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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1005호
2020.6.24. (음 5.4)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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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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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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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보다 타인을 위해 사는 경우에 보다 만족이 크다. -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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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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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색
박근혜 대통령의 의상이 눈길을 끌었다. 취임 3년차를 맞아 청와대 직원 조회에 참석했을 때의 옷차림이다. 통상 비서실장이 주관하는 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나섰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카키색 상의에 검정 바지 정장 차림의 박 대통령이…’(ㅇ뉴스), ‘취임식 때 입었던 카키색 정장과 비슷한 차림으로…’(ㅎ일보), ‘…카키색 상의를 입고 직원들 앞에 섰다’(ㅈ일보). 한 방송은 “카키가 뭡니까? 군대에서 입는 전투복이에요…”라며 “(카키색은) 대통령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복색”이라 해석하기도 했다.(ㅇ케이블 뉴스) ‘박 대통령은 이날 국방색 재킷을 입었다’(ㄷ일보)고 전한 신문도 있었다. 취임식 이후 해마다 같은 날 같은 빛깔로 차려입은 대통령의 옷은 카키색인가, 국방색인가.
카키색은 ‘누른빛에 엷은 갈색이 섞인 빛깔’이니, 그날 대통령이 입은 재킷은 ‘나뭇잎이나 풀잎과 같은 짙은 초록색’인 국방색에 가깝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인터넷 뉴스 검색 결과는 ‘대통령-카키색’ 29만4000개, ‘대통령-국방색’ 288개로 차이가 크다.(구글 뉴스) 황토색과 초록색, 확연히 다른 것인데도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은 건 ‘군복=카키’라 오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카키색은 흙먼지를 뜻하는 페르시아어 ‘카크’에서 온 말이다. ‘카키’(khaki)는 인도가 영국 식민지일 때의 군복 색깔이었다. 이후 사막과 해변에서 작전하는 군의 위장색으로 애용되었다.(위키백과) ‘카키’가 넓은 지역에 걸쳐 오랜 세월 군복의 위장색으로 사용되었기에 우리나라에선 ‘국방색’으로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이다. ‘육군의 군복 빛깔과 같은 카키색이나 어두운 녹갈색’이라 설명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흐리터분한 ‘국방색’ 풀이는 그래서 문제다. 그릇된 새김이 그렇고, ‘카키색’(탁한 황갈색. 주로 군복에 많이 쓴다), ‘카키복’(카키색의 군복. ‘카키’는 인도어로 ‘흙’을 뜻한다)의 뜻풀이와도 어그러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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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뉴스’(news)는 ‘새로운 것’(new)의 복수형이다. 한때 ‘북(N)-동(E)-서(W)-남(S) 사방에서 전해오는 기별을 한데 모은 소식’이란 그럴듯한 주장에 솔깃했던 적이 있었지만 사실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영어권이 아닌 다른 나라의 같은 뜻 표현도 ‘새로운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얻은 소득은 ‘뉴스의 어원 확인’만이 아니었다. ‘동서남북’을 서양에서는 ‘북-남-동-서’ 순으로 꼽는다는 것이다.
동가식서가숙, 동분서주, 동문서답, 동서고금처럼 방향을 짚을 땐 언제나 ‘동’(東)이 ‘서’(西)에 앞선다. 남남북녀, 남전북답(南田北畓, 논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뜻)에서 보듯 ‘남’(南)은 ‘북’(北)보다 앞선다. 우리 지도와 사전엔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동북아시아만 있을 뿐 ‘남동(남서/북동)아시아’는 없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방언 이야기>는 ‘동남 방언’, ‘서남 방언’,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제주 방언’으로 나눠 설명한다. 미국 델타항공에 합병된 ‘노스웨스트항공’(NWA)은 영어 순서(북-서)와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서북항공’으로 불렸다. 자석을 다른 말로 ‘지남철’(指南鐵)이라 하는 것도 새겨볼 만하다. 방위를 매길 때 우리는 동-서-남-북 순으로 꼽은 것이다.
