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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99호
2020.6.16. (음 4.25. - 윤)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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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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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고란 할 때는 말로 주고 싶고, 받을 때는 되로 받고 싶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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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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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마녀
드라마를 보며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일삼아 보는 연속극인데도 재미가 여간 아니다. 일일·주말 드라마와 미니시리즈·단막극의 본방송은 물론 재방송까지 ‘복습’하며 ‘드라마 왕국’이 헛것이 아님을 새삼 실감한다. 일할 때마다 ‘모니터’를 하다 보니 흥미로운 현상을 알게 되었다. ‘압구정 백야’, ‘빛나는 로맨스’, ‘소원을 말해봐’, ‘장미빛 연인들’ 따위에 담긴 공통점이다. ‘오로라 공주’, ‘왔다! 장보리’, ‘웃어라 동해야’, ‘내 딸 서영이’, ‘제빵왕 김탁구’도 마찬가지. 그렇다, 제목에 주인공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여주인공 이름(백야, 오빛나, 한소원, 백장미)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재치가 엿보인다. ‘도보리’는 ‘장보리’가 되어 막을 내렸다. ‘오대산’의 사 남매는 우주를 담았다. 세 아들은 ‘왕성, 금성, 수성’이고 막내딸이 ‘로라’이다. ‘보석 비빔밥’도 딸 ‘비취’와 ‘루비’, 아들 ‘산호’와 ‘호박’이 비벼진 제목이다. 웃어넘기기엔 여운 남는 ‘황금 무지개’의 형제 이름도 있다. 큰아들 ‘김만원’부터 ‘천원, 백원, 십원, 열원, 일원, 영원’까지 이어지는 일곱 남매(‘십원’과 ‘열원’은 쌍둥이)가 그렇다.
“주인공 이름을 제목에 넣는 게 출연자 섭외에 도움 될 때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 경향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작명 원칙의 최우선은 드라마 내용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작품성과 시청률, 두 마리 토끼를 잡는 한 피디(PD)의 말이다. 시청률 20%를 훌쩍 넘기며 눈길 끌고 있는 드라마의 원제목은 ‘전설(傳說)의 마녀’, 방송 제목은 ‘전설(?雪)의 마녀’이다. ‘전설’(?雪)은 설욕과 한뜻이다. 앙갚음의 이유가 분명한 여자 주인공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를 보면 고개 끄덕여지는 제목이다. 동음어의 한자를 살짝 비틀어 드라마의 맛을 더한 주성우 피디는 대학 영어연극반에서 함께 놀았던 후배다. ‘마녀의 전설’이었으면 더 우리말다웠을 것이다, 그에게 한마디 건넸다. 씩 웃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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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 지라시
세밑을 앞두고 ‘노점상연합회원’이 라디오에 출연해 노점의 필요성을 얘기했다.
“(서민의 친구인) 길거리 떡볶이, 오뎅을…, 아 죄송합니다….” ‘오뎅’ 대목에서 아차 싶었던 거다. “괜찮아요, 청와대에서도 ‘찌라시’ 하는 판에!” 진행자가 한마디 거든다. 청와대 공식 발표에 ‘찌라시’가 등장하고, 야당 쪽은 “‘찌라시’를 ‘공공기록물’로 인정한 것”이라며 목소리 높이는 세상에 ‘오뎅’이라 하는 게 뭔 대수이겠는가 한 것이다.
청와대 발표에 ‘찌라시’가 등장하기 전에는 ‘증권가 소식지’, ‘사설 정보지’ 등으로 쓴 뒤 ‘속칭(일명) 찌라시’라고 괄호 안에 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찌라시’는 일본에서 온 말이다. 일본 사전 <고지엔>(廣辭苑)은 ‘ちらし[散らし]’의 첫 번째 뜻으로 ‘뿌리는 것’, 두 번째 뜻으로 ‘광고를 위해 배포하는 인쇄물’을 제시한다. 일제 강점기 신문을 찾아보았다. “황군위문품(皇軍慰問品)을 특선(特選)하여 이 위문품을 중심으로, 지라시, 가다로구를 작성하든지…”(ㄷ일보, 1937년 10월23일)에 ‘지라시’와 ‘가다로구(카탈로그)’가 나온다. 황군위문품의 목록(일람표, 상품안내서) 작성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발행)부수’를 뜻하는 러시아어 ‘티라시’(тираж) 유래설도 있지만 발음이 비슷할 뿐 ‘찌라시’와 관계있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다.
