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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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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배려의 미덕
서울의 잠실구장에서는 롯데와 빙그레간의 한국시리즈 5차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지난해만 해도 배팅볼 투수로써 연봉 600 만 원을 받고 있는 롯데의 무명투수 윤형배 선수는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승리투수가 되었고 이 날도 3 회까지 무안타로 잘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4 회말 빙그레의 공격이 시작되자 이정훈에게 첫 안타를 내주고 결국 무사 만루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내 최대의 거포 장종훈의 희생플라이로 1점을 내주자, 롯데 강병철 감독은 투수 코치 이충순에게 박동희 투수의 컨디션을 알아보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박동희 투수의 컨디션 OK의 사인을 받고 이충순 코치는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윤형배를 향하여 걸어갔습니다.
"바꾸러 올라왔다."
"공 놓는 포인트가 좋습니다. 5 회까지만 기회를 주십시오. 승리투수만 되면 MVP인데 아깝지 않습니까? 1실점이지만 이제 겨우 1안타입니다."
포수 김선일이 달려와 이충순 코치에게 애원하다시피 말했습니다. 이충순 코치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윤형배를 차마 바꿀 수 없어 마운드를 힘없이 내려왔습니다.
"왜 안 바꿔!"
강병철 감독의 고함이 터져나오자 이충순 코치는 덕아웃으로 가서 그의 팔을 잡으며 조금만 두고 보자고 겸연쩍게 웃었습니다. 그의 짧은 웃음은 절대절명의 위기와 감독의 지시, 그리고 윤형배에 대한 인간적 배려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인간의 순수한 모습이었습니다. 다음 타자를 땅볼 처리하고 2사 1, 2루가 되자 다시 이충순 코치는 마운드로 올라갔습니다.
"미안하다."
공을 건네 주고 윤형배는 마운드를 내려왔습니다. 코칭 스태프, 동료들이 그를 위로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경기가 끝났습니다. 롯데가 이기고 8 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됐습니다. 한 기자가 윤형배 투수에게 물었습니다.
"마운드를 내려올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때는 매우 서운했습니다. 그러자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고 기분 좋을 뿐입니다."
아무리 비정한 승부세계, 아무리 철저한 위계질서 속에도 인간적인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롯데의 진정한 우승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배려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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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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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한번째 이야기 - 도둑도 도둑 나름
아주 먼 옛날에 한 삼촌과 영리한 조카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들은 밤낮으로 아름다운 천을 짜서 국왕에게 바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직공들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들의 생활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국왕의 창고에 주단을 바치러 갔다가, 그곳에 온갖 보물이 산처럼 쌓인 것을 보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국왕의 창고에는 저렇게 보물이 많구나. 우리가 한 목숨 부지하려고 이렇게 애쓰느니, 차라리 보물을 훔쳐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자."
의기투합한 삼촌과 조카는 사람이 없는 틈을 노려 땅굴을 파두었다가 국왕의 창고에 몰래 숨어들어가 수많은 보물을 훔쳐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날 아침, 창고지기는 보물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황급히 국왕에게 보고했다. 그러자 국왕은 이렇게 말했다.
"너는 도둑맞은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 그렇게 하면 도둑은 우리들이 공사다망해서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줄 알고 반드시 다시 보물을 훔치러 올 게 분명하다. 너희들은 창고 속에 숨어서 그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렸다가, 일망타진해서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창고지기는 왕의 명령대로 했다.
며칠이 지나도 궁궐이 조용하자, 삼촌과 조카는 다시 도둑질할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그때 조카가 삼촌에게 말했다.
"삼촌은 연세도 많고, 몸도 허약하시니 만일 창고지기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도망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안심하십시오. 만약 삼촌이 그들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젊고 힘센 제가 반드시 복수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삼촌이 먼저 앞장서서 땅굴로 들어갔다가 매복해 있던 병사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뒤에 있던 조카는 일이 잘못된 것을 눈치채고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쳐버렸다. 병사들은 고함을 쳐서 창고지기를 불렀지만, 조카는 이미 흔적도 없이 도망가버린 후였다. 창고지기는 도둑 한명이 달아난 사실을 국왕이 알면 벌을 받을까 두려워 삼촌 도둑을 죽여 입을 막기로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창고지기는 삼촌 도둑의 머리를 국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국왕은 일개 늙은이가 감히 혼자서 그 많은 보물을 훔쳤을 리 없으므로 반드시 일당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왕은 삼촌 도둑의 시체를 사거리에 내놓고 뭇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명령하였다.
"병사들을 보내 몰래 지키고 있다가, 울면서 시체를 수습하려는 자가 나타나면 같은 패가 분명하니 잡아오도록 하라."
병사들은 하루 동안 사거리를 지켰지만, 아무런 낌새도 눈치챌 수 없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먼 곳에서 온 상인들이 마차에 화물을 가득 싣고 줄줄이 성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때 반대 방향에서도 여러 대의 마차가 들이닥쳐 그만 사거리는 북새통을 이루게 되었다. 양쪽의 상인들은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소란을 피우다가 급기야 싸움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볏짚을 가득 실은 두 대의 마차가 쓰러지자 도둑의 시체는 볏짚 속에 보기 좋게 묻히게 되었다.
