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씨알의 설움 (4/6)
이름없는 씨알
원래 글은 씨알의 것이다. 씨알에서 나오고 씨알로 돌아간다. 문명, 문화, 문물이라니, 사람의 지은 모든 것은 결국 한 마디 글월인데, 그 글월을 그리는 바탕은 뭐냐 하면 곧 민이다. 문학만 아니라 정치, 교육, 예술, 종교 모든것이 결국 민이라는 비단위에 놓은 무늬다. 그 제도 문물을 세움으로 인하여 민이 한층 더 빛난다. 그리고 그 무늬 놓은 비단을 입는 거는 누구냐 하면 그 역시 만이다. 글은 씨알의 하는 소리요, 씨알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씨알의 기도다. 기도는 하나님 들으라고 하지만 또 제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제가 듣지 못하면 하나님도 못 듣는다. 하나님의 귀가 내 귀안에 와 있다. 내 귀 아니고는 하나님은 못듣는다. 자면서 잠꼬대로 한 것은 기도도 아니요, 하나님이 듣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깨어 기도해라” 하지 않았나? 그럼 씨알의 기도도 그렇다, 깨어어 해야지, 민중이 제 소리를 제 소린줄 알고 제 귀에 대고 해야 한다. 모든 탄원, 모든 선언, 모든 항의, 모든 찬송은 다 민중이 제게 대하여, 저를 통해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민중이 뭐냐? 씨알이 뭐냐? 나다. 나대로 있는 사람이다. 모든 옷을 벗은 사람, 곧 알 사람이다. 알은 실, 참, 리얼이다. 임금도, 대통령도, 장관도, 학자도, 목사도, 신부도, 군인도, 관리도, 문사도, 장사꾼도, 죄수도 다 알은 아니다. 실재는 아니다. 그런것 우주간에 없다. 그것은 다 허망한 욕심의 만신당 속에 있는 우상들이다. 이것들은 그 입은 옷으로 인하여 서 있는 것들이다. 정말 있는 것은, 알은, 한 알 뿐이다. 그것이 알 혹은 얼이다. 그 한 알이 이 끝에서는 나로 알려져 있고, 저 끝에선 하나님, 하늘, 브라만으로 알려져 있다. 민이란 곧 그러한 모든 우연적. 일시적인 제한, 꾸민을 벗고 바탈대로 있는 인격이다. 옷으로 말미암아 즉 밖에서 오는 것을 덧붙임으로 말미암아 있던 모든 우상들이 없어지고야 마는 날이 와도 이 알 사람, 알 생명은 없어지는 날이 없다. 알 사람, 곧 난 대로 있는 한 사람만 있어도 전체다. 그것이 민이다.
모든 정신적 물질적 활동의 목표를 마치니, 간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씨알’ 이란 것이 그 표어가 돼야 옳은 일이다. 그 밖의 모든 표어는 다 속임이다.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해방의 구주로 알아 그에게 드리는 찬송을 작곡했다가 그의 하는 꼬락서니를 보고 그 제목을 뜯어고쳤다고는 하지. 이것은 모든 우상과 그것을 찬양하는 모든 물질주의적 계급주의적인 예술의 운명을 표시하는 본보기다.
역사의 한 길에는 ‘ 민에로’ 라는 살표가 꽂혀 있다. 모든 나라 모든 문화는 씨알로 향하고 있다. 시보다는 소설, 장편보다는 단편, 그림보다는 사진, 연극보다는 시네마의 경향은 오로지 민 때문에 되는 일이다. 물은 바다로 가는 것이라면 역사는 씨알로 간다. 바다가 모든 물의 근본이요, 끝이듯이 씨알도 모든 인간적인 존재의 알파요 오메가다. 일찍이 골짜기 시내 같은 씨족 시대가 있었고 소 같은 봉건시대, 폭포같은 민족시대, 댐 같은 제국주의 시대가 있는 일이 있지만 그것이 역사의 구경 있을 곳은 아니었다. 이제는 허허 끝었는, 영원의 음악을 아뢰는 씨알의 바다에 들기 시작했다. 아직도 빛 멀어가는 왕관이 몇개 남아 있는 것 아니나, 그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거품이다. 이 보수주의의 이 나라조차도 민국을 선언하지 않았나? 될 수만 있다면 임금질이라도 했으면 하는 꿈을 꾸는 사람도 있기에 하겠지만.
