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남강, 도산, 고당 (1/3)
다북동
홍경래는 세상을 한 번 고쳐 만들어보려다가 그만 실패하고 정주성 북장대에 꿈으로 사라졌다. 역사를 읽어 여기에 이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옴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뜻으로 생각해보면 그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그는 민중을 깨우치지 못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전하는 말에, 그가 군자금을 얻으려 세남이 부자 김이대를 달래려 할때 먼저 관상쟁이 무당을 보내어 운명을 예언하는 척하며 반드시 귀인을 만나 크게 부귀하게 될 것이라 꾀었다 하며 또 임신년에 일을 일으키려 함에 미리 `임신기병’넉자를 글자 풀이로 하여 “일사횡관 귀신탈의, 십필가일척 소구유양족”의 민요를 지어 돌려 민심을 휘젓게 하였다 한다. 재주라면 재주요, 그 시대로는 면치 못할 일이라면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그가 어디까지나 술책의 사람, 꾀의 사람이요, 사상가·신앙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긴 세월을 두고 민중의 가슴속에 정의와 자유의 정신을 깨워주려고 하지 않고, 교묘한 꾀로 사람을 끌어 쉽게 결과를 얻어보려 했다. 그러나 민중을 깨우지 않고는 혁명은 아니되는 것이요, 깊은 사상, 높은 도덕의 신앙 아니고는 민중의 양심에 절대적인 동원령을 내릴 수는 없다.
공자는 “가르치지 않고 싸우는 것은 백성을 버리는 것”이라 했으며, “옳은 사람이 7년을 가르치면 백성이 능히 싸울수 있다” 했다. 의무와 봉사의 정신으로 자각하지 못한 민중을 이해로 충동하여 한 때 소동을 일으킬 수 있고 정권을 뺏을 수 있으나, 역사를 새롭게하는 참 혁명에 첫째 필요한 것은 철저한 혁명, 이른바 높은 정신에 불타는 뜨거운 신앙이다. 홍경래가 평안도 상놈으로 나서 감히 500년 눌린 멍에를 목에서 벗어버리고 일어선 그 의기는 장하다. 그에게 의협심은 있었다. 용맹도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사상은 없었다. 신앙은 없었다. 그의 분은 인간의 분이지 하늘의 진노는 못되었다. 그는 정말 하늘말씀을 받은 것이 없었다. 그는 모세가 못되고 크롬웰이 못되었다. 그러므로 민중의 가슴속에 자고 있는 호랑이 혼을 깨울 수는 없었다. 그는 성공햇대야 옛날 잇던 영웅의 정도를 벗어나지 못햇을 것이다. 영웅이 뭐요, 정치가 뭐지? 권력을 쥐려 할 때는 민중을 꾀어 혁명을 일으키고, 일이 이루어지면 딱 잡아떼고 민중을 속여 압박자의 본색을 나타내는 것이 그들의 공식적인 걸음이 아닌가?
홍경래도 민중을 정신적으로 깨우치지 않은 한은 성공을 한대도 제2의 이성계, 제2의 수양대군이 됐을 분일 것이다. 무지와 가난과 타락의 역사적 짐에 지쳐 짐승보다도 못한 살림을 하는 민중을 사람으로 만들려면 정권 다툼이나 계급 싸움 같은 껍데기 혁명으로는 도저히 될 수 없고, 새 철학, 새 윤리, 새 종교를 주어서만 바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는 실패한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홍경래의 꿈은 정말 사라졌을까? 아니다. 그의 외침이 깊은 혼에까지는 못 들어갔으나 역시 민중의 소리인 이상 아주 죽어 버릴 리는 없었고, 그것이 생명의 살잔 한 버팀인 이상 실패일 수는 없다. 그가 죽은 것은 보다 강한 천만 홍경래로 살아나기 위해서요, 그 일이 실패된 것은 보다 참된, 보다 순수하고 끈덕진 운동으로 뿌리박아 나가기 위해서였다. 홍경래는 역사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민중은 그를 자기네의 영웅으로 전설 속에 영원히 살렸다. 세상을 한 번 공평하게 만들어보잔, 모가지에서 멍에를 벗고 자유하잔 그 정신은 자꾸 번져나가고 스며들었다. 그것은 방아를 밟는 지어미들의 이야기 속에, 나무를 베는 지아비들 지껄임 속에 살아 있었다. 길가 버드나무 밑 바람소리 속에 그것은 들어 있었고, 주막집 마루 끝에 붓는 술잔 그림자 밑에 숨어 있었다. 지금도 평안도에서는 무슨 일을 맹렬히 떨쳐 일으킬 때는 “다북동을 일으킨다”고 한다. 홍경래가 혁명의 불길을 든 것이 가산 다북동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그들은 고구려가 망한 후 천 년 무너진 역사를 그 불에서 한 번 고쳐 다듬어내나 하고 기다렸던 노릇이 그만 실패되고 만 것이 못내 한스러웠던 것이다. 그래 말마다 ‘다북동’이요, 모여앉으면 ‘홍경래’였다. 다북동은 종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홍경래는 혁명의 껍데기를 지은 사람이요, 붙어야 할 불의 장작을 준비한 사람이다. 이제 정말 불이 일어나야 하고 속알의 혁명이 생겨야 한다.
