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과학 -
이야마 히로유키, 옮긴이: 이정임
프랭클린과
벼락
우연과 낙하 현상과의 의외의 관련이 앞 장에서는 명확해졌다. 담시 과학 역사 속에서 소문난 낙하사건을 우연과 관련지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가장 무서운 것은 벼락이다. 벼락 현상은 천상의 신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다. 벼락은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제우스가 가진 활활 불타는 창이었고, 리투아니아의 민간 전승에 의하면 하늘의 대장장이 페르쿠나스가 지상으로 떨어뜨린 불이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찬가 베다에 기록된 폭풍의 신 인드라는 바쥬라라고 불리는 번개를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들은 막대나 원반 무기로서 자주
그려졌다. 천둥은 신들끼리 싸울 때의 생생한 소리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고, 또는 지상의 인간에 대한 분노를 직접 표현하는 것으로써 무방비
상태인 인간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벼락이 신들의 무기인 이상 우러러보는 인간으로써 어느 정도 그 낙하를 예상치 못한다고 해도
그 공격 행위의 배후에는 반드시 신의 결연한 의지가 존재했다. 인간 측에서는 불투명하지만, 거기에는 우연이 아닌 노여움을 받을 만한 원인이
상정되어 있다.
제1장에서 소개한 이야기 중에서 불쌍한 세미마루를 역경으로 몰아낸 것은 부왕인 다이고 천황이었는데, 그 다이고
천황의 신상에도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부상악기'의 기술에 따르면, 연장8년 6월 26일 벼락이 청량전에 떨어진 후 천황은 병에 걸려
3일 후에 죽었다. 또 세미마루를 오사카 관문까지 데리고 가서 임금의 명령이라고 냉혹하게 버리고 온 태정관 차관 후자와라 기요츠라는 이 벼락에
맞아 즉사했다. 이것은 유명한 이야기인데, 이 930년의 낙뢰도 우연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연희 원년(901)에 또 다른
후지와라 도키히라의 중상모략으로 태재부에 좌천된 불운의 사나이 스가와라의 한맺힌 혼령이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쿄토의 키타노에 있는
텐만궁이 건립되었던 것도 이러한 해석에 의한 것으로, 벼락이 치면 사람들이 "구와바라 구와바라"라고 소리높여 부르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구와바라란 스가와라공의 봉토가 있던 곳으로 930년 이후 한 번도 벼락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주문이 생겨났다고
한다.
신의 원령을 번개불의 원인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낙뢰현상의 배후에 인격적인 존재의 관여를 일체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면 프리니우스는 인간에게 재난을 초래하는 하늘로부터의 여러 가지 강하 현상에 대해서 기록한 곳에서 이러한 현상은
"우연의 지배하에 있고 신조차도 예기치 못한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박물지' 제2권) 특히 벼락은 별이 있는 불이 낙하한 것으로
보고, 섬광이 구름을 갈라 관통하여 번개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과연 프리니우스의 말대로 벼락은 우연히 떨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원인이 있어서 필연적으로 떨어진 것일까? 18세기가 되어 마침내 한 가지 해결을 보게 되었다. 상대성이론을 완성한
아인슈타인이 다시 태어나면 물리학자가 아니라 연관공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까지의 생애를 처음부터 그대로 반복하는 것에 조금도 이견이 없다"고 '자서전'의 머리말에서 자신의 생애를 회고한 사람이 있다.
미국 자본주의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바로 그다. 프랭클린의 정치상의 공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팔라델피아에서 실행된
거대한 연의 실험이라면 한번 정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현재도 펜실베니아 대학 구내에 역사적인 실험 현장이었던 지점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미 인쇄업자로서 성공하고 문필 활동도 정력적으로 하고 있던 프랭클린 앞으로 영국의 왕립협회 회원 코린슨이 보낸 전기 실험용 유리관이
도착한 것은 1746년의 일이었다. 전기 실험이라고 해도 당시는 마찰에 의해 생기는 정전기를 순간적으로 방전시켜 그 결과 발생한 쌀알눈만한 전기
불꽃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가벼운 것으로 끌리는 인력에 호기심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거나, 손이나 발에 대고 감전 쇼크를 즐기는(전기가
너무 강해 고통을 당한 경우도 있다) 것과 같은 실험이 주류를 이루었다. 라이덴병(뇌전:라이덴, 벼락)과우연히도 일치하지만, 네달란드의 도시
라이덴의 학자가 발명한 축전병을 말함)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도 1746년으로, 그때까지는 마찰에 의한 대전체(유리나 송진이나 유황등)가
유일한 전기원이었다.
