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겨울이 만일 온다면 (1/2)
반항정신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
If winter comes, can spring be far behind?
이것은 저 이름난 셸리의「서풍에 부치는 노래」의 마지막 구절이 아닌가. 겨울이 오면 나는 언제나 그 시, 더구나 이 마지막 구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까지 몇 번인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이것을 불렀고, 부르면 언제나 신이 난다. 문학을 내가 모르고 영문학은 더구나 맛을 알리가 없지만, 또 평생에 좋아서 입에 떼지 않고 외는 글귀도 몇 개 못되지만, 그 몇 개 못되는 중에서라도 마지막까지 잊지않고 부를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구절일 것이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 나같이 이렇게 막힌 가슴속에서도 무슨 스완 송이라도 나갈 것이 있겠는지 모르지만, 만일 아무것도 없다면 이 구절이라도 부르고 갔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세상에는 일생을 맘껏 살고, 마지막 마무름까지를 잘하여 자기 죽은 후에 무덤에 세울 비석의 글귀까지 미리 지어두고 가는 이가 있다.
나는 죽은 후에 비석이 설 리는 없겠지만 세워준다 해도 내 영이 살아 있는 한은 벼락이라도 쳐서 그런 못마땅한 것은 아예 그림자도 없이 할 작정이지만, 그래도 세상이 하도 가지가진지라, 혹시라도 어느 어리석은 사람들이 정신이 빠지고 할 일이 없어 그런 짓을 하게 된다면 다른 것으론 용서를 못하여도, 만일 그 비석 위에 이 글귀라도 써준다면 혹 용서를 할지. 명구, 명문이란 것이 사실 얼마만한 힘을 가졌는지 헤아릴 재주는 없다. 자공이란 사람이 공자님보고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행할 만한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하니 공자님이 대답하여 “그건 서니라” 했다 하지만, 과연 자공이 얼마나 그 말씀을 지켰는지? 격언이라 하고 천고에 명언이라 하여 사람들의 입에 늘 오르내리는 말이 기실을 아무 힘이 없는 경우가 대개다.
루터가 “가장 큰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라고 한 것은 이래서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남의 일은 어쨌거나 내가 아는 내 일로는 오늘까지 살아오는, 또 이 앞으로 살아갈 내 길에, 그 방향을 결정하는 데, 이 “서풍”이 아니고는, 이 “겨울이 만일 온다면”이 아니고는 될 수 없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내가 「서풍」 노래와 셸리를 알게 된 것은 스물네 살 되던 해다. 공부가 늦어졌던 나는 그 해에야 일본 동경 고등사범에 입학을 했다. 우리 경제원론을 가르치던 선생에 야마다란 젊은 강사가 있었다. 동경제대를 갓 나온, 아직 서생 냄새가 없어지지 않은 청년 학도로서 몸은 결핵형으로 호리호리한데 목이 가늘고 아직 자취생활을 하는 수수한 차림차림에 두 눈에선 빛이 반짝반짝하고 목소리는 나지막하여, 담배를 피우는 일도, 팔아 먹은 지 오랜 늙은 교수들처럼 시시한 소리를 하는 일도 없이, 언제 어느 모로 보나 재지와 진실이 흘러나는 인상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사상이 마르크스주의인 것은 그의 경제학에서 알았고, 후일 대동아전쟁 다시에 무슨 커다란 좌익운동을 하다가 검거됐던 것도 신문에서 보아 알았지만, 그때에 그사람으로서 그럴 것 같지도 않은 그저 온순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하루는 시간을 시작하기 전에 영화구경 갔던 이야기를 하면서 요새「이프 윈터 컴스」라는 영화가 왔는데 재미가 있으니 한 번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설명이 그「이프 윈터 컴스」란 제목은 셸리라는 영국 시인의 「서풍에 부치는 노래」라는 시에서 딴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내가 나의 일생의 친구가 되는 셸리와「서풍의 노래」를 알게 된 처음이다. 사실을 셸리의 이름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보다도 예닐곱 해나 전 평양고등학교 시절에 일어 독본을 배우는 데서 나쓰메 소세키의「산 길」중에 그의「종달새」노래의 몇 구절이 나와 있는 것이 있었으므로 그때에 이미 알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앞을 보고는 또 뒤를 보고
무엇을 찾아 애타하는 우리
기껏 웃노라는 그 웃음이건만
오히려 괴롬의 믿바닥에 섰고
한없는 기쁨의 노래 속에도
한없는 슬픔이 늘 깃들어 있구나.