오산학교
칼과 활로 하는 혁명이 껍데기의 혁명이라면 속알의 혁명은 교회와 학교를 통해 하는 정신의 운동이다. 홍경래가 들다가 못 들고만 민중 혁명의 정말 큰 불은 그가 간 지 한 세기 후에 남강 이승훈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선생에 의하여 일으켜졌다. 남강 선생은 홍경래가 하늘에 사무치는 한을 품고 죽던 그 정주성에 양반의 사냥개인 관군이 혁명에 나섰던 민중을 단으로 묶어 세우고 무찔러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던 그 광경이 아직도 생생한 가운데 자랐을 군인의 아들로 태어났고, 도산 선생은 그 홍경래가 났던 용강에서 났고, 조만식 선생은 그가 성공했더라면 필시 새 나라를 거기서 배판했을 평양에서 자랐다.
그들은 홍경래처럼 칼과 활을 들지는 않았다. 그처럼 술책을 쓰고 선동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붉은 가슴을 가지고 민중의 붉은 가슴에 대했다. 그렇지만 그 운동은 홍경래의 혁명으로는 비할 수 없는 맹렬한 형세로 퍼져나갔다. 홍경래란이 있은 후 수십 년에 세상은 달라졌다. 이리 같은 양반의 학정은 끝에 오르고, 견디다 못해 하는 민중의 절망적인 반항은 벌떼같이 일어나고, 거기다 서양서 건너온 신문명의 사상은 사나운 바람처럼 들이불고 세상은 물 끓듯 어지러워져 갔다. 그러는 동안에 날마다 깨어가는 것은 사회의 바닥을 이루는 민중이었다. 거머리같이 피 맛을 본 다음엔 떨어지지 않는 특권계급이 구차하게라도 그 권세를 지켜볼까 하고 정권과 민중을 일본에다 싸구려 흥정으로 팔아넘겼고, 그 때문에 이 민중의 자각운동이 한때 방해를 아니 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가지고도 이 역사의 대세를 막아낼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무기 없이 하는 혁명은 나날이 자랐다. 곳곳에 일어나는 교회와 학교가 그것이다. 그것은 그때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특히 서북지방이 더 성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평양의 대성학교, 정주의 오산학교였는데, 대성은 합방이 되자 없어졌고 오산만은 길이 남았다.
세 분은 이 민중의 가슴속에 굽이치기 시작하는 커다란 운동을 대표하는 이들이요, 민중에게 가장 두터운 신임을 받은 지도자들이다. 그런데 이 세 분이 다 오산학교에 관계되어 있다. 남강 선생은 학교를 세우도록 영향을 준 이며, 조선생은 전후 두 번에 걸쳐 교장으로 있었다. 그러므로 오산은 특별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오산은 단순히 글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시작을 할 때 상투 튼 학생 여덟로 됐고, 그 쓰고 있던 집은 옛날 서당 그대로였으나, 그 속 정신은 전연 달랐다. 산정신의 샘이 되어 이 썩어진 사회를 맑혀 보잔 것이 그 이상이었다.
