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이단자가 되기까지 (1/2)
평범한 바탕
나는 내가 어떻게 이 세상에 나오게 됐는지, 어째 사는 것인지, 그런 것들을 퍽 크게 자라도록까지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옛날 중국의 장횡거는 네 살 때에 이미 “내 분 안의 일이 곧 우주 안의 일이요, 우주 안의 일이 곧 내 분 안의 일이다”했다 한다. 슈바이처도 네 살에, 밤에 어미니가 자리에 눕혀놓고 기도해주고 가는데 왜 자기를 위해서만 기도를 해주고 나무나 새를 위해서는 아니해줄까, 그것이 이상하여 어머니가 나간 후 다시 일어나 앉아 자기가 했다는 거며, 파브르도 네 살 때에 햇빛을 무엇으로 알게 되는지 의심이 나서 귀를 막아보고 입을 다물어보고 눈을 가리어보다가, 눈을 가릴 때야 해가 아니 뵈는 것을 보고 햇빛은 눈으로 들어오는 것을 알아냈다고 한다. 내가 본 것으로도 여섯 살 되는 아이가 인생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일본 동경 있을 때인데, 여관 주인의 아들이 그리 영특해 보이지조 않는데, 하루는 느닷없이 그 어머니보고 “엄마, 사람이란 어째 사는 거야?” 해서 듣던 사람이 놀랐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거나 엉큼한 생각을 하는 바탕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타고나기도 그런데다가 내 자란난 환경이 너무 순조로웠던 탓으로 더 그렇게 됐즌지도 모른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다 무식은 하나 건실한 상식의 사람들로서 부지런히 일하였으므로 가난은 하나 언제나 먹을것, 입을 것 걱정은 한 일 없었고, 아버지 어머니도 양심적인 분들이어서 우리 집 식구들은 언제 뉘게 염치에 어그러지는 행동을 하여 남의 부끄러움을 사거나 말썽거리가 되는 것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우리 집은 안으로는 화목하고 밖으로는 남의 신용과 고임을 받는 한개 건실한 평민의 가정이었다.
그 집에 나는 맏아들로 났으므로 귀염을 받아 잔잔한 바다를 달리듯이 소년 시절을 지냈다. 그래 그런지 우리 집을 마을에서 새집이라 불렀고, 나를 지방에서 첫아들을 부르는 풍속대로 애놈이라 애명을 불렀는데,그 ‘새집 애놈’은 말 잘 듣고 싸움 한 번 아니한단 말은 들었어도, 어떤 깊은 생각, 더구나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은 하려 하지도 않았다. 내게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장 어린 때의 기억으로는 너덧 살 되던 때 밤에 할머니 품에 안겨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잠이 아니 오는 때가 있었다. 그러면 깜깜한 가운데 천장에 여러 가지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꽃도 같고,불도 같고,물결도 같고 무슨 짐승도 같고, 수많은 눈도 같고, 가지가지의 형상이 번차례로 나타났다. 굉장히 넓은 세계가 있고 그것이 일시에 흘러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새 세계가 나오기도 하고 그 모양을 지금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는데, 그거는 반드시 무서움도 아닌 일종의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붙어 있다. 잊을 수 없었다.
그보다도 더 정말 잊혀지지 않는 것은 자다가 이따금 공연히 깨어 말로 할 수 없는 짜증이 나던 일이다. 까닭 모를 짜증이다. 무엇이 분한 듯도 하고 슬픈 듯도 하고 안타까운 듯도 하고 내 살을 스스로 꼬집고도 싶었다. 그래 자연 손발을 비꼬며 울었다. 울음을 내는 것도 아니고 비틀기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물론 어른들은 왜 그러느냔 책망하고 누른다. 그러나 지금 생각에도 그 몰라주던 맘은 답답하였다. 어디서 오 것임을 그때는 물론,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무슨 막연한 생각에 그때 무엇이 크게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그 맘을 좀더 알아서 풀어주는 이가 있었다면 내 혼은 어쩌면 좀더 크게 자랐을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러므로 지금도 어린애들이 까닭을 알 수 없이 우는 것을 보면 나 자신 같은 생각이 있고 두려운 맘이 든다. 한 위대한 혼의 아구가 트려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무슨 악마적인 것과 씨름을 하느라고 그러는지도 모른다.