외기는 하면서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셸리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지 못했으니 기억이 됐을 리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이름을 뜻깊이 새로 들으니 죽었던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다.
영화를 좋게 여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섶을 지고 불로 들어가라 해도 하는 단순한 학생 심리로, 보라는 대로 가보았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때는 물론 어느 정도 감격도 가지고 보았지만, 지금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것도 없이 다 잊었다. 역시 무슨 연애 이야기인데 그 마지막이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라는 이 구절로 끝이 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물이 흘러가듯 다 흘러가버리고 말았는데, “겨울이 만일 온다면”이란 구절만은 웬일인지 잊을 길이 없었고, 한번 그 시 전편을 꼭 보고 싶었다. 나는 오늘까지도 모른다. 그 야마다라는 사람이 그저 한때 지나가는 이야기로 그 영화를 소개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역시 공산주의자의 치밀한 선전방법으로 계획적으로 한 건지, 그가 셸리의 사상을 혁명적이라 해서 그랬는지, 그 영화의 작가도 프로 예술가여서 그랬는지, 그의 말을 들어서 그랬는지, 그렇지 않고 내 속에 본래 셸리를 좋아할 요소가 들어 있어 그랬는지, 모든 조건이 다 하나님의 섭리로 맞추어져서 그리 된 것인지, 그것을 나는 다 모른다.
야마다 씨는 셸리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해준 것이 없다. 또 그날 그 소개를 받은 수십 명 중 얼마나한 사람이 그 영향을 입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으로 했든간에, 다른 사람이야 어찌했든간에, 나는 그것이 인연이 되어 몇 해를 두고 잊지 못하다가 역시 셸리의 시집을 사보고야 만 것만은 사실이다. 아주 열심히었다면, 그때 당장 사보기라도 했겠는데 그렇지는 못했고, 그러면서도 잊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말「서풍의 노래」를 읽게 된것은 서른이나 돼서 오산에 와 있는 동안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어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밭에 괭이를 넣어, 영문학이 뭔지 시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내가 그것을 우리말로 옮겨서『성서조선』지에다가 내기까지 했다. 그런 이래 30년 오늘까지 그것은 내 노래요, 셸리는 나의 친구요, 이 앞으로도 아마 그는 끊어지는 날이 없이 내게 위로를 주고 힘을 줄 것이다. 그러니 알 수 없는 건 인생의 일 아닌가? 제가 하는 건가, 남이 가르쳐서 하는 건가? 교육은 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 말을 해서 좋은가, 아니해서 좋은가? 야마다가 우연한 말로 했던 것이 내게 일생의 힘이 됐다면, 말은 우선 해야 할 것 같은데, 또 만일 그가 정말 공산주의를 선전하잔 목적에서 한 것이라면 내 경우에 있어서는 전연 반대의 결과를 낸 셈이니 교육해서 된다 할 수도 없다.
