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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92호
2020.6.6. (음 4.16. - 윤)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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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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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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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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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란 화를 내지 않고 그러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은 채 어떤 얘기라도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로버트 프로스트(美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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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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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
광화문 광장에 흰 천이 덮인 것처럼 보였다. 팔랑이는 미사포가 탐스러운 함박눈처럼 다가온 것이다. 산타의 빨간 옷이 화면에 선연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순교를 상징하는 붉은 제의가 언뜻 그렇게 보인 것이다. 시청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의 노란 불빛이 반짝이는 듯 흩날렸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리본의 나풀거림을 장식이 깜박이는 것처럼 본 것이다. 여름의 기세는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물러섰고 ‘비바 파파’의 함성과 우레 같은 박수, 기도의 힘이 그 자리를 채웠다. 광화문과 시청 먼발치에서 함께한 ‘시복식 현장’이 그랬다.
‘왠지 울컥’, ‘콧등 시큰’, ‘괜히 눈물’…. 프란치스코 교황을 대하는 누리꾼의 반응이다. 교황이 내민 손길에 세월호 유족이 친구(親口, 숭상하고 존경하는 대상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입을 맞춤)하는 광경은 숱한 감동의 하나일 뿐이다. ‘유민 아빠’의 편지를 손수 주머니에 넣는 장면은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상대에 마음 못 여는 대화는 독백’이라 한 말씀은 잠언으로 남는다. 맞다. 대화는 ‘말하기’가 아닌 ‘듣는 것’으로 완성되고, 소통은 ‘전달’과 ‘수용’이 어우러지는 것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시복 청원’을 받아들인 교황은 ‘가경자’(可敬者, 시복 후보에 대한 존칭)를 ‘복자’로 허락했다. 가톨릭의 ‘복자’, ‘성인’, ‘시복(식)’, ‘시성(식)’의 뜻은 여러 매체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수단’(목부터 발목까지 단추가 달려 있는 사제복), ‘장백의’(제의 아래 받쳐 입는 길고 흰 옷), ‘영대’(목에 걸어 가슴 앞으로 늘어뜨리는 띠) 같은 명칭은 낯설지 않은 표현이 되었다. ‘교황 성하’에서 ‘교종’으로, 다시 ‘낮은 자의 목자’로 다가선 교황 또한 낯설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머물렀던 닷새의 대한민국은 ‘8월의 크리스마스’로 기억되리라.
……………………………………………………………………………………………………………… 땅꺼짐
'싱크홀’은 지질 현상의 하나를 가리키는 용어다. 정보통신기술(IT) 용어로 쓰일 때도 있다. 지질학에서 ‘싱크홀’은 ‘용식 함지’라 한다. ‘용식’은 빗물이나 지하수가 암석을 녹여서 침식하는 현상, ‘함지’는 움푹 꺼져 들어간 땅을 뜻한다. 석회암 지역에서 주로 발생하는 ‘싱크홀’이 최근엔 자연 지형과 무관한 곳에서도 일어난다. 지하 난개발의 결과로 추측하지만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정보통신기술 분야의 ‘싱크홀’은 ‘디엔에스(DNS) 싱크홀’, ‘디도스(DDoS) 싱크홀’처럼 ‘악성 봇 차단 솔루션’의 하나를 이르는 이름이다.
문화방송이 <신비한 티브이 서프라이즈>에서 소개한 ‘싱크홀’은 외국의 불가사의 현상을 엮어 전한 ‘남의 얘기’였다.(2010년) 에스비에스가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괴구멍 미스터리, 싱크홀의 정체는?’을 다루면서 비로소 ‘한국도 싱크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2012년) 기사 검색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언론에 ‘싱크홀’이 등장한 때는 2010년이다.(네이버) 나라밖 소식으로 이따금 알려지기 시작한 ‘싱크홀’은 국내 발생이 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기사 빈도가 늘어났다. 최근 ‘제2롯데월드’ 공사현장 근처 사고로 ‘수도권 주민 95%, “싱크홀 무서워”’(<한겨레> 8월21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싱크홀’(sink hole)이 낯설 때 매체들은 ‘순식간에 땅이 푹 꺼져 버리는(현상)’, ‘멀쩡하던 땅이 갑자기 꺼져 생기는 구멍’, ‘(땅이)가라앉아 생긴 구멍’, ‘지반이 붕괴되는(현상)’, ‘거대 구멍’, ‘움푹 팬 웅덩이’, ‘지반침하’ 따위의 설명을 붙였다. 명사인 원어를 설명적으로 다루거나, 웅덩이(움푹 파여 물이 괸 곳)처럼 풀이가 적절하지 않은 것도 있다. ‘땅꺼짐’은 어떨까. 널리 쓰이고(14만2000건, 구글), 정부 발표문에도 나오는 표현이다.(‘물관리 종합대책’, 1996년 8월)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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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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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대한 경멸 - 기형도
손님이 돌아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된다.
몇 자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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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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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씨알의 설움 (1/6)
글을 팔아먹고
“얘, 온 장터에 두루 다녀두, 쌀 사자는 놈은 있어도 글 사자는 놈은 없더라."
이것은 내가 여남은 살 때 사점서 소학교를 졸업하려 할 때 들은 소리인데 오늘까지 못 잊는다. 그것은 나와 한 반에 다니던 동무의 아버지가 저도 중학교에 간다고 조르는 아들을 억누르느라고 한 소리였다. 그 아버지는 농사를 하는 사람이요, 구두쇠였다. 아버지의 그 말에 그만 눌려 말도 못하고 시무룩해 버리는 동무를 보고 중학교엘 가기로 되어 있던 나는 무슨 죄나 지은 듯 미안해 무슨 말을 해줘야 할 듯하면서도 하지도 못했던 때의 그 슬픈 기분이 지금도 생각하면 끓는 솥뚜껑만 열면 훅 하고 김이 치달아 오르듯이,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그는 그 다음 아버지를 따라 농사를 했다. 학교엘 갔다 방학에 돌아오면 아버지의 얼굴과 손이 점점 시커먼 농사꾼이 되어 가는것이 보였다. 그 손을 좀 만져보고 싶었지만 차마 못했고, 천연히 서로 얘기는 하면서도 혹 뽐낸다 할 듯해서 두렵던 생각, 될수록 공부나 내가 가 있는 도회지의 얘기는 피하려 했던 생각이 지금도 같이 있다.
