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 함석헌
제1부
물 아래서 올라와서 (1/2)
종살이에서 올라와서
검둥이 위인 부커 워싱턴의 제 이야기를 읽은 지도 몇십 년이 되어 인제 그 감격스러운 내용이 다 잊혀지고 기억되는 것도 없다. 단 하나, 그가 맨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갈때 그 입학시험이 소제였다는 것, 방을 쓸라기에 정성껏 깨끗이 쓸고 닦았더니 그것이 교장의 눈에 들어 입학이 허락되었다던 이야기 정도다. 그러나 그 책의 제목만은 잊혀지지 않는다. 참 잘된 이름이다. 잘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부커 워싱턴의 일생을 ‘종살이에서 올라와서’라는 이 한 마디보다 더 잘 줄여 나타낼 말은 없을 것이다. 그가 제 손으로 쓰는 전기에 이름을 무엇이라 붙일까. 요새 잡지기자가 하는 모양으로 읽는 사람의 호기심을 끌 것부터 생각하고 했다면 이런 이름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무심코 사실을 사실대로 썼으니 그렇게 됐지. 그가 자기 일생을 줄여 묶어서 ‘종살이에서 올라와서’ 라고 한것은 일생의 목표가 종살이를 벗어보자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러면서도 종살이를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살이에서 올라와서’라는 말 안에는 확실히 자유를 얻은 것을 자랑으로 알고 기뻐하는 뜻도 들어 있지만, 또 종살이를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 기상이 들어 있다. 물론 부끄러워하지. 부끄러우니 면하려 애쓰고 애쓰니 자유에까지 올라왔지. 하나 또 부끄러워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한다. 천하에 대하여, 나는 어미는 알지만 아비는 모르는 사람이라 하는 사람은 제가 몰래 난 자식임을 부끄러워 아니하는 사람이요, 그렇기 때문에 몰래 난 자식을 면하고 누구나 우러러보는 사람의 자식 노릇을 할 수 있지만, 몰래 난 자식인 것이 부끄러워 그것을 숨기려고 성을 빌어 쓰고 호적을 거짓 꾸미고 사는 곳을 감추어 산다면 그 사람은 일생 몰래 난 자식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부커는 검둥이인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검둥이가 아니다.
왜 부끄러운가? 사람이 못되니 부끄럽지. 왜 부끄럽지 않은가? 사람이니 부끄럽지 않지. 사람이 못된 것은 너 때문이다. 사람인 것은 나 때문이다. 네가 나를 검둥이라 하고, 종이라 하고, 무식쟁이라 하고, 가난뱅이라 하고, 죄인이라 하고, 약소민족이라 하니 부끄럽지. 부끄러우면 어떡해서나 부끄럽지 않도록 해야지. 너를 위해 그리해 주어야지. 그러나 내 사람된 바탕이 얼굴빛으로, 일하는 탓으로, 돈 없음으로, 지식 없음으로, 한때 잘못한 때문으로, 칼을 쥐지 못했음으로 달라지겠느냐? 검둥이의 아들로 났거나, 누렁이의 아들로 났거나, 임금의 집에서 났거나, 말 구유에서 났거나, 갈보의 집에서 났거나, 내가 사람의 자식인 데서는 털끌만큼도 달라진 것이 없다. 내가 나를 위해서는 내게 당해진 역사의 짐을 버젓이 지리라. 그러면 생명의 님 앞에 어엿이 설 것이다. 부커만이 검둥이요, 종인가? 누구는 햇빛에 타는 살 아니 가진 놈 있고, 종살이 아니하는 놈 있나? 종이라면 다 씨종이다. 땅은 언제나 나를 아래로 내려끌고, 하늘은 언제나 나를 올려끌고, 눈은 볼데로만 가자고, 귀는 들을 데로만 가자고, 이 세상의 상전이라 하는 지배자, 압박자라 하는 것들은 자고 쉬는 때도 있지만, 이 상전, 이 지배자는 쉬는 순간도 없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서로 만나기 전은 몰라도 적어도 만남 다음부터는 나는 씨종이다. 자유없이, 자유하기 위해 싸우도록 태어난 것이다. 누가 끌어다가 만든 종이 아니요, 또 누가 가르쳐서 면하자는 버릇이 아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만히 있지 못한 것부터가 종살이다. 검둥이가 어미 아비만 아니라 어느 어미도 어느 아비도 동이다. 낳으면 그것도 종이 될 줄 뻔히 알면서도 저희도 아니 낳고 못견디는 힘에 몰려 낳는 것이다.
