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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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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27센트가 일으킨 기적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3천 3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탬플 침례교회와 탬플 대학, 탬플 병원, 탬플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탬플 재단이 설립되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도 어린 꼬마아이의 애절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립니다. 해티 와이얕이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작은 규모의 주일학교를 찾아가서 자기를 어떤 반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리가 부족해 학생을 더 받을 수 없는 주일학교에서는 해티를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채 2년이 지나지 않아서 해티 와이얕은 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해티가 죽은 후에 마음을 뜨겁게 한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해티가 베고 있던 베개 밑에서 작은 어린이용 지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지갑 속에는 동전 27센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에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배당을 더 크게 지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갈 수 있도록."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 사실을 교회 성도들에게 알렸을 때 그들은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예배당을 증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문에도 이 이야기가 보도되자 도처에서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놓았습니다. 드디어 해티 소녀가 죽은 지 5년 만에 27센트였던 돈이 25만 달러라는 대단한 액수로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탬플 침례교회 예배당 증축은 물론 대학교, 병원 등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너의 형제들을 너의 가슴에 껴안으라. 동정이 있는 곳에 신의 평화가 있다.
O brother mam! fold to thy heart thy brother. Where pofy dwells, the peace of God is there. (J. G. 휘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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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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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4. 다르게 끈질기게 파고들어라 - 시추 경영
이 친구 정신 나갔군
가장 상식적인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려다 보니 오히려 사람들은 나더러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자주 말한다. 그런 말들에 일일이 대꾸하기도 귀찮아져서 결국 생각해낸 말이 '거꾸로 경영'이다. 사실은 거꾸로 된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내 방식의 '거꾸로 경영'은 어떤 이론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살면서 체득한 인생철학이었다. 이미 여러 번 말했지만 '거꾸로 경영'은 상식을 추구하자는 것이고, 상식 속에 진정한 벤처가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해서도 말한 바 있다. 나의 '거꾸로 경영'을 감히 벤처 마인드라고 칭할 수 있다면, 내 인생 역시 벤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 가족은 1979년까지 서울 공릉동에 살다가 서초구 원지동으로 이사했다. 그런 데에는 특별한 동기가 있었다. 70년대 중반, 봉급생활자들의 유일한 재산증식방법은 바로 이사를 다니는 것이었다. 수도와 도로가 채 갖춰지지 않은 미래개발 지역으로 이사하여 한 1~2년을 살다가, 그곳이 개발되어 집값이 오르면 또다시 변두리로 이사가는 식이다. 그렇게 세 번 정도 이사를 다니면 마침내 좋은 집을 갖게 된다. 공릉동으로 이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에 직장으로부터 받아 살던, 대지 35평에 건평 18평짜리 집의 가격이 올랐던 덕분이다. 어떤 건축업자가 공릉동 동산의 배 밭을 밀고 60채 정도를 새로 지었는데, 대지 75평에 건평 45평이나 되는 아주 좋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몇 년을 살다보니 또다시 집값이 올랐다. 그래서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하느냐 하는 게 숙제였다.
한편, 나는 70년대에 세 번에 걸쳐 세계여행을 하다시피 했다. 중앙정보부 기획조정실 조정과장을 지냈을 때, 해외공관들을 감사하기 위해 해외출장을 많이 다녔던 것이다. 그런 공무를 수행하러 다니면서도 항상 머릿속에는 '다음에는 어디로 이사를 가야 히트하느냐'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구지역을 다녀보니, 좋은 집은 예외 없이 산 중턱에 있거나 호수를 끼고 있는 등, 모두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오히려 도심지의 집들은 모두 슬럼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그 반대였다. 전철역이 가깝거나 교통이 좋은 곳이 인기였다 더구나 멀쩡한 단독주택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하는 것이 대유행인 시절이었다. 선진국에서는 환경이 중요시되는 데 비해 한국은 아직 생활의 편의가 더 우선시되는 사회였다. 물론 자가용의 낮은 보급률도 한 이유가 되기도 했을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1978년 당시에 생각하기에, 우리나라도 한 5년 후부터는 오히려 주거환경쪽으로 관심이 역전될 것 같았다. 경제발전의 속도와 문화적 취향의 변동양상을 유심히 살피다 보니 그런 확신이 생긴 것이다.
