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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72호
2020.5.17. (음 4.25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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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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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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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삶이란 작은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언가 큰 것만을 성취해 보려고 한다. - 프랭크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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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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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수
‘도그파이트’(dogfight), ‘머니볼’(moneyball), ‘시빌 워’(civil war), ‘시 배틀’(sea battle)…. 영화나 게임 제목이 아니다. 에스케이 와이번스(비룡)와 한화 이글스(독수리)의 대결을 공중전에 비유해 ‘도그파이트’로, 재벌 그룹인 엘지와 삼성의 맞대결은 ‘머니볼’로, 두산과 넥센 서울 팀끼리의 경기는 내전에 빗대어 ‘시빌 워’라 부른 것이다. 항구도시 부산(롯데)과 인천(에스케이)의 팀 싸움을 ‘시 배틀’이라 한 것도 재밌다. ‘용쟁호투’(에스케이-기아), ‘공대육’(空對陸, 에스케이-엔씨)처럼 한자 조어도 빠지지 않는다. 두산(베어스)과 기아(타이거즈)의 대결은 단군신화를 끌어와 ‘단군매치’, 전라도 연고팀(기아)과 경상도 연고팀(엔씨)의 겨룸은 ‘화개장터’로 부르기도 하니 재치 만점인 별칭이다.
막바지까지 상위권 다툼이 치열했던 프로야구 정규 시즌이 끝났다. 엎치락뒤치락 호각지세로 겨루는 판세는 감독들에게는 피 말리는 순간의 연속이었겠지만 팬들에게는 점입가경의 재미를 안겨주었다. ‘가을 야구’를 위해 4강을 놓고 시새우는 형국은 여러 표현으로 다뤄졌다. 각 팀들이 듣기 싫어한 표현은 ‘탈락’, ‘추락’, ‘도전’ 등일 것이고 반긴 것은 ‘진입’, ‘복귀’, ‘탈환’, ‘유지’, ‘수성’, ‘고수’, ‘사수’ 따위일 것이다. 이 가운데 유독 ‘사수’(死守)가 눈에 띄었다.
이 표현이 눈에 띈 까닭은 어감이 전투적이어서만은 아니다. ‘두산과의 승차를 1.5경기로 벌리며 3위를 사수하는 한편…’(ㄷ일보), ‘최종전에 전력을 다해 극적인 2위 사수를 노리게 되었다’(ㅇ인터넷매체), ‘박병호는 2년 연속 홈런왕 타이틀 사수에 나섰다’(ㄴ통신). 박병호에게 홈런왕은 ‘사수’ 대상이 아니었다. 굳이 ‘사수’여야 했을까 싶다. ‘사수’의 남발이 거슬린다. 이런 표현에 쓰인 ‘사수’는 ‘차지한 물건이나 형세 따위를 굳게 지킴’인 ‘고수’라 하는 게 걸맞다. 내일부터 ‘도전’과 ‘수성’이 펼쳐질 ‘가을 야구’가 시작된다.
……………………………………………………………………………………………………………… 십이십이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라디오 시보 직후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박자’는 구호를 뉴스 앞에 넣어야 했었다. 일테면 ‘정각 열 시를 알려드립니다’, 뚜뚜뚜 뚜!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박자. 열 시 뉴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 해야 했다는 것이다. 언론 통제가 지엄하던 시절, 어느 날 어느 아나운서가 큰 ‘사고’를 쳤다. 기계적으로 읊어대던 구호를 ‘한국적 민주주의 뿌리 뽑자’로 한 것이다. 정권에 항거하는 듯한 ‘멘트’는 전국에 생방송되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 등을 내세운 ‘유신헌법’은 12월27일에 공포되었다. 그런데 왜 ‘시월유신’일까. “정부는 앞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10·17 특별선언’을 ‘시월유신’으로 통일해서 부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ㄷ일보, 1972년 10월28일) 언론은 ‘10월17일 대통령 특별선언’을 ‘10·17(십일칠) 선언’으로 기록했다. 이처럼 기념일이나 역사적인 날을 숫자로 표현하는 경우는 제법 많다. ‘일이일(1·21) 사태(김신조 사건)’, ‘삼일오(3·15) 부정선거(개표 조작)’, ‘오일륙(5·16) 군사정변’, ‘오일칠(5·17) 쿠데타(내란사건)’, ‘십이륙(10·26) 사건’ 등이다.(위키백과)
역사적인 날을 읽는 방법은 달은 그대로, 날짜는 숫자 하나씩 끊어 발음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관례일 뿐 원칙은 아니다. 순종 장례식 때 일어난 ‘육십(6·10) 만세 운동’과 ‘6월 민주화 운동’의 시작인 ‘육십(6·10) 항쟁’처럼 예외가 있기 때문이다. 12월12일에 벌어진 ‘십이십이(12·12) 군사반란(사태)’도 빼놓을 수 없다. “‘십이’가 반복되어 짝을 맞추려는 심리 탓”, “‘시비시비’(是非是非)와 발음이 같아서”라는 주장이 있지만 추정일 뿐이다. 그나저나 ‘자신의 실수를 뉴스 끝낸 뒤까지도 몰랐던’ 그 아나운서는 어찌 되었을까. ‘사고’ 직후 정보당국에 불려갔으나 훈방된 뒤 다른 부서로 옮겼다고 한다. ‘…뿌리 뽑자’가 단순 실수였는지, 전직 사유가 ‘사고’와 직접 관련 있었는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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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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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사람 - 기형도
그는 쉽게 들켜버린다.
무슨 딱딱한 덩어리처럼
달아날 수 없는,
공원 등나무 그늘 속에 웅크린
그는 앉아있다.
