고, 호는 완당이었다가 후에 추사로 바꾸었다. 그의 집안은 고조부 흥경이 영의정까지 지냈고 증조부 한신은 영조의 부마로 충남 예산군에 별사전을 받았었는데 여기에 화엄사가 있어서 그의 집안과 불교는 이때부터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또 조부 이주도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그의 생부 노경은 판서를 역임했으며 백부이자 양부인 노영은 대사헌까지 이르렀던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6살 때 입춘첩을 썼는데 이를 본 박제가가 스스로 그의 스승이 될 것을 자청하였으며, 7살 때에 쓴 글씨를 보고는 당시 좌의정 채제공이 장차 명필이 될 것이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뛰어난 서예가가 될 자질이 보였던 것이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관직에 있던 조부와 부친을 따라 고향 예산에서 한성의 장동으로 이사와 살면서 어려서부터 경학과 서도를 배웠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지만 어려서 집안에 큰 화가 미치는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여 마음에 큰 고통을 받았다. 그가 9살 때 집안의 큰 어른인 백부 노영이 개성 유수로 있다가 귀양을 갔고, 그 다음달에 곡성 부사로 있던 둘째 백부가 세상을 떠났다. 또 11살 때에는 그를 끔찍이도 아끼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에는 대사헌까지 역임한 백부와 할아버지까지 세상을 하직하여 온 집안에 줄초상이 나버렸다.
백부가 후사없이 죽자 그는 집안의 뜻을 따라 큰집에 양자로 들어갔고 16살 되던 해에 동갑인 한산이씨와 결혼을 하였다. 그가 결혼하기 전해에 정조가 죽고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등극하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정순왕후는 경주 김씨로 그의 증대 고모뻘이었다. 이런 연고로 그의 집안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지만, 그때 그의 생모가 3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그는 비탄과 허무에 빠져 한 동안 고향 예산에 내려가 불교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가 20살 되던 해에 부인 이씨가 죽고 그 무렵 스승 박제가도 함경도에 귀양갔다가 풀려난지 얼마 안 되어 죽었으며, 곧이어 양모까지 세상을 등졌다. 그는 연이어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살았던 셈이다. 이로 인해 그가 불교에 더욱 의지하고 몰두하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양모의 3년상을 마친 후에 그는 한 살 아래의 예산 이씨와 재혼하고, 그 이듬해에 24살의 나이로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그해에 그의 생부 노경이 동지사 겸 사은사의 부사로 연행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자제군관으로 사신 일행을 따라갔다. 이 청국 행은 그의 생애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때 깨우친 의식과 견문이 그의 일생을 좌우하였다.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
순조 9년(1809년) 말에 북경에 도착한 그는 청나라의 젊은 학자 조강을 제일 처음 만났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옹방강과 완원이었다. 옹방강은 학계의 원로로 경학과 문장에 능하고 특히 금석학과 서화, 그리고 시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 청나라의 학풍은 하나라 시대의 학문은 숭상하고 송,명대의 이학을 배척하는 충토가 주류였지만 옹방강은 한,송의 절충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두사람은 그가 북경에 도착한 이듬해에 만났는데, 그때 옹방강은 78살의 노인이었고 그는 겨우 25살이었다. 옹방강은 한,송 절충의 학문과 금석학 및 서화로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완원은 내각의 대학자를 거치고 태자의 태부가 되었던 인물로 경학의 대사였다. 이때 49살의 장년이었던 완원은 청년 추사의 비범한 재주를 알아보고 극진히 환대하였다. 한다. 완원은 추사의 '실사구시설'을 비롯한 그의 한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추사는 옹방강과 완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옹방강의 호인 담계와 보소재를 본따서 자신의 호를 보담재라고 짓기도 하고, 완원의 완자를 따서 완당이라고도 하였으며, 옹방강의 호 담계와 완원의 호인 연경재를 합하여 담연재라고 호를 지어 갖기도 했다. 추사는 청나라에서 6개월 정도 머무르면서 이정원, 오숭량, 주학년 등 그 밖에도 많은 학자들을 만나 교분을 쌓고 돌아왔다.