말은 문화다. 문화에서 말이 비롯한다. 방위 순서에도 문화가 담겨 있다. 서양의 ‘북동아시아’(Northeast-)를 우리 언어문화에 맞춰 ‘동북아시아’라 하는 건 그래서다. 유럽 관점에서 나온 ‘극동’(the Far East), ‘근동’(the Near East)이란 명칭은 ‘동아시아’, ‘서아시아’로 바꾼 지 제법 되었다. 영국의 패권이 한창이던 19세기에 등장한 ‘중동’(the Middle East)은 이렇다 할 대체어를 찾기 어렵다. 지리적 경계를 떠나 문화·종교적 무게가 가볍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동’을 갈음할 말, 뭐가 있을까.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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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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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믿어본다는 것 - 방수진
너를 믿어본다는 것이
이렇게 멀리 와 버렸다
거리의 간판들이 죄다 쏟아지고
흩날리는 글자들이 서로의 몸을 더듬는 아침
나는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
너를 용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둔 손이
누군가의 발끝만큼 부끄러워질 때
네가 딛고 서있는 행성의 자전축도
몇 도쯤은 기울었으리라
문턱은 낮아지고 열매는
부풀었으리라
그래도 몇 문장만으로
너를 잡아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꽃잎은 지기를 포기했는지 모른다
증오는 옷깃에서 옷깃으로
쉬지 않고 번지고
우린 얼굴 빠진 초상화처럼
한없이 무기력해졌지
하루는 시들해진 화분 속에서
당신이 버리고 간
습기를 들여 마셨다
너무 단단해서 보기만 해도
깨져버릴 것 같은 것들
슬퍼도 울지 못하는 것들이
그 안에서 소리도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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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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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맞은 8.15 (1/3)
소극적 반항
나는 일제시대에는 생각이 지금과 적지 않아 달랐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나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일반적으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 되는 점입니다마는 하여간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는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은 나는 사람의 삶을 전체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마는 그 때는 아직 개인의 자리에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이 바로 되면 사회는 저절로 바로 된다, 따라서 개인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근본적이요 급선무라고 생각하던 때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3.1운동이 기대했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가고 일제의 세력이 거의 확호부동한 것으로 보이게 되자 나는 그 악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하자는 생각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고 다만 종교와 교육과 농촌 운동을 통해서 하는 소극적인 반항을 하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오산시대 10년 동안의 일입니다.
그러다가 단말마의 발악을 하면서 멸망의 길을 내리닫는 일본 군국주의 독재정치의 압박정책이 그 극도에 달하여 학생들과 가슴을 열고 마주 앉자 던 교실에서조차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게 되자, 나는 그 이상 더 견딜 수가 없어, 거기서 죽어 묻히자고 자타가 다같이 허락하고 있었던 오산을 하는 수 없이 떠나게 됐습니다. 그것은 남이 보기에는 강해서 그랬던 것 같아 혹 보였는지 모르나, 나 자신으로서 고백 한다면 강해서보다는 약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나는 본래 마음이 약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3.1운동 이후의 일도 마찬가지 약함으로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들어가기 어려운 관립학교를 만세 이후 남들이 거의 다도로 들어가 다니는 것을, 졸업을 겨우 한 해 앞두고 그만두고 만 것이 남 보기에는 굳센 뜻이 있어서 한 것같이 보였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으로서는 감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만 차마 내 양심에 어제 있는 힘 다해서 부른 만세를 오늘 다시 한번 배반하고 나왔던 그 권세 앞에 가서 잘못된 것이라 부인할 수가 없어서,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한 것뿐이었습니다.
이제 오산을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 심정에서입니다. 감히 일본제국주의에 반항을 한다기보다도 소위 가르치는 교사라는 물건이 학생들 앞에서 일본말로 일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 더구나도 정말 일본 사람이 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한다면 또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것은 피차 서로 빤히 알면서, 다만 목숨 하나가 아까워서 거짓 연극을 하는 것이 차마 인간 양심에 허락이 되지 않아서, 할 수 없어서 못한 것 뿐입니다. 그래서 오산을 떠나면서도 떠나지를 못해 두 해 동안을 거기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온통 잃어버린 심정으로 길거리를 오고 가며 언젠지 모르게 굴원의 어부사를 외고 또 외어 다 따로 외게 된 것이 이 때의 일입니다. 일본식으로 창씨를 하라는 기한의 마지막 날이 되던 날 임종이 가까운 아버지 앞에서 단 둘밖에 없는 형제끼리 마지막 의논을 하다가 저는 고치겠다는데 나는 감히 그러자는 말이 나오지 않아, 감히 죽을 각오를 했다는 것도 아니지만, “나는 아니 고치겠다” 선언을 하고 서로 딴 길을 걷기로 한 다음 얼마 아니 있다가 나는 내 권속을 데리고 평양 만경대 앞 송산리로 나갔습니다.
