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3/4)
고구려의 기질은 어느 정도 평양 사람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실 평양 사람의 자랑은 모란봉도 대동강도 연광정도 아니요, 그 대동강물을 거슬러 떠먹는데 있다. 내가 우리지방 풍속대로 우리 어머니가 정성껏 해준 분홍저고리를 입고 갔다고 나는 촌바우라고 놀려주는 주인집 할아버지가 나보고 맨 처음 한말은 “어, 우리 대동강 물 거슬러 떠먹는 피양 개명......”이었다. 그 한마디에 1천 년 부대껴온 씨알의 눈물과 피와 한숨이 엉키어 들어 있다. 지금은 선교리 쪽으로도 큰 도시가 열렸지만 옛날의 평양이라면 대동강 서편 언덕뿐이었다. 모란봉 부벽루에서 시작되는 긴 돌성이 늙은 용처럼 구불구불 달았고 그 중허리에 대동문이 열려, 성안 사람이 물을 먹으려면 그리 나와 오른손으로 흐르는 대동강을 거슬러 물을 뜨게 된다. 이름도 좋지 않은가? 대동! 늙은이, 젊은이, 남자, 여자, 부자 가난뱅이, 양반상놈 없이 다 나와 오른손으로 거슬러 떠 한가지로 마시는 대동의 물! 아침으로 저녁으로 이 양덕 맹산 흐르고 내린 대동강 물을 떠 먹을 때마다 그들 ‘피양내기’는, 그들 고구려의 남은 씨알은 “역사의 흐름의 아무리 저 물 같기로서니 한번 못 거슬러본단 말이냐? 인생이 아무리 저렇게 파란곡절이 많기로서니 한번 못 싸워 본단 말이냐?“하였을 것이다.
그 생각이 어느덧 엉키고 엉키어 ‘대동강 물 거슬러 떠먹는 피양 사람’으로 된 것이다. 대동강이 흐르는 한 이 정신은 없어지지 않을 터이요, 이 정신이 살아 있는 한 평양 사람은 만주에서 반도에 걸쳐 문과 무를 겸해 활동하면서 고구려의 혼을 다시 살려내고야 말 것이다. 이 뜻에서 한다면 옛날에 을지문덕을 낳았고 오늘에 안창호, 조만식을 낳은 평양이 지금 공산주의의 풀무 속에 시련을 당하고 있는 것은 크게 뜻있는 일일 것이다, 사람들이 평양시라 해서,
긴둑에 비 개이고 풀빛 더욱 푸른데
그대를 남포에 보내자니 슬픈 노래 나오네
대동강 물 어느 때는 마를 날 있다더냐
해마다 흘리는 눈물 푸른 물결 붇더라.
를 흔히 입에 올리지만, 과연 대동강이 마를 리는 없다. 그것은 평양의 생명이요, 평양의 슬픔이다. 슬픔이기 때문에 생명이다. 저들은 대동강 물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눈물을 흘려서는 대동강을 살린다. 그러는 동안에 긴 둑에 푸른빛도 새로이 자라난다. 그거 역사 아닌가. 나도 대동강 물 거슬러 떠먹었다. 내 태는 발해만의 흐린 물결에 띄워 내버렸지만 내가 세상물정 알게 될 땐 이 대동강 물 거슬러 떠먹는 평양에서 컸다. 이제 그 먹었던 물이 속에서 한 번 굽이를 치는 날이 온다.
