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2/4)
그래서 훈장은 무서워 "얘 나는 너를 못 가르치겠다" 했다는 의기의 사내다. 자라서 글 잘하고 말 잘하고 계교 있어 혁명의 뜻을 품고 동지를 얻으려 팔도 강산에 아니 가본 서당, 아니 가본 절이 없다고 한다. 천 년 묵은 설움, 500년 눌린 분을 한 칼로 씻고 줄어든 고구려의 혼을살려보려고 우군칙, 이희저, 김사용 하는 사람들과 같이 정주세남이 부자 김이대를 꾀어 군자금을 대라 하고 가산 다북동에 일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하고 박천을 점령하고 청천강을 건너 아주를 빼앗으려다 못하고 물러가 정주성에 있으매, 한때 평안북도 일대를 거의 손에 넣었으나 종내 계획은 틀리고 일이 뜻같지 못해 정주성에 들어 문을 닫고 외로이 지키기 다섯달이 가자 종내 관군의 토벌을 받아 북장대 아래 원통한 피를 부었으니 때가 바로 순조 12년 서력 1812년 4월이었다.
홍경래는 왜 실패했나? 여러 말이 구구하다. 인물이 작았다느니, 기밀이 누설되어 준비가 충분치 못했다느니, 시세가 불리했다는니, 그러나 크게 말해 민중의 깨지 못함이지 다른 것 없다. 역사에는 미리 팜도 없고 외상으로 삼도 없다. 이때에서부터 비로소 참 민중의 운동인 3.1운동에 오려면 아직도 백 년이 넘는다. 민중의 걸음은 더디고 더딘 것이다. 그러나 확실하다. 홍경래는 실패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혹은 죽었으나 실패한건 아니다. 관군이 정주성을 빼앗으매 성안의 사람은 역적에 편들었다 하여 모조리 죽이는데 단으로 묶어 세우고 카로 메었고 피가 흘러 남문 밖까지 나왔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도 민중을 죽일 수 없다. 홍경래는 오늘날까지 봄 골짜기 나무 베고 소먹이는 더벅머리 속에 살았으며, 여름 낮 나무 그늘 밑에 쉬는 지아비들 속에 살았고, 가을날 밤 달 아래 다듬이하는 지어미들 속에 살았으며, 겨울 사랑방에 이야기한는 늙은이들 속에 살았다.
씨알은 난다. 민중은 50년이 지난 후 그 정주, 그 용강, 그 평양에는 범은 한 배에 새끼 셋씩을 낳는다고 말대로 되노라고 그랬는지 해를 비슷이 하여 세 사나이가 났다.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우리나라 사람은 한번밖에 못 사는 거다. 잘살아도 이 한 삶에 살아야 하고 못살아도 이 한 삶에 살아야 한다. 그 잘잘못이란 말을 행, 불행의 뜻으로 잡거나, 시, 비의 뜻으로 잡거나 정, 사의 뜻으로 잡거나 그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잘잘못이 대체로 결정되는 것은 나라에 달렸다. 나라 잘 타고 나면 잘되고 잘못 타고 나면 잘못된다. 자리가 따스할 만큼 앉았을 겨를도 없이 천하를 두루 다니던 공자의 일생은 춘추시대의 주나라로 결정이 되었고, 맨발로 길거리를 다니면서 젊은이를 가르쳐주기에 다른 생각이 없다가 독약을 먹히우고 태연히 눈을 감던 소크라테스의 운명은 아테네의 나라 형편으로 결정이 되었고 목자 잃은 양같이 헤매는 무리들에게 아픈 것을 고쳐주며 주린것을 먹여주고 가난한 자에게 하늘나라를 가르쳐주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생애는 그때 나라 망한 유대 민족으로 결정되었다. 루이 16세가 그때 프랑스에 나지 않았더라면 모가지를 잘리우지 않았을 것이요, 스탈린이 러시아에 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험악한 정치가 노릇은 아니했을 것이다. 트루먼, 아이젠하워도 만일 우리나라에 났다면 벌써 암살을 당했을는지도 모르고, 송진우, 장덕수, 여운형, 김구도 만이 미국에 났다면 훌륭한 정치가 노릇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인슈타인이 과학으로는 세계 첫 자리에 올라 이 우주에 아인슈타인 우주란 이름까지 붙게 됐지만 죽을 때는 아마도 조국에 대한 한 줄기 슬픔이 가슴에 가로 비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요, 파스테르나크가 [의사 지바고]를 써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그것도 철의 장막 속에 살지 않았다면 있지 못할 일이다.
