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한배움 (1/3)
자루없는 칼
나는 대학을 다녀보지 못했다. 이 지식을 차들어가고 숨은 것이라고는 하나 없이 벼룩 똥집까지도 발끈 뒤집어보여야 속이 시원해 하는 , 무엇보다 큰 소리가 지성인임을 자랑하는 데 있는 이 20세기에 대학을 못 가본 것은 확실히 부끄러움이요, 불행이다. 그래 나는 오래 두고 대학 못한것을 한했다. 이젠 이 앞으로 대학을 갈 것 같지는 않으니 아마 그 한은 한 대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하기는 지금도 꿈을 그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늙은이 대학을 하나 해봤으면 하는 것이다. 사업의 재주 없는 나로서는 그것은 한낱 그림에 지나지 않는 일이지만, 누가 해도 했으면 좋겠고, 하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젊어서 는 기운도 있고 욕심도 강하니, 공부를 해도 욕심에서 하고 깨끗한 진리 찾는 정신에서 하기가 어렵지만, 늙어서 이제 인생의 테두리가 그어질 대로 그어지고 고요히 있어 오고야 말 날을 기다리는 태도에 들어가면 좀 참된 공부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옛날 섭공이 자로를 보고 그 선생인 공자님에 대해 물었다. 자로가 무어라 대답을 못하고 돌아가 선생님보고 그 말을 했더니 공자님 하는 말이, “ 너 왜 이렇게 좀 말하지 못했느냐? 그 사람됨이 분이 나이 먹기를 잊고, 즐거워 근심을 잊어, 장차 늙음이 닥쳐올 줄을 모른다” 라고. 분이 나는 것은 아직 배워 얻지 못해서요, 즐거운 것은 이미 배워 깨달았기 때문이다. 공자님은 정말 인생을 배운 이였다. 그래 참 안의 스승이 됐다. 늙으면 좀 공부가 될 것이다. 거죽이 엷어지면 좀 비치어 내다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공자야 열다섯에 이미 참 뜻을 꽉 세웠다는 것이니 말할 것 없지만, 그래도 늙음이 닥쳐오는 것을 모르고 배우려는 마음은 좀 늙었기 때문에 더 났을 것이다.
공자야 어쨌거나, 나는 오늘에 대학 공부를 했으면 하는 생각이 나건만 못하니 한이다. 이제 사는 형편이 허락이 아니되는 점도 있으나, 그보다도 대학이 어디 있느냐? 저기 다방과, 댄스홀과 미장원학이더냐? 장삿집이요, 도둑의 둥지요, 갈보굴이지. 그러니 늙은이 대학 하나 있기를 바란단 말이다, 감투 쓸 가망도 다 없어진, 팔아먹을 생각도 다 달아나버린, 순전히 알고 싶어서, 죽기 전에 진리를 좀 알고 싶어서, 속으로 살이 찌고 속으로 기름기가 돌고 싶어서 공부를 하려는, 맘들을 놓고, 역시 팔아먹고 써먹잔 맘 없는 맘이 와서 가르쳐주면 그야말로 늙을 줄을 모르는 생명이 약동하지 않을까? 늙은이가 늙을 줄을 모르고 공부를 하면 젊은이들도 좀 정신을 차릴 것이다. 칼은 어린이에게 주기 전에 어른에게 줄 줄 알면서, 칼보다도 날카롭고 조급 하면 저도 죽고 나도 죽는 짓은 어째 철없는 맘에 철없는 공명심, 영웅심, 호기심, 탐심에 호소해가며 주려하나? 칼 찬 것이 대장부냐? 기운있는 것이 대장부지. 칼 채우기가 급하지 않다. 어서 제 몸 거둠 제가 하고 필요한 때 남도 붙들 만 한 정신과 몸의 힘을 길러주는 것이 급하지, 젊은이가 작페를 하는 것은 힘이 나기 전, 셈이 들기 전 칼부터 찾기 때문이다. 이 다음에 지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일 있다면 가장 심한 형벌을 받을 놈은, 나무 작두에 모가지를 잘리울 놈은 고등학교, 대학교를 자꾸 세우고 저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쳐준 학자들일 것이다.
