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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98호
2020.6.15. (음 4.24. - 윤)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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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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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기를 가시게 하면 모두 다 좋은 음식. ― 중국 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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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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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영역
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어려웠다’는 국어 문제 45문항을 훑어보았다. 수험생 시절로 돌아가 보려 했던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까다로운 지문의 양이 꽤 많아서 멀미가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서술어의 자릿수’를 다룬 문제는 낯설었다. 우리말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문장 성분의 수’를 굳이 따져야 하나 싶은 생각이 따라왔다. 쉽게 넘길 수 있으리라 예상했던 맞춤법 문제는 만만하지 않았다.
한글 맞춤법에 맞게 쓰인 것은? ①‘엇저녁’에는 고향 친구들과 만나서…, ②…안건은 다음 회의에 ‘부치기로’ 했다, ③‘적쟎은’ 사람들이 그 의견에…, ④…‘깍뚜기’를 먹어 보았다, ⑤저기 ‘넙적하게’ 생긴 바위가…. ‘어제(의)저녁’의 준말은 ‘엊저녁’, ‘적은 수나 양이 아닌’ 뜻의 표기는 ‘적잖은’, 무를 ‘깍둑썰기’로 다듬어 담근 김치는 ‘깍두기’, ‘편편하고 얇으면서 꽤 넓은’ 것은 ‘넓적-’이다. ‘넙적하다’는 ‘넙죽하다’와 같은 말이다. 안건을 회의에 ‘부치다’는 맞춤법에 맞는 표현으로 정답은 ②번이다. ‘부치다’의 뜻과 쓰임은 여럿이다. 편지를 부쳤다, 안건을 회의에 부친다, 편집장이 창간호에 부치는 글, 토론 결과를 비밀에 부치다, 빈대떡을 부쳐 먹다, 실력이 부친다(모자라거나 미치지 못한다), 부채를 부쳐라… 등 이다.
오래전 서울대 본고사 문제가 생각난다. 한자 ‘樂’의 음과 뜻을 쓰라, 이런 문제였다.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수준이었지만 당황한 수험생이 많아서 화제가 된 것이다. 덕분에 웬만한 일반인들도 ‘즐길 락, 노래 악, 좋아할 요’를 한동안 읊고 다니던 때의 기억이다. 이번 국어 영역 문제에 ‘모둠’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초·중등학교에서, 효율적인 학습을 위하여 학생들을 작은 규모로 묶은 모임’을 이르는 말이다. 기성세대에겐 생소한 표현이다. 사전은 ‘교육’에 한정해 풀이했지만 사회 일반에서 두루 쓸 수 있는 용어다. 시험은 평가 도구이지만, 습득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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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행각
프랑스 파리는 흡연에 관대했다. 실내는 금연이지만 문밖은 천지가 흡연구역이었다. 유모차 밀고 가면서, 횡단보도 건너면서, 유적지에 들어가려 줄 서 있으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파리의 풍경이 부럽다는 이를 만났다. 어렵게 찾은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우노라면 죄인 보듯이 인상 찌푸리고 손사래 치는 사람이 많은 우리 현실에 빗대어 말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 없는 우리 사회’를 두고 볼멘소리 하던 그가 ‘애정 행각도 흡연처럼 단속해야 한다’며 말을 돌렸다. 공공장소의 ‘애정 행각’이 눈살 찌푸리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애정 행각’은 무엇일까.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불쾌한 경험을 했다. 남녀 커플이 서슴없이 애정행각을 벌인 것’(ㄷ일보), ‘우리 결혼했어요, 닭살 행각의 결정판’(ㅅ일보), ‘전 검찰총장, 성추행 피소. 대담 행각’(ㅈ일보)…. 신문 기사에 등장한 ‘행각’의 쓰임이다. 인터넷 연관검색어인 ‘공공장소(공원/10대/S대/…) 애정행각’, ‘애정행각 대학생(교사/버스/경찰/…)’에서 ‘행각’은 ‘과도한 애정 행위’와 한뜻으로 쓰이고 있다.