여명기의 전기 연구 프랭클린이 취미로 전기 실험을 시작한 후 최초의 논문을 쓴 해까지
영국 왕립협회 기관지인 '필로서피컬 트랜잭션션즈'에 투고된 전기 연구 역사를 살펴보자. 이 과학잡지는 1665년에 창간된 이래 본국 영국은
물론이고,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의 일선에서 활약한 연구자의 논문을 계속해서 실었다. 19세기 초까지 서구 근대과학의 활동 상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마도 가장 좋은 정보매체였을 것이다. 당시 대표적인 전기학자들의 논문들이 현재의 과학논문으로 생각되는 것과 크게 다른 것은 읽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1) '여러가지 물체의 마찰로 발생하는 전기와 빛에 관한 실험 보고'(호크스피, 26권, 1708,
89-92페이지)-원통형으로 자른 나무판을 밀납으로 싼 것을 프란넬천이나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에 생기는 전광을 야간에 관찰한
것. (2) '전기 인력을 동물이나 무생물에 작용시킬 때에 생기는 빛이나 그것에 따른 매우 놀라운 효과에 관한 실험과 고찰'(그레이,
39권, 1734, 16-24페이지)-강한 비단실로 건강한 사내아이를 묶고 거기에 마찰 전기를 띠게 한 후 그 아이의 손이나 발에 가까이 대면
쇼크를 느끼는 실험등, 같은 것을 닭이나 소등심에도 실시했다. (3) '전기를 띤 물체가 가진 반발력에 관한 보고'(필라, 39권,
1734, 400페이지)-마찰시켜 대전시킨 송진 위에 작은 쇠공을 놓고 가는 실로 작은 코르크 등을 묶고 그 쇠공에 가까이 대면 행성과 같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돌기 시작하는 것을 관찰했다. 실험하는 중에 필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편집자는 얼마 안 있어 소형의 플라네타륨(천계의
운행을 나타내는 기계) 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 죽음을 애석해 했다. (4) '1738년 4월 15일에 황태자의 크리후덴 저택에서
실시된 전기를 직선으로 420피트 전달시킨 실험 보고'(데자규리에, 41권, 1738, 209-10페이지)-포장용 끈이나 고양이 장을 이용해서
전기가 어느만큼 멀리까지 전달되는가를 실험했다. 저택의 정원에서 마찰 전기를 일으켜 거기부터 끈을 통해 저택의 실내문까지 전달시키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았던 실험. (5) '인체나 동물의 몸에서 나오는 발광체의 방산에 대한 고찰'(마이루즈, 43권, 1745,
441-46페이지)-스잔나 시월 부인의 촛불 미사를 드리는 동안 계속 불꽃에 감싸여져 있었다는 이야기와, 그 친척이 페치코트를 벗으려고 했을
때도 불꽃이 나왔다는 사건에 대해서. 고양이 털을 빗으로 빗었을 때도 같은 현상이 관찰되었다는 것이 보고되었다. (6) '전기에
감전된 사람과 그 아내가 받은 전기 효과에 관한 편지'(빈크라, 44권, 1746, 211-12페이지)-네덜란드의 연구자 뭇센브레이크의 실험을
전해 듣고 자신의 몸에 전기를 통하게 하자 큰 쇼크를 받았다는 논문. 맥박은 빨라지고 체온도 올라갔기 때문에 해열제를 복용했지만 머리는 무겁고
코피까지 나왔다. 실험적으로 아내에게도 전기를 감전시켜 보았는데 역시 쇼크를 받아 걸을 수 없게 되었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따라서 전기가
생명이 있는 것에 흐르게 하는 것을 중지하자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7) '식물에 대한 전기 효과에 관한 편지'(브라우닝,
44권, 1746, 373-75페이지)-가끔 자기 집에 있었던 인동덩굴과 식물에 전기를 흘려보내 관찰했을 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끝에서부터
보라색 빛을 발했다는 편지이다. 사람을 설득해서 피를 흘리게 한 후 전기를 통하게 했는데, 피가 흐르는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는 잔혹한 추가
실험도 이루어졌다. (8) '파스티앙 직물 상의에 전기로 불을 붙인 것에 관한 편지'(로쉐, 45권, 1748,
323-25페이지)-아들이 10세 경에 발작으로 쓰러져 성바소로뮤병원에서도 불치병이라는 진단이 내렸기 때문에 마지막 수단으로 하루 2회 전기를
흐르게 하자 병세가 약간 회복되고, 훨씬 강한 전기를 흐르게 하자 아들이 입고 있던 상의에 불이 붙었다는 관찰 보고. (9)
'왕립협회의 신사연합에 의한 전기 절대 속도의 측정실험'(워트슨, 45권, 1648, 491-96페이지)-2마일 정도의 회로를 만들어 한쪽
단자에 전기충격을 준 후 다른 단자를 잡은 사람이 쇼크를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측정했다. 몇 번 길이를 바꾸어 보아도 전기는 순간적으로
흐른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10) '전기력에 의해 유리 너머로 악취를 전달시키는 것에 다른 많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실패했다는