다음날, 병사들은 전날의 사건을 국왕에게 보고했다. 이에 국왕은 시체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모두 철수할 것을 명령하고 유능한 정탐꾼을 보내 비밀리에 지키고 있다가 볏짚에 불을 놓으려고 하는 자가 나타나면 잡아오도록 했다. 이번에 조카 도둑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그는 몇몇의 사람들을 데리고 불춤을 추는 것처럼 위장하여 성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이 불춤을 추는 모습은 갈수록 흥겨워져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국왕이 보낸 정탐꾼마저 자기 임무를 잊어버린 채 불춤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카는 사람들이 불춤에 넋이 빠져 있는 동안 마치 실수인 것 마냥 볏짚 위로 불을 던져버렸다. 볏짚은 삽시간에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구경꾼들은 놀라서 일시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정탐꾼이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불춤을 추던 사람들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정탐꾼이 황급히 국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보고하자, 국왕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더 많은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타고 남은 뼈를 수습하러 오는 자가 있는지 지키게 했다. 국왕은 분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뼈를 수습하러 오는 자는 계책에 아주 능한자가 분명하니 잡기만 하면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날 저녁 조카 도둑은 좋은 술을 많이 챙겨 성안으로 들어갔다. 뼈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이미 며칠 동안 계속해서 근무를 했던 터라 피로해 있었다. 그래서 좋은 술을 보자 군침이 돌아 그만 도둑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도 잊고 말았다. 그들은 모두 대취해서 동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카 도둑은 인사불성이 된 사람들을 모두 묶어놓고 빈 술병에 삼촌의 뼈를 담아가지고 유유히 성을 빠져 나왔다. 다음날 보고를 받은 국왕은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었다.
"그 도둑은 정말 교활한 놈이구나! 내가 그 놈을 잡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국왕은 마침내 기막힌 꾀를 생각해냈다. 그는 강변의 정원에 아름다운 신방을 꾸며놓고 수많은 병사들로 하여금 그 주위에 매복하게 한 다음 절세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자기의 딸을 곱게 단장시켜 신방에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공주에게 말했다.
"누구든지 신방에 들어오면 손을 잡고 놓지 말아라. 그리고 비명을 지르도록 해라.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 도둑을 잡을 수 있을 게야."
국왕은 속으로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다. '내 딸이 절세미인이니, 그 도둑놈은 분명히 걸려들고 말리라.' 과연 며칠 후 한밤중에 조카 도둑이 그 부근에 나타났다. 먼저 그는 강의 상류에서 커다란 통나무 하나를 물에 띄워 보냈다. 파수를 보고 있던 병사들은 강에 이상한 물체가 보이자 불을 비추어 보았으나, 그저 통나무에 지나지 않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렇게 몇 차례 똑같은 일이 벌어지자 병사들은 그저 그러려니 하다가 잠이 들고 말았다. 그제서야 조카 도둑은 통나무 옆에 붙어 강을 내려와 신방 안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공주가 자다가 깨보니 옆에 생면부지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공주는 황급히 그 남자의 옷을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자 조카 도둑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옷을 잡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소? 손목을 잡아야 도망가지 못할 것 아니오?"
그 말을 들은 공주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옷 대신 조카 도둑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의 손목을 준비해 간 터라 공주는 그것을 잡고 있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공주가 죽은 사람의 손목을 꽉 잡고 놓지 않자 슬그머니 자신의 손을 뺀 다음 창문을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 파수를 보던 병사들이 공주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으나, 이미 조카 도둑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날이 밝은 후, 공주와 병사들은 간밤에 있었던 일을 국왕에게 보고했다. 국왕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놈은 정말 영리해서 세상에 대적할 자가 없구나!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잡을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그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래지 않아 공주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열 달이 차자 희고 통통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이에 국왕은 또 계책을 꾸며 유모에게 아이를 안고 성안의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하라고 명령하면서 말했다.
"이 아이에게 입맞추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붙잡도록 하라."
유모는 국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안고 성안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해가 저물었지만 아이에게 입맞추려고 하는 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루종일 먹을 것을 변변히 먹지 못한 아이가 큰 소리로 울면서 보채는데, 마침 근처에 우유 장수가 있었다. 그는 다름아닌 조카 도둑이었다. 우유 장수는 아이에게 우유를 건네주면서 자연스럽게 아이의 볼에 입맞추었다. 유모는 궁궐로 돌아와 국왕에게 말했다.
"어제 하루 종일 성안을 돌아다녔지만 아이에게 입맞추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다만 우유를 살 때 우유 장수가 아이에게 입맞추었을 뿐입니다."
국왕이 물었다.
"그 우유 장수를 잡아오지 않고 뭘 했나?"
유모가 대답했다.
"아이가 배가 고파 울어대서 우유를 사러갔던 것입니다. 우유 장수들은 우유를 팔 때 아이들에게 습관처럼 입을 맞추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무조건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국왕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국왕은 유모에게 계속 성안을 돌아다니도록 하고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아이에게 접근하는 자는 잡아오도록 하라."
이번에 조카 도둑은 몇 병의 맛좋은 술을 가지고 갔다. 그는 유모와 그 뒤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유모와 그 일행들은 조카 도둑의 감언이설과 맛좋은 술의 향기에 혹해서 너 한잔 나 한잔 하면서 술을 마셔대다가 곧 흠뻑 취하고 말았다. 조카 도둑은 그틈을 타서 아이를 안고 도망가버렸다. 깨어난 후 아이가 없어진 사실을 안 유모와 그 일행은 서로 멍하니 얼굴만 쳐다보다가 안색이 흙빛이 되어 황급히 국왕에게 달려가 알렸다. 국왕은 화가 나다 못해 말도 나오지 안았다. 조카 도둑은 아들을 데리고 이웃 나라의 수도로 가서 그 나라 왕을 알현하기를 요청했다. 왕은 조카 도둑을 접견하고 나서 그가 천문지리를 비롯해 모르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은 그의 박식함에 감탄하여 그를 대신에 임명했다. 그러던 어느날 왕이 말했다.
"우리 나라에 자네만큼 총명한 사람도 없는 듯하니, 내 딸자식을 시집보내려고 하네. 이 어찌 경사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에 조카 도둑은 급히 대답했다.
"대왕께서 이렇게 저를 아껴주시니 무척 송구스럽습니다만, 저는 감당할 수 없나이다. 만일 대왕께서 저를 가련히 여기신다면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사신을 조카 도둑의 본국에 보냈다. 그러고는 자신의 태자가 귀국의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하기를 바란다고 전하게 했다. 국왕은 이웃 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여 전언을 듣고 곧 혼사를 승낙했다. 하지만 속셈은 달랐다. '이 도둑놈이 정말로 교활하구나. 이번에도 술책을 꾸며 내 딸아이마저 빼돌리려고?' 국왕은 곧 사자를 이웃 나라에 급히 파견해서 이렇게 요구했다.
