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신념과 용기의 원칙주의자 송시열(1607-1689) 83살, 사사).
우암 송시열은 조선 중기 이후 대표적 유학자이면서 그 이후 조선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지나친 원칙주의는 찬양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지만 형식에 얽매인 배타주의 사조를 후세에 남겨 조선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는 구조적 모순을 제공한 것은 사실이다. 쓸데없는 명분과 격식이 만연하였던 근원도 그로부터 더 심해졌고, 그의 배타적 경향은 더욱 철저한 보수주의 경향으로 사회를 몰아갔다. 그는 주자의 기본 노선 이외의 사상적 모색을 일체 차단하여 결과적으로 사회에 획일적 사고를 고착시켰고, 학문 내용도 관념의 세계에 치중하게 하여 현실과 겉돌게 만들었다. 그의 완고한 주자 존중 자세는 형식 논리에 보다 집착하게 만들어 당쟁을 격화시켰고, 심하게는 학문을 자기 논리와 입장만을 비호하는 방편이나 득세의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폐해를 증폭시켰다. 또한 뛰어난 학식과 논리 체계로 인하고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나 성격이 천성적으로 과격하고 시비곡직을 가리는 데에 주저하거나 회피하지 않아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하늘과 땅이 만물을 낳고 성인이 만사에 응하는 까닭은 오직 '곧음'뿐이다"라고 갈파하였으며 자신의 믿는 바를 지키는 데 절대 굽힐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스스로도 일거수 일투족을 주자의 원칙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신하였고, 출사해서는 왕의 스승이 되었으며, 산림에 은거해서는 일세를 풍미하는 대학자로서 살아갔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위하는데는 열렬하고 절실하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속임없이 말하고 행동한 직선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다만 자신이 살았던 절박한 시대 상황과 그의 과격성이 어우러져 상황에 따라 대처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는 다양한 수단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예 외면했던 것이 그의 한계였다.
그의 배타적인 사조는 그 후 조선 사회의 지배적 가치관이 되어 후대에는 지도층들의 개인적 이익을 보존하는 수단으로 그의 이론이 악용되어서 국가 사회의 진정한 발전은 저해되고 말았다. 그를 관찰해 보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자세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치욕의 호란으로 은거하다.
송시열은 조선 14대 왕인 선조 40년(1607년) 충북 옥천에서 송갑조와 곽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이며 호는 우암이다. 그의 출생에 대하여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몇가지를 살펴보면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는 밝은 달과 같은 구슬을 삼키는 꿈을 꾸고 나서 태기가 있었다 하며, 그의 아버지가 제사를 모시러 종가집에 갔을 때 밤에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공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한 제자를 가리키며 "이 사람을 너에게 보내니 잘 키우라"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상한 생각이 든 그의 아버지가 급히 집에 돌아왔을 때 우암이 태어났다고 한다. 그의 부친은 기쁜 마음에 아들의 이름을 성뢰라고 지었는데, 이것이 우암의 어릴 때의 이름이다. 또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 마을 앞을 흐르던 적등강이 까닭 없이 말라서 바닥을 드러내다가 그가 출생하자 물이 다시 흘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모두가 심상치 않은 인물이 출생한 것을 설명해 주는 설화들이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학문의 기초를 배우다가 8살 때 부친의 이종인 송이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때 송이창의 아들 송준길과 같이 공부하였으며, 그 후 그들은 평생을 동지로 지내게 되었다. 19살 때 이덕사의 딸과 결혼하였고, 22살 때는 하늘같이 믿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24살이 되어 상복을 벗은 그는 연산에서 은거하고 있던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더욱 학문의 길에 정진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노 스승이 8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나 우암은 존경하는 스승을 1년만에 잃어버렸다. 다행히 타계한 노스승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도 그 아버지 못지 않은 대유학자였으므로 계속 김집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때 같이 수학하고 교류한 이들은 송준길, 이유태, 윤선거 등으로 훗날 하나같이 뛰어난 학자가 되었다. 27살 되던 해인 인조 11년(1633년)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당시 과거 시험관으로 우암의 답안 내용을 격찬했던 최명길의 천거로 경릉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곧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2년 후에 왕자의 사부로 임명되어서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가 30살 되던 해(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어가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후에 관직을 내놓고 향리인 회덕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는 오랑캐에게 항복했던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는 것을 수치로 여겨 아예 황간 땅으로 깊숙이 들어가 칩거하기도 하였다. 