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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96호
2020.6.10. (음 4.19. - 윤)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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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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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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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꿈이 후회로 바뀔 때 비로소 늙는 법이다. ― 존 배리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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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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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하스
‘다쿠아즈’, ‘카스타드’, ‘갸또’, ‘후렌치파이’, ‘칙촉’, ‘엄마손파이’…. 지난주 회의 탁자에 놓여 있던 과자 이름이다. 바른 외래어 표기를 국립국어원에 물었더니 ‘정답’이 돌아왔다. ‘다쿠아즈’(dacquoises, 달걀흰자에 설탕을 섞은 머랭 사이에 버터크림을 발라 겹친 디저트), ‘커스터드’(custard, 우유나 달걀노른자에 설탕 따위를 섞어 크림처럼 만든 과자), ‘가토’(gateau, 케이크·과자), ‘프렌치파이’…. ‘칙촉’은 촉촉한 초콜릿 과자로 운율을 맞추기 위한 것, ‘엄마손 파이’는 ‘엄마손’이 들어간 게 아니라(‘애플파이’ 같은 게 아닌!) ‘엄마의 정성’으로 만든 것을 드러내기 위한 이름일 것이다.
과자 이름에 눈길이 간 까닭은 지난주 ‘웨하스 파동’이 우려된다는 얘기를 한 뒤끝이기 때문이다. 웬 ‘웨하스 파동’? <표준국어대사전>은 ‘웨하스’를 ‘웨이퍼의 잘못’으로 단언한다. ‘웨하스’(ウエハ-ス)는 유럽에서 건너온 과자 ‘웨이퍼’(wafer)의 일본 발음을 딴 것이기 때문이다. 웨이퍼는 ‘집적회로를 만들 때 쓰는 실리콘 단결정의 얇은 판’처럼 얇은 조각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반도체에서는 ‘웨이퍼’, 과자에선 ‘웨하스’로 통하는 ‘두 얼굴의 wafer’와 비슷한 팔자인 게 또 있다.
‘대장균 후레이크’로 세간을 시끄럽게 한 ‘시리얼’의 한 종류는 ‘(콘)플레이크’(flake)가 맞고, 1961년에 첫 제품이 나온 ‘크라운 산도’는 ‘-샌드’(sand)로 적어야 외래어표기법에 맞는다. 포르투갈에서 전래한 ‘카스테라’는 ‘카스텔라’(castela)가 되어야 하고. 일본어 찌꺼기 묻어 있는 과자 이름은 어찌해야 할까. 표기를 몽땅 바꾼다? (관용 표현이니) 사전이 받아들인다? ‘설기과자’(카스텔라), ‘켜과자’(웨이퍼)처럼 다듬어 쓴다? 결정은 사전 편찬자의 몫이다. 사전을 손본다면 ‘카스텔라’의 포르투갈어 표기로 밝힌 ‘castella’도 바로잡아야 한다.
……………………………………………………………………………………………………………… 염장
지난 목요일 오후에 ‘최고위원 사퇴 속보’ 관련 얘기를 들었다. ‘속보 홍수 시대’에 정치인 당직 사퇴 소식은 ‘속보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뜬금없는 발표의 속뜻에 모이던 관심은 이내 언어 표현으로 쏠렸다. ‘대통령한테 염장을 뿌렸다’는 게 그것이다. 어느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와 출연자는 “‘염장 지른다’는 표현은 하는데, ‘염장을 뿌린다’는 건 무슨 말인가?” “‘염장을 뿌린다’는 표현은 없지만, 굉장히 강한 표현”이라며 ‘사퇴 선언’보다는 ‘염장’에 초점을 맞춘 대화를 주고받기도 했다.
이태 전 국립국어원 누리집에는 “‘염장을 지르다’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서는 안 될 표현”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국어비속어사전>(김동언 편저, 1999)에 ‘화나게 하다’라는 뜻의 욕으로 설명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모님과의 대화에서 ‘염장 지르다’를 쓰면 안 되는 것인가?”에 대한 답이었다. 여기에 기대면 ‘염장 지르다(뿌리다)’는 어원과 뜻풀이를 떠나 공공 언어로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인 셈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은 ‘염장’ 표제어 9개를 제시하지만 위 쓰임에 딱 들어맞는 뜻은 없다. 항간에 떠도는 ‘염장(지르다)’의 유래 또한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 ‘염통(염)+창자(장, 腸)’는 조어가 어색하다. ‘고문할 때 소금(염, 鹽)과 간장(장, 醬)을 상처에 뿌렸기 때문’이라는 설은 ‘상처에 간장 끼얹다’에서 깬다! ‘심복인 염장이 찌른(지른) 칼에 죽은 장보고’를 기록한 <삼국유사>에서 왔다는 주장은 ‘천년의 공백’이 설득력을 잃게 한다. ‘염장 지르다’라는 표현은 1990년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염장지르다’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가만히 있는 곳을 들쑤시어 괴롭고 힘들게 하다’로 풀이한다. 요즘 청춘의 ‘염장(질)’은 애인 없는 이들에게 보이는(들리는) 애정 표현을 가리킨다. ‘사랑한다’는 말만 100여차례 반복하는 ‘염장송’을 들어보면 뭔 말인지 안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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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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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비 온다 -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게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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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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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씨알의 설움 (5/6)
글이라고 처음 쓴 것은 성서조선 때인데 그때 우리는 돈 생각은 없었다. 여섯이 제 돈을 모아서 출판비용을 내며 한 것이지 글을 쓰면 돈이 된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있으려니 생각을 못했다. 서생 기분으로 영웅심 명애심은 숨어 있었는지 모르지. 김교신형이 혼자 경영을 하게 된 때도 매달 월급에서 잘라 넣어 가며 하는 잡지엿고 나도 매당 글을 써도 원고료라는 것이 세상에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해방 후 송두용, 노평구라는 친구들이 이 날까지 잡지를 내어도 역시 그런 식이요, 나도 글을 실은 일이 있어도 역시 성서조선 때와 마찬가지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 역사를 낼때에도 수평선 너머를 낼 때에도 말씀을 낼 때에도 돈 생각은 별로 아니했다. 부산 피난을 갔을때 간혹 길 거리에 사상계의 광고가 나붙는 것을 보면 “이런 때에도 역시 저런 것을 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했을 뿐이요. 한다면 역시 김교신의 성서조선이나 송두용의 성서인생이나 노평구의 성서연구 하는 식이려니 생각했다.
