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1/4)
평안도 상놈
호랑이가 무엇이 호랑이냐? 상놈이 호랑이다. 범이 범이다. 짐승에서는 발톱 날카롭고 무늬 돋은 것이 호랑이나, 사람에서는 톱없고 문 없는 것이 호랑이요, 왕이다. 옛날엔 또 몰라, 적어도 지금엔 그렇다. 옛날도 높은 자리에 앉은 임금이란 공연히 죽은 호랑이 가죽이지 사실 산 임금은 민중이었다. 그래 민심이 천심이라는것 아닌가? 평안도가 호랑이라는 것은 그것이 계급없는 민중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 용기도 민중한테서 나온 것이다. 무의 없는, 글없는 민중이기 때문에 날쌔고 힘있는 것이다. 무지 무식하기 때문에 왈칵 하는 것이지 작은 지혜, 지식의 분별을 한다면 힘이 못 나온다. 그것은 힘은 하나됨에서만 나오는데, 알아가지고는 하나는 못되기 때문이다.
알면 분별이지, 분이요, 별이지, 하나는 못된다. 민중은 난 대로 있으므로 소요, 박이므로 단이요, 순이므로 하나다. 한 소리만 하는 것이 민중이다. 한 소리가 참 지다. 정말 지는 민중이다. 양반이라 갈라질 수밖에 없고, 싸울 수밖에 없다. 민중은 각각 제노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제 지킬 소유도 지위도 없기 때문에, 한 소리일 수밖에 없다. 초상지풍이면 필언이라, 하늘명령 들으면 한 세대로 눕는 것이 민중이다. 지자불혹이라, 이랬다저랬다 아니하는 것은 민중만이다. 그러므로 약하기 그에서 더한 것이 없지만, 그것을 막아낼 자가 없다. 막아낼 수 없는 한 소리, 곧 하늘소리를 하기 때문에 그것이 종내 이기고 임금이 된다. 용맹이라 하지만 천하에 용맹한 것은 하나밖에 없다. 민중이다. 인자무적어천하라, 민중은 인이다. 전체이기 때문에 거기 대적이 있을 리 없다. 인자불우라, 어진 자는 근심 아니한다. 민중이기 때문에 근심이 없다. 가진 것이 없는 것이 민중이다. 그 대신 민중은 모든 것을 가진다. 귀족은 지위를 가지겠지만 민중은 그 지위를 지위되게 하는 나라를 가진다. 돋 나라 그것이다. 지배하는 자는 권세를 가지겠지만 민중은 그 권세를 권세되게 하는 생명을 가진다. 곧 생명 그 자체다.
민중은 잃을 것이 없고 대적이 없으므로 근심이 없다. 천하에 무서운 것은 근심이 없는, 두려움이 없는 얼굴이다. 유교에서는 지, 인, 용을 천하에 뚫린 덕이라 하지만, 그것은 곧 민중의 덕, 민중의 속을, 성격이란 말이다. 민중이고서야 인할 수 있고 지할 수 있고 용할 수 있다. 고기가 물 밖에서 헤엄을 칠 수 없듯이 민중을 떠나, 민중을 무시하고 없신여기는 영웅은 죽은 것이다. 그러나 세상이 영웅을 두려워할 줄 알고 민중을 존경해야 되는 줄을 어찌도 모르는고! 평안도는 민중의 나라다. 상놈이 무언가? 사람대로 있는 사람이지. 맨사람이다. 밥에도 맨밥을 가지고야 하나님께 제사한다면 사람도 맨사람을 가지고야 하늘 통할 것이다. 평안도는 백 년을 상놈으로 내려 왔지만, 그것은 맨사람, 참 민중을 얻자는 하늘 뜻 아닐까? 감투를 쓰고 채색 옷을 입은 놈은 맨대로 있을 리가 없다. 바탕을 잃었지. 이상하게 맨은 맺는다는 말과 음이 통하는데 뜻은 반대다. 맨 사람(구속당한 자)은 맨사람대로 있으나 스스로 놓였다는 자는 도리어 노예다. 그것은 아마 하늘과 땅이 반대되어서 그런 것 아닌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는 놓이고, 하늘에서 매면 땅에서 놓이고, 평안도 맨놈은 땅에서는 매였는지 몰라도 하늘에서는 놓인 백성이다. 그러므로 늘 새 사상은 가장 먼저 받았다. 저들은 인작이 없는 대신 천작을 가지지 않았을까?