진화론에서는 알 수 없는 무극선의 영향으로 돌연변화가 생겼으리라고 한다는데,사람의 한 마디 말, 한 손가락이 맴이 어린이에게는 일생이 무슨 영향이 되는지도 모른다. 우리 맘이 맑아 뚫려 비친다면 그런 것을 좀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을 한답시고 아이들보고 마구 욕을 하거나, 정치를 한답시고 민중을 함부로 덮어누르는 것은 무섭고 끔찍한 살인이다. 얼마나 많은 석가의 씨가 무지한 어머니 손에 망가지며, 얼마나 많은 예수의 싹이 잔인한 종교가의 발에 밟혀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보면 우리의 생명이란 길가의 풀같이 밝히다 겨우 남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러면서도 그것은 싸우는 존재다. 최후의 한 마리 병든 아메바 속에 오히려 무한한 새 세계의 가능성이 있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것을 믿음으로 산다. 이유,설명이 되거나 말거나 믿는다. 나는 믿고 또 믿으련다.
양심
나는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집에는 보통 하는 말의 의미로는 전혀 종교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사당도 물론 있었고 차례를 지내는데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절을 해본 기억은 있고, 조상의 묘를 잘 써야 집안이 흥한다는 이야기도 물론 들었다. 그것은 그때는 각별한 종교적 신앙이라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있는 한 개 인생관 정도였다. 어머니 등에 업혀 굿 구경을 갔던 기억이 두어 번 있으나, 우리집은 할머니도 어머니도 그런 것을 열심히 하는 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언제 남들이 하는 모양으로 귀신에 빌거나 절을 하거나 하는 것을 본 일이 없고, 물론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일년에 두 번, 가을 봄이면 동리에서 서낭님께 제사를 지냈다.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그 고기를 온 동리 집에서 타다가 먹는 것이었다. 그것을 높은 데라 불렀다. 그러나 벌써 그때만 해도 우리집은 물론이요 동리의 누구도 반드시 무슨 화복을 주장하는 실력이 있다고 꼭 확신을 해서 하는 것은 아니요, 그보다는 한 번 소를 잡아 그 고기를 나눠먹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본래 모든 제사나 예배가 먹고 배를 두드리며 좋아보자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 서낭님은 반드시 크게 존경을 받는 것은 아니었다. 늙은 나무가 몇 그루 서 있을 뿐이지 무슨 특별한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를 크게 거룩하게 알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래도 거기는 무엇이 있나 하는, 보통 곳과는 다른 감정이 좀 있었다.
아버지는 글 공부를 많이 하지는 않았으나 스물이 가까울 때까지 서당에 다녔으며,그 후 한의 공부를 한 이로서 대단히 이성적이면서도 착한 성격을 가졌었다. 누가 보든지 그 인상은 인자한 분이라는 것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퍽 예슬적인 천분을 가졌다 할 수 있다. 어디서 배운 것 아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손수 가구를 잘 짰고 아로새김을 한 것이 있었다. 나는 훗날에 그가 예술가가 됐더라면 하는 생각을 종종 해보았다. 어렸을 대 당신 이야기를 한 것 중에 내게 인상깊게 남은 것은 서당에 온 엿장수의 엿을 아이들이 빼앗아 먹던 이양기다. 하루는 그 바닷가 촌구석에 엿장수 할아버지가 왔다. 서당 아이들 중에 대가리 큰 놈들이 마침 훈장이 나간 짬이라 그 엿을 빼앗아 먹기로했다. 한 놈이 가서 “엿 삽시다.”미처 거기 대답을 하기도 전에 또 다른 놈이 “엿 삽시다.” 세 놈도 네 놈도 한꺼번에 달려들어 “엿 삽시다.”“엿 삽시다.”할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날개를 벌려 엿고리에 엎디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다. 엿은 어느 놈이 가져갔는지 알 수 없이 다 가져가고 고리는 텅 비었다. 엿을 빼앗아낸 큰 놈들은 이따가는 책임을 지게 될 것을 알므로 작은 아이들을 온통 다 모아놓고 한 조각씩 나눠주고는 먹으라 했다. 마치 오늘날 벼슬아치의 일과 비슷하다. “꿀 먹은 벙어리”라 “침 먹은 지네”라 하지만 먹은 놈은 말을 못한다. 오늘의 종교가, 문인이 말을 아니하는 것도 정치하는 큰 애들의 엿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먹는 것과 말하는 것을 한 입으로 하게 하고 썩어진 찌끼 나가는 것과 생명의 씨 넣는 것을 또 한곳으로 하게 만든 것은 깊은 뜻이 있는 듯하다. 뒤를 깨끗이 해야 앞날이 있으며 낳기를 잘못하면 썩어지는 것이요, 말은 바르게 해야 살길이 있으며, 먹기를 잘못하면 말할 자격이 없단 말인가? 하여간 그날의 서당 애들도 벌써 그 인생 철학을 알아 저희 먹고 남은 부스러기를 약자들에게 나눠주고 제 잘못을 가리어비리려고 했다. 세상에 권력 쥔 놈들처럼비겁한 것은 없다. 어린것들은 물론 대개 주는 대로 받았다. 엿을 주는 데 아니 받을 리가 있나?