‘행각’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여) 어떤 목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님’이다.(표준국어대사전) 구걸 행각, 도피 행각, 애정 행각은 ‘행위’보다는 ‘돌아다니는(다닐 行, 다리 脚) 것’에 무게가 실린 표현이다. ‘엘리베이터, 녹화 현장, 도우미 숙소’처럼 한 장소에서 하는 행위는 ‘행각’이 아닌 것이다. ‘전국 유세 행각 이범석 씨’(ㄷ일보, 1956년), ‘친일 1호 김인승 묻힌 행각 드러나’(한겨레, 1996년)에서 보듯 옛날 기사 속 ‘행각’은 제 뜻을 담고 있다. ‘11년간 31차례 강도 행각 30대’(ㄱ신문), ‘농촌 빈집 찾아다니며 절도 행각’(ㅇ경제신문), ‘복무이탈 수배 중 절도행각 공익요원 구속’(ㄴ통신) 따위는 ‘행각’의 뜻을 제대로 쓴 뉴스의 보기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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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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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만한 지나침 -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 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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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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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2부
내가 겪은 관동대지진
그 50돌에 1923년 9월 1일 일본의 동경,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일대에 큰 지진이 일어났던 일이 있습니다. 본래 일본은 지진이 많은 나라이어서 평상시에도 집이 흔들흔들 울는 정도의 것은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있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일본역사에서도 드물게 보는 큰 것이어서, 또 큰 지진에는 으레 그런법이라지만, 곳곳에서 일시에 불이 일어나서, 사람이 여러 십만이 죽고 상하고, 집이 무너지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물자가 타버리고, 당시에 직경이 6,70리는 됐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시의 하나였던 대동경시가 하룻밤 새에 그 3분의 2가 잿더미가 돼버렸습니다. 일본에서 그 지방을 관동지방이라 부르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은 이 끔찍했던 사건을 흔히 관동대진재라 합니다마는, 한때 일본은 이 관동대지진으로 나라 터가 흔들렸다는 말까지 나돌았을이만큼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이것은 인류가 당했던 재난 중 가장 큰 것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것이 이웃의 불만이 아니였습니다. 우리 자신이 살과 뼈와 피와 부르짖음으로 빠져들어 같이 당했던 재난이요, 더구나 일본 사람에게는 그것이 하나의 천재지변이었는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것이 단순한 자연의 불행만이 아니라 인간의 악을 겸해서까지 받은 것이기 때문에 더 지독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일본 군국주의에 나라가 먹히고 총독정치 밑에 압박과 업신여김을 받은 지 13년이 되던 때입니다. 나라 생각은 터럭만큼도 없는 지배자의 학정에 수백년 지쳐 모든 참된 의욕을 잃고 고식주의 운명론의 종이 되어 곤한 잠을 자던 씨알이 나라가 팔려 넘어가는 줄은 알지도 못했다가 사슬이 목에 감긴 다음에야 겨우 알아차리고 몸부림을 시작했고, 그러기를 아홉 해 하다가 세계대전 후 부는 새 바람을 맞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가다듬어 3.1운동을 일으켜 세계 인류의 정의감에 호소하여 잃었던 주권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실패로 돌아가고 말자, 낙심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차분히 실력을 기르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산업에 힘을 쓰고 교육에 역중하는 풍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원해서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일본과의 관계가 생활을 통해 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쯤 해서는 동경에 유학하는 우리나라 학생도 상당히 많았고 그 시외 변자리로는 날품팔이로 비참한 살림을 해가는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사람 중에도 그 지진 화재로 희생이 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불행은 거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진이 나자 일본 사람들은 난데없이 조선 사람들이 난동을 꾸민다고 풍설을 돌려가지고는 우리 사람을 닥치는 대로 마구 죽여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소위 조선인 학살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잊지 못할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내가 인간의 악까지를 겸해서 받은 재난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금년 9월 초하루는 바로 그 50돌이 되는 날입니다. 나는 그때 그 동경에서 그것을 몸으로 겪고 살아난 사람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것을 한번 돌이켜 되새겨보자는 것입니다.
일본 유학의 설움
그해 3월 나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만리타국으로 유학을 간다" 고 했습니다. 오늘날 외국유학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거기 깊은 설움이 있었습니다. 물론 생각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서 뜻을 찾자는 마음에는 그것은 슬플지언정 그저 단순히 성공의 층층대를 올라가는 것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나는 1962년 미국 국무성 초청 케이스로 시찰 여행을 갔으면서도 미국 사람들보고 "나는 너희 나라에 전쟁 포로로 왔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문명의 경쟁장에서 그들에게 지지 않았던들 내가 미국 구경이랍시고 엉금엉금 갔을 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그렇지만 이때에 일본 유학이야말로 정말 전쟁 포로로 잡혀가는 일입니다. 좋아서 간다기보다 할 수 없이 잡혀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젖이 떨어지자부터 제 나라 말이 아니고 외국말로, 그나마도 착한 이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강도질한 원수의 말로, 강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이었던가? 오늘 사람들의 마음이 크게 넓어져서 그럴까요? 골목마다 일본어 강습소가 들어섭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옛날은 효자는 그 부모의 손때가 묻은 것은 몇 해 동안은 차마 만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한다면 저 일본말이 제아비가 어린아이 때부터 학대를 받아가며 강제로 시킴을 받던 말인것을 생각해서라도 차마 그것을 못하면 사람이 아닌 것같이 미쳐돌아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더러 마음이 좁다 마십시오, 나는 '일본놈' '왜놈' 하는 말은 한 번도 해본 일이 없습니다. 세계의 입이 우리를 가리켜 일본의 돈닢을 보고 스스로 제 몸을 팔러 기어들어가는 갈보라고 하도 흉을 보니 하는 말입니다. 생각이 바른 이는 어떻게 말을 하나 보십시오. 내 존경하는 일본인 선생에 쓰카모토라는 분이 있습니다. 해방 직후 오산출신 후배 한 사람이 동경 유학을 하며 그의 성서연구 집회에 다닌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일요일 그 모임에서 선생이 그더러 성서 낭독을 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 시키는 대로 낭독을 했는데, 아마 발음이 좋게 잘했던 모양입니다. 선생은 듣고 나서 "외국말을 외국말인 줄 모를이만큼 잘하는 것은 수치야요" 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칭찬으로 하는 농담이지만 거기 콕 찌르는 것이 있는 무서운 말입니다.
