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 순간에서 영원으로 - 실비파탱
제5장 너무도 멋진 곳, 지베르니
1883년 알리스 오슈데와 아이들을 데리고 지베르니를 정착한 직후, 모네는 마네가 4월 30일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했다. 12월이 되자 모네는 르누아르와 더불어 난생 처음 지중해 해안으로 향했다. 엑상프로방스에 있던 세잔을 만난 두 화가는 걸음을 재촉하여 이탈리아 내륙으로 들어가 제노바까지 여행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모네는 이탈리아 국경 근처 보르디게라 바로 위에 있는 리비에라로 가 석 달을 머물렀다.
"보르디게라는 우리가 여행하면서 본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입니다. 저는 새로운 풍경을 소재로 한 연작을 다시 그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여행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혼자 진행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만의 느낌에 몰입해 고독하게 작업할 때 일이 잘 됩니다." (1884년 1월 12일. 뒤랑뤼엘에게 보낸 편지)
온화한 기후와 풍부한 열대식물로 유명한 보르디게라를 본 모네는 '지상의 낙원'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오렌지며 레몬나무, 야자수, 멋들어진 올리브 나무밑으로 정처 없이 돌아다닐 수 있소. 저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는 오렌지며 레몬나무들을 그려 보고 싶소. 바다와 하늘의 푸르름을 따로 설명할 길이 없구려." (1884년 1월 26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이 지방의 광선과 대기를 전달하기 위해 모네는 자주 쓰지 않던 색조를 사용했는데, 자신의 이탈리아 체류를 정리하는 한 편지는 뒤랑뤼엘에게 이 점을 예고한다.
"푸른 색이나 분홍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비웃을지 몰라도, 풍경 그자체가 정확히 그러한 화사함과 신비한 햇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포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든 풍경이 비둘기 가슴색이나 선명한 펀치색입니다. 저는 날마다 아름다운 이곳에 완전히 홀려 있습니다." (1884년 3월 11일)
"흰 절벽, 하얀 자갈 해변, 푸른 바다가 있는 에트르타, 초승달처럼 둥근 작은 마을이 햇살아래 펼쳐졌다." (모파상, <르 모델>, 1883년)
1883년에서 1886년 사이 모네는 르아브르 북쪽에 있는 에트르타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곤 했다. 그곳의 하늘과 바다뿐 아니라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이 그를 끌어당겼던 게 분명하다. 역시 이곳을 자주 찾은 방문객으로 기 드 모파상이 있는데, 그의 소설 상당수가 이곳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파상은 모네의 에트르타 찬양에 공감했고, 그곳에서 몇 번 만난 두 사람이 낸 같은 시기 작품에는 강한 연계성이 보인다. 쿠르베와 부댕처럼 모네는 다몽항, 아몽항. 아발항의 기암석을 그렸고 가끔 에귀유의 뾰족 바위도 그렸다.
"당신은 바다의 아름다움을 모를꺼요. 어디서 이곳의 절벽을 또 보겠소." (1883년 2월 3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1886년 봄: 네덜란드에서 보낸 며칠
모네는 레이덴과 하를렘 사이에 펼쳐진 튤립 벌판에 매료되었고, 그 벌판을 그린 다섯 점의 그림을 집으로 가지고 와 지베르니의 스튜디오에서 완성시켰다. 이 그림들은 하늘을 다소 밝게 처리하면서도 상당히 넓은 공간을 주고 있어 벌판에 압도당하지 않는 네덜란드 지평선의 광활함을 보여준다.1886년 6월 15일, 조르주 프티화랑에서 열린 제5회 국제 그림.조각전에 이중 두 점이 선보였고, 후이스망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모네가 그린 네덜란드의 튤립 벌판은 압도적입니다! 참으로 눈을 즐겁게 합니다." (1886년 6월 28일, 오딜롱 르동에게 보낸 편지)
한편, 모네는 베르테 모리소에게 이렇게 알렸다. "출품작 모두 훌륭한 분들에게 고가로 팔렸습니다."
구매자 모색
뒤랑 뤼엘의 재정상태가 악화되면서 모네는 자신의 거래상과 손을 끊고 구매자들에게 직접 그림을 파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걱정이 되었지만 결국 이렇게 털어놓았다.