자녀교육 문제도 사실은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대부분의 우리 아이들은 콘크리트 문화에 둘러싸여 각박하게 자라고 있지만, 다가오는 미래사회에는 지금까지처럼 규격화된 엘리트보다는 따뜻한 가슴과 낭만적 열정을 지닌 방목아들이 대접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어도 자녀교육 때문에 도심을 떠날 수 없다는 푸념들이 많다. 그러나 나는 과감하게 도심외곽을 선택했다. 아이들은 농사일을 거들면서 자유롭게 자랐고, 장성한 아이들의 모스에도 나는 매우 만족하고 있다. 아무튼, 앞으로는 주거환경이 더 중요시되니 미리 교외에 나가서 살면 재산증식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과, 교육환경 면에서도 아이들을 도심에서 경쟁심리로 키우느니 시골에서 여유롭게 키우면 장성한 후에 더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원래는 신사동 영동시장 언덕에 깔끔하게 지어놓은 꽤 넓은 집으로 이사할 계획이었는데, 해외출장 이후엔 마음이 달라져, 서초구 원지동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원지동은 행정구역상으로만 서울시로 되어 있을 뿐, 사실상은 시골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사방은 온통 논밭이었으며, 내가 처음에 산 500평 정도의 전답은 청계산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공릉동 집을 팔고 원지동 땅을 한 평에 3,200원 정도에 샀으니, 꽤 많은 돈을 남길 수 있었다. 나중에 그 땅에 이어진 임야 1,000평을 더 샀다. 그래도 남은 돈이 있어서 정원수의 왕자라고 하는 금송과 토속적인 한국의 꽃 고려영산홍 등 많은 관상 수를 사다 집 주변에 심었다.
그 무렵 나와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이나 직장동료들의 관심사는 대개 비슷했다. 만나면 언제나 재산증식이나 노후, 자녀교육문제 등이 화제였고 저마다의 고민이었다. 친구들은 변두리의 쓸모 없어 보이는 땅을 사서 이사한다는 내 말을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친구 정신 나갔군."
군대시절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들어왔던 소리였다. 물론 내 의견에 동의하는 친구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친구들 중에는 호젓한 산자락 동네를 나와 함께 답사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실지로 행동으로 옮긴 것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들은 모두 관심은 있었으나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미래를 내다보고 예측하는 사람은 언제나 많은 법이다. 그러나 자신이 바라본 미래를 믿고, 그에 입각해서 오늘부터 미래를 준비하는 이는 아주 적다. 날씨가 좋은 계절이면 나는 곧잘 친구들 내외를 집에 초대하곤 하는데, 뒷마당에서 불고기를 구우며 여럿이서 수다 떠는 재미가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마당은 산자락과 맞닿아 있어 경관이 그럴듯할 뿐 아니라 각종 꽃나무들이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내어 보는 맛을 더해준다. 산 속이나 다름없으니 공기 좋은 것이야 말할 것도 없고, 산자락에서 흘러 내려오는 계곡물이 마당가를 비껴 흘러서 그것을 보고 듣는 운치도 제법이다.