"귀국의 태자가 내 딸아이를 아내로 맞고자 한다면, 반드시 직접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국왕은 병사들에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하고서는 구혼자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조카 도둑은 그 소식을 듣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직접 간다면, 국왕이 알아차리고 당장 잡으려 들 텐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까?' 그는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자신을 비호해주는 왕에게 달려가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직접 보내시려면, 부디 오백 명의 정예 기병을 대동하게 하셔서, 우리 나라의 위풍당당함을 보이게 하소서. 그래야만 제가 갈 수 있나이다."
왕은 조카도둑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결혼식 날이 되자, 조카 도둑은 예복을 차려입고 이백오십 명의 기병을 선두에 두고 나머지 이백오십 명의 기병은 후위에 배치한 채 위풍당당하게 본국으로 돌아왔다. 궁궐 앞에 이르자 그는 말을 세우고 꼼짝하지 않았다. 공주의 아버지가 궁 밖으로 나와 조카 도둑을 자세히 살펴보니 비범한 재능이 엿보여 속으로 은근히 감탄하였다. 국왕은 직접 말 앞으로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내게 사실을 말해주게나. 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잡으려고 했던 도둑이 바로 자네 맞지?"
조카도둑은 말 위에서 웃으며 예를 표했다.
"맞습니다. 바로 접니다!"
국왕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천하에 자네의 총명함을 따를 자가 없네그려. 좋네! 내 딸아이를 자네에게 주겠네."
이렇게 해서 조카 도둑과 공주는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생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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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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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민족 의학의 선구자 - 허준
허준은 의성이라고까지 추앙되는 인물이며 신분적 불리함을 딛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선 도전적 인간상의 전형이다. 그는 유교적 가치관이 전부이던 시대에 태어나 크게 대우받지도 못하는 길로 자신의 인생을 몰입시켰지만, 그곳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자기를 탁마하여 시대적 가치를 뛰어넘는 평가를 이끌어낸 위대한 인간 승리의 표본이다. 의원으로서 그의 뛰어난 점은 복양과 치료보다도 정신수양과 섭생에 의술의 본의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즉 치료 의학보다는 예방 의학을 우선시했다는 점이 그의 의학 사상에 있어서 큰 특징이다. 그것은 동의보감을 비롯한 그의 모든 저술에 일관되게 흐르는 관념으로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도 대단히 선각자적인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의술을 기술이 아닌 인술로 파악하여 인본주의자로서 의원의 길을 걸어간 그는 항상 가난한 백성의 입장에서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환경에 의한 영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항상 조선의 실정을 감안한 방안을 채택하였고, 우리 민족 체질의 특성에 치료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항상 힘없는 백성에 대하여 깊은 애정을가지고 있어 일반 백성들이 의원들의 직접적인 도움 없이도 기본적인 치료가 가능하도록 하는 대중용 의학 서적 편찬에 주력했다. 각종 의서들을 개정하고 증보하여 우리말로 번역한 언해들도 이러한 그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고, 전염병이 유행하는 곳으로 달려가 치료에 임하면서 임상 경험을 쌓은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의술의 목표는 가난한 백성들을 구호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그는 자기가 배운 학문으로 그 어떤 정치가보다 더 치도의 근본을 실천해간 큰 인물이었으며, 전란을 전후해서 어수선하고 흔들리던 당시 왕조 정권을 한쪽에서 굳건히 지탱해 준 버팀목이었다. 그의 독보적 가치는 중국 의술의 아류로 취급되던 조선 의학의 체계를 정립시킨 데에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려운 환경을 뚫고 자신의 길을 열어나간 개척정신과 좌절의 순간에도 포기하거나 쓰러지지 않고 그토록 긴 기간을 오로지 하여 불후의 명작을 탄생시킨 인간승리의 모습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서얼 출신 명의 탄생
허준은 조선 13대 왕인 명종 원년(1546년)에 용천 부사를 역임한 허론의 서자로서 경기도 양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손씨는 지방 현령의 딸로 아버지의 소실이었기 때문에 그는 운명적으로 입신양명의 기회를 박탈당한 채 세상에 태어났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학문의 기초를 닦을 수있었으며, 그것은 훗날 그가 의술을 철학의 경지에 끌어올려 집대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그는 배다른 형제로 형인 옥과 동생 징이 있었다. 형은 한미한 직책에 그쳤지만 동생은 내외직의 꽤 높은 관직을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소년 시절을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서 전남지역에서 보내면서 서얼 출신이라는 자신의 처지를 자각하여 중인 계층이 진출하고 있던 의원을 인생의 길로 선택하였다. 의술 공부에 전념하던 그는 젊어서 이미 지역 사회에서 가난하고 병든 백성들을 치료해주면서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집안의 후원과 어느덧 명성을 얻은 실력으로 10대에 벌써 지방에서 약재를 검사하여 중앙으로 상납하는 심약이라는 종9품 관직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그의 의원으로서의 출세에는 아버지의 본부인 영광 김씨의 도움이 컸다. 큰어머니 김씨쪽으로 그에게는 할아버지뻘 되는 김시흡이 그의 자질을 인정하여 미암 유희춘에게 소개해주었고, 미암도 그의 능력을 높이 사서 계속 후원을 해주었다. 허준이 미암을 처음 만난 시기는 미암이 긴 유배에서 풀려난 선조 원년(1568년)의 일로 그의 나이 23살 때였다. 미암은 명종 2년(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을 기화로 윤원형 일파에게 탄압을 받고 긴 유배 생활을 하다가 선조가 즉위하자 21년의 긴 유배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그 후 미암은 선조대에 전라감사, 홍문관 제학, 대사헌의 요직을 역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미암의 지원이 허준의 출세에 큰 도움이 되었다.