최소한의 움직임만을 허용하는 자세로
나의 얼굴, 벌어진 어깨, 탄탄한 근육을 조용히 핥는
그의 탐욕스런 눈빛
나는 혐오한다, 그의 짧은 바지와
침이 흘러내리는 입과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허옇게 센 그의 정신과
내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세계에 침을 뱉고
그가 이미 추방되어버린 곳이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나의 세계를 보호하며
단 한 걸음도
그의 틈임을 용서할 수 없다.
갑자기 나는 그를 쳐다본다, 같은 순간 그는 간신히
등나무 아래로 시선을 떨어뜨린다.
손으로는 쉴새없이 단장을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입을 벌린 채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그의 육체속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그 무엇이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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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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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물 아래서 올라와서 (2/2)
내가 어릴 적에 그 소리를 많이 듣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놈들 꼴 보기 싫어서!” 하는 것이 장에 다녀오는 사람들의 입에서 흔히 나오는 소리였다. 생각하면 우스운 일이지. 평안도에 무슨 양반이 있을까? 더구나 용천에, 온통 평안도 상놈에, 양반은 무슨 양반. 하지만 보고 듣는 것이 양반 상놈 그 노름에 사는, 산다기보다 죽은 백성인지라, 평안도 상놈 저희끼리도 또 양반이라는 것이, 호랑이 없는 골짜기에 여우처럼 있었다. 그래 용천이야말로 평안북도에서도 경재적으론 가장 힘있는 곳이지만, 옛날엔 어디나 그랬던 것같이, 옛날만 아니라 지금도 그렇지만, 먹을 것 많은 곳엔 상놈이 살고 양반은 높은 지대에 있어 옷에 흙 묻히지 않고 살려 하기 때문에 용천 일대는 문벌로는 보잘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그 중에서도 제노라는 계급이 있었다. 김씨, 이씨, 장씨 하는 여덟 성이 있어서 소위 용천 팔대성이라 했다. 저 일본 동경제대를 졸업하고 한때 사사오입론을 내세워 유명한 장경근씨도 그 팔대성의 하나인 긴무 장씨다. 불행히 감탕물을 먹고 자랐기 때문에 나는 일생에 종이란 것을 눈으론 본 일이 없다. 그것만은 참 하나님의 은혜다. 드러나 어릴 적에 듣기에 그 장씨네에는 종이 있었단 말을 듣고 종이란 뭐냐 묻던 생각이 지금도 선하다.
나의 맨 처음 스승
기억을 더듬어보면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들은 소리가 우리도 상놈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어느 가정이나 그렇지만 애기가 말을 하게 되면 그저 가르치는 소리가 “성은 뭐지?” “본은 뭐지?”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성은 함가” “본은 양근”하더니 얼마 있다가는 “본은 강릉”하여 그것을 고쳐주기에 어른들은 퍽 고심했다. 어째서 양근이라던 것을 강릉이라 하게 되는냐. 거기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어제까지 신탁통치를 반대하다가 오늘 갑자기 모스크바 지령으로 민중 앞에 그것을 고치자니 그 설명이 어려웠던 것과 비슷하다.
어쨋거나 함씨네가 내가 알기에도 이날껏 벼슬 하나 변변히 한 것이 없는데, 그래도 우리는 양반이란 거다. 양반이 뭔지, 철 모르는 세 살짜리에 그것은 개발에 편자건만, 그래도 그들은 그것을 가르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었다. 어느 날엔 ‘물 아랫놈’을 면해보아야 하는 것이요 감탕물은 아니 먹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교육은 나의 살이 되고 뼈가 됐다. 이렇게 말함은 내가 언제 감히 반항을 하고 혁명을 할 생각을 했단 말이 아니다. 사실 말이지 나는 사점에 나고 물 아래 자란 것을 부끄럽게 알아본 일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그 뜻은 내 생각에도 어쩔 수 없이 높고 낮고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어머니 무릎에서부터 생겼다는 말이다. 열넷, 열다섯이 되어 집을 떠나 낯선 곳에 가서 공부를 하노라고 그 물 아랫소년이 보따리를 걸머지고 그 장씨네, 김씨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근처를 지나노라면 그들과 우리와는 딴 세상에 사는 것 같았고, 그래도 그 기와집 옆에 무너져가는 ‘오막살이’에 살며 머리가 허옇게 센 사람들이 새파란 ‘안댁’‘나리님’들한테 이랬나 저랬나 하는 반말질을 수굿수굿 듣는 것을 볼때 가엾이 보였다. 사실 같은 물 아랫사람끼리 사는 우리 사점엔 그런 꼴은 없었다. 누가 누구를 하대하는 일은 없었다. 바닥에서 무슨 차별이 또 있을까? 바닥이 꼭대기지.