독립만세
5,60대의 사람에게는 다 그런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3.1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그것은 내 일생에 큰 돌아서는 점이 됐다. 만일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 그대로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요, 의사가 됐다면 나도 지금쯤은 큼직한 병원이나 경영했을는지 모르고 잘하면 나도 누구들처럼 국회의원에 출마도 했으른지 모르고 누구보다 못지않은 자유당 중요 간부쯤도 됐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것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나기를 민족주의 가정에 났고 처음부터 교육받기를 강한 민주주의 기독교 학교에서 받았건만 공립 보통학교 이태를 거쳐 고등보통학교 3년을 다니는 동안 그만 그 정신은 다 잠 자버리고 그저 속된 입신 출세주의의 생각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사립학교는 정신 있는 학교, 공립학교는 친일파 하여 장래학문 길을 위하여 공립 관립에 입학은 하면서도 그래도 스스로 한끝 부끄러운 생각도 있고 길에서 사립학교 학생을 만나면 속으로 미안한 맘까지 있었는데 차차 날이 갈수록 일본 세력은 굳어져가고 사회에는 아무 반항의 기색도 보이는 것이 없어지자 어느덧 관립학교 학생인 것을 자랑하는 심리가 생겼다.
또 공부 실력도 처음에는 사립이 훨씬 높았으나 점점 사립학교 경영이 어려워지자 그것도 관립에 떨어지게 되었다. 또 거기다 젊은 군중심리도 있어서 3.1운동 전까지에 있어서의 학생계를 보면 어느덧 관립, 사립의 대립의 경향이 있었다. 관립학교 학생은 사립학교 학생을 실력 없는 것으로 깔보고 사립학교 학생은 관립학교 학생을 정신 없는 것으로 없신여기고 만일 그대로 갔다면 우리는 온통 일본이 다 되고 말았을지 모른다. 관립학교 학생의 심리는 친일을 하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현상에서 별수없지 않으냐? 쓸데없이 공상만 말고 학문 길로나 나가는 것이 좋다” 하는 것이었고, 사립에 다니는 학생도 실력에 부쳐 관립에 못들어왔으니 정신적으로 반항이라도 해보지만 저희도 들어올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들어오고 싶은 것이요, 또 들어오면 그것도 관립심리가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대로만 나갔다면 우리는 다 일본 사람의 심부름꾼밖에 될 것이 없었다.
어쨌건 ‘관’이란 것처럼 더러운 것은 없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지금이야말로 관립,사립의 차별이 없으련만 그래도 있다. 교육을 크게 그르치는 것은 이 썩어진 관의 사상이다. 민주주의 나라에 직이 있으면 있었지 관은 있을 리가 없건만 지금도 장관, 차관하여 관을 쓴다. 이미 관을 잔뜩 세워놓고는 관존민비의 버릇을 없앤다고 아무리 구호를 해도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관은 다른 것 아니요 곳 특권인데 특권이 있는 것을 보면 소수의 쫄쫄한 것을 내놓고는 대개의 사람은 지금 이 현상에 별수없지 않아하게 된다. 그 관에 앉은 자가 이족이거나 동족이거나 이것은 마찬가지다.
일제 말년에 만주를 여행한 일이 있는데 혼자서 울음이 북받쳐 나와 참지 못한 일이 있다. 하나는 그 무연한 벌판을 보니 “원, 이 놈들이 동지사랍시고 적어도 해마다 한두 차례는 이 벌판을 봤을텐데 이것 한번 도로 찾아 살아보잔 생각은 못하였단 말이야?” 하는 분한 생각에서요,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중국놈, 만주놈이 일본 흉내내려고 하는 꼴 보고 “우리 꼴도 저 꼴이겠구나”하는 슬픈 생각에서였다. 그때 만주제국이 된 지 아직 몇해 아니됐는데, 그 자존심 많다던 중국사람이 일본말 하고 일본 ‘벤또’사먹고 일본 티를 내노라고 노는 모양이 늙은 갈보의 꼴같이 더러워 보였다. 그러니 우리도 저랬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은 없다더냐? 종로, 세종로, 눈을 뜨고 못지나가겠더라. 그때의 내 꼴이 그러했다. 나만 아니라 대개의 젊은이가 다 그러했다. 사회 전체가 그러했다. 한마디로 “이 현상에 별수없지 않아?”였다. 타협이요, 굴종이요, 아첨이요, 속임이요, 구차다. 썩었다. 구차 구차, 이놈의 구차가 5천년 역사에 우리를 얼마나 녹여냈나? 그렇게 구차하게 살잔 생각에 민족의 정신이 논귀에 물 줄듯이 돌아들어가는 때에 큰물처럼, 회오리바람처럼, 지진처럼 모든 사람의 맘을 휩쓸고 뒤흔들고 두드려 새 기운을 내게 한 것이 3.1운동이다.