1955년 여름에 사상계사에서 ‘ 인생노트’ 를 써 달라고 원고청탁이 왔다. 게을러서 일기도 아니 쓰는 나는 보내줄 것도 없고 해서 그냥 있어버렸다. 그랬더니 겨울이 돼서 다시 조르므로 하는 수 없이 평소에 생각하던 것을 써서 56년 1월호엔가 낸 것이 내가 처음으로 일반 사회를 상대로 하고 낸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는 글이다. 그날까지 정말 나는 누구 시비하잔 심정으로 쓴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글이 많이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을 보고 놀랐고, 그보다도 놀란것은 원고료를 가져다 준 것이다. ‘이렇게들 하는 것들인가? ’ 하는것이 내가 봉투를 받아 들면서 한 첫 생각이었다. 주는 사람의 얼굴에다 두드려 내 던져 땅에 떠러트리지 못한 내가 자격부족이긴 하지만, 받아는 들고도 적지않이 슬펐다. “ 내가 그것을 쓸 때에 이것을 바라고 썼던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것일까? ” 그것이 내가 글을 팔아본 처음이다.
이젠 아주 상습범이 되 버렸다. 이날까지 된 소리 못된 소리를 달마다 써도 한 번도 마음에 달가워서 쓴일은 없다. 돈을 주머니에 넣고 와서 글 써내라는 장사꾼 밉고 글이라고 쓸때는 있는 마음껏 다해 쓰노라 해도 써놓고 보면 이거 내소리냐? 하고 찢어버리고 싶지 않은 글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날껏 글 쓰고, 찢지 않고 돈 받은 것이 나의 나밖에 못되는 설움이 있는 곳이다. 감옥에서 나와서는 또 도둑질을 다시하는 상습범,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는 민중의 피를 빨아먹는 살림을 하고 하는 성당, 예배당, 절이라는 감옥에 있는 상습범, 신문 잡지를 보고는 미안하다는 생각을 하고는 또 나라의 것을 도둑질해 먹는 정부 관청이라는 엄지감옥에 있는 상습범, 그것들도 나 같아서 그렇겠지. 너나 나나 가엾은 존재들이로구나!
솔직히 말해 보자. 돈을 위해 했나? 민중을 위하고 참을 위해 글을 쓰고 말을 할진댄 왜 돈을 주는데서만 하고 아니주는 데서는 아니하나? 참 살림이 되려면 삼각으로 돼야 한다. 주기는 갑에게 주고 받기는 병에게서 받아야 한다. 갑에게 주고 갑에게 받는것은 장사지 도덕은 아니다. 정말 사회의 먼저 깨달은 이로 알거든, 나라 걱정, 진리 걱정 하는 이로 알거든, 너희 잡지에 글을 써 주거나 말거나 너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거나 말거나 사람에 대한 대접으로, 진리의 샘을 기르는 마음으로 그의 양식을 대 주려므나. 반드시 내게 준 것이 있는 다음에야 하는 것은 너무 현금주의 아니냐? 정말 할 말이 있거든 오라거나 말거나 보수를 주거나 말거나 정말 말을 받아야 할 씨알에게 주려므나. 반드시 월급을 작정하고 원고료를 받은다음에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장사셈 아니냐? 아 참. 내가 아니 들 길을 들었다. 씨알은 존에서 먼 사람들이다. 자동차를 탈수록, 점심값이 높아 갈수록 씨알의 그림자는 떠나가는 님의 모습 같이 아득해만 간다. 이 글 장수, 말 장수들아, 내가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묵어가는 씨알농장
자격에도 없는 글을 쓰노랍시고 들어앉아 오뉴월 복들이에 암탉이 알 안듯 하는 새에 우리 농장만 다 묵었다. 이름도 좋은 참 맑은 길 하늘 고요 새 울음골의 씨알농장 아닌가? 씨알 키우고 씨알 되는 것이 내 일이거늘 무슨 일이라고 글 팔기를 시작했느냐? 옛사람을 배워 귀거래를 불러야 옳은 일이다. 이 농장은 본래 땅주인이던 정만수님이 30년 이발장이로 푼푼이 모아 얻은 돈으로 장차 어두운 농촌을 비추는 등불을 켜 보자는 뜻으로 남 돌아도 아니 보는 묵은 데를 사서 해방 직후 과일나무를 심은 것으로 시작했고, 그 후 김병태 님이 그것을 맞아 그 목적으로 강당까지 짓기 시작했던 것을 경영이 어려워져 그만두게 될 형편에 빠진 때에 내가 맡게 되었다. 정성은 물론 모자라고, 사업의 재주가 도무지 없는 나로서 스스로 그 적당치 않은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 어려운 일을 맡은 것은, 하나는 정님의 막아낼 수 없이 하는 간청이요, 하나는 오산 시절이래로 그리는 나의 농촌에 대한 꿈 때문이었다.
