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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19호
2020.7.17. (음 5.27)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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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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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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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란 그 위에서 편히 쉬라고 만든 게 아니라, 한쪽 발이 버틸 동안 다른쪽 발로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만든 발판. ― 토마스 한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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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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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이라는 이름
누군들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명문이라 일컫는다고 질색하랴? 모교가 유명해지면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졸업생들도 괜히 으쓱해질 것이다. 또 명문으로 이름난 학교 졸업생들은 취업 과정에서 얻는 이익도 상당할 것이다. 명문이라는 평판은 개인적으로도 대단히 큰 자산이지만 사회적으로도 큰 자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돌이켜 생각해 보자. 한국 사회의 명문은 과연 무엇인가? 한국의 명문은 순위가 바뀌지도 않고 새로운 명문의 탄생도 거의 불가능하다. 한번 명문으로 꼽히면 다시는 주저앉지 않는다. 한 대학이 명문이라는 말을 들으면 모든 학과가 명문 대우를 받는다. 심지어 신설 학과나 부속기관까지도. 공정한 경쟁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명문의 의미는 사실상 기득권을 뜻한다. 그렇기에 명문이라는 소문이 중요하지 그 내실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일단 한 학교 출신을 많이 채용하면 내부의 위계질서를 통해 후배들은 선배들한테 충성을 바치며 성과가 빨리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특정 학교 출신을 많이 채용하면 그들은 더 이상 공적 조직이 아니라 사적 조직이 될 위험성이 더 커진다. 최고경영자가 동문일 경우는 더 심각하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학교 차이에 대한 세평은 믿을 게 못 된다. 졸업생들의 활동이 ‘지금’ ‘현장에서’ 얼마나 공적으로 의미가 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분명한 공적인 잣대에 의해서 명문이라는 명예를 허락해야 한다. 그래서 그 명예가 떠도는 소문 덕이 아니라 학교 구성원들의 절차탁마의 산물이자 공적인 평가의 결과여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기술의 명문, 예술의 명문, 사회봉사의 명문, 공동체의 선구자를 배출한 명문 등의 다양한 명문들을 기대해 본다. 명문이라는 단어는 그 아름다운 이름에 몹시도 고약한 기능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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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의미
가족은 혈연관계와 사회경제적 활동의 기본 단위로 오래 기능해왔다. 시대에 따라 교육과 신앙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또 사회계급적 자산으로서의 기능도 있다. 이러던 가족이 무언가 변화를 맞고 있다. 독신 생활은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고 이제는 동성끼리도 결혼을 하겠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법적으로 인정받기까지 한다. 가족이 수행해온 성적인 분업 체계도 흔들리는 것이다. 가족이란 낱말의 뜻도 재고해 보게 된다.
농경사회는 대가족제도가 유용했고, 시민사회는 핵가족제도가 적절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개별화되고 있다. 그리고 각자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세상에 이렇게 가혹한 경쟁 사회가 또 있을까 하는 한탄이 나온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모든 사람이 기러기가족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이럴 때 가족이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즐거움보다는 지겨움과 불편함, 그리고 부담감만 주고 있는 제도 아닌가? 그러면서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가족한테 문제가 생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만 앞선다.
이제는 하나하나 작은 가족보다는 더 큰 의미의 사회공동체의 안위를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공동체가 다양한 종류의 가족을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독신가족, 한부모가족, 조손가족, 동성가족 등만이 아니라 가칭 공동거주가족이라든지 조합가족이라든지 아니면 옛날 수양부모가 있었던 것처럼 서로 배려하고 후원해주는 수양가족, 혹은 후원가족 등의 다양한 기초 단위가 필요하다. 적극적으로 민법의 개정도 필요하다.
우리는 어느새 아무런 준비 없이 다른 시대에 들어서버린 것 같다. 그리고 무언지 모를 어두컴컴한 시대에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내던져버리지 않았는가 하는 걱정이 앞선다. 가족의 복원이 아니라 새로운 대안적 가족 제도가 필요하다. 그렇게 되면 가족의 대안적 의미와 함께 새로운 대안적 사회가 더 빨리 다가올 것이다. 제발 피곤한 사회가 아니었으면 한다.
김하수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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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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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키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키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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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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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신비 - 폴 할펀
허공의 유령
고전 소설인 웰스의 '투명인간' 중에는 빛이 몸을 통과하게 만드는 묘약을 발견한 어떤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그 조제약을 마셨을 때,그의 몸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단지 입고 있는 옷만이 보이게 되었다. 만일 오후 산책 시간에 그가 단지 모자, 장갑, 운동화, 그리고 선글라스만을 쓰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그 옷만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광경을 보고 있는 동안 투명인간이 이런 모든 물체들과 연결되어 있고, 그들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고 결론 내릴 것이다. 몇 년 전 한때 '보이지 않는 개'라고 불리던 히트상품이 있었다. 이 물건은 개 주인이 진짜 개를 산책하러 데리고 나가는 것처럼 특별히 고안된 개줄로서 진짜 개를 키우기를 원하지 않으면서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기분을 내게 해 주는 것이었다. 만일 정상적인 사람이 이 '보이지 않는 개' 를 데리고 거리로 나온 광경을 본다면,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그 줄의 끝에 묶여 있다고 생각할까? 물론 아니다. 이러한 '애완견'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윙크를 하고 마치 진짜 애완견을 본 것처럼 행동할지도 모르지만, 개가 진짜로 묶여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항성이 은하 안에서 움직이는 방법을 관찰해 보면, 그리고 은하들이 은하단 내에서 움직이는 방법들을 보면 거기에는 마치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무엇이 이런 천체들을 강하게 잡아당기는가? 마치 웰스의 소설에 나오는 투명인간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과연 있을까? 또는 일시적 유행이었던 '보이지 않는 개' 처럼 그것은 단지 환상일 뿐인가? 아마도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하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우주 공간에 암흑 물질이 매우 많이 분포한다는 증거가 계속 발견되었고 축적되어 왔다. 수십 년 동안 과학자들은 별과 은하들의 운동이 단지 보이는 물질의 중력적인 작용에 의해서만은 완전히 설명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30년대 초반에 네덜란드의 천문학자인 오르트(Jan Oort)는 은하계 밖의 별의 역학적 상태를 좀더 잘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운동을 연구하였다. 특별히 이 연구에서 오르트는 은하 평면의 위쪽과 아래쪽에 있는 별들까지의 거리를 측정하였으며, 그러한 높이와 깊이에 별들을 붙잡아 두려면 은하계가 어느 정도의 질량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를 계산하였다. 마치 용수철에 매달린 무게추처럼 은하계의 별들은 위아래로 흔들리면서 움직인다. 별들의 그러한 진동 운동의 폭은 자신을 제외한 은하의 나머지 부분의 질량에 의한 중력 작용에 의존하고 있다.
