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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07호
2020.7.2. (음 5.12)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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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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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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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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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한 사람이 백명의 학교 스승보다 낫다. ―조지 허버트(英 시인,1593~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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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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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발
지상파와 케이블 방송의 웬만한 정보·오락 프로그램에서 빠지지 않는 게 있다. 음식을 먹거나 요리하는 법을 보여주는 방송, 이른바 ‘먹방’이다. 기본 시청률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먹는 정보에 대한 관심은 방송의 것만이 아님을 확인했다. 이 자리에서 오징어의 이모저모를 다룬 뒤 참으로 많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학계와 수산업계, 국어사전 등이 제각각으로 다루고 있는 오징어 종류의 표준 명칭을 하루빨리 정비해야 한다’, ‘제주도의 반건조 오징어를 준치라고 하는데, 한치와 관계있는 것인가’처럼 명칭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오징어 다리’와 ‘문어발’의 차이를 묻는 이도 있었다.
별생각 없이 말하고 무심히 듣던 연체동물의 다리(발)를 곰곰이 짚어 보았다. 오징어에는 ‘다리’, 문어에는 ‘발’이 붙는 게 자연스러웠다. ‘세(細)발 낙지’는 발이 가늘어서 나온 이름이다. ‘오징어+발’, ‘문어+다리’라 하면 안 되는 걸까. “오징어는 걷지 않고 물에 떠 헤엄친다. 문어는 발을 움직여 바닥을 기어 다닌다. ‘-다리’와 ‘-발’의 차이는 여기서 비롯한다”는 그럴듯한 주장도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오징어 다리’(58만9천개), ‘오징어 발’(62만8천개)의 차이는 크지 않았지만 ‘문어발’(44만5천개), ‘문어 다리’(25만9천개)는 그렇지 않았다.(구글 검색) 마땅한 답은 없을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쓸 만한 게 나왔다.
사전은 ‘발’의 1번 뜻으로 ‘사람이나 동물의 다리 맨 끝 부분’, ‘다리’의 3번 뜻으로 ‘오징어나 문어 따위의 동물 머리에 여러 개 달려 있어, 헤엄을 치거나 먹이를 잡거나 촉각을 가지는 기관’을 제시한다. 뜻풀이에 기대어 정리하면 ‘오징어/문어/주꾸미/꼴뚜기…’에는 ‘다리’가 어울린다. 그렇다면 ‘문어발’은 무엇인가. 뜻풀이 ‘문어의 발처럼 여러 갈래로 나눔’은 ‘문어의 다리’를 적시해 설명하지 않는다.(표준국어대사전) ‘문어발’은 ‘문어발 확장’, ‘문어발 인맥’, ‘문어발배당’에서 보듯 비유적인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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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크스
프로야구가 개막했다. 첫 주 전적을 두고 각 팀의 희비가 엇갈린다. 겨울철 혹독한 담금질로 기대를 모은 팀, 최강 전력을 자랑하는 우승 후보, 뚜껑 열린 신생 구단의 실전 기록 분석은 경기장 밖의 또 다른 재미를 자아낸다.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제 기량을 다하기 위해 나름의 징크스를 피한다는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 팬들의 관심을 끌어모은다.
메이저리그에는 오랜 역사에서 비롯한 유명한 징크스가 있다. 1945년 이후 이어져 오는 ‘염소의 저주’(시카고 컵스), 2004년 86년 만에 우승하면서 비로소 깨진 ‘밤비노의 저주’(보스턴 레드삭스)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우승하면 경기가 나빠진다’처럼 특정 팀의 성적과 경제를 연관 짓기도 한다. ‘2년차 징크스’(소포모어 징크스, sophomore jinx)는 나라와 분야를 떠나 두루 쓰인다.