요즘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는 것을 좀 꺼리는 눈치다. 우리 집에서 놀고 돌아가면 꼭 안식구들한테 '당신은 지금까지 뭐했느냐'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고 그들보다 넉넉한 여유자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경제적 조건이나 당면 관심사는 비슷했지만 다만 선택이 전혀 달랐을 뿐이다. 당장의 유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항상 제자리걸음일 뿐이다. 지금의 우리 집은 부르는 게 값이 될 지경으로 탐내는 사람이 많다. 가계경영에 있어서도 '거꾸로'의 원칙은 예외가 아니다. '거꾸로 경영'은 상식을 추구하자는 것이고, 상식 속에 진정한 벤처가 있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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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국내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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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불 - 최명희
혼불 1. 4. (3/4)
그때, 마을에서는, 음식의 양이 많은 것에도 놀랐었지만 그 솜씨의 알뜰하고도 미려 준절한 품격에 더 감탄했었다. 집성촌으로 자작 일촌을 이루고 살아오던 이씨 문중의 마을 매안에도, 서원이 헐리면서 속량이 된 노비가 눌러앉은 것 말고 또 언제부터인가 타성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근년에도 그 수가 제법 늘어서 십여 호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들은 각성바지로, 거멍굴보다는 조금 더 마을 바짝 양지 쪽에 모여 살았으나, 문중으로부터 온전한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저, 조상의 뼈가 묻히고 그 혼백이 깃들어 있는 고향을 버리고 떠나와, 남의 문중에 있는 마을에 눈치 보며 얹혀사는 일이란 어느 모로 살펴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상에 대한 무서운 배신이요. 후손에 대해서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으니, 그러한 것을 감당하고라도 고향땅을 등지는 사람이라면, 자기의 근본을 버리고자 하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자기의 근본을 팽개치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란, 설령 상놈이 아니라 성자가 있다 해도 이미 선비는 아니요, 천한 불상놈이나 다름없으며, 그가 스스로 버린 것이 아니라 고향으로부터 버림 받았다 하면, 그것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고 해서는 안되는 금수와 같은 일을 저질렀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 아니겠느냐 하였다. 덕석말이를 당하지 않고서야 웬만한 일로 파문에 이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일문에서 당하는 파문은, 한 사람의 사람다운 삶을 탈당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홍수나 천재지변으로 고향을 떠났다 하더라도 대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매안으로 흘러들어온 타성들은, 지나간 시절에 대하여 함구한 채 묵묵히 천역을 감당하여 살고 있었다.
그들은 산비탈을 일구어 밭을 가꾸기도 하고, 놉일도 했으며 원뜸의 이씨 종가와 다른 문중 사람들의 논밭을 얻어 부치기도 하였다. 물론 길쌈도 빼놓을 수 없는 생업이 되어 주었다. 처음에는 한 집, 두 집이었으나, 이제 십여 호를 넘으니, 그런대로 그들은 서로 한 덩어리를 이루며 등을 부비었다. 그들도 강모의 혼례 후에는, 모이기만 하면 대실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청암마님댁보다 가세가 훨씬 더 번창허능갑등만, 소문이 그러데."
"이씨들이 손해 나는 혼인은 안허는 집잉게로, 가문이 있는디?"
"거그는 몇 석이나 헌다간디?"
"소문만 갖꼬는 잘 모리겄등만, 말로는 만 석이라고도 허고, 한 칠팔천 헌다고도 허고 말이여."
"하이고, 그러먼 이쪽허고는 대도 못허게 차가 지능 거이그만잉."
"아매, 한 오천 석은 헝갑데."
"아니여, 말로는, 만석꾼이라든디?"
"만 석은 머언... 말이 만석이지 만 석 살림이 어디 그리 쉽간디? 옛말에도 만 석 부자는 나라가 알고, 하늘이 낸당 거이여."
"모올라. 우리들이야 어치케 자세헌 내막을 알 수 있당가?"
"그런디 말이여, 그 오천 석이랑 것도 선대쩍 이얘기지 지금은 말만 그런당갑데. 가문만 빛났지 실속은 없다고들 그러데."
"차암, 사람덜 겁없네. 어서 가마니들이나 짜드라고오. 오천 석, 만 석이 무신 지내가는 갱아지 이름이등게비."
"그렇기는 하네. 부지런히 새끼 꼬아서 짚세기라도 한 커리 더 삼어야제. 그 양반네들 재산 타령 해 봤자 머엇에다 쓴당가. 내 땅, 내 논도 아닐디 말이여. 계산 잘허먼 누가 노나준대?"
"참말로... 손바닥 반절만헌 논빼미 한 마지기 땅이라도 내 것이라고 이름붙여 보고 죽으먼 얼매나 좋으까... ."
"씨잘 디 없는 소리. 눈 깜빡새라도 손모가지 놓지 말고 어서 일들이나 허드라고. 없는 사람은 그저 주딩이가 웬수고 손이 보배여."
한동안은 그렇게 아랫몰이 술렁거리었었다. 감탄과 부러움과 한숨이 남모르게 엉기면서 침묵속으로 가라앉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그러지 않아도 카랑카랑한 이기채의 기침 소리가 혼행 후에 더 쇳소리를 내며 높아진 것을 들었다. 옹구네가 평순네를 보고 막 무엇이라고 입을 열려는데, 못줄이 위아래로 춤을 춘다. 매달린 색색의 헝겊 꼬리들이 날린다. 엎드렸던 사람들이 못줄 잡은 남정네를 기웃기웃 바라본다.
