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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편지】: 제967호
2020.5.09. (음 4.17) / 발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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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master@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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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오늘의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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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란 깊이있는 관찰 결과를 다정하게 전달하는 방법. - 리오 로스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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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말글 / 한글바로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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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
남북 문인 교류를 위해 북한에 다녀온 선배가 들려준 ‘전구 시리즈’가 있다. 휘황한 전등으로 빛나는 만찬장에서 들었다며 그가 전한 내용은 대충 이랬다. “북에서는 전구를 불이 들어오는 알, ‘불알’이라고 한다. 형광등은 ‘긴불알’이고, 거기에 꽂혀 있는 점등관은 ‘씨불알’이다. ‘불알’ 여럿으로 만든 것은 ‘떼불알’, 가로등은 ‘선불알’이다….” 하지만 북한 사람 만나서 ‘불알’ 얘기 꺼내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이 얘기는 한자어와 외래어 다듬어 쓰는 북한 언어 정책을 비틀어 지어낸 것일 뿐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우스개가 농담을 넘어 진담처럼 퍼져 있다. 그냥 떠도는 게 아니라 ㄱ 교수(ㅅ스포츠신문 칼럼), ㄱ 논설위원(ㅅ신문)처럼 일부에서는 사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북한에서는 샹들리에를 ‘무리등’(여러 개의 전등알이나 갖가지 모양의 형광등으로 이루어진 큰 조명등)이라 하지만 ‘샨데리야’도 적지 않게 쓰인다. 흔히 ‘스타트전구(램프)’라 하는 점등관(글로스타터)은 북한 사전에 ‘글로우스위치’(glow switch)로 올라 있기도 하다. 표기 방식의 차이일 뿐 북한도 외래어를 제한적으로나마 쓰고 있는 것이다. 남한의 ‘꼬마전구’는 북한에 가면 ‘콩알전구’가 된다. ‘전등알’(전기알), ‘등알’은 전구를 두루 이르는 북한말이다.(표준국어대사전) ‘내년부터 백열전구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전구 시리즈’를 떠올렸지만 ‘백열전구’에 담긴 뜻도 새겨볼 만하다. ‘백열’(白熱)의 뜻은 ‘물체가 흰빛이 날 만큼 온도가 높음’, ‘최고조로 오른 기운이나 열정’이다.(고려대한국어대사전) ‘백열’은 물리 현상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백열하다’, ‘백열적이다’처럼 인성을 드러낼 때도 쓰는 표현인 것이다. 새 기술에 밀려 백열전구는 사라지지만 그 불빛 아래에서 일하고 바느질하고 공부하던 우리의 백열함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
풋닭곰
올해 중복에 수산시장 나들이를 했다. 모처럼 저녁 함께하자며 불러낸 선배 따라 간 곳은 시장 한구석의 횟집이다. 가게는 허름했지만 여러 해산물이 올라온 상차림은 풍성했다. 푸지게 차려낸 밥상의 주인공은 민어였다. 점심은 구내식당의 삼계탕을 먹고 저녁에는 민어회와 부레, 탕까지 끓여 먹었으니 복달임이란 핑계로 과한 호사를 누린 셈이다. 국어사전은 복달임을 ‘복날에 그해의 더위를 물리치는 뜻으로 고기로 국을 끓여 먹음’으로 좁게 설명하지만, 민속사전은 여기에 ‘…물가를 찾아가 더위를 이기는 일’을 넣어 ‘복놀이’를 포함한 넓은 뜻으로 풀이한다.
복달임 음식 재료로 미꾸라지를 빼놓을 수 없다. 미꾸라지를 넣는 방식에 따라 추탕과 추어탕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통째로 넣는 게 서울식의 추탕이다. 삼복 즈음에 맛과 영양이 정점에 오르는 민어는 부레를 먹어야 제대로 먹은 것이라 한다. 흔히 보신탕이라 부르는 개장국, ‘개’ 대신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과 닭고기로 끓인 닭개장 따위도 빼놓을 수 없다. 닭개장이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은 말이어서인지 ‘닭계장’도 제법 쓰이지만 맞지 않는 것이다. 더위에 지친 몸을 추스르게 해주는 복달임 음식의 대표는 뭐니 뭐니 해도 삼계탕이고 계삼탕이다.
계삼탕은 ‘삼계탕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이지만 삼계탕의 원말이기도 하다. 닭고기가 주재료이니 ‘계+(인)삼+탕’이었다가 귀했던 인삼을 앞세운 표현인 삼계탕이 된 것이다. 삼계탕이 신문에 처음 등장한 때는 1963년이다.(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약병아리와 한뜻인 ‘영계’(병아리보다 조금 큰 어린 닭)로 만든 영계백숙은 ‘영’(young)과 무관한 말이다. ‘연계’(軟鷄)가 영계의 원말이다. ‘초여름에 풋닭곰, 삼복에 개장, 초가을에 미꾸라지 국’이란 북한 속담이 있다. ‘풋닭’은 ‘채 다 자라지 못한 닭’(소설어 사전)이고 북한에서는 삼계탕을 ‘닭곰’(북한어휘사전)이라 하니 ‘풋닭곰’은? 그렇다, 영계백숙이다.
