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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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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신비 - 폴 할펀
빛의 출현
1964년, 벨 연구소의 두 과학자인 펜지어스(Amo Penzias)와 윌슨(Robert Wilson)은 대폭발 이론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 놀라운 발견을 하였다. 우주 배경 복사의 발견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었다. 펜지어스와 월슨은 은하계로부터 오는 마이크로파를 찾기 위하여 뉴저지 주 홀름델에 있는 지름 20피트짜리 전파망원경을 사용하던 중, 이상한 종류의 계속적인 잡음에 의하여 방해를 받았다. 그들이 고치려고 무척 노력을 했음에도 이 잡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이런 잡음이 안테나에 집을 짓고 살고 있는 비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펜지어스는 비둘기의 배설물, 그가 표현한 대로 하면 '횐색의 절연 물질' 이 들어오는 신호를 간섭해 잡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였다. 연구팀은 접시 안테나 전체를 깨끗이 닦아 냈으나 잡음은 여전하였다. 그제서야 그들은 이 잡음이 우주의 깊은 곳에서 오는 진짜 신호를 잡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940년대 후반에 가모브(George Gamow), 알퍼(Ralph Alpher), 허먼(Robert Herman)은 일련의 논문에서 우주 배경 복사의 발견은 대폭발 가설의 중요한 증거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현재 우주의 온도를 절대온도 약 3도 정도로 추정하였다. 디케(Robert Dicke)는 1960년대에 같은 계산을 수행하였고, 펜지어스와 월슨이 관측한 잡음의 근원을 즉시 알아차렸다. 명백하게 그들은 우주의 탄생 이후에 식어 가는 복사를 발견한 것이다. 펜지어스와 월슨은 자신들의 업적으로 나중에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이러한 복사의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은-일부는 원래 상태인 것이 확인되었고, 어떤 것은 변형을 받았지만 - 극단적으로 편평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전파망원경을 돌리더라도 마이크로파는 같은 온도로 관측되었다. 이러한 일정성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걸친 계속된 실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천문학자들은 우주의 배경 복사가 하늘 전체에 걸쳐서 고르게 분포하는 것이 반가울지도 모른다. 이것은 개개의 은하나 우주의 특정 지역에 관련된 국부적인 현상이 아닌 우주의 진정한 효과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연구자들은 이런 에너지는 현세의 근원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대폭발 직후 재결합의 시대에 생긴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배경 복사의 온도는 지나치게 일정한 것으로 발견되었다. 우주의 구조 형성의 이론들은 배경 온도의 미세한 불균일성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변동은 보이지 않았다. 우주 배경 복사의 변동성에 대한 이러한 예측은 우주의 구조에는 근원이 있다고 믿고 있는 대다수의 과학자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은하 형성 모델에 따르면, 젤도비치의 톱-다운 접근 방식에서 피블스의 보텀-업 시나리오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보이는 구조의 씨앗은 초기 우주에 밀도가 불균일한 상태로 뿌려져 있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재결합의 시대의 우주는 밀도가 낮은 부분뿐만 아니라 밀도가 높은 부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두툼한 영역은 자신의 중력을 통하여 더 많은 물질을 끌어 모으면서 오늘날 우리가 보게 되는 은하, 은하단, 초은하단, 시트, 그리고 필라멘트로 성장하였다.
좀더 작은 덩어리들은 좀더 큰 덩어리로 계속하여 성장하였다. 반대로 좀더 밀도가 희박한 지역은 중력적으로 좀더 약하게 잡아당겨지게 되어 '허공'이라 불리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은하사이의 텅빈 공간이 되었다. 물리학자들은 오늘날 우리가보고 있는 여러 종류의 구조들이 형성되기 위해 재결합의 시대에 존재했던 밀도의 불균일성의 크기를 계산하였다. 그들은 초기 우주밀도의 약0.1%정도의 밀도변동이 있었다고 추정하였다. 달리 말하면 그러한 영역은 0.1% 정도 더 밀도가 높아야 하며, 다른 지역은 평균적인 값에 비하여 0.1% 정도 밀도가 희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천체물리학의 이론에 따르면, 재결합의 시대에 방출되는 복사의 온도의 변동은 그 기간 동안의 물질 밀도 분포의 변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천체물리학의 이론은 우주 배경 복사에 이어서 물질 분포의 산과 골짜기를 나타내는 온도의 변동을 요구하게 되었다.
1977년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와 UC버클리의 우주과학연구소의 천문학자인 스무트(George Smoot)와 그의 연구팀은 배경 복사 온도에 있어서의 변동의 첫번째 증거를 내놓았다. 이런 변동은 그러나, 오랫동안 기대되었던 원시적인 '물결' 모양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쌍극자 비균일성 (dipole anisotropy)' 이라고 불리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쌍극자 비균일성은, 우리 은하가 배경 복사의 바다를 항해해 나가는 운동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마치 배가 바다를 항해해 나갈때 다가오는 물결에 의하여 흔들리듯이, 우리 은하도 우주 배경 복사 속의 파동에 의하여 압력을 받게 된다. 도플러 이동 때문에 전면부와 후면부의 우주 배경 복사는 (우리 은하에 대하여) 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우리 은하의 전면부는 좀더 뜨거운 것으로, 후면부는 좀더 차가운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미묘한 온도의 변화는 NASA의 U-2 제트기에 탑재되어 올려진 버클리 연구팀의 민감한 전파탐지기에 의하여 잡혔다.
