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편지】: 제979호
2020.5.24. (음 4.2 - 윤) / 발송인:
|
|
|
nowmaster@nate.com
|
※ 한자 등 텍스트가 물음표(?)로 보이는 경우 누리집에 오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
|
|
|
글나눔 → 오늘의 어록
|
|
|
사랑하고 일하며, 때로는 쉬면서 별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인생, 그 인생에 감사하자. - 헨리 밴 다이크(美 교역자,작가)
|
|
|
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
|
|
경텃절몽구리아들
지난번 글감으로 삼았던 프로그램 누리집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남자 출연자 넷을 첫째(아들), 둘째, 셋째, 넷째로 소개하고 ‘일녀’인 여자 출연자는 ‘고명딸’이라 했다. ‘외동딸’과 ‘고명딸’의 본뜻과 말맛 차이를 밝혀 놓은 것이다. “‘(음식의)고명+딸’ 형태인 것을 이참에 알았다”는 독자도 여럿 만났다. 내친김에 사전 속의 ‘딸’과 ‘아들’을 찾아 나섰다. 그에 담긴 뜻을 더듬고 어원을 들추어 보니 사전 속의 ‘딸’은 어휘 수, 담긴 뜻에서 ‘아들’보다 더 후한 대접을 받았다.
‘알딸딸’, ‘도리깨아들’(도리깻열)처럼 사람과 관계없는 표현을 빼고 헤아려보니 ‘-아들’(33개)보다 ‘-딸’(44개)이 붙은 말이 많았다.(표준국어대사전) 좋은 뜻을 담아 ‘첫딸’을 이르는 ‘복딸’(福-)은 있지만 ‘복아들’은 없었다. ‘딸’에는 ‘귀동딸’(貴童-), ‘금딸’(금같이 귀한 딸, 북한어)같이 입꼬리 올라가게 하는 단어가 눈에 띄지만 ‘아들’은 달랐다. ‘실없다’(實--)가 붙으면 ‘시러베아들’(실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되고 ‘홀’(짝이 없어 혼자뿐인)이 얹혀지면 ‘호래아들’(후레아들)이 된다. 배운 데 없이 제풀로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아버지와 딸(아들)을 아우르는 말은 ‘아비-’가 아닌 ‘어비딸’(어비아들), 어머니와 딸(아들)을 이르는 표현은 ‘어미-’가 아닌 ‘어이딸’(어이아들)이다. 아버지(어머니)의 어원이 ‘어비’(어이)인 까닭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아울러 이르는 말은 그래서 ‘어버이’다.(한민족 언어검색, 세종계획 누리집) ‘-아들’ 가운데 익살맞은 표현이 눈에 띄었다. ‘경텃절몽구리아들’이 그것이다. ‘경텃절’은 ‘정토(淨土)의 절’이 변한 말이고 ‘몽구리’는 ‘바싹 깎은 머리, 중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니 ‘머리를 빡빡 깎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 모이
새가 날아든다. 흔히 산까치라 부르는 어치가 첫 손님이었다. 삼십 센티미터쯤 되는 듬직한 몸집에 검은색 줄무늬로 파란색 날개 덧깃을 치장한 멋진 녀석이다. 어치가 다녀간 뒤 온갖 잡새, 아니 여러 새들이 찾아온다. 박새, 쇠박새, 곤줄박이, 동고비 등이다. 일일이 이름 밝혀 불러주기 어려울 만큼 많은 새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한 지 보름이 되었다. 친구 따라 찾아온 녀석, 큰 새 눈치 보다 포르르 날아와 한입만 물고 날아가는 조막만한 녀석들…. 단골도 제법 생긴 듯하다. 큰길 뒤편 아파트에 새가 날아드는 까닭은 서재 베란다에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버드피더’ 덕분이다. 먹잇감 찾기 어려운 겨울철 이것은 새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오아시스이리라.
‘버드피더’(bird feeder)라 했지만 거창한 것은 아니다. 에어컨 실외기 위에 나뭇가지와 꽃다발 펼쳐놓고 그 위에 땅콩, 해바라기 씨 따위를 잘게 부수어 놓은 게 다이다. 눈 좋은 새들의 눈길 끌기 위해 붉은빛의 연시와 감귤도 내어놓았다. 해 뜰 녘부터 새가 찾아드는 것을 보니 효과 만점이다. 손 뻗으면 닿을 창가에서 새들이 ‘먹이’를 콕콕 쪼아 뾰족한 ‘입’으로 집어삼킨다. 형형색색 고운 각양각색의 ‘꼬리’는 그 모양으로 새 종류를 가리게 한다. 아주 가벼운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하는 말인 ‘새털’의 차이도 그렇다.
날짐승의 부위 이름은 길짐승의 그것과 구별해 부른다. 새의 ‘먹이’와 ‘입’을 ‘모이’와 ‘부리’처럼 따로 이르는 것이다. 이렇듯 새의 ‘꼬리’는 ‘꽁지’로, ‘새털’은 ‘깃털’로 ‘콕 찍어’ 가리키는 게 더 분명한 표현이다. 이런 까닭에 ‘버드피더’는 ‘새먹이통’보다 ‘새모이통’, 넓적한 곳에 펼쳐놓은 것이라면 ‘새모이대(-臺)’라 하면 되겠다. 새 부위 이름을 따져보다 새롭게 안 것이 있다. 새 다리의 정강이뼈와 발가락 사이를 ‘부척’이라 한다는 것, 목의 앞쪽은 ‘멱’이라 한다는 것이다. ‘돼지 멱따는 소리’의 멱이 바로 그것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
|
|
시나눔 → 우리나라 詩
|
|
|
오후 4시의 희망 - 기형도
김(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 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꽃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 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
|
|
독서실 → 수필
|
|
|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한배움 (2/3)