징크스(jinx)는 재수없는 것, 불길한 것, 불운을 가리키는 영어에서 왔다. ‘목을 뱀처럼 180도 비트는 고대 그리스의 흉조(jynx) 이름에서’, ‘나팔소리 때문에 모자를 떨어뜨린 기병대장 징크스를 노래한 가사에서’ 유래했다는 게 알려진 어원이다. 유력한 설은 뒤의 것이다. 히트한 노래 덕에 유명해진 ‘징크스’가 댄스곡, 드라마, 소설 제목에 쓰이면서 널리 알려졌고 미국 표준영어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영어위키)
지난주 한 방송 프로그램의 출연자가 “낡은 티셔츠를 입어야 잠이 온다”고 하니까 진행자가 “아, 징크스!”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어원과 일반적인 쓰임에 따르면 적절한 맞장구가 아니다. 국어사전 뜻풀이는 ‘재수 없는 일. 또는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이고 국립국어원은 이 표현을 ‘액(厄)’, ‘불길한/재수없는 일’로 다듬어 쓰기를 권한다. ‘경고 조치를 받은 사람이 당선된다는 속설에 비춰보면 경고 처분은 징크스보다 오히려 길조에 가깝다.’ 의사협회장 선거를 전망한 업계 전문지의 기사는 징크스의 뜻을 제대로 밝혀 쓴 셈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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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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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그대 쪽으로 - 기형도
어둠에 가려 나는 더 이상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단 하나의 영혼(靈魂)을 준비하고 발소리를 죽이며 나는
그대 창문(窓門)으로 다가간다.
가축들의 순한 눈빛이 만들어내는 희미한 길 위에는
가지를 막 떠나는 긴장한 이파리들이 공중 빈 곳을 찾고 있다.
외롭다. 그대, 내 낮은 기침소리가 그대 단편(短篇)의 잠속에서
끼어들 때면 창틀에 조그만 램프를 켜다오.
내 그리움의 거리는 너무 멀고 심묵(沈默)은 언제나 이리저리
나를 끌고 다닌다. 그대는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 한다.
불빛은 너무 약해 벌판을 잡을 수 없고, 갸우뚱 고개 젓는
그대 한숨 속으로 언제든 나는 들어가고 싶었다.
아아, 그대는 곧 입김을 불어 한 잎의 불을 끄리라.
나는 소리없이 가장 작은 나뭇가지를 꺾는다.
그 나뭇가지 뒤에 몸을 숨기고 나는 내가 끝끝내 갈 수 없는
생(生)의 벽지(僻地)를 조용히 바라본다.
그대, 저 고단한 등피(燈皮)를 다 닦아내는 부명(簿明)의 시간,
흐려지는 어둠 속에서 몇 개의 움직임이 그치고 지친 바람이
짧은 휴식을 끝마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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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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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맞은 8.15 (3/3)
실패된 해방의 의미
8.15는 실패람 실패입니다. 일제 밑에 종살이하던 민중은 해방의 이름은 얻었으나 실지는 없었습니다.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지 자유는 여전히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이면서도 얻은 것이 있습니다. 첫째,씨알의 불사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일제 말년에 그 정치가 강용하는 대로 모든 것을 내놓는 것을 보고 우리는 거의 죽은 줄로 알았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내놓고 글을 내놓고 모든 고유한 풍속을 내놓고 심지어 제 성까지도 내 놨습니다. 그러나 해방이 한번 올 때 그들은 마치 흐린 물결 속에서 올라오는 바위처럼 그 본래의 모습을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마치 일제 36년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 그들 스스로 제 속에 죽지 않는 생명이 있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은 큰 소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비관하고 낙망하지 않을 수가 있게 됐습니다. 혹은 말하기를 수십 년 서로 다른 체제 밑에 있어 온 것을 어떻게 하느냐 걱정하지만 나는 결코 그것 두려워할 것 없다고 합니다.
민중은 마치 물 같은 것입니다. 지극히 유약해서 칼로 자르면 아무 저항 못하고 잘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칼을 뽑는 순간 곧 다시 하나가 됩니다. 몇천 백 년을 있어도 그 본성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이번 해방으로 증명이 됐습니다. 오늘의 민중은 벌써 옛 날의 민중이 아닙니다. 민중은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강합니다. 제도나 이데올로기는 민중을 선하게 못하는 대신 근본적으로 타락도 시키지 못합니다. 바위에 부서지는 빗방울이 도리어 바위를 부수듯 이 칼에 맥없이 찍히는 민중이 도리어 그 칼을 삼켜 녹여버리고 맙니다. 정치는 힘에 살지만 민중은 믿음에 삽니다. 믿음은 모든 상처를 씻어 낫게 합니다. 정치는 재생하는 법이 없지만 씨알은 부활합니다. 우리는 8.15의 깨진 꿈 속에서 도리어 씨알의 새로 날 모습을 그려낼 수 있습니다.