그것들의 쌍극자 비균일성 감지력을 최대화하기 위하여 이들 감지기는 반대 방향으로 맞춰졌다. 다행히도 그들이 기록한 신호는 도플러 효과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예측한 값과 거의 일치하게 나왔다. 스무트가 쌍극자 변동량을 발견한 이후에, 그는 초기 우주에서 물려 받은 진짜 변동량을 찾을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그는 미분마이크로파감지기(DMR, differential microwave radiometer)라고 불리는 특별한 고정밀도의 감지기를 고안하였다. 이 DMR은 그런 종류의 감지기로는 유일한 것인데, 신호점의 온도를 기록하는 대신에, 한 쌍의 안테나를 이용하여 하늘의 다른 두 지역의 온도의 차이를 측정한다. 이것은 다른 감지기가 관측할 수 있는 것보다 좀더 정밀한 결과를 기록할 수 있다. 그 기기는 온도의 차이를 100만분의 1까지 측정할 수 있는 것이다. DMR은 실제로 3개의 전파탐지기를 포함하는데, 각각의 전파탐지기는 3개의 다른 전파 영역을 탐색한다. 이런 주파수가 선택된 것은 우주 배경 복사가 다른 신호에 비하여 이 영역에서 강한 스펙트럼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이 주파수대에서 우주 배경 복사는 은하의 마이크로파 복사보다 수천 배나 강력하다. 스무트가 이 탐지기를 완성했을 때,그는 이것을 우주로 올려 보낼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챌린저호 사고 때문에 NASA의 우주 계획이 차질을 빚으면서 출항 허가를 얻는 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1989년 말에 스무트와 그의 동료들은 NASA로부터 그들의 탐사를 허가받았다. DMR은 동년 11월에 COBE(Cosmic Background Explorer)라고 불리는 위성에 실려 발사되었다 COBE는지구 대기의 방해를 넘어서는 높은 고도의 궤도에 올라갔으나, 지구의 자기권에 존재하는 하전 입자들의 방해를 받았다. 1992년 스무트는 오랫동안 기다려 온 우주의 배경 복사에 남아 있는 고대 유적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1억 광년 이상에 걸친 뜨겁고 차가운 영역이 그것이다. 이러한 영역의 온도는 평균온도인 2.735도에서 10만분의 1 정도의 변동을 보였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변동은 대략 100만 도에 대하여 6도 정도에 해당된다. 천문학자들은 즉각 스무트의 결과를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로 인정하였다. 그가 발견한 복사의 평균 온도는 우주 배경 복사의 이론적인 예측값에 소수점 이하 6자리까지 정확하게 일치한다. 더 나아가 그가 발견한 변동량은 구조 형성 모델에 의하여 정확하게 이론화된 값과도 잘 일치한다. 마지막으로,그의 결과는 우주에 암흑물질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확고한 증거를 제시하기도 했다 스무트와 그의 동료들이 발견한 모든 것은 20세기 말 우주론의 가장 위대한 빛나는 승리 중의 하나이다.
위로, 위로, 그리고 멀리
COBE 위성의 우주 관측이 단지 우주 배경 복사의 성공적인 관측이라는 데 그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인공위성만큼 높이 을라가지는 못한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기구는 관측 도구의 운반 수단으로 무척 대중적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그 이유는 기구가 인공위성 실험에 비하여 훨씬 값이 싸게 들고 계획하기 쉽다는 것이다. 1989년 기구에 올려진 관측 기기들이 뉴멕시코 상공의 하늘을 12시간 동안 관측하였는데, 이때 자세한 우주 배경 복사의 기록 들을 얻었다 MIT와 프런스턴 대학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은 약4년 동안 이 관측의 기록들을 분석하여 마침내 1993년 2월에 그들의 결과를 발표하였다. 대다수의 기대대로 그들의 자료는 COBE의 온도 자료와 일치하였다. 다른 기구 관측 계획은 COBE가 밝혀낸 것보다 더 자세한 우주 배경 복사의 구조를 찾음으로써 COBE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시도로 수행되었다. 좀더 자세한 관측 자료는 우리에게 재결합의 시대 - 즉 우주의 복사가 자유롭게 나오고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하는 시기 - 라고 불리는 우주의 한 시기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려 주였다. 이러한 기구 관측 계획에는 MAX(밀리미터 불균일성 탐사 계획 Millimeter Anisotropy Experiment)와 MSAM (중규모 불균일성 탐사 계획 : Medium-Scale AnisotropyMeasurement)이라고 불리는 계획들이 포함되는데, 이 기구들은 각각 1990년대 초반에 우주로 띄워졌다.
초기 우주의 복사 형태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토대로, 천문학자들은 구조 형성 이론을 개정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어떤 학자들은 원시 형태의 씨앗에서 은하들이 어떻게 발달하는가에 관한 개선된 모델을 연구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시간적으로 거꾸로 거슬러올라가 이러한 덩어리들 자체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미세한 불균일성들이 어떤 식으로 적당한 크기와 개수에서 발생하여 우주의 구조의 원형을 제공하게 되었는가를 깊이 생각하였다. 현재 원래 밀도의 불균일성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선도적인 이론들이 있다. 이런 훌륭한 이론 중의 하나가 인플레이션 우주론과 관련되어 있다. 이 시나리오에 따르면, 우주는 초창기에 극단적으로 빠른 성장을 겪어 왔다는 것이다. 이런 거대한 성장의 파도가 지난 후에 우주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느린 팽창의 형태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은 은하의 씨앗들이 형성되었을 방법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인플레이션 방식을 따라 이러한 불균일성들은 미미한 양자적인 불균일성으로 우주의 발생 시기에 형성되었다. [양자적인 불균일성은 양자 역학서 예측하는 미세한 에너지의 장(field)으로 어떠한 좁은 공간에서도 반드시 동시에 일어난다.] 다음으로 이러한 불균일성은 우주의 갑작스런 팽창 시기에 그 크기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그 불균일성은 필연적으로 우주의 구조의 씨앗이 될 만큼 크게 성장하였다.