오르트는 이러한 작용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은하의 질량은 보이는 모든 물질을 모두 더한 것의 3배쯤 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르트가 별에 대한 연구를 하던 거의 같은 시기에 스위스계 미국인인 츠비키는 보이는 우주 이외의 물질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강력한 증거를 내놓았다. 츠비키는 머리털자리 은하단에 있는 은하들의 운동을 분석하여, 이들을 묶어 두는 데 필요한 중력적인 힘을 만들기까지 질량이 어느 정도 필요한지를 알아 냈다. 놀랍게도 그는 관측되는 물질을 더한 값의 300배 정도의 질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산해 냈다. 그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머리털자리 은하단의 대부분의 질량은 암흑 물질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암흑 물질의 존재에 대하여 초기에 제시된 가장 믿을 만한 증거는 아마도 1970년대에 워싱턴에 있는 카네기 연구소의 루빈(Vera Rubin)과 그의 동료들이 제시한 것일 것이다. 이들은 은하의 회전 곡선을 연구하고 있었다 은하의 회전 곡선은 별들과 기체들의 속도를 은하의 중심으로부터 거리에 대하여 그래프로 그린 곡선이다. 행성의 속도와 태양으로부터의 거리를 같이 그린 행성 회전 곡선은 태양계의 경우 케플러의 법칙으로 정확히 기술할 수 있다.
[머리털자리 은하단]
태양계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물질은 태양이라고 불리는 중심부에 주로 집중되어있기 때문에 행성의 속도는 그들의 거리가 증가함에 따라서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명왕성은 수성의 속도보다 훨씬 느리게 태양 주위를 돈다. 만일 나선은하의 질량이 우리 은하처럼 보이는 은하 물질의 배열에 따라 분포되어 있다면 회전 곡선은 급격히 떨어지는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대부분의 질량이 은하 중심부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있기 때문에 , 별들의 회전 속도는 거리에 따라서 감소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은하의 회전 곡선은 급격하게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우리 은하, 안드로메다 그리고 다른 나선 은하들의 경우에 그렇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거리에 따라 감소하는 대신에, 이러한 은하들의 회전 곡선은 평평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별들의 속도는 원반 부분에 걸쳐서 일정한 값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런 은하들의 질량이 중심의 불룩 튀어나온 부분에 모두 집중되어 있다기보다는, 전체에 걸쳐 고르게 퍼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은하의 원반 부분에 상당량의 암흑 물질이 존재하는 경우를 나타내는 것이 된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밖의 다른 연구들도 우주의 90% - 어쩌면 아마도 99% 이상 - 의 물질들은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할 수 없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는 증거를 계속 제공하였다. 암흑 물질은 은하의 영역 내에서 많이 나타난다. 또한 은하와 은하 사이의 우주 공간에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실험을 통하여 알려졌다.
암흑 물질은 심지어 허공의 내부와 같은 은하가 없는 영역에서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허공은 결국 완전한 빈 공간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관측에 망원경을 사용한 이후에도 우주에 있는 물질 중 단지 일부만이 파악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천문학자들은 단지 빙산의 꼭대기만을 보아 왔을 뿐이다. 이 경우를 다음과 같은 비유로 표현할 수 있다. 우주는 그 모습을 영원히 우리의 시야로부터 감추었고 빙산의 일각처럼 단지 10%혹은 그 이하의 모습만 표면 위로 나타낸다. 우주에서 가장 많이 존재하는 이 신비의 물질은 무엇인가? 많은 이론들이 최근 몇 년 동안 이 암흑 물질의 본질을 제시하여 왔다. 제시된 후보들은 3개의 범주로 구분할 수 있다. 작은 크기로 압축된 무거운 물질(MACHOs Massive Compact Halo Obiects), 약한 상호작용을 하는 무거운 입자(WIMPsinWeakly Interacting Massive Particles), 그리고 무거운 중성자들이 그것이다. 전자의 두 용어는 의문에 싸여 있는 암흑 물질의 실제를 말하지는 못하며 단지 발견된 장소만을 알려 줄 뿐이다. MACHOs는 은하의 가장자리 영역에 존재하는 무거운 물체이다. 이러한 물체들은 관측을 통하여 구분할수 있는 복사를 내고 있지 않으며, 단지 다른 물질과의 중력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다.
최초로 알려진 이러한 암흑 물질의 예는 1995년 3개의 천문학 연구팀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EROS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연구팀, OGLE라고 불리는 폴란드의 연구팀, 그리고 MACHO 계획이라 불리는 미국-오스트레일리아의 공동 연구팀이 그들이다. 가장 규모가 큰 세 번째 연구팀은 로렌스 리버모어 국립연구소의 알콕(Charles Alcock)이 팀장이며, 로렌스 리버모어의 베네트(David Bennett)와 UC 샌디에이고의 그리스트(kim Griest) 등이 협력하였다. 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의 스트롬로 산 천문대에 있는 지름 5피트짜리 망원경을 사용하였다.
연구팀은 대마젤란 구름에 있는 항성이 MACHOs에 의하여 중력 렌즈 효과를 일으키는 뚜렷한 예를 발견하였다. 중력 렌즈 효과는 지구와 멀리 있는 물체 사이에 존재하는 매우 무거운 물질이 멀리 있는 물체의 보이는 상에 영향을 준다는 일반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효과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다시 회상하면, 무거운 물체는 빛을 휘게 할 수 있고 심지어는 렌즈처럼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중력 렌즈의 경우 MACHO가 지구와 대마젤란 구름의 적색 거성 사이를 통과하게 될 때, 그 시간 동안 항성으로부터 지구로 오는 빛을 집중시키게 된다 증폭된 신호는 천문학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분석되며, 그들은 MACHO의 질량과 부피를 결정하는 데 이 자료를 사용한다. 우리 은하 내의 MACHOs의 존재는 이러한 항성의 일시적인 밝아짐과 어두워짐 현상에 의하여 예측되었다. 미국-오스트레일리아 연구팀의 경우, 적색 거성은 33일의 주기 동안 마치 자신의 겉보기 복사량이 증가된 것처럼 관측되었고, 그후 원래의 복사 상태로 돌아갔다. 그뒤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다른 이론들은 모두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명되었고, 이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매우 무거운 물질에 의한 중력 렌즈 효과의 신호라고 판단되었다.
[대마젤란 은하]
1996년 1월에 있었던 미국 천문학회 모임에서, 미국-오스트레일리아 합동 연구팀은 우리 은하 원반의 많은 부분이 MACHOs로 구성되어 있다는 강력한 증거를 보고하였다. 이런 증거는 새로운 일곱 개의 무거운 원반 물질의 발견을 통하여 제시되었다 그 연구자들은 대마젤란 구름의 중력 렌즈 효과를 사용하여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던 이들의 형태의 특징을 다시 연구하였다. 각각의 MACHOS의 크기와 질량은 태양 질량의 1/10에서 태양질량 정도의 범위에 걸쳐 있다 그들의 작은 크기와 어두움으로 미루어 보아 MACHOs는 아마도 백색 왜성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주계열 원반 항성에서 기원하였을 것이며, 태양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핵융합 에너지를 소진해 나갔을 것이다. 그들은 너무나 미약하게 빛을 발하는, 간신히 관측할 수 있는 정도의 어두운 항성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MACHOs중의 일부가 적색 왜성,혹은 갈색 왜성일 가능성이 있다 적색 왜성은 지나치게 차가우며 거의 빛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을 직접 찾아 낸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심지어 갈색 왜성은 거의 빛을 내지 않는다. 그들은 핵융합을 시작할 화학 물질의 질량이 부족한 별들 중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론가들에 의하여 제시된 또 다른 MACHOs의 후보자들은 목성 크기의 행성, 중성자별, 그리고 블랙흘 등이다. MACHOS는 전체가 백색 왜성으로구성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백색 왜성이 부분적으로라도 다른 후보자들과 혼합되어 있는 형태로 추정된다.