강재형/미디어언어연구소장·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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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눔 → 우리나라 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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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白夜) - 기형도
눈이 그친다.
인천(仁川)집 흐린 유리창에 불이 꺼지고
낮은 지붕들 사이에 끼인
하늘은 딱딱한 널빤지처럼 떠 있다.
가늠할 수 없는 넓이로 바람은
손쉽게 더러운 담벼락을 포장하고
싸락눈들은 비명을 지르며 튀어오른다.
흠집투성이 흑백의 자막(字幕)속을
한 사내가 천천히 걷고 있다.
무슨 농구(農具)처럼 굽은 손가락들, 어디선가 빠뜨려버린
몇 병의 취기를 기억해내며 사내는
문닫힌 상회(商會)앞에서 마지막 담배와 헤어진다.
빈 골목은 펼쳐진 담요처럼 쓸쓸한데
싸락눈 낮은 촉광 위로 길게 흔들리는
기침 소리 몇.
검게 얼어붙은 간판 밑을 지나
휘적휘적 사내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밤, 빛과 어둠을 분간할 수 없는
꽝꽝 빛나는, 이 무서운 백야(白夜)
밟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눈길을 만들며
군용(軍用)파커속에서 칭얼거리는 어린 아들을 업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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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명상/지혜/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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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 스펜서 존슨
2장 - 이야기 (3/4)
다시 미로 속으로
날이 갈수록 꼬마인간들은 굶주림과 스트레스로 인해 약해졌다. 허는 사태가 호전되리라는 기대로 시간을 허비하는 일에 싫증이 났다. 그는 이내 사라진 치즈에 대해 집착하면 할수록 상황은 악화되기만 할 뿐 자신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치즈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불투명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했다.
"내 말을 들어봐. 우린 현실을 받아들여야 해. 치즈는 이곳에 없어. 매일 같은 일만 반복하고 있지. 텅 빈 창고에서 기약없는 미래를 기다리며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어."
허 역시 미로 속을 다시 달리고 싶지 않았다. 치즈가 어디에 있을지 정확히 예측할 수도 없고, 그 속에서 길을 잃을 위험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운동복과 신발을 어디에 두었지?"
C창고에서 만끽한 안락에 취해, 이런 날이 올 줄 몰랐던 그들은 운동화마저 어디에 두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한참을 뒤져서야 그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다시는 필요가 없을 것처럼 느껴졌던 운동복과 신발을 보자 허는 갑자기 목이 메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허는 물끄러미 바라보던 헴은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물었다.
"설마 다시 미로로 가려는 건 아니겠지? 사람들이 치즈를 가져다 놓을 때까지 나와 함께 기다리는 것이 어때?"
"너는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허가 말했다.
"아무도 우리가 먹던 치즈를 다시 가져다 놓지 않을 거야.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없어. 이제는 새 치즈를 찾아야 해."
헴이 대들었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도 치즈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만일 다른 곳에 있다 해도 우리가 찾을 수 없으면 어떻게 할 거야?"
"나도 몰라."
허는 그때까지 수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질문을 무시하기로 했다.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새 치즈를 찾았을 때의 여러 가지 행복을 떠올리기로 했다. 포만감이 주는 안식과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우리 주위의 환경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항상 그대로 있길 원하지. 이번에도 그랬던 것 같아. 그게 삶이 아닐까? 봐, 인생은 변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잖아.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
허는 그의 쇠약해진 친구를 바라보며 설득하려고 노력했지만 헴은 두려움의 분노로 바뀌어 허가 하는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허는 그의 친구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헴이 완강한 태도를 버리지 않았기에 냉정히 그의 애원을 거절했다. 헴과 자신의 어리석었던 행동이 부끄러웠다. 왠지 모를 후련함이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떠날 채비를 마치자 허는 더욱 힘이 솟았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어리석음을 웃어넘길 수 있게 되었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미로로 떠날 시간이야."