사람이 감정의 동물이라, 저도 알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한때 남을 때리고 죽이고 하는 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용서할 수가 있지만, 가장 지식을 가지고 점잖다는 지성있는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이성을 가지고 앉아서 서로 건너다 보고 차를 마셔가며 연구, 의논, 토론하여, 아무리 잘못을 했다손 치도라도, 같은 인간성을 가진, 제속에도 같은 가능성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 정의와 사랑이란 이름 아래, 그 동료의 손발에 고랑을 채우고, 사형을 선언하고(가장 엄숙히!), 정신이 똑똑해 그 목에 밧줄을 걸어 죽이는 일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옛날같이 감정으로 하는 독재적 폭군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정의, 인도를 표방하는 법치국가라면서 어떻게 그것을 할까? 사람으로서는 능히 못할 것을 그들로 하여금 하게 하는 것은 소위 법이란 것이다. 그들이 심정을 가지는 개인으로 형사, 검사, 판사, 대통령을 하라면 다 사양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양심의 가책을 거기다 다 밀어버릴 수 있는 법이란 허재비가 있기 때문에 감히 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 일하는 것은 법인가? 아니다. 어떤 법도 결국은 어떤 개인의 판단이 없이는 힘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 한 것은 결국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 개인이건만 그는 그것을 법에 밀고 자기 양심을 속여 거짓 평안을 얻어가며 이해를 위해 그것을 한다. 그러므로 법 이론이야 어찌 됐든 간단한 인간의 심정에 비친 사실로 볼때 법은 당파의 형태를 쓰는 인간의 이기심이 제 이익을 지키기 위해 남을 없애려 할 때 제 속 깊은 데서 항의하는 양심을 속이고 느르기 위해 그럴듯하게 만들어놓은 함정일 뿐이다. 인정으로 사는 가정에는 법 없다. 법은 인간의 자랑이지, 하지만 인간의 부끄러움이다. 법의 끄트머리가 되는 감옥도 부끄러움이다. 문명국이라는 나라의 도시맞다 우뚝우뚝 서는 감옥, 그것은 과연 인간의 자랑일까? 이 20세기 문명이란 결국 우리는 능히 감옥을 만들었다 하고 대낮에 해를 보고 밤에 찬란한 별을 우러르는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지배자, 지도자가 있거든 단 하루하도 제가 몸소 제 손으로 만든 그 감옥에 가보 라 해라! 이제 겨우 사형폐지론이 나오는 이 문명은 조금 더 나가면 감옥 그늘 밑에서, 사형자들의 무덤 앞에서 하는 이 정치 이 문명이 부끄러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감옥이 안방이라면 정부는 중문이요, 학교는 밖 문이요, 종교는 그밖의 가시울타리 아닌가? 폭력주의를 제하라! 그러기 전엔 다 거짓 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것을 그 인생대학에서 배웠다. 누가 가르친 것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도 석가의 가르침도 거기 가기 전엔 잘 몰랐다. 아노라 했어도 몰랐다. 거기 가서 남 다 자는 밤을 뜬눈으로 새워본 다음에야 알았다. 지금도 아직 다 알았디는 것이 아니나 그래도 거기서 조금이라도 눈이 띄었다는 말이다. 나는 아무 대학도 다녀본 일이 없지만, 그 대신 예수와 간디와 한 가지 이 대학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던 사람들 편에 잠깐이나마 갔던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젊은이마다 한 번은 거기 가보라 하고싶건만 그럴 수도 없고! 그렇다. 거기는 본래 누가 가라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제가 가는 곳이지. 아니다, 제가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것이지. 참을 사랑해라. 그러면 하나님은 보낼 자는 그 영광의 수도장으로 보내실 것이다. 그렇다, 이 사람을 잡으며 의를 행하노라 하고, 사람이 제 형제를 짐승보다 더 낮게 평가해 차별을 하는 이 세상에서는 살인 강도 강간 역적을 하는 자들과 두려운 맘이 없이 같이 먹고 잘 수 있는 것은 분명히 영광이니라. 이사회에서는 대통령 노릇을 해도 무장대에 밤낮 갇혀서야 하지만 그안에는 도둑질할 놈도 없고 도둑맞을 놈도 없고 누가 누구를 지배할 것도 없고 누가 뉘게 지배를 받을 것도 없다.
세상엔 없는 자유 평등이 거기서는 돼 가고, 사랑까지도 여기서보다는 거기서 차라리 더 볼 수가 있다. 죄의 짐을 항상 남의 등에 지우려는 이 의인의 세계에서는 선한 사람도 망의 평안이 있을 수가 없지만, 세상 죄짐을 다 맡아진 그 세계에서는 아무도 걱정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러던 그들도 학교를 졸업하는 학생 모양으로 이 세상으로 돌려보내준다는 말을 들으면 그날 밤부터 잠을 못 잔다. 이 세상이란 이상한 곳이지. 이 이상한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더구나 이상하지. 불안의 임금이 되겠단 말인가? 지옥의 왕이 되겠단 말인가?
살창 틈으로 본 세상
내가 그 대학을 처음으로 구경한 것은 일본 동경에서다. 스물세살에 거기를 갔는데, 그때까지 나라가 망하는 시대에 났으면서도 나는 피난 한 번 해보는 일 없이, 밥 한 번 굶고 한 번 헐벗어본 일없는 양상으로 지내왔다. 그대로 갔다면 나야말로 인생이 뭔지 모르고 헛 살고 갔을 것이다. 하늘 무서운 말로 나도 믿음에 좀 감격이 있기 위해 어려움을 당해보는 일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일이 있었다. 외아들인 우리 아버지의 맏아들로 난 나는 사방에서 귀염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뜻은 아주 약해, 지금도 내가 나 자신을 알지만, 결단성이 없는 사람이다. 스물이 넘도록 온 길은 마냐한 들판 길 같은 것이었다. 거기다가 어리석게도 망국 시절에 남의 선생이 되게 된 운명의 나이므로 하나님이 일부러 하셨든지, 주제넘은 양상의 생각을 노하시어 봐라 하고 그랬는지, 그해에 유명한 동경대지진이 있었다. 대학을 하겠는지 사범을 하겠는지 그것은 아직 미지수고 화씨 100도의 더위 속에서 참혹한 수험생의 생활로 1923년 여름을 다 보낸 9월 초하룻날 정오에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동양 제일이라던 대도시가 눈 깜짝하는 사이에 다 무너지고 겸하여 불이 일어나 하룻밤 사이에 그 3분의 2가 타버리는 것을 눈으로 보았다. 흔들리는 것은 땅이 아니고 타버련 것은 동경이 아니었다. 내 세계가 온통 혼들리고 타버렸다. 불실이 하늘에 닿은 화염 지옥 속에 앉아 불인 지 못가에서 벌벌 떨며 새우는 하룻밤 동안에 사랑이 무잇 인 것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나라도 민족도 문명도 도덕도 다 깍대기요, 어느 순간에 미친 불길의 한 번 밟음에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그 순간에 내 가슴 안에는 저 밖에 불보다 더 무서운 불이 붙고 있었다.