“선전을 위해 만든 종이쪽지. ‘낱장 광고’, ‘선전지’로 순화”로 풀이한 <표준국어대사전>의 표제어는 ‘지라시’이다. ‘チ/ち’가 첫소리일 경우 ‘지’로 쓴다는 외래어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지난 일주일 뉴스 검색 결과는 ‘찌라시’(989건)와 ‘지라시’(29건)로 차이가 크다.(네이버) 특정 매체(ㅁ경제)만 규범을 지키려 애쓴다. 외래어표기법을 좇으면 ‘잔폰’(ちゃんぽん)이지만 사전은 ‘짬뽕’을 표제어로 정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찌라시’를 인정한다. ‘잔폰’과 ‘지라시’ ─ 규범은 멀고, ‘짬뽕’과 ‘찌라시’ ─ 현실은 가깝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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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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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는 나의 힘 -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려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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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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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품고 갔다 품고 돌아온 것
3.1운동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사람질을 못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한다고 지금은 감히 사람질 한단 말 아닙니다. 깊은 밤 내 마음의 지성소 앞에 엎드릴 때 나는 언제나 몸둘 곳이 없어하는 나입니다. 그렇지만 그 형편없는 나로서도 만일 3.1운동의 세례를 받은 것이 없었더라면, 깊은 깨달음은 그만두고라고, 인생과 역사에 대한 방향감각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라는 내 실감에서 하는 말입니다. 나만 아니라 그 시대에 젊은이였던 모든 사람이 다 그렇지 않을까 나는 믿습니다. 아마 오늘의 젊은이는 8.15나 4.19에 대해 같은 체험을 가질 것입니다. 시대의 정신이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밀물 같은 것이요, 폭풍 같은 것이요, 지진 같은 것입니다. 달이 뜨고 저기압이 생기고, 땅이 흔들리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영향을 아니 입을 수 없듯이, 시대가 한 번 움직이면 그 안에 사는 모든 마음이 그 구조의 핵심에까지 영향을 받게 마련입니다. 나는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또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밀물이 아무리 들이밀어도 외로운 바위 등에 달라붙는 소라에게는 소용이 없듯이, 폭풍이 아무리 몰아쳐도 구멍에 숨는 지렁이에게는 의미가 없듯이, 지진이 아무리 일어도 무덤 속에 썩은 시체에는 아무 영향이 없듯이, 시대의 대세가 아무리 아우성을 쳐 부르고 그 선물을 골고루 나눠주려 손짓을 해도 제가 스스로 역사의 나가는 행렬을 외면하고 골동품 상점에 들어가 앉았는 마음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골동품 상점이 어떤 것입니까? 대일본육군사관학교 같은 것입니다. 받는 교육의 영향이 큽니다. 3.1 이후이면서도 더욱이 나는 "다섯 뫼그늘에서 흘러나는 물" 의 말류나마 마실 수 있었기 때문에 일본을 가도 얼반둥이 일본이 아니될 마음의 태세가 돼 있었고, 군국주의 나라엘 가도 육군사관학교 같은 데는 기웃해 볼 리도 없을 만큼 나갈 방향이 잡혀져 있었고, 땅이 쩍쩍 갈라지고 불길이 하늘을 태우는 재변을 당해도 자아는 잃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머니 손가운데 실 나들이 가는 아들 몸 위의 옷이네
떠나는 마당에 꼼꼼히 꼼꼼히 꿰매줌 돌아올 날 더딜까 더딜까 걱정함일세
어쩌면 풀끝 같은 이 마음 들어 긴긴 봄 햇볕 같은 그 은혜 갚으리.
집은 가난하지만 사랑은 봄볕보다 더합니다. 나라는 깨졌지만 역사의 은혜는 변할 줄이 없습니다. 나는 뵈는 옷, 뵈지 않는 옷을 안팎으로 껴입고 길을 떠났습니다. 뵈는 옷은 가늘고 가는 실 손톱이 닳도록 다듬고 자아 짜내고 꿰매서 지은 것, 뵈지 않는 옷은 실보다 더 가는 마음들 뽑아내고 자아내어 하늘볕에 바리워서 역사 흐름에 헹기워서 엮어서 지어낸 것, 바람들세라, 물들세라, 궂은 것 붙을세라, 독한 것 침노할세라, 마지막 순간까지 한 바늘뜸 당부하며 당부하며 입혀주고는 말 못하고 고개 숙이던 어머니입니다.