헴은 허를 비난하며 대꾸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허는 작고 날카로운 돌 조각을 들어 헴을 위해 늘 하던 대로 치즈그림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벽에 썼다. 헴이 마음을 바꿔 새 치즈를 찾아나서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헴은 그것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허는 머리를 밖으로 내밀고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미로를 응시했다. 그는 어쩌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 곰곰히 생각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전까지는 미로 속에 더 이상 치즈가 없거나. 있어도 찾을 수 없을 것이라 믿었다. 두려움이 그 자신을 어찌 할 바를 모르게 만들고 무기력한 공포를 느끼게 했다. 헴은 아직도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하는 어리석을 질문에 빠져있지만, 허는 이제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나고자 한다. '왜 좀더 일찍 자리를 박차고 나서지 못했는가?' 하는 후회를 마음속에 품고서. 허는 미로를 향해 출발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있을 때 느꼈던 평온함이 떠올랐다. 한동안 굶주림에 떨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 친근한 곳이 여전히 자신의 발목을 죄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허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정말 미로 속으로 가고 싶은지 한 번 더 고민해 보았다. 그가 예전에 써놓았던 글귀가 시야에 들어왔다.
두려움을 없앤다면 성공의 길은 반드시 열린다.
두려움의 극복
그는 생각해 보았다.
두려움이 때때로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 자신도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두려움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생각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흐르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허는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그곳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다시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그는 깊은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미로를 향해, 미지의 세계를 향해 천천히 달려나갔다. 그는 길을 찾으며 C창고에서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 너무 오랫동안 치즈를 못 먹어서 몸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미로 속을 달리는 데 예전보다 더 힘이 들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는 만약 다음에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없이 변화에 따르리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하면 일이 더 쉽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치즈도 없는 창고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낫지."
출발 후 며칠 동안 허는 여기저기에서 약간의 치즈를 발견했지만 치즈는 곧 떨어졌다. 허는 헴이 용기를 내어 미로로 나올 만큼 충분한 양의 치즈를 발견할 수 없었다. 허 자신도 아직 확신이 없었다. 미로에 대한 불안감이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있는 까닭이었다. 지난번 미로 속을 다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많은 변화가 보였다.조금 앞으로 나아갔나 싶어 둘러보면 막다른 곳이었다. 여기저기 가로놓인 장애물들이 그의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앙금처럼 남은 두려움이 때때로 당혹감을 느끼게 했지만, 치즈를 찾아서 미로 속을 다니는 것이 전에 걱정했던 것만큼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치즈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과연 실제적인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배가 고플 때면 먹을 것을 준비해 올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C창고에서 나왔을 때, 이미 그곳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허는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새 치즈에 대한 기대를 통해 자신을 독려했다. 참고 견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지금, 필요한 것은 행동뿐이었다. 그는 스니프와 스커리가 할 수 있으면 자기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안락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치즈는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었다. 치즈의 양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고 남아있는 치즈는 오래되어 맛이 변해가고 있었다. 그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치즈는 오래되어 곰팡이까지 피어 냄새가 났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다가올 미래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도, 허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견된 결과는 나타나기 마련이야. 스니프와 스커리는 변화를 알아차리고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야.' 그가 C창고라는 벽에 갇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벽에 글을 썼다. 치즈냄새를 자주 맡아보면 치즈가 상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시간을 헤맨 끝에 마침내 허는 큰 창고에 도착하게 되었다. 규모로 보아 맛있고 싱싱한 치즈가 가득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실망스럽게도 창고는 텅 비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될수록 그에 비례해 허의 의욕도 떨어져갔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그를 유혹했다.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도 엄습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헴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때 문득 자신이 써놓았던 글귀가 떠올랐다.
"두렵지 않다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실제로 두려움은 커다란 무게로 그를 위협해 왔다. 매우 빈번하게. 어떤 때에는 자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조차 몰랐지만, 홀로 있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위축시킨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었다. 허약해진 몸과 마음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불안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알 수 없는 공포를 자아내는 두려움의 실체는 그의 마음속에 숨겨진 딜레마였다. 허는 아직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변화'를 향한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문득 옛친구가 생각났다. 허는 헴이 움직이기 시작했는지 혹은 아직도 두려움 때문에 마비상태에 빠져있는지 궁금했다. 허는 자신이 가장 행복했을 때를 기억해 보았다. 미로 속을 헤매며 치즈를 찾아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벽에 글을 썼다. 그 글은 헴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문구이기도 했다.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은 새 치즈를 찾는 데 도움이 된다.
모험의 즐거움
어두운 통로를 내다보니 또 다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저 앞에 무엇이 있을까? 텅 빈 공간일까? 아니면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공포가 그의 상상을 자극했다. 이제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을것만 같았다. 허는 잔뜩 몸을 웅크리고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던 자신감이 살아났다. 그는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였다. 어두운 복도로 뛰어내려가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허는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의 영혼을 튼튼하게 만드는 자양분을 발견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허는 점점 기분이 유쾌해졌다.
"내가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나는 치즈도 없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 지 못하는데."
그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고, 친구를 위해 기꺼이 글을 남겼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움직이면 마음이 홀가분해진다.