미암은 선조 2년(1569년)에 이조판서 홍담에게 허준을 추천하여 내의원으로 임명되게 해주었다. 궁중의 치료를 담당하는 내의가 되면서 허준은 일생일대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당대 최고의 의원이자 내의원 의관이던 어의 양예수를 만난 것이다. 흔히들 허준의 스승은 유의태로 알고 있지만 그는 허준보다 후대에 활약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꾸며낸 것에 불과하고 실제 스승은 내의원 수석의관 양예수였다. 당대 최고의 의원인 양예수를 만난 허준은 의술의 정수를 전수받아 의원으로서 더욱 실력을 쌓아갔다. 양예수가 지은 의림촬요가 훗날 동의보감을 저술하는 데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허준에게 있어서 양예수의 존재가 어떠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허준은 선조 4년(1571년)에 종4품인 내의첨정에 올랐다가 선조8년(1575년)에 의과에 정식으로 합격하고 왕의 시의로 선발되었다. 갓 30살의 나이에 의원으로서 확실한 지위를 굳히고 더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셈이다. 그는 과거 급제 후 왕실 진료에 많은 공적을 세우면서 녹비(사슴 가죽)와 숙마(나라에 속한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 등의 상을 여러 차례 받음으로써 점점 그 실력을 확고하게 알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게 되었고 왕의 특지로 여러 차례 품계를 올려 받았다. 그는 왕실 전담 의원으로 근무하면서 의학을 꾸준히 연구하여 선조14년(1581년)에 찬도방론 맥 결집성을 4권 4책으로 펴냈다. 이 책은 중국6조 시대 때 고양생이 지은 찬도맥결의 미흡한 부분을 교정하고 난해한 곳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써낸 것이다. 찬도맥결은 중국 중세 이전에 명성이 높았던 의원들인 희범, 결고, 통진자 등의 맥론을 집대성한 책으로 그때까지 의학도의 필독서였으며, 의과 시험의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내용이 워낙 해석하기 어려워서 의원들이 그 의미를 파악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교정이 필요했다.
허준이 지은 교정본에는 기본적인 진맥 방법과 병세에 따른 진맥법이 항목별로 상세하고도 쉽게 기술되어 있어 의학도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로부터 내의원 내에서도 그의 위치는 더욱 공고해졌고 선조 23년(1590년)에는 광해군이 위중한 병에 걸렸을 때 일을 치료하고 낫게 해주어서 그 공로로 정3품 대우의 가자(품계를 올려 받는 것)를 받았다. 광해군이 천연두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그가 구활하게 된 것인데 이로 인해 그는 광해군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허준이 가자된 다음 조정에서는 서얼 출신이자 기술 관료인 그에게 정3품 당상관 대우는 부당하다는 이유로 품계 환수 여론이 빗발쳤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진왜란과 고속 출세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그에게도 큰 전환점이 되었다.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한 후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와서 마지막으로 믿었던 신립마저 탄금대에서 무너지자 선조와 조정은 개성을 향하여 몽진 길에 올라야만 했다. 이때 허준도 피난가는 어가를 따라 시의로서 그 소임을 다했던 것이다. 그는 피난길에서 잠시도 왕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건강을 돌보아 준 공으로 선조가 대궐로 귀환하자 곧 다시 품계를 올려 받았다. 그런데, 한성으로 돌아오면서 목격한 조국의 산하는 전란으로 완전히 황폐해져 있었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었다. 특히 전쟁 중에 부상당한 사람들과 전란 끝에 의례히 찾아오는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보고 이들을 치료할 방도가 시급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허준은 선조의 명을 빌려 모든 병을 치료하는 방안을 수록한 의학서를 편찬하기로 계획하고 선조 29년(1596년)에 그 기초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노쇠한 양예수는 은퇴하여 그가 내의원 수석의관이 되었으며 동반(문관) 직책을 재수받을 정도로 최고 대우를 받고있었다.
그때는 아직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일시 휴전 상태였으며 왜군 또한 여전히 남해안 일대에 진을 치고 있어서 국내 정세는 아직도 상당히 불안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의 구휼과 치료가 시급하자 우선 내의원 안에 새 의서를 찍어내기 위한 편찬국을 두고 허준을 비롯하여 정작,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 내로라 하는 의관들이 모두 모여 공동 연구에 들어갔다. 그렇게 한창 연구가 진행되는 도중에 정유재란(1597년)이 발생하여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공동 연구는 부득이 중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전쟁의 양상은 중부지방에서 전선이 형성된 후 교착 상태에 빠진 데다가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조선에서의 철병을 유언으로 남기자 왜군들은 일제히 철수하였고, 이에 따라 7년에 걸친 왜란은 겨우 종식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내의원도 다시 정비되자 선조는 허준에게 중단되었던 의학서 편찬을 계속하라는 명을 내려 그때부터 단독으로 이 작업을 떠맡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까지 알려져 있던 500여 권의 모든 의학서를 참조하면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 나갔다. 연구에 몰두하던 그가 55살 되던 선조 33년(1600년)에는 스승인 양예수가 죽게 되어, 그때부터 그는 명실공히 조선 최고의 의원으로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는 외롭고 어려운 의서 편찬 작업을 수행하면서도 현업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선조34년(1601년)부터 전국에 천연두가 창궐하자 허준은 연구 작업을 잠시 접어두고 병들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치료하기 위해 구호 일선에 분연히 나아가 의원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고자 했다. 당시에 전염병이 워낙 극성을 부려서 왕실 치료를 전담하는 내의원 의관들도 손놓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백성들의 진료에도 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그는 일반 백성들이 의원의 도움을 못 받더라도 응급 처치를 할 수 있도록 세조 때 만들어져 전해 내려오던 구급방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2권 2책의 언해구급방으로 편찬하여 내놓았다. 또 세조 때의 의학자 임원준이 저술한 천연두 치료에 관한 책인 창진집을 개편하고 역시 우리말로 번역하여 언해두창집요를 편찬해낸 것도 그 해의 일이다. 허준은 이 책을 알기 쉽게 고쳐 쓰기도 했지만 자신이 직접 치료하면서 효과가 좋았던 진료 방법을 덧붙여 기술하여 천연두 퇴치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이러한 공로로 선조 37년(1604년)에는 충근정량 호성 3등 공신이 되었다가, 그 2년 후에는 양평군이라는 작위와 함께 보국숭록대부로 봉해져서 관리로서 최고위직 대우를 받게 되었다.