일본에 종살이할 제 자식을 낳아 무릎에 놓고는 “ 또 종을 하나 낳았구나. 네게는 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느냐?”한 것은 누구만이 아닐 것이다. 새끼 사랑하는 것이 어버이요, 종살이가 참혹한 것이라면 이를 악물고라도 아니 낳았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는 못하는 것이 인생이다. 아무리 자유, 독립정신 강한 민족이라도 나라가 망하고도 자식을 낳았지, 나라 망한 이튿날부터 결혼 그만둔 역사는 없다.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지만 종살이에서 종씨를 낳고, 또 씨종이라도 낳기 때문에 해방이 오는 날이 있다. 나라 망한 이튿날 자식 낳기를 그만두면 나라는 영 망했을 것이다. 이것이 신비다. 정치의 종살이만 아니라 인생의 종살이도 그렇다. 씨종으로 씨종을 낳고, 씨종이므로 종살이 법을 들치운다. 해방은 종만이 할 수 있다. 남이 대신 해주는 해방이란 없다. 씨종은 내 손으로 벗어야 한다. 종살이가 부끄러울 것 없다. 인생이 씨종이지만 또 종이 아니다. 나면서부터 종이란 없다. 하나는 안방에서 나고 하나는 문간에서 날 때 분명히 상전과 종의 차별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옆에서 보는 저희들의 생각 속, 제도속에만 있는 것이지 그 아이들에게는 있을 리 없다. 상전의 자식이 먹는 것은 저도 먹고 싶어하고 그가 입는 것은 저도 입고 싶어하고 그가 지껄이면 저도 지껄이고 싶어하지, 종의 자식이라고 그러지 못한다면 천성은 없다. 예수는 거룩하고 나는 욕심을 못 면했을때 서로 딴 종류의 사람인 듯 하지만, 그것은 사회제도로 인하여 하나는 자유인으로, 하나는 종으로 나게 되듯이, 이 인생이라는 있음의 꼴에 따라서 되는 일이지 그 밑바탕에서 다를것은 조금도 없다. 그가 진리의 임금이라면 나도 진리의 임금이 되고 싶고, 그가 아브라함 있기 전부터 있었다면 아도 단군 있기 전부터 있다. 그가 사람을 향해 “나를 믿어라, 믿으면 영원히 살리라” 하면 나도 사람을 향해 그러고 싶고, 그러고 싶은 것은 그럴 권리와 자격이 있는 증거다. 하나를 하나님의 외아들로 보고 하나를 지옥 갈 죄인으로 보는 것은 속은 싫어하고 겉만 핥기 좋아하는 너의 버릇이지 나의 바탕때문이 아니다. 나도 겉을 보지 말고 속 얼을 보면 영원한 그리스도다. 예수도 속을 보지 않고 겉만 보면 사마리아 갈보한테도 대접을 못 받는 초라한 인생이다.
