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 - 최명희
혼불 1. 4. (1/4)
사월령
비가 흐뭇하게 온 끝에 볕이 나서, 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였다. 모내기를 하기에는 짜 맞춘 것 같은 날씨이다. 겨울이 끝나고 해토가 시작되면서 겨우내 얼어 붙었던 땅은 서서히 녹아 내리고 추위에 굳은 흙이 그 살을 풀었다. 그러고는 엊그제 가래질을 했던 듯싶은데, 벌써 골짜기마다 뻐꾸기 소리가 한창인 것이다. 뻐꾸기가 한 번 울면 진달래가 피어나고, 또 한 번 울면 버들잎이 피어났다. 그 새 소리에 눈짓하며 꽃들이 진다. 종달이도 명랑하게 지저귄다. 건 듯 바람이 소리와 함께 싣고 들판으로 불어오건만, 논에 엎드린 사람들은 등이 따갑다. 들판에는 못줄이 색동 헝겊을 달고 금을 긋는다. 사람들은 허옇게 엎드려 못줄에 맞추어 나란히 모를 심고 있다. 바람에 헝겊의 색색깔이 팔락거린다. 못줄을 잡은 사람은 논의 이쪽과 저쪽 두렁에 서서 손을 높이 흔들며 소리를 질러 서로 신호한다. 이른 새벽, 채 닭이 울기도 전부터 모여앉아 모를 찌기 시작하였는데도 들일은 이제야 초반이다. 하늘의 해는 아직도 어리고 젊다.
"올 좀생이보기도 어쩠등고."
맨다리에 닿는 논물 기운이 싱그럽고, 발가락 사이에서 미끝거리는 진흙 감촉이 간지러운 옹구네가 옆에 엎드린 평순네에게 묻는다. 입으로는 말을 하지만 손놀림은 빈틈이 없다.
"아조 나란히 슨 것은 아니라도 별들이 기양 앞스거니 뒷스거니 서로 다투등만."
"그리여? 그러먼 올 농사는 갠찮겄네?"
"두레 시작헌 날 안서방이 날씨 좋다고 안 그러등갑네. 좀생이나 그날 날씨나 다 좋다고, 좋아라 해쌓등만."
두 사람은 엎드린 채 말을 주고받으며, 모는 모대로 부지런히 심느라고 숨이 턱에 걸린다. 좀생이는 묘성으로, 얼른 보면 육련성이라 나란히 별 여섯 개가 빛나는 것 같지만, 실제는 백이십여 개 작은 별들이 모여서 성군을 이룬 것인데, 농사에 아주 중요한 점을 쳐 준다. 좀생이와 달이 나란히 가거나 혹은 조금 앞서 가면 풍년이 들고, 반대로 좀생이와 달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흉조라, 농사를 망친다 했다. 음력으로 이월 초엿새날, 사람들은 별이 띠기를 기다려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 보며, 그 좀생이별들이 부디 풍년을 점쳐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좀생이가 보여 주는 풍흉의 예언은 한 번도 틀려 본 일이 없노라고 노인들은 말하곤 하였다.
"아, 그렇게 그거이 언제쩍 이얘기여? 기양 달이나 별이나 모도 한발씩이나 떨어져서 여그저그 사방에 흩어져 갖꼬 어디가 백혜 있능가 잘 찾어지도 않드라고, 아이고 어쩌끄나, 속으로 걱정은 되지만 설마 별이 그런다고 참말로 흉년이 들라디야, 그랬드니마는 머엇을, 그해 가실에는 애들 멕일 거도 못 거두고 말어 부렀제이."
그런데, 동국세시기에는
"이날 초저녁에, 좀생이 별 셋이 달 앞에서 고삐를 끄는 형상을 이루며 그 거리가 설 멀면 풍년이 든다."
하였고, 또 하통죽지에서는, 좀생이를 낭위성으로 간주하여 적었으니,
"이 별들이 달 뒤 열 자 거리쯤을 따르면 풍년이 들며, 달보다 열 자쯤 앞서면 흉년이 든다."
하였다. 그런가 하면 열양세시기의 이월묘숙점세조의 기록에는
"농가에서는 초저녁에 좀생이를 보아 별이 달과 떨어지는 원근으로 그 해의 풍흉을 점치나니, 이들이 나란히 가거나, 또 한 자 안에 있으면 좋다고 하고, 만일 앞서거나 뒤섬이 많이 떨어지면 그해는 장차 흉년이 들어, 어린아이들도 먹을 것을 못 보리라 하는데, 짐험하건대 아주 잘 맞느니라."
한 것을 보면 서로 말이 다른 부분도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천지의 조화와 일월성신의 움직임에 인간사 길흉과 운수를 걸어 보고 싶은 심정은 다름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청암부인은 늘 그렇게 말했다.