관직에서 사퇴한 이듬해에는 용담 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인 옥천 구룡촌으로 돌아왔다. 이 후 조정에서 수차례 관직을 재수하고 출사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향리에서 10년이 넘게 은거하며 오직 학문에만 몰두했다. 호란의 치욕 이후 우암뿐만 아니라 뜻있는 많은 인물들이 벼술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 우암은 42살 때 거주지를 진잠의 월전리로 옮기고 인조대에는 끝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설욕을 위한 북벌 추진
그 이듬해(1649년) 5월에 인조가 죽고 효종이 등극하자 그는 '기축봉사'로 알려진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이상소는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 되는 내용이 들어있다 하여 밀봉한 채로, 어려서 자신이 가르쳤던 새 임금에게 바쳐졌으며, 임금이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사항을 13개항으로 나누어 기술하였다. 밀봉하기까지 해서 외부에 누설하지 않으려던 내용이 바로 맨 마지막 항인 '정치를 바르게 해서 오랑캐를 몰아내야 한다'는 제목의 글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청에 항복한 처사가 너무나 큰 치욕이었음을 지적하고 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준 사실을 상기시킨 후에 와신상담하여 청에 복수할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조선과 청나라와의 관계를 감안할 때 이 내용이 누설되어 청에 알려진다면 엄청난 파장을 몰고올 것이 뻔하므로 밀봉하여 제출하였던 것이다. 이 상소 이후 효종은 우암을 송준길과 함께 세자 시강원 진선에 임명 하였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집의에 등용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김자점이 김경록, 송준길 등의 탄핵으로 파직된 후, 이에 앙심을 품고 역관 이형장을 사주하여 청나라에 '조선이 북벌을 계획하고 있으며, 우암이 지은 장릉의 지문에 명나라의 연호를 쓴 사실'을 고자질한 사건이 일어나 청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말았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적극 가담한 공서파의 일원으로 반정 성공 후 정사 1등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나 효종 원년에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자 앙심을 품고 청에 조선의 사정과 정서를 밀고하였지만 사태가 무마되자 유배되었다가 효종 2년(1651년)에 역모죄로 처형된 인물이다. 얼마 후 진상 조사와 문책을 위해 왔던 청나라 사신을 회유하여 사태를 무마하고 김자점은 광양으로 유배를 보낸 뒤에 효종은 다시 우암을 조정으로 불렀으나 그는 끝내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의 거듭된 사양에 효종은 계속 관작을 올려 입조를 재촉했으나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들어 오랫동안 출사를 하지 않았다. 우암이 조정에 나가지 않은 동안에도 국사에 대해 완전히 등한시하지는 않았다. 왕과의 교감을 통해 여러 차례 서면을 통해 진언을 하였고, 효종은 이에 화답하여 약재와 식량을 하사하기도 했다. 다시 출사하기 1년 전에도 '정유봉사'라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는데 19개 항목으로 구성된 이 상소에서 그는 북벌이라는 뜻을 확실히 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효종 9년(1658년)에 이르러 청나라 황제가 주색에 빠져 정사를 등한시하고 참된 신하가 내몰리는 상황이 빈번하다는 사실이 조선에 알려지면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효종은 마침내 북벌을 단행하고자 하였다. 이에 효종은 우암을 이조참의로 명하여 조정에 불렀으나 또다시 응하지 않자 아예 예조참판을 거쳐 이조판서를 제수하였다. 이에 우암은 때가 이르렀음을 깨닫고 향리에 칩거한 지 9년만에 조정에 다시 나갔으며, 복수 설욕을 노리는 왕과 신하가 비로소 머리를 맞대고 대사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우암의 나이는 52살이었다. 이 시절 우암과 효종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조정에 다시 나온 그 해 12월에 효종이 초파옷을 하사하자 우암은 과분하다 하여 사양하였다. 그러나 효종은 그를 은밀히 불러 자신의 본심을 말해 주었다. "머지않아 오랑캐 땅의 찬바람 속으로 나와 함께 달려나가야 하겠기에 미리 준비하여 준 것일 뿐인데, 왜 내 뜻을 그리도 모르시오?" 이렇듯 두 사람이 북벌의 의지로 뭉친 것은 치욕적인 국권을 회복하고 명과의 의리를 들어 복수하여야 한다는 대의명분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개인적인 원한과 응어리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다. 그의 형 소현세자는 청에 있는 동안 당시 수입된 서양 문물과 사상을 접하여 개방적 사고를 갖게 되었으며 청과의 관계도 현실을 인정하여 가급적 원만하게 이끌려고 노력했다. 이 점이 부왕인 인조의 노여움을 사 결국에는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같이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은 소현세자와 상반된 생각과 입장을 가졌다. 효종은 청나라 조정에서 소현세자를 각종 전쟁터에 동행하도록 요구하며 시달림을 주자, 세자인 형을 보호가기 위하여 자신이 대신 가겠노라고 고집하여 이를 막아내기도 했다. 이에 따라 효종은 볼모로 있는동안 그 형을 대신해 외지로 계속 끌려다니며 갖은 고생을 다하여서 차츰 청에 대한 원한이 쌓여갔던 것이다. 또 전쟁터에서 타민족에 대한 청나라의 고압적이고 잔혹한 태도를 목격하고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