8.15해방의 실패로 인해 얻은 둘째 소득은 국가주의의 멸망의 선언입니다. 우리 남북 분열의 조악의 책임은 루스벨트에 있는 것도, 처칠에 있는 것도, 스탈린이나 장개석이나 그 밖에 누구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국가주의에 있습니다. 국가주의가 있는 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주의나 공산주의나 그 체제, 이데올로기에는 차이가 있어도 개인을 그 노예로 삼는 국가주의인 데서는 다름이 없습니다.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대적을 불러일으키고야 맙니다. 그러므로 국가주의가 있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38선의 비극은 멸망해가는 국가주의의 고민입니다. 아직 그 죄악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확인하게 된 것은 큰 수확입니다. 이 의미에서 우리는 불행 중에 있으면서도 큰 역사적 사명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셋째는 전체주의 시대의 동틈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 해방의 실패는 곧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실패입니다.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두 진영이 결국 그것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취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낡아빠진 개인적 영웅주에 잡혀 있기 때문 입니다.
이제 인류는 이미 개인적 성장의 시대를 지나 전체의 시대에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역사는 이미 개인 완성의 역사가 아니고 전체적 하나됨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모든 강국들이 치명적인 큰 문제가 있는 줄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해결은 모든 중간적인 집단인 국가주의의 입장을 버리고 전 인류를 하나의 생명체로 아는 전체주의의 자리에 서서만 가능합니다. 국가주의는 개인의 완성을 재촉하는 채찍이라는 데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시기는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 전체주의는 히틀러 무솔리니 식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전체주의였습니다. 모든 가짜는 참 것의 예고입니다. 그들은 새 시대를 막연하게 느끼면서도 구식적인 사고방식을 면치 못해 폭력으로 그것을 이루어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전체는 폭력으로는 올 수 없었습니다. 개인이 완전히 자라 그 자유를 충분히 발휘하는 가운데 자진해서 하는 사람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모든 나라, 특히 신흥국가라는 나라에서 독재주의가 유행되고 있지만 그것은 히틀러 무솔리니의 바퀴 자리를 다시 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실패의 원인을 여기까지 파 내려가지 않고는 앞에 희망의 빛을 볼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에 내가 감옥에 드나드는 것을 보고 민중은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해방이 되자 언제부터 친했던 것같이 가까이 오더니, 공산당이 나오는 것을 보고는 다시 멀찍이 섰고, 소련군 감옥에 가는 것을 보고는 “저 사람은 감옥 가는 것이 일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들을 믿고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 이상 더 개인적 영웅주의에 서서비판하는 눈으로 민중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으로 민중 속에 들어가지는 못합니다. 민중을 믿지 않고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신을 믿지 않고는 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병아리가 제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알이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입니다. 깨기 전엔 씨알입니다. 깨면 전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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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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遼東之豕(요동지시)
遼(멀 요) 東(동녘 동) 之(-의 지) 豕(돼지 시)
후한서(後漢書) 주부(朱浮)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 주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전쟁에 참가하여 약간의 무공을 세워운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므로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공로를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여 항상 자랑하고 다녔다. 천하가 태평해지자, 주부처럼 평범한 군인들은 별 볼일이 없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요동에 갔다가, 검은 돼지가 머리털이 흰 새끼를 낳은 것을 보고 매우 희귀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머리털이 흰 돼지 새끼를 황제에게 바쳐 환심을 사고자 하동(河東)으로 갔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서 보니 검은 돼지 뿐만 아니라 머리털이 흰 돼지는 말 할 것도 없고, 몸 전체가 흰 돼지도 엄청나게 많았다. 주부는 끌고 갔던 돼지 새끼를 바라보며, 자신의 행동에 크게 부끄러움을 느꼈다. 곧장 돌아온 그는 다시는 자신의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첨단 시대. 희귀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흰 돼지 따위에 감탄할 틈이 없는 때이다. 遼東之豕 는 요동의 돼지 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아 무엇이든지 희귀하게 여김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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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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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잊어야 찾아지는 행복 - 장리욱
미국 독립 선언서에는 인간이 조물주께로부터 받은, 즉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세 가지 특권이 나와 있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행복을 찾는 구체적 철학을 밝히지 않았다. 그 이후 미국의 역사는 개척, 모험, 근면, 투쟁 등의 낱말로 가득 차 있었고 행복이란 말은 좀처럼 쓰인 적이 없었다. 모든 국민은 행복에 대한 관념을 잊어버린 양 오직 주어진 일과 맡은 바 책임에 노력과 정열을 기울이며 살아왔다. 그러는 동안 어느새 행복이 따라왔던 것이다.행복을 바라는 그 염원에서 탈피된 마음 자세를 갖고 오직 매일 매일 내가 해야 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노라면 뜻밖에 찾아지는 것이 행복이다.
