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이단자가 되기까지 (2/2)
인생문제
평고엘 다니게 되면서부터 나는 교회에 가기를 그만두었다. 그것은 교회가 싫어서도 아니요, 무슨 의심이 생겨서도 아니다. 단지 학교의 동무들이 거의 다 믿지 않는데 나 혼자 믿는다 하고 가기가 부끄러워서 못 갔을 뿐이다. 스스로는 여전히 기독교 신자로 자처했고 방학에 집에 가면 다름없이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교회에 못나가는 것이 늘 죄스럽기는 했다. 한번은 관 앞 거리를 자나가는 기독교 청년회관 앞을 오니 숭전 전도대들이 특히 평고 학생에게 전도한다고 길을 막고 지키다가 붙들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스스로 믿는 사람이거니 하면서도 감히 “나는 믿습니다”소리가 나오지 못해 끝끝내 믿지않는 행세를 하고 나왔다. 지금도 서울역서 전도지를 주는 것을 당할 때는 감히 “나도 믿습니다”소리를 못하고 불신자 행세를 하고 마는 일이 종종 있다.
그때 설교는 길선주 목사가 했는데, 그가 성신을 받아 큰 권능을 행한다 말을 들었으나 이것이 그를 보고 또 설교를 들은 단 한 번의 기회였다. 그때 설교는 별로 감동된 것은 없으나 믿음의 힘을 이야기하면서 정도전의 활쏘던 이야기를 하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가 저녁에 어디 갔다 오다가 길에 큰 백호가 엎디어 있는 것을 보고, 있는 정신을 가다듬어 활을 쏘았더니 미간에 맞았으므로 그대로 두고 집에 가 사람을 시켜 가보라 했더니 백호가 아니고 바위가 흡사 쭈그린 범같이 생긴 것인데 그 별백이에 화살이 꽂혀 있더라는 것이다. 정조전 자기로서도 하도 놀라워 다시 활을 가지고 시럼해보니 아무리 힘을 다해 쏘아도 아니 들어가더라는 이야기다.
만세 후 집에 돌아와 있는 이태 동안에는 마음속에 번민도 많아 교회를 열심히 나갔다. 교회에서는 아주 진실한 청년으로 지목을 받았으나 나로서는 이렇다 할 깨달음도 경험도 결심도 없었다. 교회도 내게 별로 깊이 준 것이 없다. 오산을 가서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첫 학기가 자나더니 가을 새학기에 학생간에 이제 훌륭한 선생님이 교장으로 오신다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다. 서울 계신 유영모 선생님이신데 최남선 씨가 무서워하는 이는 이 선생님뿐이란다더라 하는 것이었다. 과연 오시더니 취임하는 첫날 말씀을 하시는데 우리는 저 뒤에 섰으므로 별로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어쨌든 배운다는 ‘학’자를 가지고 말씀하셨는데 무려 두 시간 이상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혀를 떨었다. 이제 와보니 그때 선생님은 서른둘이신 때였다. 선생님보다 만열한 해, 날로 사천열이레를 떨어져 난 나는 그때 스물하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 후에 선생님을 따라 날짜 계산을 하면서 알게된 것이지만 선생님과 나와는 생일이 같이 3월 13일이요, 음력으로는 한 달 차를 두고 같은 날, 선생님은 2월23일 나는 정월 23일이다. 선생님은 그때 벌써 날짜를 세고 계시던 때여서 1만 1천1백 일엔가 지으신 지조를 가르쳐주시던 기억이 있다.그게 무슨 신비로운 인연인지 이런 말 하기도 부끄럽고 죄송스럽지만 모든 사람이 다 선생님을 높이 존경은 하면서도 괴상한 분이라 하고 멀리해 버리는데 나는 못생겼으나마 내 딴으론 선생님을 배우잔 생각이 들어 오늘까지 미미하게나마 따르고 있다.내가 인생이라, 생명이라 하는 말을 들은 것은 이때 선생님께서 처음이었다.어쩌면 그리도 둔하고 생각이 없었던지.