우암으로서도 청에 원한을 가지게 된 개인적인 동기가 있었다. 정묘년(1627년) 청의 1차 침공 당시 그의 맏형인 송시희와 운산 현감이었던 매형 윤염이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청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과 대의적인 뜻이 같은 왕과 신하가 만나 설욕의 계기를 함께 마련하던 중에 효종 10년(1659년) 3월에는 북벌을 위한 마지막 점검과 의논을 위해 효종과 우암 두사람만의 독대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독대는 전례가 없었다 하여 안팎으로 큰 의심과 시기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벌을 최종적으로 재확인하는 독대가 있은 지 2개월 후에 10년의 적공이 모두 무너지는 통한의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효종이 41살의 젊은 나이로 급사하고 만 것이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등극하자 북벌론은 실효성이 없다는 이유로 중단되어 더 이상 중원을 노리는 의지는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다.
북벌추진 과정과 그 실제적 의미
우암이 다시 입조했던 그 시시 얼마 전쯤에 효종은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큰 부상을 입은 일이 있었다. 효종은 장차 북벌 길에 나서기 위한 준비를 스스로도 철저히 한 것이지만 이 부상으로 기력이 크게 손상되었다. 더구나 귀밑에 종기까지 나서 오래도록 낫지 않아 고통이 더 심했다. 그런데 그 해에 가뭄이 크게 들자 쇠약해진 몸으로 몸소 제단에 나아가 기우제를 올리느라 더욱 고생했었다. 결국 더위와 피로가 겹친 데다 종기까지 악화되어 급작스럽게 위독 상태에 빠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재위 기간 내내 청에 대한 설욕의 기회를 기다리며 군비 확충에 전력을 기울였던 효종이 죽자 북벌 추진은 사실상 취소되었다. 그 이후에 북벌론은 오로지 조선 사회의 사념적 근저에만 남겨져 공허한 자기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이념으로나 존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실제 북벌 계획은 어느 정도 추진되었으며 우암과 효종이 그토록 그것에 매달린 근본적 이유는 무엇이고, 당시의 북벌 계획이 그 후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알아보자. 먼저 효종이 추진한 북벌 계획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되었는가에 대해 알아보자. 김자점 역모 사건을 처리한 뒤에 국내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효종은 본격적으로 군사력 강화 작업에 착수했다. 효종 3년(1652년)에 군병의 훈련을 담당하던 어영청을 정비, 강화하여 군보를 정하고 이완을 어영대장으로 임명해서 북벌의 본영으로 삼았다. 어영군은 별초병과 기병을 위주로 한 정예부대로서 황해, 강원,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 6도에 분산하여 배치했다. 또 왕궁을 경비하고 왕을 호위하던 금군을 190명에서 1000명의 정예기병으로 대폭 증원하여 왕의 경호를 강화하였고, 한성 외곽 방어를 맡고 있던 수어청을 재정비하여 수도 방위 태세도 튼튼히 하였다. 이뿐 아니라 각지의 성곽을 수축하였으며 지방군 부대인 속오군의 편제를 정비하여 훈련을 강화하였고, 부대 기본 단위인 각 초의 조직과 기능을 철저하게 정비했다. 한편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 인 하멜 등을 훈련도감에 편입시켜 화약과 무기 제조에 힘쓰게 하고 의주 부윤 임경업을 통해 은밀하게 남명과의 대청 연합전선을 구축하게 하였다. 그리고 청의 요청으로 당시 만주지방을 침범하는 러시아 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나선 정벌을 나서서 변급(1654년), 신유(1658년)의 지휘 아래 두 차례 모두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어 군사력을 시험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력 확충은 재정 부족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기도 하였고, 지나친 군비 강화로 민생 안정에 소홀해져 조정에는 이에 대한 찬반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효종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성해져 실제로 거병할 기회는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다만 이때 확립된 강한 군사적 기반이 그 후 국정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은 사실이다. 다음으로 우암이 그토록 북벌을 주장한 이념적 배경을 알아보자. 