"새참이요오."
논배미 저쪽에서 붙들이가 목청을 돋운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고개를 앞뒤로 돌려 보기도 하고 어깨를 뒤로 젖혀 보기도 하면서 두렁 쪽으로 나간다. 모두들 반가운 기색이다. 안서방네가, 담살이 붙들이를 데리고 바우네와 더불어 내온 새참 광주리 주변에 하나씩 둘씩 모여 앉은 남정네와 아낙네들은, 생각난 듯, 배가 출출해옴을 느낀다.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도, 이렇게 새참 광주리를 보면 한꺼번에 허기가 지는 것이다.
"그나저나, 새서방님 말이여, 그러다가 대실 새아씨도 인월마님짝 나능 거 아닝가 모르겄어."
옹구네는 아까 하려다가 미처 못한 말을 논에서 나오며 평순네에게 한다. 그네는 한 번 하고 싶었던 말을 결코 참는 법이 없었다.
"아이고, 벨 소리를 다 허네, 그래사 쓴당가?"
"누구는 머 그러고 싶어서 그러능가? 아, 저렇게 서방님이 안 볼라고 그러시면 먼 디 어디 있겄능가? 인월마님 정경만 허드라고, 이런 사람보기에도 참 안되얏등만."
"나 같으먼 도망가 불겄다. 진작에. 사램이 한 펭상을 산다고 한 세상을 그렇게 살고 만당가? 어디 가서 먼 짓을 못헌다고... ."
"아이고메, 그렁게 양반이제이, 개기는 어디로 가? 우리들허고 어디 같당가? 그림자맹이로 그렇게 살어도 벨 수 없는 일이제, 인월샌님은 서울서 자리잡고 아조 거그서 개밍히여 뿌리 내리싱갑제?"
"하아, 소생도 벌세 셋이나 두셌다는디?"
"그리여이!"
천천히 이야기하며 이랑으로 나와, 두 사람이 새참 자리에 왔을 때 사람들은 벌써 한참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두부를 넣고 끊인 된장 감자국 냄새가 구수하다. 그새 사발을 비우고 곰방대에 담배가루를 재는 사람도 있다. 붙들이는 술동이 옆에 포개 놓은 흰 사기 대접을 하나하나 내린다. 술동이 위에는 바가지가 떠 있다. 농주의 새콤한 냄새가 바람에 실린다.
"붙들아, 니가 율촌마님한티 말씀 좀 잘 디리 갖꼬, 술동우도 한 개 더 내오고, 밥바구리도 한 개 더 갖고 오니라."
담배를 재던 떠꺼머리 걱실걱실한 장정이 붙들이를 보고 지나가는 말처럼, 이런 것은 우스갯고리라는 듯 한 마디 던진다. 아마 그는 생김새로 보아 밥의 양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았다. 붙들이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러 그를 본다. 춘복이다. 그라면 씨름으로도 이름난 사람이다.
"사발 밑바닥에 붙은 밥 숟구락 먹고 어디 들일 허겄냐, 허리가 꼬부라져서. 보나마나 술도, 입술이나 취기다 말티제."
안서방네는 그런 춘복의 말을 못 들은 체한다. 바우네는 등에 업은 아이를 앞으로 돌려 무릅 위에 앉히고 젖을 물린다.
"천석꾼 만석꾼 부잣댁이서 멋 헐라고 이렇게 밥을 애끼능고."
춘복이는 기어이 할 말을 다 한다. 다른 사람들은 묵묵히 밥을 먹으면서 아무도 말에 끼어들지 않는다. 밥을 담아내온 대소쿠리도 비고, 술동이도 비었을 때, 안서방네와 붙들이, 바우네는 빈 그릇들을 챙겨 일어섰다.
"욕보시겄소잉."
안서방네가 인사말을 하며 광주리들을 이고는 논배미 저쪽으로 사라져 가고 난 다음에야,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아이구 이노무 자석아, 너는 왜 그렇게 말을 못 참냐, 못 참기를."