것을 선언하는 편지. 특히 보제 교수가 위덴베르그에서 실시한 전기에 의한 인간 미화 실험과 역시 전기로 사람의 머리 주위에 후광을 만들어내는
실험에 대한 검토가 포함되어 있다'(위트슨, 46권, 1749, 348-56페이지)-수지나 역청을 바르고 그 위에 사람을 눕힌 후 전기를 흐르게
하면 발끝이나 손끝부터 머리 방향으로 차례차례 빛을 띠게 되어 마지막에는 화가가 성인을 그린 것같이 멋있는 후광이 만들어진다는 보제 교수의
실험을 해보았지만, 그런 불가사의한 현상은 없었다고 분하게 여기는 논문이다. 그 내용을 본인에게 전달하자 실제로는 잘 닦은 갑옷을 입은 사람을
데리고 실험했고, 표현이 너무 시적으로 되어 오해를 일으킨 것같다는 사죄의 답변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첨부되어 있다. (11)
'전기에 의해 생기는 일부 현상에 관한 검토'(노레, 46권, 1750, 368-69페이지)-후에 프랭클린의 논적이 된 프랑스 신부가
이탈리아 여행중에 보 불가사의한 빛에 대해 보고했다. 어둠속에서 바다가 발광성 곤충으로 인해 빛나고 있는 광경을 전기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편지로 알려왔다.
한 번 읽어보면 여러 가지를 알 수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전기는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예측불허의
제어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여기 저기에서 '놀라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새로운 에너지원으로서 주목받으며 실용적인 편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1세기 반 정도의 세월이 지나야만 되었다. 그것도 18세기 말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우연한 발견이 없었다면 도시의 조명이나
기계의 동력원 등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을뿐더러 실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 귀중한 발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브라우닝의 연구 등은 지금까지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색다른 실험을 좋아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선인장에서 모차르트를 듣게 하거나(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후쿠시마현 키타가타시의 고하라 주조가 효모에 모차르트 음악을 들려줘서 향이 좋고
맛이 있는 청주 '클래식'을 제조하는데 성공해 판매하고 있다). 벅스터와 같이 미모사에 폴리그래프(거짓말 탐지기)를 접속하거나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브라우닝의 직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데자규리에의 보고 논문에서는 영국 황태자가 참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정을 잘 모르면 기이하게 비춰질 수도 있다. 이것은 씨름판에 왕(천황)이 참석한 가운데 시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시기에 이루어진 실험은
이제부터 말한 연 실험이나 혹은 파리 시민을 열광의 도가니에 바뜨린 기구 실험인데, 세상에 도움을 주기 위한 실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민중이나
귀족을 즐겁게 하는 오락으로서의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오락으로서의 실험 이런 전기 연구의 얼마되지
않은 전통을 이어받아 프랭클린은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홀로 실험을 시작했다. 그 무렵 그는 펜실베니아주 서기로 일하면서 도로에 포장 외에
조명에 관한 조항을 첨부하는 법안을 기초하고 있었다. 후에 역사의 전개로 볼 때 매우 흥미진진한 점은 공익을 생각해서 램프로 도로 조명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 사람이 취미로 전기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명과 전기라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과제가 상상력이 풍부한
프랭클린에게는 꿈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만큼 전기는 실용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렇지만 전기 실험은 우리들이 알지
못한 다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프랭클린은 이런 실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었다.