송산농사학원
송산리로 나간 것은 나로서는 있는 용기를 다해서 한 일이었습니다. 거기 송산고등농사학원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 한얼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신 김혁선생이 일찍이 조만식선생님늬 뜻을 받아서 세운 학교인데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을 본받아 사람을 길러보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사학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정에 의해서 그것을 경영할 수 없어서 누구나 원하는 이에게 넘겨주겠단 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를 통해 그것을 인계해 맡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오산 10년에 생활하고 책 사고 남겨 약간 저축해 두었던 전부를 톡 털어가지고 나가서 그것을 맡았습니다. 그것이 1940년 봄 3월의 일이었습니다.
20명이 채 못 치는 학생을 데리고 오전엔 책, 오후엔 땅파기로 일을 시작해 심은 참외가 누릇누릇 익어가는 8월, 갑자기 서리가 쏟아졌습니다. 설립자인 김혁 선생이 일본 동경에 가 있다가 사건이 터져 검거가 되자 그것이 학원에까지 파급된 것입니다. 하루는 갑자기 동경서 온 형사대가 달려들더니 학생을 불러가고 가택수색을 하고 내게도 호출장이 나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병이 마지막 고비에 든 때였습니다. 옥호동 약수에 가서 계셨는데, 차마 사실을 말씀드릴 수도 없고, 경찰에 아니 갈 수도 없고 쏟아지는 눈물을 목구멍으로 삼키고 묵묵히 마지막 얼굴을 들여 다만 보고 어머니에게 사실을 말씀 드린 다음 아니 떨어지는 발길을 옮겨 산을 내려와 평양으로 나가 내 발로 못 나올 줄을 알면서 대동경찰서로 기어들어 갔습니다. 그것이 그때 9월일입니다.
대동경찰서 유치장에서 한 해를 썩다가 그 이듬해 초여름에 나오니 아버지는 그 동안 세상을 떠났고 김교신, 송두용 두 친구가 와서 대신 상주 노릇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서도 돌아온 기쁨이 없었습니다. 나는 나왔지만 편지 한 장 때문에 젊은이 다섯을 잡아 2년 반씩 징역을 하게 만들었으니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숭인상업 학생으로서 서로 뜻이 맞아 장래에 생사를 같이하며 나라를 건지기 위해 일할 것을 맹서하고 비밀결사를 조직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내게 편지로 그것을 알려 몇 차례 만난 일이 있었는데 평소 주의해서 그런 편지는 태워버리노라고 한 내가 어떻게 주의를 못해 그랬던지 그 편지가 휴지통에 들어 있다가 오산서 평양까지 나가서 경찰의 가택수색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초에 여섯 동지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은 일찍부터 떨어져 나갔고 다섯이 그 고통을 겪었는데 한 사람은 지금 서울 있고 또 한 사람은 미주로 건너가 있고 그 나머지 사람은 이북에서 어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되려다 못된 농사꾼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내가 호주가 됐는데 남은 것은 빚뿐이었습니다. 땅이 2만 평 정도 있었는데 상속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생각을 하다가, 이상으로 하면 상속 아니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반드시 아깝다는 생각에서도 아닌데, 종시 단행을 못하고 그냥 풍속대로 따라 상속을 했다가 4년 후 공산당이 와서 자주 숙청하는 것을 당하면 서야 "그때 차라리 단행했더라면" 하고 뉘우쳤습니다. 2만 평 땅을가지고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겨우 지나고 1942년이 되니 그 5월에 성서조선 사건이 일어나 서울로 잡혀 오게 됐습니다. 그래 한 해를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내고 1943년 4월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가니 그 때는 집과 나라 형편이 다 말이 아니었습니다.
