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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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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3부
간디의 참모습
1월 30일, 오늘은 지금부터 17년 전, 1948년 간디가 세상을 떠나던 날입니다. 그는 그의 조국 인도를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사항해왔고, 그 민족을 압박자의 불의와, 스스로의 죄악과 그 둘의 합한 결과로 오는 불행에서 해방시키려고 하는 고통과 갖은 위험을 다 겪으며 일생을 두고 싸워왔습니다. 그러던 때 우리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늘이 무심치 않고 또 그의 일생의 힘쓰고 애씀이 헛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후, 해방의 기운이 돌아왔습니다. 그는 그 평생의 확신이요 맹세이었던 진리와 비폭력의 원리를 토대로 그 위에 빛나는 ‘하나의 인도’를 세우려고 최후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참과 대국을 내다보지 못하고 옅은 감정과 권력욕에 취하는 회교도와 힌두교도는 민족의 역사적 대업은 잊어버리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기만 하여 곳곳에서 학살과 항화와 약탈과 강간의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로 화해시키려고 그 둘 사이에 나서 무기한의 단식까지를 해가며 힘쓰다가 마침내 어리석은 종파주의자의 총알에 맞아 무참하게 쓰러졌던 것입니다.
어려운 고비를 당하여서 그것을 어떻게 이기고 넘었던가, 그러한때의 간디의 모습을 그려보라는 부탁을 받고 이리저리로 바쁘게 돌아다니다가 정작에 붓을 들고 자리잡고 앉는 날이 하필이면 오늘인것도 생각하면 이상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하며 한 형상이 가는 길 위에 막아서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 간디의 일생은 파란 많은 일생이요, 그의 남겨놓은 공적도 가지가지로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히말라야같이 자꾸만 올라가는 길세요, 올라갈수록 더 험하고 험할수록 그 보여주는 시야가 더 넓습니다. 그것은 운명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섭리를 믿었습니다. 그의 자서전을 읽는 사람은 곳곳에서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았다”“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하는 구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로 하면 그의 그 파란 많은 일생은 하나님의 경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것은 그가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그는 믿음의 사람이지만 또 의지의 사람이요,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자서전의 제목을 ‘나의 진리 실험의 이야기’라고 한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당한 모든 어려움은, 빨리 닫는 사람이 평지에서도 풍파를 만나는 모양으로 스스로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온 것 같은 데 있어서도 그는 그 까닭을 자기 속에 찾습니다. 그러므로 ‘대우주는 소우주 속에’라는 것이 그의 신조였습니다. 행동의 사람인 그는 자연 용기를 귀히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상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하는, 그러면서도 대적을 미워함 없이 죽을 각오로 대할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우다 죽을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하거나 빌붙지는 말라고 합니다. 그가 스물다섯 살 청년으로 남아에 갔을 때 마차를 타고 여행을 하려다가 차표는 당다히 가지고도 유색인종이라 해서 발판에 내력 앉으라는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 응하지 않자 차장은 그를 마구 끌어내리려고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찼습니다. 그래서 그는 팔목이 빠져라 하고 마차 채를 붙잡고 놓지 않아서 종시 이겼습니다. 그때에 벌써 대영제국이 백만 대군을 두고도 인도에서 물러나야만 하는 역사는 시작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결코 만용을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가 일의 핵심을 뚫어보는 통찰력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 문제의 요점이 어디 있는지를 집어내기에 힘씁니다. 남아에서 인도 사람들이 선거권을 위해 싸울 때, 보어전쟁에 참가할 때, 제1차 세계대전 때, 인도인 지원 위생병을 모집해 내던 때, 1919년에 큰 비폭력 반항운동을 일으켰다가 히말라야적 오산이라 하고 퇴각을 명할 때,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인도 국민의 태도를 결정할 때가 다 그러한 실례입니다. 그런 때 얼핏 보기에 잘못하는 것 같고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결국 나중에 가서 보면 그가 바로보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통찰력, 바른 판단은 어디서 왔느냐 하면 반드시 천재적인 천분이라기보다는 그의 참을 사랑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겸손입니다. 모든 위대한 인격이 다 그러한 것같이, 이도 모순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강한 사람이 없건만 그러면서도 또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선배에 대한 태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어려서도 자기는 어른에 대해서는 무조건 존경을 했노라 하지만 남아에서 처음 본국으로 돌아올 때는 이미 상당한 실력을 얻은 때요 사회적으로 움직일수 없는 지위를 얻은 때입니다.
그가 돌아오자마자 그 순간부터 한 일은 각 지방의 모든 선배를 찾아본 일입니다. 그것도 결코 의례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해서 또 더구나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을 다 우상같이 숭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결점도 잘 알고 자기와 다른 점도 잘 알고 자기의 지킬 것은 어디까지 지키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정치면에서 가장 존경했던 것은 고칼레였는데, 그가 고칼레에 대하는 심정을 보면 실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간디는 어떤 새로운 생각이 났을 때는 혼자서 하려 하지 않고 반드시 친구에게 내놔서 그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와같이 겸손하고 조금도 교만한 기색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주창한 일이 일이 얼핏 따르기에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협력과 온 국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가 있었고, 생명을 내걸고 싸운 대적에게서도 결코 미움을 사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졌던 모든 미덕 중에 가장 크고 가장 밑이 되는 것은, 그가 자기 일생을 참에 대한 실험이라 했고, 자기의 운동을 진리파지(사티아그라하)라 이름했더니만큼, 역시 참입니다. 그는 이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모든 어려움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때껏 세상에서 보통 “하나님은 참이다”하던 말을 뒤집어 차라리 “참은 하나님이다”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참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우리가 어떤 위기에 빠진 때를 위해 말을 한다면 이 한 가지를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결코 무슨 술책을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 중에 가장 큰 것의 하나는 “수단이 옳아야 옳다”는 것입니다. 일반 세상에서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목적만 옳으면 수단도 저절로 옳은 것이 된다”하는 것이 그 상식입니다. 그러난 간디는 분명히 절대적으로 주장합니다. 목적이 문제 아니라 수단이야말로 문제라고, 그리고 실지로 술책을 쓰지 않고 참대로 하면 일은 실패될 것만 같지만 사실로는 그것이 이기는 길이요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이 그의 생애입니다. 위에서 간디의 모습은 히말라야 같다 했습니다만는 그 이모저모를 그리자면 한이 없을 것입니다. 산의 참모습을 단번에 보려면 그 절정에 서야만 하는 것같이 참모습도 그 마지막 장면에 단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가슴 앞에 다가들어 들이대고 쏘는 권총 알을 세 방이나 바로 맞아 쓰러지는 그는 한 마디 유언을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를 ‘마하트마라 존경하고, 바부(아버지)라 사랑하고, 그에게서 한순간의 다르샨(감격)을 얻기 위해 천리를 멀다 아니하고 따라오는 그들이 그렇게 어려운 때를 당하여 갑자기 잃어버리게 되는 지도자를 놓고 그렇게도 듣고 싶었을 마지막 유언이건만도 그것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있은 것은 오직 한마디 “아이,라마”뿐이었습니다. “오,하나님”하는 말입니다.