스크루킬 호반에서 전기에 관한
연구 모임을 개최했을 때에 이야기다. 강의 오른쪽 기섥에서 왼쪽 기섥까지 전기 불꽃을 날려 술에 불을 붙이고, 전기 쇼크로 칠면조를 잡고,
그것을 회전기구 꼬챙이에 끼워 라이덴병으로 점화한 불로 구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에는 전기 장치를 한 포병대가 공포를 쏘고 전기를 띤 잔으로
각국의 유명한 전기학자를 찬양하면서 건배하는 파티를 했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사람들은 전기가 직접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 가능성조차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분한 인생의 경이로움과 감격을 주는 오락의 한 가지 정도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음에
틀림없다. 전기 실험이 18세기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는 다음 이야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지금은 믿을 수 없지만 그 시애의 전기
실험은 실업자 구제에 한 몫을 했다. 프랭클린의 '자서전'중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새로운 기적'으로서 사람들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전기 실험을 한 번 보려고 매일같이 많은 손님이 프랭클린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이 번거로움을 조금씩 친구들과 나누기
위해 그 지방의 유리공장에 부탁해서 같은 모양의 유리관을 몇 개 만들어 이것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마침내 이 실험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몇 명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친구는 키나즈리씨로, 그는 이웃에 있었던 재주있는 사람으로 그 때 당시에는 실업자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돈을 받고 실험을 보여주면 어떻겠냐고 권유하며 그를 위해 두 편의 강의안을 작성했는데, 그 강의안은 실험 순서나 설명하는
방법이 있었고, 앞의 내용을 이해하면 다음 것도 할 수 있도록 작성되어 있었다. 그는 이 실험을 위해 매우 훌륭한 실험 기계를 갖추었는데,
내가 전에 혼자 힘으로 만들었던 조잡했던 기계류가 모두 기계 전문가의 손에 의해 훌륭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의 강의에는 많은 사람이 참가했고
모두 크게 만족해했다. 얼마 후 그는 각 식민지를 순회하며 각 식민지의 수도에서 이 실험을 공개해서 상당한 돈을 손에
쥐었다.
이와 같이 관중을 모아 거리의 악사처럼 사람들이 던져주는 돈이나 입장료를 모아 실험을 하는 강연회가 이 시대에
나타나서 과학자가 직업으로서 성립된 19세기 중반가지 백년간, 일부 연구자에게 생계나 발표의 장을 보장하고 있었다는 것은 과학의 역사를
회고하는데 있어서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이다. 파리의 왕립식물원에서 실시된 공개 실험과 같이 사실상 오늘날의 대학 이학부의 강의 수준의 내용도
있었고, 골목 안에서 대중에게 사기 실험을 하거나 가짜 의료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역사가는 이 시대의 과학 활동을 '아마추어 과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활동이라는 의미 이상의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을 실질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과거의 중요한 발견이나 연구의 대부분이 이 아마추어 과학 세계에서 성립된 것을 생각하면, 과학이 미숙했던
시대의 활동이라고 한마디로 잘라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번개와 전기 전기 실험에 흥미를 느껴 혼자서 연구
실적을 쌓아 훌륭한 실험가가 된 프랭클린은 기구를 보내준 코린슨에게 실험 성과를 빠짐없이 기록한 감사장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당시 과학의
선진국이었던 영국의 과학 애오가들과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고, 그러던 중 프랭클린은 번개와 전기는 같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역사적인 논문을
1749년 11월 7일에 보내게 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을 이유로 번개의 정체를 전기라고 단정했다.