그래도 그 이튿날 날이 밝아오면 살았노란 생각이 또 났고 또 이 사바세계에로 돌아온다. 그래서 되느냐 하는 듯 새 막이 열린다. 저녁때 밥을 지어먹으려고 친구와 둘이 나가 찬거리를 사가지고 큰길에서 골목으로 막 들어서려는 순간 군중이 와 하고 달려와 우리들을 둘러싸더니 “이게 진짜다, 이게 진짜다”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번쩍이는 칼, 대창, 쇠뭉치가 들려 있었다. 어쩐 영문인지를 알 수 없었다. 혀가 딱 말라 하느라지에 붙는 순간 순사가 오더니 군중을 헤쳤다. 그는 평소에 내가 그리 드나드는 것을 늘 알았을 것이었다. 군중이 슬몃슬몃 헤쳐간 후 나는 본시 맘이 약한 물건이라 그냥 집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같이 나갔던 친구는 좀 똑똑한 사람이므로 순사에게 질문을 했다. 왜 군중을 유야무야 보내고 마느냐고. 순사는 왈칵 성을 내더니 그렇게 알고 싶거든 가자 하고 끌었다. 나도 따라나섰다. 순사는 처음에는 나더러는 돌아가라 하더니 나도 같이 간다 하니 갈 테면 가자고 둘을 같이 데리고 갔다. 간즉 난생 처음 보는 경찰서란 곳이었다. 옷을 다 벗기고는 내복만 남기고 살창 속에 넣어버렸다. 한 평 남짓한 방에 사람을 얼마나 잡아넣었는지 앉을 수도 설 수도 없다. 그게 모두 다 조센징(한국 사람)이고, 그 밖에 중국 사람이 한둘, 일본 사람이 하나였으나 그들은 한국 사람으로 알고 잘못 잡혀온 것이었다. 거기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고 보니, 한국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우물에 약을 치고 불을 놓았다 하여 잡아가둔다는 것이다. 아까 군중이 “이게 진짜다” 했던 그 뜻을 그제서야 알았다. 뒤창으로는 어제부터 붙은 불이 아직도 붙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이 여기까지 오면 이 문을 열어줄까? 생각하니 어제 본 세계가 또 천당이었다.
밤이 새도록 사람을 잡아들이는데 강도하던 놈, 강간하던 놈, 어떤 놈은 끌어오고 어떤 놈은 모가지를 매오고. 우리는 담당 형사가 보장을 했기 때문에 그 이튿날 나왔으나 나와서 들으니 그 일은 소위 정치한다는 놈들이 이런 때에 공산주의자가 혁명을 일으킬까 걱정하여 민심을 모으는 한 수단으로서 만들어낸 소리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때에 학살을 당한 우리 동포가 여러 천 명이었다. 이때는 나는 유치장이란 곳을 하루 잠깐 구경을 했을 뿐인 셈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자유가 무언지 정치란 어떤 것인지를 그전 어디서보다도 그 후 어느 책에서보다도 더 깊이 배웠다. 평소에 보는 일본 사람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친절하고 인정 많고, 내가 있던 집 주인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인 줄도 모르고 당신네 나라는 어디요? 거기서도 양복을 입소? 하고 묻는 형편이었다. 그렇던 사람들이 그렇게 험악해지는 것은 웬일일까? 순전히 정치가의 책임이다. 민중아, 너처럼 착한 것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너처럼 어리석은 것이 어디 있느냐? 역사 있은 이래 정치한다는 놈들이 갖은 죄악을 다하고는 국민이란 이름 아래, 너의 등에 다 떠넘겼지. 그러고는 깜박 속아 아무 터무니도 없는 이웃끼리 공연히 서로 죽이고 싸웠지. 이들 일본이 우리나라를 먹었었다 하지만 거짓말이다. 일본에 있던 제국주의 정치가들이, 그들이 민족을 속여서 한 일이지 일본 민중이 우리 민중과 원수질 까닭이 없다.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자가 능히 우리나라를 침노한 것은 우리나라 안에 있는 같은 제국주의자가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일본 민중에 섞여 살아보고 그 전고에 없는 큰 재난을 같이 겪어본 나로서는 일본 민중을 미워하고 의심할 아무 거리도 없다. 민중은 어디서나 같은 단순한 인간들이다. 미운 것은 민중이 아니고, 그들을 속이고 선동하는, 거기도 있고 여기도 있는 지배주의자, 폭력주의자들이다.
두번째는 정말 입학을 한 셈인데, 그것은 오산학교에 있는 동안에 됐다. 내 쇠에 있던 두 젊은이가 여름방학 동안 좌익 운동자들과 함께 모여 독서회 했던 것이 발각되어 나를 그 주모자로 인정하고 평안북도 경찰부에서 잡아다가 정주경찰서에 넘겼다. 그해는 1930년, 남강 선생님은 5월에 돌아가시고, 여름에 나는 서울 있는 김교신 형과 같이 독일어 공부를 하기로 약속을 하고 올라와서 정릉리에 새로 지은 그 집에서 두 주일을 지내고 새 학기를 위해 집으로 내려간 그날이었다. 고읍역에 내리니 기다리던 강아지가 마중나와 꼬리를 치는 듯 “선생님, 무슨 물을 말씀이 좀 있는데 잠깐 서로 갑시다” 하는 것이었다. 천만 꿈밖이지만 내 속에는 정말 아무것도 짚이는 것이 없으니 태연한 맘으로 갔다. 그러나 갔더니, 웬걸, 한 주일을 있다가 나오게 되었다. 나와서 들으니 신문에다는 ML당 관계자를 잡았다고 대서특필로 냈더라는 것이다. 그 한 주일에 유치장이 어떤 것임을 비로소 그 풍속과 맛을 알아서 이것이 훗날에 퍽 도움이 되었다.
세번째는 1940년 평양 시외 송산리에 농사학원을 경영하러 나갔다가 그 여름에 설립자인 김두혁 형이 동경에서 검거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는 계우회사건이 일어나자 나도 거기 관련되어 평양 대동경찰서네 들어가 1년을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조금 주의하지 못한 탓으로 버리노라 한 편지가 휴지 속에 있다 발각되어 젊은이 다섯을 잡아넣어 수년씩 징역을 시키게 된 것은 지금도 그 맘의 아픔을 잊을 길이 없다. 그들은 다 나라를 바로잡아 보자고 비밀결사를 만들었다가 그리 된 것인데 지금 그들은 다 어디 있는지? 경찰에서 찾는데 아니 갈 수도 없고, 아버지는 그때 위암으로 임종이 가까워 옥호동 악수에 계셨는데 겨우 하룻밤을 모시면서 이제 가면 땅 위에선 다시 뵙지 못할 줄 알면서 그런 말을 하지도 못하고 돌아서지 않는 발길을 돌리던 생각, 행여 다시 나와 임종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했었는데, 그것도 허락이 아니되어 종시 영원한 죄인이 된 소식을 그 안에서 들었을 때에 천지가 아득하던 생각, 그후 나와서 들으니 마지막에 무슨 남겨놀 말이 없는가 묻는 말에 아버지는 “나야 뭐......” 했다는 것이다. 가시는 당신이야 별 미련이 없지만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하는 어버이 맘이었다. 서울서 김교신, 송두용 두 형이 내려와 상제 노릇을 한 것은 이때였다.