칼은 쓰잔 칼이 아니요, 쓰지 말잔, 쓰지 말고 들어 뵈잔 칼이다. 성경 못 읽었나? 선악을 아는 지식의 열매는 먹지 말고 보고만 있으라 했던 것을. 늙은이가 날카로운 칼을 들고 점잖게 않았더라면 젊은이는 저절로 점잖고 순종해 할 일을 했겠지. 이 나라가 잘못된 것은, 늙어서 욕심 버리고 앉아 얼굴로 다스렸을 늙은것들은 철없이 해먹고 더 해먹겠다 서둘고, 일을 시켰어야 할 젊은이는 자루 없는 칼같은 잘못된 지식만 받았기 때문이다. 늙은이를 대학으로 보내고 젊은이를 일터로 보내라. 옛사람 말 옳지 않은가? 다행히 남은 힘이 있거든 학문을 하겠다. 나는 대학을 못하고 사범을 했다. 그것이 두고두고 한스러웠다. 내가 왜 훈장질을 배웠던가?「맹자」를 어려서 배웠건만 겉 먹었다. 아마 그것 가르치던 훈장도 역시 잘못되어 바로 가르치지 못했는지 모른다. 맹자 말을 바로 듣는다면 훈장질 할 놈이 누구냐? “사람의 걱정이 남의 스승 되기 좋아하는 데 있다. 못할 것은 선생 노릇이다."
일찍이 조만식 선생께 이런 얘기가 있다. 선생님이「조선일보」사장으로 계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때 누가 보고 “그것은 왜 하셨소?”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님 대답이 “떠돌아 다니던 감투가 내게 와 떨어져서 그렇지요” 했다. 그 뜻을 물으니 설명하기를 옛말을 끌어다 했다. 옛적에 하늘에서 궁 감투 셋을 만들어 사자를 주어 내려보내며 인간 중에 가장 궁하게 사는 놈에게 씌우라고 했다. 명령을 맡은 자가 인간 세상에 내려와 보니 서당 훈장이 제일 궁상스러워 보였다. 그래 하나를 씌워주었다. 그 다음 두루 다니며 보니 미투리 삼는 신장수가 또 훈장만은 못해도 참 궁한 꼴이었다. 그래 또 하나 씌웠다. 나중에 감투 하나가 남았는데 세상을 두루 뒤지며 보아야 도무지 씌울 놈이 없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훈장한테 다시 돌아와 네가 또 쓰는 수밖에 없다 하고 마져 씌우고 갔다. 그래 훈장은 궁감투를 겹 썼다는 것이다. 조선생이 떠돌아 다니던 감투라고 하신 것은 이 마지막 번 감투를 가리킨 것이다. 훈장이 궁감투를 겹 썼다는 데는 감투가 겹이니 만큼 뜻도 겹이다. 하나는 좋은 뜻에서요 하나는 나쁜 뜻에서라 할 수 있다. 좋은 뜻에서라 함은 사람이 정직하면 궁한 법이다. 훈장질에까지 갈 것 없이 선비가 본시 궁한 법이다. 궁사라 하지 않나? 조선생이 어려운 판국에 신문사 사장을 한 것도, 이북 다섯 도의 정치 책임의 자리에 앉았다가 시베리아 어느 들판에 얼어죽은 시체가 됐는지, 어느 감옥 어느 토굴 속에서 어떤 참혹한 최후를 당했는지 모르게 된 것도 과연 떠돌던 궁감투를 썼다면 쓴 것이라 하겠지만, 그것은 결코 못나서가 아니다. 선비다운 맘, 점잖은 맘, 곧은 맘 하나 때문이지.