(1) 결과적으로 빛과
소리가 닮았고, 둘 다 거의 순간적으로 전달된다. (2) 전기 불꽃은 벼락과 마찬가지로 물체에 불을 붙인다. (3) 둘 다
생물을 죽인다. (4) 둘 다 기계적인 손상을 입히고 유황이 타는 것과 같은 냄새가난다. (5) 번개와 전기도 같은 도체에서
흘러가고 신속하게 뾰족한 끝에 이른다. (6) 둘 다 자석의 효력을 없애거나 자석의 극을 바꾸어 버린다. (7) 둘 다 금속을
녹이는 경우가 있다.
프랭클린 시대에도 벼락의 유래를 신적인 관여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비인격적인 자연현상으로서
받아들이는 사람도 많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 시대의 자연 연구가는 이전 세기의 데카르트의 자연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데카르트는 1636년에 쓴 '기상학'에서 벼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벼락이나 번개나 회오리바람이나 낙뢰를 동반한 폭풍은 얼마만큼의
구름이 모여 있을 때에 위의 구름이 아래 구름의 위로 갑자기 낙하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로 인해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번개나 회오리바람이나 낙뢰의 여러 가지 차이를 말하자면 그것은 두 개의 구름 사이의 공간에 있는 증발물의 성질 및 위의 구름이
아래 구름 위에 낙하하는 방법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앞에 건조하며 매우 뜨거운 열이 있고, 이 공간에 매우 미세하고 매우 타기 쉬운 증발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으면, 위의 구름은 대게 커지고 신속하게 하강하기 때문에 그 구름과 아래 구름과의 사이에 있는 공기를 몰아내고 그 공기에서
전광, 즉 순간적으로 사라져버리는 가벼운 불꽃을 내는 것이다... 이것에 반해 타기에 적합한 증발물이 공기중에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에는 천둥 소리는 들리지만 번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더 높은 구름이 조각 조각으로 차례차례 낙하할 때는
대부분의 경우 번개와 천둥이 발생한다...
구름의 상층부와 하층부 사이에 있다고 데카르트가 생각한 '타기 쉬운 증발물'을
18세기의 많은 지식인은 유황을 포함한 가연성 증기 또는 질산칼륨 공기가 아닐까하고 상상했다. 하늘에 울려퍼지는 천둥은 마치 폭발음같이 들리기
때문에 13세기 경에 사라센인에 의해 전해진 흑색화약의 주성분(유황, 질산칼륨, 목탄)이 구름에 떠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질산칼륨은 라틴어로 사르 페트라에라고 하는데,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태양의 돌'이 된다. 가연성을 가진 돌이기 때문에 태양
기원의 물체 즉 하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천둥이나 번개의 원인을 하늘에서 발생한 폭발로 설명하려는 것이
당시의 주류였다. 이 시대의 자연 연구가의 기교스러운 활동을 풍자한 스위프트의 소설 '걸리버 여행기' 제3편에는, 라가드학사원(영국 왕립협회를
야유한 것)이라는 국립과학연구소가 있는데, 그곳에 근무하는 어느 이상한 연구가는 얼음에서 화약을 만들려고 하였는데, 천둥이 친 직후에 우박이
내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박을 분석하면 그 중에 화약의 원료인 유황이나 질산칼륨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지나치기 쉬운데 너무나 정상적인 발상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프랭클린의 논문은 꽤 독창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눈에 비춰졌을 것이다.
확실히 빈클러와 같은 선구자는 있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의 고전어학 교수였던 그는 전기 충격에 의한 불꽃을 번개와 벼락의 일종으로 가정하는 논문을
1746년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것은 실험에 근거한 것이 아니어서 확실한 증거가 부족했다. 예를 들면 오일러와 같은 대표적인 지식인으로부터
몽상가의 허튼 소리로 간주되었다. 그에 비하면 프랭클맅의 번개전기설은 가설의 설득적인 어조로도, 결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후의 실험으로도 당대
제일의 것이었다. 부인과 함께 전기 쇼크를 받고 깊이 잠들어 버린 빈클러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된다.
빈클러를 알 리 없었던
프랭클린이 멀리 떨어진 신대륙에서 쓴 논문은 이미 제출된 것과 함께 식물학자 미첼의 노력으로 런던왕립협회에서 구두 발표되는 단계에 이른다.