그 후에도 넉넉지는 못한 농가살림을 한 그가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그것은 알 길조차 없다. 그와 나와는 서로 길이 달라졌다. 그는 쌀 팔아먹는 사람이 됐고, 나는 글 팔아먹는 사람이 됐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행복하다 할까? 그가 설혹 농사도 뜻같지 않아 어느 때 굶어죽었다기로서, 혹 지금 공산당 밑에서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다 가정하기로서, 오늘날 글을 팔아먹고 말을 팔아먹고 있는 이 나보다 더 비참하다 할까? 그 구두쇠의 말에는 진리가 있다. 사실 쌀 사자는 사람은 있어도 글 사자는 사람은 없다. 그는 사람은 밥 먹어야 산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권위를 가지고 그 아들을 누른 것이다. 미워서가 아니라, 그래야 살겠으므로, 그리고 그대로 된 그는 설혹 농사를 하다가 죽었더라도 적어도 사는 날까지는 제 밥을 당당히 먹다가 당당히 죽었을 것이다. 내 손으로 나와 내 가족의 먹을 것을 벌지 못하고 말을 팔고 글을 팔아먹는 나는 빌어먹은 것이요, 도둑질을 해 먹은것 아닐까? 이마에 땀을 흘려 근본된 흙을 갈아먹어야 살리라 한 말씀을 진리로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내 밥을 내 손으로 벌지 못하는 나는 말을 팔았어도 거짓말을 판 것이다. 그리고 거짓말이 무엇인가? 내 혼을 팔고 속을 팔아 얻은 빈 허울 아닌가? 나는 조상 때부터 물려온 밭을 버리는 날 또 생명의 조상에서 받은 혼을 내버렸다. 이거 슬프지 않은가?
빵이냐 말씀이냐
기독교 신자로라는 사람들은 툭하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한다. 나더러는 기독 신자가 아니요, 이단이라니 그거는 그래도 좋지만, 기독교도거나 불교도거나 그것이 내게는 문제 아니요, 또 남이 뭐라 부르거나 그것을 문제삼고 싶지는 않지만, 이 말씀만은 나도 될 수 만 있다면 죽음으로라도 지키고 싶은 진리다. 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또 이 말처럼 많은 사람을 죽이는 말은 없다. 이 말 때문에 허다한 사람이 육신으로 굶어죽고 정신으로 굶어죽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말의 요점은 ‘하나님의 입’ 이라는 데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입은 사람의 입은 아니요, 그말씀은 성경책도 신부. 목사의 설교도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종교의 경전, 종교가의 설교로 안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신부들이요, 목사들이다. 그들은 이것이 참 사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빵으로는 못산다고 입에 침을 말려가면서 책과 말을 순진한 농사꾼에게 주고는 그 손에서 빵을 빼앗아 돌아서서는 제가 먹는다. 마치 자기는 못쓸 것을 처분하는 쓰레기통이 되는 듯이. 빵이 정말 먹고 사는 것이 못된다면 저는 왜 먹었나? 밥 아니 먹고 산 종교가가 이날껏 한 사람이나 있었나? 성경만 보고 산 신자가 이날껏 하나나 있었나?
기독교만 아니라 도무지 종교, 종교만 아니라 통히 글에 속한 것은 거의 다가 부도수표다. 이 글자만 가지고 하나님이라는 생명 은행에 가면 틀림없이 생명의 현금을 내준다는 것이 글의 뜻이지만, 그래서 피땀 흘려 번 빵을 주고 사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 가면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 발행자가 예금이 없기 때문이다. 말을 하고 글을 쓰려면 실지로 피땀 흘리고 손발 놀려 일하여 얻은, 즉 스스로 얻은 것의 예금이 있고서야 할 것인데, 은행이란 제도, 다시 말하면 종교니 철학이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하는것이 있는 것을 기화로 예금은 한 푼도 없는 것들이 수표, 곧 손자리를 내서 팔아 먹는다. 말이 팔아먹는다지(종교가, 학자, 예술가) 사실은 도둑질이다. 정말 금을 캐내어 맡겨놓은 것은 석가요, 공자요, 예수요, 소크라테스요, 미켈란젤로요, 아인슈타인인데, 그밖의 여남은 놈들은 손자리만 내가지고 그 손들의 캐낸 금을 도둑질 해 먹고 호강하잔 놈들이다. 옅은 생각에 손은 같은 손이니 모르겠지 해서 하는 장난이지만 사람은 어리석어 몰라도, 그 손 하나하나 제 글대로 만든 하나님이 그것을 모를까? 다 안다.
어드럼살 도장을 찍는다니, 살이야 말로 도장이다. 나무나 수정에 새긴 것이 말의 참을 증명하는 도장이라면, 살. 몸은 얼. 혼의 참을 증명하는 도장이다. 내 살,내 몸이 닿지 않은것, 내 피 내 땀이 배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니다. 수표는 그 금 캐낸 손의 자리를 말하는 것이지 아무 손이나 찍으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손글이 각각 다르고 일생 변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그 뜻은 아무래도 일했나 아니했나를 밝히잔 하나님의 뜻에서 된 일이다. 그러기에 도둑놈 잡는 데 그 손글이 절대 필요하지 않은가? 흰 손 가지고 농사꾼의 피로 찍은 손글을 속여먹고 하나님의 말씀 전하노라고 하던 놈들이 혼쭐이 나는 날이 올 것이다.