상상을 맑힐 샘물 한 줄기
다섯 뫼 그늘에 흘러 나네
하고 그 동문회 노래 첫머리는 부른다. 그것은 또 옛날같이 입신출세의 준비소가 아니었다. 바로 혁명의 보금자리가 되잔 것이었다.
네 손이 솔갑고 힘도 크도다
불길도 만지고 돌도 주물러
새로운 누리를 짓고 말련다
네가 참 다섯 뫼의 아이로구나.
하는 그 교가의 한 절이 그것을 말한다. 새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 불길 속을 지나고 물결 밑을 통과하잔 것이 그 기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 물질문명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바로 하늘 땅을 꿰뚫는 정신적 생명인 것이었다.
저 하늘의 해와 달도 돌아니며
이 땅 위에 물과 바람 또한 뛰노니
천지 사이 목숨불을 타고난 우리
열센 힘을 뻔득이어 빛을 내이자.
팔다리를 놀려 운동을 하면서도 이것이 그 정신이었다. 오산학교를 이루는 것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 그 첫째는 청산맹호 식의 민중정신이요, 그 둘째는 자립자존의 민족정신이요, 그 셋째는 참과 사랑의 기독정신이다. 먼저, 오산은 평안도의 오산이요, 평민의 오산이다. 오산은 역시 평안도가 아니고는 아니됐을 것이다. 양반 냄새 모르는 평안도요, 거기서도 군인의 아들로 났던 남강이 그것을 상징한다. 그는 나면서부터 평민이었다. 지금 군인이라면 서슬이 시퍼렇지만 그대의 군인은 형편없는 상놈이나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조 말년엔 군인 명부에는 산 사람 이름보다 죽은 놈의 이름으로 수만을 채워두는 것이 많앗다고 한다. 하여간 남강은 평민이었고, 오산학교는 평민정신이 자라는 곳이었다. 당초에 학교를 순전한 촌 골짜기에 세웠다는 것부터가 놀랄 일이다. 또 이름도 조그마한 지방 이름대로 오산이라 했다. 세상에서 흔히 하듯이 굉장한 공작의 꼬리같이 빛나는 이름이 아니다. 겉치레하기 좋아하는 우리나라 버릇에 이것부터 혁명적이었다. 뽐내는 것은 민중을 속이고 잡아먹으려는 영웅주의, 귀족주의의 짓이다.
이름이 그렇듯이 그 사람도 그랬다. 오산 졸업생이라면 수수한 검은 수목 두루마기가 그 표요, 적은 보수에 만족하고 일 충실히 하는 것이 그 특색이라고 이름이 났었다. 민중의 친구가 그럴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은 고구려 망한 천 년 이래, 울분 속에 지켜진 혼이 나타난 것이었다. 이것이 혁명의 장작이 된다. 다음, 불이 일어나려면 불씨가 있어야지. 불씨는 그때 태평양 물결타고 건너오는 민족주의 사상이다. 남강 선생은 마흔 살을 넘기까지는 한낱 실업가로 남아 돈 모으면 나도 돈 모아야 하고 남이 벼슬하면 나도 벼슬해야하며 지내다가, 평양에서 청년 도산의 웅변을 듣고 마음속에 크게 깨달아 머리 깎고 술 담배 끊고 곧 집으로 돌아와 학교를 세우고 사생활을 집어치우고 이로부터 나라 위해 내놓은 공적 생애가 시작이 되는데, 그때 선생의 마음을 그렇게 일변하게 한 것은 다른 것 아니요 곧 민족주의 사상이다. 도산이 말을 잘하여서가 아니라 그 말하는 내용, 사상이 진리였기 때문이다. 사실에서 더한 웅변이 어디 있을까? 남강은 자기 가슴속에 답답하던 것이 확 뚤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감동한 것이었다. 