나는 현해탄을 건널 때 품고 간 것이 있습니다. 비바람보다 더한 눈총 속에서도, 내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던 것이 있습니다. 하던일 다 마치고 얼굴빛 더 그을어지고 현해탄 도로 넘어 다시 돌아올때도 품고 돌아온 것 있습니다. 속알 여물려면 물론 아직 멀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이미 씨알로서의 알갱이는 넣어주심을 받은 것이 있었노라고 믿고 있습니다. 3월 하순에 동경을 갔는데 처음 한 학기는 마음도 놓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한 해를 준비해 가지고 명년에는 꼭 어디나 입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젊어서부터 의지가 강한 사람이 못됩니다. 마음이 찬찬해서 모든 일을 계획을 짜서 해나가는 편도 못됩니다. 결단성은 더구나 부족합니다. 그래서 평고시대에도 공부를 파지 않았습니다. 별로 호걸스런 성격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난꾸러기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잠잠은 한 편이면서도 남들 성적 다투며 공부파는 것이 어쩐지 속돼 보여서 그것을 공부벌레들이라고 웃고, 그저 하는 대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늦게 오산을 가니 후배가 선배된 사람들도 있고 해서 인제 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으나 그때도 그리 열심으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때 소위 부활 오산, 3.1 때의 헌병이 불질러 다 타고 선생 다 잡혀가고 학생들 다 양떼처럼 흩어져 한때 학교가 아주 없어졌다가 졸업생들의 의논으로 다시 세운 것을 부활이라 합니다만, 그 오산은 참말 형편없었습니다. 집도 임시로 지은 초가에 책상도 걸상도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하는 공부하였는데 선생들조차 자꾸 변동이 많아 실력있는 교수를 할 수가 없었고, 자격조차 없는 학교였습니다. 그러니 거기서 두 해 지난 학력 가지고 대학에 들기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준비를 해야 하는데 자격이 없으니 검정시험을 쳐야겠는데, 그러려면 모든 학과를 다 준비해야 합니다. 또 집 형편으로는 동경 유학이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므로 학교에서 주는 보조를 받아서 왔으니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관계로 자연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경같은 것은 본래 즐기는 버릇이 없습니다마는 첨으로 간 대동경인데도 별로 구경하러 나간 것도 없이 한 학기를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먼저 가 있던 남강선생 둘째아드님 이택호 선생의 주선을 받아 탕도의 어떤 하숙에 들어서 그때 우리 학생이면 거개 한 번씩은 거쳐서 가는, 신전구에 있는 정측학교에를 다니다가, 낯이 좀 익어진 다음 그때에 같이 오산을 나왔던 돌아간 명재억을 만나서 그가 있던 본경구 효정으로 하숙을 옮겼습니다. 명은 그때 자기 삼촌 희조씨와 같이 가 있었는데 그는 나이 사십 넘어 오십이 가까워 머리에 벌써 서리 내리기 시작한 분이었습니다. 또 그와 같이 한 집에 채필근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도 명희조 씨와 같은 연배나 돼 보였고 머리도 같이 반백이었습니다. 채목사는 그때 동경제대 선과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두 늙은이가 늦게 공부를 한다고 힘을 쓰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은 점도 많습니다.
동경도 그때만 해도 옛날입니다. 효정이란 그리 구석진 곳도 아니데도 저녁이면 동리 아이들이 반딧불 별레 사냥을 하느라고 "호다루 고이 호다루 고이" 하며 떠들고 다녔고 낮이면 쓰르라미가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나뭇가지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자연이 그런 만큼 사람도 그랬습니다. 처음 갔을 때 주인이 고취란 사람이었는데 가내공업으로 염색을 해서 팔고 있었습니다. 아직 시골 할아버지 티가 있는 친절한 사람이었습니다. 얼마 아니 있다가 주인이 바뀌고 우리는 그냥 눌러 세로 들어 있게 됐는데 고림이란 그 새 주인 역시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라에 있을 때는 일본 사람이라면 다 여우나 승냥이 같은 것으로만 알았는데 놀라지 마십시오. 이 사람은 동경 안에 살면서도 조선은 독립한 나라인 줄 알지 자기네 식민지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고는 우리보고 당신네 나라에서는 어떤 옷을 입고 무슨 글자를 쓰느냐 물었습니다. 목수 노릇을 하는 사람인데 우리가 기독교인 것을 보고 이것저것 묻기에 예수도 목수였다고 했더니 아주 좋아했습니다.
나는 지금은 민중과 국가와는 분명히 구별해 생각합니다마는 그 때도 벌써 두 개의 일본을 느꼈습니다. 일본 민중으로서의 일본과 대일본제국이라는 일본. 첫째 것에는 죄 있을 것 없습니다. 민중은 세계 어디 가도, 세계 어느 구석의 물도 물은 물과 서로 섞여 하나가 되는 물이듯이, 다름없는 민중입니다. 죄 있는 것은 그 둘째 것, 소위 정치가라는 도둑들의 손에서 노는 국가라는 것입니다. 그해 따라 참 무더웠습니다. 동경의 여름은 본래 무덥다는 것이지만 그해는 각별히 더 무더웠습니다. 다 벗고 팬츠만 입고 앉았어도 그저 땀이 죽죽 흘러내렸습니다. 혹은 내 심리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수험생의 참혹한 살림을 뼈에 저리게 느꼈습니다. 시험이란 것에 몰려 미처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지내는 내 모습을 사냥꾼에게 쫓겨나는 짐승의 얼굴 같을 거라고 일기에 썼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그때의 무더운 여름이 있고는 금년 무더위가 일생에 처음입니다. 그러고 보면 금년 무더위도 내 심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일기가 무더워지기 전에 마음이 벌써 무더위에 눌려 있습니다.