씨알로 감은 결국 하나님으로 감이다. 바다가 하는 물의 내려온 것이듯이, 그리하여 바다의 길은 올라가는 데 있듯이 씨알은 하늘말씀의 내려온 것이요, 씨알의 운동은 곧 하늘로 올라가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언제나 바다의 품에 깃들여 있듯이 하늘의 뜻은 언제나 씨알의 가슴에 내려와 있다. 그 하늘과 바다의 혼인하는 데서 자연적으로는 초목을 기르는 비, 바람도 나오며 천지를 흔드는 우레, 번개, 태풍, 폭풍이 나오고 역사적으로는 평화시대가 나온다. 씨알을 받듦이 하늘나라 섬김이요, 씨알을 노래함이 하나님을 찬양함이다. 세속의 일을 맡았다는 정치에서는 도리어 민의 세기인 것이 청천백일 같아 가는데 정신계를 맡았다는 종교에서는 거꾸로 시대를 거스르는 것 같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계급주의, 지배주의의 성직제를 고집하며 그것이 자랑이나 되는 듯이 알고 있다. 그러나 가을이 되도록 올챙이 꼬리가 못 떨어진 것은 부끄럼이요, 고통이지 자랑할 만한 복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귀족주의적 사고방식의 상징이던 월궁항아가 영원의 비밀로 숨겨둘 수 있을 듯 하던 그 뒷잔등을 민중 앞에 내놓고야 마는 이 과학시대에 시퍼렇게 젊은 것들이 두 다리 사이에는 틀림없이 냄새나는 곳이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대표라고 절을 하고, 돌. 나무를 보고 부처라 절을 하고, 정치상의 한 기관밖에 아니되는 것을 아버지라 하니, 대체 생각이 있느냐, 없느냐? 그형상을 보는 것 아니라 그 나타내는 뜻을 보고 한다고, 무엇을 알기나 하는 듯 입을 깔지 모르지만 그렇게 뜻을 위하거든 절도 뜻으로 하려무나. 하필 그 대강이를 숙일 것은 무어냐? 그것이 그렇게 쓰라는 대강니냐? 그것이 네 대강이냐? 그것이 우리 것 아니냐? 네 주인이 누구냐? 우리 민 아니냐? 그렇지 않으면 정신으로 섬길 하나님 아니냐? 왕이란 건 뭐며 황이란 건 뭐냐? 천지간에 교황이 있다면 너다. 너 자신이다. 부처가 있다면 너다. 너 자신이다. 네가 누구를 보고 절을 하느냐? 네가 절을 하려거든 속으로 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다마는 그 대강이를 우리 민의 보는 앞에서는 그렇게 쓰지 말라. 우리 마음이 슬프다.
그러나 슬픈 것은 그것만 아니다. 우리에게 대중이란 이름이 씌우니 그런 모욕이 어디 있나? 우리가 저 석어진 특권계급같이 ‘대’ 라, 우상의 교도인 줄 아나? 큰 것은 사실은 속이 작은 놈들이 좋아한다. ‘한’ 은 본시 우리 것인데 큼을 새삼스레 주장할 것이 무엇이냐? 본시 우리 것인 것을 너희가 한때 도둑질 해다 쓴 것인데 이제 가만히 졸렸으면 그만이지, 그런 빤히 들여다뵈는 발라맞춤은 도리어 우리 비위에 거슬린다. 도대체가 대한민국의 ‘대’ 는 무엇 하자는 건가? 한이 본래 크다는 뜻인데 ‘대’ 를 또 붙이니 우습고, 대가 대한제국 때에 쓰던 19세기 유물이지, 민국에 어찌 그것이 맞느냐? 대한이라면 어쩐지 뿔관쓰고 국제도시에 나가는 것 같다. 외국말로 할 땐 ‘코리아’ 로 되기가 다행이다. 나 보기엔 무식 같다. ‘대’ 가 영광이던 시대는 옛말이다. 대영제국, 피터 대제, 명치대제, 대일본제국, 조그만, 정말 조그만 스위스 더 크더구나. 하는 일이 어쩌면 이리도 열 가지로 떨어졌느냐?
