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백두산 호랑이
청산맹호
팔도평을 누가 했는지 어느 시대에 됐는지, 거기 어느 정도 치우친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 들었는지 모르나, 평안도를 호랑이로 표시한 것은 그럴 듯하다. 평안도 사람에겐 확실히 호랑이 기질이 있다. 호랑이 살림 꼴이나 버릇을 과학적으로 살펴보고 반드시 거기 맞추어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으로 한다면 호랑이란 고기 먹는 짐승인데 평안도 사람은 결코 남을 잡아먹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제일에 정치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이 남의 고기를 먹을 기회가 있을 리가 없다. 정말 육식은 정치가만이 하고 있다.
일거리보다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실과는 엉뚱한 전설적인, 설화적인, 우화적인 것이 많이 있다. “용은 구름을 부르고, 범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따위가 다 그것이다. 옛사람 보기에 호랑이는 날램의 화신이었다. 호랑이는 나갈줄 알고 물러갈 줄 모른다느니, 곧은 목이어서 돌이킬 줄 모른다느니, 죽어도 앉아 죽는다느니, 짐승의 왕이니 하는 말이 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평안도를 호랑이라는 것은 주로 그 용기를 말한다. 그 평을 지은 사람이 일부러 뜻을 넣어서 했는지 모르지만 북의 세 도는 짐승으로, 남의 세 도는 자연 경치로, 가운데 두 도는 사람 형상으로 표시했는데, 거기도 이치가 있는 듯싶다.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가 서로 다르지만 또 이른바 서북이라 해서 어딘지 통하는 점이 있는데 삼남이라는 세 도가 역시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차이가 있기는 하면서도 아무래도 같은 삼남이다. 그렇다면 가운데 두 도는 반대로 같을 듯하지만 다르다. 거울 속 미인과 바위 밑 부처가 다 같은 사람 형상이건만 속은 서로 딴판이듯이 경기도와 강원도는 서로 등을 지고 다르다.
이것은 옛날 이야기고 기차, 자동차, 비행기, 전신, 전화, 신문, 잡지, 영화가 번개같이 쉴새없이 오가는 지금에 지방적 기질의 다름이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평안도가 어쩔까봐 걱정하는 것은 공연한 생각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말과 일이 풀가마처럼 뒤저음을 당하는 오늘 문명에 민족, 인종의 다름도 차차 없어져 가는데 평안도 따로 경상도 따로가 있을 수 없다. 그런 것은 앞으로 점점 더 없어져 갈 것이다. 이런 것은 다 교통 통신이 자주 되지 않고 비교적 가만 있는 살림을 하는 때에 된 일이요, 이제는 그런 것은 사회 살림에 큰 영향을 줄 것은 못된다 할 것이다. 지방적 기질의 차이가 차자 없어져 간다는 사실은 한편 좋은 일이다. 기질이 좀 다르다 해서 공연히 지방색을 나타내어 사람의 말이 서로 막히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인정 풍속이라 하지만 그 풍속이란 사실 우스운 것이 많다. 바람 같은 것에 걸려 사람의 맘이 막히고 심지어는 역사의 바퀴까지 못 돌게 되는 일이 있다.
나는 일제시대 서울형무소에서 갇혀 있는 사람끼리 동태국을 어떻게 끓여먹느냐 하는 것 때문에 싸우다가 간수한테 매를 맞는 것을 본 일이 있다. 하나는 함경도 사람인데, 서울 놈들 동태를 밸도 따지 않고 그냥 끓여먹더라 흉보는 거요, 또 하나는 서울 친군데, 함경도 놈들 몰라 그러지 동태는 그냥 끓여야 제 맛이 나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깔보는 것이다. 감옥 안에서 콩밥에 소금국도 없어 못먹는 놈들에게 동태에 밸을 따고 먹음 어떻고, 그냥 먹음 어떻고, 소용없는 문제련만 그래도 그여 제가 옳다, 제 고장이 좋다 내세우 려다가 매를 맞고야 말았다. 나라를 망치는 당파 싸움이나 세계를 어지럽게 하는 전쟁은 이보다 나을까? 그것도 정말 건덕지를 따지고 따져 올라가면 동태 밸인 경우가 많다.