말이라기보다는 한 마디 부르짖음이지만 사실은 그것이 그의 유언이요, 그 이상 더 그의 참모습을 드러낼 말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갑자기 죽음을 당하지 않고 병으로 인하여 정신이 똑똑한 가운데 천천히 숨이 지면서 모든 제자 동지를 불러놓고 지나온 일생 앞에 올 세상을 생각하면서 마음껏 정성껏 있는 말을 다했다 하더라도 그 뜻을 요약한다면 이 한마디에 지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는 결코 말이 아니었습니다. 신조조차도 아닙니다. 그것은 곧 그의 숨이요, 얼이요, 그의 자아, 곧 그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과 힘쓰는 모든 일의 목적은 자아의 실현 곧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댐, 다른 말로 해서 ‘모크샤’에 이름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말할 때는 “사람은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기를 제 발 밑에 티끌보다 더 낮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러는 그로서 어떤 때는 자기는 아직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려면 멀고 멀었지만 그래도 “때로는 잠깐 그 모습을 어렴풋이 보는 때가 있다”하는 것을 보면 그의 힘씀이 대개 어떠했고, 그 혼의 이른 지경이 어디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죽임을 당했다 했지만 결코 갑자기 죽은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남이 보기에 그렇지 자기로서는 결코 불의에 죽음이 온 것 아닙니다. 자기 편에서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간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그는 예수와 비슷합니다. 그날이 오기 며칠 전에 예배 시간에 그가 말을 하고 있을때 폭탄을 던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맞지는 않았으나 굉장한 소리가 났고 모든 사람이 놀랐습니다. 그때 그는 조금도 놀람이 없이 “저거 뭐요? 나 모르지만, 걱정 마시오. 말씀이나 들으시오”했습니다. 이튼날 모든 사람이 그가 그 순간에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해서 칭찬을 올렸을 때 그는 자기는 그 폭발소리를 군사연습으로 알았으니 자기가 칭찬받을 것은 없다 하면서, “내가 정말 그러한 폭탄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내 얼굴에 웃음을 띠고 그렇게 한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생각이 없다면 그때는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아무도 그 폭탄을 던진 청년을 나삐 보지 마시오. 그는 잘못 생각하고 한 거지. 그는 아마 나를 힌두교에 대적이나 되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오”했습니다. 그러고는 이제는 위험하니 예배 시간에 오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은 좀 검문을 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을, 검문을 하면서 예배가 무슨 예배냐고 물리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전날 폭탄을 던졌다가 실패하고 잡힌 자의 동지가 아무 어려움없이 권총을 품속에 넣고 간디 앞에 나와 인사를 하고는 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줄 알면서도 두려워함이 없이 그리로 향해 간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두려워하지 않고 나갔으니 죽음을 이긴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사람이 못 이길 위기나 난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과연 간디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살아서보다 죽은 후에 더 많은 더 큰일을 했습니다. 그를 쏘는 사람은 비폭력주의를 쓰다가는 힌두교도는 회교도한테 망해버릴 것 같고 그 대신 그 하나만을 없애버리면 모든 힌두교도는 한데 뭉쳐 회교도를 쳐 없엘 것 같아서 그런 짓을 했지만 결과는 생각했던 것과 반대였습니다. 그 무섭고 슬픈 소문을 듣자 여려 폭력단체가 스스로 해체를 해버리고, 전에 진리파지운동에 대해 반신반의를 하던 사람, 그 보다도 반대를 하던 많은 사람이 그의 주의를 찬성하고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고 날이 갈수록 그를 존경합니다. 한 사람 간디가 죽은 대신 억만의 간디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이긴 것 아닙니까? 모든 위기가 무서운 것은 결국 그 뒤에 숨어 있는 죽음의 사자 때문인데, 죽음을 이기는 것은 피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능히 죽어 보여줌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도 그렇게 해 이겼고 간디고 그렇게 해서 이겼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참으로 이겼기 때문에 처칠조차도 그 죽음 앞에 절하고 조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칠이 무엇입니까? 무너져가는 대영제국의 마지막 충신이었고 역사의 쓰레기통에 들어가려는 폭력주의의 낡은 정치사상의 한 상징입니다. 그 처칠은 일찍이 간디가 원탁회의를 하기 위해 런던에 갈 때 “그 반나체의 비렁뱅이 중놈”을 어찌 우리 폐하의 어전에 서게 하느냐고 약이 올라 반대했고 2차 세계대전 때에 인도는 절대로 독립을 주어서는 아니된다고 간디를 잡아 감옥에 넣도록 지시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오늘 인도를 볼 때 세계는 참 달라진 것을 알수 있습니다. 처칠은 물론 위대합니다. 그러나 간디는 보다 더 위대합니다. 사람들이 처칠을 잊을 날이 올 것입니다. 간디를 잊을 날은 없을 것입니다.
간디는 무엇으로 죽음을 이겼습니까? 그의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것이 “아이, 라마”입니다. 그는 평생에 ‘라마나마’를 외었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때, 걱정이 되고 용기가 줄려 할 때, 그저 “라마, 라마, 라마, 라마”하고 외운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어렸을 때 자기 집 늙은 식모한테 배웠다고 합니다. 그는 겁이 많아서 밤에는 밖에 나가지를 못했는데 그 식모가 그럴 때 라마의 이름을 부르면 무서움이 없어진다 해서 그대로 했고 그랬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돌아갈 무렵에는 정치관계에서 떠나 시골 가서 불쌍한 농민들에게 자연요법을 가르쳐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라마나마를 외는 것이었습니다. 1942년 인도 국민회의는 간디의 지시에 따라 저 유명한 ‘인도를 떠나시오’운동의 결의를 했습니다. 그때는 여러 모로 보아 도저히 반항운동을 일으킬 수 없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인도 민중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인도를 전쟁으로 끌고 들어간 영국에 대해 분개한 간디는, 세계의 모든 나라가 다 반대를 하더라도, 온 인도가 다 일어나서 나를 잘못이라 하더라도 나는 나서련다. 인도를 위해서 또 세계를 위해서. 나도 지금 우리나라가 순수한 비폭력의 정치 불복종운동을 하기에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군사가 준비되지 못한다고 도망을 가는 장군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게 가장 귀한 비폭력의 무기를 주셨는데, 만일 내가 오늘의 위기에서 그것을 쓰기를 꺼린다면 하나님은 나를 용서 않으실 것이다. 하고 나섰습니다.