그때에 지낸 가지가지를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지금도 당장 기억에 새롭게 잊히지 않는 것은 한 방에 잠깐 들어왔다 나간 어떤 늙은이에게서 들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시다. 그는 내게 그것을 일러주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기나 했던 것처럼 생각된다.
옥 속에 쓰고 신 맛 겪으니 뜻은 비로소 굳어진다
사내가 옥같이 부서질지언정 기왓장처럼 옹글기 바라겠나
우리 집 지켜오는 법 너희는 아느냐 모르느냐
자손 위해 좋은 논밭 사줄 줄 모른다고 하여라.
그러고 나서 집에 와보니 앞길이 막막했다. 아버지는 이젠 아니 계시지, 지금까지 나이 마흔이 넘도록 집일에 관하여는 아무 걱정을 모르고 왔는데 이제부터는 한 집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다. 첫째로 재산 상속을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참에서 보면 아니할 거라 생각도 됐지만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도 있고 해서 하기로 했다, 이때까지 몇십 명 가족이 별 어려움 모르고 살던 커다란 살림을 꾸려야지, 배운 것은 교사질밖에 없는데 앞으로 학교에는 다시 갈 맘 없지, 또 갈 수도 없었다. 일본 사람의 사상적인 압박이 나날이 심해갔기 때문이다. 7, 8정보 되는 땅을 다뤄야 하는데 농사는 맘으로 좋아만 하지 실지로 기술은 없다. 세상과 어울릴 줄 모르는 것은 타고난 천성이지,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전에 교원 생활이란 복잡한 사회의 비교적 좁은 한 면에만 접촉하는 단순한 살림이었다. 이제는 호주 노릇을 하고 동리의 동민, 면의 유력자 노릇을 해야지, 아버지가 하던 학교일, 교회 일을 관계해야지, 나는 판무식쟁이임을 새삼 느꼈다. 아버지가 하던 한의 노릇이라도 할까, 남겨놓은 의서를 뒤적거려 보기도 했다. 방황이요, 더듬음이었다.
책은 아직 4백 리 밖 평양 송산리에서 먼지 속에서 혼자 울고 있다. 그것을 집으로 가져올 길조차 없었다. 그러고 있는 동안 1년이 가고 1942년 여름에 ‘성서조선’사건이 일어나 또 서울로 붙들려오게 되었다. 아무도 아는 체하지도 않는, 그러나 속으론 모두 놀라 저 사람이 또 저렇게 되누나 하는 줄을 내 맘에도 아는, 용암포 길거리를 손에 수갑을 차고 끌려가며 바라본 때의 5월 초승 포플러의 새로 돋아나는 연초록색 잎새가 바람에 반들거리던 모양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
|
글나눔 → 고사성어
|
|
|
對牛彈琴(대우탄금)
對(대할 대) 牛(소 우) 彈(퉁길 탄) 琴(거문고 금)
남조(南朝) 양(梁) 승우(僧祐)의 홍명집(弘明集)에 나오는 이야기. 옛날 공명의라는 유명한 음악가가 어느 날 들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를 발견하였다. 그는 냇물 소리와 목동들의 피리 소리에 흥취가 돋자, 소를 향해 거문고를 퉁기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이지 않는 소에 화를 내는 공명의에게 어떤 사람이 말했다. 당신의 연주가 나쁜 게 아니고, 소가 당신의 음악을 모르는 것이오. 공명의는 이를 믿지 않고, 아무렇게나 거문고의 줄을 세게 그었다. 갑자기 들리는 큰 소리에 소가 머리를 들고 꼬리를 저었다. 공명의는 다시 한번 시험해 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거문고로 소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보았다. 소는 다시 머리를 들고 공명의를 향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고명의는 소가 고상한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對牛彈琴 이란 어리석은 자에게 도리를 말함 을 비유한 말이며, 곧 소 귀에 경읽기 라는 뜻이다.
……………………………………………………………………………………………………………
|
|
|
글나눔 → 삶 속의 글
|
|
|
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소리 없는 웃음 터진 날 - 김윤덕
영화는 오늘 아침 책가방에 사회, 산수, 음악책에다 분홍색 부채 하나를 더 챙겨 넣었다. 가을 운동회 때 동네 어른들께 보여 드릴 부채춤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아니 아니 틀렸어!' 호랑이 같은 무용 선생님께 야단맞아 가며 한 시간 동안 팔을 올렸다 내렸다 할 생각을 하니, 영화는 아침부터 몸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우아와... 우아... 우우."
책가방을 등에 지고 문을 나서는데, 엄마가 뭐라고 웅얼거리며 손짓을 하셨다. '아참, 도시락!' 영화는 말 못하는 엄마의 표정과 손짓을 보면 엄마가 뭐라고 하시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영화네 집은 영화만 빼고 나머지 여섯 식구가 말을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못하셨다는 아빠(양선우 씨, 42세)와 엄마(민순식 씨, 40세)는, 둘째 영화를 낳았을 때 아기의 귀와 입이 트인 것을 보고 부푼 마음에 내리 삼남매를 더 낳았는데, 불행히도 셋 다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은 영화네 집을 벙어리네라고 부른다. 그 소리에 금세 기가 죽는 영화는 '우리 아빠 엄마는 왜 저런 사람들일까?' 하고 화가 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평생을 말 못하고 살아가는 부모님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에게 "안녕 안녕" 하고 손을 흔든 영화는 동네 어귀를 향해 걸어 나왔다. 영화는 집에서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학교를 걸어서 다닌다. 맨다리에 때가 탄 반바지를 입고 터덜터덜 걸어 가는 영화는 꼭 선머슴 같다. 걷다가 심심해서 영화는 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잡아 손으로 꼭 쥐고 학교까지 그 노랫소리를 들으며 걸어갔다. 학교에는 임진왜란 전에 심어졌다는 450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운동장 한 구석에 버티고 서 있는데, 나무가 만들어 준 넓다란 그늘 아래서 여자 아이들은 맨발로 곧잘 고무줄 놀이를 했다. 영화는 오늘 산수 시간에 큰 수를 숫자로 나타내는 법을 배웠다.
"0이 여덟 개면 억이에요. 그럼 30,000,000,000은?"
"3백억이요!"