(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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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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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어린이를 위하여
5월이 되면 생각나는 선구자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가슴에 사랑의 선물을 듬뿍 안겨 준 인자한 동화 속의 아저씨 같은 사람입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요, 희망이며 이상이다"라고 주장하던 소파 선생은 1899 년 서울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던 가난한 집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도 명랑하고 의욕적이었던 그는 서울 미동초등학교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가 가장 바람직한 독립운동을 위해선 어린이 육성운동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생을 어린이를 위하여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소년 운동에 뛰어듭니다.
천도교 신자가 된 그는 '어린이는 하늘과 같다'고 믿고 장인인 손병희 선생과 당시 천도교 비밀신문인 '조선 독립신문'이 위기에 처하자 보성전문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비밀리 신문을 만들어 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형사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끌려온 급사 아이가 맞는 것을 보고 '저 아이 대신 나를 때려라'고 외쳤습니다. 또 동화연구가로도 유명했던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에 '쫓겨가신 선생님'이란 소설을 발표, 일본 총독부 검열관에 걸려 옥살이를 했습니다. 옥살이 동안에도 옛날 이야기를 어떻게나 구수하게 했는지 간수들은 그가 풀려 나가는 것을 섭섭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천도교 대강당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동화 대회를 열었는데 오줌은 마렵고 이야기는 재미있고 해서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누는 아이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손깍지를 낄 수 없을 만큼 배가 나온 그가 단 위에 올라가 말라깽이 흉내를 내면, 마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동작과 화술이 놀라워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1921 년 동경에서 세계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번역 출판하기도 한 그는 1923 년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라고도 할 만한 '어린이날의 약속'이란 글을 발표한 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우자고 호소했습니다. 소설과 연극운동도 함께 펼친 소년 같은 아저씨 소파 방정환은 눈물어린 동요와 동시 수백 편을 남기고 민족의 광복을 맞기 전, 30 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와서 우주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또한 떠나간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와서 떠나가는 것인가? 이 귀에 알아듣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르바이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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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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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2. 거꾸로 경영
백프로 믿고 맡겨라 - 신뢰 경영
두 가지 시험
고광일네들과 어렵사리 인연을 맺고 우여곡절 끝에 '미래연구소'를 분당에 열었을 때, 나는 그들이 진행해왔던 'SMD마운터'는 미래산업의 중장기적 계획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미래산업은 핸들러를 주력으로 하는 반도체 제조장비업체이고, SMD마운터라면 저자제품 조립장비 분야이니 기술연관성이야 있을지라도 어떻게 보면 방향이 전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누구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내 제안을 극구 사양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입장이다 보니 뭔가 회사측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일거리를 찾고 싶었을 게다. 그들은 핸들러 성능개선부터 시작하자고 덤볐다.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서글픈 제안이기도 했다. 나는 간곡하게 그들을 설득했다.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었다. 그들이 전에 일하던 직장에서는 SMD마운터의 개발이 예상보다 늦어지자 일본의 유명한 컨설팅 회사에 검토를 의뢰했다고 한다. '매우 유망하지만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받고서 그들은 결국 프로젝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유망'에 대한 기대보다는 '필요'에 대한 부담이 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유망'에 배팅 했다. 만약 SMD마운터 개발이 성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SMD마운터가 국산화된다면 기업으로서도 또한 국가적으로도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 될 것임은 틀림이 없다. SMD마운터는 저자제품을 생산하는 거의 모든 공장에서 저자부품 조립공장을 비출 때 항상 보이는 조립기계가 바로 SMD마운터다. 그렇게 흔히 쓰이는 장비이면서도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패로 끝난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새로 깨닫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장기적이고 지속적이 투자'를 견디는 데에는 아주 이골이 난 사람이다. 아니, 그것 말고는 다른 아무런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해하는 벤처마인드란 그런 것이다.
