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 순간에서 영원으로 - 실비파탱
제4장 센 강변의 아름다운 마을, 베퇴유
파리 서북쪽, 센 강둑에 위치한 베퇴유의 경관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마을보다 약간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숲이 우거진 섬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는 센강의 만곡부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모네는 교회를 둘러써고 모여 있는 집들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빛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동일한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포착하고자 끝없이 노력했던 것을 보면, 모네가 자신이 선택한 이 마을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베퇴유에서 이젤의 위치를 크게 바꾸지 않고서 빛과 새로운 구도를 끈질기게 탐구했다. 그 결과 탄생된 작품들은 카유보트, 뒤레, 드 벨리오에게 속속 팔려나갔다.
" 내 그림들을 팔아 이곳 베퇴유에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퇴유에서 모네와 그의 가족은 알리스, 에르네스 오슈데부부와 그들의 여섯 아이들과한 집을 썼다. 생활비를 줄여보자는 의도였다. 그 집에는 강까지 이어진 과수원이 하나 있었으며, 모네는 자신의 작업용 보트를 강에 정박시켜 두곤 했다. 얼마후인 1878년 12월, 두 가족은 좀더 안락한 집으로 이사하는 한편 모네는 파리 몽세가에 있던 스튜디오를 처분하고 뱅탱유가 20번지에 새 스튜디오를 구했다. 베퇴유의 새 집에 온 모네는 도시생활의 혼잡함에서벗어나 자연 속에 파묻힌 채 전에 없이 열성적으로 작업에 몰두했고 인상파 친구들과는 점점 멀어졌다. 제4회 인상파전에 29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로 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배신자란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동의했을 뿐"(1879년 3월 25일, 뮈레에게 보낸 편지) 이라고 하였다. 또 다른 이유는 돈이 절박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집세와 이사비용으로 마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없자 모네는 다시 한 번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저 자신 만족스럽지 못할 뿐 아니라, 반길 만한 사람을 달리 찾을 길 없는 작품을 마무리하면서 깊은 근심에 휩싸여 있습니다. ......내 그림들을 팔아 이곳 베퇴유에서의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이 비정한 현슬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떠나는게 이 집의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비록 저 자신은 이곳에서 꿈같은 작품을 제작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1879년 5월 14일 에르네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
"가엾은 제 아니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모네가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들에는 미셸을 출산 한 후 '극도로 허약해진' 카미유의 건강을 염려하는 심정이 드러나 있다. 마침내 1879년 9월 5일, 그는 이렇게 썼다.
"가엾은 제 아내가 오늘 아침 사망했습니다. ......불쌍한 아이들과 홀로 남겨진 저 자신을 발견하고 저는 완전히 낙담했습니다. 당신께 또 하나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돈을 동봉해 드리겠으니 일전에 우리가 몽 드 페에테에 저당 잡힌 메달을 되찾아 주십시오. 그 메달은 카미유가 지녔던 유일한 기념품이라서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나기 전에 목에 걸어 주고 싶습니다."
이 마지막 사랑의 표시를 보면 이 화가가 자신의 젊은 날의 동반자에게 얼마나 큰 애정을 느끼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다.
9월 26일, 넋이 나간 모네는 피사로에게 이렇게 썼다.
"저는 극도의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두 아이를 데리고 내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을 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비통함이 뼈에 사무칩니다."
그해 가을 날씨가 나빳기 그는 야외작업을 포기하고 과일과 꽃, 마침 사냥철인 탓에 찾아보기 쉬웠던 죽은 사냥감을 소재로 정물화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모네가 카미유 사망이후 곧바로 정물화를 그리게 된 것은 당시의 어려운 경제적 사정 때문이었다. 모네와 아들들은 퇴거당할 지경에 처해있었고 그때 만 해도 그의 정물화는 풍경화보다 더 고가로 팔렸던 것이다.