내가 서울만 있었다 해도 3.1운동이 그처럼 결정적으로 내 생애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평양이요, 평양에서도 관립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그 운동을 치르고 난 뒤에는 다시 가던 길을 도로 걸을 수 없이 되었다. 나는 어느 점으로 보나 학교에서 두드러진 적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 성적으로는 그리 나쁜 편이 아니지만 조그만 시골 구석에서는 재주 있단 말도 들었는지 모르나 평안남북, 황해 일대의 수재가 다 모인 곳엘가면 자연 그러게 되기도 쉽지 않고 또 웬일인지 소위 공부벌레(벵꾜무시) 소리 듣는 것은 속되어 보여서 머리 싸매는 공부는 한 일이 없다. 그렇다고 이른바 호걸 노릇을 했나 하면 물론 아니다. 맘은 타고난 약질이어서 바닷가에 났으면서도 헤엄칠 줄을 모르고 체조 시간이 되면 철봉하잘까봐 그것만 걱정이었다. 그러므로 반 중에서 별 두드러진 것 없이 3년을 지냈다. 그런데 1919년 만세를 부르는 그해 처음 석은 형이 평양으로 왔다. 그가 3.1운동 때 평남북 학생운동을 맡은 관계로 자연 평고에 있어서는 내가 연락을 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육십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 처럼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정말 먹었던 대동강 물이 도로 다 나오는 듯하였다.
하기는 그 평고 교장으로 있던 다나카 선생이 언젠가 “시여처녀 종여탈토”(처음에는 처녀같고 나중에는 뛰어가는 토끼같다)라는 옛글은 가르쳐주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기는 하지. 강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약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더라. 속에 있는 것을 어떻게 불러내느냐가 문제다. 속에는 다 개인의 행위와 역사의 사건으로 영향을 입지 않는, 입힐 수 없는 혼이 잠을 자고 있다. 그것을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볼 때 나는 지금 우리나라 정치한다는 사람처럼 못난 은 없더라. 젊은이를 군대 아니 가련다고 잡으러 다니지만 말고, 학생 풍기 나쁘다고 욕만 하지 말고, 그들의 속에 있는 나라에 한 번 동원령을 못내려? 젊은이는 능히 죽을 줄을 아는 물건이다. 사람, 더구나 젊은이는 짐승처럼 목을 매고 자갈을 물려 말을 못하게 하고 가는 곳마다 사냥대처럼 따라가며 냄새를 맡아 조사하고 단속하고 취체하고 의심라고 강제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불러내주고 써주고 길을 열어줄 것이다. 젊은이 속에, 씨알 속에, 잠을 자고 기다리고 있는 나라가 있다. 그것은 일할 터를 찾고 일할 거리를 기다린다. 그것을 능히 알아 불러내어 동원을 하면 산을 옮길 수 있고 바다를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능히 하는 것이 정치가요, 영웅이다. 천리마를 잡아타지 못하고 무서워서 마굿간에 얽매두어 장난을 못하게 하는 것을 큰 일로만 아는 사람은 못생긴 물건이다. 세상에 이 따위 정치가, 교사, 종교가 어찌 그리도 많은지!