선생님은 우리 수신시간을 맡으셨는데 교과서를 가지고 한 일은 별로 없고 당신이 쓰신 것이나 혹 고금의 참되게 사신 이들의 글귀를 가지고 말씀하셨다.채근담을 알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노자를 알게 된 것도 그때가 처음이다.노자를 제일 많이 써주셨다.한 번은 칼라일의 오늘이라는 시를 가르쳐주셨다.
여기 흰 날이 왔도다. 낭비하지 말지어다. 영원에서 이날은 나왔고 영원으로 밤이면 돌아간다.이날을 미리 본 눈이 없고 보자마자 사라져버린다.여기 흰 날이 왔도다.낭비하지 말지어다.
일본말로 번역한 우치무라 간조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었다.그런데 그 말씀 중에 일본 기독교에서는 참된 사람이 둘이있는데,하나는 우치무라고 하나는 야마무로 군뻬이라고 하시며, 우치무라 선생의 애기를 하나 하셨다. 그것은 그가 미국에서 고학하던 때의 얘기였다. 그가 어떤 백치원에 선생으로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아주 저능아들이어서 나쁜 장난을 많이 하므로 그 감독이 퍽 어려웠고, 어떤 책망이나 벌을 해도 소용이 없었고 저녁을 아니 먹이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다. 정도를 따라 좀 나은 것을 워싱턴 클럽, 그 보다 떨어진 것을 링컨 클럽, 둘로 나누었는데, 우치무라 선생은 워싱턴 클럽의 담임이었다. 그 중에 대니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아주 악질이어서 나쁜 장난을 몹시 하였다. 하루는 주일인데 그놈이 어찌 사납게 놀았던지 선생이 화를 내어 “이 자식 너 오늘 저녁 못 먹는다. 그러나 오늘이 주일이니 내가 차마 너 밥 굶기겠냐. 너 내 밥 먹어라,나 밥 아니 먹는다.”했다. 대니는 물론, 애들도 그저 그러나보다 했지 정말 선생이 저녁 아니 먹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정말 아니 먹었다. 동무 선생들이 물었으나 별 대답은 없이 그저 먹고 싶지 않다고만 했다. 그러나 옳은 일은 숨겨져버리는 법이 없는지라 그 얘기를 전원에서 알게 되었다.
워싱턴 클럽의 백치들은 이것을 듣고, 우리 선생이 대니 때문에 저녁 아니 먹었다니 큰일이다.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여 반회를 열었다. 그때 유선생님 말씀대로 “백치도 미국 백치는 데모크라리가 되어 그랬는지”회의를 한 결과 대니를 링컨 클럽으로 내려뜨리기로 결의해 가지고 왔다. 학교 당국도 어쩔수 없이 그대고 듣게 됐고 우치무라 선생은 우는 대니를 놓고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다. 선생은 그 후 거리를 나왔고, 그런지 여러 해 후에 어떤 일본애기를 듣고 그깨 아직도 있던 대니를 놓고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다. 선생은 그 후 거기를 나왔고, 그런 지 여러 해 후에 어떤 일본사람이 그 백치원을 구경을 간 일이 있었는데, 일본 손님이 왔다는 애기를 듣고 그때 아직도 있던 대니가 “당신 우치무라를아셔요?”하더라는 것이다. 그래 아노라고 대답한즉, 대니는 곧 뒤이서 "He is a great man!"(그는 위대사신 분이오)하더라는 것이다. 유선생님이 이 말씀을 해주실 때 나는 우치무라가 살아 있는 사람인지 옛날 사람인지 몰랐다. 언제 그를 알아보잔 생각도 없었다. 그랬는데 그 우치무라의 이름은 어째 잊혀지지 않았고 훗날 동경에 가서 그를 뵙고 섬기게 됐고, 그의 입으로 대니의 애기를 다시 듣게 되었다. 어떻게 낳다 어떻게 죽었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는 대니가 우치무라와 유선생님과 나와의 사이에 이상한 인연을 지었다.이 앞으로도 또 누구와의 사이에 이상한 인연을 지었다. 이 앞으로도 또 누구와의 사이에 어떤 인연을 지을지 모른다.