선생님의 물음에 아이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3백억? 대체 그 숫자는 얼마나 큰 것일까, 100원짜리 동전이 몇 개 있어야 3백억이 되는 거지? 공책에 동그라미를 부지런히 그리다, 영화는 문득 제 저금통장에 씌어진 다섯 자리 숫자가 생각났다. 35,200. 종례 시간이 끝나고 담임 선생님이 영화를 교무실로 오라고 하셨다. 새 학기 가정방문 때문에 그러시나, 해서 영화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영화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을 저해 주셨다. 한 달 전 영화는 저축에 관한 글을 하나 써 낸 적이 있는데, 그 글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전체 대상에 뽑혔다는 것이었다. 곁에 계시던 선생님들이 "영화 좋겠네" 하시며 벙글벙글 웃어 주셨다. '내가 그때 무슨 이야기를 썼었지? 맞아, 아빠의 저금통장 이야기!' 영화네 집에는 두 개의 저금통장이 있다. 하나는 아빠 것이고 또 하나는 영화의 것이다. 아빠는 석회 공장에 나가 일을 해주고 하루에 1만 5천 원을 받아 오시는데, 그 돈을 조금씩 쪼개 두었다가 월말이면 우체국에 가서 저금을 하신다.
그렇게 3년 동안 부어 온 적금이 지난 3월 만기가 되어 아빠에게 110만 원이라는 목돈이 생겼다. 아빠는 엄마와 상의하여 괴산 장날 암송아지 한 마리를 사오셨다. 영화네 식구들을 닮아 눈망울이 새까만 송아지는 영화네 집에서 가장 큰 재산이다. 아빠는 또 얼마 전에 3년짜리 체신 적금을 하나 더 드셨다. 이번에는 그 돈을 모아 충주 농아학교에 있는 영모 오빠(14세)와 옥화(8세)에게 특수 보청기를 사주실 거라고 하셨다. 보청기는 당장에 필요했지만, 하나에 50만 원이나 하는 보청기는 하루벌이로 먹고 사는 영화네 집 형편에 벅찼다. 영화는 식구들을 위해 열심히 저축하시는 아빠가 참 고마웠다. 영화에게도 통장이 하나 있다. 통역(?)을 하러 아빠를 따라 우체국에 다녔는데 그곳에 있는 언니가 하나 만들어 준 것이다. 통장이 생기고 나서 영화는 버스도 안 타고, 아이스크림 가게를 지날 때도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해서 모은 돈이 3만 5천 2백 원. 영화는 조금씩 불어 가는 아빠의 통장과 제 통장이 식구들의 희망을 두 배로 불어나게 해준다는 이야기를 글로 썼다가 이번엔 상을 탄 것이었다.
집과는 반대쪽으로 2킬로미터쯤 걸어가면 아빠가 일하시는 하얀 석회 공장이 나온다. 영화의 아빠는 그곳에서 시멘트 포대를 트럭에 실어 나르는 일을 하는데, 영화는 무거워 보이는 시멘트 포대를 한 번에 번쩍번쩍 들어 옮기는 아빠의 모습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하얀 석회가루가 온몸에 묻어 아빠는 마치 눈사람 같았다. 공장 문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하얀 땅바닥에 돌멩이로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는 영화에게 아빠는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고 손가락으로 신호를 보내셨다. 영화의 자랑을 듣고 아빠는 정말 아이스크림을 한 개 사주셨다. 하지만 아빠는 영화의 말을 잘 알아듣지는 못하시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영화는, 아빠가 초등학교를 못 다년서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영화네 집은 새 집이다. 돈이 많아서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 지난해 홍수로 집이 털썩 내려앉아 동네 사람들이 다시 지어 준 것이다. 나라에서 얼마 보태 주고 남의 돈도 빌리고 해서 다시 집을 지었는데, 영화 엄마는 빚 갚을 길이 막막한지 요사이 한숨이 부쩍 늘었다. 영화는 전보다 더 좋은 집에 사는데도 엄마는 별로 즐거워하는 것 같지 않아 이상했다. 하지만 밭에서 썩어 가는 고추 때문에 엄마가 걱정하신다는 것은 영화도 알고 있다. 남의 땅을 빌려 부치는 형편에 그 흔한 햇볕은 여름내 내리쪼여 주질 않아 고추들이 시들시들 썩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자주 다투셨다. 엄마의 걱정을 모를 리 없는 아빠지만 속이 상하면 하루 번 돈으로 몽땅 술을 드시고 오는 날도 있는데, 그런 날이면 두 분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마루에 나가 싸우곤 하셨다. 그러면 영화는 흥모(6세)와 연화(4세)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 숨죽이고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엄마의 얼굴에서도 모처럼 웃음꽃이 피어났다. 아주 오랜만에 고개를 내민 초가을의 햇살만큼이나 기쁜 소식을 딸아이가 안겨 주었으므로. 영화는 이번에 상금으로 50만 원을 타면, 그 돈을 모두 아빠의 저금통장에 넣기로 했다. 상금은 아빠의 고마운 저금통장 때문에 받은 것이니까. 그러면 오빠와 동생의 보청기를 1년 더 빨리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맛있는 소시지 반찬을 만들어 주셨다. 영화가 큰 상을 탄다고 엄마는 소시지에 달걀을 씌워 기름에 자글자글 부쳐 주셨다. 소시지를 한 입 물다 엄마랑 눈이 마주친 영화가 히쭉 웃었다. 아빠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셨다. 영화네 집 앉은뱅이 밥상 위로 소리 없는 웃음이 번져 갔다. (샘터 기자)
|
|
|
독서실 → 한국사
|
|
|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 이덕일
2부. 인조반정, 그 비극의 뿌리 (2/6)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던 시절의 참상을 한 궁녀가 남긴 '산성일기'에서 살펴보자.
'12월24일에 큰비 내려, 성벽을 지키는 군사들이 다 젖고 얼어 죽은 이 많으니 상(인조)이 세자(소현)와 함께 뜰 가운데 서서 하늘에 빌어 가라사대, "금일 이에 이르기는 우리 부자 득죄함 때문이니, 성안의 군민들이야 무슨 죄가 있으리까. 천도는 우리 부자에게 화를 내리시고 원컨대 만민을 살리소서." 군신들이 안으로 드시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시더니, 오래지 않아 비 그치고 날씨 차지 아니하니, 성중인이 감읍지 않은 이 없더라.'
