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환란의 제2일도 저물어 저녁때가 됐습니다. 주인 격인 내가 식사준비를 해야 합니다. 쌀은 아침에 사온 현미가 있지만 반찬은 어떻게 할까? 멸치라도 사다 된장국이라도 끓여 훌떡 할 생각으로 거리를 나갔습니다. 덕일이가 따라 나갔습니다. 늘 다니던 가게에 가서 멸치를 한 봉 사들고 돌아오는 때입니다. 상점에서 조금 오면 파출소가 있고 그 파출소 앞에서 좁은 옆 골목길을 꺾어 들어오면 거기 우리 사는 집 앞 한길이 나옵니다. 파출소를 지나 그 옆 골목으로 막 꺾어지려는 순간, 어디서 오는지 사람의 떼가 갑자기 몰려들며 “고레가 홈모노다. 고레가 홈모노 다.” 와와 외치는 겁니다. 이게 진짜라는 말입니다. 수가 얼마나 되는지 미처 짐작도 할 수 없으나 손에는 모두 번쩍번쩍 하는 일본도, 몽둥이, 대창, 철창 하는 것들을 들었습니다. 정말 벼락입니다. 그러나 내 속에 죄가 없으니 별로 겁도 나지 않았습니다. 문득 ‘시나징' 하는 명사가 내 머리를 스치고 갔습니다. “옳지 그렇구나, 시나징이 도둑질 한다고 아침에 소리치더니 아마 나를 중국사람으로 본 모양이구나”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미처 대답을 하려하기도 전예 파출소로부터 순경이 나와서 우리와 군중 사이에 들어섰습니다. 그러고는 흥분하는 군중을 타이르고 떠밀며 헤어져 가라고 했습니다. 쌀통에 쥐 드나들듯 그 골목을 늘 드나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를 몰라도 순경은 아마 나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린 것입니다. 군중들은 슬몃슬몃 헤어져 갔습니다. 조금 우습다면 우습게 된 일막극이지만 나는 본래 모든 것을 모나게 할 줄 모르는 사람인자 라, 별로 이상한 감정 없이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덕일이는 똑똑하다면 똑똑하고 좀 날카로운 성격입니다. 후에는 복도 고상을 나오고 거기서 신문기자 노릇을 하며 일본 여자와 결혼을 애서 만주 하얼빈인가 어딘가 가서 살다가 일찍 죽어버렸습니다만, 돌아가려는 나를 끌어당기며 그냥 미시하게 갈 것 아니라 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내 심정은 벌로 그럴 것 없지 않느냐 하는 느낌이었지만 또 구태여 막자는 막음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대로 옆에서 보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나는 도리어 고맙게 아는 순경한테 가서,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진짜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가 무슨 범인이냐? 죄 없는 사람보고 군중이 까닭없이 그랬으면 경관으로서 분명한 설명을 해주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이렇다 할 아무런 책망 하나 없이 그저 미시하게 돌려보내고 만다니 그게 무슨 처사냐?" 하는 뜻의 말이었습니다.
경위로 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는 돋히지 않아도 좋을 거스러미를 돋힌다 하고 듣고만 있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순경은 발끈 화를 냈습니다. “이 사람아 때가 때 아니냐? 그렇게 알고 싶거든 그럼 가자!” 하며 잡아 끌었습니다. 나는 내가 각별히 다른 마음이 없으니 그 “때가 때 아니냐?” 하는 말의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순경은 아무 내용을 말하지 않더라도 그렇게만 말하면 담연히 알 거라는 태도로 그 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덕일이를 끌고가는 데는 좀 걱정스러웠습니다. 물론 아무 죄야 없지만, 또 따질 만도 하지만, 우리와 일본 관리와의 사이는 이유 이론이 서지 않는 처지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나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순경은 나를 보고 “자네는 일없어, 괜찮아”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러기를 한두 차례 거듭한 다음 순경은 “정말 가보고 싶으면 가도 좋아” 하고 데리고 갔습니다. 간 곳은 구입경찰서였습니다.