이 사점의 물 아랫놈들 중에 말해둘 만한 사람이 있다. 그것은 내게 일가 숙이 되는 함일형이라는 이다. 내가 세상에 나와서 사람으로 처음 본 이는 이이다. 아버지는 내 아버지요, 집은 물론 우리 집이지만 그래도 ‘사람’을 말한다면 나는 어린 생각에도 그를 먼저 쳐야 할 것을 알았다. 내가 났을 때 그는 사십 장년이요, 한학자였다. 우리의 종가가 되는 그 집은 10리 안팍에 단 하나인 기와집이어서 내남 할 것없이 그 집을 ‘기와집’으로 불렀다. 그는 일찍부터 과거를 해보려고 서울 출입을 했다. 물 아랫놈들이 서울을 알고 세상을 아는 것은 오직 하나 그를 통해서였다. 과거는 하려다가 종시 못했다. 그가 가르쳐준 사람은 많이 하기도 했다는데, 그는 웬일인지 끝내 못하고 말았다. 몸집이 크고 목소리 우렁차고 풍채 좋고 맘도 점잖고 공공한 일에 대한 정신이 강했다. 일찍이 민요 장두가 됐었다. 무슨 사건이었는지는 어릴 때 일이어서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무슨 억울한 일이 있어 민중의 앞장을 서서 일어섰다가 ‘관가’에 잡혀가서 볼기를 맞았다는 말을 들었다. 어린 맘에 내가 가장 존경하는 그가 어떻게 벌거벗기고 볼기를 맞았을까,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던 생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과거를 하려다 못하는 동안에 세월은 변했다. 그러자 그는 앞서서 땅을 팔아 아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맏아들은 석규, 서울 와서 그때 배재학당을 다녔고, 후에 기독교를 믿고 이 사점에 처음으로 기독교를 끌어들이고 목사가 됐다. 둘째 아들이 저번 이야기한 석은이로서 동경에 유학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생각이 대단히 앞섰었다. 내 이름을 지어준 이도 그요, 내게 맨 처음으로 정신적 스승이 된 이도 그다. 남들이 불러 함룡마라 했고, 글을 잘 써서 필장이라 보통 불렀다. 3. 1운동이 일어난 후는 물론 지방에서 거기 협력했고, 후에 연통제 사건 때문에 평안북도 독판직을 맡았다가 발각이 되어 일본 경찰에 잡혀 무척 고생을 했다. 어른이 통곡을 하던 것을 그에게서 처음 보았다.
내가 열 살 때, 나라가 망하던 때, 그가 몇 사람 되는 동리 어른들과 예배당에서 눈물을 흘려 통곡을 하며 ‘하나님...’하던 것이 지금도 눈에, 귀에 선하다. 어른이 그렇게 통곡을 하는 것을 볼 때 나는 무서운 것도 같고, 나도 섧기도 하고, 무슨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 전신에 뒤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나라가 뭔지를 조금 깊이 느낀 것도 그것이 처음, 기도를 정말 들은 것도 그것이 처음. 105인 사건때는 그가 신문을 보다가 ‘윤치호, 그거 똥 싸서 세수하는 놈’했다. 그 이유를 그때엔 나는 몰랐다. 그는 앞서서 동리에 신학문을 끌어들여 서당을 그만두고 학교를 세웠다. 나는 그래서 서당 구경을 못하고 학교에서부터 자라났다. 그의 영향으로 우리 문중은 온통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었고 우리만 아니라 칠팔십 호 되는 사점은 그 부근에서 비할 수 없을 만큼 일찍 깨었다. 그러므로 물 아랫놈을 업신여기는 그 용천 팔대성이란 사람들도 함일형만은 어른으로 아니 모실 수가 없었고, 일본 시대도 그 사점인 원성동 사람이라면 쉽게 엎누르지를 못했다. 그가 내 이름을 지어준 이야기를 했지만, 당초에는 ‘헌’자는 불화변에 헌을 한자를 주었다. 석은 항렬자요, 정말 내 것은 헌인데, 한문을 잘 아는 학자인 그가 왜 자전에도 없는 자라 해서 불화를 데버리고 만을 쓰게 됐다. 내 성격을 미리 알고 뜨거움이 부족할 듯해 예수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를 주듯이 일부러 불을 붙여주었던 것인지, 혹은 본래 성격대로 되노라고 불이 떨어져 나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나, 나는 오늘날 불이 그리운데 불이 떨어져나가고 없다. 이름대로 되는 것이라면 이제라도 다시 잃었던 불 도로 찾아 불화변에 쓰고 싶다. 하나 한글이 다 된 시대에 화는 뭐고 헌은 무언고? 또 씨족시대가 다 지나간 오늘 함은 뭔고? 지금도 아일 안고 “성은 뭐지? 본은 뭐지?”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습더라. 전통이 올챙이의 꽁지같아서 그저 따라다니는 거니 함이요, 김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 푸른 하늘이 본이지 무슨 본이 따로 있을까? 배를 가르고 맹장을 미리 자르는 사람이 있다더라만 맹장보다는 훨씬 더 많은 말썽을 일으키고 때로는 그 때문에 죽는 낡은 제도의 유물은 왜 선뜻 자르는 사람이 없을까? 혁명해야 돼!
모처럼 붙여준 불을 끄다니? 자전에 없다고 그만두라 한 것들은 못난이 범물들이요, 생각은 있으면서도 그냥 50년을 써온 나는 못난이 중에도 못난이다. 자전에 있거나 없거나 지어서 쓴 그의 정신을 내가 살렸더라면! 한학으로 자란 그가 서울 갔다오더니 신식 체조는 이렇게 한다고 성긋성것한 수염을 흩날리면 나막신을 신은 채 애들에게 체조를 가르쳐주던 그의 의기를 내가 받았더람! 그가 사실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석헌아, 공부 잘해!”할때는 분명히 남달리 내 속의 무엇을 조금 봐 주고 한 것인 줄을 내가 알고 잊지 못하건만! 세월이 이제 다 흐르고 불은 잃고 미지근한 채 그가 그러던 그 때의 나이를 내가 벌서 지났으니! 하물며 그보다도 더 정말 나를 고쳐 만들기 시작한 이가 늘 속에 있어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라, 그 불이 벌써 붙었더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있음에서일까? 아, 불!