우학의 이념을 기조로 건국된 조선에서 삼전도의 굴욕은 단순한 전쟁에서의 패배 이상의 후유증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유교적 윤리 개념으로 볼 때 상국으로 존중하던 명나라를 저버리고 자식이나 종처럼 여겨왔던 여진족 국가인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패륜적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국력의 부족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정당화하려는 것은 '충신불사이군'이라는 유교적 근본 가르침을 각가 차원에서 무시하는 것일 뿐이고, 그렇게 되면 국가 내에서도 신하와 백성이 군주에게 반드시 충성할 이유도 없어지는 모순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삼전도의 굴욕은 조선왕조 체제의 존재 이유에 까지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 사건이었다. 조선이 엄청난 참화를 당하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승리하였던 왜란 이후 왜국에게는 비교적 관대하였지만, 단기간 동안에 패주하여 항복하고 말았던 청나라에게 내면적으로는 조선 후반기까지도 강경하였던 숨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전쟁의 피해로 봐서는 왜란이 몇 곱절 심했지만 정신적 기층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호란의 영향이 더한층 심각했던 것이다. 이 점이 명,청 교체기에 현실론을 내세워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였던 광해군의 논리가 당시에는 결코 수용될 수 없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또한 전 국토를 왜군의 말발굽에 수년동안 짓밟혀 왔던 왜란 종결 이후에는 복수를 위해 남벌하자는 논란이 없었지만 그보다 피해가 훨씬 적었던 호란 이후 북벌의 주장이 대두된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즉, 호란은 조선 왕조의 존립 가치를 붕괴시킨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제 부정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암은 더욱 교조적 원칙론에 입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 왕조의 모든 기초가 다 무너지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란이 남긴 체제 부정의 위기를 극복하고 유교국가로서 존립해 나갈 수 있는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당시의 관점에서는 절실한 까닭이었지만 그 이후 조선 사회에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게 되었다.
북벌론이 조선 사회에 미친 영향
우암이 통찰한 바에 의하면 앞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삼전도의 굴욕으로 청과 군신관계를 맺은 것은 유교적 이념으로 구조된 조선 왕조의 존재 이유를 송두리째 빼앗아 가버린 사건이었다. 당시 그가 판단한 조선 사회는 극도의 패배적 염세주의와 함께 사회를 지탱해주는 정상적 가치관이 온통 붕괴되어 사회 각 계층 간에 존재해있던 기본적인 윤리 의식마저 상실되는 심각한 자기 부정의 상황이 위험수위에까지 치솟아 있었다. 따라서 이미 강국이 되어 있는 청나라에 대해 실제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기는 불가능하더라도 북벌 의지를 고양하고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통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정신만이라도 천명해 나가는 것이 그나마 조선의 존재 이유를 지탱하고 혼란스러운 가치관을 정립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정치 세계에서 종종 내부 모순과 불만을 해소하는 한 방편으로 외국과의 갈등 조성이나 전쟁을 유발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의 정책으로 보면 된다. 다만 우암 시대의 모순은 그렇게 단순히 정책적 돌파구로서만 북벌을 채택했다고 말할 수 없는 근본적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관념적으로라도 청나라와 대결 자세를 유지시켜 국민을 단합하고 국론을 통일시켜 정신적 기반을 지탱하는 것이 절실했다. 우암은 이를 위해서는 군사력을 강화시켜 그 의지를 수행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일면, 정신적으로는 더욱더 확고한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주자는 그에게 있어서 완벽한 모범이었다. 남송대의 주자도 국가적으로 볼 때 멸시했던 이민족 국가인 금과 군신관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치욕을 맛본 사람이었다. 주자도 절박한 당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더욱더 성현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키자는 근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했었다. 유학자로서 주자는 마땅히 존숭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시대에 닥친 상황이 주자의 그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으므로 우암은 주자의 선택과 같은 현실 대응을 하게 된 것이다. 그가 올린 '기축봉사'에서 '정치를 바르게 해서 오랑캐를 물리쳐야 한다'는 뜻으로 마지막 항의 제목을 '수정사이양이적'으로 했던 것은 주자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주자가 생각했던 송나라의 최선책도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승산이 없더라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이민족과 화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암의 뜻도 위기의 시대를 맞아서 모두가 분발하여 나라를 강하게 만들려는 소명의식을 갖도록 하고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근본을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정신적 각성을 일깨우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의 조선은 그의 기대처럼 강력한 국가가 되지 못했으며, 지도층의 기풍도 전혀 새로워지지 않으면서 주자에 의거한 관념적 대의명분론만 극히 배타적으로 증폭되어 버렸다. 