백치는 뜻없이 세상에 나왔던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유선생님이 교회에서 말씀하신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자세한 것은 남아 있지 않으나, 이 세상과 인생을 탯집속으 애기로 비유해 말씀하신 것을 인상깊게 들은 것과 전체로 생각을 참 깊이 하신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 기억된다. 나는 내 속에 텅 빈 느낌을 차차 가지게 됐고 생각을 조금씩 해보게 됐다. 선생님을 조용히 찾아뵐까 하는 생각도 나서 계신 방문 밖에까지 갔으나 어떻게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자 용기가 나지 않아 문을 열려다가 도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나는 어느 유명한 선생님이나 명사를 찾아보는 용기를 못 가졌다. 그래서 잘했다는 생각도 없지만 그래 잘못했다는 생각도 없다. 저 돼먹은 바탕을 못 벗어나는 법이다. 그때까지 내가 교회에서 배운 것은 기독교라는 한 개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생님을 만나서 조금 성경이란 것을 생각하게 됐고,교회에서 배운 성경이 그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이제 비로소 성경이란 깊이 생각을 하며 봐야 하는 책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선생님은 일 년 남짓이 계시다가 그만두고 가셨다. 각별히 악독한 것은 아니하는지 몰라도, 참에 대해 열심을 할 줄도 모르고 자기의 속이나 물건의 밑을 깊이 팔 줄도 모르던 나는 그저 평평범범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가르쳐주실 때 적은 것을 다음에도 오래 두고 보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선생님을 깊이 배우잔 생각을 하지고 못했다. 그러나 ‘삶’이라, ‘참’이라 하는 말은 잊지 못하게 되었다.그때부터 나는 ‘나’를 문제삼게 되었다.이때 오산 시절에 비로소 책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동문회에서 책을 사온 중에 톨스토이가 있었고, 투르게네프가 있었고, 입센, 괴테, 실러, 윌리엄 블레이크가 있었다. 니체도 있었고 베르그송이 있었다. 무엇을 이해했으랴마는, 이들의 이름을 지금도 기억하고 역시 나의 나되는 데에 모두 다 각각 끼쳐준 것이 있다. 그러고는 이때에 된 일로서 나의 인생관을 지어가는데 한 큰 영향을 준 것은 H. G. 웰스의 “세계문화사대계”를 본 것이다.
지금은 공군에 군의로 있는 박천규 형이 그때 한반이었는데, 그의 친척으로 일본에 유학하는 이의 소개로 인하여 그때 일본서 번역 출판된 그 책을 내 신분으로는 맞지도 않게 학비를 졸라 그깨 돈 25원을 주고 부쳐왔다. 무엇을 알고 산 것도 아니요, 그 책이 제1차 세계대전 후 나오자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혔다는 소문을 그때 듣고 산 것 아니요, 보고서 그의 말하는 참 뜻을 그때 알았을 리도 없다. 그러나 하여간 읽었고 모르면서도 이때껏 알지 못하던 커다란 인류적인 사상에 접촉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가 페비안협회의 회원이요, 세계국가주의자라는 것은 후에 동경 가서야 안 일이지만, 지금 내가 세게국가를 주장하는 사상은 그때에 그 영향을 받아 터가 잡히기 시작했다. 역사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된 것도 그의 영향, 진화론에 대해 좀 보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다. 일하여 그때는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정통적인 기독교 신앙에 만족 못하게 되는 원인이 거기서부터 놓여졌다.
