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한배움 (3/3)
정주 때는 아무 건이 없으니 맘이 든든했고, 평양 때는 내 부주의로 몇 사람이 가누나 하는 생각에 괴로웠고, 이번 사건은 아무것도 없건만 평상의 사상을 밉게 보아 막으로 죄를 만들어 씌우자는 것이니 이것을 어떻게 싸우나가 문제였다. 지금도 서대문경찰서 앞을 지나노라면 아직도 두 사람이 그 안에 담벽을 새 두고 앉았는듯한 느낌이 있다. 그때 유달영 교수도 거기 같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원도 했다. 머리 아픈 세간 살림 문제가 다 없어졌다. 형사와는 몇 번 경험이 있으니 그 싸워가는 것쯤은 그리 문제 아니었다. 형사란 결코 공공한 법의 정신, 나라 사회의 질서를 위하는 맘에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와 통할 정이 하나도 없다. 어떤 때는 냉정한 듯도 하고, 어떤 때는 동정을 해주는 듯도 하고, 담뱃대, 빵 조각쯤 내놓는 때도 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쥐를 잡아다놓은 고양이의 심리가 있다. 절대로 놔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형사와 턱 마주앉으면 인정도 도리도 다 없고 저와 나와는 이해가 서로 상반되는 양극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 비위를 맞추어서 일을 쉽게 만들어보려는 따위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아니된다. 비위를 거스려야 매를 맞는 것밖에 없는데, 사람이 매를 맞아서는 여간해서 죽는 것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내 지킬 것인 담에는 터럭만한 것이라도 지켜야지 일단 그것을 내놓으면 그 담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고집이란 말을 들어도, 경위로 따짐을 당해도 잡아뗄 것은 딱 잡아떼야 한다. 내가 언제나 저보다 위에 서야 한다. 맘의 가라앉음으로, 심리를 더듬음으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의리로 저보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봐야 한다. 형사에겐 동정은 털끝만큼도 없는 법이다. 저는 나를 먹으려다 못 먹으면 그저 아까운 것을 놓쳤다 하는 정도가 아니다. 나를 죄로 만들지 못하면 저에겐 손해가 난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이해싸움이다. 그러므로 절대 양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더러 독립운동했다는 것이다. 그래 그전에 다 검열맡아 가지고 냈던 글을 이제 와서 새삼스러이 트집을 잡는 것이다. 독립운동이란 물론 독립운동이지.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집에서 일을 하거나 다 독립운동이지. 그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니 어느 의미론 “네 했습니다” 하고 지우는 대로 고분고분 5년이건 10년이건 지고싶은 맘도 있으나, 저의 독립운동이란 말과 내 독립운동이란 말의 뜻이 다르다. 그것을 뻔히 말고 그놈에게 속고 싶은 맘은 있었다. 그러자니 싸움이었다.
나중엔 신앙문제를 가지고 온다. 묻기를 “하나님을 믿느냐? 믿지않음 죄라지?” “그렇다.” “그럼 성경에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물은 뒤에는 만일 “그렇다, 믿지 않는 자는 망한다” 하면, 그러면 천황폐하는 믿지 않는데 망하겠느냐 하는 질문을 하여 걸고 넘어가려는 흉계가 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뻔히 아는 내가 알고도 넘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대답하기를 “성경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 있다. 믿음을 가르칠 때는 믿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 하지만, 또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때는 하나님이 나중에 모든 사람을 하나 빼지 않고 다 구원한다는 약속이 있다” 했다. 그러니 그 형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런 협잡(인찌끼) 종교가 어디 있느냐?" 협잡이 아니지, 탄력이지. 내가 만일 14만 4천을 믿는 따위 변통 모르는 신앙이었다면 어쩔 수 없이 바가지를 쓰고야 말았을 것이었다.