동의보감 완성
의원으로서 그와 같은 대접을 받은 사람은 그 이전에도 일찍이 없었고, 그 이후에도 물론 없었다. 특수 기술직으로 그다지 우대받지 못하던 의원으로서 이토록 파격적인 대접을 받게 되자 자연히 조정 내에서 질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결국 대간의 빗발치는 반대로 그 직위가 취소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양반 사대부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게 되는 허준은 그 와중에도 의학 연구에 꾸준히 몰두하여 선조 41년(1608년)에는 노중례의 태산요록을 우리말로 옮기고 수정하여 언해태산집요라는 출산과 아기 양육법에 관한 해설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원으로서 승승장구하던 허준에게 그 해 2월에 엄청난 위기의 시간이 다가왔다. 선조가 병으로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허준은 왕의 주치의로서 치료에 잘못이 있다 하여 집중적인 탄핵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재위하던 왕이 죽으면 그의 건강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 하여 규례적으로 어의의 죄를 논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의례적인 절차로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로 인해 어의가 처벌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때 허준은 그 동안 선조의 비호를 받아서 중서의 신분으로 공경대부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았다는 죄 아닌 죄로 인해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당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왕의 치료에 소홀하였다는 공격을 받고 삭탈 관직된 후 유배되고 말았다. 그는 이런 좌절을 겪으면서 유배지에서도 새로운 의학서 집필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연구에 몰두했다. 그 후 조정 중신들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다음해 4월에는 위리 안치되는 가중 처벌까지 받게 되어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다행히 그 해 11월에 광해군에 의하여 사면되어 귀양에서 풀리고 다시 내의원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자 시절 그에 의해 위중한 병을 치료받았던 광해군이 특사로 그를 풀어주고 어의로 다시 불렀던 것이다. 귀양에서 풀린 그는 그 동안 연구했던 새 의서 저술을 마무리지어서 선조의 명에 의해 새로운 의학서를 편찬하는 작업에 착수한 지 15년만인 광해군 2년(1610년) 8월에 25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책을 완성해 내놓을 수 있었다. 이에 광해군은 포고문을 내려 그 공을 치하하고 상으로 태복마를 하사하였다. 이 책은 출판 준비에만 3년이 걸려서 실제로 간행된 것은 광해군 5년(1613년) 11월이었다. 허준으로서는 온갖 시련을 견디면서 혼자 힘으로 고군 분투하여 마침내 그 뜻을 이루어낸 것이다. 끈질긴 집착력과 사명감으로 그 기나긴 세월을 한 길을 향해 매진한 결과였다.
집필을 마쳤을 때 그의 나이도 어언 65살로 당시로서는 꽤 고령이 되어 있었다. 동의보감은 그 후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발간되었다. 중국에서 출판될 때 그 서문에서 "천하의 보물은 마땅히 전 세계가 함께 공유하여야 한다"고까지 극찬하였고, 일본에서도 의가의 비급으로 소중히 떠받들어졌다.
말년에도 질병 퇴치를 위하여 매진
그는 동의보감을 완성한 후에도 새로운 병이 발견되면 몸을 아끼지 않고 그것을 치료하기위한 처방을 연구하여 책으로 펴냈다. 광해군 4년(1612년) 12월에는 온역이라고 했던 발진티푸스가 함경, 강원 양도에서 유행하다가 점점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중종 때부터 전해져 오던 벽온방을 참작하여 신찬 벽온방을 찬집하였다. 이 책은 발진티푸스의 원인 및 예방과 치료법을 기술한 것으로 1613년 2월에 내의원에서 간행하였다. 또한 그 해 10월에 당독역으로 불렸던 성홍열이 전국에서 유행하자 벽역신방이라는 치료서를 엮어내기도 했다. 이 책에는 병의 기원과 증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치료법과 약방문에 이르기까지 치료에 임하기도 쉽고 효험이 큰 방법들이 간결하고도 요령 있게 서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의학 연구 및 저술과 병든 백성의 구호에 진력하던 허준은 광해군 7년(1615년) 11월에 70살을 일기로 조용히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그가 죽은 다음에 광해군은 그의 공적을 기려 그의 생전에는 중신들의 반발로 취소하였던 양평군의 관작을 추증하여 주었다. 그는 조선뿐만 아니라 동양의학계 전체에 지워질 수 없는 큰 발자취를 남겼고, 중국에서도 그를 가리켜 동국 의성이라고 추앙하였으며 그의 책을 대량으로 발간하여서 질병의 치료에 길잡이로 사용했다. 또한 오늘날에도 동의보감은 여러 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어 세계적인 의서로 그 의학적 가치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동의보감의 내요와 가치
동의보감은 의학서에 대한 허준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임상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실용적인 의서이다. 각종 질병에 따른 처방을 상세히 기술한 것은 물론 반드시 단방 치료 방법을 열거하였고, 약만으로 효과가 없을 경우에 쓰는 침구법도 덧붙여서 완벽한 치료에 임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약재에 있어서도 중국산과 국산을 구분하여 국산 약재는 산지, 지방별 명칭, 채취 계절과 제약 방법을 기술해서 약재를 구하기 쉽도록 안내했다. 그리고 처방의 출전을 밝혀두어 질병에 대한 고금의 치료 방법을 계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였으며 속방까지 기술해 두었다. 특히 잡병편에서는 증세를 중심으로 각종 질병을 알아낼 수 있도록 배열하여 임상 경험이 부족한 의원도 이 책을 기초로 하여 환자를 보면 쉽게 진맥을 할 수 있었다. 처방약의 용량도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표준치를 만들어 적의 가감하여 조제하도록 하였고 복용 방법까지 명시하였다.