집 생각도 별로 나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도 내가 인정이 무딘것 같지는 않은데 이날껏 어디를 가나 집 생각이 나서 못견디었다는 일은 없습니다. 남의 손의 밥을 먹어본 것이 열네 살 때부터인데 그때부터 그렇습니다. 평양에 나간 것이 열여섯 때인에 한 하숙에 있는 동무가 중학생이라면서 집 생각 난다고 눈물 짜는 것을 보고 사람답지 않게 생각했던 기억 지금도 있습니다. 입학시험 준비때문인 것이 주되는 이유지만 내 천성인 점도 있는 듯합니다. 나는 지금도 어디를 가도 잘 자고 무엇을 만나도 잘 먹습니다. 나 스스로 타고난 민주주의라고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 집안에서 배운점도 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버지 어머니도, 또 우리 형제자매끼리도 인정은 깊으면서도 대범합니다. 우리는 감상주의도 냉정주의도 모릅니다.
한여름이 다 가고 9월 초하루가 됐습니다. 그동안에 채목사는 다른 데로 이사를 갔고 명선생은 본국으로 나갔고 재억 씨는 자기 다니는 삽곡농대 부근으로 임시로 나가 있게 됐고 나 혼자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가을 학기부터는 정말 본격적으로 해야겠지만 아직 준비 학교들이 개학도 아니했으므로 그날 아침을 먹고는 탕도에 있는 함덕일 형제를 오랜만에 만나보러 나갔습니다. 함덕일은 내가 평고 있을 때 하숙을 하고 있던 주인입니다. 나이는 나보다 수년 아래고 동생 순일이와 함께 홀어머니를 모시고 경창리에 살고 있었는데 그 집에 하숙을 하게 되어 알게 되었습니다. 그 경창리 5번지가 내게는 잊지 못할 곳입니다. 나는 그때 상급생이라 해서 우리 같은 고향의 여러 친구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3.1 운동 만세를 부르려 할 때 그때 청년 지휘의 책임자였던 석은형의 명령을 따라 평고 대표들을 모아 첫 의논을 한 곳도 이 집이요, 숭실전문 지하실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가져다 두었던 곳도 이집이요, 덕일소학교에서 공부할 때 배웠던 지식을 살려 태극기를 내손으로 목판에 새겨 밤새 찍어냈던 곳도 이 집입니다.
그 집이 만일 지금까지 그냥 있다면 이제라도 가면 태극기를 다 찍고서 감추어두었던 그 목판이 들어 있는 그 지붕 날개를 들치고 이제라도 찾아낼 자신이 있습니다. 55년이 꿈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때 물불을 모르고 그저 신이 나서 그 태극기를 찍고 이튿날 3월 1일 맡은 자리인 평양경찰서 앞 거리에 그것을 뿌리고 해가 넘어가 어둡도록 만세를 부르고 달리다가 일본 군대의 군화에 짓밟혀 넘어지면서도 마음이 조금도 죽을 줄 모르던 그때에 내 말년이 이럴 줄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이제 덕일이도 죽었고 순일이도 죽었고 석은 형이 간 지도 46년이 됩니다. 그는 평양서 활동을 하다가 경찰이 잡으려고 해서 한때 친구가 경영하는 관 앞 서경병원에 피신해 있다가 형사대의 습격을 받아 창문을 넘어 도망해서 만주로 갔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수비대의 습격을 받아 두 번씩이나 총상을 입었고, 이름도 모를 중국 농부의 헌신적으로 하는 간호를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농부는 알지도 못하는 외국의 죽게 된 독립투사를 5리도 넘는 산중에 업어다가 토굴을 파고 숨겨두고는 날마다 먹여서 살려냈습니다. 그러나 종시 일본군에 잡혀 신의주로 끌려나와 여러 해 징역을 하고 나왔으나 그 옥중에서 얻은 폐병으로 마침내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것이 내가 오산에 부임하던 1928년의 일입니다. 아직 서경병원에 있을 때 찾아가니 걱정도 아니하고 쾌활한 얼굴로 친구되는 의사보고 웃으면서 포도주 한 잔만 만들어내라 하던 그 얼굴 그 음성을 내가 지금도 기억하는데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 그 투쟁하던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만 것이 유감입니다.