나는 이날까지 “ 아니 아니” 하면서, 내놓고 해 먹는 놈들보다 더 밉게 더 악질로 글을 팔고 말을 팔아 목사아닌 목사, 신부아닌 신부, 중아닌 중 노릇을 해 먹기는 하면서도, 그래도 믿음과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껴붙이어 돈 아니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 봤으면 하는 꿈은 언제나 놓지 못하고 가지고 온다. 일제시대엔 그걸로 일본과 싸우려 해 봤고 오늘은 또 그걸로 오늘의 대적과 싸우련다. 오산을 그만둔 것도 그때문, 송산을 간것도 그때문, 인생대학 이후 용천서 농사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38선을 알몸으로 넘어오니 친구들이 대학에 운운하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으나, 제일레 공부 실력 없어 못하겠고, 지금의 교육정신과 제도가 온통 못쓸 거로 보여 거기 들어가 섞일 마음 없고 하여 사양했다. 사양보다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지. 그래 자연 도피성 소리가 나오고, 간디의 아슈람 소리가 나왔다. 그래 6.25 바로 전에 제주도 다녀온 사람의 말을 듣고 거기를 한번 갈까 하는 의논들이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 있었다. 그러는 때에 전쟁이 터졌다.
도망을 갈 구실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살겠다는 욕심이 그래도 이것을 구실로 말은 “피난을 가자는 거 아니라 이왕 가려던 거니 그럼 제주도로 가기로 한다” 고 하면서 나섰다.내가 제주도를 새 나라의 심벌이라고 10년 전 역사 쓸 때에 말했는데 이상하게도 한라산의 높이가 6.25전쟁 나는 해에 1,950미터인 것을 발견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러나 제주도는 가지도 못했고 3년 동안을 대구, 김해에서 미군부대의 찌꺼기를 얻어, 그나마도 내 손으로도 못하고 남의 등에 붙어먹다가 왔다. 그렇게 되어 1957년 3월, 지금은 군대에 복무를 거절하고 1년 징역을 마치고 강원도 평창 6백 마지기 해발 1,200미터의 산 맨 등에 올라가 묵은 데를 일구고 있는 홍명순군과 단둘이 여기를 오게 되었다. 그때 그는 중앙신학 마지막 학년이던 것을 그만두고 왔었다. 올 때에 나는 혼자 간디가 60명 남녀 동지와 톨스토이 농장에서 일을 하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인쇄기를 손수 돌려 『인디언 오피니언』을 발행하여 남아연방과 싸워가던 것을 생각하면서 왔다.
그 후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이것을 돕는 이들이 있고 와서 일을 하는 젊은이들도 들고나고가 있기는 하나, 보통 6,7명은 되어 오늘까지 오는데 타고난 나의 뜨뜻미지근함과 '글쎄'로 3년이 되는 오늘에도 아직 제 살림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다. 관청과 사회에는 무슨 원수 가진 것은 아니지만 술 담배 교제로 되는 오늘에 나 술 담배 아니 먹으니 갈 맛 없지, 평생에 무슨 청탁은 하기 싫지, 되기도 전에 광고부터 하는 세상풍속 따르고 싶지않지, 더구나 도대체가 정부의 정치방침도 사회의 풍조도 다 틀렸다고만 뵈지, 그러므로 자연 거래가 없다. 근본 뜻인 즉, 모든 생명운동은 아래서부터 올라가는 것이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니 될수록 민으로 민주의 정신을 길러보자는 것이다. 그래 씨알농장이다. 하나 지방 농민과는 친구가 됐어야 할 것인데 그것을 못하는 것은 내 죄다.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글공부한 것이 죄가 되어 이러는 듯하다. 그런데 또 달마다 글까지 팔아먹으니 일이 옳게 될 리가 없다.
우리 살림이라야 별것없다. 네시면 일어나 찬물로 잠때 씻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두어
날마다 기도합니다.
나 부르고 한 시간 명상이나 하고 보리밥에 배를 불린 다음엔 어둡도록 땅 파는 일이요, 짐승에 모이 주는 일이요, 열시에는 내일 해가 틀림없이 머리 위에 뜰 것을 믿고 누더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뿐이다. 그러는 동안에 친구가 있다면 봄에는 새벽 네시부터 반주를 해주는 푸른 공중의 종달새요, 사을엔 밤이 늦도록 노래를 하는 벽틈의 귀뚜라미다. 물론 이렇게만 하잔 생각은 아니지. 하지만 아직 글 사고 글 팔잔 생각을 채 못 면했기 때문에 정말 땅의 글을 읽고 써내지 못한다. 그래도 하늘 고요는 하늘 고요다. 발에 흙이 묻었을 때 마음은 까만 하늘의 한 맑음에 젖어 있다. 새 울음은 새 울음이다.