옥중에서 시들었던 몸에 원기가 돌아올까 말까 할 무렵 평소에 서로 가장 가까운 친구라고 서로 마음에 허락했고 성서조선의 주필이었고 같이 고생을 했던 김교신이 용천까지를 왔습니다. 그때 정용령이 내려서 모든 젊은이를 가만두지 않고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도록 강요하던 때입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김교신이 온 뜻은 징용령에 순종을 하면서라도 무슨 일을 해보잔 뜻에서였습니다. 천리 길을 턱턱 찾아온 뜻 고맙기는 하지만 역시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또 약한 나였습니다. 동의를 못하고 나는 그래도 그것이 영 이별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송산농사학원은 소위 내 운동이라 할 만한 운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10년 두고 그리던 생각을 한 번 실지로 해보려다 첫 발자국에서 깨져버렸습니다. 이제 성서조선사건까지 치르고 나니 정말 길이 막혔습니다. 그래 아주 농사꾼이 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나는 농사꾼으로 자처하고 농사꾼의 벗이 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농사꾼들이 나를 벗으로 알아주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지식의 죄가 그렇게 큰 줄은 그때 까지 몰랐습니다. 말만 아니라 서로 품앗이가 돼야 농사꾼의 친구겠는데 책상물과 누가 품앗이를 하겠습니까? 또 말조차도 동무가 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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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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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壁功深(면벽공심)
面(낯 면) 壁(벽 벽) 功(공 공) 深(깊을 심)
오등회원(五燈會元) 동토조사(東土祖師)편의 이야기. 남북조시대에 불교가 흥성하자, 많은 인도 승려들이 중국으로 왔다. 양(梁)나라 무제(武帝) 때, 천축국 향지왕(香至王)의 셋째 왕자인 달마(達摩)는 광동지방을 지나 양나라의 수도인 건업(建業)에 도착하였다. 달마는 건업을 떠나 북위(北魏)의 영토인 숭산(嵩山)에 있는 소림사(少林寺)에 머무르게 되었다. 달마는 소림사에서 밤낮으로 벽을 향해 앉은채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面壁而坐, 終日默然,). 그에게 무슨 오묘함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달마가 이렇게 수행하기를 9년. 그리고 그는 죽었다.
소림사의 서쪽에는 높이가 2 장(丈)이나 되는 석벽(石壁)이 있다. 얼핏 보면 보통 돌 같지만, 대여섯 걸음 물러나서 보면, 달마가 정좌(靜坐)하고 있는 모습이나 움직이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달마가 9년 동안 면벽하며 도를 닦아 남긴 흔적이라고 한다.
面壁功深 이란 오랜 수련을 통하여 깊은 경지에 이름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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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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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발견하는 행복 - 이태영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온갖 향락을 누리다가 염라대왕 앞에 끌려갔더니 당장 지옥으로 보내라고 했다. 사자에게 이끌려 어느 텅 빈 곳간에 갇혔는데, 몇 달이 지나도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어찌나 답답한지 지옥으로 보내려면 빨리 보내 달라고 고함을 쳤더니 옆방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여기가 바로 지옥이야."
그렇다. 편안함이 바로 행복은 아니다. 역경도 고통도 없으면 그것이 행복일 것 같지만, 사실은 희로애락이 고루 있어야만 그 속에서 행복이 발견된다. (가정법률상담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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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추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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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자라는 만큼 닳는 운동화
클라랜스 파웰이라는 사람이 젊은 시절을 회고하며 전해준 이야기입니다. 그는 지금은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오래전에는 꽤나 어려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는데 가을학기가 되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두 아들과 딸 한 명에게 새 운동화를 사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두 아들은 궤짝으로 만든 손수레를 타고 언덕 비탈길을 내달리면서 발로 문지르기 때문에 늘 신발이 빨리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또 아내는 세탁기가 고장나서 빨래를 할 수가 없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래서 파웰 씨는 신문 광고란을 뒤져 중고품 세탁기를 파는 집을 발견해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막상 집을 찾아갔지만 대문 앞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크고 훌륭한 저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웰 씨는 초인종을 눌렀고 주인 부부는 친절히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싼 값에 세탁기를 팔았습니다. 파웰 씨는 고마움을 금할 길이 없었고 주인 부부와 대화를 나누던 끝에 무심코 자기의 아이들 얘기를 꺼내게 됐습니다. 두 녀석들이 손수레를 타면서 신발이 다 떨어졌고, 딸은 줄넘기를 해서 신발이 다 헤졌는데 학교 가기 전에 새 운동화를 사 줘야 하기에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부인 얼굴이 이상해졌습니다. 그리고 방안으로 급히 뛰어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파웰 씨가 언뜻 보니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당황한 파웰 씨가 대단히 미안해 하자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걱정마세요. 당신에게는 아무 실수도 없었어요. 당신은 아이들 신발 때문에 걱정하셨지요. 우리에게는 어린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는 태어난 후 한 번도 걸음을 옮긴 적이 없지요. 만약 우리 아이가 신발을 신고 걸어다녀 한 켤레만이라도 닳아 못 신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을 겁니다."