답답한 것은 다른 것 아니라, 봉건제도로 인해 눌린 민중의 혼이요, 뚫린 것은 다른 것 아니고, 민족주의 이론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양반의 압박, 착취에 빼빼 마른 염생이가 된 민중에게 사민평등의 새 사회, 제도, 헌법, 의회제도의 새 정치조직을 가르치며 침략하는 여러 나라 앞에서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놓여있는 국민에게, 민족자존을 주장하고 생존경쟁 철학을 뒷받침으로 하는 자유주의를 고취하는 민족주의는 하늘에서 오는 복음 같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강 선생도 처음에 어찌 흥분했던지 평양에 새 결심을 하고 돌아온 후, 남들이 보고 미쳤다고 했다 한다. 그저 사람을 만나면 눈물을 흘려 나라 일을 탄식하고 그저 가르쳐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이리하여 민족주의는 오산정신의 한 요소가 되었다. 그 다음 장작이 있고 불씨가 있어도 불이 잘 붙으려면 바람이 잘 들어가야 한다. 그 바람은 기독교 신앙이다. 서양사상이 들어오기 시작한 후 한때 양고나팔에 맞춰 일어서는 학교가 그야말로 우후죽순이었는데, 그것이 얼마 못가서, 더구나 합병 후 일본 탄압이 일자 곧 다 붙다가 마는 장작처럼 질식해 버렸다. 그런데 기독교 학교만이 비교적 오래 갔다. 그것은 그 신앙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영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운동이 스스로 함에까지 가지 않으면 오랠 수 없는데, 스스로 함은 신앙에 의하여 혼이 깨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남강 선생도 정말 그 정신이 철저해진 것은 감옥에 들어가 성경을 깊이 읽고 신앙을 얻은 후다. 대개 인물이 되는 데는 세 요소가 있다 할 수 있다. 하나는 타고난 바탕이요, 그 다음은 그 바탕을 스스로 알아 발전시킴이요, 또 그 다음은 시세다. 이 세 가지가 잘 맞아야 큰 인물이 된다. 남강의 타고난 바탕은 전이나 후나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깊은 신앙적 자각이 생김에 따라 비로소 자기의 바탕을 잘 알고 시대의 의미를 잘 깨달아 그 할 것을 다하게 됐다. 그러므로 남강 인격의 고갱이는 기독교 신앙이고, 따라서 남강의 인격을 또 그 고갱이로 삼는 오산정신의 알짬도 거기에 있다. 이 점은 도산 선생이나 조선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 신앙 없이는 이 세 인물은 없고 오산도 없다. 남강, 도산, 고당 선생의 인격의 알짬이 기독교 신앙이고 따라서 오산정신의 알짬 역시 그것임을 말하는데 있어서 잊어선 아니될것은, 그것이 선교사와 관계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 분이 다 선교사 밑에서 일한 이들이 아니요, 오산학교는 미션학교가 아니였다. 나는 오산이 만일 미션학교였더라면 오산이 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미션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도리어 자유로운 산 정신을 살릴 수 있었다. 미션학교라고 다 그렇다 할 수는 없겠지만, 매양 미션학교가 형식적인 교리의 강요를 당함으로 말미암아 생각이 고루하고 어딘지 뼈다귀 빠진 듯한 데가 있음을 세상이 잘 알고 있다. 이것은 선교사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 그릇된 추종으로 인하여 정신의 독립을 잃고, 또 재정적 독립을 못하는 데서 오는 폐단일 것이다. 간디의 말대로 경제적 독립 없이 데모크라시 없다. 오산은 경영은 늘 어려웠으나 그 대신 독립정신은 잃지 않았다. 교회 학교가 아닌 대신 민중의 학교가 될 수 있었다.
