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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그 한마디
연말이 되면 경기가 좋든 나쁘든, 또 호주머니 사정이 어떻건, 촘촘한 송년회 일정으로 바쁘면서도 들뜬다. 오랜만에 탁자에 둘러앉아 잔을 나누게 되면 잔을 부딪치며 ‘한마디’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공감이 가는 ‘딱 그 한마디’가 쉽지 않다. 오래전에는 거의 대부분이 무작정 ‘브라보’였는데, 언젠가 ‘위하여’가 대세를 이루다가 최근에는 그것도 좀 시시해진 모양이다.
건배사만이 아쉬운 것이 아니다. 누구에겐가 진정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그 마음을 짤막하게 전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그냥 축하한다고만 할까, 아니면 부럽다고 해야 할까, 우리의 말이 퍽 마땅찮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또 궂은일에 대해서 위로를 해야 할 때도 도대체 뭐라고 해야 인사도 되고, 격려가 될지 퍽 막막하다. 누구한테든지 공감되는 말을 찾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서로 공적인 관계인지 사적인 관계인지에 따라 무언가 빛다른 표현을 하고 싶어도 대개 어중간한 말 몇 마디에 나머지는 표정으로 대충 메우게 된다. 우리의 언어는 표준어를 결정할 때 어휘의 기준만 겨우 설정됐지, 적절한 사용법의 기준은 제대로 형성이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공적인 모임에 가서도 첫인사를 그저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정도로 대충 때우고 있다. 이 얼마나 껄렁한 언어문화인가? 이러한 ‘경우에 맞는 말’들은 대단한 지식인이 제안해서 표준화할 수도 없는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광범위한 시민사회 속에서 형성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유대’ 속에서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경기도 안 좋다고 하고, 당장 내년의 삶도 불안하지만 어려운 세상에 남들과 서로 공감 어린 말을 나눈다는 것도 중요한 삶의 에너지이다. 가까운 이들과 공감대를 두텁게 쌓아가는 진심이 깃든 ‘딱 그 한마디’를 찾아두는 소박한 지혜가 필요하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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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의 언어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내용으로는 일본 정부는 10억엔의 지원 기금을 제공하고, 한국 정부는 이를 ‘최종 해결’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런데 아직 주장이 엇갈리고는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를 상징하는 소녀상을 이전하는 ‘조건’이 붙었다는 설왕설래가 있다. 무언가 이상하다. 피해자들에 대한 인격적 배려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무슨 사건 브로커들끼리의 합의서 같다.
언어는 늘 일정한 맥락 속에서 움직인다. 그리고 그에 걸맞은 말투와 표정, 그리고 적절한 수사법이 뒤따라야 한다. 그런데 도덕적인 책임을 표한다고 하면서, 10억엔으로 해결되었다는 둥,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이라는 둥 하는 것은 애당초 도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기보다는 돈 몇 푼으로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고 모욕을 하는 행위에 가깝다.
식민지 지배와 세계대전은 참혹한 상처를 역사에 남겼다. 이런 가운데 발생한 인권에 대한 혹은 인도적 문제는 ‘인간의 가치’ 문제를 깊이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프랑스대혁명이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선언하고, 러시아혁명이 노동자들에게 자각을 가능하게 한 것처럼, 한국과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가치를 한 단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철학적, 도덕적 계기를 만들어 냈어야 한다.
단순히 약하디약한 여성들의 개인적인 불행이나 고단한 숙명이 아니라 인간의 잔혹한 죄의 대가를 대신 짊어진 대속(代贖)으로 받아들인다면 그 앞에서 돈 액수 혹은 재론을 금지한다거나 또 소녀상 이전 등과 같은 표현은 감히 꺼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대표한다는 그들이 이러한 역사적 대의를 담을 만한 그릇과 깜냥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다. 이 합의는 치욕의 언어로 가득 찼다. 인간의 가치를 듬뿍 높이는 최종적이고도 불가역적인 감동의 시기는 아직 멀었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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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두 손 아닌 두 발이 그린 그림 - 오순이
걸음을 배우고 앞뒤 없이 돌아 다닐 세 살 무렵 나는 집 앞 철길을 겁 없이 혼자 건너다 사고를 당해 그만 두 팔을 잃었다. 사고 후 곧장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사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았다.
"가망이 없습니다. 다른 병원을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의식을 잃은 나를 업고 뛰어다니다가 겨우 도립병원에 나를 눕힐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나는 기적적으로 소생의 울음을 터뜨렸다. 병원 생활 후에는 장장 3년이란 시간을 어머니 등의 땀 냄새를 맡으며 업혀 다녀야 했다. 내 치료비 때문에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다른 곳으로 옮겨 다녀야 할 정도였다. 병원을 다닌 지 2년이 되면서, 그러니까 다섯 살이 되면서 나는 손이 하던 모든 행동을 발가락으로 대신하는 훈련을 시작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학교 생활을 위해 발가락으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양팔이 없는 상태의 다섯 살짜리 아이의 걸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뒤뚱거리다가는 넘어지고 다시 넘어지고 해서 얼굴엔 피멍이 사라질 나이 없었다. 발에도 벌건 물집이 잡혀 식구들은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아직 자신의 모습이 어떤지도 모르는 꼬마에게 눈물을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던 해였다. 같이 놀던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없어 텅 빈 골목길을 바라보면서, 집안 사정으로 학교에 못 간 나는 조금씩 우울해지기 시작했다. 멀지 않은 학교 운동장에서 들리는 호각 소리, 아이들의 구령 소리, 마냥 뛰어가고 싶기만 하여 답답하던 그때의 심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대신 나는 집에서 언니들이 가르쳐 주는 수업으로 만족해야 했다. 때때로 교실 근처에 다가가 조용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친구가 어느새 알아보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고, 나도 친구 옆에 앉아 공부해 보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런 내 모습을 볼 수 없었던지, 어느 날은 큰언니가 학교로 찾아가 다음해에는 입학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을 갖고 왔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남보다 1년 늦게 나는 처음으로 학교 생활이란 걸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학교 생활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친구들의 눈초리가 의식되고, 내 발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음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일반일과 다르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았다.