허는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그를 두려움에서 풀어주었다. 시원한 미풍이 미로 저쪽에서 불어왔다. 신선한 바람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나니 한결 기운이 솟는 것 같았다. 두려움을 떨치고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가슴 가득 기쁨이 넘쳤다. 허는 참으로 오랜만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기억 저편에 숨어있던 기쁨이 이제야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허는 마음속으로 하나의 그림을 그리면서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산더미처럼 쌓인 치즈, 헤엄을 치즈 치즈 속을 누비는 자신의 모습, 상큼한 치즈향이 코끝에서 느껴졌다. 허는 구체화된 그림을 꼭 실현하고 싶다는 의욕을 되새겼다. 그러자 그 치즈창고를 다음 공간 혹은 다음 통로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솟구쳤다.
새로운 치즈를 마음속으로 그리면 치즈가 더 가까워진다.
'왜 전에는 이렇게 해 보지 않았을까?' 허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는 힘을 내어 경쾌하게 미로 속을 달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치즈창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치즈 몇 조각이 입구에 있는 것을 보고 허는 흥분했다. 먹어보니 맛이 있었다. 몇 조각의 치즈는 그에게 힘을 주었다. 여러 가지 치즈를 먹고, 그 중 몇 개는 나중을 위해 또 헴을 위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다. 그는 기대에 부풀어 치즈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창고는 비어있었다. 누군가 이미 그곳에 와서 새 치즈 몇 조각만 남겨놓고 떠난 것이다.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엄청난 양의 새 치즈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즈는 부지런한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거야.' 허는 후회를 접고 혹시 헴이 이제 자신과 함께 떠날 준비가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지금까지 온 길을 되짚어 가다가 멈춰 서서 벽에 글을 썼다.
사라져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수록 새 치즈를 빨리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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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고사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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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面桃花(인면도화)
人(사람 인) 面(낯 면) 桃(복숭아 도) 花(꽃 화)
당(唐) 맹계(孟棨)의 정감(情感) 이라는 시에 얽힌 이야기. 당나라 때, 최호(崔護)라는 매우 잘 생긴 젊은이가 있었다. 어느 해 청명(淸明)이던 날, 그는혼자서 장안(長安)을 여행하다 성(城)의 남쪽에 이르렀다. 그는 복숭아 꽃이 만발한 곳에 집 한채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을 얻어 마시기 위해 대문을 두드렸다. 한 여인이 나와서 그에게 물 한 잔을 주었다. 꽃이 만발한 복숭아나무 아래에 선 여인은 마치 복숭아꽃 같았다. 최호와 그 여인은 상대의 뛰어난 모습과 아름다운 자태에 서로 반하였다. 이듬해 같은 날, 최호는 다시 그 곳에 가서 그 여인을 찾았다. 집과 담은 옛모습 그대로였지만, 문은 이미 굳게 잠긴채 사람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이에 최호는 시 한 수를 지어 사모하는 마음을 달랬으니......
지난해 오늘 이 문안엔, 고운 얼굴 복숭화꽃 서로 붉게 비추었지(人面桃花相暎紅). 고운 그 얼굴은 어디 가고, 복숭아꽃만 봄바람에 웃고 있네.
人面桃花 란 한눈에 반한 뒤, 다시 만나지 못해 그리워하는 여인을 비유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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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나눔 → 삶 속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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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1 - 정채봉, 류시화 엮음
1 가족
도시락 두 개와 소주 한 병 - 이형구
내가 초등학교 때 그렇게도 우리를 사랑하시던 엄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로부터 얼마 안 지나 아버지마저 우리 형제를 남겨 둔 채 눈을 감으셨다. 기나긴 겨울 밤들은 무척 힘이 들었다. 동생 준구의 울음을 달래기가 가장 힘들었다. 무서워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잠든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온양에 살고 계셨지만 어쩌다한 번씩 들릴 뿐, 누구 하나 돌봐 줄 사람이 없었다. 절간 할머니와 옆집 아주머니가 와서 빨래도 해주시고 김치도 담가 주셨다. 4월 22일, 아버지 제사가 다가왔다. 큰아버지는 오지 않으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준구와 나는 도시락 두 개를 준하고 아버지께서 평소 즐겨 하시던 소주를 한 병 사 가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계시는 산소로 갔다. 비가 오고 있었다. 우리는 도시락을 펴놓고 술을 부었다. 절을 하려고 서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우리는 아버지, 어머니를 부르며 엉엉 울었다.
(충남 보령군 청라중 3학년)
낙엽 케이크 - 정숙희
결혼 2주년 기념일을 앞둔 크리스마스였다. 그가 제안을 했다.
"우리 과천 대공원 가자."
'왜요?'하는 내 눈빛에 그가 말했다.
"크리스마스인데 먼 여행은 못 떠나도 가까운 데라도 다녀와야지."