현재 과학자들은 MACHOs가 은하의 모든 암혹 물질의 절반 정도이거나 아마도 그 이상을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불행하게도, 은하 내에서 상당 부분의 보이지 않는 물질이 아직 설명되지 못한 상태로 남겨져 있으며, 나머지 우주의 암혹 물질의 실제적인 양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천문학자들은 은하 내의 남은 암혹 물질이 WIMPs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하였다. WIMPs는 보통의 물질들과는 잘 반응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는 물질들을 넓은 범위로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들은 엑시온(axion : 초기 우주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무거운 물질), 초대칭 입자들 그리고 다른 생소한 종류의 준원자 입자들을 포함한다. 어떻게 WIMPs를 탐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과학자들은 그들을 거대한 입자 충돌 장치에 놓고 일반적인 입자와 매우 높은 속도로 충돌시켜 보기도 하였는데, 이는 색다른 부산물을 기대해 본 실험이었다. UC 버클리의 스노든-이프트(Daniel Snowden-Ifft), 프리먼(Eric Freeman), 그리고 프라이스(Buford Price)는 자신들이 좀더 좋은 방법을 개발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WIMPs와 충돌했다는 흔적을 찾기 위하여 5억 년 이상 된 작고 얇은 암석의 박편을 조사하였다. 포착하기는 힘들지만 암석 내의 화학적 전이가 과거의 WIMPs의 충돌 흔적의 좋은 증거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입자 이론에 따르면, 만일 WIMP가 하나의 암석과 충돌하게 되면, 작기는 하지만 그것은 약간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 변화는 암석의 원자핵 중 하나가 움직이게 되는 것으로 이런 원자핵의 이동은 전자가 차례로 다른 원자핵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변화가 일어나도록 한다.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된 원자의 흔적이 암석 전체에 걸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현상의 흔적이 버클리 연구팀이 찾으려 하는 화학적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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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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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곤일척(乾坤一擲)
乾:하늘 건, 坤:땅 곤, 一:한 일, 擲:던질 척 (동의어) 일척건곤(一擲乾坤) ① 운명과 흥망을 걸고 단판걸이로 승부나 성패를 겨룸.
② 흥하든 망하든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결행함의 비유. 《出典》한유韓愈의 詩 과홍구'過鴻溝'
이 말은, 당나라의 大文章家인 한유가 河南省 內의 鴻溝를 지나다가 그 옛날(B.C 203),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乾坤一擲'을 촉구한 張良, 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 <과홍구(過鴻溝)>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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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당나라의 대문장가인 한유가 홍구[鴻溝: 하남성(河南省)내]을 지나다가 그 옛날(B.C. 203), 한왕(漢王) 유방(劉邦)에게 ‘건곤일척’을 촉구한 장량(張良), 진평(陳平)을 기리며 읊은 회고시<과홍구(過鴻溝)>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용은 지치고 범은 피곤하여 강을 나누니[龍疲虎困割川原(용피호곤할천원)]
만천하 백성들의 목숨이 보존되는도다 [億萬蒼生性命存(억만창생성명존)]
누가 군왕에게 말머리를 돌리도록 권하여[誰勸君王回馬首(수권군왕회마수)]
진정 ‘건곤일척’의 성패를 겨루게 했는가[眞成一擲賭乾坤(진성일척도건곤)]
역전(歷戰) 3년만에 진(秦)나라를 멸하고(B.C. 206) 스스로 초패왕이 된 항우는 팽성[彭城: 서주(徐州)]을 도읍으로 정하고 의제(義帝)를 초나라의 황제로 삼았다. 그리고 유방을 비롯해서 진나라 타도에 기여한 유공자들을 왕후(王侯)로 봉함에 따라 천하는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의제가 시해되고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어 온 제후들이 각지에서 반기를 들자 천하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항우가 제(齊), 조(趙), 양(梁)의 땅을 전전하면서 전영(田榮), 진여(陳餘), 팽월(彭越) 등의 반군을 치는 사이에 유방은 관중(關中)을 합병하고, 이듬해 의제 시해에 대한 징벌을 구실로 56만의 대군을 휘몰아 단숨에 팽성을 공략했다. 그러나 급보를 받고 달려온 항우가 반격하자 유방은 아버지와 아내까지 적의 수중에 남겨둔 채로 겨우 목숨만 살아 형양(滎陽:하남성 내)으로 패주했다.
그후 병력을 보충한 유방은 항우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다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싸움을 멈췄다. 항우는 유방의 아버지와 아내를 돌려보내고 팽성을 향해 철군 길에 올랐다. 이어 유방도 철군하려 하자 참모인 쟝량과 진평이 유방에게 진언했다.
“한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도 따르고 있아오나 초나라는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는데다가 군량마저 바닥이 났사옵니다. 이야말로 하늘이 초나라를 멸하려는 천의(天意)이오니 당장 쳐부숴야 하옵니다. 지금 치지 않으면 ‘호랑이를 길러 후환을 남기는 꼴[養虎遺患(양호유환)]’이 될 것이옵니다.”
여기서 마음을 굳힌 유방은 말머리를 돌려 항우를 추격했다. 이듬해 유방은 한신(韓信). 팽월 등의 군사와 더불어 해하[垓下:안휘성(安徽省) 내]에서 초나라 군사를 포위하고 ‘사면 초가(四面楚歌)’작전을 폈다. 참패한 항우는 오강(烏江:안휘성 내)으로 패주하여 자결하고, 유방은 천하 통일의 길로 들어섰다.
[주] 관중 : 감숙성(甘肅省) 동부의 산지(山地)에서 발원(發源)하여 섬서성(陝西省) 중부를 흐르는 위수(渭水:황하의 큰 지류) 유역의 평야(분지)를 가리킴. 옛부터 정치, 군사상의 요지로서 주(周), 진(秦), 한(漢), 당(唐)나라는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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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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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3 시련을 딛고
작은 별 - 김경숙
"안녕하셨어요, 유 소령님?"
누운 채 손을 내밀어 때늦은 카드며 선물을 받아드는 유 소령님의 눈에는 그렇게 봐서 그런지 쓸쓸함이 스쳤다. 내가 유 소령님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2월 중순경, 군 계통 병원 근무를 하게 된 지 한 달도 못돼서였다. 토요일 오후, 일직인 나는 병실을 차례로 돌고 있었다. 정형외과 D동 장교실에 들어섰을 때 경환자들이 모두 주말 외출을 나가고 6인용 방에는 그분 혼자 계셨다. 장교실이라야 커튼을 하나 사이에 두고 외출이 금지된 사병 오륙십 명과 격리되어 있는 곳이지만, 커튼과 계급이 주는 단절이란 대단했다.
나는 방에 들어서면서 멈칫했다. 환자의 인상이 놀랄 만큼 날카로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측정을 마치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손에선 땀이 다 났다. 오랜 병상 생활을 한 환자들은 이유 없이 신경질을 내게 마련인데 아무 잔소리를 안 듣고 나온 게 다행이다 싶었다. '소령 유호철. 우측골 및 좌대퇴 복합 골절.' 몇 달 후인 5월, 나는 바로 그 정형외과 D병동으로 배치되었다. 순간 까다로울 그 소령의 얼굴이 떠올랐다. D동 근무 사흘 뒤, 엄 중위란 해군 장교가 양쪽 다리 골절로 급히 후송되어 왔다. 골절 환자는 특히 고통이 심하므로 조심스럽게 처치를 하고 나오려는데 유 소령님이 나를 불렀다. '이크, 드디어 신경질이 터지나 보다.' 잔뜩 각오를 했더니, 뜻밖에 엄 중위를 잘 보살펴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잘 부탁한다는 당부였다. 나는 차츰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겉보기와는 달리 온화한 성품이었다.