바람에 불리는 갈대 같은 것은 반드시 여자 맘만 아니다. 제 정당, 제 고장, 제 교파, 무엇을 내세우자는 정치가, 지도자도 다 마찬가지다. 보지 않나, 국회의원의 손은 바닷가의 갈잎보다 더 잘 이리 흔들 저리 흔들 하는 것을, 그보다는 8월 조밭에 허수아비라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 가리키고 저리 불면 저리 가리키어 제 속은 하나 없고 사나운 바람을 만나서만 산 듯한 시늉을 한다. 가엾은 것은 어리석은 새 무리뿐이다. 한 발걸음 움찍도 못하는 그것이 무서워서 한밭의 익은 맛있는 조를 못 먹고 내놓 으니. 그러나 새가 어리석어도 잠깐이다. 그 조심성 많은 참새도 몇 번 속아본 다음에는 제대로 앉아 먹는다. 그럼 징당 파동에 번번이 놀라는 민중은 참새만도 못한가? 어쨌거나 교통 통신이 빠르고 잦은 것을 따라 지방색이 차차 멀어가는 것은 좋은 일이다. 6.25전쟁이 끔찍하면서도 그로 인해 얻은 것이 있다면 13도의 각 계급이 온통 한데 섞여 살아봤다는 그것이 그 중 큰 하나라 할 것이다. 경상도 문등이, 전라도 개똥쇠, 충청도 양반, 평안도 상놈, 함흥 얄개, 평양 망나니가 한데 섞여 코를 서로 비벼대고 살아가는데 참 재미가 있었다. 그리 되고 보니 양반도 동태 밸이요, 상놈도 동태 밸이었다. 양반 상놈은 평안할 때 남의 고기 먹고 살 때의 소리지, 제 손톱 발톱으로 살 구멍을 뚫고 파나가야 하는데 그까짓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내고 나서 생각해보니 정말 대동지환이었다, 다 같이 당하는 환난일 뿐 아니라, 하나로 만드는, 대동을 시키는 환난이란 말이다. 사람은 고난에서야 하나가 된다. 그러나 또 고장빛깔이 없어져 가는 것은 나쁘기도 하다.
사람은 집이 있어야 살고 문화는 고향이 있고서야 나오는 법이다. 삶은 같이함이다. 외톨로는 살 수도 없고 정신이란 더구나 있을 수 없다. 생각이요, 말이요, 글이요는 다 떠돌아다니는 살림으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자연에 대해서나 사람끼리로나 사귐이 있은 다음에야 정신의 발달이 있을 수 있다. 높은 정신문화를 낳는 데는 개인으로나 단체로나 성격이 필요한데, 그 성격이란 곧 자리잡힘이다. 아무리 정신이라고 이랬다저랬다 한 번씩 우연히 나오는 것을 갖고는 아무 힘도 없고 따라서 아무 값이 없다. 자리가 잡혀야 하듯이 맘도 자리가 잡혀야 바깥을 다스릴 수 있다. 가풍 있는 것이 집이요, 국풍 있는 것이 나라요, 성격 있는 것이 민족이지 그렇지 못한 것은 아무 뜻이 없다. 뜻은 변함이 없는 것이어야 뜻이다. 그러므로 문화창조에 있어서 고향은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기질적으로 되지 않는, 인격 없는, 향토적으로 되지 않은 문화는 없다. 그런데 요새 사람에게 있어서는 고향이 차차 없어져 간다. 사람의 살림이 대단히 바빠졌다. 그러므로 한 곳에 있을 수 없게 됐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향락욕이요, 하나는 사업심이다. 재미를 보기 위해 새 것을 구하고 사업을 하기위해 될수록 많이 될수록 빨리 모은다. 헤치고 오고 가야 한다. 그러는 동안에 고향에 대한 사랑도 잊어버리고 고향을 돌아볼 겨를도 없다. 이것은 그들의 살림이 매우 물질적으로 됐기 때문이다. 물질표준으로 사는지라 그들의 표어는 편리일 수밖에 없다. 요새 사람에게서 고향을 빼앗아버린 것은 이 편리주의다. 