거기 비추어보면 요새 국민학교 교원은 결코 궁감투가 아니다. 그 자리 하나를 사기위해 5만 환, 10만 환 금새가 정해 있다닌 궁감투가 웬 궁감투냐? 요샛것을 잘났단다면, 속일 줄 하나를 몰라 일생 혀로 밭을 갈아먹고, 그 똥은 개도 아니 먹는다던 초학 훈장은 과연 못난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늘에서 궁감투를 보낼리는 없다 하늘과 여기는 반대다. 여기서 권세의 감투가 거기서는 죄수의 벙거지요, 거기서 영공의 두루마기는 여기 오면 부끄러움의 누더기다. 훈장이 궁감투를 겹 쓰는 것은 맘이 곧기만 해서가 아니요, 변통성이 없어 틀레 박힌 거짓 선을 하고는 그것을 잘난 줄로 알기 때문이다. 맘이 속되다. 한 달에 쌀 몇 말에 목이 매여 할 말을 맘대로 못하고 놀릴 팔다리를 자유로 놀리지 못하고 한평생을 선생님 노릇을 하기 위해 가슴속엔 설엉키는 생명의 불꽃을 가지면서 외양으로 언제나 틀에 박힌 행동을 하는 데 그의 궁이 있다. 저들은 작 대기 노릇을 하느라고 언제 한 번 푸른 잎을 피우고 가지를 돋히고 뿌리를 뻗어 보지 못한다. 살아도 화분에 심은 나무같이 요리 꼬부라지고 조리 짤린 형식주의의 살림을 하다 만다. 교사, 목사, 신부, 스님이 다 그 따위다. 외양이 가장 면바른 듯하나 속은 엉망진창이다. 한 번도 참을 알 리 없다. 나마니 못나고 모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교사랍시고 선생 소리 들어가며 이 날까지 온 느낌으론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나 혼자의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장횡거가 주자의 백록동서원에 가서 “옛사람은 저를 위해 공부하더니 요새 사람은 남을 위해 공부한다.”는 제목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데 주자가 옆에 앉아 들으며 2월달인데 땀이 흘러 견디지 못해 부채질을 했다하지 않나? 존경하는 사람에게선 성인 소리까지 듣던 주자가 그랬다면 보통 사람은 말할 것도 없다. 선생질이란 그렇게 깍대기 노릇이기가 쉽다. 주자는 됐지만, 땀도 한 방울 흘릴 기회 없이 일생을 새까만 때 묻은 옷을 거는 작대기 노릇을 하다 마는 것은 참 궁감투를 겹 써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사범학교란 그것을 떡잎 시절부터 하잔 것이다. 세상에 참혹한 것이 스물도 되기 전부터 나는 이제 졸업하면 선생이 되지하고 벌써 틀을 쓰고 있는 것과 그 젊은이의 무한히 자라나는 생명의 촉각을 게발 따듯 모조리 다 따버리고 나중엔 조약돌처럼 맹숭 맹숭한 성격에 천 번 들어도 꼭 같은 소리만 나오는 레코드판 같은 인물을 교사,목사,신부로 팔아먹는 소위 사법학교, 신학교란 것에서 더한 것은 없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면 “너도 사범이 됐니?” 한다. 거기는 생명이 사는 곳이 아니라 죽은 곳이요, 위대해지는 곳이 아니라 못난이가 돼버리는 곳이다. 같은 짓이고 거기서는 벌써 팔아먹을 것을 생각하고 배우는데 고린내 나는 것이 있다. 교사, 목사, 신부치고 고린내 아니 나는 것 있던가? 사범엘 들어 가고 나서야 그것을 느껴서 이런 데를 왜 왔나 후회했다. 대학에 가서 자루 없는 칼을 받아 가지고 잘못해 몸에 상처를 내고 사람을 더러 잡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한 번 자유로운 연구를 해 보았으면 하는 맘이 간절했다. 대학에서 잘못된 짓을 가지고 사람을 해 하는 것이 칼로 죽이는 거라면, 교사, 목사, 신부가 죽이는 것은 모가지를 비틀음이요, 입을 막고 코를 막고 코를 막아 숨이 차서 죽게 함이요, 가스로 독살을 하는 셈이다. 그 노릇을 하다니! 내가 죽을 때 후손을 위해 유언하는 일이 있다면 백 대 천 대에 경찰관 노릇은 아예 해먹지 말라 하겠다고 말한 일이 있었지만 거기 한 마디를 덧붙일 여유가 있다면, 신부, 목사, 교사를 넣을 것이다.