"똑똑해야 살 것 같지만 똑똑이 늘 이익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고 온순해선 못살 것 같지만 온순이 늘 손해를 보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는 또 기대대로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옹은 “복이 될지 누가 알아?” “화가 될지 누가 알아?” 하면서 당장에 내려지는 판단에만 집착하지 않고 길게 두고 일 그 자체로 하여금 일을 말하게 함으로 말미암아 안정된 마음의 처세를 할 수 있었다는 옛말이 있지만, 역사의 의미야말로 그러지 않고는 실현할 수 없습니다. 구입경찰서 유치장엘 썩 들어서면서야 "그렇다. 일은 바로된 일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당히 따지려다가 터무니없는 손해를 봤는데 그 불행이 아니었던들 사건의 진상을 모를 뻔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모르고는 잘해도 잘이 아니요 못해도 못이 아닙니다. 진실을 붙잡으면 미래는 거기서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잘했던 것만 아니라 잘못했던 것까지도 잘한 일이 됩니다. 그것이 참 의미의 선이요 구원입니다.
"그렇게 알고 싶거든 가자" 할 때 나는 무슨 조사나 할 줄 알았지 덮어놓고 유치장에 넣을 줄은 몰랐는데, 가더니 이런 말 저런 말 물을 것도 없이, 첨에는 ,오지 말라던 나까지 데꺽 넣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들어가니 꿈도 못 꾸었던 세계입니다. 사방 아흡 자나 되는 살창 우리인데 그 안에서 설 수도 앉을 수토 없이 사람이 가득 찼습니다. 그것이 다 조선 사람입니다. 거기서 들으니 조선 사람들이 도둑질하고 불 놓고 우물에 독약을 치고 다니며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고 하면서 청년단 재향군인 또 일반 시민을 일으켜 칼로 죽창으로 마구 죽인다는 것이요, 여기 잡아넣은 것은 보호한다면서 하는 짓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일은 바로 됐다고 한 것은 이 설명을 듣고 나서 느낀 말입니다. 일이 이런데 이것을 모른다면 산 의미가 어디 있으며 평안이 어디 있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있을 때 경찰서 앞을 지나면 죄 없이도 치가 떨렸지만 유치장을 본 일은 없었고, 만세를 부르고도 이상하게 빠져서 들어갈 기회가 없었는데, 이제 여기서 그 구경을 하게 댔습니다. 후에 몇 차례씩 가보고는 “감옥은 인생대학이다” 했습니다마는 그 입학은 여기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입학식이야말로 이름에 합당하게 참 훌륭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이때에 한 번 미리 경험했던 것이 후에 그것을 이겨가는 데 퍽 도움이 됐습니다. 여기는 어젯밤의 불인지와는 또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본능이고 번뇌고 그런 것은 일어날 여지도 없었습니다. 어젯밤의 극은 우주적인 것이었지만 오늘 밤은 민족극입니다. 어젯밤은 무한 대공 아래서였지만 오늘 밤은 감옥 안입니다. 밤새 생각한 것이 자유, 자유, 자유입니다. 길이 넘는데 뚫린 살창으로 어제부터 붙는 그 불길이 아직도 붙고 있는 것이 뵈는 데 그것을 바라보면서 밝도록 한 생각은 “저 불이 여기까지 올 때 이놈들이 이 문을 열어주고 도망갈 리가 없지” 하는 하나뿐이었습니다.
제각기 노하고 저주하고 한탄하고 떠들지만 나는 한 마디 입을 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처음에 들어가던 대로 맨 앞 살창 밑에 이마를 살창에 대고 앉아, 기도를 했는지, 생각을 했는지. 그 안에 이방인이 둘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일본 사람인데 조선 사람으로 보여 잘못 잡혀온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 사람인데 역시 잘못 잡혀왔습니다. 그 일본 청년은 간수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자꾸 자기는 조선 사람이 아니라는 변명을 했고, 중국 사람은 울면서 “나 지나 유학생이오” 하며 밤새 애걸을 했습니다. 세 국민성이 제각기 나타났습니다. 일본 사람은 자신이 있어 그러는지 울지는 않았고, 한국사람도 우는 것은 하나도 없었는데 중국 학생은 내가 보기에도 비겁하다 할 만큼 체면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또 그런다고 한국 사람들은 그를 몰아쳤습니다. 나는 혼자 우리 차비에 누구를 비웃을 거야 없지 않느냐 속으로 항의를 했지만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밤새 사람을 잡아들이는데 모두 불난 데 가서 도둑질하던 것들입니다. 그 중 무서운 것은 벽창호 같은 장사인데 사내놈이 여자의 속옷을 입고 목을 흘켜 숨을 못 쉬고 쌕쌕하며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조선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 없었습니다. “이게 진짜다” 라고 칼을 빼들고 부르짖었는데, 하는 그 사람의 뜻은 무엇이었든 간에, 그 참 의미는 진짜 자아, 진짜 일본, 진짜 중국, 진짜 한국을 드러내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아들이 모른 아버지 마음