편하기 위하여는 자동차를 타야 하고 자동차를 들여오기 위하여는 큰길을 내야 하고 큰길을 내기 위하여서라면 선조가 심은 오래 늙은 나무도 찍어야 하고 그들의 뼈가 묻힌 뒷산도 허리를 잘라야 하며,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해야 하고 사업을 하기 위하여는 가재도 팔아넣고 금강산에도 광산을 파고 역사적 유물도 불도저로 밀어버려야 한다. 지금은 부산 가서 봐도 그 거리요 서울 와서 봐도 그 거리며, 대구 가서 먹어도 그 요리요 전주 가서 먹어도 그 요리다. 그래서 편한 점도 있겠지만, 그 대신 인간이 옅어져버린다. 기계는 어디 가서 맞추든지 다 들어맞는 것이 이상이지만 사람은 그럴 수는 없다. 세계 어디 가도 만날 수 없고 거기만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편리를 따르는 동안에 사람들의 살림이 여관살이 기분으로 되어 버리고 고향 생각을 잊어버리는 것은 확실히 문명의 한 큰 폐단이다. 고향이 없어지면 전통이 없어지고 전통이 없으면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 문명이 이대로만 간다면 오토메이션의 세계가 될 것이다. 뜻보다 편리를 취한다면 사람보다는 오토메이션 편이 훨씬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고향의 보금자리에서 자녀를 교육하기보다 물질적인 욕망을 편하게 채워주는 오토메이션을 발달시키기에 더 힘을 쓰게 된다면, 종당은 사람이 그 오토메이션의 종살이를 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아니다, 벌써 어느 정도 기계의 종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지않나? 하루 온종일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잠깐 동안도 주의를 풀새 없이 차머리만을 내다봐야 하는 청년, 교환대에 앉아 한 순간도 눈을 팔 새 없이 전화번호를 넣어주어야 하는 소녀가 기계의 종 아닌가? 그들에겐 성격적인 것이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신경질이 있을 뿐이지.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 팔도평에 평안도를 청산맹호라 혹은 맹호출림이라 하는데 그것을 칭찬으로 한 것인지 흉으로 한 것인지 모르나 나는 평안도 사람의 그 호랑이 기질이 좋다. 사실 기질은 기질이지 거기에 무슨 좋다 나쁘다가 있을 것 없다. 기질은 정신적 공기와 같은 것이니 그 속에 태어났으면 그래도 제 기질껏 살 일이다. 호랑이가 소 노릇 하잘 것도 없고 부처가 거울 속 그림자 노릇 하잘 것도 없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쓸 곳에 썼으면 그만이다. 밭을 가는 날엔 소를 쓰겠지만 승냥이떼가 들어왔으면 범이 아니면 아니될 것이다. 풍전세류를 태산교악 편에서 보니 연약이요, 간사지 저 제대로 보면 얼마나 좋아! 위성조우읍경진에 객사청청류색신을, 봄비도 개인 아침 인생의 태산을 넘어 원정 길을 떠나는 젊은이에게는 그 한가지를 꺾어주면 힘듦을 모르고 갈 것이다. 청풍명월이 좋은 것 같지만 그것도 고린내 나는 양반심리를 못 면하고 보면 거울 속 미인같이 죽은 그림이지 소용이 없고, 경중미인이라 할 때 연지 곤지 찍은 계집을 생각하니 그렇지, 그러지 말고 동해바다를 거울로 보면 암하노불도 거울 속 미인이다.