이때는 예심에까지 갔으니 이제 대학 예과를 한 셈이었다. 졸업까지를 꼭 하는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1년 후에 나오게 되었다. 나와 보니 세상은 바짝 어려워졌다. 일본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바람에 강산이 바싹 마르고 사람은 기름틀에 깻묵처럼 눌렸다. 이젠 농사다. 김교신 형이 흥남엘 가보자고 천 리 길을 턱턱 찾아왔으나 나는 갈 맘이 없었다. 그래 이젠 아주 농사하기로, 풀 아래 머리를 들이밀기로 했다. 두루마기를 입고 차를 타고 영어책을 들고 보다가 이동경찰에 붙들려 신의주까지 갔다가 간신히 나왔다. 수염을 기르자, 미투리를 신자. 하루는 머리를 깎으러 용암포에 나갔다 오노라니 길에서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슬쩍 지나가더니 다시 돌아와서 당신 아무개 아니냐? 일본말로 묻는다. 그래 그렇다고 하니 그놈이 웃으며 “도무지 촌 할아버지 같구만 그래.” “그럼 촌 할아버지가 촌 할아버지 같지 않구 어째?” 그것은 담당 형사였다. 우리 집을 찾아오다가 그리 된 것이었다. 오늘 이 수염은 그렇게 되어서 달려 있는 수염이다. 이태를 농사를 하는 동안에 해방이 왔다. 내 나설 자리가 아닌줄을 모른 것도 아니건만, 자치회에를 나갔다가 신의주에까지 가서 도정치에 어림도 없이 참여를 했고, 그랬다가 학생사건이 나서 해방 후엔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옥엘 또 가게 되었다. 남들이 저 사람은 팔자에 타고난 감옥이라 했다나? 팔자에 탄 것이 어디 있겠느냐? 한 가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지. 한 가지 재주만 있는 사람은 일본시대에는 일본식으로, 공산시대엔 소련식으로, 그러나 또 미국 만나면 미국식으로 잘 살지 않더냐? 소련 군인의 따발총밑에 50일 갇혔다 나왔다. 넘어야 할 38선이 있으므로 수염은 두었다가 그때에 깎으려 했는데 정작 넘을 때는 그럴 새도 없이 넘어 이 수염은 3대 역임의 수염이 돼버렸다.
언제 이화대학 교회에 가서 이야기를 하게 됐기에 모양내는 것을 좀 시비했더니 누가 후에 일러주는데, 어느 학생이 “저는 수염은 왜 길렀나”하더라나. 지난해 8월엔 또 놔버린 지 오랜 대학 과정 잊을까봐 하나님이 걱정하시어 20일 동안 서울 형무소에서 복습을 하고 왔는데, 그때도 금줄 친 사람이 감방 앞을 지나가다 또 공연히 이 수염을 가지고 시비를 했다. 운명의 수염인가? 이제 또 언제 가서 남은 과정을 정말 치르고 졸업생이 되겠는지 이렇게 중도 퇴학생으로만 그치겠는지 모르나 이제 대체는 짐작을 하게 됐다. 이날까지 이 꼴로나마 걸어오는 데는 그래도 거기서 배운 것이 힘이 되는 것이 많다. 요즘 젊은이들 순경만 보면 그저 겁을 내는데, 그 겁 조금도 나지 않는 것도 그 덕택, 밥 맛을 참으로 좀 안 것도 거기서, 사람 맛을 좀 안 것도 거기서, 세상을 뒤집어볼 줄 안 것도 거기서다. 밥이 맛있는 밥, 맛없는 밥이 따로 있지않다. 어떤 사람도 거기를 들어가 한 달만 있으면 “깡보리밥이 이렇게 꿀맛인 줄은 미처 몰랐다" 한다. 보리 속에 꿀이 들어 있는 것을 어느 대학에서 가르치던가? “이젠 집에 가면 아내보고 잘한다 잘못한다 소리 아니해야겠는데.” 그것은 거기 들어와서는 저마다 하는 소리다, 부부 화목의 길이 여기 있다.
거기를 가면 미운 사람은 다 없단다. 오직 형사 하나만 밉다지. 그저 시설이 잘되길 바라고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바란다. 이런 대학이 사회에 어디 있나? 거기에는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없다. 강도를 하고 들어왔노라는 사람과 같이 있어 봤는데 그렇게 온순한 사람은 없고, 제 아내를 가위로 스물다섯 곳 찔러죽이고 왔노라는 사람과도 얼마 동안 같이 지냈는데 그렇게 좋은 사내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놈도 사흘만 되면 쓰리꾼 아이들과 밥 그릇을 다투고 신사라던 사람도 간수의 호의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비겁하 기가 짝이 없다. 바깥 사회의 질서는 거기 들어오면 온통 뒤죽박죽이 돼버린다. 그 인생의 찌꺼기라는 것이 모여든 그 안에 서로 의리는 여전히 있고 양심은 그대로 살아 있다. 그로써 보면 사람의 행동으로 인하여 그 바탕이 변하는 것은 아니요, 아무리 죄를 지었다는 사람도 그 속의 바탕은 흙 속의 진주처럼 여전히 살아 있다. 그러나 그 바탕은 결코 상벌로 자라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배움
유영모 선생님이,「대학」처음의 “대학지도 재명명덕 재 친민 재지어지선”을 우리말로 이렇게 옮기셨다. 한 배움 길은 밝은 속알 밝힘에 있으며, 씨알 어뵘에 있으며, 된 데 머무름에 있나니라.