내 고행 사자점
사점을 왜 사점, 사자점이라는지 그 까닭을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고 그저 그 사자점 성망재 위에 사자앙천혈이 있어 풍수마다 그것을 찾고 그것을 얻더 묘를 쓰기만 하면 큰 명당이란 말만 늘 듣고 또 들었다. 이날껏 아무도 그것을 찾아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 사점이 후일 다사도 항구로 유명해진 곳이다. 이 섬에서 바다 속으로 한 5리나 가면 다슬기라는 조그만 섬이 있다.겨울이면 북쪽 황해 일대가 다 얼어서 긴의주, 안동이 다 잠은 자는데 여기만이 얼지 않기 때문에 동양 경영을 하는 일본이 벌써 한일합병이 되기 퍽 전부터 이 사점에 부동항을 쌓을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일제 말년에 와서야 실현에 손을 댔다가 망하고 말았다. 옛날 풍수설에 무슨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이 물 아래 사점이 마지막에는 물 윗양반들이 제각기 살고 싶어하는 곳이 됐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8선이요, 중공이요 하지만 어느 날 가서도 만주는 한국 사람이 가서 살고야 말 것이요, 그 만주가 경제적 가치가 발휘되려면 다사도 아니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물 아래고 물 위고는 공연히 빈 관념에서 나오는 미신이요, 정말 높고 낮고는 삶만이 결정한다. 사자앙천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왜 용굴산성은 이야기해주지 않았는지 나는 모른다. 50리 가면 용골산에 산성이 있단 말도 하고 용천읍은 조개 형국이 되어서 그 산 위에 돌사람을 만들어 세워서, 압록강 건너 대련성은 새 형국이기 때문에 그 새가 건너와 조개 알을 빼먹으려는 것을 쫒는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 용굴산성이 임경업 장군이 쌓은 것이란 말은 못 들었다.
백마산성, 용굴산성, 칠산 운암산선, 선천 검산성, 동립산성, 곽산 능한산겅, 이것이 다 임장군이 의주 부윤으로 와 있으면서 청나라를 막기 위해 쌓은 것인데, 그 임장군이 좀스러운 놈들한테 몰려 나라를 건지려 애쓰다. 도리어 만주에 잡혀가 있다가 돌아오게 될 때 압록강을 건너니 백성이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나와 말머리를 붙잡고 올며 “우리 사또님 오신다!”했다는데, 글쎄 어떻게 된 백성이 용천에 살면서도, 그 산성을 아침 저녁 바라보면서도, 그에 관한 말 한 마디를 아니해 줄까? 정말 물 아랫놈들이 되어 그런가? 물 윗놈들은 무었을 했나? 고향이 무엇이 고향인가? 산이요, 물이면 고행인가? 그 사람, 그역사가 있어야 고행이지. 사자앙천혈이 있어서 그 자리에 묘 쓰고 잘 되겠다고 물 위에서 지관 데리고 내려오지 말고 이 산성이 임장군이 쌓은 것이다, 이 흙이 그의 눈물이 밴 흙이다. 했으면 정말 사람다운 자식이 났지. 애국심 없이 나라가 설 수 없고 문화가 나올 수 없다면 고향 없이는 애국심 없다. 그리고 고행은 제 고장이 낳은 인물을 존경하고 제 고장 역사를 알아서만 있다.
나는 지금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아, 내 고향은 어딘가? 임경업 장군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내가 무식해 그런지, 사람과 일을 판단할 줄 몰라 그런지, 내가 보기에는 이충무나 임충민이 꼭 같은 정신인은, 처지를 바꾸어놓으면, 나라 위하는 데선 이이가 그요 그가 이일 터인데, 세상이 이충무를 찬양할 줄은 알면서 임장군에 대하여는 어찌 그리 냉랭한고? 충무공은 싸움을 해서 이겼고 충민공은 하다가 실패했다고 해서 세상이 그리도 현금주의인가? 사실 억울하게 돌아가고 그 큰 뜻을 펴지 못한 그일수록 그 한을 풀어드려야 하지 않을까? 그 정신이 살지, 그 이루어놓은 사업이 사나? 일이 되고 못됨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가 백마산성에 가고 용굴산성에 가서, 그가 준비하고 준비해 청태종이 그리 나오기만 하면 단번에 무찔러버리려 하다가 그 기미를 안 청태종이 가만히 돌아서 적유령으로 몰려들어왔기 때문에 그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돌아가는 길을 엄습해 분풀이를 하려다가 그것도 겁쟁이 조정이 하지 말라 해서 부득이 그만두게 되던 그 한을 그 무너져가는 성굽 밑에 눈물로 풀어볼까? 그러나 어디를 헤매거나 사점은 내 고향이다. 내 속엔 사점이 있다. 사자앙천혈이 있다. 나는 물 아래서 감탕물을 먹고 자라나 하늘로 올라가고야 말려는 사자 새끼의 영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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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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傾箱倒?(경상도협)
傾(기울 경) 箱(상자 상) 倒(넘어질 도) ?(상자 협)
세설신어(世說新語) 현원(賢媛)편의 이야기. 진(晋)나라 때, 태위(太尉)인 치감은 자신의 딸을 매우 예뻐하였다. 그는 사도(司徒)인 왕도(王道)의 아들과 조카들이 모두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청혼하고자 했다. 중매인은 왕씨 집안의 젊은이들을 살펴 본 후, 치감에게 말했다. 왕씨댁의 자제들은 매우 훌륭하였습니다만, 한 자제는 배를 드러낸 채 침상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훗날 잠을 잤던 이 젊은이가 치감의 사위가 되었는데, 그는 왕도의 조카로서 후세에 이름을 날린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였다. 왕희지는 처남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사안과 사만 등과는 마음이 잘 맞았다. 한번은 왕희지의 아내가 친정에 다니러 와서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씨 집안 사람들은 사안과 사만이 오면 광주리를 다 쏟아(傾箱倒?) 음식을 차려 맞이하면서도, 너희들이 오면 평상시 처럼 대접하니 다음부터 번거롭게 왕씨 댁에 내왕하지 않도록 해라.