옹방강과 완원은 조선의 젊은 학자인 추사에게 매료되어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보였으며, 서신을 통하여 가르침을 주기도 하고 많은 서책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완원은 자기가 편찬한 '황청경해'라는 경학에 관한 서적을 조선의 연행 사절을 통하여 추사에게 보내주었는데 이 책은 183종, 1400권, 500책의 방대한 분량이었으니 추사에 대한 완원의 배려가 얼마나 깊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옹방강의 아들 옹수곤은 추사와 동갑이었는데, 그 아버지를 닮아서 금석학에 관심이 많았고 조선의 금석탑본 수집에 열중하여서 추사는 많은 탑본을 그에게 보내주기도 하였다. 추사는 이렇게 옹방강 부자와 친교를 맺었으며, 중년기 추사의 서체가 옹방강의 그것과 빼닮을 정도로 옹방강을 깊게 추앙했다. 추사가 크게 영향을 받은 청나라 학자는 옹방강, 완원 외에 대진과 능정감이 있다. 대진은 청나라의 정통파 학자이자 고증학의 선구자로서 "경전에 나타난 사실에서 옳은 것을 찾는 실사의 학문의 중심으로 한다."고 하여 학문을 함에 있어서 편향되지 않는 자세를 가졌다. 옹방강은 대진의 학설을 '문리에 어긋난다'고 반박하였지만 추사는 대진의 생각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문집에 대진의 이욕설을 그대로 옮겨 놓은 '사폐변'을 싣기도 하였다. 능정감은 완원과 함께 학문을 수학한 인물로 예악에 통달하여 '예경석례'라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많은 청나라 학자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그의 학문적 경지도 깊어갔는데 특히 그의 관심이 높았던 분야는 경전의 주석과 예와 역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청나라의 대학자로부터 '해동 제일가는 통유'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워낙 광범하고 다양한 학문을 받아들여서 유학의 정통 학문인 경학에 대하여는 독창적이고도 계통적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그 후 순조 22년(1822년)에 그의 생부 김노경이 다시 연행할 때 그의 동생 명희도 이를 수행하여 그의 전 가족이 청나라 학자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때 동생을 통해 알게 된 청나라 학자 이장욱에게 보낸 편지가 추사의 문집에 실려 있는 '여이월 정서'이며 그와 탑본과 서적을 교환하며 친분을 쌓았던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을 편찬하기도 했다.
금석학과 실사구시 정신에의 몰두
북경에서 돌아온 추사는 10여 년 동안 과거에 응시하지 않으면서 금석학과 고증학에만 몰두하였다. 함흥 황초령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에 관하여 그 비문의 냉용을 고석해 낸 것도 그의 노력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순조 16년(1816년)에는 김경연, 조인영과 함께 북한산에 올라 무학이 세운 비석으로 잘못 알려진 진흥왕 정계비를 판독해 내기도 했다. 또 비석이 세워진 시기가 신라 진흥왕 29년(568년)에 북한산주를 폐지하고 남천주(이천)를 둔 이후인 것과 '진흥'이라는 이름이 왕이 죽은 뒤에 붙인 시호가 아니라 생전에 사용하던 칭호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리고 그는 평양성에 새겨진 '소형'이라는 글자도 고증하여 그것이 고구려의 관직 명칭임을 밝혀내어 국사학 연구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금석을 자료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추사의 자세는 오직 감별과 감상을 주로 하던 옹방강의 태도와는 분명히 다른 일면이며 이 점에 있어서 추사가 더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추사의 금석에 대한 연구는 '금석과안록'에 잘 투영되어 있는데, 이는 '실사구시'를 지향하는 그의 학문적 경향이 그 분야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사구시'라는 말은 '실학'으로 대표되는 영,정조 시대의 학풍을 대변하는 구호가 되다시피 하였는데, 그의 저서 '실사구시설'에서 인용된 용어이다. 이 '실사구시설'은 그가 북한산의 진흥왕 정계비를 발견하기 전에 씌어진 것으로 학문적 체계는 다소 엉성하였으며, '실사구시'의 본래의 뜻과는 다른 통속적 개념으로 사용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사실 '실사구시'는 "경전에 나타난 실제 사실에 근거하여 옳은 것을 찾는다"라는 뜻으로 고증학의 근본 정신이다. 고증학은 송,명의 이학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한,송 절충을 따르는 추사의 자세는 제대로 된 '실사구시'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실사구시'는 오로지 금석학 뿐이라고 할 수 있고, 만년에는 불교에 정진하여 실용주의 자세에서 벗어났으므로 그를 엄격한 의미를 실사구시 학파라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일찍이 청나라로부터 새로운 학문을 접했음에도 경세치민의 학문을 끝까지 추구하지도 않았고, 현실 정치에 적용시켜서 경륜을 펼쳐 보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년에는 주위에 위원의 '해국도지'를 읽기를 권하면서도 서양 세력의 배척을 강조했다. 학문으로 배우는 것과 실제의 행동이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결국 청년 추사를 통해서는 시대의 선각자라는 바람직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도 보수주의적 시대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직과 유배 생활
추사는 젊은 시절에 연행을 통해 배운 신학문에 몰두하며 보내다가 34살에 문과에 급제하고 그 이듬해에 한림 소시에 합격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재능과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의 관직은 세자 시강원의 설서,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제 등을 거쳐서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위기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순조 24년(1824년)에는 한림회 사건으로 삭직되었으며, 안동 김씨측과의 대립으로 순조 30년(1830년)에는 생부 노경이 고금도로 유배되고 그는 파직되는 좌절을 맛보기도 했다.