내가 만일 미션학교엘 다녔더라면 어느 선교사의 동정으로 미국쯤 갔을는지 모르고, 그랬더라면 목사가 됐던지 어느 신학교의 교수가 됐을는지는 몰른다. 그러나 그렇게 아니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또 한 가지는 기독교라도 카톨릭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카톨릭이거나 프로테스탄트거나 사랑과 참을 주장하는 데서는 마찬가지나 역시 현실 면에서는 카토 다르고 프로 다르다. 우리나라에 카토 들어온 지 수백 년인데 왜 그것은 남한에만 퍼졌고 프로는 북한에 주로 퍼졌을까! 간단히 잘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역시 카토는 귀족주의적이 되어 양반 사회에 맞고 프로는 자유를 그 생명으로 하느니만큼 평민적이어서 상놈에게 맞아서가 아닐까? 어쨌거나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에 카토 별로 없고 프로였던 것이 그 민중사상이 발달하는 데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 증거로 세상이 다 인정하는 민중운동 지도자에 카토 신자 없고 카토 신자 중에 민중운동에 나선 사람 별로 없다. 일제시대에 보면 프로는 같은 프로라도 우리 교회와 일본 교회가 서로 따로였고 카토는 그런 일 없이 하나였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자유정신 때문이다. 카토더러 말하라면 신앙엔 민족 차별이 없어 그렇다 하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는 뻔히 압박자요, 하나는 분명히 피압박자이면서 한 자리에서 예배함은 그것은 스스로 속임수일뿐이다. 그 경우에 교회는 현실적인 힘드는 의무에서의 도피소밖에 되는 것 없다. 그것은 세속주의를 이김이 아니고 거기 굴복함이요, 협력함이다. 그러한 스스로 속이는 초연주의보다는 완전치는 못한 신앙이라도 차라리 따로 예배하는 것이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청천백일하에 숨길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 천주교는 민중의 자유를 위해 싸워본 일이 없다(해방 전까지는). 그들은 나라를 세속주의에 아주 내맡기는 값으로 교회 안에서 식민지적인 평안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일찍이 교황을 위하여는 순교한 일이 었어도 나라와 민중을 위하여서는 한 마디 공적 증언도 한 일이 없다. 남강, 도산, 조선생이 만일 천주교 신자였더라면, 그리하여 교황 명령을 지상명령으로 알았더라면 오늘 같은 민중운동의 지도자는 못되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민족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우게 한 것은 그들이 믿은 프로 신앙이었다. 이름도 프로테스탄트 아닌가? 반항이다. 내댐이다. 남강은 법정에서 독립운동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한 것이라 증거했다. 카토에서는 아마 하지 말라 했는지 모르지. 3.1운동에 카토만은 들지 않았다. 카토는 역시 현대의 민중의 바다에 홀로 떠 있는 봉건 귀족주의의 외로운 섬이다. 그들은 교회에는 열심이어도 사회악과 싸우는 데는 흥미가 없어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말대로 사실 “저기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가 문제” 아닌가? 삶은 여기 아닌가? (카톨릭에 대한 나의 생각은 6·25 이후 아주 달라졌다. 카톨릭 자체가 달라져서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아주 적극적으로 나오게 됐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카톨릭의 제도는 여전히 반대나, 기독인으로서는 카토·프로의 차별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늙은 비둘기
1921년 봄 나는 오산학교에 보결생으로 들어갔다. 만세를 부르고 집에 돌아와 있는 이때에 속을 썩힐 대로 썩히다가 그해 4월에 다시 학교를 가려고 서울로 올라갔다. 입학 시기가 지났고 떼쓸 줄은 천성이 모르므로, 도로 내려오던 길에 오산에 들른 것이 내가 오산사람 되던 시초다. 하나님이 그리 보냈지. 3·1운동 때 오산학교는 민족주의의 소굴이라 하여 일본 헌병이 불을 지르고 헤쳐 버렸는데, 이때 뜻있는 이들이 간신히 힘을 써 학교를 다시 시작하고 학생을 받은 때였다. 그떼에 가니 조그마한 동굴 안에 옛날 서당이었던 기와집이 한 채 있어 그것을 사무실로 쓰고 임시로 선생 학생이 합해 손수 세웠다는 교사인데, 기와도 못얹고 이엉을 덮었고, 교실에는 책상 걸상이 하나도 없이 마룻바닥에 앉아 공부라고 하는데 그전 관립학교에 다니던 내 눈엔 초라해 뵈기 짝이 없었다. 집이 수십 채밖에 아니되는 촌에 4,5백 명 학생이 모여드니 있을 곳이 없어 농가의 사랑방, 건넌방에 서로 끼어 욱적거리니 옴이 성하고 장질부사가 나고 더럽기 한이 없었다.