그것을 그때 우리 유학생들이 일반으로 흔히 그랬던 것같이, 발음이 일본 사람과 꼭 같다고만 하면 기뻐하고 슬그머니 뽐내려 들던 것과 대조한다면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나는 그때 이름은 중학 졸업이라 하지만 나이는 스물셋입니다. 제대로라면 대학을 졸업하고 교수 될 나이입니다. 내 학교가 늦은 데도 우리 역사의 작용이 있습니다. 나는 한국 시대에 나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합병 후 다시 공립 보통학교를 다녀서 졸업을 했고, 그 다음 중학 교육은 먼저 관립학교에 들어가서 받다가 3.1운동 때 버리고 나와서는 몇 해를 놀다가 다시 오산을 다녀서 졸업을 했습니다. 그러노라니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늦은 것은 부끄럽지만 생각을 좀 할 수 있었으니 고마운 일이요, 더구나 소학, 중학을 다 사립, 관립을 겸해 다녀볼 수 있었다는 것이 크게 다행한 일입니다. 도매금으로 한데 묶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사학에는 자유정신이 있고 관학에는 벼슬아치 버릇이 붙기쉽습니다. 다른 나라는 또 몰라도 우리나라나 일본은 적어도 그렇습니다. 나도 만일 양시공립보통에서 관립 평양고등보통으로만 올라가 졸업을 했다면 대통령 보좌관쯤이나 되고 말았을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시골 상놈의 집에 나서 사립 덕일소학교 물 먹고 사립 오산중학교 물 먹었기 때문에 벼슬은 못 했어도 얼반둥이 일본 사람 됐던 일 없고, 남에게 종살이 아첨질 가르쳐준 일 없습니다.
떠나는 첫 발걸음부터 문제입니다. 집의 부모와 선생께 하직을 하고 나올 때는 '일본' 을 가는 것인데 길에서 관리를 만나면 '내지' 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말이 아니라 국어라고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요해 놓고는 그들이 우리보고 뭐란지 아십니까? '봉야리상' 이라고 했습니다. 멍청이란 말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허허 하고, 원수의 나라를 내지, 원수의 말을 국어라고, 시키는 대로 하며 입을 헤벌리고 걸어다니니, 멍청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참 너무한 짓입니다. 사립 덕택으로 나는 그 수모는 아니 받았습니다. 우리 친구 김교신은 "연락선 갑판을 발 구르며 조선 사람인 것을 알았노라" 고 부르짖은 일이 있습니다마는 그때 일본 유학 간답시고 부산 시모노세키 사이에 왔다갔다하는 연락선을 들락날락하면서 망국민으로서의 설움을 뼈에 못 느낀 놈은 사람이 아닐것입니다. 일본 사람과 꼭 같은 돈을 내고, 하라는 대로 국어를 지지거리고, 내지엘 가노라 해도 대접은 짐승 대접이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혹 이따금은 밸이 있는 사람도 없지 않았습니다. 내 족형 석은이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유학생이 집에 돌아오노라 연락선을 탔는데 거기 조선 나와서 보통학교 선생 노릇하는 사람이 하나 탔더랍니다. 그때 데라우치 총독 시대인데 학교 선생에게도 모두 칼을 채웠었습니다. 이 일본 교사가 일본 안에서는 그런 법이 없으므로 부끄러워서 연락선 안에서는 칼을 감춰두고 있다가 배가 부산에 와 닿게 되니 그때는 슬슬 끄집어내서 차더랍니다. 이 유학생이 그것을 보고 일어서서 배 안의 사람들을 보고 한바탕 연설을 하면서, 이 사람을 보라고, 학교 선생이라면서 칼을 찼으니 아마 이걸 가지고 아이들을 위협을 하는 모양이지요 하며 놀려 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빨개지더라는 것입니다. 아주 망하지는 말라고 이따금은 이런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짐승대접을 받으면서도 짐승처럼 모는 대로 이리 가고 저리 갔습니다.