"인력이 지극하면, 천재를 면하나니... . "
오늘, 이 들일은 청암부인의 논에서 하고 있는 중이다. 문중에 다흔 논에도 물론 모내기를 해야 하지만, 청암부인댁의 일에 비할 수가 없었다. 이 댁 농사는 그만큼 엄청났다. 우선 매안 근처뿐만이 아니라, 보절, 산동, 삼계, 임실, 동계, 덕과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주생, 금지, 곡성 일대, 그리고 경상북도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동면, 산내에까지도 사음을 두었다. 그러나 청암부인으로서는 항상, 이 매안의 지세가 서운하였다. 토질이 척박하고 평야가 없었으며 물이 모자라는 점, 그리고 들이 더 넘쳐갈 수 없도록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산이 흙덩어리와 잔솔밭 이외에 크게 쓸모가 없는 것들이 마음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의 위세와 기상으로는, 산이라도 허물어서 옥토를 만들고 싶었으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때때로, 무너져 가는 고가의 지붕과 묵은 흙냄새를 풍기며 푸슬푸슬 먼지를 날리던 행랑채, 덩그너니 집채만 남았을 뿐, 거기 사람의 훈김 없던 열아홉의 시절을 회상하면, 이만한 정도라도 위안이 되기는 되었다. 청암부인이 '이만한 정도'하고 하는 것은, 삼천 수백 석을 이름이었다. 소문에는 그네가 오천 석을 한다고 하였지만, 아주 대풍이 든 해라 거의 사천 석을 바라볼 때도 있었으나, 그것은 드문 일이고, 대체로 평년작이면 그쯤되었다. 그네는, 머슴이 발로 힘없이 한 번 찼을 뿐인데도 그냥 주저앉아 버리던 행랑의 벽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더욱이 형식뿐인 외양간이랴. 기구하게도 흰 덩을 타고, 처음 이 대종가의 문턱에 들어설 때 코에 훅 끼쳐 온 것은 곰팡이가 끼인 흙냄새였다. 그리고 그네를 집안에서 맞이해 준 사람은, 마님이라고도 불리지 못하던 한 과수댁이었다. 그 여인은 허물어지고 있던 검은 고가의 대청마루에서 그림자처럼 내려와, 어린 청상 청암부인의 손을 부여잡았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손등을 어루만지며 쓰다듬기만 하는 그 과수댁으 소복이, 청암부인의 흰 댕기와 더불어 이가 시리게 푸른 빛을 뿜어냈었다. 그때의 그네로서는, 이씨 가문의 선대에서 무슨 이유로, 다른 곳의 산수를 다 두고 이곳에 자리를 하였는지 알 까닭이 없었다. 다만, 낙향하여 토반이 된 문중의 대종가로 십오륙 대를 면면히 이어내려온 몇 백 년의 세월이 마을에 가라앉아 고여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학문은 높았으나 벼슬에 탐욕하지 않았던 은사의 가르침이 그 세월 속에 땀내처럼 절어 있는 것도 느껴졌다. 선비의 집에서 올바른 가풍에 젖어 단아하게 성장한 청암부인으로서 가군의 문중에 대하여 그런 고지식함과 일종의 남루를 느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었을까. 단순히, '묵신행'을 온 자기를 신부로 맞이해 줄 신랑이 이미 타계하고 없는 빈집으로 자기가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일까. 더욱이 여러 부인을 기구하게 잃고 빈 등걸이 다 되어 버린 시아버지 홀로 퇴락한 사랑에 그늘처럼 음울하게 누워 있는, 그야말로 텅 비어버린 듯한 집채를 향하여 열아홉의 나이로 신행을 하는 걸음이었으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으리라. 그네의 시부는 처덕이 박복한 사람이었다. 본인 자신 영민하여 일찍이 시재에 능하였고, 성품도 활달했던 그는 부모가 물려준 재사와 스스로 닦은 학덕으로 가히 일가의 종손다운 풍모를 지키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칠팔백 석 추수는 실히 되는 농토를 위토와 함께 남겨 주었다.
그러나 그의 운이 그뿐이었던가. 초취의 여인 반남박씨는 슬하에 아무 소생도 남기지 못한 채 어이없게도 스물세 살에 세상을 떠났다. 그네는 행실이 음전하고 심덕이 깊은 사람이었으나, 몸에 찬 기운이 있어 늘 수족이 저리는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여름이면 맨발로도 땀이 나는데, 겹버선을 신고도 발이 시리다고 하였다. 박씨의 나이 열여섯에 혼인하였으니 스물세 살 까지, 만 육년이 넘게 산 셈이었다. 소생이 있으려면 얼마든지 있을 법도 한 나이였지만, 늘 추운 듯한 얼굴로 방안에만 있다가 먼저 가고 만 것이다. 그네가 이승을 떠날 때, 시부의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혈기 방장하고 포부가 남다를 때였다.
"사람이 음양으로 한번 만나 작배하였으면 백년을 해로하고 갈라져도 길다고는 못할 세월이건만, 그 양반의 운수가 사납고 내외 이생에서의 인연이 그것뿐이셨던 모양이오. 만나는 배필마다 그리 못 만날 사람 같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전생에 지어 놓은 연분이 그렇게밖에 없으셨는가."