하늘은 이때 겨울비는 멈추어 주었는지 모르지만 청나라 군사의 포위까지 풀어준 것은 아니어서 고통은 계속되었다. 이런 상황의 고립된 산중에서 45일을 버틴 것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고군분투였다. 산성의 인조가 믿는 유일한 희망은 구원군이었다. 하지만 다음해 1월 산성에 당도한 것은 구원군이 아니라 강화도가 함락되어 비빈들이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비보였다. 인조는 할 수 없이 삼전도로 나와 청태종에게 삼궤구복이란 신하의 예를 취하며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은 향명대의의 목청 큰 서인정권의 것이 아니라 오랑캐 청나라의 것이었다. 송시열은 이 고난과 치욕의 현장을 똑똑히 목격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 당시 다른 유생들처럼 척화론을 소리 높여 외치지는 않았다. 물론 종9품 미관말직으로서 척화론을 주창할 처지가 아니기는 했지만 관직이 없는 유생들도 외치던 척화론을 그는 주창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병자호란이 끝난 후 속리산 복천사에서 백호 윤휴를 만나 서로 통곡하며 약속했다.
"혹시 우리가 정치를 하게 된다면, 결코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자."
그러나 훗날 송시열은 정치를 하게 되면서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선다. 이때만 해도 훗날 두 사람이 서로 죽이고 죽는 정적 관계가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낙향한 송시열은 벼슬에 뜻을 잃어 더 이상 과거를 보지 않았다. 병자호란의 충격이 그마큼 컸던 것이다. 그는 향리에서 학문에만 몰두했다. 인조 17년(1639)에는 용담현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으며, 21년 12월 세자시강원의 익위사좌우익위로 삼았으나 출사를 거부했다. 이런 송시열에게 인조는 계속 관직을 재수했다. 병자호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인조로서는 산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율곡의 학통을 이은 기호유림의 계승자인 송시열과 송준길을 거듭 불렀던 것이다. 재위 22년(1644)과 23년 인조는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정5품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하며 계속 불렀으나 모두 송씨라 하여 양송으로 불리던 이들은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송시열이 거듭 출사를 거부하자 그에게 제수되는 벼슬은 계속 올라갔다. 그러면서 그의 정치적 비중은 더욱 높아갔다. 종9품 한직인 대군사부를 제수받았을 때도 사양하지 않고 나왔던 그가 정5품 사헌부 지평을 제수해도 거부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인조실록' 23년 10월조는 "처음에 대군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로 벼슬길에 뜻을 끊어서, 누차 벼슬을 주었으나 거절하고 부임하지 않았다"고 하여 병자호란이 직접적인 원인임을 밝히고 이다. 그러나 출사를 거듭 거부하는 은둔정치는 그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을 높여 주었다. 과장에 사람이 구름같이 몰리던 시절에 대간 직인 사헌부 지평을 제수해도 거절한 사실은 내외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제수된 벼슬들을 거듭 거부하며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는 동안 청의 수도 삼양에서는 소현세자 부처가 볼모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리고 소현세자의 볼모 생활 도중의 처신은 훗날 발생할 거대한 비극적 사건을 잉태하고 있었다. 바로 예송논쟁의 뿌리였다.
소현세자, 그 진보성과 개방성의 좌절 -한 선각자에 대한 부왕의 저주
볼모를 자청하는 소현세자
인조의 남한산성 농성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백성들은 정유재란이 끝난 지 불과 40여 년도 안 된 상황에서 다시 발생한 환에 분개해 의병도 거의 일으키지 않았다. 조선은 청군의 포위로 일체의 보급이 끊어진 겨울 산성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항복해야 했다. 조선은 청나라의 강화 사절로 가짜 왕자와 가짜 대신을 보냈다가 말썽이 되기도 했다. 최명길이 적지에 들어가 강화 조건을 묻자 청군은 왕의 동생과 대신을 인질로 삼겠다고 말했다. 이에 조선은 주사대장 구인후 누이의 아들인 능봉군을 인조의 동생이라 속이고 판서 심집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해 보았다. 이때 청군이 심집에게 "그대 나라는 지난 정묘년에도 가짜 왕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 사람은 진짜 왕제인가?"라고 묻자 대답하지 못했다.
"그대는 진짜 대신인가?"
심집이 또 대답하지 못하자 박난영에게 물었다. 박난영은 광해군 시절 강홍립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으로 나가 싸웠던 무장이었다. 박난영은 태연히 대답했다.
"이는 진짜 왕제이고 심집은 진짜 대신이오."
이에 화가 난 청군은 박난영을 죽이고 나서 말했다.
"세자를 보내온 뒤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 다음가는 이군이었던 세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에서, 진퇴양난의 난국에 물꼬를 튼 사람은 소현세자 자신이었다. 소현세자는 비변사에 봉서를 내려 이렇게 말했다.
"태산이 이미 새알 위에 드리워졌는데, 국가의 운명을 누가 주춧돌처럼 굳건하게 하겠는가. 일이 너무도 급박해졌다. 나에게는 일단 동생이 있고 또 아들도 하나 있으니, 역시 종사를 받들 수 있다. 내가 적에게 죽는다 하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내가 성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말하라."
소현세자는 살신성인의 자세로 난국을 타개하고 조선 역사상 최초로 볼모가 되어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동생인 봉림대군, 안평대군과 함께였다. 이들이 끌려간 곳은 당시 만주에 있던 청나라 수도 심양이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이곳에 심양관소를 지어서 머물렀는데, 다시 조선에서는 이곳을 심관, 또는 심양관이라고 불렀다. 소현세자는 봉림과 안평 두 동생을 비롯한 판서 남이웅, 놔부빈객 박황, 우부빈객 박노, 보덕 이명웅, 필서 민응협 등 300여 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심양관에 머물렀으므로 서울의 동궁이 심양으로 이주한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관을 중심으로 청과 조선 사이의 모든 일을 처리했으므로 사실상 주청 조선대사였으며 심양관은 조선대사관이었던 셈이다. 청은 심양관을 통해 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려 하였고, 인조 또한 청과 직접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웠으므로 심양관의 소현세자에게 청에 관한 일들을 미루었다.