인플레이션 우주론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은 '조직의 이론(theory of textures)'이다. 조직이란 우주의 구조에 있어서 가상적인 '부족분'이며, 상전이의 시대라고 불리는 기간에 형성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상전이(온도의 변화에 따른 갑작스런 형태의 변화)는 자연계에 흔히 있는 일이다. 상온에서 액체인 물은 온도가 내려가면 고체인 얼음으로 변화 한다. 우주는 식어 가는 과정에서 그와 유사한 과정을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주가 식어 가면서, 우주에 분포하는 에너지 장은 변화하게 된다. 아마도 급격하게 형성되는 얼음에 균열이 생기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갈라진 틈 비슷한 조직은 초기 우주의 역장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과정에서 발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이 모델에 의하면 우주의 구조는 공간의 틈새 주변을 따라서 성장하게 되었다. 최근에 제시된 우주의 구조 형성 이론에는 두 가지 종류만이 있다. 우주 배경 복사의 형태가 좀더 자세하게 알려짐에 따라서 과학자들은 이들 두 가지 접근 방식을 좀더 잘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관측 자료가 무척 빠르게 쏟아지기 때문에, 인간은 우주의 구조가 형성된 방법에 대하여 곧 이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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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마술을 부리는 목소리
1921 년, 전세계의 음악팬들은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 이상 아름다운 목소리는 다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인 엔리코 카루소가 48세의 한창 나이에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가수로서 인기 절정에 있을 때 과로의 연속으로 6개월간 죽음과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결국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마치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한 그 아름다운 목소리도 처음에는 약하고 가느다랗다 하여 음악교사로부터 핀잔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너는 노래는 안 되겠어. 전혀 소리가 나지 않으니... 마치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군."
그는 15세 때 어머니와 사별했는데, 놀랍게도 어머니는 21 명의 자녀를 낳아 그 중 18 명은 죽고 겨우 셋만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가난한 농부의 아내였지만 엔리코만은 천재의 후광을 이어받았다고 믿고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가수로 만들기 위해서 신발도 사 신지 않고 맨발로 지내셨죠."
눈물을 흘리며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카루소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노래 공부를 했습니다. 그 무렵에 그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며 저녁을 얻어 먹고 사람들에게 불려가서 연인의 집 창문 밖에서 세레나데를 불러 주기도 했는데, 음치의 사나이가 달빛 아래서 '사랑의 괴로움'을 연기해 보이면 카루소가 문 안에 숨어 들어 아름다운 목소리를 뽑아 감미로운 멜로디로 여인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는 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주역인 테너 가수가 갑자기 병이나 카루소가 그 역을 맡아야 했는데 불행히도 그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보내 뒤져 보니 어떤 술집에서 그는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헐레벌떡 극장으로 달려갔지만 술에 취해 눈이 빙빙 돌았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카루소가 무대에 나서자 관중들은 화가 났고 극장 안에는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이윽고 막이 내리고 그는 실직됐습니다. 그는 자살을 결심한 채 마지막 남은 1리라로 술 한 병을 사 가지고 집으로 가서 어떻게 죽을까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극장의 심부름꾼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어이, 카루소! 빨리 와. 지금 극장에선 카루소를 내놓으라고 야단이란 말이야!"
카루소가 죽었을 때, 그 재산은 백만장자 몇 사람 몫에 해당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그는 어렸을 때의 가난을 생각하면서 죽는 날까지 금전 지출을 수첩에 기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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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두번째 이야기 - 천금보다 나은 한 마디 말
먼 옛날의 일이다. 만물이 풍요로워 곡물과 과일이 넘쳐나고 온갖 재보가 가득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나라가 있었다. 상업 역시 번성하여 부족한 물건이라고는 없었지만 국왕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날 그는 대신에게 말했다.
"유능한 사신을 뽑아 외국에 보내 우리나라에 없는 물건을 사오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이렇게 해서 사신 한 사람이 외국으로 떠났다. 외국에 도착한 사신은 시장에 나가보았으나 살 만한 물건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모두 자기 나라에도 있는 물건들이었다. 실망한 사신은 자기 나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다가 시장 구석에 한 노인이 빈 손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상하게 여긴 사신이 그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물건도 팔지 않으면서, 빈 손으로 이곳에 앉아 무얼 하고 있는 겁니까?"
노인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장사를 하고 있는 중이오."
더욱 이상한 생각이 든 사신은 노인의 주위를 자세히 둘러보았으나 팔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무엇으로 장사를 하는 겁니까?"
노인이 대답했다.
"나는 이곳에서 지혜를 팔고 있다네."
"노인장이 팔고 있다는 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또 값은 얼마입니까?"
노인은 사신을 한번 훑어보고선 태연하게 말했다.
"나의 지혜는 오백 냥이나 한다오. 먼저 돈을 내면 지혜를 알려주겠네."
사신은 지혜를 팔다니 참 희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나라 시장에서는 본 일이 없으므로 사 가지고 돌아가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한 사신은 오백 냥을 냈다. 곧 그 노인은 지혜를 알려주었다. 지혜의 내용은 바로 다음과 같았다.
"일을 당하면 여러 번 생각하고, 되도록 화를 내지 말라. 오늘 비록 쓰지 않는다고 해도 유용할 때가 있으리."