무엇보다도 그의 의학 사상에서 기본을 이루고 있는 정, 기, 신의 종요성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내장기의 생리적 기능 변조 가능성과 그 직접적 병증을 다루어서 400년 전에 이미 현대 의학에 가까운 의술이 모색되었다는 측면에서 경이로울 따름이다. 그렇게 그는 고금의 각종 의서를 통달하여 다기한 치료 방안을 취사 선택한 후 실제 임상 경험을 거쳐서 치료에 효과가 있는 정수만을 뽑아 내느라고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의보감 전편에 흐르는 이념적 바탕은 도교적 공리 정신과 실용주의적 사상으로서 이에 따라 이 책은 정확성과 함께 실제적 활용가능성이 무엇보다도 중요시 되어 있다. 또한 한의학을 총 집성하여 토대로 삼았지만 우리 민족의 체질에 맞는 민족 의학으로 정립시켰기 때문에 한방이 아니라 한방의학의 결정판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히 의술에 관해서는 모든 것이 수록되었다고 할 정도로 상세하고도 정확하였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이와 같은 명저가 다시없을 만큼 대단한 가치를 지닌 동양의학의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의보감의 구성은 목차편 2권, 내과인 내경편 4권, 외과인 외형편 4권, 유행병, 급성병, 부인과, 소아과 등을 합친 잡병편 11권, 약재와 약물에 관한 탕액편 3권, 침구편 1권 등 5강목으로 나뉘어서 총 25권으로 발간되었다. 이 방대한 의학 서적의 진정한 가치는 한국적 의학의 우수성과 민족적 재능의 뛰어남을 과시한 대역사라는 점에 있다. 또한 기술로서의 의술이 아니라 인술로서 의학을 대하였던 한 인간의 고귀한 인간존중의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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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9. 창조성
<자신한테든 남한테든 미친 짓, 부정적인 짓, 파괴적인 짓을 그만 두라. 그런 짓들은 밥먹듯 쉬운 일이었으니, 조그만 어린애도 할 수 있는 것. 이제는 전혀 다른 속 안의 것을 찾으라. 용기를 갖고 힘을 내라. 그리하여 속 안의 창조력을 일으켜라>
미치광이 살인자가 있었다. 그는 딱 천 명만 죽이기로 맹세한 텨였다. 세상이, 미쳐버린 자신을 전혀 치료해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래서 딱 천 명만 죽여버리기로 했던 것이었다. 미치광이 살인자는 한 사람 한 사람 죽일 때마다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 꿰어서 목에 둘렀다. 염주처럼. 그 염주는 천 개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질 것이었다. 이쯤되자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 염주를 두른 사나이"라 불렀다. 이제 미치광이 살인자는 구백구십구 명을 죽인 터였다. 한 사람만 더 죽이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미치광이 살인자가 어디에 나타났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담박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여져서 근처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얼씬하지 않았으므로 살인자는 마지막 한 사람을 좀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럴 즈음 붓다가 마침 어느 숲 쪽으로 지나려는데 사람들이 앞을 가로 막으며 말하기를,
<붓다시여, 그쪽으로 가지 마십시오. 미치광이 살인자가 숨어 있습니다. "손가락 염주를 두른 사나이가!" 놈은 전혀 생각이 없는 단순한 살인자예요. 당신이 붓다라고는 상상도 못할 놈이예요. 그쪽으로 가시지 말고 딴 길로 가세요>
그러자 붓다가 말하기를,
<내가 가지 아니하면 딴 사람이 갈 게 아니겠는가. 그도 사람이고, 날 필요로 하고 있다. 한번 해봐야겠다. 그 자가 날 죽일지, 내가 그를 죽일지>
붓다는 발걸음을 옮겼다. 끝까지 그의 뒤를 따르겠노라 맹세했던 가까운 제자들조차도 그의 뒤에서 점점 발걸음이 느려지더니 뒤쳐져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붓다가 미치광이 살인자가 있는 언덕 쪽으로 오를 즈음에는 한 사람도 뒤따르는 자가 없이 혼자가 되어 있었다. 제자들이라곤 꽁무니도 보이질 않았다. 한편 언덕 위에서 이를 내려다보고 있던 미치광이 살인자는 도리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애들처럼 이렇게 순진한 사람이 다있나 하면서 차라리 아름다움을 느꼈고, 동정심이 일었다. 미치광이 살인자는 생각하였다.
"이 사람,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모양이군. 안다면 이쪽으로 올 리가 없지"
그는 또 생각하였다.
"그래. 이런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못해. 그냥 보내줘야겠어. 딴 사람을 찾자"
해서 미치광이 살인자는 외쳤다.
<어이, 돌아가라! 거기서 그만 돌아가란 말이다! 한 발짝도 더 오지 마라. 난 미치광이 살인자, "손가락 염주를 두른 사나이다" 자 보라. 구백구십구 개의 손가락으로 엮은 염주를. 이젠 딱 한 개의 손가락만 더 있으면 되. 내 어머니라도 여기에 오면 난 아마 죽일 게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선. 더 가까이 오지 마라. 난 대단히 위험하니까. 난 종교 따위도 안 믿는다... 넌 아마 훌륭한 수도승일 것 같은데 난 그딴 거 모른다. 네 손가락도 물론 좋겠지. 거기서 한 발짝도 더 오지 마라. 죽여버릴 테니까>
그러나 붓다는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미치광이 살인자가 다시 생각하기를, 이 자가 귀머거리인가 미쳤는가 하였다. 해서 그가 다시 외쳤다.
<정지! 움직이지 마라!>
붓다가 말을 했다.
<난 이미 오래 전에 정지했네. 난 지금 움직이고 있지 않아. "손가락염주를 두른 사나이" 그대가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내겐 아무 목적도 없다네... 아무 동기도 없는데 무슨 움직일 일이 있는가? 그대가 움직이고 있지. 그러므로 그대여 정지하라!>
미치광이 살인자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넌 참 머저리 아니면 미친 놈이구나, 그딴 건 난 모른다!>
붓다가 바싹 다가갔다.