상놈이란 상민이란 말인데 상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어쩌면 떳떳이라니, 상놈은 떳떳한 사람이다. 언제나 있는 사람, 어디나 있는 사람, 바닥 사람, 밑 사람, 뿌리 사람, 변함없는 사람, 뻐젓한 사람, 하늘과 사람을 바로 볼 수 있는 사람, 민이 아니고는 하늘을 바로 볼 수 없는 민은 이른바 천민이라, 하늘백성, 낸 대로 있는 백성, 하늘밖에 쓴 것이 없고 땅밖에 디딘 것이 없는 사람이다. 감투를 썼다는 것은 곧 물질을 썼다 함이요, 지위를 가졌다는 것은 사람을 밟고 섰다 함이다. 그것은 하늘백성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늘 땅을 버젓이 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늘이 무서워서 가리는 감투요, 땅이 두려워서 덮는 의자다. 상은 그런 것 다 없다. 그러므로 떳떳이다. 천지가 있는 한 상놈은 있을 것이다. 시대가 재미있지 않나? 지위 가진 자들이 이상놈들 보고 "우리는 당신의 종놈입니다" 하지 않나? 평안도는 잘해 그랬던지 못해 그랬던지 그 하늘백성, 맨사람의 자리를 받은, 사람대로 있는 사람인데, 무엇하자고 푸른 산 버리고 마을의 똥개 찾아 내려오는 범 모양으로 저자에 '해먹자' 무리와 서로 따라다니나? 평안도가 시비를 듣는 것은 한마디로 상놈되기를 면해 보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상놈되기를 왜 버리려나? 상을 버리나? 상을 버리면 비상한 것 같은가? 비상은 곧 무상임을 모르나? 덧없는 것이다. 귀도 덧없는 것이요, 부도 덧없는 것이다. 참이 아니란 말이다. 마을에 내려가도 그 똥개 무리를 모아 치우기 위해 내려갔다면 좋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다면 본래의 네 집인 푸른 숲가에 서서 한 번 호통하면 그만이지 산중 왕답지 않게 그 더러운 무리에 어깨를 비비댄단 말이냐?
민중의 힘을 가지려면 언제나 상놈의 자리를 떠나서는 아니된다. 민중은 무관왕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시관의 왕이다. 그 이마에는 피와 땀이 꾸밈이 될지언정 구슬이 영광이 될 수는 없다. 나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평안도에 나고 상놈으로 난 것은 자랑이다. 프랑스의 저 참혹한 혁명의 씨를 뿌린 루이 14세는 일찍이 주제넘게 "내가 곧 나라다" 했다 한다. 그는 감히 못할 소리를 건방지게 한 죄로 참 임금이요, 참 나라인 이가 노하여 일어나는 날 가엾은 그 손자가 목을 잘리고 역사상에 드물게 보는 참혹한 인류의 영원한 부끄러움이 되는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었나? 그러나 나는 그럴 걱정이 없이 정말 "내가 곧 나라다" 할 수 있다. 분한 일이야. 그렇지 않은가 생각해봐! 이 500년 역사를 고난의 역사요, 부끄러움이 역사라 하지. 그 까닭은 어디 있나? 말을 기다릴 것 없이 당파 싸움에 있지 않나? 그 당파 싸움이 무엇 때문일까? 서로 민중의 고기를 제가 많이 깎아 먹잔 싸움 아닌가? 그렇다면, 500년 역사가 결국 그거라면 거기서 따돌려놓음을 당한 것이 행복이지 불행이겠나? 그 죄악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영광이지 부끄러움이겠나? 역사의 결산을 보는 날 아무리 심술궂고 엄한 고소자가 나선다 하여도 평안도 상놈더러 500년 피의 역사의 책임을 지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행복이 어디 있나? 참으로 그렇게 해주신 하늘에 감사해야 할 것이 아닌가?