예수는 말을 입으로 한 것이 아니요, 몸으로 했다. 그래서 자기 말을 믿으란 말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했다. 그가 피땀흘려 한 말씀을 몇 주일 교회에 가고, 몇 해 신학교가 건들건들 다니고는 제 거나 되는 듯 팔아먹으려는 놈들, 그리고 다른 사람이 제 딴으로 조금 얻은 것 있어 그것을 증거하고 그 때문에 참이 뭔지 아는 민중이 조금 거기 귀 귀울이는 것을 보면 제 편에서 저건 가짜라고 큰소리 치는 놈들. 단테도 옥엘 갇혔다. 밀턴도 눈이 어두웠다. 미켈란젤로도 고개가 기울어졌고, 베토벤도 귀가 먹었고, 톨스토이도 나이 여든이 넘어 객사를 했고, 키에르케고르도 수심 슬픔중에 젊어서 죽고, 니체는 미쳤더라.
천장이 있는지 없는지 내 모르지만, 설혹 있다 해도, 저 맑은 하늘위라 해도, 종교가 아무리 귀하고, 학문 예술이 아무리 고상하다 해도, 말을 해서 어리석은 지아비 지어머니의 눈물을 짜낸 일이 있고, 글을 써서 일없는 동물을 구경시키는 동물원인 도회지란 데서 한때 종이값을 올린 일까지 있다 하더라도, 배꼽이 떨어져서부터 황토 밑에 들어가는 날까지, 언제 그 흙을 한번 만져본 일도 없고, 일생 70년 하루도 빠짐없이 또박또박 먹는 밥을, 그 벼를 언제 어떻게 심으며 그 쌀에 물을 얼마큼이나 두는지 한번 알아도 보지 않은 놈은, 그 천당에 절대 가지 못할 것이다. 기적 기적, 권능 권능 하지만 흙에서 밥을 만들어 내는 이야 말로 권능있는 기적 아닌가? 시라, 그림이라, 음악이라 하지만 바위에서 꽃이 나오고 똥에서 과일이 나오는 이거야 말로 정말 예술 아닌가? 지식, 학문 하지만 아무리 발달했기로서 기초의 밥과 옷 만들기를 잊어버린 지식이 무슨 지식일까? 그런 것 모르고는 하늘 나라엔 못간다. 설혹 그런 비누방울 같은 것들이 용납하는 하나님이 있다 가정하더라도 그 하나님은 우리 씨알이 들어내 버릴 것이다. 인중승천이라더라,사람이 잘 화합하면 하나님도 못견딘다. 그 따위 비누방울 하나님은 문제도 아니된다.
땅을 갈아먹는 씨알의 하나님은 발을 흙 속에 디딘 하나님이다. 왜 그러자 않던가, “내 아버지는 포도원의 농부” 라고! 글보다 바탕 종교가가 부도수표를 쓴다고 욕을 하니 신부, 목사, 스님은 또 나를 흰자위로 볼지 모르고, 아주 진리 옹호하는 마음이 강하면 “저런 놈 어서 벼락을 칩시사!” 기도라도 했을지도 모른다. 들으니 요새 각처에 동상을 세운다고, 우상숭배하게 된다고 그 동상을 넘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한 할머니가 있다더라. 있을 법한 일이지. 아닌게 아니라 동상은 우상이지. 우상숭배하는 마음 없으면, 즉, 참만을 높이는 마음 있으면 그런 건 아니 세운다. 동상도 부도수표다. 동상은 후대 자손에게 알리기 위한 거라 할 지 모르나, 그대는 헝가리 길거리에 개똥처럼 구르는 스탈린 동상의 모가지 못 보았나? 동상 아니 세워도 전해지는 것이 참사람이지. 예수, 석가의 동상 누가 세우겠다는 소리나 하더냐? 잊지 않을 만한 것이 아니라, 잊을 만하기 때문에 그 보다도 잊으라고 세우는 것이다. 형상 있는건 초아진부터 잊어버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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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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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器晩成(대기만성)
大(큰 대) 器(그릇 기) 晩(늦을 만) 成(이룰 성)
삼국지 위서(魏書) 최염(崔琰)전의 이야기. 동한(東漢) 말년, 원소(袁紹)의 측근에 최염이라는 식객이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술을 좋아하여, 23세에야 논어 등을 공부하였다. 그는 처음 원소의 부하로 일했으나, 후에는 조조(曹操)의 휘하에서 상서(尙書)를 지내며 태자 옹립문제를 해결하여 공정한 관리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최염에게는 최림(崔林)이라는 동생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에 아무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명망도 없었으므로, 친구들이나 친척들이 그를 경시하였다. 그러나 최염은 항상 그를 존중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는 큰 그릇은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만들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此所謂大器晩成者也). 그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과연 최림은 훗날 위(魏) 문제(文帝)의 휘하에서 사공(司空)을 지냈다.
大器晩成 이란 큰 인물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뒤늦게 이루어짐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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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될 사람은 갑작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
《出典》'三國志' 魏志 / '後漢書' / 老子
⑴《三國志》'魏志'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삼국시대, 위(魏)나라에 최염(崔琰)이라는 풍채 좋은 유명한 장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촌 동생인 최림(崔林)은 외모가 시원치 않아서인지 출세를 못하고 일가 친척들로부터도 멸시를 당했다. 하지만 최염만은 최림의 인물됨을 꿰뚫어 보고 이렇게 말했다.
"큰 종(鐘)이나 솥은 그렇게 쉽사리 만들어지는 게 아니네. 그와 마찬가지로 큰 인물도 대성(大成)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너도 그처럼 '大器晩成'하는 그런 형이야. 두고 보라구. 틀림없이 큰 인물이 될 테니……."
과연 그 말대로 최림은 마침내 천자(天子)를 보좌하는 삼공(三公)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⑵《後漢書》에 보면, 후한을 세운 광무제(光武帝 : 25-57)때 마원(馬援)이란 명장이 있었다. 그는 변방의 관리로 출발하여 복파장군(伏波將軍)까지 된 인물이다. 마원이 생전 처음 지방관리가 되어 부임을 앞두고 형인 최황(崔況)을 찾아가자 그는 이렇게 충고했다.
"너는 이른바 '大器晩成'형이야. 솜씨 좋은 대목이 산에서 막 베어 낸 거친 원목을 시간과 노력을 들여 좋은 제목으로 다듬어 내듯이 너도 네 재능을 살려 꾸준히 노력하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부디 자중(自重)하라."