그 무렵 그이는 낮에는 현장 기사로, 밤엔 야간 대학 3학년생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 삼십 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출근하고 밤 열두 시가 되어야 집에 오는 생활. 평일에는 물론 휴일에도 숙제 때문에 더 바빠 커다란 상 앞에서 일어날 생각도 못하던 그였다. 그런 그가 그날은 큰마음을 먹었음에 틀림없었다. 그의 제안대로 우린 눈사람처럼 옷을 꽁꽁 챙겨 입힌 한 돌바기 아들을 앞세우고 과천 대공원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나섰다. 캐럴송이 울려 퍼지는 거리와는 달리 대공원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넓은 벌판은 어제 내린 눈에 잠겨, 보이는 것은 온통 눈천지였다.
남이 밟지 않는 눈 위에 발자국을 새기며 정신없이 아이와 노는 남편의 모습이 이날따라 무척 행복해 보였다. 아이는 흰 눈 위를 뛰어다니며 웃어대고, 남편은 아이를 잡으러 뛰어가고...... 그러더니 저쪽에서 그이는 흰 눈 위에 앉아 있는 내게 소리쳤다.
"거기서 기다려. 이쪽으로 오지 말라구."
"왜요?"
"아, 글쎄... 비밀이 있어."
멀리서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남편이 보이고 아이는 제 아빠가 하는 모양을 흉내내고 있었다. 드디어 남편이 내게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봐. 선물을 줄게."
"뭔데요?"
물으며 다가간 내 눈에 쏟아져 들어온 빛무리. 그이는 흰 눈발 위에 색색의 낙엽들을 주워 모아서 글씨를 써놓았다.
'축 결혼 2주년!' 낙엽 글씨. 이런 선물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이는 외투를 뒤적이더니 그 위에 호빵 두 개가 담긴 비닐 봉지를 꺼내 놓았다. 성탄을 축하하는 케이크 대신이라며. 흰 눈발 위의 그 선물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입은 웃고 있었지만 내 눈시울이 자꾸 따뜻해져 옴은 왜일까? 그의 가슴속 온기 때문인지 아직도 따뜻한 호빵은 비닐 봉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이가 말했다.
"미안해, 여보. 크리스마스인데 아무것도 못해 줘서 예쁜 선물을 해주고 싶었지만 당신이 주는 하루 용돈 1,500원으론 역부족이야. 하지만 내 마음 알지, 당신."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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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실 → 지식/생활/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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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 - 조르주 장
제5장 출판업자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성공을 거두자 손으로 쓰는 일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인쇄술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손으로 직접 원고를 써야 하는 글쓰기의 세계는 전보다 더 확대되었고, 깃펜은 생각을 문자로 기록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인쇄술의 놀라운 발달과 대규모 출판의 실현이 가져온 주된 결과는 지식의 보급과 문어의 활용이었다. 옛날 필경사들에게도 그러했지만 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당한 권력을 의미했다. 장 폴 사르트르가 그의 소설 (말)에서 썼듯 문자의 습득은 곧 '이 세상을 정복하는 수단'이었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한 사람은 고려인이다. 1234년 고려인은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했다(그러나 서구인은 이 사실을 역사에 기록해 두지 않았다. 서구인이 알고 있는 금속활자 발명의 주인공은 구텐베르크일 뿐이다:역주). 이 기술이 언제 유럽에 전파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확실하게 알려진 사실은 1462년부터 구텐베르크, 푸스트, 그리고 쇠퍼가 개발한 마인츠 인쇄기가 유럽 전역에 퍼졌다는 것이다. 16세기에 도안공, 주자공, 식자공을 두루 갖춘 인쇄소 가문이 많이 생겨났다 베네치아의 인쇄업자 알두스 마누티우스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만들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서체를 개발하려고 했다. 그는 16세기 유럽에서 널리 쓰인 레테라 안티카 서체를 발명했다. 많은 도안공들이 이 서체를 모방했다. 마누티우스는 필기체를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페트라프카의 글씨에서 영감을 받아 우아하고 약간 비스듬한 필기체인 알디네, 즉 이탤릭체를 발명했다. 루카 파치올리는 자신의 저작(신성한 균형)에서 인체의 균형을 기하학적 모형으로 환원함으로써 서체를 발명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기하학적 모형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선화를 그대로 원용했다.