몇 년 간 집에서 익힌 발의 행동이 글씨는 물론이고, 웬만한 소지품을 다룰 수 있을 정도였는데 그런 눈초리를 대할 때면 나는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그때 선생님이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점차 내가 아픈 마음들을 털어 내던 4학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내게 미술 공부를 권유하셨다. 미술 시간에 주위의 시골 풍경을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마음껏 그렸는데 선생님이 그 그림을 보신 것이다. 그때부터 내게 미술은 떨어질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그림에 대한 호기심은 더해 가기만 했고, 등교할 때부터 미술 도구가 첫 번째 준비물이 되었다. 동양화가 무엇이며, 사군자의 기법이 어떤 것인지도 배웠다.
그러나 처음 잡는 붓은 발가락 사이를 빠져 나가기 일쑤였고, 발놀림도 둔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맹목적인 것 같지만 신체적 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수천 수만 번의 반복 훈련이 필요했다. 집--동양화--학교만이 내 생활이 되면서 시간은 흘러갔다. 그림이 안될 때는 허전하고 슬펐지만, 그 반대일 때는 하교길이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또한 처음으로 창조란 것이 이렇게도 어려운 것임을 깨달았다. 이런 생활 끝에 눈물 바다와 환희의 초등학교 졸업을 마치고 "너를 끝까지 지켜보겠다" 고 하시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을 뒤로했다. 그리고는 화실이 가깝던 시내 중학교와는 정반대인, 집에서 50분이나 걸리는 제일여중에 입학했다. 처음 만나는 친구들로부터 또 따가운 시선들을 느껴야 했지만 급우들은 금방 내 손들이 되어 주었다. 나는 한결 성격도 밝아지고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림 연습은 더 많이 했다. 전시회를 찾아 다니다 보니 나도 섬세한 창작을 하고 싶다는 욕심과 의욕이 생겼다. 한편으론 체육 시간이 끝나고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친구들의 얼굴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제 나는 여고 시절의 막바지에 와 있다. 주위의 도움으로 여러 번 상도 탔고, 대학 진학의 길도 열렸다. 새로운 대학 생활에 대한 불안이 없지 않으나 이 과정을 이겨 내면 나도 떳떳이 사회의 한 대열에 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마산 제일여고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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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적군까지도 '우리는 하나'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후레더릭스벅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후레더릭스벅은 작은 땅이었지만 남군과 북군 모두 중요한 전략적 위치로 양쪽 군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전투는 치열했고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후레더릭스벅은 총소리로 뒤덮였고 포탄 연기로 인해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군, 북군 할 것 없이 사망자의 수는 급격히 늘어만 갔습니다. 부상자들의 신음은 점점 커져만 갔고 그들은 모두 물을 달라고 외쳐댔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북군의 한 병사가 대위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대위님, 저들에게 물을 먹이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십시오."
그러나 대위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다 빗발치는 총알 속으로 뛰어들어갔다가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대위님, 제발 허락해 주십시오. 저들은 모두 저의 친구들입니다. 총소리는 요란하지만 물을 달라는 소리는 너무나 또렷하게 들립니다."
그러면서 병사는 무릎을 꿇고 대위에게 매달렸습니다. 대위는 할 수 없이 허락했습니다. 병사는 대위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물 한동이를 떠서 총알이 빗발치는 곳으로 한 걸음 내디뎠습니다. 총알은 병사의 곁을 쌩쌩 스쳐 지나갔으나 병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물을 달라는 병사들에게로 가서 물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적군이고 아군이고 가리지 않고 그는 물을 먹여 주었습니다. 죽어가던 병사들은 그 물을 받아 먹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병사를 향해 일제히 총을 쏘아대던 남군은 병사가 하는 일을 알아채자 곧 사격을 멈췄습니다. 병사가 죽어가는 이들에게 한 모금의 물을 먹여 주며 마지막 위로의 말을 속삭여 주는 두 시간여 동안 전쟁은 휴전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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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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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일곱번째 이야기 - 공양의 진실
깊은 산속에서 소나무와 대나무를 벗삼아 수도에 정진하고 있던 한 보살이 있었다. 그는 대자대비심으로 일체중생의 생사고뇌를 해결하고자 밤낮없이 깨달음을 추구했다. 그런데 이러한 보살의 수도를 방해하는 한 미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한 마리 '이'였다. 이는 보살의 옷 속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보살은 이가 배고플 때마다 피를 빠는 통에 부동심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보살은 그 놈의 이를 잡기로 작정했다. 옷을 한참 뒤져 결국 이를 붙잡은 보살은 그 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았다. 아무리 미물이라 할지라도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보살은 차마 이를 죽이지 못하고 썩은 뼈다귀 위에 올려놓았다. 이는 그 뼈다귀에 붙어 있는 살점에서 남은 피를 빨아먹으며 칠일을 살았으나, 더 이상 먹을 것이 없게 되자 결국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는 오랜 세월 동안 생사의 바다를 전전하였다. 보살은 뼈를 깎는 수도 끝에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폭설이 길을 덮어버려 사람들이 나다닐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때 한 부자가 선근을 심고자 하는 뜻에서 부처님과 수천 명의 제자들을 초청해 칠일 동안 정성을 다해 공양을 베풀었다. 그런데 칠일이 지나도 폭설이 그치지 않아 길은 여전히 사람들이 나다니기 쉽지 않은 상태였다. 그때 부처님은 아난과 기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원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구나."