사실 평안도 놈이 잘나서 거기 참여 아니한 것도 아니요 평안도만이 귀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직 하늘이 그렇게 정했으니 그리된 것이지. 하늘이 무엇하자고? 썩어질 것은 다 썩어져 처분하는 날이 와도 역사는 계속해야 할 것 아닌가? 그날은 위해 한 가지를 아껴둔 것이지 무언가? 그런데, 그런데 그 남겨놓은 가지마저가 그 병균에 전염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평안도 놈도 감투 쓰고 양반질하고 싶으냐? 역사의 뜻이 없다면 몰라도 만일 있다면, 평안도가 상놈의 곳으로 500년 역사에서 제외를 당하여 무대 뒤에서 기다리고 그 마지막에 민중의 종교 기독교가 그리고 먼저 들어와 전체로 기독교, 더구나 자유정신이 강산 프로테스탄트 사회가 되고, 그런 지 반 세기 자유의 대적인 공산주의가 또 그리로 들어왔다는 그것은 크게 뜻이 있는 일이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이 무서운 역사적 시련을 겪으면 겪을수록 빠져나가는 것이 역사의 찌꺼기인 특권계급일 것이요, 미래를 차지하는 역사의 상속자는 호랑이의 넋을 가진 민중 만일 것이다. 소금의 값이 짠맛을 내는 데 있다면 상놈의 뜻은 민중정신을 지키고 길러내고 퍼뜨리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청산맹호가 똥개의 뒤를 따른다는 것은 무언가? 백두산이 무너진다 해도 이보다 더 섧고 분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놈들아, 너희 몸에 소금을 치고 너희 속에서 더러워진 때를 자내버려라! 그래야 너희의 역사적 책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평안도, 평안도 하니 오해하지 말라. 평안도가 귀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이 뒤끓는 용광로 속에서 평안도는 무슨 평안도냐? 다만 민중을 위해 하는 말 아닌가? 내가 난 곳이 있고, 본 것이 있기 때문에 하는 말뿐이다. 내가 백두산 호랑일 보았노라.
호랑이의 족보
우리 한나라는 예로부터 호랑이와 인연이 깊은 나라다. 본래 호랑이는 인도로 부터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 많이 살고 있으며, 그 중에도 우리나라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호랑이가 특별히 그 성질이 사납기로 유명하다는데, 그래 일찍부터 그것과 싸워오며 해를 많이 입어서 그런지,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호랑이에 관한 전설이 많다. 우리는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호랑의의 옛말을 들으며 자라온 민족이다. 즉 호랑이와 같이 놀며, 싸우며, 살면서 자라온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단군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부터 호랑이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러고 보면 이 민족의 둥지인 백두산에서 개마고지를 타고 번져 내려오면서 나라의 등뼈가 된 고구려의 후손인 평안도 사람에게 호랑이 같은 기질이 있다는 것은 자연 그럴 만한 일이다. 그런데 전설에 나타난 범의 지위를 보면 이상하다. 단군 전설에 보면 환웅님이 인간세계에 내려올 때 곰 한 마리 범 한 마리가 있어서 사람이 되게 하여 주기를 빌므로 마늘과 쓱을 주며 21일을 지내라 했더니 범은 그것을 참지 못해 사람이 못되고 곰은 그대로 지켜 여자가 되어 그 여자와 혼인해 단군이 나왔다고 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한 개 전설이요, 흔히 역사가들이 해석하는 모양으로 원시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대개 보는 토테미즘의 남은 그림자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 뜻은 무엇이라 생각함이 옳을까? 물론 결정해 말할수는 없으나 구태여 해석을 붙여본다면 혹 이렇지 않을까? 즉 주문을 지켜 사람이 됐다는 곰은 그때에 밖으로 부터 온 지배자들과 결탁 동화하여 한 귀족계급을 이룬 부족이요, 지키지 못해 사람이 못됐다는 범은 피지배의 민중의 계급으로 된 부족 아닐까? 그렇게 보면 곰은 임금이니, 왕검이니, 곰나루니, 곳곳에 있는 검산이니 하는 말이 표시하는 모양으로 신이라는 뜻으로 많이 실려 있다. 