심양 생활은 소현세자에게 미래가 불투명한 위기였으나 역으로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비단 소현세자 개인뿐만 아니라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조선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었다. 당시 중국에서조차 끝나가는 성리학과 명분론을 금지옥엽으로 붙들고 있는 조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를 깨닫고, 국제 정세는 명분이 아니라 힘에 의해 좌우된다는 현실을 깨우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처리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곤혹스러운 일은 청의 파병 요구였다. 청은 당시 명과 최후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때였으므로 명과의 전투에 사용할 조정군 파견을 요구했다. 숭명대의를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 정권에게 이는 심각한 자기부정이었으나 전쟁에서 패배한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조는 청의 요구에 쫓겨 재위 18년 4월에 주사상장 임경업, 부장 이완이 이끄는 조선 수군 6,000명을 파병했다. 임경업은 병자호란 때 청군이 서울을 점령한 틈을 타서 역으로 청의 수도 심양을 점령하겠다는 작전을 제안할 정도로 반청인사였으므로 그가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싸울 리가 없었다. 임경업의 수군은 전진하라고 해도 전진하지 않고 명의 전선을 만나도 발포하지 않았다. 발포하더라도 엉뚱한 곳을 향해 쏘고 배를 일부러 부수고 일부 군사를 투항시키는 등 노골적인 사보타주를 일으켜 청나라의 분노를 샀다. 청나라는 이를 조선의 배신행위로 규정짓고 청나라 장수 용골대 등을 조사단으로 삼아 의주에 파견했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용골대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에 용골대란 이름만 들어도 떠는 형편이었다. 이때 세자는 용골대의 동향을 미리 조선 조정에 알려주고 용골대에게는 조선의 처지를 설득하는 등 양자의 충돌을 막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조선 대신들이 벌벌 떠는 존재인 용골대가 한 번은 '청과 다른 의논을 하는 자가 누구냐' 라며 세자를 협박하자 세자는 벌컥 화를 냈다.
"내가 비록 이역에 와 있지만 한 나라의 세자이다. 네가 어찌 감히 이토록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에 달려 있는 것이니 그 따위로 나를 협박하지 말라."
이에 용골대가 웃으면서 사과한 적이 있었을 정도로 소현세자는 배짱도 있는 인물이었다. 인조 20년에는 조선에 출몰한 명나라 배에 부사 이계가 감사 정태화의 명을 받아 몰래 쌀과 음식을 제공해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이때 용골대는 이계 등을 만주의 봉황성으로 불러 세자와 함께 관계자들을 심문했다. 이 자리에서 세자는 시종일관 조선 관리들을 옹호했다. 이에 용골대가 세자를 힐난했다.
"세자가 감사를 이처럼 비호해 주니 그와 한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자가 웃으면서 답했다.
"이렇게까지 의심하니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세자는 청과 조선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마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애썼다. 세자는 이런 과정을 통해 중요한 것은 성리학이 제공하는 명분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현실 인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심양과 북경에서 이런 현실 인식을 갖게 되었다. 물론 이런 현실 인식은 청이 아니라 조선을 위한 것이었다.
세자는 심양에 오기 전부터 새로운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이미 병자호란 5년 전인 인조 9년(1631)에 견명사 정두원이 가져원 서양의 화포와 천리경, 자명종 등을 보고 서양문물에 대해 깊은 인상을 가졌다. 심양에 와서 세자는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더 이상 성리학이 아니라 변화하는 문물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양에서 소현세자는 중원의 대세가 이미 청으로 기울었음을 깨달았다. 만주에서 흥기한 청이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이미 종말로 치닫고 있었다. 국가 생명의 사이클로 따지면 이미 쇠퇴기를 지나 소멸기에 접어든 국가가 명나라였던 것이다.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 즉위 후 가뭄과 흉년에 계속되자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각지의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중 비교적 큰 세력은 유적이 되어 명을 위협했다. 명을 망하게 한 존재는 사실상 청이라기보다는 이들 농민반란군이었다. 농민반란군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역졸 출신의 이자성이 명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출신을 따지지 않고 세력이 있으면 황제를 자칭하는 것이 중국 역사의 한 특징인데, 이자성 또한 세력이 커지자 스스로를 대순황제라 칭하고 명의 수도 북경을 공략해 함락시켰다. 북경이 함락되는 날, 황제의 외척이나 귀족, 재상들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유적의 흙발에 차이면서도 농민출신 이자성을 성천자로 받들고 자결한 의종 숭정제를 저주함으로써 목숨을 구걸했다. 조선의 사대주의자들이 받들어 모시는 명나라는 이미 명나라 황손들도 버린 나라였다. 아마 청이 없었다면 이자성의 순나라가 명을 대신해 중원을 지배했을지도 모른다. 명을 세운 주원장이 농민 출신이었으므로 이는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행위였다. 북경이 함락되었을 때 명의 유일한 정예군은 오삼계가 이끄는 부대였다. 청군을 치기 위해 요동으로 진격하여 산해관을 돌파하던 그는 북경이 이자성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군사를 돌리기로 결심하고 청나라 진영에 편지를 보냈다.
"우리의 황제는 유적 이자성에게 돌아가셨다. 지금부터 나는 황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급히 북경으로 향하는 바, 차제에 귀국의 병력을 빌렸으면 좋겠다."
청과 연합전선을 결성해 북경으로 가자는 제안이었으나 자신이 치러가던 군사를 빌려달라는 이 말은 사실상 항복선언이었다. 소현세자를 볼모로 데려왔던 청의 구왕 다이곤은 즉각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다이곤은 당시 태종의 뒤를 이은 어린 청 세조를 대신해 사실상 섭정하는 중이었다.
"인의의 군대를 동원하여 유적 이자성을 멸하고, 중국 백성을 구원한다."
명목은 명.청연합군이었으나 사실상 청군이 명군을 흡수한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심양에 잡혀온 지 7년 째인 1644년(인조22)4월의 일이었다. 이때 구왕 다이곤은 자국의 왕과 장수뿐만 아니라 소현세자를 대동하고 남정 길에 올랐다. 소현세자의 대동은 구왕의 의도적인 행위였다. 남정군을 따라간 소현세자는 명나라의 마지막 정예군인 오삼계군단이 청나라에 항복하는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다이곤도 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현세자를 산해관에 데리고 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도 소현세자는 중원의 정세가 이미 청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명은 도처에서 무너지고 있었던 반면 청은 욱일승천하는 기세였다. 거기에다 목격한 오삼계군단의 항복장면은 조선이 취할 외교정책이 숭명대의가 아니라 청나라 중심의 현실외교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소현세자는 청군이 산해관을 넘어 파죽지세로 중원을 점령하는 것을 목격했다. 청군이 남진을 시작한 것은 4월인데 한 달로 안 되어 북경에 입성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군마가 달리는 속도가 청의 점령 속도였다. 청의 대군이 밀려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자성은 항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도망갔다. 이로써 청은 명의 수도였던 북경에 무혈입성할 수 있었다. 이자성은 북경을 청에 갖다 바치기 위해 애써 함락한 셈이었다. 청의 파죽지세를 지켜본 소현세자의 심정은 담담했다. 그는 이미 7년 간의 볼모 생활을 통해 이런 사태를 예견할 수 있었다. 세자는 볼모 생활을 통해 현실적인 국제정세 인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세자의 이런 현실인식은 조선의 인조와 서인정권에게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로 비쳤다.
|
|
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
|
|
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미래'라는 에너지
미래를 모르면 '초짜'
얼마 전,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고등학교 동창과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하는 일들이 그렇다 보니 화제가 자연스럽게 요즘의 증시불황으로 이어졌다.