공자님 흐린 세상 보고 새가 울길 기다리셨다지. 새가 나타나 울면 거룩한 이가 오신다. 해서, 우리도 부족은 해도 사람 기다린다. 봉은 없어도 닭은 있다. 계서봉황식이라, 닭이 봉황이와 한데서 먹는다 하지 않았나? 문천상이도 닭과 한데서 먹으니 봉황이 따로 있는 것 아니야. 닭을 잡아먹을 맘 없이 보면 거룩한 이 오실 것을 가르쳐주는 하늘 소리지. 보기에 따라 듣기에 따라 닭이 곧 봉황이다. 베드로도 닭의 울음에 깨어 새 사람이 되지 않았나? 지금은 우리 자격이 부족하여 닭의 밑구멍만 쳐다보고 있지만 이제 새벽 3시부터 우는 닭의 울음에 맞추어 잘 울기만 하면 오실 이가 오실 것이다.
새 울음이 새 울음이다. 새 날의 울음 울면 그것이 정말 글이다. '그' 이를 그리워 우는 것이 글 아니겠나? 자나깨나 풀을 베면서도 흙을 까면서도, 글, 그를 그리워, 글, 글,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그거 글일 것이다. 참 글. 변변치는 않아도 이것이 우리 손으로 만든 복숭아니 부끄러움 모르고 내놀까?
쉰아홉에 복숭아 맛을 첨 알고
듣고 귀 솔깃 믿고 눈에 언뜻 탐스러워
입에 침 코에 향기 손닿는 줄 모른 저녁
살그만 따온 한 알을 주고받고 먹었네.
먹고 나 보는 눈에 네 꼴 흉칙망칙
달고 신 건 한때 맛뿐 바람 소리 맘 떨린다.
얻은 건 슬긴 아니고 꼭 찌르는 가시지.
이마에 땀을 흘려 네 바탈을 갈아라
일러준 말씀 심어 가꿔내는 뿌리 밑에
한낮에 받는 한 알이 천도 복성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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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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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髮千鈞(일발천균)
一(한 일) 髮(터럭 발) 千(일천 천) 鈞(서른 근 균)
한서(漢書) 매승(枚乘)전의 이야기. 서한(西漢) 시기, 매승이라는 유명한 문인이 있었는데, 그는 사부(辭賦)에 능했다. 그는 오왕(吳王) 유비의 휘하에서 낭중(朗中)을 지내며, 오왕이 모반하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오왕에게 모반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달린 삼만근 무게의 물건이 위는 그 끝을 모를 높은 곳에 매달려 있고, 아랫부분은 바닥이 없는 깊은 못에 드리워져 있다고 합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상황이 극히 위태롭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만약 윗부분이 끊긴다면 다시 이을 수 없으며, 아랫부분이 깊은 못으로 떨어진다면 다시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왕께서 모반하시려는 것은 바로 한 가닥의 머리카락에 매다린 것처럼 위험한 일입니다.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자, 매승은 오나라를 떠나 양(梁)나라로 가서 양효왕의 문객이 되었다. 그후 오왕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一髮千鈞 이란 극도의 위험에 처해 있음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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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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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깨어진 독값 - 양은석
작년 가을 김장철이 다가왔을 무렵의 일이다. 어떤 지게꾼이 김장독을 지고 건물 옥상까지 오르다 좁은 계단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었다. 아마도 어두운 좁은 계단인 데다가 영양 실조로 시력이 흐려지고 다리가 떨려서 발을 헛디딘 모양이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에 실려 온 그 지게꾼은 동맥이 끊어져 있었고, 출혈성 쇼크로 빈사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의사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 동맥을 잇고 근육과 피부를 꿰매어 응급 치료를 했다. 치료를 마치고 수술실 밖으로 나오는데 웬 남루한 차림의 아주머니가 뛰어들어와 나를 붙들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금년엔 김장을 담그려고 겨우 독값을 마련했는데, 독이 깨졌다니 독값은 어떻게 해요?"
처음에 지게꾼의 아내인 줄 알았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지게꾼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큰 재난이고, 병원 측으로선 이런 경우 치료비는 대개 인정상 받지 못하고 끝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아주머니의 머리 속은 깨어진 독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말했다.
"아주머니 사정도 딱하긴 하지만 저 환자의 형편도 말이 아니군요. 겨우 목숨을 건진 셈인데 하루벌이 하는 사람이 돈이 있겠어요?"
아주머니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진정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말없이 돌아갔다. 환자가 의식을 찾은 뒤에 집을 알아보니 충청도 어느 시골이었다. 그는 식구들과 헤어져 서울로 올라와 남대문 노무자 숙소에 거처를 정한 지 한 달도 채 안되었다는 것이었다. 며칠 뒤 환자의 동생이 나타나 간병을 하게 되고, 환자는 한 열흘쯤 치료를 받고 나서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떠난다는 날짜가 되어도 동생은 여비를 못 구했는지 퇴원을 하루 이틀 미루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독 주인 아주머니가 느닷없이 병원에 찾아왔다.
"의사 선생님, 얼마 안되지만 환자 치료비에 보태 주세요. 금년에는 꼭 김장을 담그려고 했는데 이렇게 됐으니, 김장은 내년부터 담그기로 하고 김장 담그려고 모아 둔 돈을 여기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은 성스럽기까지 했고, 그 음성은 두고두고 내 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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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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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 장 피에르 모르
제4장.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2/2)
코페르니쿠스와 클라우스
사실 갈릴레오는 그처럼 형편없는 적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기 대신에 학생들이 답변하도록 했다. 그에게는 정보를 제공하고 설득해야 할, 휠씬 더 비중 있는 서신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선 천문학자 케플러가 있었다. 그는((별들의 소식))이 출판되자마자 그에 대한 의견을 재촉하면서 케플러에게 한 부를 보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케플러는 갈릴레오의 발견을 알고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지체없이 열렬한 축하를 담아 답장을 보냈다. 그는 이편지에서 이 책이 불러일으킨 커다란 반항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제 친구 바커 폰 바헨펠스 남작이 우리 집 앞에 마차를 멈추었어요. 남작은 마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그게 정말이오? 그가 별 주위를 도는 별들을 발견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하고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케플러는 곧 공식적으로 갈릴레오를 축하하는 글을 출판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목성 주위를 도는 위성의 존재를 납득할 수 없었다. 갈릴레오는 그에게 망원경을 하나 보냈고, 마침내 케플러 자신도 위성들을 볼 수 있었다.