전혀 다른 각도에서 진행되었던 연구도, 심지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난 연구조차도 많은 것을 남겨주고 간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래산업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가 바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는 한때 나로 하여금 자살까지 결심하게 만들었던 어떤 실패로부터 얻어진 선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어처구니없는 실패가 바로 성공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너희가 지금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라. 그냥 생각만 해볼 것이 아니라 직접 해보라. 다행히 회사에는 돈이 있다. 이 돈은 너희들이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마음껏 낭비해도 되는 유흥비라고 생각하라. 놀 때 돈 아끼는 놈은 한심함 놈이다. 기술개발에 있어서만은 절대로 경제개념을 갖지 않길 바란다. 금방 느끼게 되겠지만 지금 너희들이 낭비한 유흥비가 곧 엄청난 흑자로 되돌아올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그들은 비로소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곧이곧대로는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연구소를 오픈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나를 처음으로 시험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스스로가 시험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최고의 워크스테이션으로 빠르고 편리하게 작업하기를 원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컴퓨터는 엔지니어들의 손발 노릇을 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자 친구이다. 그들이 최고성능의 컴퓨터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언제나 돈이 문제였다. 그들이 원하는 워크스테이션은 당시 최고사양과 최고성능을 자랑하는 고급모델이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고성능의 네트워킹 시스템도 갖추었다. 수억 원이라는 비용이 들었지만 대신에 그들의 사기와 능률을 얻었다.
내 태도에 용기를 얻었던지 그들은 또 한 차례 나를 시험했다. 무려 30억을 호가하는 미국의 최신형 설계 소프트웨어를 요구한 것이다. 고광일 상무의 설명을 들으니 대단한 프로그램인 줄은 알겠지만, 소프트웨어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계장비라면 모르겠지만 도대체 무슨 소프트웨어이길래 그토록 비싼 것일까. 아무리 탄탄하기로 소문난 기업이라 할지라도 미래산업은 여전히 중소기업이다. 누가 듣더라고 그것은 너무나 엄청난 이야기였다. 30억이라면 웬만한 중소기업의 1년 총매출액일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고민이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의 능력과 그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구입절차를 밟도록 지시했지만 엉뚱한 곳에서 트러블이 생겼다. 소프트웨어 판매업체 쪽에서 파견 나온 담당자가 문제였다. 사장과 직접 계약하겠다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거액이 오고 가는 중요한 거래에 일개 팀장과 최종계약을 한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미심쩍고 불안했던 모양이다. 연락을 받자마자 나는 분당으로 곧바로 차를 몰았다. 계약담당자가 원하는 것은 내가 직접 서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계약서에 직접 서명하는 대신에 '이 계약에 관한 한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모든 것은 팀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솔직한 말이었다. 내가 무엇을 안다고 왈가왈부하겠는가. 사실 나는 서투르게나마 영어를 할 줄 안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일부러 고 상무에게 통역을 시켰다. 모택동이 그랬다던가. 그는 통역을 시키는 동안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고 상무에게 힘을 실어줄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고, 그 자리에서 내가 멀리 떨어져 있음을 그 사람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계약은 무사히 끝났다. 한국으로의 첫 진출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해주어서 좋은 할인율을 적용 받을 수 있었다. IMF직전의 일이라 환율도 적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당자가 돌아가자 고상무는 연신 싱글벙글 이었다. 통쾌했던 모양이다.
"세계의 많은 기업을 다녀봤지만 이렇게 손쉽고 간단한 계약은 처음이랍니다. 그러면서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연구비의 바운더리가 도대체 얼마냐'고 묻는 겁니다. '그런 것 없다'고 했죠.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사실 이 소프트웨어는 전에 있던 호사에서도 몇 번이나 구입을 요청했던 겁니다 정말 대단한 프로그램이거든요. 업무효율이 높아지고 어쩌고 아무리 설득을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왜 , 있잖습니까, 내내 검토만 하다가 흐지부지되는 거요."