⑶《老子》에도, '큰 네모(四角)는 모서리가 없으며 큰그릇은 늦게 만들어진다(大方無隔 大器晩成)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짧은 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동의어】대기난성(大器難成)
【유사어】대재만성(大才晩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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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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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2. 평범한 행복
어느 약속 - 김구연
한 가슴에 난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다면 난 헛되어 산 것이 아니니라. 한 인생의 아픔을 달래 줄 수 있다면, 한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기운을 잃은 한 마리의 개똥지빠귀를 둥지에 데려다 줄 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산 것이 아니니라. - 에밀리 디킨슨
내가 파월 국군으로 부산항에서 배를 타려고 전방 모 기지에서 기차로 출발, 청량리역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수많은 환송 인파가 행운을 빌어 주고 있었지만 나는 고향이 경상도라 아무도 나오지 못했다. 그냥 차창에 기대어 바깥 인파만 쳐다보다 기차가 출발 신호와 함께 서서히 홈을 빠져 나가는 순간,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하얀 쪽지를 건네주었다. 캄캄한 밤이라서 그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분간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쪽지를 받아 들고 읽어 보았다.
<약속합시다. 살아서 돌아오신다고.>
글씨 밑에 주소와 이름이, 그것도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말 고마운 여성이구나 싶어, 월남에서 전투를 하면서도 가끔 나는 그 쪽지의 주인공을 생각했다. 사실 벅찬 소대장의 전투 임무 때문에 자주 그 쪽지의 주인공에게 소식을 전해 주진 못했지만 그 여성은 꼬박꼬박 서신을 보내 주었다. 그후 나는 상처를 입고 불구자가 되어 조국에 돌아왔다. 병원 생활을 끝내고 지금은 사회인이 된 나는 그 여성의 고마움이 생각나서 주소록을 뒤져 보지만 찾을 길이 없다.
(회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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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과학/예술/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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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레오 - 장 피에르 모르
1609년 5월 베네치아, 돛대와 밧줄이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한가운데에서 병기창의 노동자들이 세계의 모든 부를 베네치아로 운반할 선박들을 만들고 있었다. 이처럼 소란한 가운데 이리저리 거닐면서 무언가를 적기도 하고 기술자들에게 질문을 건네기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를 모르는 병기창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갈릴레오였다.
호기심 많은 교수
선박의 제조에는 도르래, 윈치, 권양기, 무거운 것을 옮기는 굴림대, 배를 물에 띄우거나 반대로 뭍으로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는 빗면 같은 기계들이 필요하다. 이 기계들은 사람들이 줄로 끌거나 지렛대를 사용하여 작동시켰다. 말을 제외하면 별다른 '동력'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그나마 병기창에서는 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 이러한 기계의 작동은, 축성술의 이론과 천문학과 함께 베네치아에서 30km떨어진 파두아 대학의 학생들에게 갈릴레오가 가르치고 있는 '수학'이다.
베네치아 학단의 이방인
기계의 원리를 강의하는 대학 교수라 해서 직접 그 기계를 관찰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나가는 일은 오늘날에도 보기 힘들다. 그러니 그 시절 갈릴레오는 그야말로 괴짜 교수였던 셈이다. 동료 교수들에게 장인이나 뱃사람의 세계는 대학과는 전혀 다른 별세계였을 뿐이다. 그들의 강의는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 작가의 저작을 주해하는 데 국한되어 있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갈릴레오는 물리적 법칙은 경험을 통해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험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과 모순될 때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했다. 어쨌든 과학이 2000년 전부터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시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기술분야 역시 멈추지 않고 발전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점은 병기창을 통해 잘 드러났다. 예를 들어 갈릴레오는 새로 개선된 도르래를 주목했다. 나선형으로 홈이 패어 있고 노끈이 감겨 있는 나무토막 형태의 제동기였다. 이러한 생각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곳에서 발명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병기창에서 온 장인이 가져온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기능하는 것일까?
갈릴레오는 그것을 그렸다. 그는 베네치아의 예술가 사이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인정받는 삽화가였던 것이다. 그는 작업에 열중한 나머지 종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다. 모로시니 궁전에 알현에 가야 할 시간이 가까웠음이 틀림없었다. 걸어갈 것인가 곤돌라를 타고 갈 것인가? 갈릴레오는 오늘 저녁에는 걷기로 작정했다. 슬라보니아 제방을 따라 산책을 하고 싶었다. 날씨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 만큼 부드러웠고 걷고 있자니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항구의 갖가지 장비들이 이상한 향기를 뿜어내는 봇짐들 사이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부들은 밤에 바다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온통 먹물을 뒤집어쓰고 포석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문어를 한 무리 개구쟁이들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둘러싸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걸음을 늦추었다.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하여 류트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노랫소리가 흘러 나왔다. 훌륭한 류트 솜씨였다. 그 자신 류트 연주자가 아닌가! 그것은 과거에 피사에서 아버지가 가르쳐준 곡조였다. 피복상이던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는 음악가이자 작곡가였으며, 여러 권의 음악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갈릴레오가 총독의 궁전 가까이에 도착했을 때 만과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무 늦었다. 더 빨리 궁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곤돌라를 잡아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곤돌라가 대운하를 헤쳐 나가는 동안 갈릴레오는 오늘밤 그의 친구 사르피를 만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사르피는 10인위원회의 일원이자 종교와 역사를 연구하는 지식인이었다. 오늘밤에 사르피는 베네치아의 교황에 대한 독립을 저지하려는 예수회의공작에 대해 늘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외국인 여행자도 여럿 만나게 될 것이다. 흥미를 끄는 많은 여행자들이 안드레아 모로시니의 살롱을 거쳐갔다. 17년 동안 갈릴레오는 네델란드인, 프랑스인, 바바리아인, 라인강 연안 지방 사람들을 만났다. 곤돌라가 모로시니 궁전의 '수문'에 닿았다. 갈릴레오는 계단으로 뛰어내려 횃불이 타오르고 있는 아치 밑을 지났다. 1609년 5월의 그날 밤에 인생을 바꿔 놓을 새로운 소식을 접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상인이 튜브의 양 끝에 렌즈를 두 개 끼워 망원경이라는 장난감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찮은 장난감에서 미래를 본 갈릴레오