그러니 청산맹호는 청산맹호대로 보라. 왈칵하고 뒤가 없다 하지만 벽산이 무너지게 한 번 호통하고 마니 호랑이지, 호랑이가 강아지처럼 줄곧 짖는다면 어찌 견딜 수 있을까? 평안도는 평안도대로 쓰고 함경도 함경도대로 쓰자. 서로 비평하는 것이 맘이 좁기 때문이다. 만물이 가는지가지로 어석더석한 것은 큰 눈을 뜨람 아닌가? 멀리서 크게 보면 하나로 산 우주다. 사람 사람의 성격이 서로서로 다른 것은 사랑하는 가슴 열람 아닌가? 하나로 가까이 잡으면 모두 다 한 맘이다. 하여간 나는 "저것도 평안도냐? 할 만큼 약하고 겁많은 성격이면서도 평안도의 호랑이는 좋다. 요새같이 이렇게 승냥이 무리가, 승냥이나 되나, 여우.개 무리가 들끓는 세상에서는 백주에 대갈엄이가 장안 복판에 한 번 나타났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범 그리다 잘못되면 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함경도를 이전투구라 한것은 좀 고쳤으면 좋겠다. 그것은 그 끈기있는 면을 표하기 위한 것일 것이지만, 함경도 기질을 그렇게만 표할 것은 아니다. 나는 개는 아주 싫다. 개같이 더러운 물건이 어디 있을까? 해방 이후, 나는 서울 살지 않다가 처음 와서 그렇게 뵈는지, 이상하게 '개자식' 소리가 부쩍 늘었고, 또 웬일인지 개 기르는 풍이 심히 늘어가는데, 그것도 사람 속의 일과 어울려가는 까닭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 사람 속에 개가 많아져서 그리 되는 것 아닐까? 그러나 개란 것은 참 더러운 물건이다. 잘 먹이는 탓으로 셰퍼드, 포인터 같이 귀족화하고 학교에 가서 공부까지 한 놈이 있으나 그 똥을 먹는 본성에서는 똥개나 다름이 없다. 사람의 먹을 것을 도둑질해 먹으니 그렇지, 이제라도 먹을 것이 없어지면 똥을 즐겨 먹을 것이다. 이상하게, 이상할 것도 없지만, 사람 중에서도 도둑질을 잘하는 놈들이 영악한 개, 고급 개를 기르기를 좋아하는 듯하다. 개가 도둑을 본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도둑끼리 친해 있을 뿐이지. 정말 도둑질을 아니하는 가난한 사람의 집엔 개를 둘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개를 싫어하는 것은 그보다도 그놈의 비겁 때문이다. 보통 개가 주인을 위하는 것으로 그놈의 덕으로 칭찬하여 심지어는 사람에게까지 적용하여 충견이니, 견마의 힘을 다하느니 하지만 사실은 주인을 아는 것이 아니라 제게 먹을 것을 잘 주는 것으로 꼬리를 칠 뿐이다. 개란 곧 아첨이다. 제게 잘하여 주는 사람이면 그것이 선하거나 악하거나 가릴 것 없이 꼬리를 친다. 꼬리나 치면 좋지만 심하면 아주 자빠져누워 죽는 시늉을 하면서 아첨을 한다. 그리고 옷이라도 허줄하면 찢어먹을 듯 짖지만 한번 정말 강하게 굴면 그만 풀이 죽어 꼬리를 축 내리어 다리에 끼고 비슬비슬 피해 도망을 한다. 이따금 서울 길거리에 개장수가 개떼를 끌고가는 것을 보면 마치 혁명군에 끌려가는 독재 군주의 부하들 같아서 그렇게 기세 당당하고 험악하던 놈들이 어쩌면 저리 비겁해졌나 하고 의심이 들고 가엾어 보인다. 그놈들은 다 세력이 있을 때는 아주 무서운 듯하지만 한번 풀이 꺾이면 비겁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다. 그래 나는 개 좋아하는 꼴은 보기 싫다.
거기다 비하면 소는 참 좋다. 둔하다고 "소 귀에 글 읽기다" "소같이 둔하다" 하는 말이 있지만 둔해 그런 것 아니다. 착한 것이지. 그는 도둑놈이 끌어가도 끌려가는 평화주의자다. 사람 차별을 아니한다. 그놈이 끌려가는 것은 반드시 코가 아파서가 아니다. 다섯 살 어린이가 끌어도 끌려가는 것은 그놈에게 인정이 있어서지, 코가 아프거나 어리석어서가 아니다. 그렇게 둔한 듯해도 한 번 빠진 구멍엔 다시 아니 간다는 거요, 도살장에 가면 다 알지 모르지 않는다. 그 힘에 한 번 반항을 하면 코쯤은 터지더라도 감히 막을 자가 없으련만, 민중같이 착한 그놈은 벌벌 떨지언정 반항을 아니하고 죽음을 제가 당한다. 개보다야 훨씬 낫지 않은가? 인도에서 소를 공경하고 소를 성인이 태어난 것이라함은 무리가 아니다. 나는 개없는 세상엔 살고 싶어도 소 없는 세상엔 살지 않으련다. 우리나라를 나타내는 것은 본래 소다. 우리나라 소는 중요한 자랑할 만한 산물이다. 우리 민족도 소 같은 민족이다. 그런데 그 나라에 그 소같이 착한 나라에 개는 웬 개가 그리 많아졌을까?