"당신 덕분에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구매자를 찾아 나선다는 건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입니다." (1884년 5월 18일, 뒤랑 뤼엘에게 보낸 편지)
작품을 처분하려는 생각으로 모네는 조르주 프티가 매년 주최하는 국제전에 몇 차례 참여했다. 그는 뒤랑 뤼엘에게, 경쟁자인 조르주 프티가 잘되면 그 역시 이익일 것이라고 힘들여 설득했다. 그 결과 모네는 두 미술상에게 작품을 나누어 팔게 되었다. 일례로, 브뤼셀의 화가집단이 개최한 1886년 전시회에 출품된 모네의 작품들은 프티와 뒤랑 뤼엘에게 똑같이 분배되었다. 뒤랑 뤼엘이 자신을 돕는 셈치고 미국 쪽을 공략해 보자고 제안했을 때 모네는 1886년 1월23일 조심스런 답장을 보냈다. "당신이 미국에 거는 희망에느 공감합니다만, 저로서는 우선 이곳에서 제 그림을 알리고 파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1886년 뉴욕에서 개최된 '파리 인상파의 유화와 파스텔전'에는 모네의 그림이 40점이나 전시되었다. 미국 화가인 메리 캐삿과 존 싱어 사전트의 도움으로 이 전시회는 대 성공을 거두었다.
"바다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바위들은 신비한 동굴, 대못, 바늘이 한테 엉킨 형상을 하고 있소." (1886년 9월 18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브르타뉴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고 베르테 모리소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털어놓은 적이 있던 모네는 1886년 가을 모르비앙만의 벨일섬을 여행했다. 그때 그는 섬 서쪽 케르빌라우앙이란 마을의 한 어부집에서 묵었는데, 그 곳은 바다와 면한 살풍경한 곳이었다. 그 풍경에 자극받은 그는 40점 가량을 그렸고, 이들은 장소와 기상상태에 따라 몇 개 부류로 나뉜다. 그림 하나하나마다 모네의 관찰각도가 다르기 때문에 이 그림들을 연작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마음은 연작을 제작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진정한 바다의 모습을 화면에 담기 위해서는 매일 한 번도 빼지 않고 매순간 같은 장소에서 바다를 관찰해야 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래서 같은 소재를 네 번 혹은 여섯 번 이상 그릴 때도 있소." (10월 30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브르타뉴에서 보낸 동안 모네는, 아직 본능적이고 비체게적이긴 했지만 소재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식을 시험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 방식은 훗날 한결 조직적인 절차를 거쳐 발전한다. 벨일에서 모네는 귀스타브 제프루아를 만났다. 그는 정치가 조르주 클레망소의 진보적 신문 <<정의>>에서 일하는 미술평론가였다. 모네의 절친한 친구이자 열렬한 지지자가 된 제프루아는, 극심한 태풍속에서 이젤을 절벽에 묶어 두고 작업하던 모네의 모습을 회고 하기도 했다. 모네는 EH 작가인 옥타브 미르보의 방문을 받았다.
"거친 벨일을 다녀와서인지 이번 작업은 상당히 수월할 것 같습니다. 이곳엔 오직 푸른 색과 분홍색, 황금색밖에 없습니다." ( 1888년 3월 10일, 뒤레에게 보낸 편지)
모네는 1888년 정월을 지중해안에서 보냈다. 그는 칸에서 모파상을 만났는데, 모파상은 그에게 앙티브에 있는 샤토 드 라피네드에 묵으라고 권했다. 그곳은 화가들이 애용하는 호텔로 풍경화가인 앙리 조제프 아르피니예도 머물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곳에서 모네는 30점 가량을 그렸다.