16세기 초에 서체만들기 작업의 주무대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로 넘어갔다. 특히 프랑스인 제프루아 토리가 1530년에 내놓은 여러 서체들은 인쇄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열렬히 숭배했던 도안공이자 식자공인 토리는 파치올리의 가르침을 좇아 샹뢰리 서체를 개발했다. 그는 곧 시몽 드 콜린의 전속 서체도안사로 임명되었다. 시몽은 파리의 몽테뉴 셍트-쥬네비에브에서 황금의 태양이라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다. 콜린이 사용하던 서체는 레테라 안티카에서 응용한 것이었는데 시몽은 그리스풍의 폰트(같은모양, 같은 크기의 활자 한 벌:역주)를 도안하는 작업에 열심이었다. 이 작업은 1540~1541년에 클로드 가라몽이 개발한 저 유명한 그렉 뒤 루아 서체(왕이 사용하는 그리스풍서체)를 디자인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탤릭체 그렉 뒤 루아를 만들어 낸 뒤에 가라몽은 토리의 서체에서 영감을 받아 로마풍의 서체(똑바로 세워진 정체)를 개발했는데 이것은 그후 활자계의 으뜸 서체가 되었다. 가라몽 로만 서체(한국에서 널리 쓰이는 이 서체는 영어식 발음인 개라몬드 서체로 알려져 있음:역주)는 샹플뢰리가 내세운 서체제작의 제일 원칠, 즉 '글자의 배열과 글자 크기의 균형을 절묘하게 실현한 예술과 과학의 화합'을 구체화 했다.
출판업의 선구자들
문학을 애호한 인문주의자 프랑수아1세 시대에 서체도안의 명문인 에스티앙가가 등장했다. 프랑수아1세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들 가문은 제네바로 피신했다. 그곳은 마르틴 루터가 고딕체를 사용하여 종교개혁 관련 출판물을 발행한 곳이었는데 에스티앙가는 이 도시를 유럽의 유수한 출판중심지로 바꾸어 놓았다. 18세기 중엽까지 에스티앙가는 앙리1세, 로베르, 샤를, 앙리2세,폴, 그리고 앙투안 등을 차례로 배출하면서 출판업의 성가를 한층 드높였다. 이 가문은 그리스와 로마 고전 번역물과 당대 학자들의 저서를 차례로 출판했고 새로운 서체도 만들어 냈다. 그보다 더 북쪽인 네덜란드에서는 프랑스 태생으로 앤트워프의 시민이 된 크리스토프 플랑탱이 활발한 활약을 보였다. 그는 스페인 왕 펠리페 2세의 전속 서체도안가였고 제본가이기도 했으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해 인쇄술의 무궁한 잠재력을 최대한 개발하려고 했다. 그의 작업소에는 한꺼번에 16대의 인쇄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34년동안 1500여점의 작품을 발간했는데 그중 하나가 스페인의 인문주의자인 아리아스 몬타누스의 감독하에 편찬된 폴리글랏 성경(여러 언어로 쓰인 대역 성경:역주)이다. 플랑탱 이외에 라이덴에 본거지를 둔 엘제비어 가도 지질이 훌륭한 종이와 정밀한 활자를 이용하여 좋은 책을 많이 출판했다. 이들은 대규모 상업출판의 효시다.
포켓북과 급진 사상
16세기말 반 종교혁명과 종교재판이 득세하여 새로운 사상을 억압하고 있을 때 신교국가인 네덜란드는 유럽 출판 협동조함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절대군주 체제에 적응할 수 없던 이들 출판인은 1550년 이후 라틴어 책자 출판을 중단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자국어로 출판하기 시작했다. 리옹 출신의 출판인 에티앙 돌레의 순교에 대한 기억이 이들 출판인의 가슴에는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돌레는 프랑수아 라블레와 클레망 마로의 저작을 출판했는데, 에라스무스의 (기독교 전사의 교본)을 출판하여 종교재판소의 분노를 사서 1546년 8월 3일 파리의 화형장에서 불타 죽었다.
네덜란드는 다른 나라에서는 출판 금지된 문학작품이 속속 출판되는 본고장이 되었다. 엘제비어는 그런 시대상황을 적절히 이용하여 손바닥만한 크기의 소형책자인 포켓북을 많이 출간했다. 이 소형책자는 알두스 마누티우스가 처음 고안했다. 루이 14세 시대에 가난한 사람과 미친 사람은 격리, 구금되었고 문자는 격자무늬의 감옥(모눈종이)속에 가두어졌다. 프랑스 국립과학원의 조장 신부는 왕실 지정 인쇄소에서 새로운 알파벳을 도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구속을 좋아하던 시대인지라 문자는 수학적 정밀성을 자랑하는 도식 속에 가두어져 철장 속의 포로같이 되었다. 모든 문자는 정사각형 속에서 도안되었고, 정사각형은 다시 64개의 자그마한 모눈으로 나누어져 격자모습을 취했다. 이것이 타이포그래피가 완성되는 원형이었다. 다른 주장이 있겠지만 문자의 전형을 창조한 도안공은 수학자라기보다는 예술가적 성질을 지니고 있던 필립 그랑장 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신선하고 분명한 것을 찾고 있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펴낸 (백과사전)은 장식이나 치장을 배격했다. 이 책은 지면을 아름답게 꾸미거나 장식하는 것보다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18세기에 들어서자 독자들은 이제 시각적인 즐거움보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찾기에 이르렀다. 독자의 욕구를 충족하려면 문자의 가독성을 높여야 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디도가 사람들은 새로운 정신이 담긴 서체를 개발했다. 1755년 프랑수아 앙브루아즈 디도는 단순하면서도 시원한 알파벳을 도안하여 이것을 피에르 루이 와플라르에게 시켰다. 당시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대표적인 서체라고 할 수 있는 이 디도 서체의 정교한 수직 글자꼴은 프랑스 타이포그래피의 정화가 되었다. 영국에서는 1716년에 윌리엄 캐슬런이 멋진 로만 서체를 도안했으며, 이것은 1776년에 미국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존 배스커빌이 만들어 낸 서체는 그 명성이 널리 퍼져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모방자가 나올 정도였다. 이들 모방자의 한 사람인 이탈리아의 지암바티스타 보도니는 보도니 서체를 개발했다.
