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38선을 넘나들어 (3/5)
총칼에 대든 붉은 주먹
나는 학생시절에 기독신앙을 가지나, 사회주의자가 되나 많이 망설였다. 도덕적 정신적인 데서는 문제도 아니되지만 역사적인 자리에서 볼 때 사회주의에 어떤‘진보적’인 것이 있음을 인정 아니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사회주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사회주의 이론에 일면의 진리가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일면이지, 그것으로 사람을 옳게 이끌어나갈 수는 없다. 그래 분명하게 잘라버렸다. 기독 신앙이 아니었다면 나는 험악한 공산주의는 몰라도 영국의 폐비안 같은 것은 됐을는지도 모른다. 누구의 말같이 현대 사람이야 넓은 의미로는 다 사회주의자지,‘사회’란 생각을 빼고 오늘날 사람의 살림은 있을 수 없다. 해방이 아니 왔다면 나는 교회에도 아니 가는 자유 신앙으로 농사로 일생을 마쳤을것이다. 서울형무소를 다녀간 후는 아주 농사하기로 작성했었다. 추운 겨울날 김교신 형이 그 여행하기 어려운 때에 천리 길을 달려 용천 구석을 찾아와, 흥남에 가서 질소비료 회사에 몸을 의탁하고 무슨 일을 해보자고 권하였다. 그것이 이 땅에서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래도 그때 하룻밤 지낸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것은 그때 내 맘에도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민초속에 들어가고 싶었다. 생각이 깊어서보다는 나의 못난 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그 어려운 세상에 줄을 넘을 수 가 없었다. 그 김교신은 해방을 백열이틀 앞두고 하늘로 가버렸다. 해방이 되던 날, 나는 밭에 거름을 주려고 똥통을 메고 섰다가 그 소식을 들었다. 후에는 공산당에게 총살을 당한 내 생질 최상복군이 용암포의 유지들이 나를 나오란다고 두번 세번 들어왔을 때, 사양하다 못해가며“내가 아니 나갈 자리를 나간다. 이제 나를 이용하잔 것인데 사람이 이런 때는 아니 가는 것이다. 하나 다른 일 아닌 해방이니 내가 속는 줄 알면서도 "그럼 나간다. 내 할 것만 해준 후엔 나를 물러난다” 했다. 그때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은 서울 계신 선생님이었고, 그 다음은 김형이었다. 선생님이 내가 여기 나가는 것을 옳다 하실까, 부질없는 일이라 하실까? 선생님 말씀을 기다릴 것 없이 내 생각에도 부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줄을 알면서도 나가야 할 무엇을 느꼈다. 나간 결과가 할 것 하고도 물러선다는 것과는 딴판이 되어 신의주까지 가게 됐고, 5도연합회 구경까지 하게 됐다.
들어간 처음에는, 이제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지만, 이왕 손을 댄 바에는 한번 교육에 관해서만은 생각대로 해볼까 하여 할 수 있는 데까지 사람을 배치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북새질에 견딜 수가 없었다. 물러나려니 그때 평안북도의 정치책임자인 이유필씨가 사면초가가 되었는데 차마 버리고 나올 수 없어 하루 이틀 기회를 보는 동안에 학생사건이 터졌다. 언제나 나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 다니는 물건이다. 요새는 팔아먹기를 잘하는 세상이어서 신의주 학생사건도 엉뚱강산이로 팔아먹는 모양이지만, 그 역사야말로 나 몰래는 못 쓸 것이다. 자치위원회가 처음에는 소박한 민중의 순전한 자치정신에서 나온 것만은 나도 증언한다. 그러나 거기 나온 인물들이 구식 사상을 면치 못한 것만은 사실이요, 또 정치역사에 대해 아주 무식했다. 나도 생각이 얕지만 나 보기에도 그 해방은 사회적 변동을 의미하는 것이지 결코 정권의 변동만이 아닌데, 즉 이 앞으로 사회생활이 온통 달라지려는 것인데, 역사를 새로 시작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의 대부분의 생각이 일본이 우리를 압박하다가 이제 쫓겨갔으니 이젠 우리 손으로 고스란히 해가면 된다는 정도를 면치 못했다 . 참 무식이었다. 지주는 지주대로 있고 양반은 양반대로 행세를 할 줄 알았고 또 하려 했다. 그리고 일하러 나선 사람은 거의가 소위 유산계급 사람들이었다. 그동안 민중을 눌렀던 것을 외국 사람으로만 해석했지 특권계급이라 해석할 줄을 몰랐다. 그랬으니 공산주의자에게 배겨날 리가 없었다.