이 교조적인 명분론은 주자학 이외의 다른 사상이나 학문은 일체 이단시하면서 조선의 국가 발전에 결정적 장애가 되었으며, 시간이 가면서 점점 현실과 유리된 허황한 관념론으로 흐르고 말았다. 또한 중화의 본산인 명나라가 멸망한 이상 성현의 가르침을 좇는 유일한 국가인 조선이 그 뿌리를 잇는다는 공허한 '조선 중화주의'에 빠져 결과적으로 시대 조류에 뒤떨어지게 되면서 국가 전체가 깊은 침체의 수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북벌론은 점점 관념의 세계에서나 존재하게 되었고 입으로만 얘기하는 허구적 존재로 전락하여 기득권 세력의 사적인 이익을 지켜주는 배타적인 방어 논리로만 악용되었다. 결국, 북벌론이 우암 시대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단호하고도 기개 있는 의지였으나, 그 후에는 사회 발전에 결정적 걸림돌로 작용하는 아이러니를 불러왔다. 그 후 이와 같은 불합리의 위선적인 태도는 박지원이나 박제가 등 실학자들에 의해 통렬히 비판되기도 하였다.
예송 논쟁
형식적 명분론에 얽매인 갈등은 효종이 죽고 나서 곧바로 발아하기 시작했다. 효종이 급사했을 때 선왕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가 자의대비로 생존해 있었다. 그래서 법통상 아들인 효종의 죽음을 맞아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우찬성이었던 우암은 원칙론자답게 주자의 예법에 충실하여 "자의대비는 이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장자의 예에 따라 3년복을 입었으므로 둘째 아들인 효종의 죽음에 임해서는 기년(1년)복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왕위는 계승했지만 장자가 아닌 '체이부정'이므로 3년복은 부당하다고 부가하여 설명했다. 이에 대하여 맨 먼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사람이 윤휴였다. 우암보다 10년 연하였던 그는, 전일에 우암과 교류하며 지내다가 경전 주해문제로 대립하여 그즈음에 와서는 사이가 멀어진 상태였다. 윤휴는 유교 경전에 대하여 주자의 해석과는 다른 독자적인 접근을 모색하려 했기 때문에 당시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으나, 절대적인 주자 원칙론자인 우암과는 도저히 부합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우암의 원칙적인 종법주의에 반대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예법에 장자에 대하여 3년복을 입는 것은 조상의 종통을 승계하였기 때문인데 한 나라의 왕통을 이은 임금은 아무리 차자라고 하더라도 등극 후에는 적자로 보아야 하므로 3년복이 당연한 것이다. 또, 체이부정의 논리는 돌아가신 선왕의 왕통을 부정하고 그것이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궤변이 되고 만다."
우암은 주자의 원칙에 충실하여 임금이라 하더라도 '가례'의 일반적인 예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고, 윤휴의 논리는 왕권 계승의 정통성과 관계된 정치적 고려에서 출발한 현실적 사고의 결과였다. 사헌부 장령 허목도 왕권의 정통성 부정이라는 위험성을 지적하여 우암의 '체이부정' 논리를 공박하고 나왔고, 급기야 윤선도는 "우암이 선왕의 은혜를 입고도 장례 과정과 장지에까지 위신을 낮추어 해를 끼치는 것을 보면 불순한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까지 몰아붙였다. 처음에는 예론의 해석 차이에서 비롯된 단순한 복제시비였던 것이 어느덧 우암에 대한 인신 공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또한 이 과정에서 권력을 둘러싸고 우암이 속한 서인과 윤선도 등이 속한 남인 사이의 공방전으로 바뀌어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학문 논쟁이면서 내면적으로는 양대 세력 간에 권력 투쟁의 양상으로 변모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세력 구조상 우위에 있던 서인의 승리로 끝나 자비대비 복상은 기년복으로 결정되고, 윤선도는 모함을 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사실 우암은 그 후에도 효종의 기일만 되면 하사받은 초피옷을 안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몸부림치며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토록 계속했었기 때문에, 효종에게서 남다른 은혜를 받고도 왕의 죽음에 이르러 그 위신을 추락시키고 해를 입히려 한다는 윤선도의 공격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는 단지 그 누구라도 주자의 원칙에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우암 자신도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하여 현종 원년(1660년) 5월에 스스로 사직하고 회덕 땅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여러 직책으로 출사의 종용을 계속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지내면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나 이 동안도 현종으로부터 빈사의 대우를 받아 국사에 자문 역할을 했다. 또한 자신은 물러나 있었지만 조정의 주요 세력은 서인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들의 지주로서 자리 매김을 하고 있었다.