傾箱倒? 이란 가진 것을 모두 다 꺼내놓음 을 비유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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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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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구두닦이 내 남편 - 김미라
삶을 통해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포르투갈의 격언
내 남편의 직업은 구두닦이다. 길에서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언제나 시커먼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과 구두약에 염색된 손을 하고 있다.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인지 항상 밝은 웃음을 짓고 다니는 남편의 모습이 무척 천진스러워 보일 때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나는 대통령 부인이 되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지금은 구두닦이의 아내가 된 것이다. 그가 구두닦이를 시작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그의 집에서 우리의 결혼을 반대하자 고집이 센 그는 누구의 도움도 안 받고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겠다며, 나와 함께 단칸짜리 셋방 하나를 얻어 살림을 차렸다. 그때부터 그는 구두 닦는 직업을 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치사스러운 직업이라고 투덜댔으나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최근에 그는 친구와 함께 비원 근처의 어느 빌딩 하나를 맡아서 월급제로 일하고 있다. 그 빌딩은 15층 건물인데 구두닦이는 엘리베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계단으로 오르내려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밤이 되면 잠자리에 쓰러져 코를 골며 자버린다. 어떤 때는 피곤이 겹쳤는지 잠 속에서 헛소리를 내지르기도 한다.
"야, 협중아, 이번에는 니가 올라가라. 나 다리 아파 죽겠어."
나는 그의 잠꼬대를 듣고 다리를 주물러 주다가 엉엉 울어 버린 일도 있다. 내 울음 소리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 길은 남자가 한 번쯤 걸어 봐야 하는 길이야."
이제 나는 곧 태어날 아기와 그를 위해, 비록 구두닦이의 아내이지만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훌륭한 아내가 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주부)
깊은 강물은 소리 나지 않는다 - 류영옥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3학년 때까지의 등록금과 달마다 내는 2만 원뿐이다. 쌀은 집에서 날라다 먹어라."
그러나 대학 생활이란 것이 어디 등록금과 방과 쌀만 갖고 해결되던가? 책값, 옷값, 각종 학교 행사 및 서클 회비, 그리고 커피값까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많이 원망했다. 해마다 농토를 늘릴 정도로 부자인 어머니가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있냐며. 그 갈등의 고리가 잠시 풀린 것은 2학년 겨울 방학 때였다. 집안이 어려워 우리 집으로 복학 등록금을 빌리러 온 동네 대학생에게 어머니는 선뜻 돈을 내놓으며 말씀하셨다.
"자네는 돈의 귀함과 천함을 잘 아는 사람으로 여겨지네. 등록금을 꿔주니 졸업 후 2년 내로 갚게. 안 갚아도 좋으나 그때 불쌍해지는 사람은 돈을 못 받는 내가 아닐세. 지금의 자네 처지와 돈을 빌리는 심정을 잊어버린 자넬세."
내 어머니는 자상하거나 인자한 분이 아니었다. 공들여 싼 도시락, 리본을 들여 예쁘게 땋은 머리, 털실로 짠 스웨터, 이런 것들은 나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자취 생활을 하면서, 밑반찬을 싸 들고 딸을 방문하는 다른 어머니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우리 어머니도 다른 어머니들처럼 자식을 사랑하는 걸까. 이런 의심을 품기까지 했었다. 밤새 산길을 걸어서 이고 오신 어머니의 동치미 보따리에 목이 멘 그 새벽녘까지는. 내가 강원도 깊은 산골의 탄광 마을에서 자취를 할 때였다. 시골 자취방이란 것이 허술하기 짝이 없어 나는 그만 연탄 가스에 중독되고 말았다. 보건소로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머리는 깨어질 듯하고, 물 그릇조차 집을 기운도 없었다. 무섭고, 외롭고, 난생처음 어머니가 그리웠다. 늦도록 훌쩍이다 까무룩 잠이 든 새벽, 두런거리는 소리와 낯익은 목소리에 문을 밀쳐 보니 머리에 보따리를 인 어머니가 하얀 달빛 아래 서 계셨다.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충청도에서 길을 떠나 오셨건만 평창에서 막차를 놓치는 바람에 다음날 새벽 차를 기다리지 못하고 밤새 산을 넘으셨던 것이다.
"애가 타서 여간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서리가 하얗게 내린 동치미 보따리를 풀면서 말씀하시는 늙은 어머니 무릎에 엎드려 나는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지금도 나는 부모를 원망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
"깊은 강물은 소리 나지 않는다. 자식이 그 깊이를 모를 뿐이지."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엔 할아버지 거지가 한 명 있었는데, 온몸이 꽁꽁 얼어서는 자주 우리 집으로 찾아들곤 했었다. 이른 아침마다 식구들이 밥상을 받고 둘러앉은 방에 부랑자를 불러들이는 어머니에게 불만을 품고 내가 한 번 심하게 대든 적이 있었다. 그때 좀처럼 눈물이 없으신 어머니께서 글썽거리며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너도 자식을 낳아 보거라. 남에게 모질게 대할 수 없음도 그 화가 행여 자식에게 끼칠까 두려워서고, 좋은 일을 하면서도 밑바닥 마음으론 이 공덕이 자식에게 쌓여지길 빌게 되는 것이 어미의 심정이다."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20대 중반에 몇 년 간 나는 보육원 시설에서 봉사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결혼을 안하겠다는 딸을 걱정하던 어머니였으나 정작 내가 그 생활을 포기하고 결혼할 남자를 데려가자 무겁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떠나 온 애들에게 평생 못 벗을 빚을 졌구나. 너를 엄마라고 부르던 그 애들에게 진 빚을 잊지 말고 살아라."