보기 싫은 것이, 여관 중에도 가장 너절한 것은 대중여관이라 하고, 식당도 제일 더러운 것은 대중식당이라 하니 어찌 민중의 대접이 그거냐? 값이 싸고 물건이 내린 것은 가난한 민중이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더러울 것까지는 뭐냐? 또 더럽게 하는것은 네 마음데로지만 대중은 왜 파느냐? 나라의 주인이 우리인데 대접이 어찌 그럴까? 그것이 또 참겠다. 대중잡지, 대중소설이란 데 이르러서는 참 참을수 없다. 천하에 입에 못담을 더러운 것을 써 놓고는 대중소설이라 하니 민중은 그렇게 더러운 거냐? 내놓은 말로 그 소설 쓰는놈들 우리가 상관이나 있느냐? 언제 우리가 악수나 해본 일 있느냐? 그 쓰는 놈도 그 내용의 모델이 되는 것도 그것은 다 귀족주의의 썩다 남은 찌꺼기지. 아침에 별을 이고 나고 저녁에 또 별을 이고 돌아오며 뼈가 빠지도록 일하여도 입에 풀칠도 어려운 정말 민중 씨알은 그런거 생각할 틈도 없다. 이 억울한 누명을 변명해주는 작자가 하나나 있느냐? 너희가 민중을 알고 민중의 친구가 되고 민중이 되려면 그 ‘대중적’ 이란 말 집어치워라! 우리는 이름조차 잃었다. 잃어진 우리 이름을 찾아내라! 이것이 또 설움 아닌가?
잘못 든 길.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지식이 없고 점잖은 이들이 내가 누구를 가르키려 드느냐 할 것이다. 혹은 나이와는 맞지 않게 센티 아니냐 비웃을 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으면 미쳤다 할 것이다. 그러나 다 아니다. 철 없는 시절에 교사 노릇 해 보려고 생각한 일도 있었으나 그섯 집어치운 진 이미 오래고, 또 십계명을 모조리 다 범한 내가 가르치긴 누구를 가르칠까? 센티람 센티인지 모르지만, 너더러 센티라기 전에 세상을 좀 내다봐! 그러면 내 신경이 지쳤다기 보단 말하는 편이 도리어 마비된 것임을 알 것이다. 미쳤다는 거야 옳다면 옳은 말이지만, 내가 공연히 미쳤나? 그런 것이 아니다. 내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길은 무슨 길, 글 팔아 먹는 길에 들어간 것이란 말이다. 본래 글주재가 있는 것도 아니요, 팔아먹잔 생각은 참 없노라 했는데 훌륭하게 글 팔아 먹는 놈이 되지 않았나? 스물 여덟에 이미 오산학교에 선생이랍시고 취직을 할 때 그 첫날 지금도 기억나는 일이지만, 미션 학교도 아닌데서 요한복음 10장의 “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는 구절을 읽었다. 이제 생각하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그러고는 10년을 한 달도 빠짐없이 월급봉투를 또박또박 세어서 받어 먹었다.
그만두고 나서는 농사로 돌아가자던 것인데 어찌해서 일 뜻같지 않았고 38선을 넘은 즉 참 알몸이었다. 월급을 받으면 가족에겐 먹고 살아갈 만큼 준 다음에 다 책을 사노라 했는데 그것도 다 내버리고 왔지. 평소에 조그맣기는 하지만 그 서재에 들어낮으면 죽은 글로 아니 알고 살아 있는 스승 친구의 둘러않은 가운데 있노라 했는데 나라는 언제 찾을지 생각을 하게 되면 남강을 연상하는 남산만을 뻔히 보게 되는 일제시대에 그것이 단 하나의 위로요 오아시스였는데, 그것을 버리고 나왔다. 정말 살아 있는 뜻이 그들과의 사귐에만 있는 살아있는 친구, 스승으로 알았다면 정말 그렇게 사랑했다면, 두고 왔을까, 혹은 그 껍질은 못가지고 와도 산 속알의 스승은 여기, 공산당이 따라올까 두근두근은 하나마 여기 이 가슴속에 있다 해서 일까? 아무튼 마흔다섯가지를 책을 상대로 하고 글을 가지고 살았다는 사람이 책은 한권도 없이 알몸이 됐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밥을 벌 생각은 하나 하지 못하고 이날까지를 말만 하고 남의 신세로 살아간다. 하늘이 내새웠다는 사명감이나 있으면 얻어먹어도 제 마음으론 하나님이 먹여주신다 할 것이나, 이것은 분명한 의식을 가지고 빌어먹는 살림이다. 신부나 목사처럼, 별것없는 사람들의 쑹쑹이로 된 투표요, 안수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특별하신 뜻으로 내 그 거룩한 직임을 맞았지 할 만큼 정신이 수양이 됐으면 편한 마음으로나 받아 먹겠는데 그렇지도 못하니 이것은 스스로 부끄러눔이 있는 살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