1970년 6월, 육사 출신으로 최전방에 근무하던 그는 무장 공비와의 접전 끝에 양쪽 대퇴와 측골에 탄환이 다섯 발이나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다. 몇 차례 수술로 총알이 박힌 다리의 뼈를 3센티미터씩 잘라 내고 다행히 다리를 절단하는 불행은 면했지만 가슴까지 석고 붕대를 하고 누워 있어야만 했다. 몇 달에 한 번씩 수술 결과를 보기 위해 잠깐씩 석고 붕대를 뺄 때 이외에는 식사는 물론 세수 둥 모든 일을 누워서 치뤄야 했다. 몸을 뒤척일 수 없는 건 말할 나위도 없고, 수술 부위의 통증 또한 대단했다. 매일 몇 차례씩 맞는 항생제에다, 링거액은 바늘을 뺄 새도 없이 병만 바꿨다. 새벽 네 시에 바늘을 꽂아 이튿날 새벽 한 시에서 두 시 사이에 자유로운 한쪽 팔마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곁에서 보다 못한 사람들이 똑똑똑 떨어지는 포도당액을 더 빨리 떨어지게 해놓으면 유 소령님은 벌컥 화를 냈다.
"포도당이란 몸 안에 필요한 농도가 넘으면 배설되지 않는가. 잠깐 편하자고 빨리 맞아 그냥 내보내면 내 고생의 보람이 뭐겠나?"
이렇게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좌절감에 빠진 다른 환자들을 격려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누워 있는 환자에게 여름은 특히 괴로웠다. 찌는 듯 더운 저녁 나절이면 나는 유소령님의 침대를 밀고 베란다로 나가 음악을 듣곤 했다.
"미스 김은 내게 어느 별을 주겠어?"
"물론 가장 크고 밝은 별을 드려야죠. 저기 저거요."
"아니, 나는 그 옆의 조그만 별을 늘 보아 왔어. 그게 나야. 너무 작고 희미해서 잘 안 보이지만 개인 날이나 흐린 날이나 늘 그렇게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어느새 또 나타나 깜박이거든."
침대에 누운 채 밤 하늘의 별을 헤며 독백 같은 말을 하는 그의 곁에서 나는 말을 잃고 있었다. 그가 입원한 지 만 3년이 되던 6월 29일, 나는 꽃을 한 묶음 사들고 그의 병실로 들어갔다.
"어머나, 아무도 안 왔어요? 오늘이 기념일이잖아요."
"누가 남의 불행을 오래 기억해 주겠어?"
그날만은 그도 언짢은지 평소와는 다른 기색이었다.
"그럼 저라도 축하해 드릴게요."
나는 뒤에 숨겼던 꽃다발을 내밀며 애써 명랑하게 말을 꺼냈지만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제 나는 그곳을 떠났다. 그 무섭게 덥던 여름, 공연히 울적했던 가을도 지나고, 크리스마스며 설날도 차례로 지났다. 명절때마다 쾌활한 친구들에게 에워싸여 떠들썩하게 웃다가도 문득 유 소령님의 담담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서 흰 눈이 온누리를 덮은 오늘, 난 갑자기 그의 병실을 찾아 달려온 것이다. 그동안 다소 차도가 보여 휠체어를 타고 물리치료를 받다가 병이 재발하여 수술을 기다린다는 유 소령님. 난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을 바라보며 부디 유 소령님이 석고 붕대를 떼고 일어나, 강인한 인내력의 승리를 외칠 날이 빨리 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간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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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인생은 험난한 항해
'꿈과 이상'은 젊음의 상징이며 인생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예로 미국의 극작가 유진 오닐의 희곡 '지평선 저 너머'는 꿈과 이상이 인생에 있어 얼마나 뜻깊고 중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하는 작품입니다.
앤드류와 로버트는 농부의 아들입니다. 형 앤드류는 건실하고 땅을 사랑하는 전형적인 농부 스타일인 반면, 동생 로버트는 몸이 약하고 시적인 성향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늘 저 산 너머에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미지의 나라를 동경하며 책을 벗삼아 오직 꿈을 그리며 살았습니다. 그들과 가까운 농장에는 루우스라는 평범한 처녀가 있었는데 앤드류는 일찍부터 그녀를 사랑했고 결혼을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동생 로버트의 소망이 이루어져 그는 지평선 너머 먼 곳에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데 정작 떠나는 날 밤, 무슨 미련이 생겼는지 루우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그러나 형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의 시적인 대화에 감동된 루우스는 자신이 진정 사모한 사람은 로버트라며 곁에 있어 달라고 애원합니다.
로버트는 자신이 동경했던 아름다움과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평생을 꿈꾸어 왔던 여행을 중단한 채 루우스와 결혼을 해버립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형 앤드류는 깊은 절망에 빠져 로버트가 타려던 배를 타고 떠나 버립니다. 작은 운명의 장난으로 시인이던 로버트는 농장을 맡게 되고 농부인 앤드류는 선원이 되는 순간, 비극은 시작됩니다. 병약한 로버트는 사랑을 얻은 기쁨에 열심히 농장을 가꾸었으나 농장 경영에 실패하고 빈곤의 구렁텅이에 허덕이다 폐병을 앓게 되고, 루우스도 고달픈 생활에 청춘의 아름다움이 퇴색해 버립니다. 형 앤드류 또한 배에서 내린 후, 사업에 실패하고 황금만능을 추구하다 지난날의 생활이 무의미했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처절한 비극의 종장에 가서야 로버트는 병상을 뛰쳐나와 태양이 솟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고 숨을 거둡니다.
"이제 나에게도 행복이 찾아왔다. 자유를 얻게 된다. 영원히 자유로워진다."
이 작품을 대하면서 젊은날에 가졌던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 계획을 끝까지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비극에서는 모든 순간이 영원이고 희극에서는 영원이 순간이다.
In tragedy everymonemt is eternity; in comedy, eternity is a moment. (C.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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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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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경에 숨어 있는 100가지 이야기 - 진현종
제1장 이것은 괴로움이다
열번째 이야기 - 스님을 쫓아다닌 여인
부처님이 사위국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그때 아난은 걸식을 하러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때마침 갈증이 나서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다. 그 여인은 아난을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물을 주고 나서 아난의 뒤를 밟아 그가 살고 있는 곳을 알아두었다. 그 일이 일어난 그날로 여인은 상사병으로 몸져 누워버렸다. 이에 어머니 마등은 딸에게 도대체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어머니, 오늘 우물가에서 아난이라는 스님을 만났는데 저는 그분에게 시집가고 싶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가지 않겠어요."
"아난은 스님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네 남편이 될 수 있단 말이냐?"
그러나 딸은 계속 울기만 하다가 마침내 식음도 전폐했다. 그러자 마등은 주술을 사용해서 아난을 식사에 초대했다. 딸은 뛸 듯이 기뻐했다. 식사를 마치자 마등은 아난에게 물었다.
"제 딸년이 스님에게 시집가고자 하는데, 스님의 의향은 어떠신지요?"
"저는 불제자로 계를 지키는 사람이라 결혼을 할 수 없습니다."