짐승처럼 가만 있는 것은 또 괜찮은데, 적지 않은 수의 것들이 아주 일본이 다 됐노라고 으스대는 데는 참 질색이었습니다. 가짜 일본종이 진짜 일본종보다 더 고약했습니다. 내 눈으로 당했던 꼴, 사립학교도 교련을 하라고 해서 오산에서도 교련 선생을 구해왔던일이 있습니다. 그래도 일본 사람보다는 나을까 하는 생각에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오고 예비역 소좌로 있다는 이아무개라는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 충무공의 직계손이라고 하는데, 하루는 아침 조회 시간에 단에 올라서더니 하다는 소리가 "천황폐하의 군인이 돼서 전장에 나가서 죽게 되면 '전황폐하 만세' 하고 죽어야 된다" 고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라가 망했기로서 다른 데도 아닌 오산학교 마당에서 감히 그런 소리를 합니까? 치가 떨려 견딜 수가 없어 당장 끌어내리려 했더니 여럿이 말려서 하지는 못하고 말았습니다마는 나는 오늘까지도 그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어쩌면 그런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고 보면 한국에서 났다고 다 한국놈도 아니요, 이충무 소리를 한다고 다 이충무도 아닙니다. 도대체 그놈의 대일본육군사관학교란 무엇입니까? 거기서는 피도 삭고 역사도 변했습니다. 그러니 그 군국일본은 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진과는 상관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모르고는 조선인 학살사건을 알 수 없고, 조선인 학살을 모르고는 관동대지진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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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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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暮途遠(일모도원)
日(해 일) 暮(저물 모) 途(길 도) 遠(멀 원)
사기 오자서(伍子胥) 열전의 이야기. 전국시기, 오사(伍奢)와 비무기(費無忌)는 모두 초평왕(楚平王)의 태자 건(建)의 스승이었는데, 비무기는 계략에 능하고 음흉한 사람이었다. 그는 태자 건의 혼인문제로 태자가 자기에게 보복할까 두려워, 태자에게 충성하는 오사와 오상 등을 죽였다. 오사의 아들인 오자서는 오(吳)나라로 도망하여 복수를 결심했다. 그는 오왕 합려(闔閭)에게 제의하여 초나라의 도성인 영을 공략했다. 이때, 초나라는 평왕의 아들 소왕(昭王)이 왕위에 있었는데, 그는 공격을 피해 도망해 버렸다. 소왕을 놓친 오자서는 대신 초평왕의 무덤에서 그의 시체를 끌어내어 3백번이나 매질을 하였다.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이를 너무 가혹한 짓이라고 그를 꾸짖었다. 오자서는 그에게 말했다.
해는 저물고 갈길은 아직 멀고, 나는 초조한 나머지 도리에 따를 수만은 없었서 그만 도리에 어긋난 일을 하였다네.
日暮途遠 이란 시간은 다 되어가는데 할 일은 아직 많음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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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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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작은 행복 - 문정희
나는 원래 뜨개질 같은 것을 싫어했다. 바늘로 실을 잡아당겼다가 다시 넣고 하는, 똑같은 행위의 끝없는 반복이란 지독히 권태스럽고 비창의적인 일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차라리 그 시간에 독서를 한다든가,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더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가 교사로 있는 학교의 오후는 시끄러우면서도 무료하다. 독서를 하기에는 너무나 산만하다. 그래서 우연히 낮 시간 이용의 한 방법으로 시작해 본 것이 뜨개질이었다. 한 코 한 코를 떠가면서, 지금까지 뜨개질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생각과는 확실히 다른 무엇이 있음을 알았다. 남편의 믿음직한 어깨 넓이를 어림으로 재어 보는 흐뭇함도 컸으며, 또 한 가지는 이 일이 결코 반복이나 비창의적인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완전한 한 가지 철학이 있었다. 한 코만 잘못되어도 전체가 다 풀어져 버리는 질서와 절대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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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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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 장 피에르 모르
제6장 - 함정
피렌체에 정착한 갈릴레오는 네 개의 '천체'를 발견했다. 그러나 이 꽃들에는 가시가, 그것도 독이 있는 가시가 숨겨져 있었다. 1613년은 갈릴레오에 대한 전투의 개시를 알리는 해이기도 했다. 전투는 그다지 놀라운 방식이 아니었고, 첫 번째 공격은 직접 그를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의 하나인 피사의 수학 교수이자 사제인 카스텔리를 향하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적들은 자기들의 상대의 제자가 성공하는 것을 곱게 보아넘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그를 공격하면 갈릴레오까지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카스텔리가 대학에 자리를 잡았을 때 엘치 대학 총장은 코페르니쿠스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이제 그들은 그를 정성 들여 만든 각본 속으로 밀어넣었다.