그가 평양에서 만주로 가려 할 때 변명을 하려 하자 아버지되는 일형 아저씨가 성재천이라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모사재인이요 성사재천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사재천 옳은 말입니다. 그러나 하늘이 어째서 이렇습니까? 나도 이사야처럼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역시 오늘도, "성읍들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그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실까요? 그렇습니다. 함석은은 지금도 성사재천을 믿고 재천을 성취해 가지고 있습니다. 탕도는 내가 아직 어렸을 때 그 석은 형이 그의 일본 유학하는것을 하늘같이 알고 있을 때에 그가 메이지대학을 다니며 하숙하고 있는 곳입니다. 나는 그 이름을 그때부터 들어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 탕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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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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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備無患(유비무환)
有(있을 유) 備(갖출 비) 無(없을 무) 患(근심 환)
춘추좌전 양공(襄公) 11년조의 이야기. 기원전 641년, 진(晋)나라 도공(悼公)은 11개 동맹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정(鄭)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당시 약소국으로서 맹주(盟主)인 진나라 덕분에 전란을 피할 수 있었다. 정나라는 악사, 전차, 가녀(歌女)와 많은 악기를 감사의 예물을 진나라에 보냈다. 진나라 도공은 이를 받고 대단히 기분이 좋아 예물의 반을 대신 위강(魏絳)에게 주었다. 그러나 위강은 이를 사양하며 말했다. 이렇게 화평하게 된 것은 우리 국가의 복이옵고, 8년간에 제후들을 아홉 차례나 화합시키어 제후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 것은 군주의 덕택입니다. 신에게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길, 편안히 있으며 위태로움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잘 생각하면 대비가 있게 되고, 대비가 있으면 걱정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신은 이것을 규범으로 삼으시도록 아룁니다
有備無患 이란 미리 준비해 두면 걱정이 없음 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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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무환(有備無患) / 준비가 있으면 근심할 것이 없음. 《出典》'書經' 說命
'열명(說命)'은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이란 어진 재상을 얻게 되는 경위와 부열의 어진 정사에 대한 의견과 그 의견을 실천하게 하는 내용을 기록한 글인데, 이 '有備無患'이란 말은 부열이 고종 임금에게 한 말 가운데 들어 있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각이 옳으면 이를 행동으로 옮기되 그 옮기는 것을 시기에 맞게 하십시오. 그 능(能)한 것을 자랑하게 되면 그 공(功)을 잃게 됩니다. 오직 모든 일은 다 그 갖춘 것이 있는 법이니 갖춘 것이 있어야만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處善以動 動有厥時 矜其能 喪厥功 惟事事 及其有備 有備無患.
또,《春秋左氏傳》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진나라 도승이 정나라에서 보낸 값진 보물과 가희(佳姬)들을 화친(和親)의 선물로 보내 오자 이것들을 위강에게 보냈다. 그러자 위강은 완강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하여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입니다."
居安思危 思危 則有備 有備則無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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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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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우편 배달부의 성 - 김치수 (문학평론가)
얼마 전,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 한 분이 프랑스에 다녀왔다. 나는 선배의 독특한 안목에 대해 깊이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프랑스 여행담을 기대했다. 사실 선배는 많은 것을 보고 왔다. 떼아뜨르 프랑세즈의 관람이니, 샹송이니, 프랑스인의 생활이니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킨 이야기는 다른 것이었다.
선배는 어느 날 한 마을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큰 성곽이 있었다. 그처럼 조그마한 마을에 큰 성곽이 있는 것이 이상스러워 가까이 가보았더니 거기에는 우편 배달부의 성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19세기 말엽에 이 마을에는 한 우편 배달부가 있었다. 그의 소원은 자기도 귀족처럼 큰 성을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편 배달부로서 그는 그런 성을 가질 만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 자신이 우편물을 배달하러 다니는 동안에 그곳에서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하루에 두세 개도 모으고 많은 날은 십여 개도 모으는 일을 그는 우편 배달부 생활 40년 동안 계속했다. 그랬더니 그 돌이 하나의 성을 쌓을 만큼 많아졌고, 그리하여 그 우편 배달부는 직장에서 퇴직을 하고 퇴직금으로 그 성을 쌓았다.'
그는 그의 꿈을 40년 만에 이루었으며, 여생을 그곳에서 편안하게 보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에선, 이 우편 배달부야말로 오늘의 프랑스를 있게 한 프랑스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준 사람이라 하여 오늘날까지 그 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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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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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 장 피에르 모르
제7장 :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제 그의 우선적 관심사는 자신에 대한 카치니와 로리니의 공격은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재판관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이 일에 크게 집착했다. 첫째, 그는 15년 전의 조르다노 브루노처럼 장작더미 위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개인적으로 무죄임을 인정받을 때에야 그의 진정한 목적인 과학을 옹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목표를 재빨리 달성했다. '비둘기들'이 일으킨 스캔들이 교회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목적을 달성한 이상, 재판관들은 확실치 않은 고소를 고집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갈릴레오를 인정하여 주었다. 그에게 대항하는 개인적인 모든 시도가 중단되었다.
고립무원의 갈릴레오
이제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이 성서의 가르침과 양립될 수 있다는 것을 교회에 증명하는 투쟁을 하기를 원했다. 그는 두 달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일에 전념했다. 그는 열정과 달변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쉽게 설득시켰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벨라르미네와 한번 알현을 하는 일도 불가능했다. 갈릴레오는 편지로 고와 요직에 있는 네 명의 추기경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써보냈다. 호의적인 대답도, 적대적인 대답도 전혀 없었다. 이미 반쯤은 설득시켰다고 여겼던 로마 대학의 예수회 사제들도 점점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반대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정식 명령을 교구장에게 받고 있었음이 훗날 밝혀진다.