인생은 나면서부터 종이지만 또 인생은 나면서부터 자유다. 옷에 묻은 똥 때문에 앓는 사람이 없는 것같이 제도로 좇아오는 종살이를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이 아니 쓸수 없는 육신 때문에 오는 정욕을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몰래 난 자식이지만 내 인격에 다름 있겟느냐 하고 천하에 내놓고, 나는 아버지를 모른다 하면 하늘이 낳은 자식이 될 수 있다. 내가 부커의「종살이에서 올라와서」를 잊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내 소리기 때문이다. 어느 웅변가도 듣는 자의 속에 이미 있는 소리 이외의 웅변을 하는 재주는 없다. 나도 씨종이요, 나도 종살이를 면하잔 인격이요, 내게도 종살이를 부끄러이 여기지 않는 정신이 있다. 인생의 역사는 다 종살이에서 올라가는 역사다. 그런데 세상에는 왜 그다지도 종살이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많은가? 돈이 없는데 있는 체, 지식이 없는데 있는 체, 잘못이 있는데 없는채. 부끄러울 것이 없지 않은가? 종이란 저희가 하는 소리지 내가 아니다. 종으로 난 것은 내가 택해 된 것이 아니다. 내게 지워진 짐이지. 지는 것이 사람이요, 자유하는 길이지 피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본래 시험문제를 내는 선생의 마음엔 사람을 차별해서 하는 마음이 없다. 받는 내 맘이 차별해 보기 때문에 쉽고 어렵고 미움이 일어난다. 문제는 스스로 종살이를 부끄러워하는 데, 내가 정말 종이나 되는 것처럼, 사회제도의 한 일이 정말 내 아버지 어머니를 더럽힐 수 있는 것처럼, 내 아버지 어머니의 정욕이 내 인격에가지 정말 점을 찍을 수 있는 것처럼, 나의 한 잘못이 정말 내 영혼에까지 흠집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있다.
이날까지 독립을 못해 온 민족이면 민족이었지, 그것이 이 앞으로 사는 데 아무 영향을 줄 것 없지 않은가? 잘못한 역사를 잘한 것처럼 구구하게 꾸미려면 그것은 내 본바탕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 인정함이요, 그렇게 교육하는 데서 벌서 이 다음날 가서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는 날 제 나라를 업신여길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구역나는 것이, 없으면서 있는 척하는 것에 더한 것은 없다. 남의 전쟁을 삯으로 하는 처지면 그렇다고 솔직히 제 신세를 인정하고 그것을 부끄럼없이 해서 면하도록 할것이지, 실속없는 숫자를 자랑해선 무엇하나? 군대 힘이 숫자에 있는 것도 아니요, 교육의 정도가 숫자에 있는 것도 아닌 것 아닌가? 사람앞에서 보리밥 먹는 것을 부끄러이 알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는 가난을 면할 날이 오겠지만, 빚을 내서 생활의 겉을 꾸미는 자는 영 노동자생활을 못 면할 것이다. 노동이 부끄러울 것 없다면 살기 위해 민족 전체가 남의 싸움을 해주는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 제발 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처럼, 내 힘으로 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힘으로 우리 살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속이려 들지는 말라!
얻어먹게 되면 얻어도 먹지. 본래 내 것 네 것이 없는 것인데 제도라는 협잡을 해 가지고 슬쩍 모르게 도둑질을 해서 모은 것이 부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한 구석에서 얻어먹는 놈이 생기도록 된 것이다. 내가 천하에 내놓고 얻어먹으면 나의 잘못과 사회의 잘못을 심판하는 것이 되지만 얻어먹는 것을 부끄러이 알아서 가리고 속이려 하면, 체면을 보려 하면, 나의 잘못도 잘못이려니와 더구나 모든 개인의 잘못의 원인이 되고 기회가 되는, 사회제도의 잘못을 가리고 옳다 해주는 일이 된다. 이 백성은 오래 종살이를 해온 백성이므로 종살이를 부끄러워하는 버릇이 붙었다. 그러므로 종살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부터 가르쳐야 한다. 종살이를 부끄러워하는 것은 영 벗어볼 생각 아니하기로 작정한 맘이다. 감춰가면 두고두고 하겠다는 비겁이다. 빌어먹거든 천하를 내놓고 얼굴 버쩍 들고 빌어먹어야 한다. 그래야 밥 주는 자가 좀 부끄러워할 것이다. 거꾸로 아닌가? 빌어먹는 놈이 있으면, 그것은 있는 놈의 부끄럼이지 없는 놈의 부끄럼이 아니다. 옳게 된 나라에는 거지가 없지 않은가? 문명이 옳게 된 문명이면 얻어먹는 나라가 있지 않을 것이다. 종교에서는 구제를 덕이나 되는 것처럼 하지만 사실 구제는 눈 가리고 해야 옳은 일이다. 그래 예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지 않나. 해야 할 일이지만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받는 자가 얼굴을 숙일 것이 아니라 주는 놈이 얼굴을 돌이키고 주어야 옳은 일이다. 해야 할 것은 구제가 아니고 내 가진 것을 팔아다 내놓음이다. 그러므로 얻어먹을 때는 얼굴을 버쩍 들어서 주는 자가 죄를 진 생각이 날 만큼 해야 한다. 미운 생각에 그리하란 말이 아니다. 거지 얼굴을 들기가 얼마나 거북하리오만 내가 십자가를 진 줄 알고 들어서 너와 나 사이에 있는 죄를 회개하도록 맘을 일으켜주란 말이다.