하고 중늙은이가 채 못되어 보이는 공배가 춘복이 주둥이를 쥐어박는 시늉을 한다.
"하앗따, 머, 그런 말도 못허고 산다요? 입은 뒀다 머에다 쓸라고 말이사 바로 말이지, 새참이라고 어디 애들 장난맹이로 한 숟구락씩 엥게 주면, 그께잇거 머, 한 볼때기 깨물고 말 것도 없는디."
"그래도, 배 곯아서 일 못허든 안형제 그렇게 입바른 소리 자꼬 해쌓지 마라. 그래서 졸 거 하나도 없응게에."
공배는 힘을 주어 한 마디씩 한다.
"멩심히여."
그래도 못 미더웠던지 말끝을 누르며 그는 한 마디를 더 거든다. 그러자 옆에서 옹구네가 나선다. 그네는 나서기를 무척 좋아하는 아낙이다.
"그 전에 청암마님 살림하실 적으는 안 그랬다고요. 그 어른이야 참말로 대처에 밝으시고 훠언허시지요. 아랫사람 다둑거릴 지 아시고, 천헌 것들 불쌍헌 지 아시고, 그때는 차암 등 따시고 배 불렀는디... ."
옹구네의 음성에는 타령조가 섞여 있다. 청승스럽다.
"지금은 머 굶어 죽능가? 율촌마님이라고 머얼 얼매나 인색허시간디? 우리한테만 그러싱 거이 아닝게비여. 당신이 입고 잡숫는 것도 그렇게 규모가 짱짱허고 검소허싱게."
아무래도 공배는, 이렇게 새참 뒤 끝에 둘러앉아 그 댁의 인심 공론이나 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말도 말어, 이런 년은, 먹을래도 먹을 거이 없응게 먹지마는, 아 그런 부잣집이서 무신 마늘이 귀헐 거잉가? 썩어나는 거이 마늘이제잉. 그런디도, 저어번 날 봉게는 마늘 한 쪽을 갖고, 칼로 딱 반 토막을 내능 거이여. 멋 헐라고 그렇고, 암 말도 안허고 넹게다 봤제. 그것을 낮에 양념으로 반절 넣고는 두었다가 저녁판에 그놈 남은 반절을 양념에 넣드라고오. 징해라."
옹구네는 몸서리를 쳐 보인다.
"옛말도 안 있능갑네. 굳은 땅에 물 괸다고 안허등가, 그렇게 그렇게 큰 살림을 허시겄제잉."
이번에는 평순네도 끼여들었다. 춘복은 칫, 하고 논배미 쪽에 침을 뱉더니,
"시상도 마않이 달라졌단디, 머이 어뜨케 달러졌능가 휘이 귀겡이나 한 번 댕게오까아? 속 터진다."
하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야 좀 봐. 달러지기는 먼 놈의 시상이 달러진다냐? 뒤집어지든 엎어지든 상상놈의 신세는 벤헐래야 벤헐 거이 있어야제잉? 농사철 당해서 매급시 맘 들뜨지 말고 두렛일 소홀허게 말그라. 잉?"
공배가 끝까지 춘복의 말꼬리를 쫓으며 으름장을 놓는다.
"제엔장헐 놈의 시상. 다 똑같은 사람으로 났는디, 쎄 빠지게 일허는 놈은 죽어라 일만 허고, 할랑할랑 부채 들고 대청마루에 책상다리 앉었는 양반은 가만히 앉은 자리에서 눈만 한 번 깜잭이먼 한 천 석이니, 먼 놈의 시상이 이렁가아. 생각을 숫제 안해 부러야제. 생각만 조께 허먼 기양 속이 뒤집어징게... ."
"허허어. 춘복아, 너 또 왜 그러냐아... 내동 암 말도 않고 소맹이로 일만 잘허드니, 무신 바램이 또 너를 헤젓는다냐."
"아, 내가 이 나이를 먹어 갖꼬, 힘 좋겄다 머엇이 아숩다고 논바닥에 처백헤 갖꼬는, 새참 밥 한 그륵 갖꼬 가이내들맹이로 이러고 저러고 허니 속이 좋겄소? 에린 것 붙들고."
"씨가 다릉게 안 그러냐? 씨가... ."