나는 오늘도 공산주의가 날뛰는 것을 볼 때마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오?”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그럼 혁명에는 좌도 우도 없고 그저 끊임없이 스스로 새로운 생명의 꿈틀거림이 있을 뿐이란 말인가? 모든 것은 그저 내 가슴속 하나에 있단 말인가? 어쨌든 나는 셸리가 좋다. 그「프로메테우스」가 좋고, 그 「에피사이키디온」(Epipsychidion)이 좋고, 그 「느낌의 나무」가 좋고, 그 「종달새」, 그「구름」이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좋은 것은 이 「서풍이 부치는 노래」다. “오 사나운 서풍이여, 너 산 가을의 숨이여” 하는 첫 줄로 시작이 되는 그 시는 첫 글자 그대로 와일드(wild)한, 생기찬 영의 부르짖음이요, 자기 말대로 “예언자의 나팔”이요, “슬프면서도 녹아드는 혼의 기도”다. 나뭇잎을 흔들어 떨며, 씨를 날려 땅 속에 묻고, 구름을 몰아쳐 폭풍우를 퍼부으며, 죽어가는 해를 위해 만가를 부르고, 지중해를 흔들어 평화의 꿈을 깨쳐 어지럽게 하며, 새 시대의 오는 앞길을 여는 사나운 서풍을 향해 노래를 하다, 외치다 못해,
사나운 영아 네가 나려무나!
나를 일으켜주려무나.
잎새처럼, 구름처럼, 물결처럼
나는 인생의 가시밭에 엎어졌노라.
너처럼 그렇게 날쌔고 그렇게 뻣뻣하고 자랑하던 내가.....
하여 울음으로 다투어가며 애타는 기도를 하는 셸리는 저 자신이 이 나를 몇 번이나 엎어진 데서 일으켜 주었는지 모른다. 일제시대의 그 내리누르는 압박 밑에서 숨이 막히려 할 때에도 황성산 푸른 솔잎을 흔들고 오는 그 서풍은 내 코를 뚫어 새 숨을 넣어주었고, 해방 후 공산주의의 그 살벌한 포악 앞에서 사지가 움츠려지려 할 때에도 몽고 사막, 만주 벌판을 쓸고 압록강을 건너오는 그 서풍은 내 가슴에 새 피를 돌리어 한 몸을 버티고 걸어나갈수 있게 해주었으며, 6.25전쟁에 낙동강 썩은 물가에 솔피처럼 몰려 슬픈 탄식에 지친 혼이 조는 때에도 대서양을 건너 지중해, 홍해, 인도양, 황해를 건너 태평양을 단숨에 끊으려고 불어대는 그 서풍은 나를 깨워 흔들어 새 날을 바라게 하였다. 그것은 슬플 때의 나의 위로요, 맥날 때의 나를 가다듬어 주는 자요, 내가 터무니없는 잘못을 하고 내 혼이 거꾸러질 때 내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길동무요, 내 맘이 둔해질 때 나를 책망해 뒤의 것을 잊고 알 수 없는 앞을 향해 막 더듬어 나가게 하는 ‘빈 들의 소리’다.
내가 셸리를 좋아하는 것은 문학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영국의 일류 시인이라하지만 그것을 감상할 만한 문학의 힘은 내게 없다. 나는 글을 모른다. 조금 배우려 하던 글도 다 잊어 버렸다. 또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그의 인격이 높은 것이 있어하는 것도 아니다. 학교에서는 ‘미치광이 셸리’‘무신론자 셸리’의 별명을 들었고, 종내 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쫓겨났으며, 사회에서는 옳은 가정을 이루지 못하고 궤도없는 사랑에 빠져 남의 비난을 받은 그는 인격적으로 별 훌륭한 것이 없으며, 내가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러한 정도의 생애를 본으로 삼을 것이 못되는 것쯤은 안다. 또 그의 사업 경력이 두드러진 것이 있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서른도 못되어 뱃놀이를 하다가 바다에 빠져죽은 그에게 큰 사업을 이루어놓은 것이 있을 리 없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압박,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서풍의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닷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것은,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몇 사람 아니되는 새 시대의 정신적 영웅의 한 사람이다. 도덕의 테두리에서 견주어볼 때 그에게 비난할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을 그가 가진, 새 시대에 대해 날카롭고 억센 힘으로 나가려는 독수리 같은 정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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