"제 딸은 스님에게 시집가지 못하면 자살하고 말겠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저는 불제자라 여인과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마등이 딸에게 가서 아난의 입장을 전하자 딸은 울면서 졸라댔다.
"그럼 문을 닫아걸고 아난을 나가지 못하게 하세요. 밤이 되면 제 남편이 될 수도 있을 거예요."
마등은 딸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겠기에 그녀의 말대로 문을 닫아걸고 주술을 써서 아난을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저녁때가 되자 마등은 딸을 위해 신방을 차려주었다. 딸은 기뻐하며 몸치장을 했다. 그러나 아난은 절대로 신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마등은 뜰에 불을 피워놓고 아난의 옷을 끌어 당기며 협박했다.
"당신이 끝내 내 딸년의 소청을 들어주지 않겠다면, 당신을 저 불속에 집어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난은 그때부터 부처님께 기원하기 시작했다. 부처님은 곧 아난이 처한 위기를 파악하시고 신통력을 써서 아난을 구출해냈다. 아난은 부처님에게 전후사정을 자세히 알려드렸다. 아난이 탈출한 사실을 알게 된 마등의 딸이 다시 울어대자 마등이 말했다.
"그는 불제자라 나의 주술로도 어쩔 수가 없구나."
마등의 딸은 계속 아난만 생각하다가 급기야 아난의 뒤를 졸졸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아난은 애써 피해다녔지만 그녀는 지칠 줄 모르고 따라다니기를 그치지 않았다. 아난이 부처님 계시는 곳으로 돌아가버리자 그녀는 문 앞에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다. 아난이 다시는 문 밖으로 나오지 않자 그녀는 그제서야 울면서 자리를 떴다. 그때 아난이 부처님께 말했다.
"마등의 딸이 오늘 저를 따라왔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마등의 딸을 불러오게 해서 물었다.
"너는 왜 아난의 뒤를 따라다녔느냐?"
"저는 아난의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아난은 사문이라 삭발을 했다. 너도 삭발을 한다면 아난을 남편으로 맞게 해주겠다."
"그렇다면 저도 머리를 깎겠습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가 네 어머니에게 알리고 삭발을 한 후 다시 오너라."
마등의 딸은 어머니에게 부처님이 한 말씀을 전했다. 이에 마등이 말했다.
"나는 너를 낳아 기른 어미다. 그런데 너는 스님의 아내가 되고자 삭발하고 속세와 인연을 끊을 참이냐? 마음을 고쳐먹고 성안의 큰 부자와 혼인을 하도록 하여라."
"저는 죽는 한이 있어도 아난의 아내가 되겠어요."
"너는 어찌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려고 하느냐?"
"어머니, 저를 사랑하신다면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마등은 딸의 마음을 돌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출가를 허락하였다. 딸은 곧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와서 말했다.
"제가 머리를 자르고 왔습니다."
"너는 아난의 어디를 사랑하느냐?"
"저는 아난의 눈, 코, 입, 귀 그리고 목소리, 심지어 걸음걸이까지 사랑합니다."
"눈 속에는 눈물이 있고, 코 속에는 콧물이 있고, 입 속에는 침이 있다. 또 귀속에는 더러운 때가 들어 있으며 몸 속에는 오줌과 똥같이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들어 있다. 또 남녀가 부부관계를 맺으면 자식을 보게 되고, 자식이 생기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슬픔을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몸에 집착할 게 뭐가 있단 말이냐?"
마등의 딸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비로소 깨달은 바가 있어 아라한의 도를 이루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사실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아난이 있는 곳에 가보도록 하라."
그녀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숙이고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리석은 탓에 앞 뒤 모르고 아난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음이 열려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을 만난 것 같고, 배를 타고 평안한 섬이 이르게 된 것 같습니다. 또 시각장애인이 부축해주는 사람을 만난 것 같고, 노인이 지팡이를 얻게 된 것과도 같습니다. 바로 부처님께서 저에게 가르침을 주셔서 마음이 열린 것입니다."
이때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에게 여쭈었다.
"이 여인의 어머니는 주술을 행하는 사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찌 그 딸이 아라한의 지위를 얻게 된 것입니까?"
"비구들아, 마등의 딸은 오백세에 걸쳐 아난의 아내였다. 그들은 그 오백세 동안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부부였다. 그 인연으로 오늘 내 가르침 안에서 도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옛날의 그 부부가 다시 만나 형제같이 되었으니, 이런 불도를 어찌 닦지 않겠느냐?"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비구들은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설마등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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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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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우국 충정의 상승장군 이순신 (2/2)
한산도, 부산포 대첩
육지에서는 무인지경으로 진격하던 왜군이 해상에서 이순신에게 연패를 당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노하여 와키사카, 구키, 가토 3인의 수군장이 힘을 합쳐서라도 단시일 내에 조선 수군을 격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개전 이후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을 아예 도외시하고 육전에 참가하고 있었는데 이 명령을 받고는 부산에 총집결하기로 하였다. 또 이순신의 관할인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육지에서도 금산 부근의 병력을 증강시킨 후 서진 태세를 갖추고 있어서 이순신은 수륙 양면으로 협공받는 처지에 놓였다. 이에 이순신은 왜군이 합동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선제 공격으로 적의 예봉을 차단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3차 출격을 위해 다시 원균, 이억기와 합세한 후, 대격전을 앞두고 7월 7일 당포에 닻을 내렸다. 당포에서 적정을 탐지해 보니 70여 척의 적선이 견내량(현 통영)에 나타나 있었다. 이 왜군 전선들은 와키사카 지휘부대로서 다른 부대가 채 집결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전공을 얻기 위해 단독으로 출동한 상태였다. 견내량은 우리 나라 남해안의 일반적인 특성 그대로 지형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내해에서는 대규모 해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결국 진격을 포기하고 또다시 적군을 외양으로 유인해 섬멸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그 유명한 한산대첩의 막이 다시 드디어 오르고 있었다.
여기까지 전쟁 발발 후 전투과정을 보면 이순신의 작전 수행상의 특성을 알 수 있다. 우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내해에서의 전투를 지양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대로 남해안의 복잡한 지형을 충분히 숙지한 결과이며 혹시라도 전세가 불리한 적군이 육지로 도망하여 내지에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두 번째로는 적선과 아군 전선의 구조적 차이와 적군의 전투방법까지 파악한 다음 대처하고 있는 점이다. 왜군의 배는 먼 거리를 이동하여 원정해야 하는 만큼 빠른 속도를 내기 위해 배의 모양이 가늘고 길며, 바닥은 뾰족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반면에 조선의 배는 주로 연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갑판이 넓고 배 밑바닥도 평평했다. 즉, 왜선은 안택선 또는 관선이라고 하는 형태였고, 조선의 함선은 판옥선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배는 왜선에 비해 속도는 느리지만 회전성이 좋았다. 그래서 추격하기에는 만만해 보이지만 유인 작전시 회전 반경이 적기 때문에 일시에 포위망을 형성하기 쉬웠다. 또 왜군의 전투 방법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활이나 총통 또는 함포 공격을 하기보다는 자기 배를 상대편 배에 접근시킨 후 판자로 양 배를 연결시킨 다음 병력이 상대편 배로 돌입하는 백병전에 능했다. 그런데 조선 배들은 갑판이 상당히 높아서 왜군 전선들과 근접해도 병력들이 건너오기 좀처럼 힘들게 되어 있었다. 더구나 거북선은 갑판 자체가 철판으로 덮여 있는 데다가 그 위에 뾰족한 쇠못까지 촘촘히 박혀 있어서 적군이 기어오를 수조차 없었다.