사신은 오백 냥을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쨌든 거래는 이루어진 것이라 그 말을 깊이 새기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본국으로 돌아온 사신은 자기 집에 들렀다. 그때는 한밤중이라 모든 식구들이 잠들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달빛을 빌어 얼핏보니 아내의 침실 앞에 신발이 네 짝 놓여 있었다. 사신은 자기가 없는 틈을 타서 아내가 간통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사실 아내는 간통을 한 게 아니라 그날 몸이 아파 어머니가 곁에서 간호를 해 주다가 함께 잠든 것이었다. 침상 앞의 신발은 바로 어머니의 것이었다. 이 사정을 알 리 없는 사신은 분기탱천했으나 문득 외국에서 만난 노인이 일러준 지혜의 말이 생각났다. 그래서 그 말을 되뇌이며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중얼거렸다.
"내 아들이 돌아온 게 아닐까?"
그제서야 사신은 자기 아내와 어머니가 함께 잠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방 밖으로 뛰어나가 펄펄 뛰며 외쳤다.
"정말 싸다! 정말 싸구나!"
의아하게 생각한 어머니가 물었다.
"외국에 무언가 사러 간다더니, 싸다고 하는 말은 또 무슨 말이냐?"
사신은 다시 방으로 돌아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뻐하며 말했다.
"내 아내와 어머니는 만 냥을 준다 해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데, 단돈 오백 냥 어치 지혜의 말로 두 분을 지키게 되었으니 이 어찌 싼 게 아니란 말입니까?"
<천존설아육왕비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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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인습의 굴레 속에서 자아를 구현한 여류시인 - 허난설헌(1563-1589, 27살, 병사).
허난설헌은 조서 규방 문학의 새 지평을 연 대표적 인물이다 그녀는 평생을 집안의 틀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던 조선 여인들의 한을 시로써 표현하여 생명 있는 문학의 진수를 선보인 여류 문인이다. 그 시절에 여자가 학문이나 시를 배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하물며 두터운 남존여비 사고의 각질을 뚫고 두각을 나타낸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설사 재능이 있어 작품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기는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재능을 알고 숨막히는 인습의 굴레 속에서도 감연히 붓을 들어 올올이 아름다운 꽃 시를 수놓았으며, 그녀의 재능을 존경하고 아까워하여 누이의 작품을 모아서 세상에 소개한 동생이 있었기에 작가의 감정이 소롯이 담겨 있는 시들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시들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이 간직하고 있던 작품들은 모두 스스로 불태워 버렸으며, 다른 곳에 남겨진 것도 없애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녀는 타인에게 보이기 위해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수단으로 붓을 잡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은 작가 자신의 성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은 다른 규방 작품들과 좋은 대비가 된다. 그녀 이외에 조선의 다른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은 고달픈 일상사의 감정 표출이 억제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부종사', '여필종부'로 대변되는 당시의 인습과 자신의 감정표현까지 억제할 것을 강요당하는 현실에 항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유탕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개방적이고 다정 다감한 집안에서 자라난 그녀는 숨막히는 시집살이에 질식되어갔고 상처받기 쉬운 여린 심성 때문에 작은 아픔도 서럽기만 하였다. 그래서 애초의 밝고 맑았던 심성이 차츰 우울과 번민으로 어두워져가면서 하루하루의 지친 삶이 지루하게만 느껴졌는지 그녀는 가장 무성하고 아름다워야 할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이었다.
뛰어난 예술적 재능
허난설헌은 조선 13대 왕인 명종 18년(1563년)에 강릉 초당리에서 초당 허엽과 김씨 부인의 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양친 허씨의 명문가 출신이며 부제학, 경상도 관찰사, 동지중추 부사 등 내외의 요직을 지냈던 인물로 첫 번째 무인 한씨가 1남(허성) 2녀를 두고 죽자, 두 번째 부인 김씨를 들여 2남(허봉, 허균) 1녀(난설헌)을 얻었다. 전처 소생 자식들은 대체로 아버지의 유학자다운 면모를 많이 물려받았는데, 후처 소생들은 어머니 김씨의 예민한 감수성을 닮아서 모두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을 보였다. 난설헌의 본명은 초희였고 자는 경번, 호는 난설헌이었는데 그녀의 자인 경번에 대해 훗날 세간에 억측이 생기기도 하였다. 당나라 시인 번천 두목지를 경모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이름으로 번연히 남편이 있는 사대부가의 여인으로 합당하지 않은 처신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5살 때 아버지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되어서 그때부터 한성의 건천동에서 살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동생 균과 함께 글공부를 같이 배웠는데 둘째 오빠 허봉이 초년의 글 선생이었고, 그 후 서애 류성룡과 서얼 출신 시인 손곡 이달에게서 학문과 시를 배웠다.
그녀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에게서 수학하여 화담의 도교적인 분위기를 체득하였던지라 집안에 도교 관련 서적들을 많이 소장했었다. 그녀는 자라면서 이런 책들을 통해 신선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길렀는데, 7살때에 신선 세계의 광한전에서 백옥루라는 누각을 새로 짓고 있다는 상상을 바탕으로 그 건물의 상량문을 자신이 직접 지어 보기도 했다. 이 시가 바로 명나라의 문인 조문기가 "마치 신선이 되어 백옥루에 올라 있는 느낌이 든다"고까지 극찬한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다. 그녀의 집안은 일반적인 사대부가와는 달리 상당히 개방적이고 진보적이어서 남매간의 우애도 유별나게 좋았으며, 자랄 때 그녀는 남자 형제들과 큰 차별 없이 같이 공부하면서 스스럼없이 어울려 지냈다. 그러한 집안 경향은 그 후 오빠 허봉과 동생 허균의 행적을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점은 엄격한 사대부가의 풍속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던 배다른 큰오빠 허성이나 두 언니들과 좋은 대비가 되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시인으로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데다 그녀의 예민한 감수성이 시 선생 손곡의 낭만적인 시풍에 영향을 받아 성품마저도 다소곳함보다는 자유 분방하였다.