사범이 정말 사범이 되려면 사범이어야 할 것이다. 죽기를 바로 죽도록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이 정말 배울 것은 사는 법이 아니고 죽는 법이다. 삶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사는 법은 저절로 안다. 그것은 하늘법이다. 생은 명이다. 새삼스레 살라 하지 않아도 살 줄 안다. 정말 삶은 바로 죽음에 있다. 삶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고 죽음은 우리가 할 일이다. 예수가 한 일은 십자가 하나다. 잘못 사는 까닥이 잘목 죽은데 있다. 그러므로 배울 것이 있다면 죽는 법이다. 몸으로써 본때를 보여야 참 스승이라 하지만 본때란 죽는 본때다. 본때 있게 죽은 것이 스승이다. 선사, 먼저 죽어 뵈준 이가 선사다. 그런데 교사, 목사, 신부란 다 저렇게 죽는 것이 좋다고 손가락질만 하고 있지 자기네는 한 걸음도 움찍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전의 사범에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런 사범의 시범밖에 못한다. 일체 문제와 모든 사람의 속이 죽음의 턱밑에 가서야 결정이 나는데, 아지고 쌕쌕 숨을 쉬고 있는 물건이 무엇을 알기나 한 듯 보기나 한 듯 큰소리를 할까? 배울 만한 참이 내게 있다면 “그 주의 괴수는 나다.”해야 할 일이지만, 오늘의 종교와 교육은 생불여사의 종교요, 교육 아닌가?
인생대학
나는 백묵가루와 책좀이 있는 대학에는 못 갔지만 그 대신 밧줄과 고랑과 철창으로 된 대학에는 가본 일이 있다. 이른바 인생대학이라는 곳이다. 모든 것을 보이는 것으로만 하는 세속 사람은 거기를 옥이라 하지만, 뵈는 것보다 뵈지 않는 뜻을 말하는 사람은 거기를 대학이라 한다. 안과 밖은 서로 반대가 되는 법이라 사실 대학은 감옥이요, 감옥에서는 집을 빼앗기고 살이 빠지고 징역살이를 하나 속은 점점 깊어가고 높아가는 곳이다. 다만, 생각이 있는 자에게는 말이다. 역기서나 저기서나 조건은 생각에 달렸는데, 생각 있으면 잃음이 얻음이요 생각 없으면 얻음이 잃음인데, 감옥이란 곳은 생각을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대학이다. 사실 감옥이란 곳은 인생의 부끄러움이지만 그 부끄럼움 속에 사람됨을 배우는 것이 있다. 에덴 동산의 그림이 그것을 표시하지 않나. 몸뚱이 한복판에 부끄러운 것이 있어 무화과 잎으로 가려야 했는데 사실 사람이 사람 노릇은 거기서 배우게 된다. 몸 복판에도 부끄러운 감옥이 있고 사뢰 복판에도 부끄러운 감옥이 있어 그것을 감추려 하는 동안에 문명이고 도덕이고 발달해가는 것이 사람이다. 정치요, 교육이요, 종교요,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결국 발을 붙이고 있는 토대인 감옥이란 것도 결국 못 먹을 것을 먹은 입, 못 만질 것을 만진 손, 못 내놓을 것을 내놓은 그것을 먹은 입, 못 만질 것을 만진 손, 못 내놓을 것을 내놓을 것을 내놓은 그것을 가리자는 무화과 잎새가 커지고 엮인 것밖에 되는 것 없다. 정치도, 종교도, 교육도 따지면 눈가림이다. 하나님의 눈, 다시 말하면 참의 눈을 가리잔 것이 그 목적이다. 참을 차마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눈을 가리는 것이 문명이다. 가려 가지고 될 것이 아니지만 가려보자는 것이다. 거기 사람의 살림이 근본적으로 거짓인 것이 들어 있다. 하지만 가려 가지고 되지 않지만 , 아니되는 것을 해보는 동안에 배우는 것, 되는 것이 있다. 이것 가지고는 아니된다 함이다.