1751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최초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유황이나 질산칼륨 공기의 폭발설을 지지하고 있던 사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정보와 물자가 부족한 식민지로부터의 보고라는 이유만으로 구세계에 선구적인 새로운 법칙을 초래하는 획기적인 논문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생떽쥐베리가 '어린왕자' 중에서 아무렇지 않게 썼던 이야기는 18세기 런던에서도 해당될지 모른다. 어느 천문학자가
새로운 별의 발견을 학회에 보고했는데, 민족 의상을 입고 있어서 신용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프랭클린이 그 당시 학회로부터
과학의 총아로서 무조건적인 칭찬을 받게 되기까지의 경위에는 번개가 떨어지는 경우의 우연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우연이 작용했다. 프랭클린의
논문이 읽혀진 학회에서 알게 된 의사가 있었는데, 평생 식민지 지지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던 포자길 박사가 바로 그였다. 박사는 논문을 인쇄할
수 있도록 조처를 취하고 일부러 서문까지 써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서전'에 의하면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행해진 전기에 관한 새로운
실험과 관찰'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팜플렛은 중판을 거듭해 5쇄까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프랭클린은 1펜스도 인세를 받지 못했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런던 학계의 반응은 한결같이 냉담했고, 처음에는 이렇다할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변화가 일어난 것은 오히려 영어로
쓰여진 처음의 논문집이 시판되지 않았던 파리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알 사람은 다 알게 되는 것일까? 후대의 역사가는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가치있는 연구가 역사 속에서 묻혀버리려는 순간에 선견자의 눈을 가진 인사가 등장해서 그것을 옹호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프랭클린의 문제의
논문집을 우연히 입수해 프랑스어로 번역한 다음 인쇄하도록 배려한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세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뷰퐁이었다.
그 후 번개전기설을 포함한 프랭클린의 논문집은 이태리어, 독일어, 라틴어로 번역되어 전 유럽에서 읽히게 되었는데, 그 보급에
가장 힘을 써 준 인물은 재미있게도 프랭클린의 학설에 이론을 제기한 노레 신부였다. 노레 신부는 프랭클린이라는 연구자는 틀림없이 가공의 인물로
자신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해 파리 사람이 이름을 밝히지 않고 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변경이었던 필라델피아라는 지명을 보고 수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프랭클린이 실재하는 것을 확인하자 아카데미에 부지런히 반론을 투고했다. 당연히 그 반론에는 프랭클린의 이름이
재삼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에 번개의 정체를 전기로 단정하는 이설의 장본인으로서 사람들의 눈에 띄는 기회가 된 것이다. 동시대의 프리스틀리
박사로부터 '인류에 대한 최대의 실용상의 공헌'이라고 절찬을 받은 이 논문집을 읽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년이 채 지나지 않아
'프랭클린주의자'라고 불리는 연구자를 대량으로 배출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실험 프랭클린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은 1752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에 일어났다. 논문집에는 번개의 본성을 확인하는 실험 방법이 명기되어 있었다.
비오고 번개치는 날에 지상에서 긴 철봉을 들고 있으면 번개에 있는 전기로 인해 철봉을 대전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을 두 명의
프랑스인이 시도했다. 다리바르와 드 로르가 각각 독립적으로 했다고 되어 있는 실험에 대해서 같은 시기의 프리스틀 리가 쓴 '전기 연구의 역사와
현상'(초판, 1767년)이라는 가장 오래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 있다.