공산주의자는 날로 이것을 무산 무식층에 선전하여 계급의식을 날까롭게 만들어 무산자를 자기네 편에 넣으며 노골적으로 정권을 빼앗는 운동을 해갔다. 학생사건이란 것은 이러한 공산당의 비인도적인 도리에 어그러진 사나움에 대한 의분과, 다소는 거기 계급적인 의식도 끼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조직이 있는 운동은 아니었다. 본래 해방 후 신의주에 인텔리층의 청년으로 조직된 청년회가 있었으나 그것은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 영향이 중.고등학생에게 얼마만한 영향을 주었는지 표면으론 아무 직접 연락이 아닐 것이다. 사건 나기 얼마 전에 서울서 왔노라는 학생 대표 한 사람이 나를 본 일도 있으나 그것을 통해 서울과의 무슨 긴밀한 연락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요컨대 그 학생사건은 어린 맘의 정의감에서 사회악에 대해서 한 소박한 반항이라 해서 좋을것이다. 문제는 그 전이나 후나 청소년의 가슴속에 있는 그정신을 뒷받침해주며 지도하고 길러줄 아무 조직체가 없었다는데 있다. 학생들이 한 일은 어린이답게 어리석다. 총 칼에 대해 조약돌을 쥐고 달려들 었으니 참 어리석지 않은가? 그러나 어리석음이 문제 아니다. 인간의 일 어느 거면 어리석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것을 하늘이 받들어주나 아니 주나 하는 데 있다.
3천 년 전 다윗 소년때는 하나님이 그것을 받들어주니 골리앗이 넘어갔고, 이번에는 하나님이 아니 받드니 조약돌을 들었던 어린 생명 자신만 조약돌과 함께 떨어졌다. 왜 그랬나? 그때는 민중에게 믿음이 있었고 이때는 없어 그런 거지 다른 것 아니다. 이제라도 민중이 하나되는 산 믿음이 있으면 조약돌을 아니 들어도 넘어갈 것이요,나팔을 불지 않아도 성이 무너질 것이다. 일이 있기 얼마 전에 소련 정치고문관이 와서 나더러, 교육에 대한 방침을 물으며 정치문제에 관해 어떻게 할 터이냐 하기에 나는 한마디로 “나는 학생들을 정치에 관계 아니 시킬 작정이다”했다. 그것이 화가 될 줄은 몰랐다. 물론 나의 믿는 바니 알았대도 그대로 할 수밖에 없는 말이지만, 그때는 학생사건 같은 것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 후에 들은 말이지만 내가 학생사건의 책임을 지고 쫓겨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건이 터지기 전날인 11월 22일 내게 소식이 들어오기를, 아이들이 도인민위원회(그때는 자치위원이라는 이름이 없어지고 변했다)와 공산당 본부에 들어가 질문을 하겠다고 하였다. 그래 밝은 날 아침 도에 가서 전화로 각 학교 교장들에게 그런 일이 나지 않도록 하란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선생들의 마음속에도 불평이 잔뜩 있었으니 시원하단 생각에 묵인한지도 모른다. 하여간 정오쯤 되어 학생들이 정말 몰려온다는 소리를 듣고 나가는데 벌써 총 소리는 나고 학생 셋이 도청 정문 앞에 쓰러졌다. 그때 보안부장이란 것이 한웅이란 자요, 그 밑에 차정삼이가 있었는데 그놈들 입으로 “쏴라,쏴라”하는 것을 내 귀로 들었다.달려가 일으키니 천지가 아득하지 않으냐? 숨은 다 끊어지고 눈만 번히. 들것에 담아서 병원으로 옮기고 다시 그곳에 돌아오니 왠 자가 “그것만이요, 좀 보려오. 저리갑시다” 끄는 것이었다. 직감으로 알았겠지만 피할 수도 없는 일이고, 따라간즉 전 재판소 자리, 그때 공산당 본부였다.문에 썩 들어서니 몇인지 알 수 없으나, 열은 넘게 검은 정복 입은 것이 수두룩 넘어져 있고 소련 군인이 쭉 들어섰다. 그런 중에서 전날 정치고문의 통역으로 와서 소련서 난 2세라던 한국 군인놈이 일어서더니 손가락으로 나를 가르키며 무슨 선동적인 연설을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더니 군인들이 일시에 와하고 내게로 달려왔다. 총이 몇 갠지 권총이 몇인지 이루 알 수도 없고, 나는 그저 섰을 뿐이었다.