세 번째로는 아군에게 유리하고 적군에게는 불리한 전법을 구사했다는 점이다. 이른바 학익진이라는 것으로서 적선을 자신이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한 뒤 일거에 포위하여 집중 공격하는 전법이다. 이렇게되면 왜선은 회전 반경이 크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아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이때에 판옥선의 높은 갑판에서 활을 비오듯이 쏘면서 집중 포화를 퍼부어 대면 왜군은 속수무책으로 궤멸되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철갑선인 거북선이 왜선에 그대로 돌진하여 충돌하면 길기만 하지 충격에는 약한 왜선은 동강이 나거나 파손되어 제기능을 잃고 침몰하기 일쑤였다. 이렇게 이순신은 양국 전선의 차이를 파악하여 적의 단점을 이용하고, 아군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작전 환경을 조성한 후 전투에 임했기 때문에 싸우면 싸우는 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한산도 싸움에서도 그러한 이순신의 전법의 백미를 볼 수 있다. 우선 5척의 전선으로 하여금 적의 선봉선을 공격하여 적을 유도하자 적군은 일제히 추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적군이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전 함대가 뱃머리를 급선회하여 왜군의 좌우양편으로 마치 학이 날개를 편 것처럼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퍼부었다. 그 결과 왜선 73척 중 42척을 격침시키고 17척을 나포하는,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대승리를 거두고 임진왜란의 전세가 바뀌게 되었다.
한산대첩 이후에도 이순신은 안골포(현 창원군 웅천면)까지 이동하여 또 다른 왜군 함대를 발견했다. 이곳에 있던 왜군들은 구키와 가토 휘하의 부대들이었는데 와키사카 군의 대패 소식을 들었는지 끝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부득이 조선 수군은 각 전선들이 교대로 공격하는 작전을 펴서 하루 종일 격전을 계속한 끝에 왜군 선단을 대부분 격파하였다. 이후 근처 도서를 샅샅이 수색하였으나 더 이상의 왜선을 발견하지 못하자 7월 13일에 좌수영으로 귀환하였다.
이렇게 3차에 걸친 출동 결과 가덕도 서쪽 방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이순신은 왜군의 본진이 있는 부산포 공략을 마음놓고 추진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또한 신중한 이순신의 작전 수행 방법을 잘 알 수 있다. 즉, 완전한 승산이 있기 전까지는 절대로 섣불리 공격하지 않았으며, 승리가 확실시되더라도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고려하였다. 그러나 일단 결정된 이후에는 불굴의 용기와 멸사의 정신으로 공격에 임하여 반드시 승리를 쟁취하였다. 이순신은 드디어 8월 24일에 전라 좌, 우수영 소속 166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부산을 향해 출격하였다. 이제 양국 해군의 본진이 운명을 건 대결전을 눈앞에 두게 된 것이다.
9월 1일에 절영도(현 영도)에 이르러 적정을 탐색해 보니 왜선 약 500척이 동쪽 해안에 세 개의 진으로 나뉘어 정박해 있었다. 왜군은 조선 수군의 공격을 받고도 승선하여 해상전을 전개하려 하지 않고, 이미 요새화한 부산포 내에 틀어박혀 강력한 저항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군의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전면적인 직격 작전을 감행하였다. 종일토록 치열하게 전투한 결과 1,00여 척의 적선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둘 수 있었지만, 아군도 상당수의 사상자를 내는 등 피해가 컸다. 특히 매전투마다 앞장섰던 녹도 만호 정운의 전사는 이순신의 마음을 애통하게 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연승으로 조선 수군은 남해에서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고, 이에 따라 전라 좌수영은 여수에서 한산도로 본영을 옮겨갔다. 이것은 한산도가 남해 제해권의 목줄에 해당되는 요처이기 때문에 이곳에 본영을 구축해야만 왜군의 서쪽 해상 진출을 효과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왜군 중심 세력을 그의 공격권 안에 두어서 언제라도 격멸시킬 기회를 엿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산도는 원래 이순신의 관할 구역 밖이었으므로 실제로는 그의 부대 이외에는 왜군과 대적할 만한 조선 수군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결국 조선 조정은 이러한 사정을 참작하여 선조 26년(1593년) 8월에 그를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여 수군의 지휘권을 일원화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순신의 나이 49살로 무관으로 과직 생활을 시작한 지 17년만에 무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영광이라기 보다 자신이 무너지면 조선 수군 전체가 궤멸된다는 엄청난 책임감이 과중되는 자리이기도 하였다. 또한 한산도는 왜군의 전진 기지가 설치되어 있는 거제도와는 빤히 마주 보이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 수역은 남해에서 쌍방간 동서로 진출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세력을 잃으면 남해의전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이렇게 해상에서는 긴박한 대치 국면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에 명군과 왜군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고 있었다.
왜군은 육지에서 전승가도를 달리고는 있었지만 명군의 참전으로 전쟁의 양상이 소강 상태를 보이고, 해상에서의 연패로 후방이 교란되고 잇었으므로 강화회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명군은 명군대로 전쟁을 속히 끝내고 귀국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므로 강화회담은 조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침략군과 참전군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도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별수 없이 강화회담 추이에 관심을 기울이는 수밖에 없었다.
모함과 백의종군
강화회담이 지루하게 진행되자 해상에서도 정면 충돌이 억제되고 있는 가운데 이순신은 끊임없이 적의 동태를 면밀히 감시하면서 군비 보강과 군사 훈련에 몰두하였다. 이에 따라 거제도 서쪽의 외딴섬에 불과했던 한산섬은 최전방 해군 요새이자 조병창이며 완벽한 군수 조달지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많이 줄어들고 대치 상태가 지속되자 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해묵은 불화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수군 총지휘자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도 나이도 많고 선임이었던 점을 내세워 항상 불만을 가지고 독단적으로 행동하였다. 더구나 원균은 조정의 고관 대작은 물론 왕까지도 잘 알고 있었으나, 이순신은 류성룡이나 이원익 이외에는 별다른 후원자가 없었다. 말하자면 원균은 전형적인 정치 군인이었고 이순신은 야전 군인이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부득이 이순신을 수군 최고 책임자로 임명하였으나 원균과 조정은 그 권위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리고 원균은 임진년 전투 과정에서 자신의 지휘 병력을 잃어버린 입장이면서도 대책과 능력도 없이 강공만을 주장하다가 대부분 이순신에 의해 배척되자 불쾌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순신이 전라 좌도 수군 책임자이면서도 경상도 수군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에서 경상도 수역의 제일선까지 담당하여 싸우면서 전승을 거두자 자존심마저 상해 있었다.