"그나저나 정 사장 유명해졌더라."
무슨 소린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재미있었다.
"아, 글세 우리 마누라가 자네를 다 알지 뭔가."
안식구 되는 사람한테 정문술 사장 만나러 간다고 했더니 '당신이 정문술 사장을 어떻게 아느냐'며 깜짝 놀라더라는 것이다.
"우리 마누라가 주식투자를 한답시고 좀 돌아다녔거든. 미래산업이랑 정문술이 모르면 그 동네에서는 초짜 소리 듣는다더군."
반도체와 상관없는 일반인들이 미래산업과 정문술을 알고 있다면 십중팔구 주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증권가에서는 미래산업이 꽤 유명한 편이다. 지난 몇 년 간의 불황이 우리한테는 고속성장의 시기였고 그 와중에 미래산업은 주식상장을 결정했다.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빚 갚자는 돈은 아니다. 기술개발자금을 확보해두려는 의도였다. 군침만 흘리던 고가의 연구장비들을 그때 많이 사들일 수 있었다. 후발주자로 뛰어들어 자리잡느라 고생만 잔뜩 시켰던 직원들에게도 좋은 보답이 되었다. 신문에서 떠들던 대로 약간 과장하자면 '전 사원 억대 부자'의 신화도 이룰 수 있었다.
96년 9월에 우리사주 7만 9천 주를 270명의 직원에게 주당 4만원씩 사게 해주었다. 경력에 따라서 200주에서 1천 주까지 배당해주었다. 당시 주가가 30만 원을 오르내렸으니 그 차액이 엄청났다. 정확히 계산해보면 270명 중에서 200명이 억대 부자가 된 셈이다. 관리과에 근무하는 어느 여직원의 경우 730주를 받았으니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2억 7천만 원이 된다. 구내식당에서 일하는 한 아주머니도 억대 부자가 되었다. 이른바 '황제주', '귀족주'라는 것이다. 일반회사에서 주식회사로 변모한다는 것은, 사장과 직원들만의 기업에서 바야흐로 국민의 기업으로 변화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단 주식회사가 된 이상 기업은 더욱 투명해져야 하고 더욱 도덕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당연히 기업 공개념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
미래산업이 주식상장을 준비하던 1996년, 증권가의 새로운 변화의 시기를 맞고 있었다. '증권 공모가 자율화 조치'의 시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증권감독원에서 상장을 준비하는 기업의 재무구조와 수익성, 안정성, 성장성 등 각종 항목을 심사하여 공모가를 결정해왔다. 그러기 위해서 기업은 '주간사 계획서'를 제출하고 승인받아야 한다. 미래산업은 당시 증시사상 최고가격인 주당 4만 원으로 승인이 났다. 주간사 계획서의 승인을 받고 안도하던 중에 갑자기 '증권 공모가 자율화 조치'의 시행령이 공표되었다. 한 달 후부터는 시장의 원리에 의해 자유롭게 공모가를 결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산업의 상장을 준비하던 동원증권은 곧바로 증권감독원에 재심청원을 했다. 이러저러해서 억울한 입장이니 가급적이면 공모가를 다시 책정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증권감독원측에서는 우리의 입장을 십분 이해는 하겠지만 공공기관의 심사결과를 함부로 번복할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동원증권이 이번에는 이미 승인된 주간사 계획을 취하하자고 제안했다. 딱 한 달만 기다리면 엄청난 가격으로 팔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비슷한 경우 때문에 두어 군데 기업에서는 벌써 주간사 계획을 취하한 경우가 있었다. 공모가 자율화 조치 이후에 상장하면 최하 200억에서 300억은 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승인된 공모가 4만 원에 50만 주를 발행할 예정이었으니, 눈 딱 감고 한 달만 버티면 200억 원 규모의 유입자금이 졸지에 400~500억 원 규모로 뻥튀기되는 셈이다.
나라에서 어떤 제도를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장기적으로 무언가의 이득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는 본의 아니게 피해를 보는 사람도 생겨날 수 있다.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서 한번쯤은 감수해야 할 불가피한 아픔이다. 반대로 그 혼잡한 와중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폭리를 취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러한 발상 자체를 부도덕한 것이라 생각했고 국가정책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얄팍한 장난질은 나의 적성에 맞질 않았다. 나는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부담 없는 가격으로 우리의 주식을 나눠가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어렵게 주식발행을 결정한 의미도 그래야만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더구나 기업 이미지만큼 주가에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은 없다. 주식을 발행한다는 것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과는 달랐다. 장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로서는 자금유입보다 기업공개의 의미가 더 컸다 이미 사장 한 삶이 차지하고 있기에는 회사가 너무 커져 있었다. 나라고 그럴 욕심이 없었겠냐마는 다만 기업 이미지 제고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고 어렵사리 결심을 굳혔다.
내 결심을 말했더니 동원증권에서는 당연히 펄쩍 뛰며 만류했다. 동원증권의 입장에서도 유입되는 자금이 커질수록 더 많은 커미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결정에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내 고집이 의외로 강건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못마땅해하면서도 별 수 없이 그대로 따라와 주었다. 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클라이언트였을 것이다. 공모가 자율화 조치를 불과 몇 주일 앞두고 미래산업은 마침내 주식을 시장에 공개했다. 사람들은 모두들 정문술이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욕했다. 사업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다. 하지만 나와 우리 직원들은 우리의 결정이 옳다고 믿었다. 다행히 시장은 비교적 정확하게 우리의 도덕성을 평가해주었다. 특히 소액투자자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발행 며칠만에 미래산업 주식값은 엄청나게 뛰어올랐고, 매스컴들은 우리의 과감한 결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장외시장 사상 최단기간 주가상승률을 r기록했다. 순식간에 4만 원이던 주가가 30만 원을 넘어섰다. 얼마 후에 증권사 사장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투자 한번 기막히게 하셨습니다."
미래산업은 200억을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기억 이미지도 좋아졌고, 주식신뢰도도 매우 높았다. 주가가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해주니 당연히 나를 포함한 우리 직원들은 큰 부자가 되었다. 200억을 버리고 보이지 않는 수천억을 벌어들인 셈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전 사원 억대 부자'의 신화가 이루어졌다.
주식을 발행한다는 것은 제품을 만들어 파는 것과는 달랐다. 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금유입보다 기업공개의의미가 더 컸다. 매스컴들은 우리의 과감한 결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4만 원이던 주가가 30만 원을 넘어섰다.
|
|
|
|
사진 / 그림
|
|
|
|
|
[허블 우주망원경으로 찍은 오리온 성운]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