무교회
1923년 봄에 나는 일본 동경에 갔다. 갈 때에 장래 무슨 공부를 하느냐 하는 데 대해 생각을 했다. 본래 취미가 비교적 여러가지여서 방향을 결정하는 데 좀 어려웠다. 그래서 가장 취미 적고 자신 없는 데서부터 떼버리기로 했다. 운동은 본래 못하니 체육은 문제될 것도 없고, 그 다음 법률은 천생 싫으니 법학 생각할 여지 없고, 수학은 하라면 할 수는 있을 듯하나 취미없고, 물리는 재미는 있으나 수학 싫은 사람이 될 수 없는 일이니 구만두고, 문학은 본래 글에 취미가 있다면 있는 편이고 어려서부터 글짓기에는 비교적 좋은 점수를 받았으니 하자면 할 수도 있으나 웬일 인지 그리 끌리지 않았다. 후에 남들은 내가 영문학을 한 줄 알아다 하는 이도 있지만 모르는 말이다. 문학 생각 별로 하지 않았다. 철학 생각은 했으나 그때 내 스스로 못났다는 느낌에 감히 전문할 생각을 못했다. 나 자신을 아무리 보아도 생각을 깊이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될 뿐이었다. 생각이 옅은 사람이 철학을 어찌 하나? 그래도 내가 사범을 들어갔으니 그랬지, 만일 대학 길로 나갔다면 역시 철학을 했을지 모른다.
예수는 믿었고, 그때는 교회에 대해 불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웬일인지 신학 할 생각은 해본 일도 없다. 목사 주에 내 속에 존경하는 맘을 일으켜준 이 별로 없었다. 가장 인상깊은 이는 처음에 나 자라던 교회 목사 노릇을 했던 김국주목사다. 주일이면 20리 밖에 있는 자기 집에서 당나귀를 타고 와서 예배를 보아주고 주곤 했는데, 그는 참 온순한 점잖고 말 적은 이였다. 인자해 뵈는 이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때는 미술이 차라리 취미가 있었다. 이제 생각해보아도 그림을 썩 잘 그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취미는 있어서 만세 후 이태 노는 동안에는 스케치장을 가지고 다녔고 미술 강의록을 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장래의 전문을 택할 때는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주되는 이유는 그때 내 딴의 생각으로 우리나라 형편에 그게 급한 것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때 만세 이후에 민중은 부쩍 깨기 시작했으므로 교육열이 높았다. 그것은 오늘의 소위 교육열보다는 훨씬 참된 것이었다. 또 한편 다가오는 일본 자본주의의 압박 앞에 이러다가는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을 뿐 아니라 민족적으로 온통 망해버린다는 불안이 사회에 넘치는 때였다. 그러므로 교육이 가장 급하단 생각에 사법 길을 택했다. 그래도 들어가 놓고는 거기가 학문적이 아닌 것 때문에 불만이어서 들어간 것을 후회도 해 보았다.
처음 한 해는 입학시험 준비로 지냈는데, 그때가 제일 괴로웠다. 이미 오산에서 혼의 눈을 뜨기 시작했으므로 속살림을 무시하고 시험준비라는 바쁜 생각에 지내자니 나 스스로 내 맘의 동산을 짓밟는 듯해 견딜 수 없었다. 그래 평생에 일기를 별로 못 쓰는 나도 그 시절만은 날마다 소감을 적었다. 나는 천성이 소위 공부꾼은 아니다. 물수건을 해가면 공부해가며 공부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무엇에나 뜨뜨미지지. 그래도 그것조차도 견딜 수가 없었다.그러는데 그해 9월 1일 동경대지진이 일어났다.인구 2백만 넘던 도시가 거의 다 타버리고 사람이 수십만이 죽고 우리나라 사람은 게다가 또 터무니없는 폭동 일으켰다는 혐의로 여러 천 명이 학살을 당했다. 죽지 않고 다행히 살아는 났고, 일생에 원해도 보기 드문 그 금찍한 꼴을 경험은 했지만, 크게 무슨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다. 일부러 태연을 꾸미자 해서도 아니었지만 유학생이 거의 다 돌아가도 나는 나오지도 않고 있었다. 평생에 감상적인 태도나 문구를 쓰는 일이 없던 아버지가 다 죽은 줄 알고 있다가 몇 주일이 지난 후에야 내 전보를 받고 몇 차례 편지를 하시며, 나중엔 “네가 석헌이로구나”할 터이니 어서 나오라는 것을 그냥 눌러 있었다. 시험지옥이라지만 시험은 지옥보다도 더한 것이다. 명년엔 꼭 입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아니었더라면 그렇게까지는 아니했을지도 모른다. 