그러자 아난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황급히 말했다.
"그 부자가 정성을 다해 칠일 동안 부처님과 저희들에게 공양을 했으니, 며칠 더 공양을 베풀어달라고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눈이 갈수록 많이 오니, 이대로 사원으로 돌아간다면 당분간은 걸식할 곳도 없을 듯합니다."
"그 부자는 이제 더 이상의 호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다시는 우리에게 공양하지 않을 것이다."
말씀을 마친 부처님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사원으로 돌아가셨다. 다음날 부처님은 아난을 불러놓고 말씀하셨다.
"네가 그 부잣집에 가서 걸식을 해보도록 하라."
아난은 부처님의 분부에 따라 그 부잣집 앞에 가서 발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아난이 걸식하러 온 모습을 보고서도 주인에게 가서 알리지도 않고,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아난은 잠시 기다렸다가 그 부자가 보시를 베풀 뜻이 없음을 알고 사원으로 돌아와 전후의 사정을 부처님에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어떻게 어제와 오늘의 태도가 그렇게 확연하게 다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부처님은 먼 과거세에 자신이 보살로 수행하고 있을 때 한 마리 이와 있었던 인연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난아, 나는 자비심에서 그 이의 목숨을 구해주고 썩은 뼈다귀 위에 놓아주었다. 그 이는 그 때문에 칠일 동안 생명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그 이가 이번 세상에서 부자로 환생하여 그때의 인연을 내게 칠일 동안 각종 산해진미로 공양해 갚은 것이다. 이제 칠일이 지났으니, 그 부자의 정성도 다했으리라. 이제 그 이유를 알겠느냐?"
<육도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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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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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목민 철학으로 일관한 실학사상가 정약용(1762-1836, 75살, 병사).
정약용은 개혁 사상가이자 엄청난 양의 저술을 남긴 집필가였다. 그는 북학파의 '이용후생론'과 같이 단순히 강대국인 청나라를 흉내내고 답습만 해서는 나라의 발전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하여 더 근본적인 조선 사회의 개혁 목표를 제시하였다. 전통적 특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조선 농업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직시하여 오로지 민본주의의 입장에서 나라를 개혁하려 하였고 전면적으로 폐정과 악습을 타파시킨 기반 위에서만 안정적인 농민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효율적인 개혁을 위해서는 지도층의 각성이 선생지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개인적 덕성을 함양시키는 유교적 본질주의에 입각하였고, 그 기본 위에 서학 등의 선진 문물을 적절히 수용하여 궁극적으로 조선의 경제적 토대가 되는 농촌사회 발전을 도모하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고유성과 보편성을 함께 추구한 통합적 사고의 소유자였다. 따라서 그가 상정한 인간형도 무조건 새로운 문물에 대한 적응력이 높은, 실용적이거나 기능적으로 편향된 모습이 아니고 전통시대의 이상주의 정신과 본질주의 사고에 기초를 둔 개방적 인간이었다. 형태와 방향만 있고 정신은 상실한 오늘날의 인간형에 비추어 보면 그가 전해주는 자세와 사상은 우리에게 경종을 주고 있다. 그의 합리적 사고는 본성의 수양을 강조하는 퇴계의 이론을 좇는 남인계열이면서도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능동적인 실천에 중요성을 인정하는 율곡의 입장도 수용하는 포용성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는 당파적 논리에 의하여 자신들의 이론적 기반과 상이한 주장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던 당시의 경직된 사고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한계는 개혁의 방향을 미래에 다가올 발전된 세계에다 맞추지 않고 과거의 태평성대를 표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사상적 근저에서 발전성의 개념이 불명확하고, 사회 발전을 선두에 서서 추진해 갈 개혁의 주체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힘을 인정하기보다는 권력으로부터 시혜성격의 개혁을 상정한 것을 보면 그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유교적 사고에 입각한 왕조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 바탕에 깔려 있는 애민주의는 일생을 통한 그의 행동과 작품들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으며, 민생의 안정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이념적 근간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민중 철학의 대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도 왜곡되고 모순된 현실사회를 사실적으로 이해하여 이에 대해 가차없는 공격을 가함으로써 민중의 입장에서 현상을 극복해 보려고 했던 민본 철학자이자,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좌표를 잃지 않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재상감으로 지목되었던 뛰어난 자질
정약용은 조선 21대 왕인 영조 38년(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현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에서 정재원과 윤씨 사이의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나주이고 자는 송보이며 호는 다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다산이 태어나던 해에 발생한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에 따른 임오화변으로 관직을 떠나 있었다. 다산은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들을 배웠는데 학문의 진보는 빨랐지만 장난이 무척 심했다고 한다. 학문의 기초를 아버지에게 배운 후 강 건너 양평에 살던 권철신에게서 한동안 수학하였는데, 권철신은 남인 학자로 실학 사상의 시조인 성호 이익의 제자이기도 하다. 9살 때 어머니가 죽고 오로지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서 자란 그는 15살의 어린 나이로 승지 홍화보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리고 그 해(1776년)에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는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복귀하여 한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한성에 온 다산은 돌아가신 어머니 윤씨의 친정인 외가를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곳에는 외증조부인 윤두서가 장서를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그것을 탐독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외증조부 공재 윤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로 18세기 초 유명한 문인 화가인 현재 심사정, 겸재 정선과 더불어 삼재로 불린 대화가였다. 또 둘째 형 약전의 친구 이승훈의 일가인 이가환의 집을 출입하면서 이가환의 증조부인 성호 이익의 유고를 읽고 학문의 새로운 길을 알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이승훈과 맏형 약현의 처남인 이벽 등을 통하여 새로운 학문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서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평생을 사학으로 취급된 천주교 신봉자로 지목되어 끊임없이 규탄 받기도 했다. 22살 때 생회시에 급제하였으며, 그 해에 장남 학연이 출생하기도 하였다. 소과에 등과한 다산은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정조 8년(1784년)에 왕이 '중용'에 대한 70개항의 질문을 만들어 성균관 유생들에게 답변을 제출하라는 시험을 실시했었다. 정조의 질문에는 자신이 이끌려고 하는 탕평정치와 인간의 관계를 설정해 보라는 정치적 의미가 담겨있었다. 다산은 큰형 약현의 처남인 이벽과 의논하여 답안을 만들어 제출했는데 정조는 이 다산의 답안을 극찬하였다. 당시 정조는 아무도 모르게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종합한 '사칠 속편'이라는 책을 집필하여 가지고 있었는데 다산의 답변이 이 저술 내용과 상당 부분 일치했던 것이다.