현종 9년(1668년)에는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나 곧바로 사임하였다가 계속되는 조정의 부름에 따라 66살이 되는 현종 14년(1673년0에 좌우정을 제수받고 관직에 돌아왔다. 그런데, 그 이듬해에 효종비 인선왕후가 죽자 다시 예송 논쟁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도 생존해 있던 자의대비의 복상이 문제가 되었다. 서인측에서는 효종을 차자로 인정한 전일의 예에 따라 9개월을 복상하자는 대공복을 주장하였고, 남인 족에서는 큰며느리로 인정하여 기년복을 내세웠다. 이때에 서인은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나서 1차 예송 때와 같이 강력한 단합을 통해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당시 현종의 왕비 명성황후는 대동법의 주창자 김육의 손녀였는데, 대동법 시행 과정에서 김육과 우암의 스승 김집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김집의 문도와 김육의 집안은 지속적으로 불화하여 왔었다. 김육의 후손들은 그 동안 우암의 권위에 차마 맞상대를 못하였지만, 이번에는 왕비가 자기 집안인 것을 기화로 세력이 강해지자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을 목적으로 남인과 결탁하여 우암측을 공격하고 나왔다. 그 선봉에 현종의 장인 김우명과 그의 조카 김석주가 나서서 남인들과 함께 협공을 하고 나오는 데다, 그 무렵 성인이 된 현종까지 자신의 부모를 적자로 대접하지 않은 서인의 태도에 극도의 반감을 나타냈다. 결국 우암도 양사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향리에 칩거하였고, 그 사이에 현종이 34살의 젊은 나이로 서거하고 14살의 어린 나이로 숙종이 등극하였다. 이때 완전히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우암을 끈질기게 탄핵하여 결국 덕원으로 유배시켰다가 다시 장기로 이배시켰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시비의 근원이 되는 그를 끝내 죽이려고 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게 된 남인은 서인의 치죄 과정에서 강경파인 청남과 온건파인 탁남으로 나뉘어져 대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효종과 현종에 걸쳐 왕의 사부로 예우를 받던 그를 함부로 죽일 수 없어 숙종은 그를 거제도로 다시 이배시켜 위리 안치의 명을 내렸다. 이 시절 그는 배소에서 저술에 몰두하여 '주자대전차의', '이정서 분류', '주자어류소분'등을 짓고 퇴계의 '경서질의'와 '기선록'을 증정하였다.
노,소론의 분당 과정
숙종이 즉위한 후에까지 권력을 계속 장악한 남인 정권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숙종 6년(1680년)에 소위 '삼복의 변'이 일어나 실권에서 모두 제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숙종 등극 초기에는 완전히 남인 세상이 되어 있어서 왕은 모후인 명성왕후의 사촌 동생 김석주를 통해 이를 일부나마 견제하고 있었다. 김석주는 서인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2차 예송 논쟁 때 남인과 결탁하여 우암측을 공격하였으나 그 결과 남인이 득세하게 되자 다시 우암 세력과 암암리에 손을 잡고 정권을 되찾을 궁리를 하였다. 숙종 6년 3월에 숙종이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의 조부에게 충정공의 시호를 내려서 그의 집에서 큰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도중에 큰비가 내리자 숙종은 이를 걱정하여 기름 먹인 어용 천막인 '용봉차일'을 내어주도록 분부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허적이 벌써 허락도 없이 가져간 사실을 알고 허적과 남인들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위세를 믿고 방자하게 왕실의 물건까지 무단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노하였다. 따라서 남인들의 전횡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왕의 의중이 남인에게서 돌아서는 상황에서 4월에 허적의 서자 허견이 숙종의 오촌 아저씨들인 복성곤,복창군,복평군 3형제를 부추겨서 역모를 꾀하였다는 고변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관련자 모두는 붙잡혀 처형되었고 허적, 윤휴 등 남인의 거두들도 유배당하였다가 결국에는 사사되었다.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니 이것이 '경신대출척'으로 숙종시대 환국 정치의 서막이 되었다. 이렇게 남인 정권을 몰아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인물들은 김석주와 어영대장 김익훈 등 왕의 근친 세력들로, 이때의 일은 남인의 득세에 불만을 갖게 된 숙종의 친위 쿠데타 성격이 강하다. 권력을 틀어 잡은 김익훈 등은 남인의 나머지 무리들도 철저히 색출해서 처벌하기 위하여 음험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같은 서인 내에서도 비난의 소리가 높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의 남인 축출 작업에 조지겸 등 강직한 소장파들이 엄중히 항의하여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는 김익훈 등을 탄핵하였다. 