38선은 우리의 죄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죄요, 온 세계의 부끄럼이지 우리 혼자 질 짐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약하거든 약한 척하고, 민중의 실력이 없으면 없는 척하라, 없는 것을 있는 척 가리고 부끄러워하면 영 면할 날이 없다. 대학 세울 실력이 없으면 그만두고 국민학교나 잘하지 무슨 체면으라고 실력도 없는 것을 세우느냐? 국방의 실력이 없으면 없는 대로 어서 생활에나 충실하도록 하지, 없는 실력 있는 것처럼 전쟁 소리만 자꾸 하면 남이 우리를 침략자로만 보지 않나? 군비 자랑하던, 쌈 잘하던 앗시리아는 망하여 씨도 없지만, 생활력이 굳센 유대인은, 나라는 망했어도 아직 민족이 있고 민족이 있는 한 나라는 다시 서고야 말 것이다. 제발 우리의 종살이를 부끄러워 말도록 강대국이라는 나라의 양심을 찌를 때까지 부끄럼없이 약소민족 노릇을 해야 할 것이다. 공부만 하면 벼슬부터 하겠다는 것도 종살이를 부끄러워하는 생각, 빚을 내서라도 국회의원이 되어보겠다는 것도 종살이를 부끄러워하는 생각, 이대로만 가면 이 나라에 종은 없어지지 않는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맘이 일어나는 때까지 내가 철저히 없는 놈, 눌린 놈, 뺏긴 놈의 살림을 내놓고 해야 할 것이다.
물 아랫사람
부커 워싱턴이 종살이에서부터 기어올라온 사람이라면, 나는 물아래서부터 기어올아온 사람이다. ‘종살이에서 올라와서’ 이야기가 나온 것은 내가 내 소리를 하려니 자연 연상이 돼서 한 소리다. 나는 황해 바닷가에 태어나서 ‘물 아랫사람’,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란 사람이다. 내가 뭐라고 내 소리를 할까. 무슨 자랑이라고 아니, 자랑이 될 것도 없고, 자랑하잔 심리 아닌 것쯤은 나도 스스로 안다. 사람이 제 주제를 알아야지, 내가 어리석어도 내 주제가 어떤 것쯤은 아는 나지, 그것도 모르고 주책을 떠는 나는 아니다. 그럼 고백인가? 뉘우침인가? 그것도 아니다. 고백이야 했으면 참 좋지, 해야지. 하지만 고백, 뉘우침을 쓰는 자격은 여간한 자격이 아니다. 어느 날 가서야 될지. 나는 그날이 오기를 바란다. 나 자신이 그만큼 참된 지경에 이르기를 바라고 믿는다. 제가 제 소리를 하려거든 잘한 것, 잘못한 것을 가릴 것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말하여야지, 천하에 내놔 괜치 않을 것은 말하고, 그래서 아니될 것은 슬쩍 감추어두면 그것은 참을 아는 도리도 아니요, 남을 대접하는 길도 아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은 그 고백을 해도 하는 자기 인겻에도 아무 손해가 없도 듣는 사람에게도 아무 나쁜 영행이 없을 만큼, 고백하는 이 자신이 인격적으로 높은 경지에 이른 후에야 되는 일이다. 새 사람이 돼서 고백하는 거지 억지로 고백을 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비바람을 겪고 자란 나무가 그 허물진 것을 천하에 드러내놓고 버티어 섰어도 그것이 자랑이 될지언정 아무 부끄럼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간디쯤이 되면 아버지가 숨이 지는 순간 부부끼리 자던 이야기까지 고백을 해도 좋지만, 해서 도리어 많은 듣는 사람에게 힘이 되지만, 간디 못된 사람이 그것을 하면 아니된다. 이 뜻에서 종교에서 고백을 시키는데, 그것이 좋을 일이면서도 잘못됨이 많이 들어 있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 내 살림을 그대로 공개할 자격에는 못 이르렀으니 고백은 못한다. 인제 어느 때 가서 할지.