다산은 인간 본성의 수양을 강조하면서도 인식의 주체인 인간의 능동적인 활동을 중요시하는 방향으로 답안을 작성했었다. 퇴계의 이론에 율곡의 학설을 접목시킨 것이다. 즉 인간성이 도덕 규범 자체보다 실천 행동의 결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것이 정조의 속마음과 합치했던 것이다. 이때 다산에 대해 강력한 인상을 받은 정조는 그 후에 그의 후원자요 보호자 역할을 해주었다. 그때 다산의 나이 23살, 정조는 33살 나던 해의 일이다. 그후에도 다산은 성균관에서 수학하는 동안 정조가 친히 하문하는 문제마다 우수한 답안을 제출하여 칭찬과 함께 포상으로 많은 서책을 하사 받았다. 당시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학문 정진을 위하여 규장각에서 발행한 서적을 공부의 성과가 우수한 자에게 왕이 친히 하사하곤 하였는데 다산은 대부분의 포상 서적을 모두 받아서 나중에는 '병학통'이라는 병서까지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다산은 이렇게 과거 최종시험에 합격하기 전부터 정조로부터 재상감이라고 칭찬을 받을 만큼 학문에 뛰어났지만 대과에서 4번씩이나 번번이 낙방했었다. 이는 다산의 집안이 남인 계열이라 당시 실권 세력인 노,소론의 견제가 심했던 때문으로 판단된다. 결국 다산은 남인 지도자 체제공이 우의정이 된 다음해(1789년) 식년시에서야 비로소 차석으로 급제할 수 있었다. 당시는 붕당간의 갈등이 깊어 탕평의 정치를 주창했던 정조 연간인데도 이미 왕까지 그 학문 실력을 인정한 다삼마저도 당쟁의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끊임없이 배척받은 관직생활
과거에 급제하고 가주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다산은 곧바로 초계문신에 선발되었다. 초계문신은 신진 관료 중 우수한 자를 왕실 도소관인 규장각에서 재교육시키는 제도로서 당색이나 문벌이 서로 다른 관직 초기의 인재들을 교류하게 하여 동류의식을 갖게 하고 탕평정치를 보좌할 관료 집단으로 양성시키자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관직에 진출한 첫해 겨울에는 한강에 배다리 설치를 위한 설계도를 만들어 제출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채택될 정도로 기술 분야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여 당시에 할 수 있는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천재성을 일찍이 나타내었다. 이 배다리 설치 작업은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사업으로서 중신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정조는 국가 위신과 기술 문화를 높이는 차원에서 강력히 추진했다. 이 배다리는 정조가 매년 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에 행차할 때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며, 당시로서는 장관을 이루는 대역사였다. 배다리를 이용하면 배로 일일이 이동하는 것보다 빠르기도 하지만 비용도 줄일 수 있어서 백성들에게 위대한 군왕으로서 정조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이듬해(1790년)에 예문관 검열로 재직 당시 서학을 신봉했다는 규탄을 받아 충청도 서산군 해미로 유배되고 말았다. 당시 조정은 그즈음 유입되기 시작하던 천주교와 서학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서학을 긍정하는 신서파와 이를 배격하는 공서파가 그것이었다.
당시에 신서파는 진보적 성향의 일부 인물들뿐이었고 조정의 주류는 공서파였다. 이 첫 유배는 정조가 곧 개입하여 열흘 정도의 짧은 기간으로 끝나고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사헌부 지평, 훈련원 감찰을 거쳐 2년후(1792년)에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수찬으로 임명되던 해 4월에는 진주 목사로 재직 중이던 아버지의 별세로 사직하였으나 그 해말 수원성을 축조하기로 한 정조가 복상중이던 다산에게 설계를 지시하여 이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다산은 설계도에서도 독창성을 발휘하여 선진화된 성제를 선보였으며 기계화된 건축장비들을 제작하여 경비를 절약하고 공기도 단축할 수 있었다. 정조는 수원성 건설을 백성들의 부역 동원으로 하지 않고 임금 노동자인 모군만으로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는데, 다산의 기술력에 의한 보좌 덕분에 이 뜻을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었다.