다리바르씨는 파리에서 24킬로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마르리 라 뷰 마을에 실험 기구를 설치했다. 드 로르씨는 수도 파리의 고지대에 있는 자택을 실험 장소로 선택했다. 다리바르씨의
기계는 길이 12미터 정도의 철봉으로 하단을 상자로 싸여 있어서 빗물로부터 안전했다. 외부는 세 개의 나무 막대로 지탱하고 비단 끈으로 확실히
붙들어 매어져 있어서 역시 빗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 기계야말로 하늘의 불의 방문을 사상 최초로 받아들이는 영애를 차지하게
되었다. 본인은 그 순간에 현장에 마침 없었지만 그가 없을 때에는 코아피에라는 14년의 경력을 지닌 체력도 이해력도 있는 용기병(16-17세기
유럽에서 갑옷에 총을 든 기마병)이 책임을 지고 기계를 지키도록 의뢰해 놓았다. 그는 무엇을 어떻게 관찰하면 좋은지, 어떻게 위험을 피하면
좋은지 적절한 지시를 받았다. 거기에다가 폭풍이 온 시점에서 근처 사람을 불러 입회시키고 특별히 마르리 교구의 사제를 불렀다. 마침내 오랜
시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폭풍이 몰려왔다. 1752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2시와 3시 사이에 코아피에는 무시무시한 천둥 소리를 들었다.
그는 바로 뛰쳐나가 놋쇠 끈을 댄 대전용 병을 철봉 하단의 상자에 접촉시켰다. 그러자 거기에서 작지만 눈부신 불꽃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톡톡하고 튀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는 불꽃과 파열음을 다시 관찰함과 동시에 근처 사람들을 시켜 사제를 불러오도록 부탁했다. 사제는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다. 그 다음부터는 영혼을 인도하는 손이 지상으로 내려오는 광경을 본 교구민들은 벼락에 맞아 불쌍하게 죽은 코아피에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모여들었다. 놀라는 소리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우박이 내리는데도 모여드는 사람들의 수는 줄지가 않았다. 실험 기계가 있는 곳에
도착한 성실한 성직자는 더 이상 위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스스로 놋쇠 끈에 손을 대보았다. 그러자 강한 전기 불꽂이 일어나고 확실히 그것이
전기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원하던 발견은 실현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앙심이 깊은 교구민들은 실험의 성과를 보고 싶어서
모인 것이 아니었다. 모독죄를 범한 실험가가 신의 노여움을 받아 죽는 것을 보러 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코아피에는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학이 승리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후 경과를 생각하면 코아피에가 죽지 않고 실험이 끝난 것은 우연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벼락의 정체가 전기인 것을 증명했다는 기념할 만한 실험의 일부이다.
한편 드 로르씨는 8일 후에
자택에서 같은 현상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때는 구름만 지나가고 천둥은 치지 않았기 때문에 대기(지구를 둘러싼 공기의 전체)에서 전기를 모으는
실험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물론 이것만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는 없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획기적인 실험은 오히려 프랭클린 본인에 의해
필라델피아에서 이루어졌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조금 더 기다려주기 바란다. 다리바르의 실험 성공에 관한 소문은 즉시 파리
궁정까지 전달되었다. 루이 15세는 너무나 호기심이 생겨서 측근에게 명령해 드 로르에게 수도에서 재실험을 하도록 지시했다. 32미터 정도의
철봉을 세워 다시 한 실험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국왕은 경이로운 실험의 발안자 프랭클린의 영예를 찬양하고, 이후 프랭클린은 직접 한 실험이
아니라 다리바르와 드 로르가 '필라델피아의 실험'이라고 경외감을 안고 부른 실험에 의해 유럽에서 더욱 유명한 전기학자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전신
기술 등을 생각할 수 없었던 시대의 일이었다. 대륙에서의 이러한 상황 변화가 프랭클린에게 전달되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프랭클린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눈으로 벼락의 정체를 보고자 했다. 맨 처음은 다리바르 등에서 제안한 것과 같은 방법을 취할 예정이었지만, 비
내리며 벼락치는 날을 기다리던 중에 연으로 하늘에서 직접 벼락을 지상까지 강하시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1752년 6월의 일이다. '문득
생각이 떠오르다'라는 영어 표현은 풀 어폰이고, 또 독일어에서도 에인폴른인 것을 생각하면 마치 프랭클린의 착상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우연같기도
하다. '자서전' 쓰는 것을 도운 친구 스튜버의 이야기에 의하면 필라델피아에서의 실험은 매우 소박했다고 한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동행한 23세의 아들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실험의 진행을 알리지 않았다. 비와 벼락을 피하면서 연을 날려 상황을 지켜 보았는데, 전기를
떠올리게 하는 어떤 징후도 나타나지 않았다. 절망하고 있을 때 비단끈에 보풀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고 끈 끝에 매달아 둔 종에 손가락을 대보니
불꽃이 일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프랭클린이 고대하고 있던 감동의 순간였다. 국왕도 없었을뿐더러 호기심 많은 군중도 없었다. 그는 아들과 단
둘이서 그 기쁨을 나누었다. 여기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로 하늘의 물질을 인위적으로 유도하는 실험이 성취되었던
것이다.