집에 돌아온 파웰 씨는 말썽꾸러기 자녀들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떨어진 세 켤레의 운동화를 보며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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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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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2. 거꾸로 경영
백프로 믿고 맡겨라 - 신뢰 경영
당신의 직장은 어떠십니까
기업이 파는 것은 물건만이 아니다. 기업문화도 중요한 상품이다. 굳이 경제개념과 연관시켜서 안됐지만, 기업문화는 기업이미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직원들의 업무 효율성에도, 심지어는 주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만큼 기업문화는 중요하다. 대기업이야 워낙에 거대한 조직이다 보니 어떤 식으로든지 기업문화가 생겨난다. 그런데 중소기업쯤 되면 기업문화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는다. 기껏 한다는 짓이 어느 회사에서 재미 좀 봤다니까 그 회사에서 했던 운동이나 이벤트를 도입해보자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나름대로의 기업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기업문화를 보자면 아예 '문화'라기보다는 왜곡된 '종교'같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앞에서 한 회사의 예를 들었다. 매스컴에서는 불황을 이겨낼 무슨 커다란 묘책이라도 발견한 듯이 너도나도 야단이다. 대기업에서는 순번까지 정해가며 간부들을 견학 보낸다. 대기업에 속한 그 많은 직원들을 전부 그 모양으로 만들겠다는 소린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멀쩡한 청춘들을 몽땅 바보로 만들자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은가. 한심하고 무서운 일이다. 요즘 '벤처기업'이란 용어를 자주들 사용한다. 기술력으로 승부하대서 벤처라는 것이고, 그만큼 위험하대서 또한 벤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는 '벤처기업'이란 시장에서의 개념이다. 좀더 크게 생각해보면, 모든 기업은 벤처기업이다. 모험은 시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안에서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업은 작은 국가이자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기업도 안으로 끊임없이 개척해야 하고, 시도해야 하고, 투쟁해야 하고, 생존해야 한다. 안에서 실패하는 기업은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런데 우리들은 참 모험하기를 싫어한다. 자기만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모험하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하는 모험은 위험해서 싫고, 남이 하는 모험은 위화감을 조성하니 싫은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냥 해먹던 대로 해먹는 것이 제일 속 편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다. 뿐만 아니라 경직되고 퇴화한다. 바로 이게 문제다. 기업문화의 주역은 직원들이다. 위에서 도입하고 교육하고 강요해서 만들어지는 건 바라직한 기업문화가 아니다. 간부들도 괴롭고 직원들도 괴롭다. 기업 본래의 목적과는 별개로 또 하나의 기형적인 '일거리'들이 생겨난다. 그런데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참고 견뎌서 얼마간의 성과를 본다한들 무에 그리 대견스럽겠는가, 참고 견디느라 허비한 엄청난 에너지들로 기술개발에나 힘썼으면 그만한 성과보다 못했겠는가 말이다.
예컨대, 시간을 절약하자고 위로부터 캠페인을 벌이고 이벤트를 조직한다. 시간을 절약하는 묘안들을 짜내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런 취지를 교육하고 다짐하고 평가해야 할 테니 이런 저런 집회와 회의를 하느라 또 많은 시간들이 허비된다. 약간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적인 경제개념에도 맞지 않는다. 대개의 사내 운동이란 것이 이토록 어리석기 짝이 없다. 기업문화란 직원들이 가장 즐겁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무형의 환경을 뜻한다. 리더는 직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모색하고 구축해갈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모험이라는 것이다. 직원들을 자유롭게 풀어두자니 간부들이 불안하고 초조한 것이다. 이 불안과 초조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결국 기업문화는 사라지고 기형적인 관료조직만 남는다. 관료조직은 속성상 보다 견고한 관료조직을 모방한다. 악순환이다.