순조가 죽고 헌종이 등극하여 그는 41살에 대사성이 되었고, 그 2년 뒤에 생부 노경이 죽었다. 부친이 죽은 이듬해에 형조참판이 되었으나 안동 김씨가 풍양 조씨를 밀어내고 다시 권력을 잡자 그에게도 위기가 왔다. 안동김씨들이 반대파인 윤상도, 허성 등을 숙청시키면서 추사도 같은 통속으로 인정하여 제주도로 유배를 보내버린 것이다. 제주도에 귀양간지 만 4년째 되던 해에 그의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가 사망했다는 비보를 들었고, 유배지에서 병고로 극심한 고통을 받기도 했다. 제주도로 귀양간지 만 9년이 지난 헌종 14년(1848년)에야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철종 2년(1851년)에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에 연루되어 북청으로 또다시 유배되었다가 다음해에 방면되었다.
그는 전후 두 번에 걸쳐 십년 이상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문인들을 가르쳐서 많은 제자를 둘 수 있었다. 한때 '추사의 문하에는 삼천 명의 선비가 있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일대 학군을 이루기도 하였으며, 그의 문하로부터 조선 말기 개화 사상의 싹이 트기도 하였다. 그는 유배 생활 중에도 제자들을 통하여 서적을 전해 받아 학문과 서예에 정진하였으며, 그 시기에 그린 '세한도'는 그의 힘있는 기백과 품격이 잘 드러나서 신품으로까지 격찬을 받았다.
그는 70살 때 부친의 묘소가 있는 과천의 관악산 기슭에 '과지초당'이라는 거처를 짓고 살면서 광주 봉은사에 가서 불법의 구족계를 받고 불가에 완전히 귀의한 후에 71살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그가 일찍이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북경에 다녀올 때에도 많은 불교 경전과 불구를 가져와서 마국사에 400여 권의 불경과 불상을 기증하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도 '금강경석주'를 좌우명처럼 애송하였으며 자신의 문집에도 '천축고'를 비롯하여 많은 게구와 당시의 고승 백파와 초의에게 보낸 서신들을 담기도 하였다. 그런데 달레의 '한국교회사'는 그의 특이한 행적을 전해주고 있다. 그가 역관이자 천주교인이었던 유진길로부터 교리를 전도받아 입교하기로 하였다가 유배 조치되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기술되어 있는 내용이 그것이다. 그는 한때 정약용에게도 사사한 일이 있었고 다산의 유배지인 강진에까지 찾아가서 유묵을 남긴 행적이 전해지므로 아예 없는 사실은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서예의 대가로서의 일생
추사는 서예 부문에 있어서 현재까지도 독보적인 존재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의 글씨는 금석학을 통한 국사학에의 공로와 함께 그의 양대 업적으로 꼽히고 있다. 어려서 추사의 서체는 명나라의 명필 동기창의 서법을 따르고 있었는데 연행 후에 옹방강을 본받아서 농후하고 기골찬 형태로 바뀌었다. 그후 송의 소식과 미불의 서체로 옮아갔다가 다시 당나라의 이옹의 그것을 본받았다. 추사의 서체는 이러한 편력과 발전을 거듭한 후에 당나라 구양순의 서품을 받아들여서 서법의 대성을 보게 되었다. 실로 그의 서체는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서법의 일가를 이루어 낸 것으로 독창적이면서도 정통적인 일면이 함께 내재된 힘차고 굳센 추사체를 완성한 것이다.
그는 일찍이 글씨에도 족보가 있다고 말했다. 즉 전, 예, 해, 행, 초의 서체 변천 과정을 지칭하는 것으로, 전서나 예서를 모르면서 해서나 초서를 쓰는 것은 뿌리가 없는 것과 같다고 했다. 추사는 금석학을 연구하여 전서나 예서에 통달한 후에 그만의 독특한 서법을 창안해 낸 것이다. 그는 글씨란 청고, 고아한 뜻이 없으면 쓸 수 없다고 하였다. 글씨는 쓰는 사람의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없으면 손 끝에 청고,고아한 뜻이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고 늘 강조했다. 그는 서예뿐만 아니라 그림에도 출중하여 난과 대나무, 산수화, 불화 등에도 능하였으며 서론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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