개인의 자유와 힘씀이 없단 말 아니다. 나라를 세우고 목숨이 개인에 달리지 않았단 말 아니다. 그러나 구멍을 막으려면 돌은 부스러져야 하는 것이요, 집을 세우려면 아름드리 나무는 찍혀야 하는 것 아닌가? 네 맘을 쓰고 아니 쓰는 것은 네 자유에 있느니라. 그러나 그것을 어디다 어떻게 쓸 거에 관하여는 우리는 나라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것이요, 시대의 소리와 의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나라가 무엇이요, 시대가 무엇이냐? 자연과 사람, 물질과 정신, '나들'과 '너들'의 하나로 되어 살아 있는 생명체 아니냐? 옛 살람이 이것을 가리켜 운명이라, 팔자라 했고, 예정이라 하고 자연이라 했다. 이제 사람이 이것을 가리켜 사회라 하고 심리라 하고, 생리라 하고 물리라 하며, 실존이라 하고 현종이라 한다. 그러나 겸손하게 단순히 말하면 하나님이요, 나라다. 절대 되는 하나님의 뜻이시간으로 공간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나면 나라다. 나라는 '나'요, '나라!'하는 자요, '낳는 자'다. 잘 받으면 천명이요, 잘못하면 인위 곧 위, 곧 거짓이요, 그 잘못된 것을 고치면 혁면이다. 명을 새롭게 함이다. 참 자리에선 정치와 종교가 하나이다.
우리처럼 '나라' 소리 많이 듣고 자라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특색은 나라 소리 많은 것이다. '엄마' '아빠'를 배울 때부터 이날까지, 낮에도 '우리나라' 밤에도 '우리나라' 밤에도 '우리나라', 서울 가도 '나라' 산골 가도 '나라', 직업에도 '나라' 학문에도 '나라' 이것이 어떻게 된 나라일까? 장자는 말하기를 신이 꼭 맞으면 발을 잊고, 띠가 꼭 맞으면 허리를 잊고, 맘이 잘 맞으면 시비를 잊는다고 했는데, 그 말대로 미루어 한다면 정치가 바로 되면 나라를 잊을 건 아닌가? 그럼 우리가 밤낮 나라 나라, 정보 정보, 임금 임금, 누에 든 모래알처럼 목에 걸린 가사처럼 못 석인 별처럼 잊지 못하고 부르는 것은 거기 무슨 크게 잘못된 것이 있는 나라 아닌가?
옛날 요 임금은 어찌 정치를 잘했던지 백성이 임금 있는 줄 알지도 못했다 하며, 지금도 스위스 같은 나라에선 대통령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입학 시험에 어린애들이 무슨 장관의 이름까지 외워야 하는 나라는 무슨 나라인가? 젖을 먹일 때부터 백발이 되는 오늘까지 독립 소리 들은 건 얼마고 한 자는 얼마일까? 독립문, 독립협회, 독립운동, 독립당, 독립군, 독립만세, 독립독립, 그렇게 독립을 부르짖는 민족이 독립은 왜 못하고 이 모양일까? 석양에 망우리 나가보면 무연한 풀 속에 우뚝우뚝 홀로 서 있는 무덤 많더라만 그 사람들이 정말 근심 걱정 잊고 독립한 사람들인가? 그 독립한 무덤 하나 남기려다가 나라 잃은 사람들 아닌가? 금산의 칠백의사처럼 싸우다 싸우다 한 무덤에 얼크러져 네 뼈, 내 살을 고를 수 없이 됐더라면 나라는 정말 독립을 했지. 지금도 서울 장안에 쑥밭 아닌 화초밭 속에, 다투어가며 따로따로를 자랑하는 돌 벽돌의 산 무덤들, 그 속에 산 송장이 살이 썩는것 아니라 찌고 있는 동안에 나라의 풀들은 일어설 기운이 없이 이리 건들 저리 건들하더라. 이런 나라엘 왜 태어났을까? 태어나는 나라를 제 맘대로 골라 나라면 이 나라에 나겠다 할 사람 몇이나 될까? 하지만 명에는 둘이 없다. 사실은 잘잘못도 없다. 잘잘못을 붙이는 것이야마말 로 잘못하는 사람의 생각이다. 그저 함이, 삶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잘잘못을 가리는 생각으로 하더라도, 이나라는 한 번 살아볼 만한 나라 아닐까? 인생이 무슨 뜻이 있는 것 아니고 한바탕 구경을 하고 가는 것이라 치고라도 이 구경은 큰 구경이다. 억만 년의 역사라 하지만 이런 구경은 흔한 것이 아니다. 나라가 한 번 망하고 나라가 한 번 일어나는 것을 보는 일, 이것은 장관중의 장관 아닐까?