사람들은 미래산업의 기업문화가 독특하다고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리 회사의 기업문화는 지금도 건설 중이다. 다만 제대로된 기업문화 건설을 위해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것이다. 그러니 밖에서 보기에 어지럽고 방만해 보일 수밖에. 미래산업은 기술력 하나만 자신 있을 뿐 관리면 에서는 매우 취약하다. 인력이나 자금이 필요 없이 낭비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원인이 확인되는 대로 꾸준히 고쳐 나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쓸데없는 푸닥거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자율과 방임의 기업문화를 원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율과 방임 속에서 진정한 창조성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미래산업이 즐거운 회사가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대개의 경우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직장에서 보내게 마련이다. 더구나 그 시간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Golden Time of Golden Age'인 것이다. 나머지 삼분의 일은 가정과 휴양을 위해 쓰고 마지막 삼분의 일은 잠을 자면서 보낸다. 흔히 직장을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억울한 감이 없지 않다. 단순히 먹고살기 위해 쓰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삼분의 일이 불행한 사람이다. 뿐만 아니라 하루 중에서 가장 활동적인 시간대를 우리는 직장에서 보내야 한다. 직장에서의 기분이 거의 하루의 컨디션을 지배한다고 봐야 한다. 직장생활은 그만큼 중요하다. 나는 늘상 직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직장에서 즐겁게 보내라. 행복하게 일해라. 일하는 즐거움과 행복을 만끽해라. 회사는 환경만 만들어줄 수 있을 뿐이다. 결국은 너희들 신세 너희가 책임지는 것 아니냐, 후회하지 말고 매 순간 즐겁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보내라. 직장에서 일하는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요, 일하는 행복을 모르고 그저 벌어먹기 위해 고달프게 사는 사람은 실패한 인생임을 명심해라."
아직은 무엇이 진정 올바르고 능률적인지 알 수 없지만, 필요 없는 간섭과 강요가 없기 때문에 모두가 즐겁게 일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의 미래산업을 있게 한 힘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경영평가단이 우리를 욕하면서도 우리의 주식을 살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직원들이 불행한 기업이라면, 그 기업이 아무리 돈을 잘 본다 하더라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 궁극에는 사람을 위한 기업이어야지, 기업을 위한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우리들은 참 모험하기를 싫어한다. 자기만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모험하는 것도 싫어한다. 내가 하는 모험은 위험해서 싫고, 남이 하는 모험은 위화감을 조정하니 싫은 것이다. 기업문화란 직원들이 즐겁고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무형의 환경을 뜻한다. 리더는 직원들이 스스로 원하는 환경을 모색하고 구축해갈 기회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바로 모험이라는 것이다. 내가 자율과 방임의 기업문화를 원하는 것은 두 가지 여유 때문이다. 하나는 자유고 방침 속에서 진정한 창조성이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미래사업이 즐거운 회사가 되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다. 직원들이 불행한 기업이라면, 그 기업이 아무리 돈을 잘 번다 하더라도 존재할 가치가 없다. 궁극에는 사람을 위한 기업이어야지, 기업을 위한 사람이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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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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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엄마
마당으로 뛰어내려와 안고 들어갈 텐데 웬일인지 엄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또 숨었구나!' 방문을 열어봐도 엄마가 없었다. '옳지 그럼 다락에 있지' 발판을 갖다 놓고 다락문을 열었으나 엄마는 거기도 없었다. 건넛방까지 가 봐도 없었을 때에는 앞이 아니 보였다. 울음 섞인 목소리는 몇번이나 엄마를 불렀다. 그러나 마루에서 재각대는 시계 소리밖에는 아무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주춧돌 위에 앉아서 정말 엄마 없는 아이같이 울었다. 그러다가 신발을 벗어서 안고 벽장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날 유치원에서 몰래 빠져 나왔었다. 순이한테 끌려 다니다가 처음으로 혼자 큰 한길을 걷는 것이 어떻게나 기뻤는지 몰랐었다. 금시에 어른이 된 것 같았다. 잡화상 유리창도 들여다보고, 약 파는 사람 연설하는 것도 듣고, 아이들 싸움하는 것 구경하고 그러느라고 좀 늦게야 온 듯하다. 자다가 눈을 떠보니 캄캄하였다. 나는 엄마를 부르면서 벽장문을 발길로 찼다. 엄마는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그때 엄마의 가슴이 왜 그렇게 뛰었는지 엄마의 팔이 왜 그렇게 떨렸는지 나는 몰랐었다.