별로 크게 깊이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동양제일을 자랑하던 문명과 문명인의 한 까풀 밑에 얼마나 더러운, 잔혹한 짐승 같은 것이 있는지 인간이란 얼마나 악한, 하잘 것 없는 것인지, 더구나 정치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지가 불과 몇 분 동안에 청천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을 볼 때 참 허무하단 생각을 금치 못했다. 나도 신용 못할 물건, 너도 신용 못할 물건. 그러나 또 가지가지의 인정의 아름다운 빛도 드러났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닌가? 오늘의 문명과 정치와 종교도 설마하고 한 까풀 밑을 속이고 태연한 듯 앉아 천만 년 권세를 꿈꾸지만 하나님이 지층의 어느 조그만 구석만 조금 흔들어놓으면 무슨 꼴이 나올까? 다른 사람은 모를지 몰라도 이 나는 안다. 본 것이 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내가 내 속을 보면 어떤가? 이듬해에 동경 고등사범에 입학을 하고 나니 한숨이 후 나왔다. 이젠 생각해봐야지. 그때 소감으로 나 스스로 나는 빼빼 마른 사막길을 이때껏 걸어온 것 같다 했다. 그때 로맹 롤앙의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고,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 읽었다. 적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파우스트가 ‘요한복음’을 내놓고 고쳐 번역하며 읽으려 하던 장면이 생각이 나서 나도 ‘요한복음’을 고쳐 읽었다. 전에 못 본 새 책 같았다. 그래 붓을 들어 처음으로 유선생님께 편지를 올렸다. 그때 무슨 말을 썼던지 다 잊었으나 다만 한 마디, “원래 오산 있을 때 선생님 말씀을 자세히 들었을 것을 그랬다”는 말을 했다. 그랬더니 곧 선생님의 회답이 왔는데 그 내용 지금 또 다 잊었지만 요지는 “원래 원래...”원래라는 거 없다는 것이다. 그 전해에 우리 고향에 큰 홍수 있었는데, 그개의 그 참혹한 꼴,또 그대 미국 하딩 대통령이 게 통조림에 중독되어 죽었다는 사실, 그리고 동경 지진, 그런것들을 들으셔서 그 모든 것이 다 그때 늘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뜻의 내용이었다. 읽고 나니 나는 수박을 겉을 핥은 것이 아니라 불덩이를 통으로 삼키고 모르고 있구나, 내가 참 생각이 없구나, 어리석구나, 둔하구나, 겉먹고 스스로 속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성경을 고쳐 좀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데다가 우치무라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까지 유선생님이 소개해주신 것은 잊지 않았지만 우치무라가 살아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한 학교에 있는 김교신 형이 우치무라 모임에 나가는 줄을 알게 됐다. 그래 곧 그의 소개로 선생의 문하에 가게 되었다. 가니 그때 그는 매주일 예레미야 강의를 하는 때였다. 그때 인생문제와 민족문제가 한테 얽혀 맘에 결정을 못했던 나는 그 강의를 듣는 동안에 많이 풀린 것이 있고 참 믿음이 곧 애국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나는 한 시간 한 시간을 타산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주일이 오면 기차를 타고 몇시간을 서서 왕복하며 가서 한 시간이나마 성경 강의를 듣는 것이 나을까, 집에서 내 맘으로 책을 읽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일까? 헤아려보곤 하였다. 그래도 아니 가곤 못견디어 갔고, 갔다 오면 “오늘 가기를 잘 했지. 그 말씀 못 들었다면 어쩔 뻔했나?” 하는 것이 늘 되풀이되는 낌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이제야 바로 기독교 신앙이 무엇임을 알았다고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성경 연구회에 가는 우리 사람이 여섯이었다. 선생님의 말을 듣고는 나와서 우리끼리 모여 우리말로 성경을 읽고 기도를 철저치 못한 거도 나였는지 모른다. 