함정이 점점 갈릴레오의 주변을 둘러싸다.
1613년 3월 코시모 데 메디치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네 대공 부인을 모시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피사대학의 한 교수는 카스텔리 신부에게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성서와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질문을 했다. 대공 부인은 대단히 경건하고 궁전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피사의 교수들은 요긴한 관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베네딕투스회 수사이며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인 카스텔리는 논쟁을 피하지 않고 적들이 대공 부인의 마음에 일으켜놓은 근심을 진정시켰다. 다음날 그는 이 사건을 갈릴레오에게 보고했고, 갈릴레오는 카스텔리를 이 일에 홀로 버려둘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카스텔리에게 편지를 보내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밝히고 그 편지를 복사하여 돌리도록 요청했다.
그리하여 갈릴레오의 적들은 그를 종교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는 계획의 첫 단계에서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이에 스캔들을 일으키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1614년 12월 새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카치니라는 도미니쿠스회 수도사는 "갈릴래아(프랑스어로는 갈릴레오와 동일함:역주)사람들아, 왜 너희는 하늘만을 쳐다보고 있느냐?"라는 성서의 구절을 설교 주제로 선택했다. 말장난(갈릴래아라는 팔레스타인의 한 지역)을 제외하면, 설교는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대한 격렬한 공격이었다. 다음날, 도미니쿠스회의 책임자는 갈릴레오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어 자기 밑에 있는4000명의 수사 중 한 명이 저지른 '짐승 같은 짓'에 책임을 느끼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동시에 카치니 수사는 자기 형에게 '비둘기들'에 입회한 것을 비난하는 편지를 받았다. 비둘기란 오도비코 엘레 콜롬베(비둘기라는 뜻:역주)가 이끄는 교수단을 부르는 용어였다. '비둘기들'이 일격을 날릴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제 또 다른 수호대의 개가 보습을 드러냈다. 1612년에 이미 등장했던 로리니였다. 그는 갈릴레오가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의 복사본 한 부를 손에 넣었다. 그는 그 편지의 여기저기에 수정을 가하여 다시 쓴 다음 종교재판소로 보냈다.
또한 카치니는 스스로 피사의 종교재판관에게 가서 '자기 양심의 부담을 덜기 위해'갈릴레오의 오류, 예를 들면, '갈릴레오주의자'들은 하느님을 우연으로 간주한다는 내용 등에 대해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종교재판관들이 증거를 원한다면 로리니가 보낸, 그리고 변조한 편지를 다시 읽기만 하면 되었다. 또 그들은 여러 증인들-갈릴레오의 동료들과 로리니와 카치니의 친구들-을 심문할 수도 있었다. 이제 기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피사의 종요재판관들은 이같은 고소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들은 서류를 로마의 종교재판소로 넘겼다.
피할 수 없는 로마 교회의 개입
1615년 2월, 로마의 사제 가운데 갈릴레오의 친한 친구 한명이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도 잘 알다시피 항상 당신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벨라르미네 추기경이 어제 저녁 나에게 이문제에 관하여 당신이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가 했던 논쟁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으며 물리학과 수학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는, 좀더 신중한 태도를 보였으면 좋겠다고 다시 이야기 했습니다. 성서의 해석은 신학자들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들의 우두머리는 벨라르미네 추기경이었다. 그는 교회를 교황의 권위에 더욱 일치시킨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트리엔트 공의회와 조르다노 브루노의 재판과 같은 폭퐁우를 통하여 긴 일생을 이미 이 목표에 바쳐왔다(그는 73세였다).1611년 봄부터 갈릴레오에 대한 비림 보고서를 종교재판소에게 요청했던 것도 바로 그였다. 당시 그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로마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사항을 모두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종교재판관들은 카치니, 로리니와 그 일당들이 갈릴레오의 '불경건'에 대해 뱉어내는 증언을 점점 쌓아가고 있었던 반면, 벨라르미네는 이러한 고소의 허위성을 미리 간파하고 있었지만, 훨씬 더 심각한 사항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성서와 코페르니쿠스 이론 사이의 모순이 교회 안에 초래한 위기감이었다. 이러한 논쟁은 80년이나 된 오래된 것이었으나 갈릴레오의 발견과 함께 이 논쟁은 비로소 '위험한' 것이 되었고, 대중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갈릴레오가 교회 안에 뿌린 근심의 씨앗
이러한 모순에 대해 이제 갈릴레오는 공개적으로 말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교회내부에서조차 확실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늙은 클라비우스는 공식적 천문학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1612년 세상을 떠났다. 로마 대학의 그의 후계자도 같은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벨라르미네가 즉시 행동을 결심을 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1615년 3월 나폴리의 신학자, 포스카리니가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가 옳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쓴 책을 받았다. 코페르니쿠스주의자이며 유명한 신학자였던 포스카리니는 벨라르미네에게 자신의 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벨라르미네는 4월 12일 답장을 보냈다. 그는 현상들에 대한 수학적 기술에 그치는 한, 코페르니부스의 이론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말로 편지를 시작해?T다. 그러나 태양이 진정으로 체계의 중심에 있다는 주장은"매우 위험한 태도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분노하게 할 뿐 아니라 성서에 반대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적 건강에 해를 입히는 행동이다."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의 편지는 적들과 그가 말하는 언어가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논의로 끝을 맺고 있다. "'이 땅은 영원히 그대로이다. 해는 떴다 지고.'라고 쓴 사람은 하느님께 직접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다. 그가 증명된, 혹은 증명이 가능한 진리와 상반되는 선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상의 포기인가, 교회의 전쟁인가!