실패로 끝났다 하더라도 상관은 없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이라면, 그것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새로 깨닫고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기술개발에 있어서만 은 절대로 경제개념을 갖지 않길 바란다. 금방 느끼게 되겠지만 지금 너희들이 낭비한 유흥비가 곧 엄청난 흑자로 되돌아올 것이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고성능의 네트워킹 시스템도 갖추었다. 수억 원이라는 비용이 들었지만 대신에 그들의 사기와 능률을 얻었다. 나는 계약서에 직접 서명하는 대신에 '이 계약에 관한 한 나는 아무런 권한이 없으며 모든 것은 팀장이 알아서 할 것'이라고 말하고는 슬쩍 자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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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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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찬란한 시절
수공가위와 크레용이 든 가방을 메고 서영이가 아침 일찍이 유치원에 가는 것을 보면, 예전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생각이 난다. 나는 그때 동그란 도시락을 색실로 짠 주머니에다 넣어 가지고 다녔다. 그 도시락을 휘둘러서 동무들을 곧잘 때렸다. 하루는 유치원이 파하고 다들 집으로 가는데, 나를 데리러 오는 유모가 아니 오셔서 혼자 남아서 울고 있었다. 선생님은 나를 달래느라고 색종이를 주셨다. 그 빨간빛 파란빛 초록 연두색깔이 그렇게 화려하게 보이던 일은 그후로는 없다. 그 선생님의 얼굴이 어떻게 생기신 분인지 지금은 도무지 생각이 아니 난다. 눈물을 씻어주느라고 내 얼굴을 만져주던 그 손매만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이름도 잊고 얼굴도 기억에 없지마는 나와 제일 정답게 놀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의 양말이 조금 뚫어졌던 것이 이상하게도 생각난다. 그 아이는 지금 어디서 사는지, 아마 대학에 다니는 따님이 있는 부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사는 그는 영원한 다섯 살 난 소녀이다. 유치원 시절에는 세상이 아름답고 신기한 것으로 가득 차고, 사는 것이 참으로 기뻤다. 아깝고 찬란한 다시 못 올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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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26. 비교
<높고 낮음, 우월함 저열함이 따로 없느니, 모두가 마땅하다>
아주 당당한 무사가 선사를 찾았다. 천하에 유명한 그 무사는 선사를 본 순간, 선사의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본 순간, 돌연 열등감에 휩싸였다. 무사가 선사에게 말하기를,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소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좋았었소이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웬지 모를 열등감이 엄습하는군요. 일찍이 가져 본 적이 없는 느낌이오. 수없이 죽음을 만났지만 두려움이라곤 알지 못하였는데, 이 놀라움이 웬 것이란 말입니까?>
선사가 말하기를,
<기다리시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거든 내 말해 주겠소>
선사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하루종일 그칠 새가 없었다. 무사는 기다리다가 지쳐서 못내 안절부절하였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겨우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첬다. 무사가 얼른 물었다.
<자, 이제 말씀해 주시겠소이까?>
선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밖으로 나갑시다>
마침 보름날이었다. 산등성이 위로 둥근 보름달 이 막 떠오르고 있었다. 선사가 말했다.
<이 나무들 좀 보시게. 한 나무는 하늘로 쭉 뻗어 올랐고, 다른 한 나무는 키가 아주 작지. 이 나무들은 수십 년을 내 창문 옆에서 살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없었소. 키 작은 나무가 키 큰 나무한테, 난 왜 그대 앞에 서면 열등감을 느끼지? 하고 입도 벙긋한 적이 없소. 자, 이 나무는 작고 이 나무는 크지. 난 이 나무들한테서 아무런 소리도 못 들었소. 왜 그런가?>
무사가 답하기를,
<이것들은 비교할 줄 모르지 않소이까>
선사가 말하기를,
<오호, 내게 물을 것도 없겠네 그려. 해답을 알고 있으니>
비교하지 않으면 우월하고 저열한 모든 게 사라진다. 그럴 때 그대는 단지 있을 뿐. 조그만 풀 뿌리든 키 큰 나무든 그저 있을 뿐. 풀잎 하나도 큰 별처럼 절대로 있는 것. 뻐꾸기 울음소리도 붓다의 말씀처럼 절대로 있는 것. 그대, 세상 만물을 보라. 모든 게 절대로 있고, 모두가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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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동서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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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사마천 사기 1 - 엄광용 엮음
(세상과 나를 바꾸는 지혜 명인 40인의 성공처세학)
진정한 우정, 관포지교 - 포숙아
- 관중은 가난하였으며, 자주 포숙아를 속였다. 포숙아는 자신이 속임수에 넘어가는 줄 알면서도 관중을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속이는 일을 가지고 탓하지 않았다. -
제나라 환공이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것은, 그를 보좌하는 재상 관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중이 제나라 재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을 알아준 친구 포숙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관중은 어린 시절부터 포숙아와 친하게 지냈다. 어린 시절 관중은 가난하였으며, 자주 포숙아를 속였다. 포숙아는 자신이 속임수에 넘어가는 줄 알면서도 관중을 잘 대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코 속이는 일을 가지고 탓하지 않았다.