1610년 8월부터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위성의 존재를 열렬히 주장하는 강연을 했다. 그러므로 케플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옹호자였다. 갈릴레오가 진정 설득하고자 했던 사람은 클라비우스였다. 클라비우스는 예수회 회원이자 교황의 수석 천문학자였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였다. 그런 그가 갈릴레오의 발견을 조롱하며, 미리 망원경에 별들을 넣어두지 않는 한, 망원경으로 그 별들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했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그를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으며 그를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다. 갈릴레오는 클라비우스가 정직한 사람이므로, 망원경으로 목성의 위성과 달이 산을 보기만 한다면 진실을 말하리라고 생각했다. 11월에 금성의 변화과정에 대한 관찰을 끝마칠 즈음, 다행스럽게도 클라비우스가 그의 충고에 따라 마침내 목성의 위성을 보았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거듭되는 새로운 발견
갈릴레오는 첫 번째 발견을 알리려고 노력하면서 파두아와 피렌체에서 관찰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그는 토성에 이상한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처음에 그는 토성의 양쪽에 있는 두 개의 반점이 목성의 위성보다 크고 행성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는 위성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이 행성의 주위를 도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얼마 후 갈릴레오는 이들이 잠시 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이러한 돌출 부분이 태양계의 가장 훌륭한 경관의 하나인 토성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에는 그의 망원경의 성능이 너무 약했다. 이러한 사실은 45년 후에 호이겐스가 훨씬 더 성능이 좋은 망원경을 가지고 발견한다. 갈릴레오는 토성에서 놓친 행운을 금성에서 만회한다. 그는 곧 금성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점이어서 완전히 확실해질 때까지 발표를 미룰 정도였다.
동시에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의 발견을 훔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그는 미리 대비를 했다. 1610년 9월부터 그는 케플러에게 "Haec immatura a me jam frustra leguntar, o.y.."(번역하면 나는 이것들을 헛되이 너무 일찍 읽었다, o.y.)와 같은 다소 이상한 라틴어 문장을 보냈다. 사실 이것은 글자 수수께끼로서, 이 문장의 글자를 순서대로 재배열하면 다른 문장이 된다. 이 문장은 명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갈릴레오는 자신이 틀렸으면 잘못된 것을 출판하지 않으면 되고, 자기가 옳은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자기의 발견이라고 주장하면 자신의 우선권을 증명하기 위해 글자 수수께끼 의미를 밝히기만 하면 될 것이다. 갈릴레오는 옳았다. 그는 12월에 프라하에서 케플러에게 중요한 글자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를 발송했다. 그 문장은 "Cynthiae figuras aemulatur mater amorum(사랑의 어머니는 다이아나의 형상을 모방한다)."였다. 현대의 독자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하겠지만, 르네상스 시기 말의 독자라면 금방 그 뜻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금성(비너스, 사랑의 어머니)은 달(다이아나)처럼 형태가 변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금성은 달처럼 변화하여 때로는 둥근 모양이 되고 때로는 초승달 모양이 된다. 이것은 중요한 발견이었다. 이것은 금성이 때로는 태양의 뒤에 있고 때로는 앞으로 간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금성 :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고 다른 천체의 궤도가 서로 교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자. 이러한 체계 내에서는 금성이 태양의 앞과 뒤로 움직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금성의 변화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체계를 반박하는 결정적인 논거가 된다. 게다가 이런 변화는 금성이 스스로 빛을 발아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준다. 지구나 달처럼 금성도 태양의 빛을 받아 밝은 쪽과 어두운 다른 쪽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양이 독자적인 역할을 행사하며 다른 행성들은 지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요컨대 코페르니쿠스가 옳다.
갈릴레오는 이미 달이 지구와 흡사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제 그는 금성이 달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베네치아의 사르피에게 재미있는 설명을 넣어 편지를 띄웠다. "망원경을 거꾸로 잡고 달을 보면 금성처럼 빛나는 점을 볼 수 있을걸세." 그 외에도 이 발견에는 당시의 천문학자들에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또 다른 측면이 내포되어 있었다. 코페르니쿠스의 체계에 따를 때 지구와 금성의 거리는 많이 변화한다. 그러므로 지구에서 보이는 금성의 크기도 많이 변화해야 한다. 그러나 맨눈으로 보면 금성은 항상 빛나는 점으로 보인다. 그 빛의 강도가 변하는 것은 확실하지만, 금성이 지구에 실제로 접근하는 만큼 밝아지지는 않는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그때까지 코페르니쿠스에 반대하는 강력한 증거가 되어왔다. 그런데 이 유명한 망원경으로 보았을 때에 금성의 크기는 코페르니쿠스가 예견했던 대로 변화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성의 형태도 함께 금성의 크기가 가장 커지는 순간이 금성의 형태가 가장 가느다란 초승달 모양이 되는 때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것은 갈릴레오가 지금까지 성취한 모든 발견 중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 가장 큰 뒷받침을 주는 것이었다. 바로 방문하라는 클라비우스의 초대를 받았다. 클라비우스는 결국 망원경을 들여다보았고 갈릴레오가 예견했던 대로(별들의 소식)에 쓰인 발견의 진실성을 인정했던 것이다. 겨울이 지나자마자 갈릴레오는 가장 아끼는 망원경을 가지고 로마로 출발했다. 새로이 발견한 사실들을 클라비우스에게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품고서.