그전엔 못 그랬던 나도 그들을 따라 밤을 새워가며 기도해 본 일도 있다. 선생님께 배워감에 따라 우리 맘속에는 차차 우리나라와 민족이 살길은 참 믿음에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엿새 동안에 다니는 학교의 공부보다 이 편이 차차 더 관심사가 되었다. 그래 선생 기분으로지만 여성 사람이 ‘성서조선’이라는 이름으로 잡지를 내게 됐고, 여름방학 때 나와 전도 강연을 한 일도 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교회에 덮어놓고 반대하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우리는 졸업을 하고 귀국하여 대개 학교에 교원으로 취직을 했고 ‘성서조선’은 처음에는 동인제로 하다가 나중엔 김교신이 혼자 맡고 글만 서로 같이 썼다. 우리는, 적어도 나는, 처음부터 교회에 가지 말잔 것은 아니었다. 방학때 집에 오면, 될수록 교회에 나갔다. 그러나 갔다가는 늘 실망했다. 조금도 심령의 소생하는 것이 없고 낡아빠지고 껍데기 돼버린 교회 형식만 되풀이하는 데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신앙은 첫째 자유여야 하는데 거기는 자유가 없다. 참이어야 하는데 형식이요, 수단적이다. 심령의 문제인데, 나와 하나님 사이는 직접적인 문제인데 항상 교회란 우상이 그 중간에 선다. 이것이 견딜 수 없어 더러 말을 하면 처음엔 독선이라 고답이라 하다가 그 다음엔 교회를 부인한다고 차차 멀리했다. 우리를 몰아친 이 중에서도 김인서 같은 이가 가장 심했다. 우치무라 선생이 돌아간 때에 ‘성서조선’지가 그를 슬퍼하는 글을 썼다하여 그는 우리를 민족정신이 없는 놈들로 공격을 했다. 그래도 해방 전까지는 무교회주의라는 비평은 하여도 아주 이단이란 딱지를 붙이지는 않았다. 해방 후 우치무라의 10주년 기념강연을 하고 난 후 아주 이단이라 규정을 짓고 장로파에서는 무교회주의자에게 교단을 절재 허락하지 말라고 통문을 돌렸다. 민족정신, 장로파의 특사로 자임하는 김인서씨는 그 피난 중데도 곳곳에 부흥회를 하며 개인의 이름을 불러가며 비평을 했고 어느 때 꿈을 꾸었는지 이제 우치무라 총독이 군림한다고 경고를 하며 돈키호테 같은 용맹을 뽐냈고, 카톨릭은 또 지난해에 싱거운 그 재탕을 돌렸다.이제라도 시골 순진한 신자에게 성경을 풀어 말해부면 “그렇게 성경 본문을 풀어 말씀하니 참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 적습니다.목사님들 설교한다지만 사실 성경은 풀지 않고 다른 말만 하는 걸요”하는 말을 종종 듣는데, 그러다가도 어느 목사가 가서 “그 사람들 무교회주의요,경계하시오” 하면 그만 태도가 달라진다. 서울 에서도 청년들은 그대로 무슨 들은 것이 있다고 말을 청하건만교회, 교회에서도 장로교, 장로교에서도 석조전을 지은 일류 교회에는 우리 같은 것은 기웃할 수도 없다. 그 안에는 청년이 없나, 청년이 아니 있으면 무엇이 있나?안에는 역사, 인생이 없나? 인생문제, 역사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나는 그런 종교에서 이단이란 말 들어서 영광일지언정 털끝만큼도 부끄럽게 알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
나는 학교에서 전공하는 것이 역사, 윤리, 교육이었으므로 그 방면의 책을 읽어감에 따라 종교를 차차 과학적인 자리에서 보게 되었다. 그림에 따라 기독교는 곁코 유일의 종교가 아니요, 종교 중의 하나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게 되었다. 동경게 있는 동안 처음에는 ‘기탄잘리’를 읽은 것이 시초가 되어 타고르의 책을 계속해 읽었다. 범신적이라 하지만, 나는 그것이 내 신앙하여 가는 데 아무 지장이 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좋았다. 타고르를 읽다가 간디를 읽게 되었다. 동경에 있을 때 한때는 인도에 갔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타고난 뜨뜨미지근 역시 그것을 잊은 것은 아니지만 두고두고 생각만 하고 실행은 못하게 했다. 그때 차라리 인도에 갔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때 아니 간 것이 내게 좋기 때문에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지 않았을 것이다.우치무라 선생의 영향으로 칼라일을 읽었다. ‘옷의 철학’은 몇번 읽었다. 