감옥은 인류의 문명의 한복판에 있어서 “이것 가지고는 아니되니다”하는 경고판이다. 그것은 법률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잡은 것임을 아려주는 곳이다. 그것은 일생을 관리밖에 못하는, 속이 빽빽 멘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지만 도리어 그 란에 좀 들어가본 사람은 곧 아는 일이다. 청살 안에 들어가 앉아보면 세상이 곧 바뀌어진다. 간수를 보면 “정말 내가 죄수냐, 네가 죄수냐?”묻고 싶어지는데 그들은 그것을 모른다. 자유가 없고 징역을 하기는 저나 내나 마찬가지인데, 내 먹을 밥을 제가 가져와야지, 내가 기침만 한 번 크게 해도 눈이 휘둥그래지지, 누가 주인이요 누가 종이냐? 사람이 제 자유를 잃지 않고 남의 자유를 빼앗는 수는 없으며 제 맘이 먼저 불행하지 않고 남을 괴롭게 하는 재주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사람의 인격과 살림은 하나지 결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리 해먹는 사람들은 하늘에 해 같은 이 이치를 모른다. 살창 안에 있는 죄수는 제가 자유 빼앗긴 줄을 알기나 하지만 살창밖에 있는 죄수는 그것조차 모르는 죄수다. 그리고 병은 병인 줄 모르는 것일수록 중한 병 아닌가? 그러면 살창의 안팎은 사실은 바뀐 것이다. 누가 더 중한 죄수냐 하면 살창 밖인 줄 알면서 기실은 더 깊은 옥 속에 있는,남을 가둔 줄 알면서 사실은 제가 갇힌 간수다. 그리고 간수 뒤에는 형무소장이 섰고 형무소장 뒤에는 법무장관이 섰고 법무장관 뒤에는 대통령이 섰고 대통령 뒤에는 나라가 섰다. 그러니 징역을 사는 것은 어는 한 도둑놈이나 살인자가 아니요, 곧 우리나라가 징역을 살고 자유를 잃고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 중에 가장 이상적인, 가장 단단한 가정이란 데서는 이것은 환한 진리다.
아들의 종아리를 칠때 사실 아프고 부끄러운 것은 그 아버지 자신이다.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하므로 가정엔 감옥은 없다.법으로 다스리잔 사람들의 답답한 점은 여기 있다. 남을 벌할 때 받는 것이 자신임을 알았다면 사회는 훨씬 쉽게 고쳐졌을 것이건만 관리란 관리는 다 신통히도 맘이 종잇장같이 엷은 사람들이라 원수를 갚는다는 맘으로 벌을 하며 썩 잘한대야 바로잡아 주노라고 하지만 결코 바로잡아지지는 않는다. 그것을 깨달으려면 그들 자신이 한번 그 대학에 입학을 해봐야 알 것이다. 감옥은 확실히 인간의 부끄러움이기 때문에 대학이 된다. 대학이 참 대학이 못되는 것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자랑이 부끄러움이고 부끄러움이 자랑이건만 이 사회에 점잖다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생각해봐! 그렇지 않은가? 재가 대학 졸업생이라 자랑을 하려면 대학 졸업 못한 부끄러워하는 내 형제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냥 내 자랑으로 아는 내 맘이야말로 부끄럽지 않은가? 참지식은 부끄러워할 것이다.
그럼 감옥이 부끄러운 것이라면, 그것을 최후의 의지로 하고 있는 국가 사회제도도 부끄러운 것이다. 가장 알기 쉽게, 말 아니 듣는 놈은 잡아 감옥에 보낼 준비를 해놓은 맘으로 하는 교사, 목사, 대통령은 부끄러움이지 조금도 영광될 것 없다. 아무도 아무리 천하미인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팔을 비틀고 발에 고랑을 채워 가며 내 아내 노릇을 하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제맘에 좋아서 와서 꼬리를 치는 강아지가 훨씬 더 사랑할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에 강제로 팔을 비틀어 자기를 존경해 달라는 정치가는 어찌도 그리 많은고? 감옥만 없으면 하나도 하루도 못해먹을 지배자들! 감옥이 뭐냐? 폭력의 상징 아닌가? 폭력으로 되는 정치, 교육, 종교, 문명, 부끄럽다! 대체 동물 중 어느 동물이 제 짝 제 새끼를 살창에 가둬두는 놈이 있던가? 짐승 중 어느 짐승이 제 동무를 발등 좀 밟았다고 두고두고 물고 찢고 찌르고 지지고 하던가? 사람이 감정의 동물이라, 저도 알 수 없고 억제할 수 없는 충동에 한때 남을 때리고 죽이고 하는 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