“금세 먹기에 곶감이 제일이지.”
그래서 아버지도 받기는 받았다. 아니 받으면 큰 놈들이 때릴 줄을 아니, 아니 받을 수 없지. 그러나 그는 먹을 수 없더라는 것이다. 세상에는 가져다주는 엿을 못 받아먹는 겁쟁이가 있다. 그러나 그 겁쟁이와 욕심엔 혼자 다 먹긴 고사하고 어린애 손에 든 것까지 빼앗아먹고 싶으면서도 선심이나 쓰는 듯 제 먹던 부스러기나마도 나눠주는 착하지 않고는 못견디는 겁쟁이와, 누가 정말 참 겁쟁인가? 아버지는 엿을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생각하니 집에 가도 걱정을 들을 것 같아 엿을 손에 쥔 채 길 옆의 수수밭에 들어갔다. 먹지는 않았지만 서당 애들이 엿장수 할아버지의 엿을 빼앗아 먹었다는 것은 드러내놓은 사실이니 자기만 아니하였다는 말을 할 용기도 없어서였다. 그러는 동안 해는 지고 엿은 손에서 녹고 집에서는 아버지 어머니가 남의 아이들은 다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아이가 아니온다고 그 수수밭 고랑 앞을 몇 번을 오가며 “야,형택아,형택아!”부른다. 나가야 할 줄 알면서도 나가지 못하고, 그때의 생각이 “지금도 아니 잊힌다”고 하면서 마흔은 더 넘은 때에 이야기를 하였다. 그 엿이 그 다음 어찌 됐는지,수수밭 고랑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나와서 뭐라고 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도 또 40년이 되어오는 오늘까지 잊지 못하고 내 손에 혹시 그 엿이 있기나 한 듯 들여다본다. 그러면서도 그는 종교적은 아닌 듯했다. 남들이 다하는 그 시절이건만 그는 아무 미신적인 것을 믿지 않고 “그런 거 어디 있나”하고 반대했다. 일생이 점은 꼭 두 번 치러 갔노라고 했다.
한 번은 할아버지가 병이 위독해 꼭 돌아가실 듯하게 됐던 때, 또 한 번은 내가 어려서 부종으론가 죽게 됐던 때다. 어머니는 쉰이 지나 예수를 믿게 되고 국문을 배워 성경을 곧잘 보았지만 젊어서는 글자 하나도 모르는 이였다. 그러나 사리 판단에는 밝았고, 우리들을 한 번도 때린 기억이 내게는 없다. 내 아래 누이동생이 두살 아래로 났으므로 나를 젖 오래 먹이지 못한 것이 한이라 두고두고 이야기를 했다. 누에를 쳐서 명주짜기를 일흔이 넘도록 30년 변함없이 하여 나를 손수 짜 입혔고, 우리 집 명주는 남이 보고 알아볼 만큼 씨가 먹었었다. 내가 감옥에 갔었던 때는 겨울날 얼마나 추울까 하는 생각에 당신도 얼음 어는 밤에 밖에 나가 밤을 지내봤노라는 것이며, 잠이 아니 와서 밤새 물레질을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몇 살 때인지 가을철 늦게 외밭에 남아 있는 외를 보아두고 자라거든 따먹으리라 했는데 누이동생이 어느새 먼저 따먹었다. 나는 내가 아들이요, 그것은 계집애이므로 으레 내게 특권이 있지 감히 제가 손을 대려니 생각을 아니했던 터이므로 시비를 걸었다. 우리 집 형제가 다 그리 둔하지 않아서 남한테 꿀리는 것이 없었는데,그 동생만은 좀 둔하므로 평소에 어머니도 좀 불만해하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그를 업신여기는 것을 보고는 “예,그건 사람아니냐? 입이야 마찬가지지”했다. 그 말은 그만 내 가슴에 칼처럼 쩔렸다! 그런 집안에서 자라 그랬는지 양심의 자연의 법칙에 인해 그랬는지 우리는 별로 큰 소리를 내어 뜰 밖에 나가게 한 일이 없이 자랐고 어른의 명령에는 무조건 순종하는 것으로 의식도 못하게 알고있다.