나라가 망하려 해도 쉽게 되는 것 아니요, 흥하려 해도 쉽게 되는 것 아니다. 맘이 둔한 자는 꽃피고 새가 노래하는 것을 만나도 먹먹히 지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은 끔찍한 환난을 겪어도 거기서 위대한 시와 철학과 교훈을 뽑아낸다. 산골짜기의 냇물이 한번 땅속에 스며들었다 저만큼 가 뚫고나와도 손뼉을 치고 감탄을 하게 되는데, 5천 년 역사가 땅 속에 들어갔다가 36년 후에 다시 뚫고 나오는데 어떻게 놀람없이 볼 수 있을까? 하물며 우리가 구경꾼이 아니요, 바로 그 연극 중의 극적인 장면을 놀아내는 배우 그 자신 임에서야! 이완용, 송병준을 밉다 말고 김옥균, 서재필을 아깝다 말라. 일본을 악독하달 것도 없고 소련을 흉악하다 할 것도 없으며 6.25를 끔찍하다 할 것 아니요, 2.4파동을 더럽다 할 것도 아니니라. 워낙 큰 연극을 함에 힘이 들 수밖에 없느니라!
평양 대동강
나라는 다 깨지고 뫼와 물만 깊었구나
성에 봄이 드니 나무 숲만 깊었구나
때에 느껴서는 꽃에도 눈물을 지고
갈라진 아픈 맘엔 새소리도 놀라 난다.
내가 두보였더라면 이렇게 읊었을것을! 사실 이 시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서당엘 못갔으니 할말 없지만,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시는 끔찍이 좋아서 공부를 했다는데 왜 풍월로만 알았지 그의 알뜰한 애국심은 못배웠을까? 시재로 하면 두보가 이백만 못할는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시를 말함에 이백보다도 두보를 더 존중하는 것은 그 인격, 그 정신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나라가 망한 강산에 봄은 해마다 여전히 찾아 들어와 붉은 진달래가 성망재를 물들이고, 무심한 아이들이 이를 꺾어, 피어선 꺾이고 꺾이고는 또 필 때, 이시 하나쯤 읽어줄 만하지 않은가? 정말 물 아래 상놈들이 돼 그런가? 아니야. 사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온통 그렇지 않은가? 무심한 백성이다. 사실 내가 이 시를 얻어들은 것을 일본사람에게서 였다. 나라가 망하고 나니 정말 국파산하재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살지만 산 사람이 아니다. 봄이 오면 밭을 갈고 가을이 오면 거두지만 무엇을 하잔 목적도 없이 그저 살았으니 먹을것을 위해 꿈지럭거리는 것이었다. 학교의 선생은 맘에 있는 것을 아이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생각과는 다른것을 가르쳐준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도 정말 할말은 마음끼리 하게 하고 입은 딴 것을 말한다.
이리하여 나라는 땅 속 아닌 가슴속으로 숨어들어가고 사람들은 온통 거짓말쟁이가 됐다. 일본을 우리나라라 생각은 아니하면서도 입으로는 우리는 일본 국민이라 하고 일본말을 국어라 하고 일본 사람을 보면 속으론 미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절을 하고 “아리가도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 한다. 목사님도 신부님도 선생님도 어떤 점잖은 이도 제 가장 가랑하고 존경하는 어버이, 자식, 스승, 제자를 보고도 이 빤히 내놓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이것이 우리가 참을 못 지킨 죄값이었다. 하나님의 명인 제 나라를 지키는 것이 참이다. 그 참을 아니하면 그 값으로 맘에 없어도 점점 더 거짓을 하지 않고는 못견디게 된다. 거기가 지옥이다. 나라를 잃으면 밥이 적어지고 옷이 적어져서 불행이 아니다. 맘에 없는 불의를 하여야 하고 거짓을 하는, 다시 말하면 죄의 종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 정말 불행이다. 우리는 그렇게 몇십 년을 살아왔다. 살아온 것이 아니라 죽어왔다. 그러는 동안에 참을 한 것은 자연만이었다. 두보도 기가 막혀 그 시를 읊었을 것이다. 전쟁에 죽은 사람이 불쌍해서만 아니다. 산 사람이 뻔히 있건만 사람이 있다 할 수 없어 하는 탄식이다. 전쟁에 죽은 사람은 차라리 살았다.