지금 내 소리를 한둘 하는 것은 감히 고백하는 심정으로서는 못 되고 그저 쓰라는 이가 있어 쓰자니 뒷골목을 지나가다 빚 주인을 만나, 이놈아, 오늘은 단 한 푼이라도 내고야 간다 하면 어쩔수 없이 저녁 끼니로 비지 사먹으려던 한 푼이라도 내고야 마는 것같이, 빚을 무는, 다 무는 것도 아니요, 그저 있는 대로 조금이라도 내는 심리로 하는 것뿐이다. 또 아무 놈이면 제 소리 아닌 것이 있나? 대중 소설을 쓰는 가람은 물론 제 속을 떨어 내놓는 것이지만, 아인슈타인도 결국은 제 소리를 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과학은 아인슈타인의 인격이요, 자유당의 하는 일은 이승만의 인격 아닌가. 수학을 말해도 제 소리요, 철학을 말해도 제 소리요, 거짓말을 해도 하면 할수록 제 소리요, 남을 시키면 시켜서 할수록 제 꼴이다. 두 뺨이 빨갛게 꽃 같은 것이 사실은 썩어진 폐의 빛인 것같이, 무색 것을 아무것도 아니 입고 시커먼 옷을 입고 20세기 도시 복판을 살금살금 걸어가는 신부 수녀도 사실을 그 속에 귀신 사귄 당집같이 오색 칠색의 뒤숭숭한 것이 있는 증거다. 아무려면 제 소리 아닌 것이 있느냐? 제 소리 이상도 못하고 제 소리 이하도 못하는 것이 사람이요, 나라요, 역사요, 맘이다. 그러니 자랑이요, 흉이요, 유익이요, 손해요, 벌이요, 그거는 공연한 속임수고 그저 다들 제 소리를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래 나도 맘놓고 하기로 한다.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점’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점’이란 말이다. 백두산에서 서남으로 내리닫는 맥이 끝에 와서 천마산을 일으켜서 삭주, 의주, 구성, 세 고을의 만나는 곳이 되니 그 산을 의주 천마, 삭주 천마, 구성 천마, 소의 삼천마라고 부른다. 거기서 내려와서 의주의 백마산이 있고 그 백마에서 떨어져 몇 십리 내려오다가 솟은 것이 용골산, 그 아래에는 평지가 계속되어 폭 5, 60리의 살진 들이 열리는데, 그것이 용천군이다. 일망무제라고 하고 싶은 마냥한 들이 이어 닿아 여름에는 푸른 비단이요, 가을에는 황금 바다다. 그러므로 인총이 배여 그 빽빽하기가 전라도와 같은 곳이다. 사점은 그 끝에 내려가 있는, 실이 십리도 못되는 조그만 섬이다. 그것이 가장 큰 것이고, 그 부근 십 리 안팎에 신점, 간염, 삽섬, 구염, 남겸 하는 졸망졸망한 섬 다섯이 있어 그것을 합해 사자육도라 하는데 수백 년 전부터 동을 막아 육지에 대었으므로 이젠 이름만 섬이지 섬이 아니다. 땅은 살져서 곡식을 많이 나고 바다의 고기잡이도 잘되어 살기는 괜찮으나 워낙 교통이 불편한 곳인지라 사는 사람은 대개 가난하고 하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용천에서도 그 위대에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없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이라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진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 사점서 장을 보러 가려면 30리 길을 걸어 그 위대에 가야 하는데, 갔다올 때면 그 위대 사람들한테 그 소리를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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