제나라 양공이 술과 미녀에 빠져 방탕 생활을 할 때, 그의 동생 규와 소백은 화가 자신들에게 미칠 것이 두려워 각기 노나라와 거나라로 도망쳤다. 이때 관중은 규를 따라갔고, 포숙아는 소백을 따라갔다. 양공이 죽고 나서 공자 규와 소백 사이에서는 정권쟁탈전이 벌어졌다. 규는 관중으로 하여금, 소백이 먼저 제나라 왕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길목을 지켜 그를 죽이라고 하였다. 관중은 소백이 군사를 이끌고 제나라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화살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렸다. 관중은 공자 규에게 보고하기를, 소백을 죽였으니 이제 안심하고 천천히 제나라로 들어와도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공자 소백은 관중의 군사가 쏜 화살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다. 화살이 허리 장식대를 맞아 용케도 살아난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저들이 알지 못하게 하라."
소백은 죽은 척 한 채 자신의 군사들에게 말하였다. 군사들은 곧 소백이 죽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시체를 싣는 온량거에 공자를 태운 다음, 급히 군사를 몰아 제나라에 입성하였다. 소백은 이렇게 하여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환공이다. 환공은 곧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에서 입국하려는 공자 규의 군사를 차단하였다. 그리고 노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다음과 같은 말을 전달하였다.
"공자 규는 과인과 형제이므로 차마 죽일 수 없으니, 노나라에서 알아서 죽여라. 그리고 관중은 나를 죽이려고 한 원수이므로 압송케 하여 마음껏 욕보인 후 젓을 담가 죽일 수 있도록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장차 군사를 일으켜 노나라를 포위할 것이다."
노나라에서는 환공의 이같은 엄포에 기가 죽어 공자 규를 죽이고, 관중을 포박하여 제나라로 압송하였다. 그때 공자 시절부터 환공을 모시던 포숙아가 선뜻 나서서 말하였다.
"대왕께서 장차 제나라만 통치하신다면 고계와 저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장차 천하의 패왕이 되고자 하신다면 관중이 옆에 있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한때의 원한으로 아까운 인재를 잃는 일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환공은 포숙아의 말을 따랐다. 포숙아는 친구인 관중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를 추천하여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관중은 죽마고우인 포숙아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가난하였을 때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한 일이 있었다. 이득을 분배할 때 나는 포숙아보다 많이 가져갔다. 그러나 포숙아는 그것을 눈치채고도 나를 탐욕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포숙아를 위하여 어떤 일을 도모한 적이 있었는데, 더욱 곤궁해지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그때도 포숙아는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시운에 따라 이로울 때도 있고 불리할 때도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벼슬을 하였다가 세 번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포숙아는 내가 부정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때를 못 만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찍이 세 번 싸워 세 번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 봉양할 노모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공자 규가 패했을 때 친구인 소홀은 노나라에서 죽었으나, 나는 죽지도 못하고 제나라로 끌려왔다. 그러나 포숙아는 나를 부끄러움이 없는 사나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의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워 떨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사실을 포숙아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낳은 이는 부모이고,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을 일컬어 "관포지교"라 하여 칭찬해 마지않았다.
우정 : 진정한 친구 셋만 있다면 당신은 인생에 성공했다. 위기와 시련에 처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든든한 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는 참된 친구가 어떤 권력이나 부를 얻는 것보다 값진 것임을 깨우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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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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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어지도 - Pedro Reinel의 항해 도표(1504)]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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