소위 임술 삼고변(1682년)이 발생하여 김익훈 등의 조작 정탐 정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우암 등 노장층이 김익훈 등을 비호하자 박세채 등 소장파들이 강력하게 반기를 들고 나왔다. 여기에다 조선 건국 300주년을 기념하여 태조의 위화도 회군의 의의를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 '소의명륜'이라는 시호를 내려 기리자는 우암의 주장에 대하여 소장파들이 일제히 반대하면서 서인 조정은 완연히 노,소로 구분되어 갈라지고 말았다. 우암은 평소에 신임하던 박서채와 제자인 윤증에게까지 공격을 당하자 사태가 이지경에 이른 것을 한탄하며 표연히 관직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버렸다. 이것은 귀양에서 풀려 관직에 다시 돌아온 지 3년만인 숙종 9년(1683년)의 일로 그의 나이 77살에 비로소 봉조하가 되어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것이다.
윤증과의 사제 분쟁
서인 내부에서 발생한 노장층과 소장층의 분쟁 과정에서 파생된 우암과 그 제자인 윤증과의 갈등은 우암이 살던 회덕과 윤증이 살던 이산의 첫 글자를 따서 '회니'분쟁이라고까지 일컬어질 정도로 유명하며, 양자는 결국 숙종 7년(1681년)에 이로 인해 절교를 하고 말았다. 양자의 분쟁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우암의 관계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윤선거는 병자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성균관 학생으로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청나라에서 군신관계를 맺자는 방자한 요구를 가지고 사신이 오자 '그 목을 베어 대의를 밝히라'는 상소를 올려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정작 호란이 발생하자 강화에서 죽음으로 항쟁한 친구들과는 달리 성을 탈출하여 연명을 했다. 그는 이것을 자책하여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했는데 서인인 우암과 유계는 물론 남인이었던 권시, 윤휴와도 두루 교류를 했다. 당시 윤휴는 주자의 해석에 동조하지 않고 독자적인 견지를 피력하여 주자를 철저히 존숭하던 우암과 격렬히 대립하고 있었다.
양자의 대립에서 윤선거는 윤휴의 재주를 아껴 그를 두둔하며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그러나 우암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여 통렬히 공박했는데, 그때 효종이 죽고 예송 논쟁이 터져 급기야 정치적 대립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1차 예송 논쟁 당시에 윤선거는 일개 처사가 국가의 대신을 함부로 공격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우암의 편을 들어 윤휴와 절교하게 되었다. 그 뒤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년)에 죽자 우암이 조문을 지어 추모하였는데, 윤휴도 제문을 지어 문상을 하였다는 말을 듣고 윤선거가 실상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윤휴와 절교한 척했다고 짐작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몇 해 뒤 윤선거의 아들이자 우암의 제자인 윤증이 선친의 연보와 박세채가 고인을 위해 지은 행장, 윤선거 생전의 글 등을 가지고 와서 비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전일의 의심스러운 생각 때문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제자의 부탁이라 하는 수 없이 비문을 짓기 위해 윤선거의 유품을 살펴보던 중에 윤휴를 두둔하는 내용의 글을 발견하고 매우 마음이 언짢았다. 그렇지만 기와에 부탁을 받은 것이라 비문을 짓기는 하면서도 탐탁지 않음 마음에서 비문에 지은 글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고 박서채의 행장에서 인용한 것일 뿐이라고 후기하여 두었다. 자기가 비문을 쓰기는 하였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을 은연중에 내비친 것이다. 이에 윤증은 여러 차례 비문의 정정을 요청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심지어 2차 예송 논쟁 때 실각되어 유배되었던 우암의 배소에까지 찾아가 간청하였지만 비문의 내용을 완전히 정정하지는 못했다. 그 후 경신대출척으로 조정에 돌아온 우암이 소장파들에게 공격을 받았을 때 윤증은 소론의 종주로 나서 우암을 맹공하는 데 앞장을 섰다. 이때 윤증이 우암에게 보냈던 맹렬한 비난의 글을 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제 몸 이기는 데 과감한 바를 굳센 것이라고 하거늘 선생님께서는 남 꾸짖는 데 맹렬한 것을 굳센 것으로 알며, 의리가 이욕을 이기는 것을 굳세다 하거늘 선생님은 권력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을 굳센 것으로 아시니 어찌 합당하다 하겠습니까? 또, 남을 꾸짖고 조롱하며 치켜세우고 깎아내리는 것이 입으로나 붓으로나 모질고 각박하여 남을 치면 반드시 이기고야 말고, 한 가지 일이나 말이라도 자신과 어긋나는 바가 있으면 그 것을 분통하게 여겨 평생의 정분까지 헌신짝처럼 버리시니, 은혜를 저버리고 정을 얇게 하는 것이 극에 달하였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선생님에 대해 비열한 자들이 그 위세를 두렵게 여기고 떠받드는 것이 예의에 지나치므로 완연히 부귀문정의 모습이지만 조금도 선비의 풍채를 찾을 수 없으니 어찌 그 그림자를 미루어 실상을 짐작하지 못하겠습니까?'