망원경은 이미 5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상인이 제작해 전파하던 망원경을 1608년에는 파리에도 전해졌다. 그러나 렌즈 두 개로 시력을 교정하도록 만들어진 이 안경은 장난감으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물체가 확대되어 보이기는 해도 두 세배 정도밖에 안 되었거니와 희미한데다 찌그러지기까지 했으므로 대중의 관심은 급속히 시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떠했을까? 망원경 소식을 모를 리 없던 프랑스나 프랑스의 과학자들은 어떻게 그것이 경탄할 만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대답은 충격적이다. 그들은 광학기구란 어떠한 것이든 간에 결코 아무런 이득도 가져오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해를 준다고 생각했다. 진리와 관계없는 환상이나 환영을 보게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갈릴레오는 그 원리에 대해 어렴풋한 설명을 듣자마자, 직접 망원경 제작에 몰두했다. 그는 동료들과 같은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물리적 법칙을 발견하고 검증하는 첫째 수단은 무엇보다 경험이었으며, 그 자신 기술분야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가 병기창에서 기계들을 관찰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 년 전부터 물리학적 원리와 수학적 원리를 이용한 도구들을 고안하고 제작했다. 중요한 것으로는 온갖 계산과 작도를 도와주는 '기하와 군사용 컴퍼스'가 있다. 또한 그는 망원경으로 돈을 벌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돈이 필요했다. 그의 교수 봉급은 대학의 의학 교수의 봉급에 비해 열배나 적은,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막내는 곧 세 살이 될 터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그는 토스카나에 살고 있는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그가 지참금을 주지 않으면 동생들은 결혼을 할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리하여 갈릴레오는 부유한 학생들, 특히 귀족 가문의 외국 학생들에게 개인 교습을 했다. 그 학생들은 대부분 하인을 데리고 그의 집에 기거했다. 거기다가 기하용 컴퍼스를 만드는 노동자 마르크 앙투안, 갈릴레오의 가족, 그의 학생들을 위한 텍스트를 베끼는 비서, 하인 몇을 덧붙이면 파두아에 있는 그의 집을 지배하던 소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대학에서 공식 강의를 해야 했는데, 당시 갈릴레오가 가르치던 과목에는 교과서가 없었으므로 모든 내용을 스스로 작성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는 17년 동안 수많은 경험을 했고 특히 역학 분야에서 중요한 법칙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발견을 정리하고 책으로 낼 시간이 전혀 없었다. 그가 그때까지 출판한 것은 고작해야 기하용 컴퍼스의 사용법을 설명한 소책자가 전부였다. 그는 친구들에게 사색할 시간마저 없다고 푸념을 했다. 만약에 망원경이 충분한 수입을 가져와 개인교습을 줄일 수만 있다면, 사색을 하고 핵을 쓸 수 있을 텐데, 그러나 그가 망원경을 만든 또 하나 중요한 이유는 망원경이 주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자유였다. 17세기 초 과학자들은 커다란 논쟁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2000년 전부터 강요되어온 낡은 사상에 의문을 제기했던 것이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을 알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그것을 존경해 왔다. 1597년, 그는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그 분야에서 많은 검토와 논증을 했으며 반박도 했지만, 감히 출판을 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1609년 당시, 갈릴레오는 적어도 20년 전부터 코페르니쿠스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이 점에 대해 공개적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학생들에게도 대학의 방침에 맞추어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다는 프톨레마이도스의 낡은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는 왜 이토록 신중한 태도를 취했을까? 첫째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은 프톨레마이오스와 모순될 뿐 아니라 성서에도 모순되기 때문에, 공개적인 지지에는 커다란 위험이 따른다. 성서에 따를 때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정지해 있으며 태양은 지구의주위를 돌아야 했다. 교회가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공식적으로 금지하지는 않았지만, 1600년 조르다노 브루노가 로마에서 화형을 당한 것은 그의 학설을 지지한 데에 부분적인 다른 불만도 품고 있었으며,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을 공개적으로 변호한다 해서 화형을 당할 염려는 없었다. 그러나 종교재판의 주목을 받게 될 것이며 모든 동료들과 무자비한 전투를 벌여야 할 것이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권위를 공격한 그에게 이미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갈릴레오가 겁쟁이라거나 격론의 장에 나서는 일을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다. 그후의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해 준다. 단, 그는 싸워야 한다면 견고한 사실에 바탕을 두기를 원했다. 그에게 진실로 견고한 유일한 것은 경험이었다.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옳다는 많은 '검토와 논증과 반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초등학생의 연습'이라 표현한 것처럼 그는 아직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학설을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탄약이 필요했다. 그 탄약은 경험이 입증해줄 결과였다. 그는 망원경이 증거를 제시해 주기를 바라면서 곧장 망원경 제작에 착수했다. 다행히 곧 여름방학이 시작될 참이었다. 갈릴레오는 보통 여름이면 피렌체에 가서 토스카나의 젊은 영주인 메디치가의 코시모에게 교습을 했다. 그러나 올해는 그의 부친이 별세한 터라 코시모가 대공의 자리에 올랐고 수업을 듣지 않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에 몰두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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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은 모두 시계를 갖고 있다
제6장 생물 시계의 다양한 주기
대자연의 사계 - 곤충
꼭 포유류의 생활 리듬이 아니더라도 대자연의 사계를 생각해 보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대자연이 계속 다른 모습을 띠어 간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대자연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요인은 너무도 많다. 지금은 그 다양한 요인 중 곤충의 변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여러분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철마다 곤충도 변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봄이 오면 배추흰나비가 팔랑팔랑 날개짓을 하며 날아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여름이 오면 매미가 짙은 나무 그늘에 숨어 맴맴 울어제낀다. 가을이 오면 낮에는 고추잠자리가 맴을 돌며 날아다니고, 밤마다 귀뚜라미의 고운 노래가 들려온다. 다양한 곤충이 계절을 바꾸어 가며 자연의 서정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봄에 배추흰나비가 날고, 여름에 매미가 울고, 가을에 고추잠자리가 날고 귀뚜라미가 우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귀뚜라미는 어째서 봄이 아니라 가을에만 노래를 하는 것일까? 곤충들이 마치 언제 무대에 나서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연극 배우들처럼 꼭 제철에만 그 모습을 나타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곤충들이 계절에 따라 변하는 밤과 낮의 길이, 다시 말해 '해의 길이'를 알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곤충들은 해의 길이를 읽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배추흰나비를 예로 들어 보자. 배추흰나비의 생활사를 살펴보면 계절에 따라 잠을 자는 세대도 있고 잠을 자지 않는 세대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잠을 자는 세대라는 것은 겨울을 번데기 꼬치 속에서 나는 것을 말하고, 잠을 자지 않는 세대라는 것은 번데기가 겨울을 나지 않고 곧바로 엄지벌레가 되는 것을 말한다. 번데기의 상태로 꼬치 속에서 겨울을 난 후, 봄이 되어 멋진 날개를 달고 나온 배추흰나비는 알을 낳는다. 그러면 그 알이 깨어나서 배추흰나비의 애벌레(배추벌레)가 되어 자라난다. 그리고 이 애벌레가 자라나는 것은 봄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들어 해가 점점 길어질 때이다.