그녀의 시 선생이었던 손곡은 3당시인의 한사람으로 손꼽히는데 낙천적이고 낭만적인 백락천의 시풍을 많이 이어받은 사람이었다. 백락천은 당나라 시인으로 고통받으며 어렵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편에서 시를 썼던 사회파 시인으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그의 경향이 손곡을 통해서 난설헌에게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고달픈 환경과 절망스러운 생활
난설헌은 17살 때 둘째 오빠 허봉이 중매를 서서 안동 김씨 문중으로 시집을 갔다. 신랑 김성립은 그녀의 오빠 허봉과 호당에서 사가 독서하던 동료인 김첨의 아들로서 그녀보다 한 살 위였다. 그녀의 시집은 대대로 명문가로서 시할아버지 김홍도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홍문관 전한을 역임하면서 명종대에 윤원형을 탄핵하다가 죽었으나 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시증조부 김로는 첨중추 부사를 지냈으며, 시고조부 김희수도 대사헌까지 역임한 바 있었다. 그야말로 더 이상 고를 수 없는 최고의 집안으로 시집간 것이지만 그녀의 불행한 삶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시집의 분위기는 친정과는 완전히 다르게 엄격한 사대부가의 표본과 같은 모습이었다. 시어머니인 송씨 부인도 이조판서를 지낸 송기수의 딸로서 그 아버지의 엄격함을 그대로 배우고 자란 여인이었다. 완전히 바뀐 생활 환경에서 예민한 감성을 가진 난설헌은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녀는 자라면서 실과 바늘보다 먹과 뭇을 더 가까이 하였기 때문에 가정 살림에 익숙하지도 못하였다. 자연히 반듯한 시어머니와 뜻이 맞지 않았고, 남편과의 사이도 썩 좋지 못했다.
가정에서 점점 소외되어 간 그녀는 더욱 시문과 독서에 몰두하여 텅빈 가슴을 메우려 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시댁 식구들과의 관계는 더욱 소원해져 갔다. 게다가 가녀린 심성을 가진 새색시의 한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 때문에도 갈수록 쌓여만 갔다. 그녀가 시집 온 이듬해에 아버지가 상주의 객관에서 돌연히 세상을 떠났고, 그 3년 후에는 그녀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던 둘째오빠 하곡 허봉이 동인의 선두에 서서 율곡을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믿고 의지하던 두 기둥이 모두 그녀의 곁을 떠나 버린 것이다. 더구나 슬하의 두 자식이 모두 어려서 죽자 그녀의 삶은 삭막함과 애절함에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며, 그녀가 죽기 한 해 전에는 둘째 오빠 하곡이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관직에 뜻을 잃고 세상을 유랑하다가 금강산에서 병사하여 삶에 대한 의지의 끈이 더욱 희미해졌다.
친정의 배다른 큰오빠 악록 허성은 근엄하여 심중을 하소연하기도 어려웠고, 동생 교산 허균은 아직 과거에도 합격하지 못한 어린 소년일 뿐이었다. 천지간에 어디 하나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남겨진 외톨이처럼 느껴진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몽유 광상산'이라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27살 되던 해(1589년) 어느 날 몸을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단장한 후에 집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그동안 자신이 시를 짓고 책을 읽던 초당에서 홀연히 숨을 거두었다.
"올해는 내 나이 세 번째 아홉수에 해당하는 해인데 마침 오늘 연꽃들이 서리를 맞아 붉게 변했으므로 미리 말했던 것처럼 바로 내가 죽을 날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지은 시들을 모두 불태워 나처럼 불행한 여인이 다시는 조선 땅에 태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바란다."
사후에 다시 태어난 여인
2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규방 여인의 존재와 그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특이하게도 명나라에서 먼저 그녀의 작품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널리 애송하게 된 후의 일이다. 중국인들 중에서 제일 먼저 그녀의 시를 접한 인물은 정유재란 당시에 명의원군을 따라 조선에 온 오명제라는 시인이었다. 그는 한때 허균의 집에 머물렀는데 허균으로부터 난설헌의 시 200여수를 전해 받고 중국으로 돌아가서는 '조선시선'이라는 시집에서 이를 소개했다. 그 다음으로 그녀의 시를 알게 된 중국인들은 선조 39년(1606년)에 황장손의 탄생을 알리는 사신으로 온 주지번과 양유년이었다. 이때 그녀의 동생 허균이 원접사 유근의 종사관이 되어 이들을 영접하며 친교를 맺는 과정에서 그들이 시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누이의 유고를 보여주게 되었다. 난설헌의 시들을 살펴본 두 사람이 경탄을 금하지못하자 허균은 그들에게서 찬사의 서문을 받아두고 자신이 만들었던 누이의 문집 필사본을 전해주었다.