그는 날마다 저녘때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은 지방을 돌다가 길이 늦어져서 밤 늦게 도착해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자게 되었습니다. 비서들은 먼저 자리에 들고 간디는 회를 마치고 한시나 되어서 들어와 자리에 눕더니 조금 있다 곧 일어나 어둠 속에 앉아 밤새도록 울며 회개하는 기도를 하더랍니다. “하나님은 이날껏 나를 잊으신 일이 없는데 나는 조금 바쁘다고 예배하기를 잊었으니 어찌합니까?”하면서. 죽음도 무서워 아니한 간디, 원자폭탄이 만일 떨어지면 “나는 폭탄을 떨어뜨린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하는 얼굴을 보여주며 죽고 싶다”하던 간디 속에서는 그러한 단순한 신앙이 있었던 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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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두려움 없는 사랑
나이아가라 폭포에는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폭포 근처에 살고 있던 인디언 부족은 해마다 폭포의 신에게 제물을 바쳐 왔습니다. 그들은 달빛이 환하게 비치는 밤 폭포의 안개 위에 나타나는 무지개를 신이 나타나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해마다 폭포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은 바로 예쁜 소녀였습니다. 제물을 바칠 때가 되면 제물이 될 소녀를 제비로 뽑아 정해진 날에 홀로 배에 태워서 폭포로 흘러내려 떨어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제물을 결정하는 제비가 추장의 외동딸에게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죽은 후 오직 이 딸에게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온 추장에게 그것은 크나큰 슬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추장의 얼굴을 보니 여전히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고 있었습니다. 억지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얼굴 뒤에는 가슴이 에이는 아픔과 고통이 용솟음치고 있음을 사람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드디어 제물을 배에 태워 신에게 바칠 날이 다가왔습니다. 꽃으로 장식된 배에 추장의 딸은 실려졌고 추장의 어린 딸은 아빠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결국 공포에 떨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끝내 아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배는 폭포를 향해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때 수풀 속에 숨어 있던 한 사람이 배를 저어 소녀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는 바로 소녀의 아버지였습니다. 추장은 소녀의 배 가까이로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리고 딸과 아빠는 손을 꼭 마주 쥔 채로 나이아가라 폭포의 엄청난 물결에 휩쓸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소아는 부자의 도리가 지켜지고, 부자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데에 있는 것이다. - 강유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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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4.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 - 시추 경영
아이들은 잡초처럼 키워라
공장을 천안으로 옮길 때 단 한 사람을 제외한 전 직원이 천안으로 따라 이주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신문에 이른바 '천안 대이동'이라고 명명했던 바로 그 사건이다. 이 무렵 직원들이 가장 근심했던 것이 바로 자녀교육 문제였다. 그들도 이 나라의 평범한 학부모들인 바에야, 수도권을 이탈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는 건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내가 직원들에게 해주었던 이야기가 바로 '잡초론'이다. 아이들이라면 벌에도 쏘여보고 지렁이도 죽여보면서 커야 제대로 크는 것이라고 말이다.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세상을 한번 둘러봐. 아니면 애들 주변의 친구들을 한번 보라구.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취향, 똑같은 말투, 똑같은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말야. 선생들이나 부모들이나 하나같이 애들이 엉뚱한 짓 못하도록 들볶기만 하니까 그리 되는 거라구. 그게 바보로 만드는 거지 뭔가. 반대로 생각하면 시골로 도망 오는 것이 애들한테도 다행인 일이야. 순박한 시골 애들과 함께 마음껏 뒤섞여 놀게 하라구. 사랑하고 믿어주기만 한다면 애들은 잘못되지 않는다니까."
그러면서 나는 내가 살아왔던 이야기며, 우리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석연찮은 그들의 얼굴에 대고 내가 가진 증거물을 들이대는 것이다. 우리 집 큰애가 1964년 생이고, 막내가 1970년 생이다. 그러니까 6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아이를 낳은 셈이다. 일찌감치 홀로 되신 어머니는 손자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했는데 내리 딸 셋을 낳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아내한테는 미안한 노릇이지만 어머니를 실망시켜드릴 수는 없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 중에 재수생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 때문에 잡지사에서 몇 번인가 취재요청을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성공적인 자녀교육법의 '비결'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런 인터뷰가 곤혹스럽다. 아이들을 키운 특별한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답변을 위해 자녀교육법이라도 연구해야 될 판이었다. 그래서 억지고 생각해낸 말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방목'이다.
80년에 해직 당하고 뒤늦게 사업을 한답시고 뛰어다니느라 나는 집안문제에 벼로 신경을 못 썼다. 그냥 바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항상 죽느냐 사느냐의 긴박감 속에 있었다. 당연히 가계는 물론이려니와 아이들 교육문제도 뒷전이었다. 남들처럼 일류대에 보내겠다고 과외를 시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다. 학비마저 제때 줘서 보내지 못하는 판국에 과외는 너무나 먼 얘기였다.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 집 주변은 온통 논밭이었다. 봄이면 모내기하느라 동네가 온통 떠들썩했고 여름, 가을이면 개구리며 풀벌레 소리에 귀청이 떨어져나갈 지경이었다. 말로야 서울이 싫다고들 하지만 자녀교육이며 직장 등을 핑계로 모두들 변두리 생활을 기피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원래 원지동은 참외와 수박이 유명했는데 우리 집도 밭에다 직접 심어 먹었다. 여고 2학년부터 중학생, 초등학생까지 골고루였던 아이들이 모두 삽이며 괭이를 들고 밭일을 도왔다. 그러고도 틈이 생기면 밖으로 나가 손발이 새까매지도록 뛰어 놀았다.
사업의 어려움으로 항상 침울해 있던 내게 그런 집안 분위기는 많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절망 속에서 허덕이는 아버지와 묵묵히 집안일을 지키는 어머니를 지켜보며 아이들은 철도 일찍 났던 모양이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다른 아이들 같았으면 집안 여건을 비관하고 비뚤어지기도 했으리라. 시키지 않아도 모두들 힘을 합쳐 집안일 에 한몫씩을 해왔다. 그 민감할 나이에 학비를 제때 주지 못해도 울거나 짜증내는 녀석 하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재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맏딸은 이화여대 건강교육학과를 졸업했고, 둘째 딸은 세종대학 성악과, 셋째 딸은 덕성여대 가정관리학과를 졸업했다. 넷째이자 장남은 중앙대 기계공학과와 동대학원을 마쳤고, 막내는 중앙대 무역학과를 졸업했다.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대단한 실적으로 꼽힌다. 모두 재수 한 번 안하고 소위'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이 밝고 성실하게 자라주었던 것도 경쟁 없는 시골 분위기에서 따뜻하게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모두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결정한 방향대로 자라주었다. 내가 한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무엇이든 억지로 시키지 않았다는 것뿐이다. 그러니 누가 자꾸 물으면 '방목'이라고 대답할 밖에.
딸들은 모두 성실하고 평범한 남편들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두 아들은 각각 현대자동차와 삼성신용카드에 근무하고 있다. 큰아들은 수도권 근무를 마다하고 일부러 생산 부서를 지원해서 지금 울산에서 일하고 있다. 현대자동차를 평생직장으로 삼아 밑바닥에서부터 경험을 쌓겠다는 그 마음이 기특하다. 막내아들은 대학원을 가겠다. 유학을 가겠다고 하는 것을 '학문을 하지 않을 바에야 곧바로 사회에 뛰어드는 게 더 낫다'라고 설득했더니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일류대학 출신자들 속에서도 당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모습이 또한 대견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자녀를 자기 뜻대로 재단하고 다그치는 부모들은 자녀들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것이다. 아이들을 못 믿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시야 안에 잡아두려고 한다. 그건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피곤하게 만든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과 믿음만 있다면, 눈 딱 감고 풀어 기르자는 말이다.