일본 말에도 가미란 말로 남아 있다. 그러나 범이니 호랑이니 하는 말은 지명이나 사람 이름에나 관직 이름에나 별로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민간신앙에 들어오면 범은 대단히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반드시 산신령을 믿었는데, 그 산신령에는 꼭 범이 따라다닌다. 문견이 좁아 다른 나라는 모르나 우리나라 절에가면 어디나 반드시 산신령의 그림이 있는데, 그 산신령을 언제나 범을 대리고 있다. 산신령은 본래 불교에 있는 것일까? 모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나라 본래 있던 종교가 불교와 융합하면서 들어 간 것 아닐까? 이렇게 종합해 볼 때 범은 민중을 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거기까지는 위험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곰이 정치와 결탁한 나라의 종교를 표하는 대신 범은 민간신앙을 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쪽이 통치정신이라면 이쪽은 반항정신, 저쪽이 조직이라면 이쪽은 믿음이다. 범은 늘 친함을 입지 못하면서도 매우 영스러운 것으로 두려워함을 받는다. 그것은 개혁, 혁명을 표시한다.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면서도 잔인하지도, 음험하지도, 구구하지도, 끈덕지지도 않는, 그리고 변화막측, 자유자재, 대범 과감한 호랑이로써 그 신앙의 대상을 상징하는 데 뜻이 있다. 이것은 중국 사람이 고구려 사람을 평하여 강용이근후라, 질긱강용이라, 불위구초라, 견인유환투사구지라 한 말과 서로 들어맞는 일이다. 어쨌거나 고구려의 기질은 호랑이다운 것이요, 그 기질은 쇠하였을망정 평안도 상놈에 남아 있다. 호랑이가 모든 짐승의 왕으로 있으면, 그 신령으로 온 산을 다스리고 억만 가지의 잎새가 그 휘파람으로 움직이는 것이로되 그 형태를 나타내는 일이 극히 드문 것과 같이, 민중이 그 나라의 주인이요, 그 정신으로 역사가 굴러가는 것이나, 그 얼굴을 드러내는 일은 매우 보기 어렵다.
민중도 호랑이 같이 용맹하면서도 또 착하기 때문에 숨은 자다. 역사상의 많지 않은 실례에서 그것을 들어본다면 우선 온달이다. 그는 일생을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철저히 민중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나라의 흥망이 관계되는 때에는 출장입상하는 재주를 들어냈다. 그 다음은 검도령이다. 그는 천하의 옳지 않음을 바로잡기 위해 70근 철퇴를 만들어두는 의기를 가지고도 발톱을 감추는 호랑이 모양으로 풀 속에 묻혀 있다가 한 번 알아주는 이가 있은즉 멀리 중원에 들어가 진시황을 때리다 실패했으나 책임을 한 몸에 지고 태연히 매질 끝에 죽었다. 과연 시인이 부른 대로 보한수불성이나 천하개진동이다. 한나라 원수는 못 갚었어도 천하는 부르르 떨었다. 그 다음은 을지문덕,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거짓 패했다가 백만 적군을 단숨에 무찔러버리는 용맹을 가지면서도 유유히,
신스러운 꾀 천문을 더듬고
묘한 셈 자리를 다했구나
싸움 이겨 공 이미 높였으니
족한 줄 알아 그치면 어떠하리
라 하여 적장을 풍자할 만큼 어질었던 참 사내. 그러고는 한중 되는 군사로 외로운 성을 지켜 한때의 정복자 이세민으로 하여금 백만 군으 가지고도 못 쓰고 울고 돌아가네 하면서도 양만춘인지 이름조차 자세히 남지 않은 정말 무명의 영웅. 그러고는 천 년을 임진강 이북을 이리와 여우의 드나드는 대로 맡겼으니 족히 찾아볼 것도 없고, 그래도 죽지 않는 민중의 혼이어서 다 썩어진 전주 이씨 말년에 한 사내가 일어났으니 곧 홍경래다. 그는 평안남도 용강 사람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글을 읽다가 시를 지으라 함에,
추풍역수장사권
백일함양천자두
라 했다. 훈장이 이를 받아들고 읽기를 "추풍역수장사권이요, 백일함양천자두라" 하니 그는 곧 고치며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추풍역수장사권으로 백일함양천자두를(가을 바람 역수를 건너는 사내의 주먹으로 대낮에 함양 천자의 대가리를)" 하여 '으로'와 '를'에 힘을 주어 읽으며 주먹으로 방바닥을 땅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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