공배의 그 말에 춘복의 눈꼬리가 위로 찢겨 올라간다.
"씨? 씨가 머이간디? 일월성신이 한 자리 뫼야 앉어서 콩 개리고 팥 개리디끼 너는 양반 종자, 너는 쌍놈 종자, 소쿠리다가 갈러 놓간디? 그리 갖꼬는 땅 우에다가 모 붓는 거여? 그렁 것도 아닌디, 사람들이 이리저리 갈러 놓고는 양반은 양반노릇 허고, 쌍놈은 쎄가 빠지고 안 그러요? 그거이 머언 씨 탓이라요?"
"그래도 그렁 거이 아니다. 다 전상에 죄가 많아서 이승에 와. 갚고 갈라고 이 고상을 안허냐. 속에서 치민 대로 말을 다 헐라면, 쎄바닥이 칭칭 필로 갱겨 있드라도 다 못 풀제잉. 바깥으로 풀어내면 일도 안되고 화만 부르능 거잉게에 속으다 또아리를 지어서 담어 놔라. 인자 이러고 참고 살자먼 이담에 존 시상도 오겄지."
공배는 담배 연기를 풀썩 뱉어낸다. 연기의 그늘이 얼굴에 어룽거리다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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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35. 자기 기분에 정통하기
<행이든 불행이든 모두 스쳐가는 것. 자신의 기분을 알아 거기에 희생되지 않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자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 한 왕이 자신의 능력에 대해 크게 좌절하였다. 게다가 이웃나라의, 자신보다 힘이 더 센 왕이 쳐들어 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왕은 두려웠다. 죽음이, 패배가, 절망이, 늙음이 두렵고 무서웠다. 그래서 왕은 현자들을 불러 물었다.
<까닭은 모르겠으나 어떤 반지를 하나 꼭 찾아야만 되겠소... 그걸로 말하자면 내가 불행할 때 날 즐겁게 해 줄 것이오. 또 내가 행복할 때 그걸 보기만 하면 저절로 날 슬프게 할 것이오>
왕은 하나의 열쇠를 구하는 것이었다. 두 개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행복의 문과 불행의 문을 모두 열 수 있는 열쇠를. 왕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는 자기 기분에 정통하길 원하는 것이다. 자기 기분의 진짜 주인이 되어, 더는 자기 기분에 희생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현자들은 이 문제를 가지고 머리를 있는 대로 다 짜봤지만 아무런 결론도 얻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한 수피 신비가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수피는 자기손가락에 끼어 있던 반지 하나를 빼주며 말하였다.
<꼭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게 있소. 이걸 왕에게 주되, 왕이 모든 걸 다 잃고 혼란과 고통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때에 이 반지 밑을 보라 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 반지의 메시지를 놓칠 것이오>
왕은 수피의 말을 수락하고 반지를 받았다.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이웃나라가 침략을 개시하여 물밀듯이 쳐들어 왔다. 왕은 목숨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왕궁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적들이 뒤쫓아 왔다. 말들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들렸다. 왕은 자신의 말도 이미 죽었으리라 하고 그냥 뛰어 달아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로 그를 몰아넣고 있었다. 완전 포위된 왕은 막다른 골목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그때 왕은 불현듯 반지를 떠올렸다. 반지의 뚜껑을 열고 보석 밑을 살펴 보았다. 거기엔 이런 글귀가 박혀 있었다.
"이것 역시 스쳐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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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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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원수의 시체를 파내어 3백 번 태질을 가하다 - 오자서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라! 그리고 그 시체를 내 앞으로 가져와라!" 오자서는 무덤에서 파낸 초나라 평왕의 시체에다 3백 번 태질을 하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분풀이를 하였다.
오자서는 초나라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오사는 평왕의 태자 건의 태부였다. 그리고 그 밑에 태자의 소부로 비무기가 있었는데, 그는 간특한 기회주의자였다. 진나라로부터 태자비를 맞아들일 때, 평왕은 비무기를 사신으로 보냈다. 그런데 태자비를 먼저 보고 온 비무기는 평왕에게 살짝 그녀가 천하절색의 미인이라 보고하였다. 평왕은 태자비가 오자 자신이 먼저 본 후 마음이 달라져 그날로 바로 아들의 신부감을 가로채버렸다. 이렇게 되자 비무기는 은근히 태자가 두려워졌다. 그는 평왕에게 태자가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참소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태부 오사는 평왕에게 나가 비무기의 잘못을 비판하였다.