과수댁은 더듬더듬 말했었다. 문중에서는, 박씨부인의 탈상이 있고는 바로 재취를 맞이할 절차로 분주했다고 한다. 종부 없는 종가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청암부인의 시부는 쉽게 재취를 하지 않았다. 무엇인가 한 풀 꺾인 듯한, 힘 없는 모습으로 서안 앞에 앉아 있거나, 기껏 멀리 출입한다고 해도 그저 삼계석문 옆 정자 구로정 정도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는 누구와 별로 말도 나누는 것 같지 않았고, 말을 나눈다 하여도 의례적인 몇 마디가 고작이었다. 그런 날이 하루 가고 이틀 가며 어느 결에 한 삭 두 삭 지나고, 어언 해가 바뀌었으나, 그의 침중함은 더욱 깊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빛이 가시어 안색이 창백한 얼굴과 육덕이 깎인 그의 어깨는 점점 각이 지기 시작하였다. 헌출한 몸에 혈색 또한 남다르게 밝아서 풍신이 좋던 그가, 일생 바짝 마른 몸으로 지내게 된 것은 그때부터라고 보아야 했다. 애석하게도 일찍이 별세한 선친을 대신하여 숙항들이 서둘러 그의 재취가 진행되고 있을 때, 그는 자기 종항 중의 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고 한다.
"발이 찬 사람이었네. 손도 찼지. 그래도 내 맘에는 발이 더 찼던 것같구만, 아마, 손은 아무래도 좀 움직이고 발은 가만히 두어서 그랬던가... . 속에 있는 말이라고 입 밖에 잘 내는 사람도 아닌데, 발이 시리다고는 몇 번 하데, 나는 몸이 다순 사람이라, 손으로 두 발을 감싸서 한참을 녹여 주면, 부끄러워 말은 못허고 얼굴만 숙이고는, 그만허시지요, 인제 다수어요, 그것이 전부라... . 한번은 그런 일도 있었지. 잠결에 깨서 돌아보니 이 사람이 저쪽 끄트머리 자리에 등을 돌리고 누웠어. 잔뜩 오그리고 돌아누워 있길래, 어디가 불편한가 걱정이 돼서 깨웠지 않았겠나. 그 사람이 그때 허는 말이, 날도 차운데, 행여라도 잠결에 자개 손발이 나한테 닿을까봐 그랬다는 게야. 허, 참. 그 사람이 가고 나서는, 이따금씩 그때 생각이나. 무심한 사람. 얼은 소날로 얼마나 먼길을 그렇게 웅크리며 가고 있는고... . 나한테 찬 기운 안 끼칠라고 그렇게 서둘러 갔는가."
그러면서 한숨 끝에
"이렇게 앉었다가도 문득, 손 안에 잡히던 발이 서늘하게 전해져 오네. 그럼 그냥 전신이 식어드는 것 가어서."
하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재취의 여인을 맞아들였다. 청주한문의 따님이었다. 별다른 특징이 있는 모색도 아니고 사라의 성품 또한 무던하였다. 비록 가문 있는 집안의 종손이라고 하나 재취의 자리임이 꺼려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을텐데, 그런 내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선대에 물려받은 농토가 어느결에 삼사백 석이 줄어들어 조금씩 알게 모르게 살림에 표가 나고 있었는데도, 그다지 큰 근심을 하지 않았다. 초취의 박씨와 사별한 후, 특별히 무슨 실책을 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푼돈처럼 농토가 새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년 사이에 몇 백 석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문중에서는, 시부의 실심 때문에 그러한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웬만하면 자식도 하나 낳지 못하고 가 버린 여인에게 그다지도 마음을 기울여 실심을 하겠느냐고 했다가도, 사람의 정이란 다 각각 양색이 다른 것이니 그 속을 누가 알겠느냐고, 모이기만 하면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수군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한씨부인은 그런 일들에 거의 괘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담담한 기색으로 안방에서 대청으로, 대청에서 장독대로 오가면서 집안일을 살피었다. 천성이 그러한가. 무슨 일에든지 속을 끊이는 법이 없었다. 시부가 몇 날 며칠을 사랑채에서 지내며 밤낮으로 서책에만 골몰하여도, 그저 범연한 일로 여기었다. 보름을 그리하여도, 그런대로 한 달이 지나가도 낯색이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심정을 다스리려 애쓰는 기색이 드러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네는 건강도 좋은 편이어서, 까다로움 없이 수북수북 밥그릇을 비우고, 한가로운 시간이면 침선도 멀리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무던한 그네의 성품 때문이었던지, 한씨가 재취로 들어온 지 구 년이 막 넘어설 무렵에는, 슬하에 두 아들을 두게 되었다. 장남 준의와 차남 병의였다. 연전에 한씨부인이 장남 준의를 낳았을 때, 문중에서는 물론이지만, 시부 자신이 크게 기뻐했었다. 그는 정말로 얼마 만에 파안대소하였다. 그의 나이도 어느덧 서른을 넘기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대종가의 종손이 튼실하게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찬 시부가 부인 한씨를 눈에 띄게 아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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