그 후 광해군 원년(1609년)에 책봉조서를 가지고 온 명나라 사신 유용과 서명도 허균에게 난설헌의 문집을 얻고자 요청할 정도로 중국에서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그녀의 동생 허균이 광해군 10년(1618년)에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되자 한동안 매장되었다가 숙종 18년(1692년)에 동래에서 재간행된 후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숙종 37년(1711년)에는 일본에도 이 시집이 전해져서 분다이야 지로베등에 의해 간행되어 널리 애송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그녀의 시가 애송되기 전에 조선에서 완전히 사장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생 허균이 그녀가 죽은 다음해에 '난설헌고'라는 문집을 꾸며서 스승인 류성룡의 발문을 붙인 다음 필사본으로 몇몇이들에게 전해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그녀의 시가 허균이 자작하여 놓고 죽은 누이가 지은 것처럼 세상을 속였다는 의심을 받기도 하였지만, 그 당시 유명한 문인이었던 남용익이 그의 저서'호곡시화'에서 이 문제를 명쾌하게 해명해 주었다.
"하곡의 시는 아름답게 빼어나고 고법을 알아 동생 교산의 그것보다 훨씬 격이 높았다. 그런데 난설헌의 시는 격조가 하곡보다 높기 때문에 교산이 미치지 못한다."
허씨 가문 삼남매의 시를 짓는 능력에 대해 평을 한 것인데, 시에 있어서는 셋 중에 가장 실력이 뒤쳐지는 허균이 제일 뛰어난 난설헌의 시를 꾸며서 지어낼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 난설헌의 시가 왜 중국에서 그토록 칭찬과 인기가 높았는지를 알아보자.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악부라는 시의 한 형태가 있어서 그들은 옛악부 속의 시들을 변형하여 자기만의 새로운 시를 짓는 것을 즐겨 했었다. 그런데 손곡을 통해서 당나라의 시 경향에 많은 영향을 받은 난설헌도 악부의 소재들을 재각색하여 많은 시를 지었다. 즉 난설헌의 시에는 중국 시인들의 시구와 시상들이 반영된 작품이 많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친근감을 샀던 것이다.
허난설헌의 시 세계
현재 그녀의 시는 숙종 18년(1692년)에 동래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난설헌집'에 수록된 242수가 전해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시 속에서 현실에 대한 절망스러움을 '그리움'으로 승화시켜 표현했으며, 그 질곡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대상으로 '신선 세계'를 택하여 정신적 탈출을 시도했다. 그녀의 숨막힐 것 같은 자신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자 그것을 스스로 순간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부질없는 찰나의 고통에서 탈피하는 도피처로서 신선 셰계를 동경하여 자신을 현세의 사람이기보다는 선계의 존재로 감정이입을 했던 것이다. '유선사'라는 제목의 87수나 '동선요'등 신선 셰계와 관련된 100여 수는 모두 현실의 고통 때문에 환상의 세계에 절실하게 빠져들었던 그녀의 모습을 대변하는 내용들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언한 '몽유 광상산'에서도 그녀는 자신을 신선 셰계와 인연이 있는 존재로 묘사하였던 것만을 보아도 그녀의 정신세계가 얼마나 선계를 동경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는 어릴 적에 많이 보았던 도교 관련 책들의 영향도 컸던 듯하다.
또 하나 그녀의 시의 큰 특징은 악부체 시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선유사'를 비롯하여 밝고 화려한 분위기 속에서 그려진 20여 편의 '궁사'들을 포함한 170여 수가 악부체 형태로 지어졌다. 악부체의 특징은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시의 시상이나 구절 등을 빌려와서 자신만의 새로운 시로 재구성해 내는 형태의 시작방법인데, 대체로 제목이 요, 사, 언, 곡, 악, 행, 음 등으로 끝나며 중국적 소재가 많이 인용되었다. 또한 그녀의 시는 악부체 경향과 함께 시어가 풍요롭고 화려한 것은 물론 현란한 감정 또한 전편에 풍성하게 흐르는, 당의 시풍이 두드러진 것이 특색이다. 이것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3당 시인으로 일컬어지던 그녀의 스승 손곡 이달의 영향 때문이었음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감정과 현실을 숨김 없이 표현해냈다는 점에서 더욱 그 가치가 인정된다. 그녀의 작품을 접해보면 거기에서 배어나오는 그녀의 현실을 느낄 수 있으며, 그로 인해 그녀의 지나온 삶을 오늘날에도 마주 앉아 대화하듯이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실제 작품 감상
그녀의 시를 내용이나 소재 면에서 대별해 보면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행복하고 꿈 많은 시절을 노래한 것이고, 둘째는 불행과 절망 가운데 그 한과 아픔을 새겨낸 것이며, 셋째로는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웃에 대한 연민을 담아낸 것과, 넷째로는 사회에 대한 원망과 걱정을 토로한 것 등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녀의 삶과 죽음을 조명해 보는 의미에서 행복과 불행을 다룬 작품 몇 편만 감상해 보자.
인가여반 경추천, 결대반건 학반선, 풍송채승 천상거, 패성시락 녹양연.
'이웃집 여자 친구와 그네뛰기 경주할 적에 수건으로 허리춤을 질끈 동여매고 신선인 양 반쯤 배운 모습이 바람을 일으키며 오색 그넷줄을 타고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는데 우거진 버드나무 위로 패물 소리만 흩날리는구나'
그야말로 세속적인 근심이 하나도 뭍어나지 않는 꿈 많던 소녀 시절의 모습을 밝고 가벼운 분위기 속에 그려내고 있다. 오색 새끼로 꾸며진 그네를 타고 창공을 차고 오르는 광경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 듯하다.
호리월초명, 채연중야귀, 경뇨막근안, 공경원앙비.
'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쳐드니 연 캐던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아오는데, 저 배야 기슭으로 들지 말아라. 단잠 든 원앙이 놀라 날아가겠다.'