갈릴레오는 1611년 3월 29일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 체류는 매혹적인 것이었으며, 그는 거기서 융숭한 환대를 받았다. 그는 가까운 친구였던 살비아티에게 다음과 같이 써보냈다.
"로마의 수많은 저명 인사와 추기경, 고위 성직자, 영주들이 나를 환영해 주었네. 그들은 내가 관찰한 것을 보고 싶어했고 또 만족스러워했지. 이곳의 훌륭한 조각상과 그림, 벽화와 궁전과 정원을 구경하는 일도 큰 즐거움이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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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모두 시계를 갖고 있다
7. 생물 시계의 정체 -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생물 시계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곤충의 생물 시계
전체 동물계를 통틀어서 생물 시계의 구조가 가장 처음 알려진 것은 바퀴였다. 여러분 중에서 바퀴를 모르는 친구는 거의 없을 것이다. 바퀴라고 하면 '그게 무엇일까'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친구들도 바퀴벌레라고 하면 모두 고개를 끄덕끄덕할 것이다. 바퀴를 보통 바퀴벌레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 원래는 윤충이라고 하는 민물에서 사는 작은 벌레를 바퀴벌레라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두운 밤이 되면 집안을 슬금슬금 기어다니는 그 불결한 곤충은 '벌레'를 빼고 '바퀴'라고 불러야 한다. 이제 바퀴는 우리 사람들에게 아주 친근한(?) 곤충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서로 잘 지낼 수 있다는 뜻에서 친근하다는 것이 아니고, 자주 만난다는 뜻에서 친근하다는 것이다.
바퀴가 속하는 곳은 곤충류 메뚜기목 바퀴과이다. 바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여러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몸은 납작한 타원형이고 빛깔은 갈색이다. 바퀴는 따뜻한 곳을 좋아하며 음식물과 옷에 해를 주고 전염병을 옮기기도 한다. 여러분이 만일 방에서 한밤중에 갑자기 전등을 켰을 때, 바퀴 1마리를 발견했다면 그 방에는 최소한 10마리 이상의 바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퀴는 밤에 활발하게 돌아다닌다. 야행성의 활동 리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퀴의 활동 리듬을 지배하는 시계가 어디 있는가가 알려진 것은 1968년의 일이었다. 바퀴의 생물 시계는 뇌의 일부분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내밀어진 시신경엽이라는 장소에 있었다.
곤충의 눈은 두 가지가 있다. 겹눈과 홑눈이다. 그런데 시계의 빛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는 겹눈이다. 우선 이 겹눈에서 바깥 세상의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시신경을 통해서 시신경엽에 있는 시계에까지 정보를 전달하면 시계는 그 정보를 통해 시간을 읽는 것이다. 시계가 보내는 정보는 역시 신경을 통해 뇌의 중추부에 있는 뇌간부에 보내진다. 정보는 다시 이곳으로부터 호르몬을 통해서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하지만 뇌간부가 시계의 말단부로서 정보를 전달한다는 것을 잘못이라고 보는 과학자도 있다.
귀뚜라미도 바퀴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발달된 시계를 갖고 있다. 귀뚜라미의 시신경엽을 파괴하거나 그곳에서 정보를 흘러 보내는 신경을 절단하거나 하면 귀뚜라미는 돌아다니는 활동의 리듬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노래하는 활동의 리듬이나 생식 기관을 형성하는 리듬까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다. 시신경엽에 시계의 중심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알려졌지만 뇌간부에 시계의 말단부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바퀴나 귀뚜라미가 갖고 있는 이런 훌륭한 시계는 다른 곤충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나아가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들 곤충의 시계가 뒤에 이야기할 사람의 시계와 아주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물 시계에 대해 알아본 다음에 바퀴나 귀뚜라미의 생물 시계와 비교해 보면 좋을 것이다.
나방은 곤충류 중에서는 아주 고등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상당히 진화한 곤충이라는 이야기이다. 나방의 우화 리듬을 대상으로 해서 생물 시계의 구조를 조사해 보았다. 그 결과, 나방이 가진 생물 시계의 중심체는 뇌간부 속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나방은 생물 시계가 빛의 수용체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다. 나방의 생물 시계는 실로 간단한 구조를 보였던 것이다. 바퀴나 귀뚜라미는 불완전한 변태를 하는 곤충이다. 알에서 애벌레, 애벌레에서 엄지벌레의 세 시기를 거친다는 것이다. 한데 바퀴나 귀뚜라미는 애벌레의 몸에도 시신경엽이나 겹눈이 갖추어져 있다. 이에 반해 나방은 완전 변태를 하는 곤충이다. 따라서 알에서 애벌레, 애벌레에서 번데기, 번데기에서 엄지벌레의 네 시기를 거쳐 한살이를 한다는 것이다. 나방처럼 완전 변태를 하는 곤충은 엄지벌레만이 시신경엽과 겹눈을 갖고 있다. 애벌레와 번데기 상태에서는 시신경엽과 겹눈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나방이 변태하면서 빛의 수용체나 시계의 중심체의 위치와 구조를 바꾸지 않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변화가 그리 크지 않은 뇌간부 속에 빛을 받아들이는 수용체까지 겸한 생물 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방은 이렇게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생물 시계의 형태를 갖추는 방향으로 진화했던 것이다. 앞에서 등장했던 진딧물의 광주기 시계가 가진 구조도 나방의 것과 똑같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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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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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기술을 찍어오는 사진사
김두철이라는 녀석이 있다. 현재 미래산업의 설계팀장을 맡고 있는 재주꾼이다. 이 녀석의 머릿속에는 온통 기계밖에 들어 있지 않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항상 연구하고 실험한다. 어쩌다 그를 마주치면 나는 현재 진행 중인 연구에 대해 슬쩍 물어본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궁금해서라기보다는 격려의 의미가 더 크다. 그러면 그는 마치 두툼한 보고서를 외우고 다니는 사람처럼 막무가내로 쏟아낸다. 복도에서고 식당에서고 상관하지 않는다. 대개는 내가 질려 줄행랑을 놓고야 만다. DS 코리아를 설립하고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던 무렵이었다. 개발팀장이었던 백정규가 하루는 내게 와서 조수가 필요하니 고려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무래도 잔심부름이라도 할 똘망똘망한 녀석이 하나쯤 있었으면 합니다."