부친상을 마친 다산은 정조 18년(1794년) 10월에 복직한 후 곧바로 왕의 특명을 받고 암행어사로 경기도 연천 방면을 순찰하였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의 수탈과 폐정이 심하여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온 다산은 서용보의 협잡과 부정에 대하여 확인한 그대로 복명하고 엄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서용보는 곧 파직되었고 이때부터 그는 앙심을 품어서 그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산을 궁지로 몰아 넣으려고 획책했다. 서용보는 영조의 왕위 계승에 공이 컸던 서종제의 증손으로 당시 조정에서도 지지세력이 많았기 때문에 이때 다산의 보고에 의하여 한동안 실각하였으나 그 후 복귀하여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또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각종 과거에 연달아 장원을 했던 재상이기도 했으며, 일찍이 대사헌과 이조판서와 같은 요직을 역임하였던 중신이었으나 부정과 축재에 눈이 먼 전형적인 탐관오리였다. 이때 서용보의 부정과 궁핍한 백성의 현실을 목격한 다산은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이라는 시를 지어 피폐한 백성들의 정상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고발하였다. 어사의 임무를 마친 이듬해 다산은 동부승지를 거쳐 병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청나라 신부 주문모가 체포되자 둘째 형 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연좌되어 충청도 금정 찰방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금정에서는 공무 틈틈이 퇴계와 성호에 대한 연구를 해서 '성호유고'를 정리하고 '도산사숙록'을 저술하면서 지내다가 5개월만에 용양위 부사직으로 중앙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그를 적대시하던 세력에 의해 천주교 신봉자로 계속 공격을 당하자 정조는 그를 황해도 곡산 부사로 임명하여 다시 외직으로 내보냈다. 그는 곡산에서 지방 수령으로 근무하면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목민관으로서 올바른 행정을 수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때의 지방관 경험이 훗날 '목민심서'를 저술할 때 바탕이 되었으며 현지에 근무하면서 천연두가 창궐하자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2년여 지방근무를 마치고 정조 23년(1799)에 병조참지로 중앙관직에 복귀하여 형조참의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나 또다시 서학에 관련 여부가 문제 되어 반대파에 의하여 집중 공격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때 그는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는 '자명소'를 제출하면서 아울러 사직하고는 고향인 마재로 돌아와 버렸다. 그의 나이 39살 때 일인데 그 후로는 완전히 벼슬길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던 정조가 이듬해(1800년) 6우러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18년의 기나긴 유배생활
정조가 급작스럽게 서거하자 11살의 순조가 보위에 올라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대리 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순황후는 노론 벽파의 기둥으로서 그녀의 섭정 기간에는 자연히 벽파가 득세하였다. 벽파 정권은 권력을 잡자 천주교 신자를 국가 반역자 집단으로 매도여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당시 천주교 신자 중에는 노론의 정치적 반대파인 남인 계열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벽파 정권은 순조 원년(1801년)에 '척사위정'의 명분으로 신유사옥을 일으켜 이가환, 이승훈, 권철신, 정약종(다산의 셋째 형) 등을 죽이고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귀양을 보냈다. 이때 둘째 형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당시 조정 일각에서는 정조가 특히 신임했던 다산만은 석방하려 했지만 악연 깊은 서용보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유배지로 내려온 다산은 성수봉이라는 군교의 집에 기숙처를 정하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며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하는 노력에만 매진하였다. 그러나 세월의 시련은 다산에게 이런 생활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조카 사위인 황사영이 조선 교호에 대한 박해 사실을 밀서로 북경의 주교에게 전하려다 발각된 '황사영 백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벽파 강경론자들은 이 기회에 남인 세력을 완전히 소탕할 목적으로 유배된 인사들까지 재심리한다는 핑계로 한성으로 압송해 모두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도 다산의 공적이 인정되어 둘째 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재유배되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다. 이들 형제는 전라도까지는 동행하다가 나주 근처 율정이라는 곳에서 헤어져 각자의 유형지로 향하였는데 이때가 생전에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다. 약전이 유배중이던 흑산도에서 순조 16년(1816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강진에 도착한 다산은 변두리에 거처를 정하고 역시 두문불출하며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도 그는 여러 권의 저술을 남겼으며 귀양생활 8년(1808년)부터는 만덕동 산자락에 있던 윤박이라는 선비의 별채를 빌려 생활하였다. 별채가 있던 산 이름이 다산이어서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다산으로 삼았다. 당시 다산에 있던 만덕사에는 1000여 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어서 이 책들이 그의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유배지에서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하며 지내던 다산은 순조 17년(1871년)에 훗날 '경세유표'로 명명된 '방례초본' 40권을 정리하였다. 이 책은 국가 행정기구 및 제도의 축소 계획부터 토지, 조세문제에 이르기까지 기술된 방대한 국가 경영서였지만 사법제도와 기술분야에 관한 부분은 빠져서 완성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당시 국가 경영에 있어서 가장 시급한 일로 보았던 민생 안정을 위하여 서둘러 지방관의 실무 지침서인 '목민심서' 저술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집필을 시작한 이듬해 봄에 총 48권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는데 이 책은 12장 72조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지방관의 청백 자세 확립과 이서의 단속을 강조한 것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고통과 탐관오리의 수탈을 폭로하고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한 지방관 지침서로서 그의 애민사상이 구체적으로 전개되어 있는 저술이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완성하던 해 9월에 이태순의 상소에 의하여 기나긴 귀양에서 풀려 무려 18년만에 고향 마재로 돌아왔다. 이 때에는 다행히도 악연 깊은 서용보가 청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온 뒤 벼슬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고, 외척으로 실권을 쥐고 있던 김조순이 찬성하여 간신히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18년이라는 긴 세월의 유배 생활로 그의 정적들도 더 이상 다산을 붙들어둘 명분이 없기도 했다.