"대왕께서는 어찌 사람을 모함하는 소인배의 말만 들으시고 골육인 친자식을 의심하려 하십니까?"
그런데 이때 마침 태자는 아버지 평왕이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다른 나라로 도망쳤다. 이에 평왕은 정말로 태자가 반역을 하려고 했다 생각하고, 태부 오사 역시 한통속이라며 즉시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비무기는 후환이 두려워 오사의 두 아들까지 반역에 가담하였다며, 빨리 그들을 잡아들여야 한다고 간하였다. 평왕은 오사를 불러 말하였다.
"네가 두 아들을 불러들이면 너만큼은 살려주겠다. 그러나 두 아들이 오지 않으면 너는 곧 주살될 것이다."
오사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불러 보십시오. 큰아들은 성정이 어질어 반드시 올 것이나, 작은아들은 고집이 세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곧 오사의 집으로 사자를 보냈다. 큰아들 오상은 자신이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며 순순히 왕의 명에 따랐다. 그러나 아버지 오사의 말처럼 작은아들 오자서는 달랐다.
"형님, 대왕이 우리 형제를 부른 것은 아버지를 살려주려고 해서가 아닙니다. 만일 도망치게 되면 후환이 두려워 아예 우리 형제를 주살해 버리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형님이 고집을 세우시니 저로서는 말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망쳐서 살아남았다가 이 원수를 반드시 갚고야 말겠습니다."
오자서는 그길로 태자 건이 도망쳤다는 송나라로 갔다. 이렇게 오자서가 도망치고 나서, 초나라 평왕은 오사와 오상 부자를 죽여버렸다. 한편 송나라에서는 화씨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 난을 피해 오자서는 태자와 함께 정나라로 갔다.
"우리는 복수를 하려고 합니다. 초나라를 칠테니 군사를 빌려주십시오."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 왕에게 이렇게 요청했다.
"그대들의 사정이 딱한 것은 알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 정나라가 초나라와 원수지간이 될 수 없는 일이오."
오자서는 태자와 의논하여, 이번에는 진나라로 가서 군사를 빌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진나라에서도 군사를 빌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진나라 왕 경공은 태자 건이 정나라와 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가 먼저 정나라를 쳐서 이긴 후, 군사를 빌려주겠다고 하였다. 단 조건은 태자 건이 다시 정나라에 가서 진나라 군대가 도성을 공격할 때 내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오자서는, 만약 진나라가 정나라를 쳐서 이길 경우 태자 건을 정나라 왕으로 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다시 정나라로 갔다. 그런데 동행한 시종이 몰래 정나라왕에게 그 음모를 고자질하였다. 태자 건은 곧 정나라 군사들에게 잡혔다. 오자서는 태자의 아들 승을 데리고 다시 오나라 쪽으로 도망쳤다. 며칠을 굶으면서 달리고 달려 장강 앞에 이르렀을 때, 뒤쪽에서 정나라 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내 운명도 여기서 끝이 나는구나!"
오자서는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였다. 그때 늙은 어부가 강가의 거룻배 위에서 손짓을 하였다. 오자서는 얼른 그 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자신의 칼을 뱃삯대신 내밀었다.
"가진 게 이것밖에 없습니다. 백금의 값은 나갈 것이니, 급히 강을 건너게 해주십시오."
"여보시오. 그대는 오자서가 아니오? 지금 초나라에는 곳곳에 그대의 초상이 붙어 있소. 그대의 목을 가져오면 상금 오만 섬과 높은 벼슬을 준다고 하오. 나에게 욕심이 있다면 백금짜리밖에 안 되는 칼을 받겠소 차라리 그대의 목을 가져가 푸짐한 상금을 챙기고 벼슬살이를 하는게 낫지."
늙은 어부는 그러면서 급히 노를 저어, 오자서가 무사히 강을 건너 도망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 원수를 갚기 전까지 나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몸이다!"