문자의 역사를 바꾼 새로운 발명품
구텐베르크의 발명 이래 거의 변하지 않고 1783년까지 사용되어 왔던 수동식 인쇄기는 하루에 최대 300장 정도를 안쇄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해에 들어와 디도가 구텐베르크 인쇄기에다 쇠받침대와 구리판을 추가했다. 이 같은 금속 프레스는 사상 최초의 것으로 이를 이용해 대형 종이에다 인쇄할 수 있었다. 동시에 스풀(종이를 감는 틀:역주)위에서 종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 완성되었다. 1807년에는 가압장치가 발명되었고 1812년에는 평판인쇄(평판 위에 종이를 놓고 평판 프레스로 누르는것)대신에 여러 개의 인쇄판을 동시에 탑재할 수 있는 원압형(원통형)인쇄판이 발명되어 대체 되었다. 원압인쇄기는 프리드리히 쾨니히가 최초로 완성했는데영국에서 처음 쓰이기 시작했다.(소형 종이에 찍을 경우 한 번에 한 페이지만 인쇄할 수 있으나 대형 종이를 이용하면 한 번에 네 페이지 또는 여덟 페이지를 인쇄할 수 있었다. 평판을 사용하면 그 판에 들어 있는 내용밖에 찍을 수가 없으나 원압인쇄판을 사용하면 서로 다른 내용을 동시에 네 번 정도 찍을 수가 있으므로 인쇄속도가 빨라진다:역주). 동시에 자동 잉크 공급기가 발명되어 잉크볼(인쇄공이 판면에 잉크를 바를 때 쓰던 기구:역주)이 사라지게 되었고 인쇄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원압인쇄기는 하루에 110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28년에 오거스터스 애플거스와 에드워드 쿠퍼가 영국의 (타임스)지를 위해 발명한 4원압형 인쇄기의 출현으로 하루에 약 4000장까지 인쇄가 가능하게 되었다. 애플거스와 쿠퍼는 또한 종이 받침대도 회전하는 회전형 인쇄기를 발명했는데, 이로써 한 시간에 8000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이 회전형 인쇄기는 오늘날 널리 쓰이는 윤전 인쇄기의 선구라 할 수 있음:역주).
회전형 인쇄기가 주도한 속도 경쟁은 19세기 말 라이노타이프의 발명으로 더욱 불이 붙었다 구텐베르크 시대이래 식자공은 글자를 한자 한자 뽑아서 조합해야 했다. 1872년까지 식자공은 글자를 뽑아서 줄에 따라 정렬한 뒤 게라(조판한 활자판을 담는 그릇:역주)에 넣어 판반(인쇄를 하기 위한 판:역주)에 맞추어 본 다음 줄과 나무 쐐기를 이용하여 위치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인쇄가 완료되면 게라를 해체하여 활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숙달된 식자공은 시간당 최대 1500자를 조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이노타이프(1행 단위로 식자 해 주는 자동식자 주조기:역주)가 도입되면서 한시간에 9000자 정도를 조판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1930년에 들어와 사진 식자가 개발되면서 또다시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된다. 사진 식자는 발명 당시만 해도 인쇄 업체들에게 무시당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그 장점이 널리 알려져 활발하게 도입되기 시작했다. 신문이 그날그날 벌어지는 일을 보도한는 것이 이제는 꿈이 아니었다.