대학은 한 배움이다. ‘한’은 하나란 말이요, 또 크다는 말이다. 삼국시대 벼슬 이름에 대각간이란 것의 간, 성실사한의 한, 그것은 다 우리나라의 이름의 한과 한가지로 이 한이다. 대학은 큰 것을 배움이요, 하나를 배움이다. 참 큰 것은 하나일 것이요, 하나란 하나, 둘의 하나가 아니다. 그 이상, 그 이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다, 이른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참이다.
또 ‘한 배움’은 ‘한배 움’으로 쓸 수도 있다. 대학은 한배 움이다. 한배란 한문으로 태백이다. 백두산을 한배뫼, 단군 할아버지를 한배님이라 한다. 한배는 조상이다. 움은 운다는 말의 명사다. 대학은 한배를 움이다. 생명의 근원을 움이다. 운다는 것은 속에서 우러나온다는 말이 나타내는 것같이 속뜻의 나타남, 드러남이다. 한배 움은 조상의 뜻대로 함, 하나님의 뜻대로 함이다. 우리 겨레는 한 사람이다. 우리는 큰 사람을 목적하는 살림을 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인격, 언제나 누가 말하나 아는‘그이’ ‘군자’를 이상으로 하는 사람이다. 중국 사람이 “동쪽에 군자 나라가 있다” 한 것은 그래 한 소리인가? 성경에서 하면 그리스도, 인도교에서 하면 아트만, 흑은 크리슈나 그것이다. 이 우주에는 사람이 여럿 있는 것 아니다. 만물이란 것은 눈에 뵈는 꼴뿐이요, 그 참은 한 인격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한 사람, 그이 곧 그리스도뿐이다. 모든 사람, 여러 사람, men은 그 한 사람, The One, The Man의 나타남뿐이다. 사람의 습작품이 사람들이다. 유교에서 이것은 대인이라 했다. ‘대학’은 대인의 학 이라 했는데, 그 대인이란 나이 많은 몸이 큰 사람이란 말이 아니다. 큰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란 말이다.
‘주역’에, 큰 사람이란 하늘 땅으로 더불어 그 속알을 같이하며 해 달과 더불어 그 밝음을 같이하며 귀신으로 더불어 그 좋고 언짢음을 같이한다. 한 것이 곧 이것이다. 맹자는 이것을, 큰 사람은 발가숭이 그 마음을 잃지 않은 이라. 또는, 큰 사람은 저를 바르게 하여 물건이 바르게 되는 이라. 했다. 발가숭이 마음, 난 대로 있는 마음, 이 세상 살림하는 동안에 잘못되지 않은 마음, 그것이 곧 덕, 속알이다. 그 속알, 그 근본 마음 자리를 찾아 기르면 그것은 곧 우주에 통하는 힘이요, 해 달을 뚫는 밝음이요, 뵈고 뵈지 않는 모든 생명의 운동이 다 거기 있단 말이다. 큰 사람은 성인도 못견딘다. 고 한 것이다. 대학의 목적은 그런 인격, 마음의 그런 자리를 찾아 기름이다. 그 목표를 가르쳐 도, 곧 길이라 한다. 길은 공도, 누구나 그리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행위의 목표가 도이다. ‘중용’은, 하늘이 말씀한 것을 이론 바탈, 바탈대로 함을 이론 길, 길닦음 을 이론 가르침. 이라 한다. 도에 관하여는 노자가 여러 가지로 깊은 설명을 하나 그것을 다 말할 수도 없고, 한마디로 도는 변치 않는 바탈이다. 형상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하나도 그대로 있는 것이 없다. 영원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참이 아니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이 변해 마지않는 물질세계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버리고 그 변하는 밑에 있는 변치 않는 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종교의 가르침이다. 그 점에서는 중용이나 노자나 인도사상이나 기독교나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옛날 가르침의 목적은 주로 이 바탈을 찾는 데, 참을 찾는 데 있었다.