오자서는 이렇게 이를 악물었다. 오나라로 간 오자서는 공자 광과 친하게 지냈다. 공자광이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안 오자서는, 천하의 칼잡이 전제를 그에게 소개하였다. 공자 광이 연회를 열었을 때 전제는 생선 속에 칼을 숨기고 가서 오나라 요왕을 찔러 죽였다. 이렇게 하여 공자 광은 오나라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합려였다. 오나라 왕 합려는 오자서에게 외무대신에 해당하는 행인의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한편 초나라에서는 평왕이 죽고, 태자 건의 부인이 될 뻔하였던 진나라 공주에게서 낳은 아들 진이 소왕으로 즉위하였다. 합려가 오나라 왕이 된 지 9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오자서에게는 원수를 갚을 기회가 왔다.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게 된 것이었다. 이때 오나라 군사는 다섯 번 공격을 하여 드디어 초나라의 수도를 점령하였다. 초나라 소왕은 운몽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다시 운으로, 운에서 또다시 수로 피신하였다.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수도에 입성한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부터 찾았다.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라! 그리고 그 시체를 내 앞으로 가져와라!"
오자서는 무덤에서 파낸 평왕의 시체에다 3백 번 태질을 하면서 그동안 참아왔던 분풀이를 하였다. 한편 오나라 왕 합려는 월나라를 치다가 손가락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것이 도져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부차가 왕이 되었다.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인 월나라왕 구천을 쳐서 회계산에서 항복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제나라를 치려 하였을 때, 오자서가 반대를 하였다.
"제나라를 치기 전에 월나라를 경계하십시오."
그러나 오나라 왕 부차는 오자서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이나 부차는 제나라를 치고자 하였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오자서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이처럼 번번이 반대에 부딪치자, 부차는 오자서를 미워하게 되었다. 화가 난 부차가 오자서에게 명하였다.
"그대가 제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시오. 가서 그쪽 사정을 몰래 염탐해 오란 말이오."
오자서는 제나라로 갈 때 아들을 데리고 갔다. 그리고 오나라로 돌아올 때 아들을 제나라에 남겨두었다.
"오나라는 망한다. 내가 수차에 걸쳐 오나라 왕에게 제나라를 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를 듣지 않았다."
오자서는 아들에게 오나라가 망하여 겪게 될 환난을 피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제나라에다 아들을 남겨 둔 것이었다. 그런데 한편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 재상인 백비에게 뇌물을 보내어, 눈엣가시 같은 오자서를 탄핵하도록 하였다. 백비는 오자서가 아들을 제나라에 두고 온 것에 대하여 강한 의심을 품고, 이 사실을 오나라 왕 부차에 일러바쳤다.
"그렇다면 오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제나라 편에 선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과인이 제나라를 치자고 할 때 극구 반대를 한 것이다. 첩자 오자서가 제나라로 달아나기 전에 죽여야 한다."
오나라 왕은 즉시 사자를 시켜 오자서에게 칼을 보내 자결하라고 명령하였다.
"간신 백비가 충신 오자서를 죽이려 하는구나!"
오자서는 이렇게 하늘을 우러러 한탄한 후 자신의 가신을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단단히 부탁하였다.
"반드시 내 무덤 위에다 가래나무를 심어주게, 오나라 왕이 적에게 패하여 죽었을 때 그 나무로 관을 짜서 시체를 넣어야 하니까. 그리고 내 눈알을 빼어서 동문 위에다 걸어주게나. 월나라 군대가 쳐들어와 오나라가 망하는 꼴을 꼭 보고 싶기 때문일세."
이 말을 남기고 오자서는 곧 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사신이 전하는 오자서의 말을 듣고, 오나라 왕 부차는 크게 노하여 소리쳤다.
"오자서의 시체를 말가죽 주머니에 넣어 장강에 빠뜨려라!"
그 뒤 오나라 왕 부차는 제나라를 쳐서 이겼으나, 진나라의 공격을 받아 국력이 극도로 쇠퇴하였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던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를 쳐서 멸망시켰으며, 곧 부차는 자결하였다.
신중 : 살다보면 무엇이 올바른 판단인지 혼동될 때가 많다. 깊게 생각하고 상황을 따져 판단하라. 신중해야 할 때 신중한 것은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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