한 밤을 또 꼬박 새웠습니다. 아침이 됐을 때 한 사람이 살창 밖에 와서 이리저리 돌아보더니 문득 나를 보고 “아, 자네도 왔던가?” 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보니 우리 담임형사 고바야시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조선 학생은 구역으로 담임형사가 있어서 늘 동정을 살렸습니다. 그래서 내가 좀 항의조로 “자네도라니 어떻게 된 거요?” 했더니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냐, 잘못돼서 그런 거니 이리 나와요” 하며 문을 쨌습니다. 있는 사람들께 조금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이 사람도 같이 가야 한다”고 덕일이를 데리고 나왔습니다. 나오니 이층 형사실로 데리고 가서 빵을 내놓고 먹으라 했습니다. 평소의 온순주의가 효과가 난 셈입니다. 담임형사들은 늘 주의해서 보고 이따금 찾아오기도 하므로 누가 어떤 사람인 걸 다 꿰뚫고 있을 것입니다. 필시 나 같은 것은 온순한 문제없는 학생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내놓는 것입니다. 덕일이는 역시 거기서도 덕일이었습니다. 못 나간다고 엄살을 하는 겁니다. “나가면 죽일 텐데 못 나갑니다. "데려다주세요" 하니 형사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염려없으니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 나와서 2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를 가려니 “저게 진짜다. 저게 진짜다.” 사방에서 일제사격이 오는 듯해 겨우 걸음을 옮겨놓았습니다.
이튿날 아침 목사가 찾아왔습니다. 본래 우리 바로 건너편 집이 교회여서 일요일이면 거기를 더러 나갔던 일이 있습니다. 교회는 크지 않아서 한 20명 모이는데 모두들 아주 진지한 태도로 조용하게하는 예배였습니다. 지껄이고 떠드는 우리나라 교회를 보다가 첨으로 그런 모임을 보니 퍽 좋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따금 갔지만 나도 무슨 말을 하려 않고 그들도 한 마디 묻는 것도 없었습니다. 목사는 도미나가라는 분이었는데 퍽 점잖았습니다. 그래도 언제 말도 한 마디 해본 일이 없으므로 찾아오리라는 상상도 못했는데 왔기 때문에 참 고마웠습니다. 현관에 선 채로 부근 사람들한테 잘 말을 해두었으니 조금도 걱정 말라고, 그러나 위험하니 절대 밖에 나가지는 말라고 하고 돌아갔습니다.
한 주일 동안을 집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집에서 반드시 큰 걱정 속에 있을 것인데 소식을 보낼 길이 없었습니다. 보통우편은 물론 전보도 끊어져 있었습니다. 한 주일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전보가 통한다고 신문에 났는데 그것도 오직 한 곳 중앙우편국에서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있는 데서 가자면 10리도 넘습니다. 걸어가기로 했습니다. 가면서 보니 그저 내다뵈는 대로 빨갛게 탄 흙뿐입니다. 그때만 해도 거의 모든 건물이 나무로 지은 것이었습니다. 동경의 중심이라는 일본교를 가니 한 주일이 지났는데도 냇물에 시체들이 떠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어머니가 아기를 업은채 죽었는데 그 아기의 발목이 타서 떨어져 타다 남은 장작 그루터기 같았습니다. 저렇게 죽을 때 그 죽는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그래도 우편국에 가서 집에 무사하다는 전보를 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돌아오면서는 조금도 무서운 생각도 미운 생각도 없었습니다.
전보를 쳐놓고는 이제는 집에서도 마음을 놓으려니 했지만 후에 들으니 그 전보가 집에까지 가는데 한 주일이 더 들었답니다. 나는 그런 줄은 알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집에서 내가 살아 있는 줄 안 것은 지진이 나서 동경이 몽땅 땅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는 소식이 신문에 난 지 두 주일이 넘어서야 겨우 된 일입니다. 그동안에 그 마음들이 어떠했을까? 그 다음 내가 첨으로 집에 갔을 때, 아마 이듬해 여름방학일 것입니다. 그때 마을 사람들 말은 아버지가 “다 죽어서 다니시는 얼굴"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 속에 싸여 있으려니 짐작은 하면서도, 그런 줄은 모르고 태평으로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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