<그대한테 이제 딱 한 개의 손가락이 필요하다는 걸 내 안다. 네. 자, 내 것을 가져라. 그리하여 그대의 뜻을 이루라. 기꺼이 내주리. 자, 내 손가락을 자르고, 내 목을 쳐라. 그리하면 나도 내 뜻을 이루리. 이거야말로 내 몸이 참으로 쓰여질 마지막 기회인즉>
미치광이 살인자가 말했다.
<세상에서 미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잔꾀 부리지 마라. 지금 당장이라도 널 죽일 수도 있으니깐>
붓다가 말을 했다.
<날 죽이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네. 죽을 사람의 원이네. 이 나무의 가지를 하나 잘라 보라>
미치광이 살인자는 칼을 빼들고 커다란 나뭇가지를 하나 내리쳤다. 그러자 붓다가 말을 했다.
<한 가지 더 있네. 그 나뭇가지를 나무에 도로 붙이게>
미치광이 살인자가 말하기를,
<넌 완전히 미쳤구나. 이걸 자를 순 있어도 어떻게 도로 붙일 수 있겠어>
붓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댄 파괴할 줄만 알지, 만들 줄은 모르는군... 파괴란 애들도 할 수 있는 것, 거기엔 용기가 필요 없지. 이 나뭇가지 쯤이야 어린 꼬마라도 자를 수 있지. 그러나 이걸 도로 붙이려면 스승이 있어야 한다네. 나뭇가지 하나 도로 붙이지 못하면서 사람의 머리 정신에 대해 뭘 안단 말인가? 뭘?>
순간, 미치광이 살인자는 눈을 꽉 감고 외쳤다.
<부디 절 이끌어 주시오!>
미치는 에너지나 깨닫는 에너지나 똑같은 것이다. 에너지가 흐르는 방향만이 다를 뿐, 똑같은 에너지이다. 창조적 에너지나 파괴적 에너지나 똑같은 것이다. 에너지의 쓰임이 다를 뿐, 똑같은 에너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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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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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장군 가문에 장군 나고 재상 가문에 재상난다 - 맹상군
"옛말에 '장군 가문에서 장군이 나고, 재상 가문에서 재상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아버님을 받드는 미녀들은 비단을 밟고 다니지만, 아버님을 따르는 선비들은 짧은 잠방이도 얻어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맹상군의 이름은 전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제나라 위왕의 작은아들 전영으로, 위왕, 선왕, 민왕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전영에게는 40여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전문은 천첩의 소생으로 5월 5일에 태어났다. 전영은 5월생이 불길하다는 속설 때문에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였으나, 그 어미는 몰래 아들을 낳아 길렀다. 전영은 그 아들이 다 성장하였을 때에서야 그 사실을 알았다.
"내가 전에 5월생의 아이는 낳지 말라고 일렀는데, 감히 이 아이를 낳아 기른 것은 무슨 까닭이냐?"
전영이 화를 내어 말하자 전문의 어머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전문이 물었다.
"제가 감히 묻겠습니다. 아버님께서는 5월생의 아이를 낳아 기르지 못하게 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전영이 말하였다.
"5월에 난 아들이 그 키가 지게문 높이와 같게 되면 그 부모에게 좋지 않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늘의 명을 받고 태어나는 것인데 무얼 그리 근심하십니까? 만약 5월에 태어나는 사람이 하늘의 명이 아닌 지게문의 명을 받는다면, 그 지게문을 높이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면 아무 탈이 없을 것입니다."
전영은 아들의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나서 얼마 후 전문은 아버지 전영을 찾아와 물었다.
"아들의 아들을 무엇이라 합니까?"
"손자라고 한다."
"손자의 손자를 무엇이라 합니까?"
"현손이라고 한다."
"그러면 현손의 현손은 무엇이라 합니까?"
"알 수 없다."
전영은 엉뚱한 질문을 하는 아들 전문을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버님께서는 제나라 재상으로 세분의 대왕을 모셨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제나라 영토는 더 이상 확장되지 않았는데, 아버님의 재산은 천만금이 축적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님의 문하에는 단 한 사람의 어진이도 없었습니다. 옛말에 '장군 가문에서 장군이 나고, 재상 가문에서 재상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아버님을 받드는 미녀들은 비단을 밟고 다니지만, 아버님을 따르는 선비들은 짧은 잠방이도 얻어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인이나 첩들은 쌀밥과 고기를 먹다 남기지만, 선비들은 쌀겨나 지게미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체 너는 지금 무슨 소릴 하려는 거냐?"
전영은 꼬치꼬치 따지고 드는 아들에게 물었다.
"방금 아버님께서는 현손의 현손을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님께서는 재산을 축적하고 또 축적하고 있는데, 그 재산을 그 '알 수 없다'고 말씀하신 자손들에게 남겨주려 하고 있질 않으십니까? 이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신하들이 자기 가문만을 생각하여 재산을 축적할수록, 국력은 날로 쇠퇴해 가기 마련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재산을 축적하는데 노력을 기울이시는 것이 괴이하게 생각될 뿐입니다."
전영은 아들 전문의 말을 듣고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오늘부터는 네가 우리 집안의 일을 전부 맡아 보고, 손님접대를 하도록 하거라."
전문은 그때부터 집안의 일을 알뜰하게 살폈으며, 손님 접대를 극진히 하였다.
당시에 명문가에게는 식객들이 들끓었다. 명문 재상인 전영이 집안을 관리할 때는 접대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선비들이 많이 찾아들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 전문이 손님 접대를 극진히 하자 많은 선비들이 그 집에 식객으로 머물게 되었다. 선비들 사이에서 날로 전문을 칭찬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제후들까지도 전문의 이름을 들먹이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문을 후계자로 삼으십시오."
제후들이 전영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 문이 그렇게 똑똑하오?"
"천하에 명성이 자자합니다."
전영은 전첩 소생의 아들 전문을 후계자로 삼고 죽었다.