혹독한 겨울
1879년에서 1880년 초에 이르는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모네는 갑작스레 센강의 정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강 대부분이 꽁꽁 얼어붙더니 해빙기로 접어들면서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물살을 타고 떠내려왔다. 자연의 장관에 매료된 그는 점차 대기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내 모네는 보는 각도와 관찰한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효과를 자아내는 장대한 구도를 갖춘 작품 대여섯 점을 그릴 수 있었다. 모네는 이젤의 위치를 옮기지 않거나 아주 약간만 변화시키고도, 작품과 무관한 다른 소재들을 차단하면서 빛의 움직임에 따른 형상과 색채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베퇴유에서 완성된 그림들은 특별한 감정의 차원을 보여준다. 차가운 색조로 처리된 풍경화에서는 생명의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림 속의 하늘과 강물은 겨울이 주는 창백함과 정적, 그리고 황량함만을 간직하고 있다. 이 그림들은 당시 모네를 압박하던 경제적 근심과 정신적 방황을 반영한다. 보들레르의 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연합적 심상' 이 작용한 듯, 모네의 우울한 심정이 자연물에 결합된 것이다. '부빙 시리즈'는 당시 모네가 처한 상황을 암시해 준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깨진 얼음덩어리들이, 인상파 집단의 붕괴와 카미유의 사망으로 한 시절의 종말에 이른 한 화가의 개인적 삶의 전환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도전: 살롱전과 최초의 개인전
1870년, 심사위원단이 또 다시 출품작을 퇴짜 놓아 이후 살롱과 거리를 두고 지내 왔던 모네는 1880년 한 번 더 공식적으로 살롱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전년도에 르누아르가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로 수상한 것도 모네가 심경 변화를 일으키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자신이 1874년 인상파 운동의 확립에 주도적으로 기여했던 점을 고려할 때,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의 살롱 응모를 배신행위라고 비난 할 것임을 잘 알고 있던 모네는, 자신의 그와 같은 결정은 오직 그림을 팔기 위해셔였다며 조심스런 해명의 편지를 뒤레에게 띄웠다. 모네의 응모작 두 점 가운데 (라바쿠르)만이 입선되었고 그나마 초라하게 전시되었다. 졸라는 모네의 제작방식이 너무나 경솔하다고 비난했지만, 그의 재능을 인정하고 그가 장차 성공할 것이라고 예견했다.
"10년 안에 그의 재능은 제대로 평가될 것이며, 그의 작품은 호평 속에서 전시될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거액에 거래될 것이며, 그는 당대 동창의 거두로 자리매김될 것이다."((살롱에 나타난 자연주의 3),(르 볼테르) 1880년 6월 21일)
이처럼 모네는 살롱으로 복귀하는 한편-1년 전부터 스스로 '독립화가(independent artist)'라고 칭하고 있던- 인상파 화가들이 개최하는 제5회 전시회에는 등을 돌렸다. 모네의 불참은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의 탈퇴 이후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던 인상파 집단의 붕괴를 한층 더 부채질했다. 6월 들어 모네는 최초의 개인전을 열게 되는데, 장소는 출판업자 조르주 샤르팡티에가 1879년에 창간한 잡지(현대인의 삶) 부속 화랑이었다. 테오도르 뒤레가 서문을 쓴 카탈로그에는 18점의 작품이 소개되어 있었다. 전시회에서 몇 점의 작품이 팔려 나갔다. 모네는 그 돈으로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을 수 있었으며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 1880년 7월 5일, 그는 뒤레에게 이렇게 썼다. "무척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8월이 되자 그는 르아브르 화가동지회의 1880년 전시회에 참가했다. 고향에서는 살롱 당선작을 포함한 그의 그림들이 푸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곧이어 몇 년간 노르망디 해안에서 그린 바다풍경화들은 파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게 된다.
"곧 베퇴유를 떠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센 강변에 위치한 멋진 곳을 찾고 있습니다. 푸아시가 어떨까 생각중입니다."(1881년 5월 24일 졸라에게 보낸 편지)
카미유 사망 이후 모네의 가정과 오슈데의 가정은 뒤죽박죽이 되어 있었다. 에르네스는 아마도 사업상 파리에 머물러야 했던 모양이고, 알리스는 모네의 두 아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모네 곁에서 지냈다.
베퇴유 체제기는 아르장퇴유에서 지베르니로 넘어가는 중간 시기이며 중요한 이행기로 기록된다. 이 시점에서 모네의 생활과 경력은 그의 미래에 결정적 요소로 작용할 새로운 방향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첫째, 그는 이제 원숙기에 접어들어 화가로서 체득한 지난날의 경험을 소화할 수 있게 된 동시에, 구인상파 집단과 거리를 유지함으로써 자신만의 독자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둘째, 카미유가 죽은 후 장차 모네의 두 번째 아내가 될 여성의 비중이 점점 커짐으로써 그의 사생활에도 변화가 생겼다. 마지막으로 뒤랑 뤼엘의 지속적인 후원은 이제 곧 좋은 날이 오게 될 것이란 예감을 안겨 주었다. 이 모든 낙관적인 징조를 멋지게 담아 낸 작품이, 모네가 베퇴유를 떠나기 몇 달 전에 제작한 (베퇴유의 화가의 정원)이다. 1881년 12월, 고맙게도 뒤랑 뤼엘이 이사비용을 대 준 덕분에 모네는 알리스 오슈데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퇴유에서 동쪽으로 32km가량 떨어진 푸아시로 이사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강변에 자리잡은 새 집은 생루이 별장이라 불렀다.