개가 참 많다. 너무 많다. 길거리에 나가면 개에 걸려 걸음을 걸을 수 없고, '개자식' 소리에 귀가 아프다. 어디서 가져왔을까? 발발이는 일본서, 불독은 영국서, 셰퍼드는 독일서, 털 깊은 건 미국서, 키 큰 건 중국서, 진도는 또 우리나라 고유한 것이라고 한몫. 똥 먹고 살게 생긴 개를 친구나 되는 양, 자식이나 되는 양 기르려니 잘 먹여야지. 그러노라니 사람 먹을 것은 없어지지. 그러면 그놈들은 사람 고기 먹고 질질 번번 살찐 것 아닌가? 그렇기에 사람만보면, 허줄한 민중만 보면 막 달려든다.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개는 모두 잡아 바치라 했기에 일본 망하면 개도 없어질 줄 알았는데, 해방 후 더 많아졌으니 개의 번식력은 참 강한 모양이다. 이대로 개 기르는 풍이 나간다면 사람, 더구나 우리나라 민중 같이 순한 사람은 종자도 없어지고 개만 남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이 어찌 될까? 서로 물고 뜯고 비겁하고 아첨하며 남의 고기만 먹으려는 그 버릇에 사람이 없으면 제어할 자도 없을 터이니 저희끼리 어찌 될까? 아 무서워! 그런 생각하면 청산맹호 그리워진다. 그놈 한 번 나오면 발톱 이빨에 피 묻히기 기다릴 것도 없이 호통만 한 번 치고 꼬리만 한 번 뚜루룩 딱 감았다 펴면 그까짓 개 무리는 대번에 도망을 하련만! 개 모가지 쇠사슬 매잡고 호걸인 양 장안 거리를 돌아다니던 애견가란 것을 줄을 미처 놓지도 못하고 거슬려 끌려가다 결딴이 나고 말걸!
청산의 호랑이 다 어디 갔나? 그렇지 않으면 굴 속에 잠을 자나? 아무리 문명을 하고 육종학이 발달됐기로서, 메기로 인해 성격이 변한단 말도 있기로서, 개와 범이 서로 붙어 잡종이 돼버렸을 리는 없는데, 범은 죽어 가죽을 남긴다고 쓸데없는 죽은 이름을 탐하다가 다 죽었을까? 범의 본고향인 개마고대에를 언제 가볼까? 내가 왜 개를 미워하겠나? 인간 개가 보기 싫어서 하는 말이다. 해방 후 평안도가 말썽이란 소리가 많다. 야미 장사도 평안도라지, 정치에도 평안도라지, 군인도 평안도라지, 종교도 평안도란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평안도에서 지당대신이 났지, 서슬 푸른 내무장관들이 났지, 정당의 강경파도 평안도지, 종교의 정통파도 평안도지. 김구 선생을 죽인 것도 평안도, 장부통령을 쏜 것도 평안도, 서북청년회는 공산당을 잡노라고 제주도 끝까지 벌끈 뒤집어 촌 처녀들을 벌벌 떨게 했지. 감람나무 새 예수, 무슨 교주 하는 평안도 성령파 예수는 나라를 구원한다고 방내에 바람을 넣어 초가삼간의 날개를 다 들추어버렸지. 이것이 정말 호랑이 기질이 하는 짓일까? 공산당에 못견디어 묘향산 양림산서 쫓긴 호랑이가 모두 몰려 내려왔기 때문에 그런 걸까? 그래 공산당 무서워 쫓긴 것이 호랑일까? 무호동중리작호라고 살쾡이가 한 짓일까? 나 몰라.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알아둘 것이 있으니, 옛사람 말에,
범을 그려도 그 가죽은 그리고 뼈를 못 그리며
사람을 알아도 그 낯은 알고 맘을 알지 못한다.
범 그리다 잘못되면 도리어 개가 된다. 범 노릇하려다 잘못하면 살기는커녕 개가 돼버린다. 야아, 알아차려라! 범한테는 죽어도 차라리 부끄러울 것이 없어도 개한테 물려 죽는단 말이냐? 개한테 죽으면 개자식도 아니고 개만도 못한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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