애벌레의 머릿속에는 '광주성 시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광주성 시계가 하는 일은 해의 길이를 재는 것이다.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가진 광주성 시계는 초여름이어서 해가 길 때에는 즉시 한 세대를 더 살라고 명령한다. 이런 명령을 받아들인 배추벌레는 번데기 상태가 된 후에도 긴 잠에 빠지지 않고 곧바로 날개를 달고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다시 알을 낳는다. 이런 세대는 잠을 자지 않는 세대이고, 한 세대를 다시 반복하기 때문에 봄에 배추흰나비가 낳은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가 자라나, 다시 나비가 되어 알을 낳는다. 이 새로운 세대의 나비가 낳은 알에서도 다시 애벌레가 깨어난다. 이 애벌레가 가진 광주성 시계도 해의 길이가 길 때에는 다시 한 세대를 반복하라고 명령한다. 이런 명령을 받은 애벌레가 변한 번데기는 긴 잠에 빠지지 않고 바로 나비가 되어 다시 알을 낳는다. 이런 일이 계속 되풀이된다. 그리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해가 점점 짧아진다. 그러면 애벌레의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광주성 시계는 해가 짧아졌다는 것을 알고는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은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는 시기를 조금 늦춘다. 그래서 더 오래 먹이를 먹고, 몸 속에 영양분을 많이 저장하는 것이다. 이런 준비는 모두 번데기가 되어 오랫동안 잠을 잘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번데기가 되어 겨울을 나는 것이다.
이번에는 왕귀뚜라미의 생활사를 살펴보도록 하자. 왕귀뚜라미의 생활사를 알기 전에 우선 왕귀뚜라미가 어떤 곤충인지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왕귀뚜라미는 귀뚜라미의 일종으로 몸의 길이가 2센티미터에서 2.6센티미터나 된다. 귀뚜라미 중에서 가장 커서 왕귀뚜라미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이들의 몸은 갈색이고 밭이나 풀밭에서 살아간다. 왕귀뚜라미의 수컷은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면서 우리들에게 흠씬 풍기는 가을의 정취를 전달해 준다. 그런데 사실 수컷의 노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짝짓기를 위해 암컷을 부르는 소리이고, 그 소리는 날개를 비벼서 낸다. 노래하는 수컷을 만나 짝짓기를 한 암컷 왕귀뚜라미는 흙 속에 알을 낳는다. 이렇게 알을 낳고는 수컷이나 암컷 모두 짧은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알은 흙 속 에서 겨울을 난다. 봄이 가고 초여름이 되면 알에서 애벌레가 깨어난다. 애벌레는 계속 탈피를 반복하면서 자라나서 여름이 끝날 때쯤이면 엄지벌레가 된다. 이렇게 엄지벌레가 된 왕귀뚜라미는 다시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는다. 그 알은 다시 이듬해 초여름이면 애벌레가 되고 여름이 끝날 때쯤 엄지벌레가 된다. 그리고 엄지벌레의 수컷은 다시 짝짓기를 위해 노래하는 일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가을이 올 때마다 왕귀뚜라미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진딧물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여러분도 나무의 새순이나 꽃에 작은 벌레가 하나 가득 꼬물거리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벌레는 진딧물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진딧물이라는 곤충이 갖는 생활사는 신비롭다. 진딧물의 엄지벌레는 봄부터 여름에 걸쳐 해가 긴 동안에는 알이 아니라 애벌레를 낳는다. 이 때 암컷 엄지벌레는 수컷과 짝짓기를 하지 않은 채 새끼를 낳는데, 재미있는 사실은 암컷의 새끼만을 낳는다는 것이다. 암컷 애벌레들은 자라나서 엄지벌레가 되면 다시 암컷 애벌레들을 낳는다. 이런 일이 여름까지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가을이 오면서 해가 점점 더 짧아진다. 그러면 진딧물의 몸에 있는 광주성 시계가 명령을 내린다. 암컷과 수컷의 애벌레를 모두 낳으라는 명령이다. 그 명령을 받은 암컷 진딧물은 이번에는 암컷과 수컷의 애벌레를 동시에 낳는다. 암컷과 수컷 애벌레들은 성장해서 엄지벌레가 되어 짝짓기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짝짓기를 한 암컷이 낳는 새끼는 놀랍게도 애벌레가 아니라 알이다. 짝짓기를 한 암컷은 알을 흙 속에 낳는데, 이는 알이 따뜻한 흙 속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도록 하려는 것이다. 흙 속에서 겨울을 보내고 새 봄을 맞은 진딧물의 알이 자라 애벌레가 되고 다시 엄지벌레가 되는 것이다. 진딧물의 생활사는 이렇게 계속 되풀이된다.