"저는 울타리를 치고 태양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금은 보석으로 그림을 그려야 할 판입니다." (1888년 2월 1일, 로댕에게 보낸 편지)
이 이미지는 이미 보르디게라에서 시도한 것이었다, 때때로 그는 같은 소재를 한 번 이상 그릴 때도 있었지만 아직 진정한 의미의 연작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6월들어 모네는 테오 반 고흐에게 열 점을 팔았다. 그는 빈센트 반 고흐의 동생으로 부소와 발라동 화랑에서 일하고 있었다. 테오가 모네의 그림들을 전시하자 저널리스트인 펠릭스 페네옹은 <르뷔 앵테팡당트>지에 "열 점의 앙티브 바다풍경이 부소와 발라동 화랑 부속 쇼룸에서 전시되고 있다."고 썼다. 당시 신인상파론에 경도되어 있던 페네옹과 피사로는 이 전시회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지 몰라도, 모파상, 말라르메, 제프루아는 격찬을 보냈다. 베르테 모리소는 모네에게 편지를 띄워 그 충격을 이렇게 전했다. "당신은 대중을 완전히 사로잡았습니다. 정말 대단한 외고집입니다. 전시회를 관람한 사람들은 감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새로운 구매자에게 작품을 팔 수 있게 되자 힘을 얻은 모네는 5월 25일 뒤랑 뤼엘의 파리 화랑에서 열린 단체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이때까지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미국에 선전하려는 뒤랑 뤼엘의 시도에 반대하고 있었다.
크뢰즈 계곡
"여기서도 새로운 풍경을 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참으로 거칠고 웅대한 이곳은 벨일을 연상시킵니다. 저는 놀라운 작품을 꿈꿨지만 작업이 진행될수록 장애물이 늘어 마음먹은 대로 전달하기 힘듭니다."(1889년 4월 8일, 모리소에게 보낸 편지)
프랑스 서부 크뢰즈강에서 영감을 얻은 20점의 기묘한 그림들 역시 지난번처럼 두세부류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 중 아홉 점에서는 전보다 훨씬 더 두드러진 조화를 엿볼 수 있다. 베퇴유의 부빙, 네덜란드의 튤립 벌판, 벨일과 앙티브의 바다풍경화를 거치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어진 소재를 공통된 접근법으로 대하는 방식이 점차 발전되었고, 마침내 크뢰즈계곡을 그린 이 아홉 점의작품에 이르러 연작물이란 개념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한 대상을 거의 동일한 시점에서 바라보며 그린 변형판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 그리고 빛의 변화만이 각 작품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 아홉 점의 풍경화야말로 연작물이라 부를 만한 것이었는데, 그 용어는 모네 자신이 먼저 사용했다.
모네의 <크뢰즈의 계곡, 구름이 낀 날 Valley of the Creuse, Cloudy Day>, 1889, 유화
"이 무섭도록 음울한 날씨속에서. 내 그림들을 보면 소름이 끼치오. 그림들은 너무도 어둡소. 게다가 어떤 것에는 하늘도 등장하지 않소. 그림들은 애처로운 연작물이 될 것같소." (1889년 4월 4일,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제프루아에게 보낸 4월 24일 편지에서 모네는, 계절이 이 풍경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주고 있다고 토로했다. "끊임없이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자연을 따를 수는 있지만 따라잡지는 못하겠습니다. 게다가 강물의 수위가 들쭉날쭉해 하루는 초록인가 하면 다음날에는 갑자기 노란 빛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에는 물이 거의 말라 버렸다가도 이튿날 금세 맹렬한 급류가 되어 흐릅니다." 4월 21일, 그는 조르주 프티에게 이렇게 썼다.
"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적절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입니다."
이 무렵 모네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품과 그의 작품을 나란히 선보일 파리 전시회였다.
"그들은 회화와 조각이라는 쌍둥이 예술을 이 나라에서 가장 찬란하고, 확실하게 구현해 온 사람들이아" (옥타브 미르보, <<파리 에코>>, 1889년 6월 25일)
로댕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모네는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 예술가와 공동 전시회를 열고 싶어했다. 1889년 2월 28일, 그는 로댕에게 이렇게 썼다. "선생과 저 둘이서 힘을 모으면 멋진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달로그에는 모네의 작품이 145점, 로댕의 작품이 36점 실렸다. 모네를 위한 서문에는 미르보의 서명이 실려 있고 로댕의 소개는 귀스타브 제프루아가 맡았다. 로댕은 이번 전시회에서 처음 선보인 군상 <칼레의 시민>에 특히 신경을 썼고, 1864-1889년에 제작한 자신의 대표작들을 내놓은 모네는 이 전시회가 지난 25년 동안의 작업을 회고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칼레의 시민 - 로뎅
제프루아는 1889년 6월 21일 <정의>에 "이 전시회는 클로드 모네의 화가로서의 삶을 담은 이력서이다." 라고 썼다. 일부에서 혹평도 있었지만 언론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전시회가 열렸던 6월 21일, 모네는 조르주 프티에게 이렇게 썼다.