집필에 몰두한 말년
다산은 고향에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 학문에 정진하면서 집필을 계속하였다. 귀양에서 풀린 이듬해(1819년)에는 재판 제도와 각 지방의 관습을 기록한 '흠흠신서'를 30권으로 완성했다. 귀양 생활에서 놓여나기는 했으나 그에 대한 조정의 감시는 여전하여 처신이 자유롭지 못한 가운데 말년을 보내면서도 의연하게 연구에 정진하며 집필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의 나이 66살 때(1827년)에도 또다시 서학을 유포한다는 허무맹랑한 혐의를 받았으나 헛소문으로 밝혀져 무사할 수 있었다. 또 서용보와의 악연은 말년까지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은퇴한 서용보가 이웃 동네에 내려와 살게 되었던 것이다. 다산은 감정을 풀고자 하였으나 서용보는 겉으로는 응하면서도 끝까지 다산에 대한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다산은 고향에서도 거의 외부 출입을 끊은 채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하면서 말년을 보냈다. 자신의 생활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의 애민 사상은 여전하여 죽기 3년 전인 72살 때 '황년 수촌 춘사십수'라는 시를 지어 고통받는 농촌의 현실을 한탄하였다. 조용히 저술과 시작에 전념하면서 말년을 보내던 그는 헌종 2년(1836년)에 75살의 나이로 마재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원래 그날은 다산부부의 회혼식날이어서 조촐한 기념잔치를 하려 했는데 결국은 경사스러운 날이 애통한 날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다시 18년만에 세상을 하직한 다산은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이면서도 불우한 생활에 굴하지 않고 수많은 저술을 남긴 불세출의 대학자였다. 그는 무려 508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저서를 기록했으며, 시도 무려 2469편이나 지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목록을 작성해둔 그의 치밀함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많은 수의 작품은 소실되어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그의 작품은 당시로서는 연구 가능한 전 분야를 망라한 방대한 내용으로 하나같이 전문적인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다. 제반 저술의 근간은 유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를 평생 곤경에 빠뜨렸던 서학 등 새로운 경향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접목시켜 애민적 입장에서 집필하였다. 다산의 관심은 쇠퇴하고 있는 국력을 회복하고 고통받는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는 데에 항상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헝클어진 조선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교주의적 관점만으로는 어렵다고 보고 선진화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서학에 대한 그의 관심도 종교적인 관점보다는 과학 기술적인 매력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새로운 학문에 대한 개인적인 흥미도 있었겠지만 그것들을 통하여 국가 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목적이 더 강렬했던 것이다. 국가의 개혁과 발전을 위하여 당시로서는 금기시되는 학문이라도 위험을 무릅쓰고 배우려던 선각자적인 집념이 그를 곤경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다산은 나름대로 국가 발전의 모델을 가지고 있었으며 뚜렷한 개혁 의지를 바탕으로 나라와 백성에게 필요하다면 무엇이든지 수용해야 된다는, 당시로서는 대단히 열린 사고를 가졌던 인물이다.
사상적 경향
다산은 성호학파 남인 학자의 일반적 경향대로 명말 청초의 경세학풍은 물론 서양의 신학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 소위 세계화 추진론자였다. 반면에 그를 적극 후원하였던 정조는 "동국에 태어난 이상 마땅히 본 모습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조선 중화주의'에 입각한 주체성 강조론자였다. 이렇듯 지향하는 관점이 다른 두 사람이 일치한 것은 당시 사회적 현실에 대한 개혁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출발점이 달랐기 때문에 개혁의 지향하는 방향이 달랐다.
정조는 제도 개혁보다는 실력이 있고 편파성이 없는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점진적 개혁을 추진했고, 다산은 국가 체제 전체의 변혁에 까지 이르는 제도 개혁을 주장하면서 더 나아가 의식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정조는 당시의 체제를 지키며 이끌고 가야 할 대표자인 군왕이었고 다산은 일반 민중의 시각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간극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상태가 점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기에 충분하였는가, 아니면 보다 획기적인 개혁 추진이 필요했던가 하는 점은 지금의 입장에선 명확하지만 당시로서는 선택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개혁의 최대 지주였던 정조가 조금만 더 오래 살면서 다산 등의 개혁 추진론자들의 조직화하고 정치 주도 세력으로 육성시킬 수 있었다면 개혁의 방향이 달라지고 아울러 조선의 역사도 바뀌었을지 모른다. 개혁주의자들이 채 기반을 갖추고 세력이 결집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나마도 지지하고 후원하였던 정조가 죽었기 때문에 수구 세력의 반격을 당하여 완전히 궤멸되었던 것이다.