곤충들이 겨울을 보내는 방법은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왕귀뚜라미나 진딧물처럼 알로 겨울을 나는 것도 있고, 배추흰나비처럼 번데기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도 있다. 뿐만 아니라 애벌레의 상태로 겨울을 나는 것도 있으며 엄지벌레 그 자체로 겨울을 나는 것도 있다. 그리고 많은 곤충들이 깊은 잠에 빠져 겨울을 난다. 겨울잠을 자는 것이다. 물론 여름에 깊은 잠에 빠지는 곤충도 있다. 곤충에게 있어서 이런 긴 잠은 겨울의 추위나 여름의 더위와 같은 계절적인 어려움을 극복하고, 발육 단계를 조절하기 위해서 오랜 진화를 통해 획득한 대단히 훌륭한 방법이다.
곤충은 깊은 잠을 자는 동안에는 호흡이라든가 다른 여러 활동에 최소한의 에너지만을 사용한다. 그리고 많은 적이 자신을 볼 수 없도록 몸을 숨긴 채 잠에 들어간다. 같은 종의 곤충은 해의 길이가 일정한 어느 하루를 택해 광주성 시계가 명령을 내리면 일정한 발육 상태에 달한 것부터 순차적으로 잠에 빠져든다. 이렇게 잠에 들어간 후에는 모두 발육을 정지해 버리기 때문에 잠을 자는 동안 모든 개체가 똑같은 발육 단계에 있게 된다. 그리고 어느 특별한 계절이 이들을 방문해서 잠을 깨우면, 다음 단계의 발육에 들어가는 것이다. 곤충이 연출하는 대자연의 사계는 이렇게 해서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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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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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새로운 도전
안정궤도에 막 올라선 기업이 가장 경계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만'이다. 자만의 늪에 한번 빠지면 그간의 노력들도 모두 물거품이 되고 기업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기업도 겸손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알량한 성공에 취하긴 쉬워도 겸손을 알고 실천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미 말했듯이 '리드 프레임 매거진'의 개발은 나의 첫 성공이자 미래산업의 첫 성공이었다. 순식간에 매거진 시장 전체를 우리의 제품이 장악했으니 말이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시장에서도 우리의 매거진은 인기가 좋았다. 그 전까지 매거진을 국내에 수입 판매하던 델트론 오토메이션 코리아라는 회사에서는 우리 때문에 판로가 끊기자, 반대로 우리 제품의 해외수출을 제안해왔다. 김영환이라는 사람과의 첫 만남이었다.
김영환은 매거진의 해외수출 업무를 대행해주었다. 대행료가 좀 비싼 편이었지만, 당신의 우리는 그 정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로 심리적으로 넉넉했다. 미래산업의 매출액이 5억을 넘어서고 순익만 3억을 갈무리하던 해에 김영환은 내게 필리핀 여행을 제안했다. 필리핀에 현지법인을 열어둔 미국계 회사였던 델트론 오토메이션에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서 매거진 영업도 하고 반도체에 대한 안목도 좀 넓혀보라는 얘기였다. 경험도 쌓을 겸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김영환의 경비까지 내가 책임지기로 하고 따라 나섰다. 생각 해보면 좀이 쑤셨던 것 같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또다시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일을 벌여보고 싶었다. 모험과 도전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한번 멋지게 성공하고 나니 계속해서 큰일을 터뜨려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호기심과 승부 욕을 넘어선 만용이었다.
나는 마닐라에서 아서 테일러와 만났다. 아서 테일러는 미국에서 이미 크게 성공한 바 있던 왕 컴퓨터라는 벤처기업의 창업멤버였다. 그 덕분에 자기자본을 매우 넉넉히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당시에는 델트론 오토메이션의 경영자이면서 핵심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공장을 돌아다녀 보니 실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마침 새로 개발한 반도체 제조장비 몇 종을 시험 가동하는 중이었다 비로소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아서 테일러의 부인은 한국 여자였는데, 한국에서 살고 싶어한다고 했다. 그래서 아서 테일러는 한국에서 같이 사업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김영환은 이미 그것을 알고서 나를 데리고 갔던 것이다. 아서 테일러가 설명하는 새로운 사업이란 바로 '무인 웨이퍼 검사장비'를 개발하는 일이었다.
매거진은 매우 복잡한 공정을 필요로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기계장치가 아니었다. 매거진은 우리가 가지 금형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던 제품이었다. 그러나 '웨이퍼 검사장비'라면 반도체 제조장비 중에서도 최첨단에 속했다. 웨이퍼(Wafer)란 반도체의 가장 기본이 되는 소자를 말한다. 반도체 제조과정에서 아직 자동화되지 않은 공정 중의 하나가 바로 웨이퍼 검사공정이었다. 이 웨이퍼를 검사하기 위해서는 현미경과 육안을 필요로 했다. 현미경과 육안이 하는 일을 기계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이었으니, 당시의 우리 입장으로서는 엄청난 기술도약을 필요로 했다. 그렇지만 나는 별로 어렵게 생가하지 않았다. 나의 투자와 아서 테일러의 기술만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반도체 업계에 종사하는 주변사람들에게 물었더니 모두들 놀라워했다. 반도체 제조공정은 이미 대부분 자동화되었지만, 웨이퍼 검사만은 사람이 현미경을 붙들고 직접 해야 했다. 그런 장비가 있다면 야 사업성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서 테일러는 반도체 제조장비 분야에서 이미 많은 경험을 쌓아왔던 엔지니어였으며 스스로 대단한 벤처사업가이기도 했다. 내가 당시에 막연하게 가지고 있던 사업방향과 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DS 코리아'라는 합작법인이었다. 당시 미래산업은 매거진 생산에 눈코 뜰 새가 없었다. 각지방에서 공고 생들을 수련 생으로 끌어왔고 심지어는 동네 아주머니들까지 데려다가 일을 가르쳤다. 개발이 어려웠지 다음 문제는 물량을 뽑아내는 단순작업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백정규는 내게 공장이전을 건의해왔다 매년 전세금을 올려줘야 하는 공장에서 벗어나 넓고 깨끗한 공장을 사자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때 '웨이퍼 검사장비'의 개발계획을 백정규에게 꺼내놓았다.