"로댕의 군상들이 죽 늘어서는 바람에 뒤에 있던 제 그림들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불운이었고, 저는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공동전시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면 각자의 작품을 어디에 놓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의논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사실을 로댕은 알고 있었어야만합니다. 나와 의논하고 내 작품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 주었다면, 서로 마음 상하는 일없이 배열하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였을텐데, 이제 제가 바라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지베르니로 돌아가 평온을 되찾고 싶을 뿐입니다."
위대한 예술적 재능을 갖춘 두 거장의 공개적 다툼은 가까스로 무마되었다.
마네의 <올랭피아>
1889년 5월에 개막된 프랑스 미술 100년제에 모네의 작품 석 점이 선보였다. 그때 같이 전시된 그림이 바로 1865년 살롱전에서 큰 소동을 불러일으켰던 마네의<올랭피아>였다. 모네는 이 그림을 구입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하기 위해 마네의 친구들에게 돈을 거두었다. "이는 경의의 표현인 동시에 그림의 소유자인 그의 아내를 도울 수 있는 사려깊은 행동이기도 합니다." 모네는 1889년 10월 25일 로댕에게 자신의 입장을 전했다. 켐페인은 예술부 장관을 지낸 앙토냉 프루스트의 반대에 부딫혔다. 1890년 1월 22일, 모네는 모리소에게 이렇게 썼다. "프루스트란 작자는 바보 멍청이입니다. 그자에게 편지를 써서 그렇게 말해 줄 겁니다. 그리고 전쟁이 선포되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겁니다." 결국 모네는 정부에 압력을 가해 뤽상부르 박물관에 <올랭피아>를 전시하는 데 성공했다. <올랭피아>는 1907년에야 조르주 클레망소의 중재로 루브르로 옮겨졌다.
올랭피아 - 마네
모네는 다시 이젤 앞으로 돌아왔다. 1890년 7월 11일, 그는 모리소에게 " 이 악마적인 그림<올랭피아> 때문에 고생이 막심합니다. 제가 그만큼 기대가 큰 모양입니다. 결국 그 때문에 아무 일도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라고 썼다. "저는 지베르니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여행중에도 모네는 오직 지베르니와 그 정원, 아들 장과 미셸, 연인 알리스, 그리고 오슈데의 아이들을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 전원에서의 내 생활을다시 찾고 싶소.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면 정말 좋을 것같소." (1884년 2월 12일, 보르디게라에서 알리스에게 보낸 편지)
모네-로댕 공동전시회 카탈로그를 작성할 당시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그린 넉 점을 묶어 '야외인물 스케치'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림들은 오슈데의 딸들을 그린것이었는데, 그는 1890년 7월 11일 모리소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아이들을 '내 어여쁜 모델들'이라 불렀다. 옥타브 미르보가 '아름다운 지베르니의 인물화'라고 묘사한 이 그림들은, 모네가 사생활과 작업을 접합하여 창조한 자신만의 이상적인 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이것을 인위적인 기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산 예술임을 간파한 미르보는, 카탈로그 서문에서 그의 가정적 행복을 특히 강조하며 이렇게 평가했다. "인간의 의지를 좀먹고 용기를 파괴하는 열병, 아귀다툼, 계략으로 가득 찬 파리는, 모네와 같은 우직한 정관자, 사물에 내재한 생명과 자신의 위대한 열정을 상통시키는 자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시골에서 살며 야외는 그의 스튜디오이다. 소문도, 동인이나 심사위원도, 미학도, 볼썽사나운 질투도 없는 바로 그곳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그리고 가장 주목할 만한-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저는 지금 각기 다른 효과를 내는 연작물에 끈질기게 매달려 있습니다. 일이 진행되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제가 바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한층 더 열심히 작업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설픈 솜씨로는 될 성싶지 않습니다. 제 느낌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점점 더 많이 느낍니다. 그리고 너무 무력해지지 않고 좀더 오래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직 진보를 이루었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89년 10월 7일, 귀스타브 제프루아에게 보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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