갈릴레오의 친구들은 또 그들대로 무력감을 체험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절망하여 오르시니 추기경이 개입해 주도록 권하는 사적인 편지를 보내 달라고 코시모 데 메디치에게 요청했다. 코시모는 즉각적으로 편지를 띄었고 추기경은 교황과의 알현을 주선했지만, 교황은 갈릴레오가 포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가 끝내 고집하면 사건이 종교재판소로 넘어 갈 것이라고. 1616년 2월 26일 드리어 벨라르미네와 알현할 수 있다는 허락을 얻어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알현에 나갔으나, 켈라르미네는 도미니쿠스회 수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으며, 전날 이미 결정이 내려졌노라는 답변이 있었다. 종교재판소가 판결을 보내왔다. 그것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사상은 철학적으로 어리석고 부조리하며 형식적으로 이단이다. 이러한 사상은 명백히 성서의 교리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인정할 수 없는 패배
교황의 명령과 함께 전달된 판결문은, 그가 감금형을 받게 되었다는 것과, 어떤 방법으로든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를 금지한다는 내용도 담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적들을 한번 만나보지도 못한 채 전투에서 패배했다.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사형선고를 내린 종교인 중 갈릴레오의 책을 읽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와는 상관없는 서론만을 그나마 대강 훑어 보았을 뿐이었다. 판결문은 사제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마다 낭독되었고 모든 대학에 통보되었다. 전유럽의 종교재판소는 서점에서 코페르니쿠스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책을 압수했다.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돈다는 것을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까지는 아직도 2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다. 정확히 그것은 1822년의 일이었다. 크게 낙심한 갈릴레오는 그후 2년 동안 자주 병을 앓았으며, 실제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는 1618년 다시 등장했다. 그해에는 해성이 세 개 발견되었고, 늘 그랬듯이 논쟁이 따랐다. 갈릴레오는 (시험자)라는 책으로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이 갈릴레오가 출판한 책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는 것이다.
(시험자)의 출판과 때를 같이하여 교황이 사망했다. 후임자는 우르바누스 8세, 물에 뜨는 물체 사건 이후 갈릴레오와 친구가 되었던 바르베르니 추기경이었다. 갈릴레오는 (시험자)를 그에게 헌증했고, 1624년 다시 로마로 갔다. 새 교황은 그를 환대했고, 프롤레마이오스의 사상과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가능한 이론으로 소개하는 책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리하여 4년의 집필기간 동안 교황에게 몇장을 보내 심사를 받아가며 완성한 것이 (두 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이다. 이책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변호하는 살비아티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사상을 옹호하는 심플리치오, 이해력과 분별력을 갖춘 사그레도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철회맹세, 그러나 영원한 영광
1632년 책이 출판되었다. 유럽 전체가 일찍이 어떠한 과학서적도 받아본 적이 없는 열광적인 반응으로 이 책을 환영했다. 물론 갈릴레오는 표면적으로는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이 옳거나, 혹은 그것을 변호하는 살비아티가 그의 적 심플리치오보다 더 훌륭하게 논쟁을 이끈다 해도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다. 불행히도 교황의 측근들은 갈릴레오가 그를 조롱하고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기 위해 이 책을 썼으며, 멍청한 심플리치오는 실상 교황 자신이라고 설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고발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갈릴레오의 처지에서 교황을 조롱한다는 것은 미친 짓일 뿐 아니라, 더욱이 교황은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황은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격노했다. 이제 69세가 되어 건강상태가 대단히 나빴던 갈릴레오는 로마로 소환되어 고문의 위협을 받았다. 또한 그는 혼자였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로마의 친구들도 죽었거나 교황이 두려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1633년 6월 22일, 도미니쿠스회 사령부인 미네르바 동산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서 이 노인은 죄수복을 입고 판사들과 사제들의 무리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사상이 그릇되었다고 선언하는 글을 낭독해야 했다. 종신 감옥형이 선고되었으나, 그는 1년 만에 풀려났고 피렌체 근처 아르체티에 있는 자기 집에 살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허락 없이는 집을 떠날 수도 없었고, 감시자가 배석하지 않고는 중요한 방문객을 만날 수도 없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그는 말년에 무엇을 했을까? 그는 이미 파두아에서 쓰기로 계획했던 역학에 관한 위대한 책을 쓰게 되었다. (두 가지 새로운 학문에 관한 대화)라는 이 책은 현대 역학을 탄생시켰다. 갈릴레오는 이 책을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출판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이 책은 비밀리에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다. 1638년, 죽기 4년 전에 불굴의 정신을 가진 이 노인은 자가 출판되었으며, 전유럽에서 읽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과 자신의 승리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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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친절을 팝니다.
미국 피츠버그에 비가 내렸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가구점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여기저기 살피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 할머니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한 가구점 주인이 할머니에게 다가갔습니다.
"할머니, 이쪽으로 오세요. 비도 많이 내리는데 가게 안으로 들어오세요."
"나는 가구를 사러 온 것이 아니라 차를 기다리고 있어요. 괜찮습니다."