생활에 불만이나 자만이 생길 때마다 나는 어머니의 그 음성이 생생히 들려 와 고개를 숙인다. (수원 권선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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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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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 순간에서 영원으로 - 실비파탱
제2장 인상주의의 전성기
"아르장퇴유, 생드니항 구빈원 근처 오브리 저택"
이것은 1871년 12월 21일 모네가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주소이다. 이 편지에서 그는 "우리는 지금 이사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마네가 그에게 권한 집인 듯한) 이 집은 그가 살던 집에서 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 언제나 모네에게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던 센강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는 요트며 예인선, 산책로로 유명한 아르장퇴유 저수지를 비롯해 1870년 전쟁 이후 재건축이 한창이던 철교며 유료 교각들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모네는 계속해서 꽃을 그렸는데 주로 자신의 집 정원에서 작업했다. 1872년 봄 내내 그는 종종 카미유와 장을 모델로 삼아 풍경 속에서 인물을 표현하는 법을 연구했다. 생타드레스에서 르카드르 일가를 두 가지 작도에서 그린 적이 있긴 했지만 ((꽃이 있는 정원) 과 (정원의 잔 마르그리트 그카드르), 이번에 아르장퇴유에서는 정원 구석의 라일락 수풀을 햇빛이 서로 다를 떄 두 번 그리는 시도를 했다. 이 두 작품은 1890년대 모네작품의 주요 특징이 되는 연작의 효시에 해당한다. 센강과 집 정원 외에도 모네는 아르장퇴유 근처 시골풍경을 즐겨 그렸다.
"모네는 수상작을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하는 듯합니다."고 1872년 12월 12일 부댕이 평했다, 어쨌든 그해는 이 젊은 화가에게 작품의 질이나 수입에서 결실이 따른 한 해였다. 그는 38점의 작품 중 동생 레옹에게 1점, 마네에게 1점, 루이 라투셰란 거래상에게 5점, 그리고 뒤랑 뤼엘에게 1만 2,100프랑은 받고 가장 많은 29점을 팔았다. 이 거래내역은 모네의 장부에 기록된 것인데, 그의 장부는 뒤랑 뤼엘이 남긴 영수증과 함께 모네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1년 뒤 작품 가격은 두 배로 뛰어 평균가가 750프랑까지 올랐다, 이번에도 주요 구매자는 뒤랑 뤼엘이었다. 그외에도 모네 수집 1세대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은행가 형제인 알베르와앙리 에크, 비평가이자 1878년에 나온 팜플렛 (인상파 화가)의 저자인 테오도르 뒤레가 있었다. 이 같은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모네는 보다 높은 가격으로 흥정을 하기 시작했다. 1873년, 모네는 노르망디로 돌아와 에트르타와 생타드레스 그리고 르아브르항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인상, 해돋이)란 제목을붙인, 불멸의 명작의로 남게 될 캔버스에는 날짜가 '72'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사실 그것도 바로 이시기에 그려졌다.
[인상, 해돋이]
1874년: 최초의 인상파전
1869년과 1870년 살롱전에서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던 모네는 이제 피사로나 시슬레와 마찬가지로 심사위원단의 마음을 돌려 볼 생각을 아예 포기해 버렸다.
1867년, 모네와 바지유를 비롯한 몇몇 친구들 사이에 살롱전과는 별도로 전시회를 열어 보자는 안이 제기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때는 기금 부족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제 그 안이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도두들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하는데 유독 마네만이 반대하고 있습니다."1873년 4월 22일, 모네는 피사로에게 이렇게 썼다. 5월 7일 극작가이자 미술비평가인 폴 알렉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는 "우리가 지금 조직하려는 협회"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11월 30일 모네는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 협회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라고 썼다. 피사로나 드가, 르누아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이 운동에 무척 헌신적이었던 것이다
몇 번이나 서립정관을 뜯어 고친 후인 (그 사이 모네가 중재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874년 1월 17일, 마침내 30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의 예술가를 포함하는 유한협동조합' 이 탄생했다. 조합의 첫 전시회는 4월 15일에서 5월15일까지, 카퓌신가 35번지, 사진작가 나다르 펠릭스 투르나숑의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카탈로그에 실린 65점의 작품을 낸 예술가들에는 부댕, 펠릭스 브라크몽, 폴 세잔, 에드가 드가, 아르망 기요맹, 에두아르 레핀 베르테 모리소,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부댕이나 레핀 같은 일부 출품자들은 2주 후에 열린 공식 살롱전에도 참여했다. 카탈로그 번호 95번에서 103번까지가 모네의 작품이었는데. 개중에는 한 번호로 두 작품을 분류한 것도 있다. 여기 출품된 작품들 가운데는 (양귀비), 르아브르의 바다풍경화 한 점, (카피쉰가), 실내를 배경으로 카미유와 장을 그린 것((오찬), 1868년)도 있었다. 