실로 실랄하고 맹렬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신공격적인 내용이었다. 이렇게 정국 운영 방법과 역사관의 차이, 그리고 개인적 감정까지 뒤섞여서 서인 세력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었고, 그 후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등장할 때까지 조선 정치의 한 형태로 고착되어 갔다.
거유의 최후
노,소론 분쟁에 책임을 느껴 사직하고 향리에 돌아온 우암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지만 기어코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다. 이른바 기사환국(1689년)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숙종은 계비 인현왕후 민씨에게서 여러 해 동안 후사를 얻지 못하던 차에 총애하던 숙원 장씨가 왕자를 낳자 서둘러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했다. 이때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들은 왕비의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그녀에게서 후사를 기다려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며 원자 책봉을 반대했다. 그러나 숙종은 서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자 균을 원자로 결정하고 숙원 장씨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이때 향리에 칩거하고 있던 우암은 '중국 송나라의 철종도 부왕의 후궁에게서 장성한 왕자가 여려 명 있었지만 열 살이 넘어서 태자에 봉해졌다'는 예를 들면서 분연히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은 "소위 원로라는 사람이 이미 결정된 국가 대사에 대하여 쓸데없는 상소질을 통해 정국을 어지럽게 만든다"고 분개하였고, 이 기회에 숙종의 환심을 사고 서인들을 몰아내려는 남인들이 우암을 비난하는 상소를 빗발치듯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제주도로 유배시켜 버렸다. 이어서 자신의 결정에 반대하는 서인들을 조정에서 축출하고 그 자리를 남인으로 교체한 다음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희빈 장씨를 정비로 삼았다. 왕세자 책봉 문제로 일거에 정권을 잡은 남인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암, 목창명 등이 나서서 우암을 처형하라는 강력한 주장을 전재하였다. 결국, 숙종 15년(1689년) 3월에 제주 북포에 귀양가 있던 우암은 재심문을 이유로 한성으로 압송되던 도중인 그 해 6월에 정읍에서 왕명으로 사사되고 말았다.
일세의 거유이자 정치가인 그의 나이 83살 때의 일이었다. 제주도의 배소에서도 짧은 기간이나마 '논어 맹자 혹문'과 '논어 맹자 문의 통고'를 편수하였던 그는 격렬한 정치가이면서도 자자학의 대가여서 훗날 '송자'라는 성인 칭호까지 받았다. 그가 죽은 지 5년 뒤에는 갑술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재집권하자 관작이 회복되고 '문정공'이라는 시호까지 내려졌다. 그는 율곡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사단칠정이 모두 이라는 일원론적 주기론을 발전시켰다. 그에게 있어서 주자는 모든 면에서 귀감이었지만 '주자어류' 중에서 '사단이발,칠정기발'이라는 구절은 그의 이론 전개에 장애가 되자 그 의미를 거듭 참구한 결과 '주자론동이고'에서 '사단이발'부분은 잘못 기록으로 단정하는 융통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심성론에 있어서도 '심은 곧 기'라고 보았으며 "음직이는 것이 심이요, 움직이게 하는 것은 성이다"라고 갈파하여 주기론자로서 자신의 태도를 확실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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