"너를 잃은 줄 알고 엄마는 미친년 모양으로 돌아다녔다. 너는 왜 그리 엄마를 성화 먹이니, 어쩌자고 너 혼자 온단 말이냐, 그리고 숨기까지 하니 너 하나 믿고 살아가는데, 엄마는 아무래도 달아나야 되겠다."
나들이간 줄 알았던 엄마는 나를 찾으러 나갔던 것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그저 울었다. 그후 어떤 날 밤에 자다가 깨어보니 엄마는 아니 자고 앉아 무엇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일어나서 무릎을 꿇고 엄마 옆에 앉았다. 엄마는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장롱에서 옷들을 꺼내더니 돌아가신 아빠옷 한 벌에 엄마옷 한 벌씩 짝을 맞춰 차곡차곡 집어넣고 내 옷은 따로 반닫이에 넣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슬퍼졌지만 엄마 품에 안겨서 잠이 들었다. 그후 얼마 안 가서 엄마는 아빠를 따라가고 말았다.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내가 타고난 영광이었다. 엄마는 우아하고 청초한 여성이었다. 그는 서화에 능하고 거문고는 도에 가까웠다고 한다. 내 기억으로는 그는 나에게나 남에게나 거짓말한 일이 없고, 거만하거나 비겁하거나 몰인정한 적이 없었다. 내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요, 내가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그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한 때문이다. 엄마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후 비단이나 고운 색깔을 몸에 대신 일이 없었다. 분을 바르신 일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보고 아름답다고 하면 엄마는 죽은 아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여름이면 모시, 겨울이면 옥양목, 그의 생활은 모시같이 섬세하고 깔끔하고 옥양목같이 깨끗하고 차가웠다. 황진이처럼 멋있던 그는 죽은 남편을 위하여 기도와 고행으로 살아가려고 했다. 폭포 같은 마음을 지닌 채 호수같이 살려고 애를 쓰다가 바다로 가고야 말았다.
엄마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내 이름을 부른 것이었다. 나는 그후 외지로 돌아다니느라고 엄마의 무덤까지 잃어버렸다. 다행히 그의 사진이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삼십 대에 세상을 떠난 그는 언제나 젊고 아름답다. 내가 새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 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엄마한테서 배운 웃음이야. 나는 엄마 아들답지 않은 때가 많으나 그래도 엄마의 아들이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나 아빠의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엄마와 나는 숨기내기를 잘하였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를 금방 찾아냈다. 그런데 엄마는 오래오래 있어야 나를 찾아냈다. 나는 다락 속에 있는데, 엄마는 이방 저방 찾아다녔다. 다락을 열고 들여다보고서도 "여기도 없네" 하고 그냥 가버린다. 광에도 가보고 장독 뒤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닌가. 하도 답답해서 소리를 내면 그제야 겨우 찾아냈다. 엄마가 왜 나를 금방 찾아내지 못하는지 나는 몰랐다. 엄마와 나는 구슬치기도 하였다. 그렇게 착하던 엄마도 구슬치기를 할 때에는 아주 떼쟁이었다. 그런데 내 구슬을 다 딴 뒤에는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었다. 왜 그 구슬들을 내게 도로 주는지 나는 몰랐다.
한번은 글방에서 몰래 도망왔다. 너무 이른 것 같아서 한길을 좀 돌아다니다가 집에 돌아왔다. 내 생각으로는 그만하면 상당히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서자 엄마는 왜 이렇게 일찍 왔느냐고 물었다. 어물어물했더니, 엄마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막 때린다. 나는 한나절이나 울다가 잠이 들었다. 자다 눈을 뜨니 엄마는 내 종아리를 만지면서 울고 있었다. 왜 엄마가 우는지 나는 몰랐다.
나는 글방에 가기 전부터 '추상화'를 그렸다. 엄마는 그 그림에 틀을 만들어서 벽에 붙여 놓았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추상화가 없을 때라, 우리집에 오는 손님들은 아마 우리 엄마가 좀 돌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엄마는 새로 지은 옷을 내게 입혀보는 것을 참 기뻐하였다. 옷 입히는 동안 내가 몸을 가만두지 않는다고 야단이었다. 작년에 접어 넣었던 것을 다 내어도 길이가 작다고 좋아하였다. 그런데 내 키가 지금도 작은 참 미안한 일이다.