설비가 그런데 사람도 마찬가지다. 옛날부터 계신 선생님이라고는 두서너분 뿐이고 그 다음은 다 새로 온 분들인데, 인제 와보니 엉터리 선생도 많았다. 한 달 있다 가는 분, 한 학기 있다 가는 분, 시간을 별로 충실히 하지 못햇다. 그래 유명한 말이 됐지만, 후일상해 가서 신문기자론가 있다 세상을 떠난 신언준이라는 친구가 하도 딱해 “오늘도 5전어치는 배워야 하지 않아요?” 했다. 그때 매달 수업료가 1환 50전이다. 학생도 합탕이었다. 전부터 있는 학생은 몇이 안 되고 모두 모여든 사람들인데 평고퇴학자가 있지, 신성에서 닦아회하고 온 자가 있지, 서른 된 수염 난 이가 있지, 교회 장로 하는 사람이 있지, 훈장 하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본 백화파 문학을 읽고 문사연하는 치가 있지.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울려 거의 자기도취라 할 만큼 “우리 오산, 우리 오산” 하고 지내는 것이었다. 공립학교에서 “오마에(너)”라고 부르는 소리만 듣던 내 귀가 선생들이 아주 어린 학생보고도 “왜 그랬지요? 하는 존경하는 말을 들으면, 오산의 면목은 다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데도 오히려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몸은 지금 감옥에 가 있어 봇 보지만 남강 선생 때문이었다. 나는 거기서 처음으로‘한글’‘배달’‘한배’라는 말을 배웠다.
둥지 안에 누워 자는 고운 새끼를
멕일 것 얻노라고 해가 맞도록
골몰하게 다니던 늙은 비둘기
훨훨훨 날아와서 뻑뻑 구르르
지붕 위에 지저귀는 참새의 무리
우리 청년 더운 가슴 노래하는 듯
이곳에서 저리로 저서 이리로
무리 지어 날아다님 곱기도 하다.
늙은 비둘기라는 한 마디에 남강의 면목은 나타나 있고, 지저귀는 참새라는 데 민중의 아들의 기상은 들어 있다. 학생들은 남강 선생을 보통 ‘범 영감’이라 했는데, 그럼, 범과 비둘기 그것은 잘 대조되는 표현이다. 마치 예수를 사자라 하면서도 어린 양이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참새 무리의 가슴속에 백두산 호랑이의 혼을 넣어주자고 늙은 비둘기의 수고를 하는 남강!
백두산서 자란 범은 백두호라고
범 중의 범으로 울리나니라
우리들은 오산에서 자라났으니
어디를 가든지 오산이로다.
제가 어떻게 될지 알지도 못하는 젊은 맘이 이렇게 부르며 노상 교만은 아닌 자존심을 느끼고 한 것은, 아무것도 한 것 없고 거울속에 비치는 백발만이 부끄러운 오늘에 와서 불러도, 이것은 역시 어깨가 들먹들먹 좋다. 위대와 나를 하나로 붙들어매고 녹여서 넣어 주는 믿음같이 위대한 것은 없다. 믿는 혼은 영원히 젊었다.
땅 속에 우는 뼈다귀
“만주 좁쌀에 동네 썩어진 된장은 혼자서 치운다”던 오산이라도 선생, 학생이 한데 어울려서 같이 울고 웃던 그때는 참 좋았다고 선배들은 말하건만 나는 그때에 헤매인 자식이었지 그것을 모른다. 헤매다 돌아든 그때는 남강 선생은 감옥에 아직 계셨고, 선생님 옥중에서 백발 되어 나오신 때는 나는 학교를 졸업했고, 일본을 거쳐 오산에 다시 오자마자 선생님 또 일본 시찰 가셧지. 돌아오시기를 기다려 인제라도 배워보자 느지막에 생각이 들려 하니 선생이 훌쩍 가버리셨다. 인생이랍시고 오고 싶어 온 것도 아니고 보내셨으므로 온 것인데, 할 것은 맡은 맘은 없지 않건만 육신은 약하고, 무한한 것을 추궁하는 것은 속에 품었건만 닥쳐지는 길은 천만 갈래여서 어쩔 줄을 모르고 어물어물 저믐저즘, 개인이요, 전체요, 사회요, 역사요 하다가 한번 석 자 흙 밑을 들어가면 다시 이러구저러구 없는 이 삶에서 다행이라면 “저 분이로구나”하는 스승을 만난 것처럼 다행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그 대신 분하다면 그런 줄을 알면서도 내 둔, 내 게으름, 내 빽빽 멤 때문에 그 스승을 못 배우고 말았구나 하게 되는 것처럼 분한 일이 세상에 어디 또 있을까? 남들에겐 몰라도 내겐 선생님이 일찍 가신 것은 내가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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