기독교의 접촉
동리의 서쪽에 있는 성망재를 올라가면 서해 바다로 면한 골짜기에 절골이라는 데가 있어, 그 옛날엔 거기도 절이 있었던 것을 알았으나 절이 어떤 것인지, 부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절은 거기서 50리나 되는 용골산에를 가야 있었고 그것을 처음 본 것은 열세 살 때였다. 중이 이 따금 동냥을 온대야 알 수 없는 염불을 하다가 살줌이나 얻어가지고 가는 것을 볼 뿐이다, 뒤를 따라가며 “중 중 까까중,대패루 밀어 중”하는 것뿐이므로 불교에대해 존경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있을 여지가 없었다. 내가 여섯이나 일곱이 됐을 때 기독교가 동리 안에 처음 들어왔다. 그것을 끌어들인 것은 훗날에 목사가 되고 해방 후 공산당한테 끌려가 거처를 모르게 된 석규 형이었다. 그때 우리 집안에서는 일형 아자씨가 먼저 깬 생각을 가졌던 탓으로 남들은 신학문이요 공부요 꿈도 아니 꾸는 때에 두 청년이 서울 유학을 했다. 하나는 석규 형이요, 또하나는 나의 당숙이 되는 세택이라는 이다. 둘이 다 배재학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세택 아저씨는 이제 와서 아니호열자에 걸려 죽었다. 그는 외아들이었으므로 우리 집안이 온통 모여 울던 생각이 난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상한 것은, 내가 다섯 살엔가 천자 배우기를 시작했는데, 누가 가르쳤는지 도무지 기억이 없고, 다만 그가 어느때 서울서 내려와 우리 집에 인사를 왔다가 내게 한 페이지 가르쳐 주던 것만이 기억된다. 그런데 은촉희황이란 구가 그때 뜻은 도무지 모르는데 왜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던진 지금까지 그 감정은 남아 있어 때때로 생각이 나면 그 옛날에 다시 돌아간듯한 느낌이 있다. 그는 그것 하나 때문에 세상에 왔던가, 그렇게 생가해본 때도 있다. 까닭모를 슬품에 주고 가는 사람, 제가 청춘에 죽을 줄 안 것도 아닐 것이고, 내게 그 슬품을 주는 줄 알지도 못했을 것인데, 이런 따위는 다 무슨 뜻이 있을까. 뜻 없다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다. 그때의 슬픔은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일종 마음을 씻어주는 작용을 한다. 석규 형이 어떻게 기독교를 믿게 됐는지 그것은 듣지 못했으나 그때의 용천 양시에 교회가 벌써 섰고, 우리에게서 20리 되는 덕천김씨네 동리에 섰는데, 석규 형이 주장이 되어 사점에도 서게 되었다. 서당에는 아직도 오르기 전인데 어느 날 거기를 가서 예배하는 것을 처음으로 보았고 여름이면 그 마당 앞 큰 들매나무 아래 흰포장을 쳐서 남회, 여회를 갈라놓고, 그때 처음 보는 양등불을 켜고 예배를 하곤 하던 광경이 생각난다. 처음으로 들은 찬송가는 “예수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들으니 그 책귀에 약을 발랐기 때문에 손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노라면 취해서 믿게 된다 했고, 기도를 한다고 두 손을 걸어 이마에 대고 엎디어 “하나님 아버지시여” 하며 “아멘” 하던 것이 더욱 이상해보였다.