아이들에게도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들에게 계획표를 짜주고 시간표를 짜주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스스로의 판단과 취향에 따라 세상을 마음껏 모험할 수 있도록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자녀경영에도 벤처 정신이 필요하다. 아이들은 거칠게 풀어놓고 함부로 길러야 독립심 강하고, 건강하며, 생명력도 강한, 진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나는 이 촌동네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도록 했다. 다른 부모들처럼 극성스럽게 아이들을 볶아댈 만한 마음의 여유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집안 공기는 항상 침울했지만 아이들은 일부러라도 웃고 떠들 줄을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잡초처럼 키웠다. 내 스스로 잡초처럼 살아왔고, 그래서 잡초의 생명력과 가능성에대한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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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최명희
혼불 1. 4. (4/4)
옹구네는 막막한 심정으로 들녘을 돌아본다. 들판은 아득한 연두 물빛이다. 거기다가 막 씻어 헹군 듯한 햇살이 여린 모의 갈피에 반짝이며 숨느라고 여기저기서 그 물빛이 찰랑거린다. 옹구네는 이도 저도 다 귀치않고, 그저 한판 늘어지게 잤으면 싶었다. 그래서 하늘로 고개를 젖히고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한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 구더기 속에 파묻혀 한평생 지낼 일이 순간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며칠 전, 마을에서 대두레의 농악을 울릴 때는 참 좋았었지. 날마다 그날만 같으면 오죽이나 좋을꼬. 지금도 옹구네 귀에는 그때의 농악 소리가 개갱갱갱거리는 것 같았다. 어깨까지도 들먹여지는 소리가 아니었던가. 그 두레를 시작하는 날의 농악만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이 무너지고, 주종이 한 자리에 어울려들 수 있었던 것이다. 종가나 문중의 부농들은, 두레에 들어도 직접 모내기에 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머슴과 품꾼들이 맡아서 했다. 그렇지만, 문중에서는 중놈 이하가 되는 집은 농사 일을 손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을까. 사실 조선조의 엄격한 신분 계급으로 사, 농, 공, 상이 있었다 하나, 지금에 이르러 사와 농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나라가 망하여 일본의 속국이 된 지금, 어디 출사하여 벼슬을 할 조정도 없거니와, 정자관 쓰고 들어앉아 글만 읽을 풍류 세월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문중에서는 웬만하여 머슴들과 삯꾼으로 농사를 할 수 있는 집이라면 모르지만, 여의치 않을 집에서는 논밭에 직접 나서서 일을 하였다. 그러나 책을 읽고 서안을 대하거나, 일이 있어 큰 갓을 쓰고 출입을 할 적에는 다시 선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자연히, 사와 농은 경우와 때에 따라서 분리된다고나 할까.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가세가 넉넉지 못하여 그 자신이 손수 논밭에 나서서 땀을 흘리는 일은 광영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문중에서도, 타성들도 축에서 빠지는 이들을 경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빈농에 이르러서랴.
"오루꿀양반, 장구 치는 솜씨 한 번 휘들어지등만." 옹구네는 논배미 저쪽에서 못줄을 보고 있는 기응을 보고는 평순네에게 말을 건넨다. 두레가 시작되던 날의 농악은 대답했었다. 일에 따라 일손끼리 소두레도 짤 것이지만, 모내기는 농사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라,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대두레를 짜는 것이다. 두레를 짜면 모내기 할 순번을 정하는데, '못날 받는다'고 한다. 그 못날을 받은 다음, 쟁기질 할 일이 많은 첫 번째 집의 모내기를 시작하기 전에, 마을의 모정 앞 공터에서 하루 온종일 농악을 하며, 새로 시작할 일을 위하여 축수하는데, 그것이 볼 만하였다. 마을 전체가 들썩이며 울리게 되는 농악의 꽹매기 소리가 산천을 두드리며 절정을 오를 때, 온 마을 사람들은 한 덩어리로 어우러지고, 종가에서는 푸짐한 술과 음식을 모정으로 내보냈다. 으레, 첫 번째 모내기는 종가의 것을 하였다. '두레'란, 서로 서로 개인적으로 품을 맞바꾸는 '품앗이'하고는 일의 성질부터가 달랐다. 한 마을의 성년 남자 전원이 의무적으로 참가하는 이 두레는, 경작할 땅의 많고 적음이나 자타의 구별도 없이 공동으로 일을 한다. 품이 열 개 드는 집의 일을 하게 되었을 때, 그쪽에서 미안해하며 술과 담배를 내놓고 인사를 닦기도 하지만, 굳이 그런 염려는 안해도 된다. 행수와 도감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 그냥 내 일 네 일 없이 함께 한 동아리가 되어 움직이고, 드디어는 맨 마지막 집까지 모두 똑같이 일하고는 끝내기 때문이다.
거기에, 뼈 빠지게 농사지어 누구 좋은 일 시키는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은 끼여들 틈도 없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흙이 덩어리였다. 그저 다만 풍년을 간절히 바랄 따름이고, 날씨가 알맞기를 축수하며, 이렇게 너나없이 한 덩어리가 되어 매끌한 논바닥에 모를 꽂을 때, 손 끝으로 전해지는 이상한 뿌듯함이 몸을 채우는 것이다. '농자천하지대본'의 농기 깃발을 호기롭게 펄럭이며 농악대가 동네 모정 앞에 모였을 때, 사람들은 그 날씨의 화창함과 울리는 소구, 장구 소리에 진심으로 이제부터 시작되는 농사일이 부디 순탄하기를 빌었었다. 그날, 상쇠, 상소고, 상버꾸, 상무동을 섰던 사람들도, 징과 꽹과리, 장구, 북을 두드리던 사람들도 그렇게 신명나게 날라리 호적을 불던 사람들도, 몸에 감았다. 청홍의 띠를 벗어놓고, 지금은 오로지 모내기에 열중하고 있다. 얼마나 즐거웠던가. 논갈기를 필두로 가래질, 써레질에 못자리하기, 볍씨치기, 거름주기, 피고르기, 모찌기, 모심기, 그리고 콩심기며 벼풀하기, 벼베기, 볏단 주워묶기, 굉이기, 타작, 거기다가 흥겨운 방아찧기, 새끼꼬기, 가마니치기 등을 있는 대로 흉내내며 농악대의 쾌자 자락이 휘날릴 때, 열두 발 상모가 푸른 하늘에 그리던 갖가지의 하얀 무늬는 또 얼마나 경쾌하고 절묘하였던가. 거기다가 여장을 한 무동들이 다섯이나 나와서, 삼베 길쌈하는 흉내를 어찌나 앙징맞게 하는지, 그만 복장을 쥐어 잡고 웃게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쪼개기, 삼삼기, 상뭉치기, 물레질, 감는 돌개질, 익히기, 푸는 돌개질, 날기, 베매기, 짜기, 빨래하기 등 등의 시늉을 감치게도 잘 해내어, 보고 있던 아낙들은 눈귀에 질금질금 눈물이 번질 지경이었다. 그럴 때의 아낙들은, 집안에서 바깥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고 왼자락으로 치마를 여며 입는 반가의 부인으로 태어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렇게 한평생 농사짓고 베틀에 앉아 손톱 발톱이 닳아지도록 베만 짜며 살다 가는 것이 조금도 원통하지 않은 것이다. 원통하기는커녕 웬일인지 감사하고 까닭 모르게 벅차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록 종가의 종손이 된 이기채와 동복의 형제였으나, 그것과는 관계없이 얼마 안되는 두락의 농토를 소중하게 아끼고 경작하였다.