밤이면 엄마는 나를 데리고 마당에 내려가 별 많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두칠성을 찾아 북극성을 일러주었다. 나는 그때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불행히 천문학자는 되지 못했지만, 나는 그후부터 하늘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엄마는 나에게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여 주었다. 나는 왕자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쓰고 다니던 내가 왕자 같다고 생각하여서가 아니라 왕자의 엄마인 황후보다 우리 엄마가 더 예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예쁜 엄마가 나를 두고 달아날까 봐 나는 가끔 걱정스러웠다. 어떤 때는 엄마가 나의 정말 엄마가 아닌가 걱정스러운 때도 있었다. 엄마가 나를 버리고 달아나면 어쩌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때 엄마는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영영 가버릴 것을 왜 세 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는지 지금도 나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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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24. 힘의 오용
<작은 힘이라도 쓸 때 남들을, 모든 만물을 받들고 사랑함에 조금도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의 보잘 것 없는 머리로 남들의 삶을 간섭하고 방해해서는 아니 된다. 그대가 참으로 힘이 있다면 남들에게 농간 부리지 말고 창조적으로 쓰라>
라마크리슈나에게 비베타난다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런데 라마크리슈나 아쉬람에는 아주 단순하고 순진한 깔루라는 자가 있어서, 대단히 지적이고 논리적인 지베카난다는 늘 그를 지분거렸다. 깔루는 아쉬람 안에 자기 방을 갖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돌멩이 하나로도 신이 될 수 있는데, 깔루는 자신의 조그만 방에 삼백 개나 되는 돌벵이 신을 모셔두고 있었다. 비베카난다는 깔루에게 늘 말하곤 하였다.
<그 돌멩이 신들일랑 몽땅 갠지스강에 내다 버려라. 그런 엉터리가 어디 있나. 신은 그대 안에 있다>
그러노라면 깔루는 말하는 것이었다.
<난 이 돌들을 사랑해. 아름답잖어. 갠지스강이 그것들을 내게 보내준 거야. 한데 그걸 갖다 버리라구? 그럴 순 없어>
그런 하룻날 비베카난다에게 첫 깨침이 일어났다. 강력한 힘이 몰아쳤다. 비베카난다는 문득 그 힘을 써서 깔루의 마음을 움직여 보겠다는 장난기어린 생각을 하였다.
"깔루여, 이제 그대의 돌멩이 신들을 몽땅 갠지스강에 내다 버려라"
라마크리슈나는 이 모든 걸 다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다 알고 있었으나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였다. 깔루가 큰 꾸러미를 안고 방에서 나왔다. 그 안엔 그의 돌멩이 신들이 모두 들어 있을 것이었다. 라마크리슈나가 깔루를 불러 세웠다.
<기다려라. 어딜 가려느냐?>
깔루가 말하기를,
<지금 막,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아챘어요. 그래서 이 돌멩이 신들을 몽땅 내다 버릴려고 해요>
라마크리슈나는 깔루를 세워 놓고 비베카난다를 물렀다. 라마크리슈나는 크게 노하여 말했다.
<비베카난다, 이런 못된 방법으로 힘을 쓰다니!>
그러면서 깔루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방으로 돌아가 그대의 신들을 다시 제자리에 모셔 놓으라. 신들을 내다 버리겠다는 건 깔루 그대의 뜻이 전혀 아니니. 그건 비베카난다의 생각이고, 그의 농간일 뿐이다>
라마크리슈나는 분노하여 비베카난다에게 말했다.
<이제부터 그대의 열쇠는 내가 갖고 있겠다. 그대는 이제 다시는 깨치지 못할 것이고, 힘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대가 죽기 사흘 전데 이 열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비베카난다는 정말 다시는 깨칠 수 없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라마크리슈나가 세상을 떠날 때 비베카난다는 애원하였다.
<스승님, 제발 제 열쇠를 돌려 주십시오>
그러나 라마크리슈나는 말하기를,
<아니 된다. 그대는 위험한 자, 그런 힘이 못된 방법으로 쓰여서는 아니 된다. 기다려라. 그대는 아직 멀었으니. 구하고 명상하라>
비베카난다는 죽기 꼭 사흘 전에 새로운 깨침을 얻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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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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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Noisiel, Menier 초콜릿 공장 : 1872 년에 지어진이 건물은 눈에 띄는 금속 구조를 가진 세계 최초의 건물이었으며 세라믹 타일 패턴이 특징.]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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