만세를 부르고 난 후 한반의 친구들은 거의 다 복교를 했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 훈도가 되고, 군수,경부가 되고, 의사,변호사가 되었다. 그라나 나는 다시 학교엘 갈 수 없었다. 한동안 게엄령이 내렸다가 안정된 뒤에 집에서 어른들이 학교에 다시 가라 하기도 하여 다시 봇짐을 싸가지고 평양에 나왔으나 차마 학교 문엘 들어설 수가 없었다. 머리를 들이밀기가 우선 싫고 한 번 박차고 나온 학교를 다시 갈 수가 없고 또 함께 운동했던 친구 중에는 아주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진 사람도 있는데 의리상 배반이 되는 것 같아 다시 학교에 가서 자복하고 학교 다니기는 싫었다. 크게 용기가 있어서 아니라 맘이 약해 차마 할 수가 없어 도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나의 일생은 딴 길로 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을 할지 모르지만 하여간 의사되기는 그만두었다. 관과는 원수가 됐다. 막연은 하지만 나는 무슨 새 것을 발견하고 잃었던 커다란 것을 찾은 듯했다. 그것을 이제 또다시 모른다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젠 어떻게 하나?
“독립 만세!”소리는 처음에는 일본 군대를 가지고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방방곡곡에 울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먹고 살아야 하는 인생인지라 만세 소리는 없어지고 일본의 압박 아래 있는 악착한 현실만 뚜렷해 갔다. 그러나 그 만세 없어졌을까? 아니다. 흐름은 또 한번 땅 속으로, 땅 속 아닌 가슴속으로 들어갔다. 누구나 낮에는 일본 사람의 요란한 칼소리를 들어도 고요한 밤 베개에 기대 귀를 기울이면 “대한독립 만세!”하는 소리가 저 몇십백 리 밖에서 하는 군중의 외침이나 되는 것처럼 제 가슴속에 은은히 들려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씨알의 소리
“어 신문 녕감 이제야 오시는구만.”
“어서 들어오시우, 또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들으셨소?”
미닫이 소리가 드르륵 나며 들어서는 것은 얼굴빛이 익을 밤알 같은데 칼로 새긴 듯이 깊은 주름이 가고 눈같이 센 머리와 수염을 박박 깎은 늙은이다. 모든 시선이 그리 모인다. 노닥노닥 기워입은 옷이 소매는 팔 중동에 가고 바지는 무릎에 찬다. 쇠갈퀴 같은 손에는 담뱃대만을 들었고 발은 왕발이다. 서슴지 않고 턱 들어서 자리를 잡고 나이 여든이 돼가도 아직 쇠뼈다귀를 까는 입에 담뱃불을 붙여 대를 가로 물면 창이 찢어질 듯한 목소리로 이야기가 나온다.
"아, 오늘 다웅 거우 건너갔다 온 사람이 그러는데 저 관제현 저쪽으룬 벌써 독립군 다 돼 있대.......”
이것은 만세 이후 한동안 우리 집 사랑방에 저녁이면 열리는 광경의 한토막이다. 거기는 면장도 오고 동장도 오고 주사님도 오고 건넛집 머슴도 온다. 방이 터지도록 사람이 모여 담배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서 밤새도록 서울선 어쨌단다, 평양선 어쨌단다, 뉘집에 독립단이 왔다 갔단다, 어느 구두쇠 부자가 돈 몇만 냥을 주어 보냈단다. 이런 따위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서야 돌아간다. 그 중에서 인기인 것이 이 김선달이라는 영감이다. 그의 아버지는 대원군 쇄국정치할 때에 화매죄로 걸려서 신도첨사한테 구염산에서 목을 잘려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뱃대가리에서 늙은 배꾼이다. 무식하고 상스럽고 술 잘 먹고 쌈 잘해서 그전 같으면 동리에서 누가 대수롭게 알지도 않을 사람이다. 그런데 만세 부른 이후 사랑에를 밤마다 오고, 오면 인기다. 본래 거짓말도 잘하는 데다가 어디서 얻어들은 소리를 또 과장해서 저녁이면 동리 안의 이 사랑 저 사랑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알려준다. 그래 촌 신문이란 이름이 붙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이 그대로 신용 못할 것인 줄 알면서도 그의 이야기를 개선장군의 보고나 되는 듯이 듣는 것이었다. 3.1운동은 이 인간의 찌꺼기를 단번에 씨알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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