몇 개 인쇄판과 잉크를 사용해 한 페이지 양쪽면을 인쇄하는 기계가 발명되면서 원색 인쇄도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4, 5개의 롤러를 갖추고 4, 5개의 색깔을 쓸 수 있는 회전형 인쇄기만 있으면 고속 원색인쇄도 가능했다. 인쇄의 발달은 18세기에 신문의 발달은 가져왔다. 정기간행물이 처음 나온 것은 17세기 초엽 네덜란드와 독일에서였다. 1759년에 새뮤얼 존슨 박사는 이렇게 개탄했다. "지식은 늘려 주지 못하는 신문이 매일 가짓수만 증가하고 있다. 조간신문에 난 얘기가 석간신문에 또 나고 석간의 얘기가 그 다음날 조간에 또 나온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 의해 언론의 자유라는 개념이 처음 도입되고 1789년 8월에는 인권선언으로 구체화되자, 다음해인 프랑스에서만 300개 이상의 신문이 출간되었다. 이들의 한결같은 꿈은 영국의 (타임스)같은 신문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타임스)는 1785년에 존 월터에 의해 (데일리 유니버설 레지스터)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었고 그후 1788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 (타임스)는 편집자의 논설이 너무 직설적이어서 경세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18세기에 프라하에 사는 독일인에 의해 석판 인쇄술이 완성되었다. 이제 한가지 문제만 빼고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본문과 삽화를 동시에 인쇄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796년 알로이스 제너펠더는 뮌헨 근처의 졸른호펜 일대에서 나는 석회석이 불에 달굴 때 유성 잉크를 배척하는 성질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그는 1796~1799년 사이에 석판인쇄술을 발명했다. 이 인쇄술은 물과 기름이 서로 배척하는 성질을 이용한 것으로 1800년에 영국 특허를 얻었다. 그후 석판 대신에 얇은 금속판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사진을 사용하는 기술(1840년 개발)등이 보강되었다. 석판인쇄술은 1860년 이후 부쩍 수요가 늘어난 포스터 제작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제너펠더는 자기 고장에서 산출되는 석회석에 인쇄 잉크로 글씨를 쓴 다음 질산으로 대리석판을 부식시켜 볼록판을 만들어 악보 등을 인쇄했는데, 다공질인 대리석이 수분을 오래 지녀 유성인 인쇄 잉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석판인쇄술의 원리를 발견했음:역주). 이 시기에 타이포그래피의 스타일이나 응용에 결정적인 수정이 가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디자이너들은 삽화를 배치하는 방식을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문 레이아웃도 형태가 많이 바뀌어 독자의 반응을 수렴하는 쪽으로 변해 갔다. 독자반응의 수렴, 이것은 현대출판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인쇄의 주된 영역은 신문과 책이지만 펜으로 써야하는 영역이 여전히 남아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편지, 법률문서, 예술창작 등은 손으로 쓰고 있다. 손으로 직접 쓴 서면이 계약, 유언, 매매서류 등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해 오늘날에도 일부 법률문서에는 수기가 요구되고 있다. 그러나 필경사의 유일한 일거리였던 법률문서는 일반대중의 눈에는 곧 필경사를 고용한 악덕 사채꾼을 연상케하는 물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필경업을 악덕 고리대금업과 동일시했다. 필경사들이 과거에 오랫동안 빛나는 업적을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전문 필경사의 지위는 너무나 퇴락하여 19세기 말이 되면 술주정꾼으로 치부되기가 일쑤였다.
1750년 아헨이 살고 있는 요한 얀트센이라는 한 지방관리가 금속펜을 발명했다고 주장했다. "자랑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펜을 발명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편(보스턴 미캐닉)지는 금속펜이 미국에서 발명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보스턴의 유지인 페레그린 윌리엄슨이 발명했다는 것이다. 1808년에 발간된 독일 정기간행물은 쾨니히스베르크(현재의 칼리닌그라드)에 살고 있는 학교 선생이 발명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1740년에 발간된 프랑스 소책자는 금속펜을 프랑스인이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이들 국가에서 일반적인 수요에 부응하여 이 같은 기술혁신이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거위깃펜은 제작과정에서 균일한 품질을 보장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황금만이 그 대용품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었다. 손으로 만든 금속펜은 너무 거칠어서 종이를 찢는 경우가 가끔있었다. 그러나 기계를 이용한 생산과정이 점점 발달되어 값싸고 품질 좋은 펜촉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금속펜은 현대 산업사회 최초의 소모품이 되었다. 파스칼은 잘 쓸 줄 아는 것은 잘 생각할 줄 아는 것이라고 했다 19세기이래 필기도구는 점점 개량되고 갈수록 세련되었다. 좀더 정확하고 빠르게 쓸 수 있는 도구를 찾다보니 만년필, 볼펜, 타자기, 워드 프로세서가 발명되었다. 이러한 도구의 개발로 글쓰기가 훨씬 쉬워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과정에서 뭔가 잃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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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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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GC 1300은 에리다누스자리 방향으로 6,100만 광년 떨어져 있는 막대나선은하이다. 은하는 폭이 약 110,000 광년으로, 우리은하의 크기의 대략 2/3에 해당한다. NGC 1300은 약 200개의 은하로 이루어진 에리다누스자리 은하단의 일원이기도 하다. 1835년 존 허셜이 발견하였다.]
- 그림을 누르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위키백과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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