사실 왜란이 발생하고 육지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는 당시 전황에서 이순신마저 해상에서 적을 막지 못했다면 왜군은 육로뿐 아니라 수로를 통하여 서해로 진격하여 육해군 협격으로 조기에 조선 조정을 항복시켰을 것이다. 그 같은 사실은 그 후 청군 침입시 적군의 침입로를 한 곳에서도 막지 못하자 일거에 무너졌던 점을 대비하여 보면 여실히 증명된다. 어쨌든 원균은 이순신의 지휘권을 부단히 무시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를 전공에 대한 불만때문에 야기된 갈등으로 단순히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부득이 원균을 경상 우수사에서 충청병사로 전보시키면서도 이순신의 지휘관으로서의 통제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력 수군은 이순신이 만들어 놓은 전라 좌수영군이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순신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강화 회담이 진척되지 않아 대치 상태가 길어지자 선조를 위시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의 전략 그 자체를 불신하기 시작하였다. 뾰족한 방법도 없으면서 항상 승리했던 수군이 왜군을 격멸시킬 수 있다고 기대한 때문인지 이순신에게 공격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져 있었다. 당시 왜군들이 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고 강화 회담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따라서 왜군을 격파하려면 육지에서 견딜 수 없는 공격을 가하여 바다로 몰아내고 이순신의 수군이 퇴로를 차단하여 이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섬멸하는 작전을 펴야만했다. 따라서 명군은 강화 회담에만 매달려 있고 조선 자체 군사력으로는 왜군과 육지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의 수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해서라도 적을 공격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러한 무모한 공격의 결과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육상에서의 적극적인 공격을 요청하였다.
바다에서의 전투라면 또 모르지만 병력 수에서 절대 열세인 수군이 상륙하여 육상전을 감행하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만일 실패라도 하는 날에는 그나마 마지막 보루인 수군마저 궤멸되어서 조선은 군사적으로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린다는 판단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왜군은 강화 회담을 깨버리고 또다시 전면전을 불사할 것은 뻔한 이치였다. 이순신이라고 이 피말리는 대치 형국이 빨리 해소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난중 일기의 이 시기 부분을 보면 과중한 업무와 코앞에 적을 사령관으로서 신경이 곤두선 데다가 조정의 몰이해 때문에 괴로워하여 몸이 아프다는 기록이 수없이 나온다. 심신이 급속히 상하여서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처럼 팽팽하게 대치한 상태에서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움직이는 쪽이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병력과 장비, 전투력 모두에서 월등히 우세한 왜군이 남해안 일대에서 장기간 응거하면서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던 것도 이처럼 철저하게 버티고 있는 이순신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는 왜적이 자기 영토에서 5년간이나 머무르고 있는데도 육지에서는 한번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면서 이순신의 소극책만을 탓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에 대한 조정의 오해가 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략을 수정하지 않았다. 숨막히는 대치 상황에서 그 혼자 힘만으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왜군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움직이는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주위의 비판 때문에 이 전략을 수정하는 것은 자멸을 자초하는 것으로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선 조정의 입장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던 왜군은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이순신을 제거할 수 있는 계책을 꾸며내었다. 이른바 반간계를 수립한 것이다. 왜장 고니시는 또 다른 왜군 지휘관인 가토와 불화설을 조선측에 은근히 흘린 후 가토가 일시적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귀환하는 일정을 조선군에게 알려줄 테니 조선 수군이 매복했다가 이를 제거해 달라고 은밀히 요청하였다. 이 거짓 정보를 접한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출동을 명하였고 이순신은 왜군의 계략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동했다. 왜군의 함정을 의심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느라 출동이 다소 지연되기도 하였지만 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로 돌아온 뒤였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동을 지연하여 잡을 수 있는 왜장을 놓쳤다고 이순신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해졌으며 마침내 이순신을 문책하기로 결정했다. 이때에는 지금까지 이순신을 옹호해 주던 류성룡조차도 그를 더 이상 옹호해 줄 수 없었다.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지휘관을 의심만 하다가 결국에는 적의 반간계에 속아 처벌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조선은 적전에서 스스로 약점을 노출시킨 꼴이었다. 결국 이순신은 정유년인 선조 30년(1957년) 2월 25일에 신임 통제사 원균에게 그 직책을 인계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3월 4일에 투옥되었다가 재조사를 통하여 결백이 증명되자 4월 1일에 겨우 사면되어 또다시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 종군이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당시 권율은 계속 남쪽으로 이동 중에 있었는데 이순신은 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 그의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이용해서 먼길을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그리운 아들을 지척에 둔 4월 13일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당시 이순신 위로 두 형은 이미 오래 전에 병사하여 이순신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순신에 대하여 각별한 의지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통한의 심정을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뛰며 뒹구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고 적고 있다. 겨우 입관을 마치고 4월 19일에 다시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는 난중일기에 "울며 부르짖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따름이다."라고 그때의 아픈 마음을 적고있다.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진 상태에서 그가 경상도 초계에 있는 권율의 본진에 도착한 것은 50여 일이 지난 6월 8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권율의 자문 상대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7월 16일에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까지 전멸하였다는 급보를 접하게 되었다.
정유년 전투의 대승, 그리고 죽음
마침내 정유년 왜군의 재침이 시작된 것이다. 당황한 조선 조정은 8월 3일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하였고, 이에 그는 곧바로 순천을 거쳐 회령포(현장흥)에 도착해 보니 남아 있는 전선이라고는 12척에 불과하였다. 그가 그토록 애써 가꾸어 놓은 함대가 모두 궤멸되어 버린 것이다. 비통한 마음을 삼키며 8월 29일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겨서 다가올 전투에 대비하며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9월 14일, 왜군 수백 척이 재차 공격을 시도할 것이라는 정보를 듣고 명량 해협에서 이를 대적하기 위해 겨우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명량 해역은 일명 울돌목이라고 불리고 있었으며, 간조와 만조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대적을 상대하기 위해 넓은 바다를 피해 이 좁은 해역을선택한 것이다. 이순신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명량 해협은 조류가 빠른 데다 좁은 지형이기 때문에 100여 척의 적선은 행동이 부자유스러워 조선 수군은 적은 수의 함선으로도 적에게 포위되지 않으면서 오히려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믿을 수 없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둬 서해를 통하여 북상하려는 왜군의 의도를 또 한번 분쇄하였다. 명량 대첩 이후 고금도(현 완도)로 진을 옮기고 군세를 거의 회복해가던 이듬해(1598년)8월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왜군은 철병을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명군 제독 진인을 설득하여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기로 하고 11월 19일 새벽에 노량 해역에 집결해 있는 왜군을 기습하였다. 이리하여 양군 합쳐 1,000 여 척의 대선단이 서로 충돌하는 마지막 대해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싸움이 한창일 때 이순신은 적의 유탄을 맞고 홀연히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죽음을 안 것은 몸종 김이와 맏아들 회, 그리고 조카 완세 세 사람이었다. 그토록 일구월심 소원했던 왜적을 섬멸하는 마지막 전투의 절정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은 이제 모두 끝났다는 듯이 마지막 싸움의 대승을 뒤로한 채 험난했던 삶을 마감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왜선 200 여 척을 격침하는 전쟁발발 이래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렇게 이순신은 풍전등화 같던 조국을 수호하고 전장에서 최후를 맞은 참군인의 모습을 남긴 채 장렬히 산화하였다. 그리고 이 싸움을 끝으로 7년간 전화에 시달리던 조선도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또한 이 싸움의 결과가 이순신이 그 동안 취했던 전략이 맞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순신이 대치하고 있던 상태가 절대 적을 두려워 한 소극책이 아니라 현실적인 상책이었으며, 적을 바다로 끌어내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의 판단은 정확했던 것이다.