"동생 주변도 알아 주어야 허네. 어찌 그리, 앉은 방석을 못 돌리고 매양 그렇게 근근헌 생활을 벗들 못허는고?"
일찍이 전주와 남원을 무시로 출입하며 기민하게 움직이던 중형 기표는 기응을 핀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어날 적에는 한 어버이 속에서 동복으로 낳았건만, 장형께서는 가문의 종손이 되시고, 하루아침에 천만석꾼의 상속자가 되지 않으셨는가. 헌데, 우리라고 이렇게 찌그러진 논밭 뙈기나 주무르며 살다가 말란 법이 있는가?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고, 일찍이 선친께서는 본디 문약허신 분으로 우리 형제한테 무슨 변변헌 재산도 못 남겨 주셨지만, 그때 세상에는 또 그것이 별 흉도 아니었다. 허나, 지금은 세상이 달러. 이제 두고 보아. 앞으로는 재산 있는 사람이 양반이 될 것이야. 돈이 양반이란 말이지. 동생도 물정을 좀 깨쳐야겄네. 스스로 미처 못 깨쳤을 때는,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오기라도 해야지."
기표는 목소리를 누르며 말했다. 그는, 본디 그의 부친 병의씨로부터 물려받는 문장과 필재가 남달랐다. 거기다가 명석, 민활하였다. 그리고 일찍부터 외처의 바람을 많이 쐰 탓인지, 현실에 적응하는 것도 그만큼 빨랐다. 그 눈의 형형함은 장형 이기채에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기채의 눈빛이 강단과 집념에 빛나고 있다면, 기표는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작고 가늘면서도 각이 진 눈의 안광은 차가웠다. 사람들은 아들 강태가 꼭 아버지를 닮았다고는 하였는데, 그 눈빛은 때때로 남모르게 번쩍이며 푸른 빛을 띠었다. 거기다가 이기채의 깐깐하고 작은 체수에 비하여, 기표의 풍채는 시원하고 늠연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칫 그의 풍채와 혈색 때문에, 그 눈이 뿜어내는 각이 지고 날카로운 푸른 빛을 놓치고 잊어 버리는 것이다. 이기채는, 기표를 옆에 두고 오른팔처럼 썼다. 타지에 나갈 일이 있으면, 큰일이건 작은일이건 기표를 불렀다. 기표는 얼마든지 기꺼이 응했다. 응할 뿐만 아니라 먼저 나서기도 했다. 항상 몸에서 바람 소리가 나는 기표로서는 기응의 처신이 못마땅하여 혀를 차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응은 그런 것에는 쾌념하지 않았다.
"다 분복대로 사는 것이지요."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사람의 일이란 그런 게 아니야. 옛말에도 있듯이, 무는 개를 돌아보고, 우는 애기 젖 준다고, 사람 스스로가 자기 일을 경영해야지 어디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누워 있는다고 감이 떨어지는가?"
"감을 욕심내지 않으면 마음이 초조헐 것도 없지요."
"허허어, 이 사람 말허는 것 좀 보아. 동복의 삼형제가 각각이 다 다르니 무슨 속을 터놓고 어디다 무슨 말을 헐 수가 있어? 꿍꿍 앓드래도나 혼자만 답답헐 밖에."
기응은 묵묵히 일손을 놀리고 기표는 뒷짐을 진 채로 서성거렸다.
"밖에서 이러면 안에서나 기민해야지. 이건 안팎이 쌍으로 똑같은 성품이니."
새끼를 꼬거나, 가마니를 짜거나, 마당에서 덕석을 말아올리는 기응의 뒷 등을 바라보며 기표는 혀를 찼다. '안'이란 오류골댁을 이름이다. 오류골댁 또한 기응이 하는 일과 별반다를 것 없는 일들을, 별 큰 소리도 없이 묵묵히 할 따름이었으므로 기표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논바닥에 엎드린 햇빛에서 놋쇠 익는 냄새가 난다. 탱그르르 소리가 울릴 것도 같다. 그것은 흡사 장구의 울음통에 터질 듯이 차 있는 소리와도 같았다. 대나무를 깎아서 만든 궁글채, 열채, 그 장구채로 바람처럼 건드리기만 하여도 저절로 울리는 오묘한 음향을, 지금 익을 대로 익어서 벌어지고 있는 뙤약볕 속에서 듣는 것이다. 장구통이야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햇살 좋은 양지 쪽에서 자란 홍송을 따르랴. 몸이 무르고 결이 고와 비단 같은 그 소나무는 무겁고도 부드럽다. 산속에서 뿌리 뻗고 자랄 적에는 어디 무슨 소리 같은 것을 가두어 둘 만한 우묵한 곳도 없는 것이, 일단 장구로 몸을 바꾸기만 하면 어찌 그리 신통한지. 뙤약볕은 장구통이다. 기응은 장구채를 든다. 손끝에서인가, 장구통에서인가, 아니면 햇빛 속에선가, 그도 아니면 기응의 마음이 차올라 울리는 것인가. 농인은 사월의 달디단 공기를 두드리며 홑가락 겹가락이 경쾌하게 터져 나온다.
정저긍자그
정저긍자그
징그징그 정저궁자그 정저궁자그
궁자궁자그 구궁구궁 궁자궁자그
순간, 기응이 잡고 있는 못줄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저쪽에서 힘을 주는 모양이었다. 일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못줄에 매달린 색색의 헝겊들이 춤을 추듯이 흔들리며 팔락거린다.
정저긍자그
징그징그 정저궁자그 정저궁자그
사람들도 이제 쉴 만큼 쉬었는지, 괴춤을 추기면서 하나씩 둘씩 일어서서 논으로 걸어 들어온다. 물 소리가 철벙철벙 난다. 마을의 집집들이 비어 있다. 그 적막한 대사립문을 녹음이 그늘을 드리워 닫아 준다. 기응은, 갈아 놓은 면화와 수수, 동부, 녹두, 참깨의 모들도 이번 비에 흥건히 물을 먹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마 강실이는, 집 뒤의 뽕밭에 여린 잎을 따러 나갔을 것이다. 한 잠 자고 일어나는 누에는 하루에도 열 두 밥을 먹으니, 밤낮을 쉬지 말고 부지런히 먹여야 한다.