이 시는 신혼의 단꿈을 노래한 것으로 행복이 영원히 계속되기를 기원하는 여인의 바람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한 시간도 잠시뿐이었고 그녀에게는 시집살이의 고통과 절망스러운 나날들이 닥쳐왔다. 그녀는 부푼 낭만과 정열을 뒤로한 채 수심과 고뇌를 안고 생활해야 했고 그것이 다감한 그녀의 가슴에 오롯이 상처로 남아서 한으로 쌓여갔다. 이러한 불행한 기시에 썼던 작품들에는 그녀의 심정이 그대로 배어 나온다.
영영창하란, 지엽하분방, 서풍일피불, 영락비추상, 수색종조췌, 청향종불사, 감불상아심, 체루첨의몌.
'창 아래 피어난 아름다운 난은 가녀린 줄기 같은 이파리가 그리도 예쁘기만 하였는데, 가을 바람 소슬함에 그 잎마저 애처롭게 흔들리더니 시들어 떨어지며 찬 서리를 슬퍼해야 하는구나. 빼어난 그 자태가 시들어 떨어진다 해도 맑은 향기는 끝내 다하지 않겠지만 초라해진 모습에 마음이 상하여 흐르는 눈물로 소매를 적시는구나'
난 속에 자신을 투영시켜서 서리 맞는 난이 영락하듯이 아름다운 모습에서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스스로 아무리 힘들어도 맑은 향기만은 잃지 않겠다는 애처로운 다짐을 하고 있다. 그녀의 불행은 시집살이의 어려움과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어린 자식 둘을 강보에서 잃어버리고 그 애끓는 모정을 가눌 길 없어 지은 '곡자'라는 작품에는 그녀의 가슴에 일었던 비통이 절절이 묻어나온다.
거년상애녀 금년상애자, 애애광릉토 쌍분상대기, 소소백양품 귀화명송추, 지전초여혼 현주전여구, 응지제형혼 야야상추유, 종유복중해 안기기장성, 낭금황대사 혈읍비탄성.
'지난 해에 잃은 딸과 올해에 잃은 아들을, 울며 울며 묻던 광릉 땅에 두 무덤으로 마주섰구나, 백양 나무에 소슬바람 불고 소나무 숲에는 귀신불이 밝을 때, 지전으로 너희 혼을 불러놓고 무덤 위에 술 부을 뿐이지만, 너희 형제 혼은 서로 알아보고 밤이 되면 어울려 놀겠지. 뱃속에 새 생명이 생긴다 한들 다시 낳아서 잘 자랄 수 있을까. 허무한 황대사만 읊조리고 슬픈 울음을 삼키며 피눈물만 흘릴 뿐이구나.'
어린 자식들을 앞서 보내고 그녀는 더욱 자신을 잃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참척의 고통은 그녀에게 살고 싶은 의욕을 모두 빼앗아 가버려서 사슬 같고 절망스러운 삶을 어서 빨리 마감하고 싶은 심정만이 가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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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40. 전체
<자신을 보되 전체를 보라. 마음은 가위와 같은 것. 자르고 가른다. 그러나 사랑은 바늘과 같아서 하나되게 하느니, 가슴을 사랑 쪽으로 열라. 그리하면 그대 전체가 되리니>
왕이 큰 수피 신비가를 찾았다. 왕은 수피에게 하나의 선물을 가졌왔는데. 황금에 보석들이 박힌 대단히 아름답고 값진 가위였다. 왕은 그걸 선물로 주었다. 수피는 선물을 받고 살펴보고는 돌로 왕에게 되돌려 주면서 말하기를,
<페하, 참으로 고마우신 선물입니다만 그리고 대단히 아름다운 선물입니다만 제겐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군요. 차라리 제게 바늘 하나 주시는 것이 나을 것이옵니다. 제겐 가위가 오무지 쓸 데가 없지오. 바늘이라면 몰라도요>
왕이 말하기를,
<알 수 없구려. 바늘이 필요하다면 가위도 역시 필요할 터인데>
수피가 말하기를,
<가위란 자르는 데 쓰이는 것이니 제겐 필요치 않지요. 그러나 바늘은 하나되게 하므로 제겐 꼭 필요하지요. 제 가르침이 꼭 바늘과 같은 것이지요. 사람이든 사물이든 하나되게 하는 것. 그건 사랑에 있지요. 그러므로 제게 필요한 건 바늘이지요. 바늘 하나면 족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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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주머니 속의 송곳은 드러나기 마련이다 - 평원군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선생은 3년 동안 있었는데도 좌우 사람들이 칭송하는 일이 없었으며, 저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평원군은 조나라의 여러 공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조승이다. 그는 공자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여, 그의 집으로 많은 빈객들이 몰려들었다. 평원군은 조나라의 혜문왕과 효성왕 때에 재상을 지냈다. 그는 세 번씩이나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평원군의 집 누각에서 바라보면, 그 아래 민가들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어느 날 평원군의 애첩이 누각에 올라가 안마당이 잘 보이는 민가를 내려보다가 깔깔대고 웃었다. 그 민가에는 절름발이가 살고 있었는데, 그가 절뚝거리며 우물물을 긷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웃음소리에 문득 누각을 올려다 보던 절름발이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의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를 보고 웃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날 절름발이는 평원군을 찾아갔다.
"승상께서는 선비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천리길을 멀다 하지 않고 찾아오는 것은, 승상께서 선비를 소중히 여기고 애첩을 천하게 여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본래가 절름발이입니다. 그것은 제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승상의 애첩은 제가 다리 저는 것을 누각에서 내려다보고 큰소리로 웃었습니다."