[베퇴유의 화가의 정원 - 모네 (1880년, 내셔널 갤러리)]
뒤랑 뤼엘 : 여러 면으로 실질적인 도움을 준 충실한 후원자
1880년대 초부터 모네의 구매자 명부에는 조르주 프티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뒤랑 뤼엘이 자주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뒤랑 뤼엘은 정신적, 재정적으로 끊임없이 이 화가를 지원해 주었다. 해가 갈수록 뒤랑 뤼엘의 영향력은 점점 커져 마침내 지난날의 후원자 집단 (가주 장 밥티스트 포레, 뒤레, 샤를 에프뤼시, 드 벨리오, 뮈레)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제 모네는 자신의 작품을 옛 후원자들에게 싼 값으로 팔려 하지 않았다. 1881년 2월 이후 뒤랑 뤼엘의 구매가 계속되자 모네는 살롱전을 완전히 포기하는 동시에, 같은 해 제6회 전시회를 개최했던 인상파와도소원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882년, 뤼니옹 제네랄 은행이 파산했고, 뒤랑 뤼엘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 일로 모네는 마음을 바꿔 제7회 독립화가들 전시회(앵데팡당전)에 참여하기로 하고 무려 35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이 전시회는 3월에 레이쇼팡 파노라마(파리, 생토노레가 251번지)에서 열렸다. 1880년에도 날카로운 공격을 퍼부은 조리스 위스망 같은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인상파의 시각과 모네의 극도로 독자적인 색채사용법을 두고 여전히 비난을 퍼부었지만, 모네의 바다풍경화는 격찬을 받았다.
노르망디 해안 푸르빌에서 새로운 그림소재를 발견한 모네는 강렬한 창작욕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해 겨울과 다음해 여름까지는 불확실한 시기였다.
"미래는 너무도 암울해 보입니다. 회의에 사로잡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1882년 9월 18일 뒤랑 뤼엘에게 보낸 편지)
이제 모네의 친구가 된 이 화상은 언제나처럼 관대하게 돈과 풍부한 충고로 응답했다. 뒤랑 뤼엘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모네의 그림을 전시했으며 10월에는 노르망디에서 그린 20점의 작품을 구매했다. 1882년은 모네가 롬가 35번지에 위치한 뒤랑 뤼엘의 아파트 대형 거실을 장식하기 시작한 해이고 그 작업은 1885년까지 계속되었다. 1883년 3월, 이 화상은 파리에 마련한 자신의 새 화랑에서 모네의 그림 56점을 전시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언론과 대중이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 큰 충격을 받은 모네는 전시회를 미흡하게 준비한 탓이라며 뒤랑 뤼엘을 비난했다. "저는... 제 맘에 꼭 드는 집과 풍경을 찾을 겁니다."(1883년 4월 5일, 뒤랑 뤼엘에게 보낸 편지)
모네는 자신에게 전혀 영감을 불려일으키지 못하는 "이 초라한 푸아시가 싫다."고 몇 번인가 토로한 적이 있었다. 뒤랑 뤼엘에게도 그런 생각을 전한 적이 있다. "이곳의 전원은 저한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군요."(1882년 5월 27일) 그해의 주요 작업이 주로 노르망디 해안에서 이루어진 점으로 볼 때 결과적으로 푸아시에서의 짧은 체루는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그가 알리스 오슈데에게 보낸 편지들은 그 당시 두 사람의 친분이 상당환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당신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시요."(1883년 2월 12일, 에트르타에서) 푸아시를 못마땅해하고 있던 모네는 결국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나이도 마흔둘이나 되었으니 진정한 안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지녀 온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국을 뒤지기 시작했고 뒤랑 뤼엘에게도 반복해서 그 얘기를 들려주었다. 1883년 4월 5일의 편지에 모네는 이렇게 밝혔다.
"일단 적절한 곳에 정착하면, 파리에는 사전에 날짜를 잡아 놓고 한 달에 한 번씩만 다녀올 생각입니다."
지난해 그는 이미 파리 뱅탱유가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처분했다. 푸아시를 떠나는 비용 역시 뒤랑 뤼엘이 대 주었다. 모네는 이렇게 편지를 띄웠다.
"이 모든 일로 당신에게 더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대작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곳 시골이 제 맘에 꼭 들기 때문입니다."
그는 드디어 지베르니를 발견했던 것이다.
"저는 황홀경에 빠져 있습니다. 저에게 지베르니는 너무도 멋진 곳입니다"
1883년 모네는 뒤레에게 이렇게 썼다. 1880년대 내내, 모네는 파리에서 서북쪽으로 64km가량 떨어진, 에프트 강과 센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이 마을이 점점 좋아진다고 많은 편지들을 통해 끊임없이 토로했다. 7년 후 그는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전원이나 가옥은 어디에서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임을 확신하고" 지베르니의 집을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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