이 작품들은 1870년 살롱전에서 낙선한 것들이었고, 이를 두고 모네가 살롱의 공식 심사위원단에 과감히 도전한 것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전시회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 풍경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둔(인상, 해돋이) 가 있었다, 비평가들은 이 반항적 집단에 즉각적이고도 맹렬한 비난을 퍼부었는데, 특히 모네가 주요 공격대상이었다. 루이 르루아는 (르 샤리바리)지 4월 25일자에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란 제목으로 (결과적으로 르루아는 인상파란 신조어를 만든 장본인이 되었다.) 경멸적인 사설을 실었고, 에밀 카르동도 (라 프레스)지 4월 29일자에 '인상파'에 대한 글을 실었다. 4월 22일 (로피니옹 나쇼날)에 논평을 게재한 아르망 실베스트르는 다소 관대한 태도를 취하면서, 모네와 피사로, 시슬리가 보여준 '사물을 보는 시선'에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러한 시선이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단지 인상의 효과뿐이다. 결국 제대로 된 표현은 선 묘사에 숙련된 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조합은 12월에 해산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76년, 인상파 전시회는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인상주의의 평온기
전시회를 둘러싸고 잔뜩 긴장하면서 보냈던 모네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아르장퇴유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친구들이 자주 찾아와 함께 작업을 했다. 모네 일가에 생활비를 보태 주고 있던 마네는 (정원의 모네 일가)를 그렸고 르누아르도 같은 배경으로 (모네 부인과 아들)을 화폭에 담았다. 센강의 다리와 요트는 화가들에게 변함없이 인기 있는 소재였지만 아르장퇴유 자체도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소재였다. 장기간 화단운동을 주도했던 모네는 이번에는 겨울풍경을 담는데 전념했다. 1874년 가을 모네는 다시 한번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생드니가 2번지, 역 바로 맞은 편에 있는 초록 덧문의 분홍색 집'이었다. 그 같은 주거환경은 그가 장차 지베르니에서 살게 될 집을 예감하게 해준다. 그 집의 정원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75년 작품이었는데, 1875년 봄, 화창한 날이면 모네는 카미유와 장을 대동하고 프티 게네빌리에 근처 강둑이나 꽃이 만발한 목초지로 나들이를 나가곤 했다.
"미래를 굳게 믿고 있긴 하지만 현재를 견디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1875년 6월 28일, 마네에게 보낸 편지)
형편이 어려워진 뒤랑 뤼엘이 처음으로 모네의 그림 구매를 잠시 중단하게 되자, 모네는 인상파 화가의 작품을 사 주는 새로운 구매자들에게 매달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모네의 장부에는 새로운 이름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주요 구매자들로는 오페라 바리톤 가수인 장 밥티스트 포레, 직물상인 에르네스 오슈데가 있었다. 특히 오슈데는 1874년 5월에 (인상, 해돋이)를 800프랑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만큼 열렬한 수집가였다. 그러나 1874년 모네의 수입(총 1만 554프랑)은 전년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1875년, 모네는 몇 차례 마네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역경을 벗어나지 못하면 당분간 팔레트를 잡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이 신의 있는 친구는 돈을 보내 주었다.
1874년 3월 24일, 뒤랑뤼엘이 경매인으로 나선 가운데 드루오 경매장에서 그림 경매가 이루어졌다. 르누아르, 모리소, 시슬레, 모네가 163점의 그림을 내놓았는데, 모네의 그림들은 통렬한 야유 속에 형편없이 낮은 가격으로 입찰되었다. 그날 그의 수입은 보잘것없었지만 개인적으로 모네의 그림을 취급하는 구매자 집단 (포레, 에밀, 블레몽, 에르네스 메, 앙리 루아르, 빅토르 쇼케)이 점점 성장하면서 그의 재능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담당했다. 제2회인상파전은 1876년 4월, 파리 르 플렌티에가의 뒤랑 뤼엘 화랑에서 열렸다. 카탈로그에 오른 모네의 작품은 18점이었다. 수많은 비평가들이 공격할 채비를 갖추고 모여들었지만, 그런 중에도 언론은 1874년 전시회 때보다는 훨씬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르망 실베스트르, 스테판 말라르메 등이 호평의 글을 실었고 에밀 졸라도 모네의 주도적 역할에 경의를 표했다.
"그룹의 주도자는 모네이다. 그의 붓솜씨는 유별난 화살함으로 단연 눈에 띈다."
화가이자 수집가인 귀스타브 카유보트와 의사인 조르주 드벨리오 같은 새 구매자들이 등장했다. 두 사람은 이후 모네의 재정적,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몽트게롱의 에르네스와 알리스 오슈데 부부
1876년 봄, 모네가 아르장퇴유를 벗어나 주로 파리에서 소재를 찾고 있을 무렵 에르네스 오슈데가 그를 몽트게롱으로 초대했다. 그의 아내 알리스가 상속받은 로탕부르그의 저택을 장식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연회장을 꾸미기 위해 모네는 두계절 동안을 그곳에 머물렀다. 여름에는 (칠면조, 몽트게롱 정원 한구석)(혹은 (다알리아))과 (사냥)(혹은 몽트게롱의 공원길))을 그렸다, 모네가 예르강 근처로 귀스타브 카유보트를 방문한 것도 이맘때였다. 이듬해 1877년 8월 20일, 알리스 오슈데가 여섯째 아이 장 피에르를 출산했는데 그 아이는 모네의 아들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훗날 모네에 대한 책을 쓰기도 한 장 피에르는 노년기의 자신의 모습이 모네와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우리는 아르장퇴유에서 떠나야 합니다."
몽트게롱에서 머물던 모네는 아르장퇴유로 돌아왔다. 다시 돈걱정이 시작되었다.