대학을 서양말로는 유니버시티(university)라 하는데, 그것은 라틴말의 우니(Uni), 곧 하나라는 데서 나온 것이다. 우주를 유니버스 라 하는데, 그것도 천지만물이 여러 가지지만 그것이 통일이 되어 산 하나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래 보편이니 통일이니 하는 뜻이 있다. 대학을 유니버시티라 하는 것은 각 부분이 제각기 전문을 하나 그것이 모두 서로 유기적인 통일을 하여 하나가 되도록 하는 곳이란 뜻에서 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것도 대학이란 뜻과 서로 통하는 말이다. 동서양을 물을 것 없이 대학의 본뜻은 바탈은 찾는 데 있다. 오늘날 대학 교육이 그러냐 하면 아니다. 점점 갈라져 나가 서로 끄트머리로 나가는 것이 대학 교육이다. 지금은 제 전문하는 부분 이외에 대하여는 서로 무식쟁이다. 부분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좋으나 전체로서의 종합, 하나됨은 잃어졌다. 지금 대학 교육을 아무리 받아도 이 사회에 적응해 나가는 지혜를 조금도 갖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수한 부분적인 지식은 있건만 지혜는 없다. 이것은 본래 희랍의 학문이 그런데다가 문예부흥 이래 발달하는 과학의 영향이 더해서 점점 그렇게 된 것이다. 거기서는 현상계에 대한 견문 (information)을 넓히는 것이 목적이지 그 현상의 뒤에 무엇이 있나가 문제 아니다. 그러한 현상에 대한 지식이 아무리 늘어도 그것이 현상을 다스릴 수는 없다. 뵈는 것은 뵈지 않는 것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동양의 생각은 그 뵈는 것보다 뵈지 않는 것을 더 문제삼았다. 그러므로 과학은 발달 못하고 철학 종교가 그 문화의 주장이 됐다. 과학이 발달 못하고 현상의 세계를 경시한 죄로는 이른바 아시아적인 사회가 돼버려 서구 나라의 식민지가 돼버리는 불행을 당했지만 지금은 인류의 역사를 끌고 나가던 그 서구주의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갔고 지식을 넓히는 주의의 교육은 사람을 불행하게만 만들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대학 교육은 그 학풍이 완전히 변해야 할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럼 학풍이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그것은 이 세대 자체가 전개시켜 나갈 것이요, 어느 개인이 플랜을 그려서 될 것은 아니지만 사람은 역사적 존재인지라 학풍을 변하려 할 때에도 전혀 새것을 갑자기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전번 문예부흥 모양으로 지금까지 나가는 길이 아닌 다른 어떤 길에서 찾아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요새 동양 소리가 차차 높아가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 동양 학풍의 특색이 무엇이냐 하면 밖이 아니고 안을 찾는 것, 지식이 아니고 지혜를 찾는 것, 듣고 보는 것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달라지는 것(transformation)을 문제삼는 일이다. 그것을 기질의 변화라 했다. 혹 깨달음이라, 해탈이라, 새로 남이라 한다.
대학 교육의 목적은 기질의 변화에 있어야 할 것이다. 변화란 현상계에서 하는 말이지 참의 세계에서 바탈을 찾음이다. 복명이다. 돌아감이다. 회개다. 이 물질의 지배를 받는 현실의 사람은 그 도를 아무리 높여도 그것은 현상이 복잡해졌을 뿐이지, 그것으로 외계의 지배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은 어디까지나 썩어질 사람이지 생명이 아니다. 과학이 발달하여 장생불사하는 법을 발견한다 해도 그것은 참 생명은 아니다. 참 정신을 찾지 못하는 한은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죽음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위에서 대학을 감옥이라 하고, 감옥을 대학이라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대학에서는 많이 배우는 대신 속알을 잃고 죽게 되는데, 감옥에서는 현실의 세계를 온통 박탈당하고 남은 것은 오직 물질의 세력이 못 미치는, 정말 하늘이 준 밑천인 마음, 바탈 하나만 남기 때문에 도리어 그것을 찾게 된다. 정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것을 찾으면 모든 것이 그 안에 있다. 모든 것이 정신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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