그때 보니 사람이 정말 위급한 경우에는 맘이 편안한 것이었다. 그저 “오늘은 이렇게 되나 보다”하고 있었다. 소련 군인의 총은 그들의 장교가 떼어 물리치고 정말 무지막지한 매질은 우리 사람들이 했다. 잠깐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서 비행장에 있던 유치장으로 갔다가 저녁에 정거장 호텔로 끌려가 소련 사령관 앞에서 이유필 씨와 만났다. 그러나 영감은 감히 한 마디 말도 못하고 나도 무언, 자기도 무언으로 서로 헤어졌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후 나와서 들으니 그는 위원장 자리를 빼앗기고 나온 후, 38선을 넘다가 그선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는 오래 상해 임시정부에 있던 이로 일제 때에 잡혀 나와 징역을 살았던 것이다. 맘은 착한 이나 사상은 새롭지 못했다. 그를 끌어내 세운 것이 이황이란 자였는데, 소련군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하룻밤 사이에 영감을 배반했고, 그의 제일 신임한다던 청년 이응곤인가 무언가 한 자도 그러고, 할 수 없이 마지막엔 나를 붙잡는 것을 의리상 차마 모른다 할 수 없어, 기회를 보아 어느날 같이 물러나기로 약속했던 것아 그리 됐다.
옥중에 쉰 날을 있으면서 아무리 생각해봐야 나갈 길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내 할 일은 이제 우는 것인가 보다 하여 날마다 일어나는 느낌을 적어보았다. 그것이 내가 난 후 처음으로 시를 써본 시작이었다. 나올 줄은 뜻은 아니했던 데서 갑자기 나오니 기쁜 줄도 시원한 줄도 모르겠고, 모처럼 온 해방이 이리 되는 것이냐 생각하는 눈물만이 앞을 가렸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내 맘이 너무나 돌 같아졌다. 집에 와보니 세상은 달라졌다.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일제시대에 수갑을 차고 형사에게 끌려가니 어느 사람 하나가 아는 체하지 않더니 해방이 되는 날 떠메어다 놓고 저마다 알고 저마다 존경하노라더니 또 소련 사람에게 끌려갔다 오니 마주 서주는 사람하나 없었다.
인심은 조석변을 말로만 들었더니 실지로 당하고 보니 참 기가 막혔다. 우리 집에서 길러낸 것들이 나를 집어먹었다. “사람들이 이렇게 변할 줄은 참 몰랐다”하고 탄식을 했더니 어느 친구가 대답하기를 “변한 거 아니지요, 본래 있던 거 나왔지요” 했다. 본래 그렇다면 너무 가엾고, 변했다면 너무 허망하다. 예수의 거룩한 점이 한층 더해 보였다. 그런 것들을 미워 않고 위해 기도했으니 이젠 도리가 없고 인정도 없다. 가는 곳마다 흘근대는 눈반울이요, 거품 무는 이빨이다. 그전에 선생들이 입으로 가르치며 하지는 않던 것이 이제 인간의 찌꺼기에 의하여 실행이 됐다. 높고 낮고가 없다. 아니다. 바뀌었다. 안방주인이 머슴에게 살 길을 애걸 하게 됐다.
지주 숙청령이 내렸다. 나 개인으로 하면 억울한 점도 있으나 이것이 역사적 처벌이라 생각하니 달게 받을 맘도 있었다. 그대 가서야 후회를 했다. 보낸 아버지가 세상 떠난 후에 상속을 할까 말까, 하는것이 옳지 않은 일인 줄 알면서 세상제도대로 상속을 했었는데 이럴 줄 알았더람 그때에 아니했더면 오늘 이런 일은 없지 했다. 예수를 믿는 지 몇십 년이어도 정말 하나님 말씀은 그때 처음 들었다. 지주 숙청을 한다는데 처음에는 과거에 일제시대에 독립 위해 싸운 사람에게 보아준다는 말이 있어, 누가 와서 하는 말이 나도 그중에 넣을 법하더라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와서 하는 말이 그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공산당 자기네끼리도 의논이 많아서 처음에는 그것을 보아주려 하다가, 애국자라는 경계선을 어디 긋느냐 하는 문제에서 결정이 아니되다가, 한 사람말이 “아니다, 정말 애국자면 지주생활을 했을 리가 없다”해서 무시되고 말았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아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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