이처럼 벨라르미네는 포스카리니에게,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갈릴레오에게 확실한 선택을 강요했다. 그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평범한 수학적 가설 이상의 것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그들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상 속에 세계의 현실이 있다고 고집한다면 그때는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2000년 전으로 후퇴하여 아테네의 철학자들이 천문학자들에게 불경건이라는 벌로 협박하여 하늘의 현상에 대한 수학적인 기술만으로 만족하도록 강요했던 시기로 돌아가보자. 그때부터 지구와 하늘 사이에 대 분리가 일어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강화했다. 그후 모든 종교는 이러한 분리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2000년간 종교권력은 '하늘과 땅을 섞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망원경을 이용하여 갈릴레오가 새로운 발견을 한 것이다. 달의 산들, 태양의 흑점, 목성의 위성들, 금성의 변화, 이 모든 것이 보였고 교회는 이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하여 천문학자들이 수학적 기술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의 실제적인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한결 더 수월해졌다. 그럴수록 벨라르미네는 더 급해졌다. 포스카리니에게 보낸 그의 편지는 갈릴레오에게 보낸 최후 통첩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가 자신이 관찰한 바에서 결론을 이끌어내기를 즉시 포기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전투에 돌입할 것인가? 그는 물론 성서에 대한 논란에 휘말려드는 일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의 적들은 상황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이제 그는 논란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논란은 교회의 최고위층까지 파급되었다. 갈릴레오는 더 이상 후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교회의 한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나는 유능한 사람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이 현실성이 없는 수학적 현실일 뿐이라고 내가 생각한다고 여기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사상에 가장 충실한 자 중 하나이므로, 사람들은 다른 모든 코페르니쿠스주의자들도 이러한 의견을 공유한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의 이론은 물리적으로 옳다기보다는 오류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갈릴레오는 카돌릭 신자였다. 그는 기독교와 교회를 깊이 존경했다. 이러한 점은 앞으로 시작될 전투의 중요성을 더욱 배가시켰다. 실상 '그의'학문이 금지되는 동시에 '그의'종교가 부당한 금지를 하는 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있었다. 그에게는 학문과 종교 양자가 완벽하게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인 동시에 코페르니쿠스주의자였다. 드디어 그는 로마에 가서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전에 그는 시간을 들여서 자신의 사상을 정성껏 정리하고 성서와 새로운 천문학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글을 썼다. 그는 이러한 글을 대공 부인 크리스티네에게 길게 써보냈다. 그녀는 토스카나 궁정에서 가장 신앙심이 깊은 부인이자, 그에게 큰 호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편지는 20년 후에야 스트라스부르에서 출판된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글의 복사본을 여러 장 유포했다. 어쨌든 그는 로마어로 출판했다.
로마 주재 토스카나 대사는 갈릴레오가 로라에 오는 것을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시모 데 메디치는 갈릴레오를 전적으로 후원했다. 그러므로 대사는 이를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갈릴레오는 로마에 도착하여 대사의 궁전에 체류했다. 이것은 벌써 하나의 성공이었다. 메디치가가 갈릴레오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음을 세인들에게 확인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소송사건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악화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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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제1권
팔이 닿질 않아요.