이렇게 하여 전영의 후계자가 되어 가문을 이끈 전문이 바로 후에 재상이 된 맹상군이다. 옛말 그대로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온 것이다.
재물 : 재물은 쓰기위해 모으는 것이다. 재물을 쌓아두면 도둑이 되고, 재물을 풀면 성인군자가 된다. 진짜 부자는 재물이 많은 자가 아니라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은 자이다. 사람에게 투자하라.
많은 사람을 아는 것이 큰 힘이 된다
손님은 맹상군과 자신의 식탁에 차등을 두었기 때문에, 일부러 불빛을 막아 감추려 한다고 오해하였다. 맹상군이 식탁을 보여주자, 손님은 자신의 식탁과 똑같은 걸 알고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맹상군의 집에는 늘 식객들이 북적거렸다. 그는 아버지 전영이 재상을 지낼 때부터 모은 많은 재산을 털어 그 식객들을 대접하였다. 식객들이 수천이나 되었지만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후대하였다. 어느 날 맹상군이 손님을 접대하여 같이 저녁을 먹을 때였다. 그때 누군가가 불빛을 막아 맹상군의 식탁을 가렸다. 손님은 맹상군과 자신의 식탁에 차등을 두었기 때문에, 일부러 불빛을 막아 감추려 한다고 생각하고 투덜거렸다. 맹상군은 자신의 식탁을 손님에게 보여주었다. 손님의 식탁과 똑같았다. 그 손님은 자신의 못난 행동을 부끄럽게 여겨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진나라 소왕도 맹상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날 진나라 경양군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그대신 맹상군을 진나라로 초청하였다. 맹상군의 식객들은 모두 말렸다.
"진나라로 가면 잡힙니다. 가지 마십시오."
"그래도 저쪽에서 초청한 건데 아니 갈 수가 없질 않소?"
맹상군은 제나라의 입장을 생각해서 진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그때 소진의 아우인 소대가 다음과 같은 '우화'를 예로 들어 말하였다.
"오늘 아침에 제가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나무로 만든 인형과 흙으로 만든 인형이 싸우는 걸 목격했습니다. 나무인형이 '하늘에서 비가 오면 네 몸은 허물어지고 말거야'하고 흙인형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랬더니 흙인형이 '나는 흙에서 출생하였으니 허물어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지만, 너는 비가 오면 정처없이 떠내려가서 다신 돌아오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호랑이나 이리처럼 사나운 나라입니다. 그런 곳에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흙인형에게 비웃음을 당한 나무인형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소대의 말을 듣고 맹상군은 진나라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제나라 민왕 25년에, 맹상군은 어쩔 수 없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진나라 소왕은 맹상군을 보자 곧 자기 나라의 재상으로 삼으려 하였다. 그때 진나라 신하가 말하였다.
"맹상군은 현명합니다. 진나라 재상이 되더라도 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나라를 위하여 일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진나라에게는 위험인물입니다. 이 기회에 그를 가둔 후, 죄를 씌워 죽이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번에 그를 놓아 보낸다면 크게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 소왕은 신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곧 맹상군은 숙소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진나라 소왕이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연금을 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맹상군과 그리고 그와 함께 간 식객들은 진나라에서 벗어나 무사히 제나라로 돌아갈 방책을 논의하였다. 식객 중에 진나라 소왕의 애첩 행희와 잘 통하는 사람이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소왕이 총애하는 애첩으로 하여금 승상을 석방하게 해달라고 부탁해 보겠습니다."
그 식객은 곧 행희를 만나 부탁하였다.
"맹상군은 흰여우 가죽으로 만든 귀한 옷을 갖고 있다 들었소. 그것을 내게 주면 맹상군을 풀어달라고 대왕께 부탁드려 보지요."
식객은 이와 같은 행희의 말을 맹상군에게 와서 전하였다.
"허어, 큰일이군. 하나밖에 없는 그 옷은 이미 소왕에게 바쳤는 걸."
'호백구'라는 그 옷은 값이 천금이나 나가는 천하에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염려 마십시오. 그 호백구를 제가 훔쳐오겠습니다."
한 볼품 없이 생긴 식객 하나가 선뜻 나섰다.
"그대가 어떻게?"
"전직이 도둑이었습니다."
밤에 나간 그 식객은 새벽녘이 되자 진나라 보물 창고 깊숙이 숨겨져 있던 호백구를 훔쳐가지고 돌아왔다. 맹상군에게서 호백구를 선물받은 행희는 곧 소왕을 만나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애첩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는 소왕은 곧 맹상군을 연금 상태에서 풀어주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맹상군 일행은 몰래 진나라 궁궐을 빠져나와 함곡관까지 왔다. 그런데 관문이 꼭 잠겨 있었다. 당시에는 첫닭이 울어야 관문을 열게 되어 있었다. 야반도주를 한 맹상군 일행은 진나라 관군이 추격해 올까봐 새벽까지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한편 진나라 소왕은 맹상군 일행이 몰래 궁궐을 빠져나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였다.
"맹상군을 풀어준 것은 과인의 실수로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맹상군이 아직 함곡관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새벽이 되어야 관문이 열릴 것이니 서둘러 추격하라."
소왕은 군사들을 함곡관으로 출동시켰다. 맹상군 일행은 함곡관 관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식객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말하였다.
"제가 관문을 열어 보겠습니다."
"아니, 어떻게?"
맹상군은 반색을 하였다.
"앉아서 구경만 하십시오."
그 식객은 입을 오므려 닭울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인근의 닭들이 모두 그 소리를 흉내내어 울었다. 함곡관을 지키던 문지기들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니 벌써 새벽인가?"
문지기들이 관문을 열자, 맹상군 일행은 미리 가짜로 만들어두었던 통행증을 제시하고 무사히 함곡관을 벗어나 제나라로 돌아왔다.
인복 : 폭넓은 아량으로 사람을 얻어라.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쓰일 곳이 있는 법이다. 평소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면, 위기가 닥쳤을 때 도움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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