영,정조 치하에서 발아되고 추진되었던 개혁 의지가 정조 사망 이후에는 완전히 차단되고 무위로 끝나고 말았던 역사의 실상은 그 이전 개혁의 방법과 방향성이 너무 미지근하거나 무력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이념이 성리학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고 개혁의 호위 세력을 집단화하여 전면에 내세우지 못했으며, 보다 근본적인 제도 개혁에는 등한시했기 때문에 실패했던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이 안고 있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어정쩡한 당시의 상황에서 다산은 더 앞자락에 나와서 개혁을 주창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정조 생전에는 그 사상적 완성이 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정치적 입지도 부족한 가운데 관직 생활을 끝냈던 것이 그 자신의 불운이자 조선의 불행이었다. 그리고 다산의 개혁 방안 또한 다분히 이상적 방향에 그치고, 실제로 개혁을 추진할 주체도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은 지적될 수 있다. 이는 그가 사회 전체를 부정하고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급진적 성향을 가진 것이 아니고 체제 안에서 잘못된 점을 바꾸어 보려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개혁은 같은 개혁 군주가 존재하고 그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추진되어야만 가능한 내용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다산의 한계였다. 그가 지향했던 사회도 더 발전된 미래의 모습을 상정한 것이 아니고 과거의 이상적 모델인 주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도 결국은 유교주의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극가 개혁을 위해 진보된 신학문을 적극 수용하여 활용하여야 한다는 선각자적 수준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장한 개혁의 방향도 특권층의 권한을 축소,약화시킴에 따라 상대적으로 군주권을 강화시키는 것이었으며,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국가와 사회의 구조도 변동되었으므로 통치기구와 정신 이념도 변경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이 토지를 상실하여 민생의 근간이 무너지고 국가의 조세기반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이 부분의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특히 의식의 개혁을 역설하여 농민들의 주체적 자존 의식을 고취 하였으며, 다스리는 자의 자세 변화를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여 수령들의 청렴한 자세를 강조하였다. 이에 대해 '목민심서'에도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청렴이란 목자의 본분이요. 만 가지 선행의 원천이다.' 그는 수령이 먼저 수신을 철저히 하여 덕과 아울러 위엄과 능력을 갖추어야 하며, 여기에 올바른 뜻과 공명함이 있어야 바른 행정을 펼 수 있다고 했다. 즉 지도자는 전인적인 인격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 다산의 정신과 사상은 경세적인 실학이기에 앞서 인간의 기초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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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5. 미룸
<미래에의 만족을 뒤쫓는다는 게 얼마나 우스꽝스런 일인가. 지금 여기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한 게 없으니, 미루지 말라>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로 가는 길에 디오게네스를 먼났다. 한겨울의 아침 나절이었다. 바람이 찼다. 디오게네스는 강둑의 모래 위에 비스듬히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아름다운 영혼은 세속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알렉산더는 그의 모습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경외스런 어투로 말을 건넸다.
<선생...>
알렉산더는 난생 처음으로 "선생"이란 말을 쓴 것이었다.
<선생, 난 당신한테 단번에 감동하였소이다. 그래서 당신을 위해 뭔가 해드려야 겠소이다. 뭘 해드리면 좋겠소?>
디오게네스가 말하기를,
<아 조금만 옆으로 비켜 서주셨으면 합니다. 햇빛을 가리고 계시니. 그뿐입니다>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신에게 청할 것이요. 이번엔 알렉산더가 아니라 디오게네스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디오게네스가 웃으며 말하기를,
<누가 감히 대왕의 길을 막겠습니까? 대왕께선 지금 어디로 가시지요? 여러 달 동안 군대가 이동하는 걸 보았습니다... 대왕께선 어디로 가십니까? 무슨 일로 가십니까?>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세계를 정복하러 인도로 가는 길이오>
디오게네스가 묻기를,
<그런 다음에 뭘 하시렵니까?>
알렉산더가 말하기를,
<그야 편히 쉬어야지요>
디오게네스가 웃으며 말하기를,
<대왕께선 참 어리석소이다! 난 지금 쉬고 있질 않습니까. 난 세계를 정복하지도 않았고, 또 그럴 필요성조차 못 느끼지만 지금 아주 편안히 쉬고 있소이다. 대왕께서 정말 편히 쉬고 싶다면 지금 당장 왜 그리 못하십니까? 편히 쉬기 전에 먼저 세계를 정복해야 한다고 누가 그럽디까? 대왕께 말해 두지만 지금 당장 편히 쉬지 못하신다면 끝내 그럴 수 없을 것이오. 대왕께선 결코 세계를 정복하지 못하실 겁니다... 대왕께선 여행 중에 죽게 될 것이오. 그리고 딴 많은 사람들도>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에게 그 충고를 마음 깊이 간직해 두겠다고 말하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길을 멈출 순 없었다. 그는 정말 여행 중에 목숨을 잃었다. 길에서 죽은 것이다. 그 후 이상한 얘기가 전해 내려 왔는데, 디오게네스도 알렉산더가 죽던 그날 똑같이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신에게로 가는 길에 강을 건너다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등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몇 발짝 뒤에 디오게네스가 보였다. 아 아름다운 사람. 알렉산더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창피를 무릎쓰고 외쳤다.
<이거 또 만나게 되었구려. 황제와 거지가 말요>
디오게네스가 말했다.
<그렇군요. 한데 당신은 뭔가 오해하고 있소. 누가 거지고 누가 황제인지 모르는 것 같소. 나는 삶을 완전히 살고 누렸으므로 신을 만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은 신을 만나지 못할 것이오. 당신은 나조차도 볼 줄 모르지 않소. 당신은 내 눈조차 들여다 볼 줄 모르오. 당신으 삶은 완전히 헛된 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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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아름다운 옥으로 왕을 위협하다<인상여>
-"대왕께선 화씨벽대신 진나라의 15개 성을 조나라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만일 대왕께서 이 화씨벽을 빼앗으려 한다면, 저는 이것을 기둥에 던져 깨뜨려 버리고 이 자리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겠습니다.-
조나라 혜문왕이 초나라의 화씨벽을 손에 넣었다. 이것은 옛날 초나라 사람인 화씨가 발견한 아름다운 옥으로 당시의 여왕에게 바쳐진 후 대대로 전수되어 오던 보물이었다. 진나라 소왕은 그 소문을 듣고 사람을 시켜 조나라 혜문왕에게 서신을 보내 화씨벽과 15개 성을 맞바꾸자고 제의하였다. 혜문왕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의견을 물었다.