우체통 앞에서 어린 꼬마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글을 깨우칠 나이가 되었음직한 꼬마는 서툴게 씌어진 편지봉투를 우체통 입구에 넣으려 애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팔이 닿지 않아 끙끙거리고 있는 꼬마의 귀여운 모습을 어른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을 뿐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그런 정겨운 광경을 즐기고 싶었던가 봅니다. 그때 온통 흙먼지를 뒤집어쓴 청소부가 우체통 부근을 지나가다 꼬마를 보고 웃음을 지었습니다. 청소부는 청소를 멈추고 꼬마에게 다가갔습니다. 꼬마는 청소부에게 편지를 내밀었습니다. 대신 넣어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소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습니다. 마침내 꼬마는 울음을 터뜨렸고 청소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꼬마를 가볍게 안았습니다. 청소부가 우체통 가까이로 허리를 숙이자 꼬마가 편지 투입구에 편지를 넣었습니다. 어느새 꼬마는 청소부에게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저 멀리서 한 여인이 급하게 뛰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꼬마의 더러워진 옷을 털며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냥 편지를 받아 넣어 주시지 왜 안아 주셨어요? 좀 보세요. 이렇게 더러워졌잖아요. 새로 산 옷인데."
청소부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편지를 대신 넣어 주었더라면 이 꼬마는 우체통에 다시는 오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편지도 다시는 쓰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는 아이가 직접 편지를 넣을 수 있도록 부인께서 안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결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라. 그러면 그들의 재간으로 그대를 놀라게 할 것이다.
Never tell people 'how' to do thing. Tell them 'what' to do and they will surprise you with their ingenuity. (G. S. 패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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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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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대기업이 살아가는 법
나중에 알아낸 사실이지만, 처음 'MS-3000'의 개발제안서를 내었을 때, S사에서는 우리가 돌아가자마자 구미에 있는 H사에 동일한 조건의 오더를 내렸다. MS-3000'과 같은 종류의 핸들러를 개발해보라는 내용이었다. 여러 군데에 동일한 오더를 주고, 빠르고 싼 쪽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일종의 보험전략이자 대기업의 오래된 습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S사에서는 우리가 일년 동안 연구해서 겨우 마련한, 실로 목숨과도 같은 우리의 개발계획과 세부규격, 설계도면까지 같이 내주었던 것이다. 미래산업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니까 더 좋은 쪽으로 그쪽에서 한번 해보라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알자마자 나는 곧바로 S사 본관 9층에 있는 구매 부로 뛰어갔다. 더 이상 두려울 것도, 당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핸들러고 뭐고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친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나는 사무실로 쳐들어가서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구매부장 어디 있어! 내가 가만두지 않겠어!"
내 눈빛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는 처음에 거칠게 저지하던 직원들도 곧 포기해버렸다. 간부들이 달려와서 나를 끌어다 회의실에 앉혔다.
"정 사장님, 진정하십시오! 여기 일이란 게 워낙에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우리한테 목숨이나 다름없는 걸 제멋대로 빼돌려! 여기 일 안 하면 그만이지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그런 장난을 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자하고는 별일 아닙니다. 그저 다른 각도에서 도움이라도 좀 될까 싶어서..."
웬일인지 그쪽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였다. 내막을 알게 된 담당이사가 이미 담당간부들을 단단히 문책했던 것이다. '건전한 양심을 갖춘 사람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로구나' 하고 생각하니 내 마음도 저절로 풀어졌다. 이미 그렇게 된 일은 할 수 없었고, 최대한 미래산업의 기득권을 인정한다는 선에서 그 민망한 자리는 끝이 났다. 결과적으로 미래산업이 메모리 테스트 핸들러 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별 피해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일로 인해 나는 대기업의 생리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풍전기공 시절에도 금성전기와 거래하면서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 대기업은 늘 이런 식으로 하청업체들을 가볍게 취급했다. 그것은 그 안의 특별한 누가 일부러 의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스런 생리일뿐인 것이다. 나는 지금도 대기업을 자주 들락거린다. '협력업체'의 사장이 해야 할 중요한 업무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사실 대기업 사람들 하는 양을 보자면 기가 막힐 때가 많다. 대기업의 과장이나 부장쯤 되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협력업체 사장들을 아주 내려보는 버릇이 있다. '당신네 회사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이번 인사는 좀 문제 있지 않았어?' 하는 식으로 내정간섭까지 하려든다. 그런 어이없는 충고 앞에서 우리네와 같은 협력업체 사장들은 감지덕지한 표정으로 굽실거리는 수밖에 없다. 협력업체의 생사존망이 오로지 그들의 심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요즘도 대기업의 부장쯤 되는 사람들은 우리 회사로 전화를 한다. 이미 환갑이 넘은 나한테 전화를 해서 온갖 잘난 척을 하며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아저씨뻘 되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실없는 농지거리를 할 수 있는 배포가 도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기업에서 간부노릇 정도 할 사람이면 어려서부터 모범생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일류대'에서 착실한 엘리트 수업을 받아왔을 것이다. 사회에 나와보면 이미 앞서간 그들의 선배들이 든든히 버티고 있으니 겁날 것도 없었을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가서 선배들이 마련해준 길을 또한 착실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사람들이 자기 앞에 와서 벌벌 떨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무서운 줄을, 사람이 무서운 줄을,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미루어 짐작해보면 그들의 거드름과 권위주의는 사회에서 키워준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정리해고라도 당할라치면 한강밖에 갈 곳이 없다는 소리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세상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험난한 세상에 내팽개쳐져도 도대체 무슨 일을 새로 시작할 수 있겠는가.