"뭘 물어, 알아서 데려다 쓰면 되지."
나는 그저 입버릇처럼 대답하고 이후로 신경을 안 썼다. 백 부사장은 자신이 다녔던 전주공고에 추천을 의뢰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찾아온 녀석이 좀 괴짜였다. 눈동자는 맨날 허튼 곳에만 가 있고, 주의를 주어도 그냥 히죽거리는 게 일이었다. 정작 '똘망똘망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더구나 특별한 기술이나 재능도 없어 보였다. 공고를 졸업하고 2년 동안을 내리 놀았다는 것이 이해가 될 지경이었다. 재학시절에 지역 기능올림픽 제도부문에서 동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는데, 그것도 영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 녀석한테 일을 시키면 언제나 늦었고, 결과도 신통찮았다. 더구나 이 녀석은 틈만 생기면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소리만을 잔뜩 늘어놓기 일쑤였다. '이런 S자동차 부품은 저렇게 하면 훨씬 좋아질 텐데 왜들 그 생각을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다'는 식이었다. 백정규는 '꼴통' 하나 들어왔다며 푸념을 했지만, 나는 사실 이 녀석이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백정규도 사실 진득한 속정이 많은 인물이라 투덜거리면서도 꾸준히 일을 가르치는 것 같았다.
'웨이퍼 검사장비'의 실패 이후 DS 코리아는 다시 부천의 미래산업과 합쳐졌다. 김두철도 당연히 부천으로 따라왔다. 매거진이 있는 부천은 우리의 베이스캠프였다. 다시 시작하더라도 부천에서 시작해야 했다. 비록 다년간의 연구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그 동안 축적했던 기술력만은 믿음직했다. 우리가 가진 기술력보다 한 단계 낮은 제품을 선정해서 남들보다 잘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합의사항이었다. 마침 '세미콘 코리아'라는 반도체 전시회가 코엑스에서 열렸다. 참고가 될까 싶어 직원들을 보냈더니 나중에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가 '핸들러'였다. 핸들러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았다. 반도체 제조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이면서도 당시에는 모두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복잡한 장비였지만 우리가 개발하던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로부터 많은 기술을 그대로 뽑아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무너질 것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핸들러라는 장비는 복잡하기도 할뿐더러 일단 그 크기부터가 엄청났다. 소프트웨어나 컨트롤러 같은 핵심기술은 둘째치고, 기계구조를 파악하는 것도 문제였다. 설계도면이 있으면 좋겠지만, 엄두도 낼 수 없는 바람이었다. 그러던 중에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두철이라는 녀석이 불쑥 설계도면을 가지고 나타났던 것이다.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이 자식, 이거 어디서 났어!"
백정규의 말투에는 반가움과 불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데 김두철의 대답이 또 한번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제가 그렸는데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허투루 그린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부분적으로 미비한 구석도 많았지만, 이 정도 골격이라면 차차 보완해도 될 만한 문제였다. 졸지에 김두철은 우리의 스타가 되었다. 그 녀석의 머릿속에는 항상 설계도면이 들어가 있었다. 핸들러에 관한 것이든, 자동차에 관계된 것이든, 어쨌거나 말이다. 한번 유심히 본 장비는 머릿속에서 도면을 그려보고, 또 나름대로 수정까지 해보는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고난 눈썰미에다 뛰어난 상상력과 구성력을 가지고 있는 놈이었다. 김두철이 우리들로부터 얻어 가지게 된 별명은 다름 아닌 '찍사'였다. 정정당당한 산업스파이였고, 걸어다니는 사진기였던 셈이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결국 핸들러 개발에 성공했다. 그런데 우리의 제품이 현장에 풀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말 웃지 못할 사단이 벌어졌다.
일본기업과 합작으로 핸들러를 제조하던 한 업체로부터 거센 항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하루는 그 회사 개발부장이 당시 압구정동에 있던 우리 연구소로 쳐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거친 말투로 사장부터 찾았다. 내가 나서니 다짜고짜 날더러 도둑놈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자기네 도면을 우리가 훔쳐갔다는 얘기였다. 그 회사에서 일본 도시바제 핸들러를 모듈별로 나누어 다른 공장에 하청을 준 바 있는데, 그 도면을 우리가 빼내 갔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맞섰다.