"뽕을 딸 때는, 아무렇게나 손에 잡히는 대로 따지 말고, 뒷그루를 살펴 줘야 한다. 뒷날에 움이 새로 돋을 자리를 다치면 안되지. 말라버린 가지는 찍어 주고, 새 순에서 핀 햇잎을 골라, 뒤로 젖혀서 따라. 뽕잎 하나라도 그것이 다 목숨 있는 것이니 함부로 상허게 허지 마라."
봄에 짠 봄나이 필 무명을 빨래하여 볕에 바래던 오류골댁은 뒤꼍으로 돌아가는 강실이에게 그렇게 일렀을 것이다. 기응은 못줄을 옮겨 꽂으며, 논의 도랑을 치고 물길을 내야겠다고 생각한다. 지붕에 비 새는 곳은 미리 개와를 해 두어야, 곧 닥쳐올 장마철의 음우도 막아 낼 것인데, 꽃 피고 새 닢 나면 벌통에 분봉한 벌들도, 새 통에 옮겨 주어야 한다. 기응의 귀에는 꿀벌들의 닝닝거리는 소리가 햇발에 섞여 감미롭게 들린다. 여왕벌 하나를 모시고, 있는 힘을 다하여 꿀을 물어 나르며 자기의 직분과 의리를 다하는 평화가 그대로 전해진다. 기응은 고개를 들어 바람을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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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6. 지옥의 문
<매 순간순간 그대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한다. 그대에게 의식이 없으면 곧 지옥을 선택하는 것. 선택은 오직 그대한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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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군주가 알아주지 않으면 인재는 그 곁을 떠난다 - 상앙
"대왕께서 상앙을 중히 쓰지 않으신다면, 그가 다른 나라로 도망가기 전에 잡아죽이십시오. 만약 그를 살려 다른 나라로 가게 한다면 장차 위나라에 큰 걱정거리를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상앙은 위나라의 여러 첩들이 낳은 공자들 중의 한명이었다. 성은 공손 씨이며, 그의 조상은 본래 희성이었다. 젊어서부터 형명의 학을 익힌 상앙은 위나라 재상 공숙좌를 섬겼으며, 중서자란 낮은 벼슬자리에 있었다. 공숙좌는 상앙이 매우 현명하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았으나, 나중에 그를 크게 쓰기 위해 아껴두고 있었다. 그런데 공숙좌는 상앙을 왕에게 추천도 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병들어 버리고 말았다. 위나라 혜왕이 친히 공숙좌를 문병하고 나서 근심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대의 병이 악화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될까봐 큰 걱정이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장차 나라일을 누구에게 맡겼으면 좋겠소?"
공숙좌가 말하였다.
"제가 거두고 있는 사람 중에 중서자로 있는 상앙이 적격입니다. 그는 아직 젊어 연륜은 적으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대왕께서 그를 중용하여 이 나라의 일을 의논하면 능히 해낼만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혜왕은 공숙좌의 말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상앙이란 인물에 대해 별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혜왕이 일어서려하자, 공숙좌가 말하였다.
"대왕! 잠시 주위를 물리시고 제 말씀을 더 들어주십시오."
혜왕이 좌우를 물리고 나서 물었다.
"무슨 비밀 이야기라도 있소?"
"네, 이것은 반드시 지키셔야 할 일입니다. 대왕께서 상앙을 중히 쓰지 않으시겠다면, 그가 다른 나라로 도망가기 전에 잡아죽이십시오. 만약 그를 살려 다른 나라로 가게 한다면 장차 위나라에 큰 걱정거리를 만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혜왕은 공숙좌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공숙좌는 혜왕이 가고 나자 곧 상앙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조금 전에 대왕이 내게 정승을 삼아 국정을 논의할만한 인물을 천거하라고 해서 자네를 추천하였네. 그랬더니 대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자네를 쓰지 않겠다는 뜻이었지. 미안한 얘기네만, 선비는 자신이 섬기는 군주를 먼저 생각하고, 신하를 나중에 생각하는 법이네. 그래서 나는 대왕께 '상앙을 등용치 않을 생각이시면 마땅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말씀드렸네. 대왕께서도 그러겠다고 하셨네. 대왕은 그대를 등용치 않을 것이 분명하니, 자네의 목숨이 위태롭네. 어서 다른 나라로 도망치게나."
상앙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승상의 말씀을 듣고도 저를 등용치 않을 눈치였다면, 저를 죽이라고 한 승상의 그 말씀 또한 듣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한편 혜왕은 궁궐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숙좌의 병이 매우 위독하니, 슬픈 일이로다. 과인에게 상앙을 추천하면서, 나라 일을 그와 의논하라 하니 제 정신으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병이 깊어 공숙좌의 정신이 흐려지지 않고서야 어찌 과인에게 그런 인물을 추천할 수 있겠는가?"
혜왕은 공숙좌가 노망했다고 여긴 것이었다. 드디어 공숙좌가 죽었다. 위나라 혜왕은 그후에도 상앙을 부르지 않았다. 때마침 진나라 효공이 전국에 포고령을 내려 인재를 찾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상앙은 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가버렸다. 진나라로 간 상앙은 효공의 총애를 받고 있는 경감을 만났다.
"대왕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경감은 곧 상앙에게 효공을 만날 수 있게 주선하였다. 효공을 만난 상앙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해 열심히 설파하였다. 그러나 효공은 꾸벅꾸벅 졸기만 하였다. 상앙이 물러가고 나서 경감이 효공에게 물었다.
"상앙이란 자의 인물됨됨이가 어떠합니까?"
"그저 허망한 말만 지껄이길 좋아하는 사람이오. 그런 사람을 어디에 쓰겠소?"
경감이 상앙을 만나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효공의 반응이 그 정도냐고 책망하였다. 그러자 상앙이 말하였다.
"내가 5제시대 제왕의 도를 이야기하였지만, 대왕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경감은 다시 주선하여 상앙을 효공에게 안내하였다. 효공은 상앙과 전보다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나 상앙에게서 큰 호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효공은 경감을 불러 어찌 그런 인물을 소개하냐고 책망하였다. 경감이 상앙을 만나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내가 하, 은, 주 3대 성왕들의 예를 들어 왕도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니, 아직 대왕께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다시 만나게 해주십시오."
세 번째 만나고 나서 효공은 비로소 상앙이 인재임을 알게되었다. 효공은 상앙을 내보낸 후 경감을 불러 말하였다.
"그대가 추천한 상앙이란 자는 좋은 사람이오. 과인이 함께 이야기할 만한 상대요."
경감은 상앙을 만나 효공의 뜻을 전했다.
"내가 대왕께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는 패도에 대해 이야기하였더니 몹시 관심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대왕을 다시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제 대왕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상앙이 네 번째 효공을 만났다. 효공은 자신의 무릎이 상앙 쪽으로 점점 다가들고 있는 줄도 모를 정도로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 수일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효공은 결코 지루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효공에게서 물러나온 상앙에게 경감이 물었다.
"그대는 대체 무슨 이야기로 대왕을 저토록 기쁘게 할 수 있었소?"
상앙이 말하였다.
"대왕께 제왕의 도를 시행하면 하, 은, 주 3대의 태평성대에 비길만한 업적을 이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러한 업적을 당대에 이룩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효공은 곧 상앙을 등용하였다. 위나라에서 버림받은 상앙이 진나라에 와서 드디어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된 것이었다.