"사장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렇게 해야겠지요."
약간 불안한 눈치였지만 언제나처럼 똑같은 대답이었다. 나는 부천에 있던 S엔지니어들을 모조리 서울 압구정동 뉴서울빌딩에 있는 'DS 코리아'로 불러 올렸다. 역시 백정규가 현장책임자로 임명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개발자금을 구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섰다. 매거진 판매수익으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은 비용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변에서 끌어올 수 있는 사채라는 사채는 다 끌어다 대었고, 은행과 신용금고에 들락거리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이었다. 무엇에 홀린 것처럼 시작은 했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경비가 필요했다. 얼마 되지 않아 빚은 산더미처럼 불어났고, 그에 비해 연구진행 속도는 매우 더뎠다. 나는 차츰 지치기 시작했다. 회사가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나는 또다시 뭔가 획기적이고 새로운 일을 벌여보고 싶었었다. 모험과 도전이 그리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자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의 우리 입장으로서는 엄청난 기술도약을 필요로 했다. 나의 투자와 아서 테일러의 기술만 합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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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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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피천득
장난감
내 책상 속에는 십여 년 전 텐센트 스토어에서 사온 구슬치기하는 마블 몇 개가 있다.
라일락,
너는 느릅나무 그늘지는 거리에도 피어 있다.
연과 마블을 파는 작은 가게가 있는.
나는 어려서 장난감 가게 주인을 부러워하였다. 지금도 막상 장사를 시작한다면 장난감 가게밖에 할 게 없는 것 같다. 물론 그 가게에서는 아이들에게 화상을 입게 하는 딱총은 아니 팔 것이다. 장난감 가게는 우선 그 상품이 재미있다. 손님이 아니 오더라도 나 혼자 그것들을 가지고 놀 수 있다. 그리고 장난감 가게에 오는 손님들의 얼굴에는 언제나 웃음이 있다. 약방과는 다르다. 이쁜 아기, 이쁜 엄마, 좋은 할아버지 그리고 크리스마스가 오면 금방 부자가 될 것이다.
장난감 가게를 하게 되면 부대사업으로 옆에다 장난감 서비스센터를 내겠다. 바퀴 빠진 자동차도 고쳐주고, 다리 부러진 인형도 고쳐주고.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의 장난감들을 생각하면 수선료를 많이 받을 수 없다. 나는 어려서 무서움을 잘 탔다. 그래서 늘 머리맡에다 안데르센의 동화에 나오는 주석으로 만든 용감한 병정들을 늘어 놓고야 잠이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떠 보면 나의 근위병들은 다 제자리에서 꼼짝도 아니하고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의 한 은퇴한 철도 회사 사장이 자기 집 마당에다 기관차, 그리고 철교, 터널까지 갖춘 장치를 차려 놓고 이웃 아이들을 데려다가 기차놀이를 하는 것을 보았다. 현대문명이 자랑하는 디젤 기관차도, 제트기도, 우주선도, 생각하면 다 장난감에 지나지 않는다. 언젠가 내가 묻힐 때가 오면 내 책상 서랍 속에 있는 마블을 넣어주었으면 한다. 골동품 수집가는 청자 찻잔 하나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요, 부잣집 부인이라도 진주 반지 하나 끼고 가지 못하지마는, 아무리 탐욕스런 세상이라 하여도 나의 구슬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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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방황은 큰 사람을 낳는다 - 마 데바 와두다
11. 평범성
<평범한 사람이 바로 이인이다. 별난 사람을 찾지 말라. 제 본래의 길을 가라>
한 선승이 뜰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웬 구도자가 와서 묻기를,
<아저씨, 선사께선 어디 계시지요?>
선승이 웃으며 말하기를,
<저쪽 문 바로 안에 계시지>
구도자가 뜰을 돌아 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거기엔 뜻밖에도 뜰에서 본 그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구도자가 말하기를,
<당신 지금 뭣하는 거요? 냉큼 거기서 내려오지 못하겠소. 천벌을 받을지고!>
선승은 상석에서 내려와 바닥에 가 앉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자넨 상석에 앉아 있는 선사를 보긴 틀렸어>
그러나 구도자는 위대한 선사가 저렇게 평범한 사람일 수 있다는 걸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렸고, 스승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선승이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펴고 있는데, 딴 종파의 사람이 느닷 없이 튀어나와 말을 가로채고 자랑을 늘어놓는 거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네 종파의 창시자는 강 이쪽에 서서 붓한 자루를 쥐고 강저쪽에서 있는 사람의 손에 들린 종이에 거룩한 이름을 쓸 줄 안다고 하였다. 한참 자랑을 늘어놓더니 그가 물었다.
<한데 선사께선 대체 어떤 기적을 행하실 수 있소이까?>
선승이 선뜻 말하기를,
<딱 하나 있지. 배 고플 때 밥 먹고, 목 마를 때 물 마시는 것>
유일한 기적, 진짜 기적은 참으로 평범하기이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별난 것을 갈구한다.우리의 자아는 언제나 별나 보이를 원한다. 진짜 기적은 이런 것이다.자신이 하찮은 사람임을 참으로 아는 것, 남들과 같이 평범하게 있는 거. 조금도 별나보이기를 원치 않는 것, 없지 않은 듯이 있는 것. 별난 힘이란 전혀 영적인 게아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이적을 행하는 자처럼 못난 사람은 없다.
그대는 마음 속으로 중얼거릴 것이다. "이게 무슨 기적이란 말인가? 배 고플 때 밥 먹고, 졸리울 때 잠자는 게" 그 선승은 진짜를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대는 분명 배가 고픈데 그대의 마음은 말한다. "아니지. 난 단식하고 있으니까" 배가 잔뜩 부른 데도 그대의 마음은 말한다. "더 먹어야지. 맛있으니까" 그러나 저 선승은 말한다. "난 자연을 따른다. 스스로 그러한 것을. 나의 있음이 느끼는 바대로 움직인다. 여기엔 농간하는 마음 쪼가리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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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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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리아 호수의 안개 낀 아침 - 뉴질랜드]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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