"후원자가 선뜻 거액을 내놓지 않는 한 우리는 아담하고 멋진 집에서 쫓겨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집에서 편안히 작업해 왔는데... . 그러나 저는 여전히 열의에 차 있고 계획도 많습니다."(1876년 7월 25일, 드 벨리오에게 보낸 편지)
1877년 정월 한 달은 생라자르역을 그리면서 제3회 인상파 전시회를 준비하느라보냈다. 이 전시회에서 모네는(칠면조)를 선보이게 된다.
아르장퇴유에서 생활하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그의 장부에는 수입이 많은 걸로 나와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가는 늘 빚에 쪼들렸고, 채권자들에게 제대로 돈을 갚지 못할 경우 가구까지 끌어내 팔아야 하는 건 아닌가 걱정해야 했다. 드 벨리오에게 그는 이렇게 썼다.
"또 다른 불운이 덮쳤습니다. 궁색한 걸로는 모자랐던지 이번엔 아내마저 병이 나고 말았습니다."
1878년 1월 15일, 그는 한 친구에게 이렇게 썼다.
"두 밤만 더 지나면, 아르장퇴우를 떠나야 한다네. 그러기 전에 먼저 빚을 갚아야 하고."
결국 카유보트가 그에게 돈을 대 주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아무튼 모네는 그 집에서 나왔다. 집주인에게(소풍)을 저당잡힌 채로...... 아무렇게나 둘둘 말려진 채 지하실에 처박혀진 이 그림의 운명은 한 시기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훗날 모네는 (소풍)을 복원하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이 그림이 자신의 젊은 날의 추억이라고, 자신의 초창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칠면조]
"파리! 파리로 가야 한다!"
답답한 시골공기에 갇혀 있던 젊은이들이며 작가, 화가들은 모두 그 생각에 골똘했다. 플로드 모네 역시... 파리에 살고 싶어했다.박물관이며 전람회에도 가 볼 수 있고 다른 화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작품을 살롱에 선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지나자 그들 대부분은 (특히 모네는) 조용한 생활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스핑크스에서 한두 가지 비밀을 찾아냈다." 비평가 귀스타브 제프루아(클로드 모네)(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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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경제/경영/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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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벌써 절망합니까 - 정문술
미래'라는 에너지
현명한 협박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광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집 전화번호까지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끈질긴 친구인 것만은 분명했다. 휴일을 기다려 집으로 직접 전화를 했던 것에도 어떤 의도가 숨어 있었으리라.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니까 매일같이 술고문을 시키는 겁니다. 한 사람당 세 사람씩 달라붙었습니다. 감시, 회유, 협박이죠. 진절머리가 나서 아예 안 나가기로 했습니다."
집단퇴사를 결심하고 나서 어디를 가든지 팀원들은 헤어지지 말자는 원칙하에 투표를 했는데 팀장인 그를 제외한 전원이 미래산업을 적어 내더란다. 어떻게 낌새를 눈치챘는지 그날부터 간부들이 그들을 괴롭히는 모양이었다. 프로젝트를 다시 해보라느니 직급을 올려주겠다느니 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술집으로만 끌고 다니는 통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무단퇴사 했다는 이야기였다.
"몇 군데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저희들을 받아주겠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D정밀로 가고 싶었습니다. 거기 잘 아는 선배님이 계시거든요. S전자에서도 긍정적인 제안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다른 팀원들은 전부 미래산업을 고집합니다. 사장님이 끝까지 받아주시지 않으면 저희는 결국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협박이었다. 일전에 말한 것처럼 내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어차피 회사를 나올 것이고, 어디로든 흘러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다시 대기업의 답답한 환경 속으로 돌아갈 것이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자신도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개방적 환경을 마련해줄 자신이 있었다. 고광일의 말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결판을 짓겠다는 단호함이 수화기를 통해서도 느껴졌다. 갈등이었다. 한참 후에야 나는 짤막한 대답을 해줄 수 있었다.
"오시오."
처임이자 마지막 파계라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나 그들을 위해서나 어떤 독선적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분당에 있는 동서증권빌딩 5, 6, 7층을 얻어 연구소를 마련해주었다. 우리 미래산업의 또 다른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미래 연구소(Mirae Research Center)'는 그렇게 생겨났다. 내부가 대충 정리되고 나서야 나는 그들과 첫 미팅을 가졌다. 그때까지 고광일 말고는 아무도 만나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이야기했다.
"첫째. 연구목표는 언제나 여러분들 스스로 정하십시오. 둘째, 연구비용은 제발 절약하지 말아 주십시오. 셋째, 나에게 업무 보고하는 사람은 즉시 해고하겠습니다."
다소 극적인 과장이 섞이긴 했을지라도 사장인 내가 이렇게까지 다짐했건만 대기업에서 일하던 기질은 쉽게 고쳐지질 않는 모양이었다. 고광일 상무는 지금도 틈만 나면 브리핑 자료를 들고 천안까지 찾아온다. 번번이 야단을 치지만 소용이 없다.
"사업설명도 좀 드려야겠고, 인사드린 지도 오래되었는데 오늘 오후쯤 한번..."
"분당에서 천안까지 뭐하러 와. 당신, 시간이 그렇게 많아?"
요즘도 우리의 전화통화는 늘 이런 식이다. 집단퇴사를 결심하고 나서 어디를 가든지 팀원들은 헤어지지 말자는 원칙하에 투표를 했는데 팀장인 그를 제외한 전원이 미래산업을 적어내더란다.
"첫째, 연구목표는 언제나 여러분들 스스로 정하십시오. 둘째. 연구비용은 제발 절약하지 말아 주십시오. 셋째, 나에게 업무 보고하는 사람은 즉시 해고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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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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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단테와 베르질리우스(Dante and Virgil in Hell)William-Adolphe Bouguereau (1850).]
- 그림을 누르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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