한 몸을 모두 던져 조국을 지켜냈던 그는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고 본가가 있던 아산의 어라산 기슭에 잠들었다. 5.16 군사 쿠데타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그에 대한 영웅화 작업을 추진하는 바람에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지만, 그의 멸사봉공과 우국충정의 정신만은 후세에 길이 기려야 될 본보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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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8. 변형
<세상의 모둔 번뇌일랑은 그대 가슴 속으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은총을 부어라. 즉각 뜻이 이루어지리니, 지금 당장 해보라>
자비 길은 바로 여기 있다. 주의 깊게 귀 기울여 숨 쉬는 것. 숨을 들이마시되,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마시라. 세상의 모든 어둠, 부정, 악을. 가슴으로 마시라. 그리고 그대의 모든 기쁨, 은총, 축복을 다해 숨을 내쉬라. 내쉬되, 그대 자신을 세상 속으로 부어라. 이것이 바로 자비의 길이다. 번뇌일랑은 가져가고 은총을 주는 것. 그러면 놀라운 일이 있으리니, 그대가 세상의 모든 번뇌를 끌어안는 순간 세상엔 고통이 사라질 것이다. 가슴은 곧 변화시키는 힘. 고통을 마시고 은총으로 변화시켜... 아 가슴은 고통을 마시고 은총을 낳는다. 그대의 가슴이 일단 한 번만이라도 이같은 힘을 일으킬 수 있다면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해보라. 이처럼 간단하고 실제적인 길이 어디 있는가. 지금 당장 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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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2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사방 6백 리의 땅과 사방 6리의 땅 - 장의
'전에 그대의 식객으로 있을 때 그대의 구슬을 훔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고문하였다. 그대는 부디 그대의 나라를 잘 지키도록 하라. 내가 반드시 그대의 나라를 쳐서 성을 훔치려 한다.'
소진의 합종책에 맞서 '연횡책'을 들고 나온 사람은 장의이다. 두 사람 모두 귀곡 선생 문하생인데, 혀끝 하나로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 한 궤변가들이다. 장의 역시 공부를 다 배우고 나서 이나라 저나라 돌아다니며 벼슬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가 초나라에 들어가 재상의 식객으로 머물고 있을 때였다. 초나라 재상은 연회석상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구슬을 자랑한 적이 있는데, 그것을 곧 잃어버렸다. 그 범인으로 억울하게도 장의가 지목되었다. 장의는 곧 초나라 재상 앞에 불려나가 구슬을 도둑질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심한 매질을 당했다. 그는 모르는 일이라고 끝까지 주장해 겨우 풀려났으나, 몸은 이미 상처와 멍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런 모욕을 당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장의는 아내에게 그 구슬 도난 사건의 전후 사정을 다 털어놓았다. 그러자 아내가 말하였다.
"말로 사람을 설득하여 벼슬자리나 얻으려 하니 그렇지요. 이제 벼슬하겠다고 이나라 저나라 떠돌아다니는 짓 좀 제발 그만두세요."
그러나 장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말했다.
"자, 잘봐요. 혀는 아직 달려 있는 거지?"
"어이쿠! 그 말 잘하는 혀가 그럼 그 구슬처럼 어디로 도망이라도 친단 말입니까?"
아내는 입을 씰룩이며 비웃었다.
"그럼 됐어. 이 혀끝만 살아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거든."
그후 장의는 진나라로 가서 달변의 혓바닥으로 혜왕을 설득하여 재상이 되었다. 그는 진나라 재상이 되자마자 초나라 재상에게 다음과 같은 도전장을 보냈다. '전에 그대의 식객으로 있을 때 그대의 구슬을 훔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고문하였다. 그대는 부디 그대의 나라를 잘 지키도록 하라. 내가 반드시 그대의 나라를 쳐서 성을 훔치려 한다.' 그후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려고 할 때였다. 당시 제나라는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두 나라를 이간시키기 위하여 장의는 초나라로 갔다.
"대왕께서 저를 믿어주신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제나라와의 국교를 끊어주십시오. 그 대신에 진나라의 땅 상과 어 사방 6백 리를 드리고, 또 진나라 공주를 대왕의 측실로 봉사케 하겠습니다. 초나라도 역시 공주를 우리 진나라에 보내면, 두 나라는 형제의 인연을 맺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초나라는 서쪽의 강국인 진나라와 친교를 하고, 북쪽의 강국인 제나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는 결과가 되므로 그 이상의 묘책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나라의 회왕은 귀가 솔깃하였다. 그때 초나라의 신하 중 단 한 사람이 반대하였다. 그는 장의의 정적인 진진이었다.
"장의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상과 어의 땅이 우리 손에 들어올 리가 없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초나라가 제나라와 국교를 끊으면, 제나라와 진나라의 연합이 성립됩니다. 결국 초나라는 궁지에 몰리고 맙니다."
그러나 회왕은 진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상과 어의 땅 6백 리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 데 다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초나라 회왕은 제나라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진나라로 돌아가는 장의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의 장군을 사신으로 함께 보냈다. 그런데 장의는 진나라로 귀국하자마자 말고삐를 잘못 잡은척하며 마차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를 핑계삼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사신으로부터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초나라 회왕은 자신이 장의에게 불충분한 대접을 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는 곧 용사를 파견하여 제나라 왕에게 일부러 무례한 짓을 저지르게 하여 진나라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제나라 왕은 분노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초나라에서 일방적으로 국교를 단절한 것이 분한데다 신하를 시켜 모욕까지 주자, 제나라 왕은 즉시 보복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는 화가난 김에 아예 진나라에 머리를 숙이고 자청하여 국교 수립을 제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와 제나라는 연합을 하게 되었다. 장의의 계락대로 된 것이었다. 그때서야 장의는 조정에 나갔다. 그리고 그는 초나라에서 함께 온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사방 6리의 영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토를 초나라에 드리겠습니다."
장의가 초나라 회왕과 약속한 '6백 리'에서 어느 결에 '백'이라는 말이 빠져 있었다.
"나는 진나라가 우리 초나라에게 상과 어의 6백 리 땅을 주기로 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방 6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초나라 사자가 항의하였다.
"아마 잘못 들으셨겠지요."
장의는 짐짓 딴청을 하였다. 결국 초나라 사자는 자기 나라로 돌아가, 회왕에게 장의가 거짓말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노발대발하여 진나라를 치기 위해 당장 전군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때 진진이 급히 말렸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 기다려 주십시오. 지금 진나라를 치는 것은 득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진나라에 적당한 땅을 떼어주고 비위를 맞춘 뒤, 진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쳐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진나라에 준 땅 대신 제나라 땅을 흡수하여, 우리 초나라는 한 치의 땅도 잃지 않고 더욱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의에게 속은 것이 분한 초나라 회왕은 진진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굴흉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나라를 치도록 하라!"
그러나 진나라는 제나라와 연합하여 초나라 군대와 맞섰다. 초나라 군대는 이 싸움에서 크게 패하여 군사 8만을 잃었으며, 대장군 굴흉도 전사하였다. 결국 초나라는 진나라에 두읍을 떼어주고, 억울한 강화를 맺었다.
결과적으로 장의는 구슬 도둑 누명을 쓰고 매질당한 분풀이로 초나라의 두 성을 훔친 셈이었다.
원한 : 사사로이 남에게 원한을 사지 마라. 남에게 원한을 사면 보복을 당할 때 그보다 더 큰 대가를 치른다. 반대로 작은 온정을 베풀면 반드시 큰 보은이 뒤따른다. 남을 해하는 일은 보복의 씨앗이고, 온정은 보은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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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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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로포텐 섬의 모스케네쇠야 (Moskenesøy)]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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