"그것은 크게 잘못한 일이로군요. 내가 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평원군은 절름발이를 위로하였다.
"승상께서는 저와 약속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 여자의 목을 베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겠소."
절름발이의 말에 평원군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이때 평원군은 절름발이의 요구가 너무 지나치다 싶었으나, 농담으로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작자 좀 보게. 한 번 웃었다는 이유로 나의 애첩을 죽이려고 하네?' 평원군은 애첩에게 절름발이의 이야기를 전한 후 앞으로 조심하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절름발이의 이야기는 평원군의 식객들 사이에 퍼져 나갔고, 1년이 지나자 반수 이상의 선비들이 떠나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평원군은 남아 있는 선비들에게 물었다.
"내가 빈객들에게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왜들 자꾸 떠나는 거요?"
마침 보따리를 싸던 선비 하나가 말하였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승상께서는 1년 전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둘째, 승상께서 선비보다 계집을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평원군은 그때서야 1년 전 절름발이와의 약속을 기억하였다. 그는 곧 애첩의 목을 벤 후 절름발이에게 정식으로 사과를 하였다. 그 뒤부터 다시 선비들은 평원군의 집을 찾아들게 되었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였을 때였다.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을 시켜 초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려고 하였다. 평원군은 초나라로 떠날 때 식객과 문하의 가신들 중 용력이 있고 문무를 겸비한 사람 20명을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그런데 19명을 선정하고 나머지 1명을 누구로 뽑아야할 지 망설이고 있었다.
"저를 꼭 이번 행차에 참여토록 해주십시오."
그때 선뜻 평원군 앞으로 나선 사람이 있었다.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선생은 누구시오?"
평원군이 물었다.
"저는 모수라고 합니다."
"선생께선 우리 집에 몇 년이나 계시었소?"
"3년입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밖으로 드러나는 법입니다. 선생은 3년동안 있었는데도 좌우 사람들의 칭송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으며, 저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은 선생께서 지닌 재능이 없기 때문이니, 이번과 같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행차에는 동행 시킬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평원군의 이 같은 결론에 모수가 정색을 하고 말하였다.
"저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주머니 속에 있는 송곳이 되기를 청했을 뿐입니다. 만약 제가 일찍부터 주머니 속의 송곳이 되기를 원했다면, 이미 그 송곳은 자루까지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모수의 말은 그럴 듯하였다. 그래서 평원군은 일단 그를 일행에 끼워넣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큰 기대를 걸지는 않았다. 평원군 일행은 곧 초나라에 도착했다. 평원군은 초나라와 합종하여 진나라를 쳐야 한다는 조나라의 의견을 내놓았다. 초나라 대신들의 반대가 심하여 한나절이 지나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모수가 칼을 들고 섬돌에 올라가, 단상에 초나라 왕과 함께 앉아 있는 평원군에게 물었다.
"대체 합종이라 함은 단 두 마디로 결정을 하는 일인데, 한나절이 지나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러자 초나라 왕이 깜짝 놀라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요?"
"저와 같이 온 객인입니다."
평원군의 말에 초나라 왕은 대뜸 모수를 향하여 꾸짖었다.
"당장 물러가라. 지금 과인이 너의 주군과 중요한 협상을 하고 있거늘 감히 객인이 나서다니!"
그러자 모수는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초나라 왕에게 칼을 들이대며 말하였다.
"대왕께서 저를 꾸짖는 것은 지금 이곳에 초나라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열 걸음 앞에 와 있습니다. 대왕의 목숨은 저의 손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주군께서 앞에 계신데 저를 꾸짖는 것은 대왕의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옛날 은나라의 탕왕은 70리 땅만 가지고도 천하의 왕 노릇을 하였으며, 주나라의 문왕은 백 리의 땅을 가지고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습니다. 어찌 대왕께서는 사졸이 많다는 것을 위세로 삼으려 하십니까? 지금 초나라 땅은 사방이 5천 리이고, 군사가 백만입니다. 이것은 곧 패자가 될 수 있는 바탕이니, 이러한 강대함을 잘 활용하면 천하에 당해낼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일전에 진나라의 졸장 백기는 불과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초나라와 한 번 싸워 언, 영의 땅을 공략하고, 두 번 싸워 이릉을 불살랐으며, 세 번 싸워 선대왕의 능묘를 욕보였습니다. 이것은 초나라가 백대를 넘겨도 잊지 못한 천추의 원수입니다. 우리 조나라조차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데, 당사자인 초나라에서는 도대체 진나라의 그와 같은 오만방자함을 관망만 하고 계실 것입니까?"
모수의 말에 초나라 왕은 신음소리를 깨물며 말하였다.
"으음! 선생의 말이 맞소. 합종에 찬성하는 바이오."
모수 덕분에 합종은 곧 성사되었다.
조나라로 돌아왔을 때, 평원군은 많은 선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앞으로 나는 섣불리 인물을 감정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들의 관상을 보아 온 것이 천 명을 넘었으며, 단 한 번도 잘못 보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모수 선생의 관상은 결정적으로 잘못 본 경우입니다. 모수 선생이 한 번 초나라에 가자, 당장 조나라는 든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수 선생이 한 번 놀린 세 치의 혀는, 백만 명의 군사보다 강했습니다. 나는 이후 감히 인물을 감정할 줄 안다고 자처하지 않겠습니다."
그후 평원군은 모수를 상객으로 대우하였다.
관상 : 겉모습만 보고 그 사람을 쉽게 단정짓지 말라. 뛰어난 사람은 그 능력이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때를 만나지 못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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