설득 : 설득을 하는 데는 단계가 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노인에게 죽을 먹이듯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설득하는 방법이 달라야 한다. 성급히 결론을 내세워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 입장에 서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올바른 설득의 지혜다.
법을 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다.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고, 산적이나 좀도둑이 없어졌으며, 집안은 풍족하고 모두가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진나라 효공에 의해 등용된 상앙은 부국 강병의 방책으로 법을 고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효공은 다른 신하들이 비방할 것을 두려워하여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의심하면서 시행하면 그 일을 결코 성공시킬 수 없습니다. 대체로 남보다 뛰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본래부터 세상의 비난을 받게 마련이고, 홀로 아는 지혜를 지닌 사람은 백성들의 경멸의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우매한 사람은 일의 성과가 어떻게 될지 예측을 하지 못하며, 지혜 있는 사람은 일의 징조가 나타나기 전에 예견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나 함께 일을 계획할 수는 없으나, 함께 일의 성과를 즐길 수는 있습니다. 지고한 덕을 지닌 사람은 속설을 따르지 아니하며, 큰 공을 성취하는 사람은 여러 사람과 모의해서 일을 결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성인은 진실로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일이면 그 옛것을 법으로 지키지 않고,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일이면 예를 따르지 않습니다."
상앙의 이같은 말을 듣고서야 효공은 결단을 내렸다.
"좋소! 그대의 생각대로 진행하시오."
이때 감룡과 두지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러나 상앙은 백성들의 풍습을 바꾸는 것을 옳지 않다는 감룡의 말을 '통속적'이라고 맹렬히 비판하였으며, 옛것을 따라야 한다는 두지의 주장에 대하여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한 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공박하였다. 그러면서 상앙은 옛날 성군들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은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은 옛 제도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왕자가 되었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은 예를 바꾸지 않았으나 망했습니다. 그러므로 옛 제도에 상반된다고 하여 비난할 것도 아니고, 옛것을 좇는다 하여 칭찬할 것도 못됩니다."
"그 말이 옳다!"
효공은 상앙의 말을 지지하였다. 효공은 곧 상앙을 좌서장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법을 변경하도록 하였다. 상앙이 새롭게 만든 법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첫째, 백성으로 하여금 열 집 또는 다섯 집으로 통, 반을 구성하여 서로 죄를 적발하고, 그 죄에 연좌되게 한다. 그리하여 죄를 지은 것을 고발하지 않는 자는 허리를 베는 형벌을 주고, 고발한 자에게는 적의 머리를 베어오는 자와 같은 상을 주며, 죄를 숨긴 자는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주게 한다.
둘째, 백성으로서 아들 두 사람을 두고 분가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 세금을 배로 올린다.
셋째, 군공이 있는 자는 그 공의 비율에 따라 상등의 벼슬을 주고, 사사로운 싸움을 한 자는 각각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을 받는다.
넷째, 어른이나 아이나 다 힘을 모아 농사를 짓고 길쌈을 하며, 곡식과 피륙을 많이 바친 자는 부역을 면제케 한다.
다섯째, 상공업을 일삼아 이익만 추구하는 자와 게으른 자는 모두 잡아들여 노예로 만든다.
여섯째, 종실일지라도 군공이 있지 않으면 심사하여 공족의 족보에서 제외시킨다.
일곱째, 높고 낮은 신분의 등급을 분명히 하여, 그 점유하는 전택과 신첩과 의복의 제도를 그 집의 신분 등급에 따라 차등을 둔다.
여덟째, 공이 없는 자는 부유하여도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없게 한다.
상앙은 이러한 법령을 제정한 다음 시행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시험을 하였다. 우선 상앙은 세 길이 되는 나무를 남문에 세워놓은 다음, 백성들을 불러 모아 그 나무를 능히 북문으로 옮겨놓는 자에게는 10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의심스러워 감히 나무를 옮기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영을 내려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놓는 자에게는 50금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한 사람이 그것을 옮겨 놓았다. 그는 즉석에서 그 사람에게 50금을 주어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마침내 상앙은 새로운 법령을 공포하였다. 법령을 공포한 지 1년이 지나자 백성들은 불편하다고 호소하는 자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았다. 이때 마침 태자가 법을 어겼다.
"법이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
상앙은 태자를 법대로 처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자라는 특별한 신분 때문에 감히 처벌할 수 없어, 태자의 보좌관인 공자 건과 스승 공손가에게 그 죄를 물어 경형에 처하였다. 경형은 바늘로 얼굴과 몸을 찔러 먹물로 죄명을 새겨넣는 형벌이었다.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법의 무서움을 알고 모두들 새 법령에 따랐다.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진나라 백성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않았고, 산적이나 좀도둑이 없어졌으며, 집안은 풍족하고 모두가 너그러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또한 백성들은 국가를 위한 싸움에 용감하게 나섰으며, 사사로운 싸움을 피하였다. 그 전에 법령이 불편하다고 말하던 자들이 이제는 법령이 편하다고 말하였다.
"그렇게 말하는 자들도 법령의 교화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상앙은 법령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는 자들을 변방의 성으로 내쫓았다. 그후부터 아무도 법령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상앙은 대량조로 승격되었다. 이후에도 상앙은 계속 개혁 정치를 펴서 토목 공사를 일으키고, 농지를 개간하였으며, 부세를 공평하게 하는 한편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그로부터 4년 후 공자 건이 법을 어겼다. 전에 태자를 대신하여 경형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상앙은 용서하지 않고 코를 베는 의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다시 5년이 지나자 진나라는 부강해졌다. 주나라 천자가 종묘의 제사에 쓴 고기를 진나라 효공에게 보내니, 제후들이 모두 축하해 마지않았다.
규율 : 개인이나 국가나 스스로 필요에 의해 규율을 정할 때는 엄격히 집행되어야 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예외를 용납하다보면 규율은 유명무실해진다. 엄격한 규율집행만이 목적한 바를 계획대로 이룰 수 있는 지름길임을 명심하라.
인심을 잃는 자는 결국 망한다.
"시경에는 또한 '인심을 얻은 자는 흥하고, 인심을 잃어버린 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법을 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지만, 그대신 인심을 잃었습니다."
제나라가 위나라의 군사를 마릉에서 깨뜨리고 태자 신을 사로잡았다. 두다리가 잘린 손빈이 동문수학한 친구이자 원수인 방연을 '솥자리 옮기기' 전술로 무찌른 바로 그 유명한 전투였다. 그 다음 해에 상앙은 진나라 효공을 설득하였다.