오늘은 어떤가? 부모 자식끼리, 선생 제자끼리, 종교가 신자끼리 거짓말 아니할까? 정부의 명령, 관청의 보고서, 교장의 훈화는 정말 말 그대로일까? 우리가 나라를 지켰다면 나라는 우리에게 참을 하게 해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면 겉모양의 나라는 나라가 아니요,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열네 살에 나는 공립 보통학교에 다니게 됐다. 그때 우리는 공립학교라면 나라 팔아먹는 놈만 가는 곳으로 알아서 업신여겼는데 우리 동리에서 내가 맨 처음으로 거기를 가게 될 줄은 몰랐다. 아버지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코 일본 세력에 가 붙으려 한 일은 없는 이건만 나를 장차 의학을 시킬 생각에 그리 가게 하였다. 학력으로 하면 그보다 훨씬 높은데까지 나갔는데 단지 일본말 하나 때문에 거기 가 묻는 말에 일본말로 대답 못한다고 3학년으로 내려가 붙으라 할 때 분하던 생각. 열여섯에 평양관립 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 물 아래 촌바우가 금수강산을 본 것이 이것이 처음이었다. 소년 시절의 3년을 그 속에서 자란 것은 일생에 잊지 못할 행복이다. 평양은 이른바,
긴 성 한편에 굼실굼실 흐르는 물
한 벌판 동편 끝에 올망졸망 섰는 뫼.
그 장관은 넓은 들과 그 복판을 흐르는 대동강이었다. 거기 중심이 되어 호령하는 자리에서 주산이 된 것이 모란봉이다. 모란봉이 크기 조막만한 데 지나지 않지만 한번 거기 올라서면 사방 몇 백리의 산천이 지호간에 있다. 이것이 이른바 제일강산이다. 이것이 모란봉의 모란봉된 까닭이요, 평양의 평양된 까닭이다. 고구려가 여기에 나라 터를 잡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요, 묘청이 여기다 도읍하면 36국이 내조하다 했던 것은 노상 미신만이 아니다. 거기다 비하면 고려의 송도와 이씨의 한양은 족히 비할 나위도 못된다. 왕건은 또 그래도 당시 형편에 할수없어 하기는 하면서도 장차 평양으로 옮길 생각을 했다니 봐줄 점이 있지만, 요 북악산 남으로 정한 이는 기상이 낮고 생각이 속된 사람이다. 아니다. 인물이란 무엇이냐? 민의 바다에 일어나는 한 물방울에 지나지 않는데 이성계를 책망하여 무엇하느냐? 민의 기운 살았으면 고구려며 평양이요, 죽었으면 조선이며 한양이지. 지금도 평양을 잃어버린 것은 한이다. 민주주의자라면 만주는 또 몰라도 적어도 평양에 가야 한다. 그 땅이 그렇게 생긴 것같이 민중의 나라요, 통일의 도시다. 평양에서 아마 당파 싸움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발톱, 눈의 때 같은 양반과 그 고린내 나는 당파 싸움은 서울의 산물이다. 이 역사적 죄악의 탯집인 서울! 고려 마지막에 이색 선생이 평양을 지나다가 읊은 시에,
텅 빈 성에 한 조각 달만 뜨고
돌은 늙었는데 구름은 제대로구나.
하는 구절이 있다. 이것도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과 같은 심정의 말이다. 그 아래 구절에 보여주는 대로 그는 동명성왕의 큰일을 그리워하는 맘이 간절하기 때문에 성이 비고 돌이 늙어 뵌 것이다.
기린이 한번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왕손은 어딜 가 노니느냐.
그러나 임금은 없어져도 백성은 남았다. 백성이 남은 한은 나라는 보이게는 못있어도 그 백성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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