"이것은 필시 진나라 왕의 계략임이 분명합니다. 화씨벽을 주어도 진나라는 15개 성을 내놓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화씨 벽만 빼앗길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렇다고 화씨벽을 내놓지 않으면 진나라는 그것을 핑계삼아 우리 조나라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조나라 대신들은 이처럼 갑론을박만 하고 있을 뿐 좀처럼 결론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때 환관의 영이 나서서 말하였다.
"저희 집 객인 중에 인상여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사자로 보내면 슬기롭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혜문왕이 인상여를 불러 물었다.
"진나라 왕이 자기 나라의 15개 성을 과인의 화씨벽과 바꾸자고 요청하였다. 그대는 과연 이것을 주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 말해보라." 인상여가 말하였다.
"지금 진나라는 강하고 우리 조나라는 약합니다. 허락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나라 왕이 과인의 화씨벽만 빼앗은 채 약속을 어기면 어찌하겠는가?"
"진나라가 성을 가지고 화씨벽을 바꾸자고 요청하는데 허락지 않으면 잘못이 조나라에 있는 것이고, 조나라가 화씨벽을 주었는데 15개 성을 주지 않으면 그 잘못은 진나라에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을 비교하여 보니, 차리리 허락하여 잘못된 책임을 진나라에 지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가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로 갈 수 있겠는가?"
"네, 만약 15개 성이 조나라로 돌아오게 된다면 화씨벽을 진나라 왕에게 주고 올 것이고, 성을 주지 않는다면 다시 화씨벽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인상여는 이렇게 장담하였다.
"과연 그럴 수 있겠는가?"
"틀림없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상여는 곧 화씨벽을 가지고 진나라로 떠났다.
진나라 소왕은 인상여가 바치는 화씨벽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리고는 차례로 대신들과 궁녀들까지 돌려가며 그 보물을 감상하게 하였다. 대신들은 만세까지 불렀다. 이것을 본 인상여는 소왕이 진나라의 15개 성을 조나라에 넘겨줄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감지하였다.
"그 화씨벽에 흠이 있으니, 청컨대 대왕께 가르쳐드릴까 합니다."
문득 인상여가 앞으로 나가 말하였다.
"옥에도 흠이 있단 말이오?"
소왕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인상여에게 다시 화씨벽을 넘겼다. 화씨벽을 손에 넣은 인상여는 갑자기 기둥 가까이로 가서 곤두선 머리털이 갓을 밀어 올릴 만큼 성이 난 얼굴로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대왕께서는 화씨벽을 가져온 사신을 빈객으로 대우하기는커녕 예절 없이 신하처럼 대했습니다. 그리고 화씨벽을 일개 궁녀에게까지 돌려 보이며 희롱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대왕께서 화씨벽대신 진나라의 15개 성을 조나라에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는 속셈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이 화씨벽을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만일 대왕께서 저를 협박하여 이 화씨벽을 빼앗으려 한다면, 저는 이 화씨벽을 기둥에 던져 깨버리고 이 자리에서 머리를 부딪쳐 죽겠습니다."
인상여는 화씨벽을 번쩍 들어 기둥에 던지려 하였다. 진나라 소왕은 보물인 화씨벽이 손상될까 두려워 인상여에게 곧 사과를 하였다.
"우리 진나라의 15개 성을 조나라에 주겠어. 여봐라! 어서 지도를 가져오너라."
소왕이 이렇게 말하였지만, 인상여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대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화씨벽은 천하의 보배입니다. 조나라 왕께서는 이 벽옥을 보낼 때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벽옥을 받으시려면 대왕께서도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연후에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때 비로소 이 화씨벽을 대왕께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화씨벽을 갖고 싶은 욕심에 진나라 소왕은 인상여의 말대로 5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인상여는 화씨벽을 간직한 채 숙소로 돌아와 머물렀다. 그리고는 수하의 사람에게 누더기 옷을 입혀 변장을 시킨 후 화씨벽을 가족 조나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마침내 5일이 지난 후 인상여는 다시 진나라 소왕에게 나갔다.
"진나라는 지금까지 20여 대를 거치는 동안 일찍이 대왕들이 약속을 굳게 지킨 일이 없습니다. 저는 진실로 대왕께 속아서 조나라 왕의 명령을 저버리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이미 시람을 시켜 화씨벽을 갖고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저는 대왕을 속인 죄로 마땅히 죽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를 죽여주십시오."
소왕은 물론 대신들도 모두 깜짝 놀랐다.
"당장 저자의 목을 쳐야 합니다."
대신들이 소리쳤다.
"가만 두어라. 지금 인상여를 죽이면 화씨벽을 영원히 얻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리 진나라와 조나라의 우호관계도 끊어지게 된다. 그러니 인상여를 후대하여 안전하게 조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
이렇게 하여 인상여는 화씨벽도 빼앗기지 않고, 자신의 목숨도 구하여 조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나라 혜문왕은 인상여의 공로를 치하하여, 그를 상대부에 임명하였다.
약점 : 상대의 약점을 알면 무서울 것이 없다. 무모한 배짱은 죽음을 부르지만, 상대의 약점을 이용한 배짱은 얻고자 하는 바를 다 얻을 수 있다. 협상은 누가 더 많이 상대의 약점을 알고 있는가에 따라 우위가 결정된다. 자신의 장점을 내세워 상대의 약점을 공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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