[웬일인지 그쪽의 태도는 지나칠 정도로 저자세였다. 내막을 알게 된 담당이사가 이미 담당간부들을 단단히 문책했던 것이다. '건전한 양심을 갖춘 사람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로구나' 대기업은 늘 이런 식으로 하청업체들을 가볍게 취급했다. 그것은 그 안의 특별한 누가 일부러 의도해서 그건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땅의 대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자연스런 생리일뿐인 것이다. 미루어 짐작해보며 그들의 거드름과 권위주의는 사회에서 키워준 것이다. 그러니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들인 것이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어쩌다가 정리해고라도 당할라치면 한강밖에 갈곳이 없다는 소리도 그래서 일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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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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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시골 한약국
나는 학생 시절에 병이 나서 어느 시골에 가서 몇달 휴양을 하였다. 그때 내가 유하던 집 할아버지의 권고로 용하다는 한약국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한 제 지어먹은 일이 있었다. 그 의원은 한참 내 맥을 짚어보고는 전신 쇠약이니까 녹용과 삼을 넣은 보약을 먹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자기 약방에는 약재가 없고 약 살 돈도 당장 없다고 하였다. 사실 낡은 약장에는 서랍이 많지 않았고 서랍 하나에 걸려 있는 약저울도 녹이 슬어 있었다. 약국 천장을 쳐다봐도 먼지 앉은 봉지가 십여 개쯤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어째서 내 마음에 그에게 끌렸던지 그 이튿날 나는 그 한의와 같이 4, 50리나 되는 청양이라는 곳에 가서 내 돈으로 나 먹을 약재를 사고 약국을 해먹으려면 꼭 있어야 한다는 약재를 사도록 돈을 주었다.
약의 효험인지, 여름 시냇가에 날마다 낚시질을 다니고 밤이면 곤히 잠을 잔 덕택인지 나는 몸이 건강해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돌려주었던 그 돈은 받았는지 받지 못하였는지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후 셰익스피어의 극 "로미오와 줄리엣" 속에서 로미오가 독약을 사는 약방, 먼지 앉은 병들과 상자들을 벌려 놓은 초라한 약방이 나올 때 비상조차도 없을 충청도 그 시골 약국을 회상하였다.
양복 한 벌 변변한 것을 못해 입고 사들인 책들을 사변통에 다 잃어버리고 그후 오 년 간 애면글면 모은 나의 책은 지금 겨우 삼백 권에 지나지 아니한다. 나는 이 책들을 내가 기른 꽃들을 만져보듯이 어루만져보기도 하고, 자라는 아이를 바라보듯이 대견스럽게 보기도 한다. 물론 내가 구해 놓은 이 책들은 예전 그 한방의가 나한테서 돈을 취하여 사온 진피, 후박, 감초, 반하, 행인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우황, 웅담, 사향, 영사, 야명사 같은 책자들이 필요할 때면 나는 그 시골약국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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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17 . 깨어있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거든 얼른 멈춰라. 기계적이지 말라. 자아를 따라 움직이지 말라. 차 한 잔 들고 눈 떠라. 의식을 가지고 움직여라>
선가에서 차는 깨침의 상징이다. 차는 그대를 눈 뜨게 하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기 때문이다. 차는 옛부터 명상에 아주 유용한 수단으로 쓰여 왔다. 달마 대사가 중국으로 갔을 때 높고 큰 산인 "태산"에서 명상을 했다. 높고 큰 이 산의 이름 "태"자에서 차 "다"자가 유래하였다. 달마는 참으로 위대한 명상가였다. 그는 날마다 18 시간씩 명상하였는데, 그건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졸음과 싸워야 했고, 눈꺼풀이 얼마나 무거운가를 거듭거듭, 실감해야만 했다. 그래서 달마는 자신의 눈꺼풀을 싹 잘라 내버리기까지 하였다.
아, 아름다워라. 바로 그 눈꺼풀이 차의 씨앗이 되었으니, 내버린 눈꺼풀에서 잎새가 돋아났던 것인데, 달마는 그 잎새를 취해 달여 마시곤 깜짝 놀래었다. 그걸 마시자 오랜 시간 정신이 맑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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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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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은하(SG M51, NGC 5194)는 고전적인 나선 은하로 사냥개자리에 위치해 있다.]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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