우리 집에서는 믿지도 않았지만 별로 반대도 아니했다. 우리 문중에서도 여러 집이 믿었는데 우리 집에서는 아니 믿었다. 그들이 많이 이지적인 성격 때문이 아닌가 한다. 교회에서는 특별히 아버지를 꼭 믿게 해야 한다고 “저 의원이 꼭 나와야 하는데”하며 권하곤 했으나 아버지는 부동이었다. 가분가분하는 이가 아닌 줄 알므로 목사 형도 아버지를 보고는 쉽게 권하지 않았다. 머리도 남은 다 깎았는데 늦도록 아니 깎았다. 훗날에 머리도 깎고 믿게도 됐지만 그것은 자기가 생각해서 한 것이지 남의 원에 따라 된 것이 아니었다. 머리를 먼저 깎고 먼저 개명하고 먼저 믿었던 사람들이 얼마못가 칠령팔락이 됐는데 아버지는 시작을 한 다음에는 허투로 하지는 않았다. 나는 말년에는 아버지를 마음으로 존경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자 학교가 곧 기독교 학교로 되어버렸으므로 자연 믿게 되었다. 아버지는 당신은 아니 믿으면서도 우리보고는 믿는 것이 좋다 했고, 처음으로 국한문 성경을 샀을 때 그 덮개를 하얀 종이로 두텁게 바른 후 연두색 선을 곱게 둘러주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해도 참 솔직히 믿었다. 물론 믿음의 뜻을 알 리는 없고 그저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을 뿐이다. 다른 아이들은 기도할 때 눈뜨고 장난도 했으나 나는 한 번도 못 떠보았다. 그러나 여름밤 예배 시간에 졸음이 오는 데는 참 곤란하였다. 그래서 기도하자면 참 반가웠다. 엎디어 맘 놓고 잘 생각에.
언젠가 사경회를 했는데, 다들 회개한다고 울고불고 하는데 나는 눈물이 도무지 나오지 않아서 거북했다. 그때 가슴에 압박을 느끼던것을 지급도 못 잊는다. 그런데도 석규 형은 나를 잘 믿는다고 각별히 사랑했고, 보통 열두 살에야 서는 학습을 나는 아홉 살에 세웠다. 그러나 세례는 집안이 다 믿어야 주는 법이라 우리 집에서는 종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종내 받지 못했다. 교회 신자는 못 되도록 하나님이 마련했던가 보다. 집안 감화를 시키라고 학교에서 명령하는데, 그것은 참 딱했다. 아버지는 본래 조금도 엄하게는 아니하건만 늘 어려워 감히 말도 못했다. 내가 맏아들이건만 언제 안아나 업어준 기억이 없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아마 서른이나 된 때의 얼굴이다. 그러니 아버지보고 감히 “예수 믿읍시다” 말은 나갈 형편도 못된다.
그러나 전도는 해야 했다. 생각한 끝에 그들 듣는 데서 성경을 읽기로 했다. 그래 성경 중에 제일 무섭다고 생각되는 요한계시록에 지옥의 유활불과 황충이 있다는 대목을 들어라 하고 큰 소리로 읽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다. 훗날 이야기지만, 그 아버지, 어머니가 내가 동경서 졸업하고 나올 무렵에 자진 교회에 나갔다. 그때는 용암포 부근으로 이사를 간때라 우리 사는 지방이 특히 미신이 많았으므로 그것을 깨워주기위하여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나중엔 장로가 됐었다. 어느 날 내 아들놈이 교회에 가라는 할아버지에게 응석을 하노라고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했을 때 아버지는 “이 자식아,네가 무엇을 아느냐? 나는 몰라도 공부도 한 네 애비가 믿기에 나도 믿느다”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을 때 눈물이 적은 내 눈도 그저 있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믿지는 않아도 내게는 아버지가 지옥을 가려니 하는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가 아무 죄 없는 사람임을 나는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문제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귀신은 섬기지 말아야 한다는데 압지나 어머니가 언제 귀신에 절하는 것은보지 못했으나 아버지 있는 사랑방에 나가면 거기 의업의 신을 사귀어둔 것이라는 그릇이 있고 그 안에 엽전 토리개가 있다. 그것을 없애버려야겠는데 아버지보고 말할 용기는 없고 그래도 어떤 일을 하든지 나를 벌하지는 않으리라는 자신에 그것을 몰래 훔쳐냈다. 버리기는 아깝고 내가 쓸 수도 없고 어디 둘 곳도 없고 몸에 지니고 며칠을 다니며 생각을 했다. 