"실수로 뚫어놓은 구멍까지 똑같은데 안 훔쳐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잘못하다간 법정투쟁까지 갈 뻔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는 원만히 해결되었다. 껍데기만 비슷할 뿐 내부구조는 명백히 다르다는 점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김두철은 못 말릴 녀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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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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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호이트 콜렉션
'찰스 먼취가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들으시겠습니다' 하는 아나운서의 말을 들을 때면 심포니 홀을 생각하고, 연달아 보스턴 박물관을 연상한다. 근 1년 동안 주말이면 나는 이 두 곳에 갔었다. 먼저 가는 곳은 박물관이었다. 유럽에서 사들인 그 수많은 명화들, 조각들, 루이 16세가 쓰던 가구들, 그러나 내가 먼저 가는 쪽은 그 반대편에 있는 작은 방이었다. 거기에는 그것들이 고요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처음 그것들을 만났을 때, 나는 놀랐다. 수십년 전 내가 상해에 도착하던 날 청초하게 한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을 때 느낀 그 감격이었다. 3백년, 5백년, 7백년 전의 우리나라 흙으로 우리 선조가 만들어 놓은 비취색, 짙은 옥색, 백색의 그릇들, 일품인 상감포도당초문표형주전자를 위시하여 장방형에 네 발이 달린 연지수금향로, 화문매병, 윤화탁 등 수십 점이 한방에 진열되어 있다. 이 자기들은 고 호이트(Hoyt) 씨가 수집한 것들로, 하버드 대학 포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을 그의 유언에 따라 보스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한다.
이것들 중에도 단아한 순청주전자 하나는 시녀들 속에 있는 공주와도 같았다. 맑고 찬 빛, 자혜로운 선, 그 난초같이 휘다가 사뿐 머문 입매! 나는 만져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주말이 아니라도 불현듯 지하철을 타고 그것들을 보러 가는 때가 있었다. 내가 그곳을 떠나기 전날, 박물관 그 방을 찾아갔었다. 소환되지 않는 이 문화 사절들은 얼마나 나를 따라 고국에 오고 싶었을까? 미국도 동북방 7천 마일 이국에 그것들을 두고 온 지 십년, 그것들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순결, 고아, 정적, 유원이 깃들어 있는 그 방 바로 옆방은 일본실이었다. 거기에는 '사무라이' 칼들이 수십 자루나 진열되어 있었다. 무서운 동화를 읽은 어린아이같이 나는 자다 깨어 불안을 느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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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15. 약점
<스승과 함께라면 어느 때 어떤 상황이라도 그대의 눈을 뜨게 하는 데 소용된다. 자신을 방어하지 말라. 불안한 대로, 여린 대로, 있으라. 스승한테 완전히 맡기고, 믿으라.>
대단히 엄한 선사가 있어서 제자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 하였다. 어느 날 한 제자가 종을 치고 있던 제자가 순간적으로 헛치고 말았는데, 막 절문 앞을 지나가는 어여쁜 처녀를 보고 정신이 아뜩하였던 것이다. 제자는 그 자리에 더는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속안에서 잠자고 있던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꿈꾸듯 처녀의 뒤를 쫓으려 하였다. 바로 그 순간, 뒤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스승이 지팡이로 제자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 갈겼다. 어찌나 셌는지 제자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져 죽고 말았다.
선가에는 오랜 전통이 하나 있는데, 어떤 스승한테 제자로 들어 갈 때는 약조를 해야 한다. "이 목숨이 살고 죽음은 오직 스승님께 달려 있습니다" 제자는 이를 서약한다. 이런 전통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엄한 선사를 비난하였다. 자신이 후려 갈겨 제자가 죽었는데도 스승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전하였다. 누군가 그 죽은 제자에 대해 물으면 도리어 털털거리며 웃는 것이었다 스승은 뭐가 잘못되었노라 얘기 한 마디 한 일이 없었다. 스승에게 있어 제자의 죽음은 하나의 우연한 "일"이었다. 스승은 껄껄거리며 웃었다. 왜? 속 안의 내용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그 제자는 뭔가를 얻었다. 그의 육신은 꼬꾸라졌지만 안으로 그는 눈을 번쩍 떴던 것이다. 욕망이 뿌리채 뽑히고, 꿈도 순식간에 걷혔으며, 모든 것이 육신과 함께 박살난 것이다. 그는 안으로 눈 뜨는 그 순간에 죽은 것이다. 만약에 눈 뜨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대는 깨닫게 될 것이다. 선사는 죽음의 찰나를 너무나 멋지게 이용한 셈이다. 그랬으므로 제자는 눈 뜰 수 있었다. 이 선사야말로 참으로 위대한 예술가요 스승이 아니냐.
이 얘기를 읽고 그대는 분명 스승이 제자를 죽인 사건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 얘기의 핵심이 아니다. 사실 제자는 어떻게든 죽게 되어 있었다. 스스은 그걸 알고 있었다. 얘기 속에는 이런 암시가 들어 있지 않은데, 그렇지 않았다면 스승이 마침 그때 제자의 뒤에서 지켜보고 있을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제자가 종을 치는 일은 아주 일상적이고 날마다 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여기엔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다. 제자의 죽음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그건 내적 신비여서, 만약에 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걸 막을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 스승은 그대의 속 안을 꿰뚫어 본다. 스승은 그대의 죽음의 때를 안다. 그러나 그대가 완전히 맡겨야만이 죽음은 아주 뜻깊게 이용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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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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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하우스, 가르니에 궁의 그랜드 살롱.]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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