"물건을 안 사셔도 좋습니다. 그냥 편히 앉아서 구경하고 계세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할머니는 가구점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아서 차를 기다렸습니다.
"참, 차를 기다린다고 하셨지요. 차 번호가 어떻게 되죠? 제가 확인해 드릴게요."
"아유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괜찮습니다. 차 번호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차 번호를 알아서는 몇 번이고 밖에 나가 차가 왔는가를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지켜본 주위사람들은 그를 비웃었습니다.
"저 친구 할 일도 되게 없군. 그렇게 할 일이 없으면 차라리 낮잠이라도 자든가 하지."
"글쎄 말이야. 손님 끌어들일 궁리는 안 하고 처음 보는 할머니 뒤치다꺼리만 하고 있네."
그러나 그는 차가 올 때까지 미소를 잃지 않고 그 할머니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머니!"
"고마웠어요, 젊은이!"
그런데 며칠 후 그는 미국의 대재벌이자 강철왕인 카네기로부터 깜짝 놀란 편지를 받았습니다.
'비오는 날 저의 어머님께 베풀어 주신 당신의 친절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부터 우리 회사에 필요한 가구 일체를 당신에게 의뢰하며 또한 고향 스코틀랜드에 큰 집을 짓게 될 참인데 그곳에 필요한 가구도 모두 당신께 의뢰합니다. (카네기)'
작은 친절로 인해 결국 어마어마한 소득을 얻게 된 그는 피츠버그에서 가구점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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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요놈을 워떻게 돌려야 쓴당가
어쨌든 처음 납품한 장비들이 대충 돌아갈 만해지자 S사에서는 다시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그 무렵 S사에서 사용하던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는 모두 일보 히다치 사의 제품이었다. 전세계적으로 메모리 반도체 모양이 바뀌고 있던 시점이라 S사는 현재 사용하고 있던 핸들러들의 개조를 히다치측에 요청했다. 당시의 반도체 규격은 DIP타입에서 SOJ타입으로 변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자면 부착 후에 다시 마무리를 해주어야 하는 뾰족한 다리에서 별다른 마무리가 필요 없는 둥근 다리로 바뀐 것이다. 단지 다리 모양만 바뀌었을 뿐이니 반도체 접속레일과 소켓의 형태 등과 같은 간단한 몇 가지 장치를 손보면 기존의 기계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다치에서는 S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내용이야 어쨌건 그들로서는 새 물건을 팔아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화가 난 S사에서는 히다치에서 새로 구입한 최신형 'DIP타입 16병렬 테스트 핸들러' 여섯 대를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비행기에 실어 일본의 본사로 보냈다. 히다치쪽에서도 지지 않았다. 그들 역시 포장을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반송해버렸던 것이다. 기업간의 자존심 싸움이자 국가간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오기가 생긴 S사에서는 우리를 찾았다.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는 신출내기라 하더라도 국내에서 SDNFL가 핸들러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새 규격의 SOJ 반도체를 핸드링할 수 있도록 기존의 DIP 장비를 개조해 달라고 요청했다. 성공만 한다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DIP 장비의 개조권한을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우리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들은 미국의 핸들러 메이커 심텍에 같은 조건, 같은 내용의 의뢰를 했다. 그러나 우리가 열심히 개발에 착수하는 동안 심텍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한국의 미래산업이라는 듣도보도 못한 회사에서 핸들러 개조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니 당연히 못 해내리라 판단했던 것이다. 우리가 핸들러 개조에 실패하면 S사의 새로운 주문무량은 의당 자기네를 향하리라고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S사와 히다치는 이번 일로 해서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히다치의 핸들러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처음에 주먹구구로 만들었던 핸들러 따위는 실로 장난감에 불과했다. 함부로 개조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니었다. 특히 컨트롤러 부분은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논리구조가 일본어에 적합하게 구성되었을 뿐 아니라, 그냥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프로그래밍 소스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본사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우리는 결국 변칙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의 컨트룰러에 우리가 만든 보조 컨트롤러를 하나 더 부착해버린 것이다. 변경된 규격에 따른 제어만을 전담하는 별도의 두뇌를 만들어 붙이고 검사소켓의 기계적인 구조를 뜯어고치니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S사의 핸들러를 모두 개조했다. 우리의 핸들러 기술을 한 차원 높이는 계기가 되었을 뿐더러, 수입도 적지 않았다. 아직 미래산업의 재무구조는 형편없었지만, 매거진도 계속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런 일거리들도 끊이지 않아 그 즈음에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급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는 겁 없이 또 다른 모험을 준비했다. 미래산업의 상표를 붙인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를 개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나는 다시 S사를 찾아가서 우리가 작성한 설계도면을 보여주며 개발계발을 설명했다. 그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성공만 한다면 기본적인 판로는 보장된 셈이었다. 그 대신 우리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6개월 안에 틀림없이 핸들러를 만들어 올 테니, 핸들러를 한 대만 우리한테 빌려 라라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까지만 해도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의 내부구조를 직접 본 적도 없는 우리들이었다. 그들은 순순히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느 정도 우리를 신뢰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번에는 일본 어드벤테스트의 최신모델인 '16병렬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였다. 잔뜩 호기를 부려 겁 없이 실어오기는 했지만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전라도 출신의 한 엔지니어는 핸들러를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최 요놈을 워떻게 돌려야 쓴당가?"