"지금 진나라와 위나라를 비유한다면 사람의 뱃속에 병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위나라가 진나라를 병합하지 않으면, 진나라가 곧 위나라를 병합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기느냐 지느냐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왜냐하면 위나라는 험준한 산령의 서쪽에 위치해있어 안읍에 수도를 정하였고, 진나라는 황하를 경계로 하여 산동의 이권을 독점하고 있습니다. 위나라가 생각할 때 유리하면 서쪽의 진나라를 칠 것이고, 불리하다 생각하면 동쪽을 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진나라는 대왕의 위광에 힘입어 매우 강합니다. 그러나 위나라는 작년에 제나라에게 마릉에서 대패하여 힘이 쇠하였고, 제후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습니다. 위나라를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만약 위나라를 제압한다면 진나라는 천연의 요새인 산하를 거느려, 동쪽의 제후들을 굴복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대왕께서 꿈꾸어오신, 제왕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효공은 상앙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즉시 상앙을 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치게 하였다.
한편 위나라에서는 공자 앙을 장군으로 삼아 진나라 군대와 맞서 싸우게 하였다. 두 나라 군대가 대치하였을 때, 상앙은 위나라 공자 앙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옛날에 공자와 서로 친하게 지냈습니다. 이제 함께 두 나라의 장군이 되었으나 차마 서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공자와 함께 서로 낯을 대해보고 맹약을 한 뒤, 즐겨 술이나 마시면서 전쟁을 중지하여 진나라와 위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나라의 공자 앙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곧 상앙은 공자 앙과 만나 술을 마셨다. 그때 상앙은 무사를 곁에 숨겨두고 있다가 위나라 공자 앙을 사로잡았으며, 그 길로 공격 명령을 내려 지휘하는 장군을 잃은 위나라 군대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위나라 혜왕은 진나라와 화친을 맺기 위해 하서의 땅을 베어 바치고, 수도를 안읍에서 대량으로 옮겼다. 그리고 나서 혜왕이 말하였다.
"과인이 일찍이 공숙좌의 진언을 들어 상앙을 채용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에 와 생각하니 후회막급이로다."
상앙이 위나라를 깨뜨리고 돌아오자, 진나라 효공은 그를 상 땅의 15읍에 봉하고 '상군'이라 불렀다.
상앙이 진나라 재상이 된 지 10여 년이 지났다. 진나라의 종실과 외척들 중에서는 그를 원망하는 자들이 많았다. 상앙은 법을 세워 진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너무 법을 앞세워 가차없는 형벌을 가했기 때문에 인심을 얻는 데는 실패하였다. 더구나 위나라 공자 앙을 속여 전쟁에서 이긴 것은 그에게 오히려 큰 흠으로 작용하였다. 어느 날 상앙은 군자로 소문난 조량을 만나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맹란고의 소개로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선생과 사귀기를 청합니다."
이때 조량이 냉담하게 말하였다.
"저는 싫습니다. 공자의 말씀에 '어진이를 천거하여 받들어 모시는 이는 진취하고, 부정한 자들을 모아 왕노릇을 하는 자는 몰락한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옛말에 '자기가 있을 만한 지위가 아닌 데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지위를 탐한다고 하고, 자기가 누릴 수 있는 명성이 아닌 것을 누리는 것을 이름을 탐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만약 승상의 호의를 받아들여 친교를 맺는다면 저는 지위를 탐하고 이름을 탐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상앙은 매우 불쾌하였다. 조량이 스스로를 낮추는 듯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선생은 내가 진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천 장의 양가죽은 한 장의 여우 겨드랑이 가죽만 못합니다. 천 사람의 '네 그렇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하는 말은 한 선비가 '아닙니다'하고 부정하는 것만 못합니다. 은나라 주왕은 신하들의 말을 봉쇄하여 멸망하였고, 주나라의 무왕은 신하들의 직언을 받아들여 번창하였습니다. 만약 승상께서 무왕을 그르지 않다고 생각하시고, 저를 주살하지 않으신다면, 하루 종일이라도 바른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량이 이와 같이 나오자, 상앙이 화를 억누르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말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 꾸미는 말은 아름답고, 지극한 말은 절실하며, 충고하는 말은 약이 되고, 달콤한 말은 병이 된다고 합니다. 선생께서 과연 하루 종일 바른 말 하시기를 즐겨하신다면, 저에게는 그것이 아주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상앙은 예의를 다하여 대답했지만, 그 말과 억양 속에는 상대에 대한 비웃음이 곁들여 있었다. 그러나 조량은 서슴없이 상앙의 잘못을 지적하였다. 태자의 죄를 물어 공자 건과 스승 공손가에게 경형을 가한 것이며, 법을 어긴 백성들에게 엄중한 죄를 묻고, 법령에 대해 의견을 말한 사람을 변방의 성으로 내쫓은 것 등을 열거하였다. 그리고 나서 "시경"에 나오는 말을 예로 들어 상앙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시경에 말하기를 '쥐를 보아도 몸이 있건만 사람으로서 예 없을까. 사람으로서 예 없으면 어찌 빨리 죽지 않을까'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를 가지고 본다면 승상께서는 장수를 누릴 수 없습니다. 지금 공자 건은 경형에다 코를 베는 형벌까지 받아 문을 닫고 밖에 나오지 않은 지가 8년이 넘었습니다. 시경에는 또한 '인심을 얻은 자는 흥하고, 인심을 잃어버린 자는 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승상께서는 법을 세워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지만, 그대신 인심을 잃었습니다. 서경에는 '모든 일에 덕을 근본으로 삼는 자는 영달하고, 힘을 근본으로 삼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승상의 위태로움은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어째서 봉지로 받은 상 땅의 15읍을 나라에 돌려주고, 시골에 돌아가서 농사를 지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상앙은 이와 같은 조량의 말을 끝내 듣지 않았다.
그 뒤 불과 다섯 달만에 진나라 효공이 죽고, 태자가 즉위하여 혜왕이 되었다. 상앙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무리들은 새로 즉위한 왕에게 고하였다.
"상앙이 지금 군사를 모아 모반을 꾀하려 하고 있습니다."
혜왕은 즉시 상앙을 잡아오게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상앙은 시급히 변복을 하고 도망쳤다. 그가 함곡관에 이르러 어느 여관에 묵으려 할 때였다. 상앙의 얼굴을 모르는 여관의 여주인은 여행 증명서를 내보이라고 하였다. 급하게 도망쳤기 때문에 상앙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상앙 어른이 정하신 법에 의하면 여행 증명서가 없는 자를 유숙시킬 경우 처벌을 받게 됩니다."
여관에서 쫓겨난 상앙은 스스로 탄식하였다.
"아아, 내가 만든 법에 내가 걸려들었구나!"
상앙은 진나라 국경을 넘어 위나라로 갔다. 그러나 위나라 백성들은 공자 앙을 속여 위나라 군대를 격파시킨 상앙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상앙은 다시 다른 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아니된다. 상앙은 강국인 진나라의 적이므로 받아들였다가는 진나라의 미움을 살 수 있다."
나라마다 이렇게 나오니 상앙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상앙은 몰래 진나라로 되돌아와 그의 일족과 상읍의 군대를 이끌고 정나라로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나라는 곧 군대를 출동시켜 정나라의 민지에서 상앙을 사로잡아 죽였다. 그의 일족들도 몰살당하였다.
인심 : 세상에 독불장군이란 존재할 수 없다. 타인의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올바름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올바르다고 해도 결국 주위에 적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인심을 잃으면 될 일도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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