그러나 하루는 낮에 잠이 들었다가 어머니한테 들켰다. 별 책망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때 기독교는 요새처럼 맥빠진 사이다가 아니었다. 믿는 사람도 진지한 태도요, 반대도 많았다. 그러므로 믿으려면 핍박당할 각오를 하는 것이었다. 주일날은 어른을 만나도 절을 해서는 아니되었다. 제사 음식은 물론 먹어서는 아니되고 피도 먹어서는 안된다. 주일지키는 데 관해 이런 일이 한 번 있었다. 열두 살 때인데 아버지와 같이 외가에를 가게 됐다. 외가는 믿지도 않고 믿는 것을 비웃는 집안이었다.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주일날 오자는 것이었다. 내게는 큰 문제다. 내 맘을 아는 아버지는 미리 말하여, 가다가 용암포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보고 가게 할 것이니 가자고 하였다. 나는 약속을 믿고 떠났다. 그러나 용암포에 오자 일은 예기했던 것같지 않아 교회에 가지 못하고 그냥 왔다. 오자니 집에 가까이 올수록 불안스러워 견딜 수 없다. 교회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나 걱정이었다. 석규 형을 만날 때는 참 무서웠다. 물론 그도 아무 말은 없었고 나도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잘못이라는 생각은 아니했다. 그러나 그 후 여러 해를 두고 그 불안은 없어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해 본 한 가지 기억이 있다. 열인지 열하나 땐지,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이 그만두고 가게 되어 아침 일찍 전송을 나가게 됐다. 한 5리나 갔다 돌아오는데 어찌 돼 그랬던지 어른들도 다 돌아갔는데 나보다 서너 살 아래로 보이는 아이가 하나 떨어져 가지를 못하고 있었다. 단 둘이만 남았는데 물은즉 배가 고파 못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래 업어다 주기로 했다. 그 애의 집까지 업어다 주고는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내 생각에도 착한 일로 알았다. 그러나 성경에 착한 일을 할 때는 남 몰래하라고 한 것이 기억났다. 그래 집에 와서도 아무에게조 그런 말은 아니했다. 며칠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누이가 새우를 한 바가지 놓고 그 수염을 다듬으며 “너 이거 누가 가져왔는지 알어?”한다. 나는 “몰라”대답했다. “너 시례게 무슨 일 있지.”나는 속으로 “그만 알려졌구나”했다. 기쁘고도 부끄러웠다. 누이는 “이거 학순네가 가져왔는데...”하고 그애 어머니가 와서 치하하더란 말을 하였다. 학순이란 그애 아버지요, 고기잡이를 하는데 게으름쟁이로 또 가난하기로 그 동리에서 유명했고 그 아내는 늘 허리를 한 발이나 빠지게 시커먼 옷을 주르르 끌고 다니고 욕 잘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다 자라서 스물이 넘은 뒤에도 그 사례는 나를 보면 각별하게 대해 주었다.
그때 배운 성경은 깊은 뜻을 안 것은 아니나 역시 인상이 깊고 지금껏 힘이 됐다고 믿는다. 산상수훈이 가장 기억되고 창세기 처음이 잊혀지지 않는다. 천지를 하나님이 창조했다는데 천지 있기전은 무엇이 있었을까? 그것은 허공일 거다 대답을 했는데 허공도 전엔 무엇일까? 그것은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어서 좀 하다가 말았다. 나는 역시 깊은 생각을 해도 알 수가 없어서 좀 하다가 말았다. 나는 역시 깊은 생각의 사람이 못된다. 그러고는 가르치는 선생이 우리보다 조금 위밖에 아니돼서 그랬겠지만 아담이 그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 데서 그 동침이란 것을 설명하기가 좀 거북해하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 나는 아직 성에 관한 분명한 지식은 없는 때였지만 역시 말로 해서는 아니되는 무엇이 있는것은 막연히 알았다. 그로 인해 생각되는 것은 성경을 카톨릭 모양으로 아주 제한해버리는 것도 문제지만 역시 어린이에게는 그냥 마구 개방해서는 바로 이해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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