옆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포복절도했지만, 사실 한심스러운 건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구조를 파악하는 건 둘째치고 제대로 작동시키는 법조차 몰랐기 때문이다. 핸들러가 도무지 어떻게 움직이는 건지도 모른 채 무턱대고 뜯어보기부터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S사쪽에다 대고 도움을 요청할 계제를 아니었다. 핸들러를 개발하겠다는 사람들이 그런 부탁을 한다면 그들이 얼마나 어이없게 생각하겠는가 말이다.
결국 내가 움직일 차례였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부탁해서 다른 반도체 업체의 핸들러 기사 한 명을 간신히 소개받았다. 풍전기공 시절에도 한 번 해본 적 있는 일이었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후한 보수를 약속하고 퇴근 후 시간을 빌리기로 했다. 퇴근시간만 되면 나는 부랴부랴 차를 몰고 그쪽 공장으로 가서 그를 태우고 곧장 우리 공장으로 돌아왔다. 밤새 가르침(?)이 끝나면 나는 또 부랴부랴 그를 태우고 출근을 시켜주었다. 나도 힘들었지만 그 사람도 어지간히 고된 일정이었다. 당시 이런 일거리들은 대개 내 차지였다. 기업간의 자존심 싸움이자 국가간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다. 결국 오기가 생긴 S사에서는 우리를 찾았다. 실력이 아무리 형편없는 신출내기가 하더라도 국내에서 우리가 핸들러 분야의 선두주자였던 것만은 분명했다. 급한 고비를 넘기자 우리는 겁 없이 또 다른 모임을 준비했다. 미래산업의 상표를 붙인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를 개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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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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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장수
비 오는 날이면 수첩에 적어두었던 여배우 이름을 읽어보면서 예전에 보았던 영화장면을 회상하는 버릇이 있다. 지금도 때로는 미술관 안내서와 음악회 프로그램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지도를 펴놓고 여행하던 곳을 찾아서 본다. 물론 묶어두었던 편지들을 읽어도 보고 책갈피에 끼어 둔 사진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30 년 전이 조금 아까 같을 때가 있다. 나의 시선이 일순간에 수천 수만 광년밖에 있는 별에 갈 수 있듯이, 기억은 수십년 전 한 초점에 도달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와 그 별 사이에는 희박하여져 가는 공기와 멀고 먼 진공이 있을 뿐이요, 30 년 전과 지금 사이에는 변화 곡절이 무상하고 농도 진한 '생활'이라는 것이 있다. 이 생활 역사를 한 페이지 읽어보면 일년이라는 세월은 긴긴 세월이요, 하룻밤, 아니오 분에도 별별 사건이 다 생기는 것이다.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를 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 같다. 그리고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그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다. 우리가 제한된 생리적 수명을 가지고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사는 방법은 아름다운 인연을 많이 맺으며 나날이 적고 착한 일을 하고, 때로 살아온 자기 과거를 다시 사는 데 있는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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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18. 명상
<모든 걸 받들라. "큰"것 "작은"것이 따로 없으니, 모두가 거룩하다>
웬만큼 수행했다는 한 제자가 큰 스승을 찾았다. 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제자는 신발을 벗고 그 옆에 우산을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인사를 올리자 스승이 물었다. 어째서 신발 옆에 우산을 놓았느냐고.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이냐? 스승이라면 신이나 쿤달리니 현상이나 챠크라가 열리는 것, 머리에서 빛이 번쩍번쩍하는 일같은 것을 물어야 하지 않느냐고 그대는 아마 생각할 것이다. 한데 이 스승은 아주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것을 물었다. 신발과 우산 따위가 영성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나 이 하찮은 질문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제자는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승이 일렀다.
<돌아가서 칠 년 더 공부해라>
<이 조그만 실수 때문에요?>
<실수엔 크고 작은 게 없는 것. 그댄 아직 멀었느니, 그게 전부다>
차별을 두지 말라.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아주아주 영적이니. 받들고 깊이 보라. 모든 게 영적이리니. 받들지 않고 깊이 보지 않으면 모든 게 또한 비영적이리니. 영성은 그대가 부어주는 것. 세상 만물에 주는 그대의 선물. 아무리 하찮은 우산이라 해도 스승이 눈길 한번 주면 무엇 못지 않게 거룩해진다. 명상의 힘은 마력이어서 아주 하찮은 것을 고귀한 것으로 변화시킨다. 명상적이어라. 궁극엔 모든 것이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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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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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마트라 산의 너도밤나무 숲.]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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