그도 교회에 갇힌 이는 아니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에서 알게 되어 러스킨을 읽었다. 그도 교회주의는 아니지. 톨스토이는 전부터 읽는데 그는 물론 교회에서 파문을 맞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우치무라 선생도 십자가 신앙을 고조하느니만큼 톨스토이는 참 신앙이 아니라 했지만,나는 우치무라 선생을 전적으로 존경하면서도 그 점만은 불복이다. 또 선생의 소개로 슈바이처를 알고 읽게 됐는데 슈바이처는 결코 정통 신자는 아니다.오산에서 교사 노릇을 하는 동안에 동경서 받은 영향으로 무교회적인 독립 신앙의 입장에서 성경을 원문에 따라 연구해 보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역사는 줄곧 웰스의 문화적인 잘에서 보아왔고 과학에 충실하면서 옛신앙을 건질 수 있는 데까지 건져보자는 고등 비평학자의 정신을 따랐다. 그러게 성경을 보았다. 역사에서는 , 그때 한창 성한 공산주의 유물사관을 전혀 눈감고 아니라 할 수는 없어 알 대로 알아보려 애썼다. 그 결과 근본에서 틀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현실적인 면에서 어느 부분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단정했다.
‘성서조선’사건으로 서울 감옥에 있는 동안 불교 경전을 조금 읽었다. 감방 안에서 친란의 ‘교행신중’을 읽은 것이 인연이 되어 ‘무량수경’을 읽었고, ‘반야경’,‘법화경’,‘열반경’,‘금강경’ 등을 깊이 알지는 못하면서 혼자 읽었다.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와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온 후 늘 공부하면서도 감히 손을 못 대던 ‘노자’를 읽기 시작했다. 선생님도 없이 참고서도 없이 읽었으니, 읽었던들 변변히 읽었다 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속이 트이는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해방 후 38선을 넘어와 여러 해 만에 선생님을 뵈니 “뚫을 수록 곧고 바랄수록 높다”는 느낌이 있었다. 마음 공부 더 힘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난중에 해를 두고 이름만 듣고 보지 못한 ‘바가바드 기타’를 우연히 헌책집에서 발견했을 때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고 읽을 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졌다. ‘장자’를 읽기 시작했다. 점점 껍질이 좀 떨어지는 듯함을 느꼈다. 간디를 동경에서 읽고는 오산 시절에 연구해 보려 “청년인도”를 사다 놓고도 남으로 북으로 달리는 동안 못 일어났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장 참되게 실천한 사람은 그 이라는 생각뿐이다.
이렇게 오는 동안에 역사적 예수를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 속죄는 어떻게 해서 되느냐 하는 의심이 새롭게 일어났다. 그런 자세한 이야기를 여기다 할 필요도 없지만 내 딴으론 풀린 것이 조금 있고 전보다는 좀 더 널리 보이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다 하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 기분을 발표한 것이 “대선언”(내 부치는 말)이요, ‘흰손’이요,그 이후의 글들이다. 그러고 나면 가까운 신아의 친구들도 한때 의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교회에서 이단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는 생각은 케케묵은 생각이다. 허공에 길이 어디 따로 있을까? 끝없이 나아감, 한없이 올라감이 곧 길이지, 상대적인 존재인 이상 어차피 어느 한 길을 갈 터이요, 그것은 무한한 길의 한 길밖에 아니될 것이다. 나는 내 가는 길을 갈 뿐이지, 그 자체를 규정할 자격은 없다. 이단은 없다. 누구를 이단이라고 하는 맘이 바로 이단이란 유일의 이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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