연의 유래 프랭클린이 실험에 이용한 연에 대해서는 같은 해 10월 19일에 왕립협회 앞으로 보낸
서간 논문에 만드는 방법이 기록되어 있다. 두 개의 가벼운 삼나무 막대를 십자로 묶고 네 귀퉁이 안을 얇은 비단천을 한 장 붙여서 만든 연에
꼬리에 붙여 실을 연결하면 종이로 만든 연과 마찬가지로 공중에 날아오른다. 비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비나 바람에도 찢어질 염려가 없었다. 이
연의 정점에 끝이 날카로운 바늘을 붙이고 다시 마로 된 끈의 잡는 부분에 비단 끈을 연결해 둔다. 그리고 마로 된 끈과 비단 끈을연결한 부분에는
종을 달아 두면 된다... 벼락을 몰고 오는 구름이 연 위에 이르면 즉시 구름에서 날카로운 바늘 끝으로 전기가 내려와 마로 된 끈에 보풀이
일어나게 되고... 연결 부위의 종에서는 전기가 다량으로 흐르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이 종을 유리병에 접속하면 병을 대전시키게 되어, 이와
같이 해서 얻을 수 있는 전기를 사용해서 알콜에 점화하는 것도 가능하게 된다... 이상을 통해서 전기와 번개를 각각 구성하는 물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프리스틀리가 '매우 간편한 방법. 매우 저렴한 제작비. 얼핏 보기에 진부해 보이는 장치'로 이 경이로운 실험에 성공했다고
감탄한 기분을 알 수 있을 것같다. 일부러 연을 사용한데는 적극적으로 자연에 동참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과학의 심성이 충분히 발휘되어 있었던
것이고, 동시대의 학자에게는 흉내낼 수 없는 프랭클린만의 독창성이 엿보였다. 연을 이용한 사람은 그 때까지 없었던 것일까? 연에 대해서
약간 설명하면, 연은 영어로 카이트라고 하는데, 볼래 소리개를 의미한다. 이것은 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있는 중국에서 '지연'이라고
부르던 것이 그대로 번역된 것이다. 원래는 종이를 발명한 중국에서 고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이 아라비아를 경유해서 서유럽에 르네상스 시대에
도래했다고 한다. 문헌에 의한 기록은 나폴리에서 1558년 출판되 장바티스타 데라 포르타의 '자연 마술'의 기술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하늘을 나는 드래곤, 또는 코메트(혜성). 그것은 다음과 같이 만들어졌다. 자른 갈대를 가로 세로 1:2의 비율로 두
개를 대각선으로 연결해 사각형을 만든다. 그 대각선으로 나머지를 자르고, 같은 크기의 작은 끈으로 연결해 엔진의 머리 부분인 다른 두 개와 서로
묶는다. 그리고나서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종이나 얇은 린넨을 붙인다. 다음으로 탑꼭대기나 높은 곳에서 만든 연이 망가지지 않도록 큰 바람이
아니라 일정하게 바람이 불 때에 날린다. 그러나 바람이 적을 때에는 연이 날지 않는다. 직선으로 날리지 말고 옆으로 날리도록 한다. 그것은
양끝에 붙어 있는 끈이 영향도 받는다. 또 종이를 붙여 만든 같은 길이의 긴 꼬리의 영향도 받는다. 기술자의 조작으로 힘있게.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놓으면 이 하늘을 나는 배는 공중을 날게 된다. 그것이 조금밖에 올라가지 않을 때(집들 사이에 바람이 불지 않기 때문이다)에는
조작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대로 잡고 있는 것이 좋다. 여기에 각등을 달면 혜성과 같이 보인다. 종이에 탄환을 넣은 폭죽을 실어 공중에 띄우면 이
날아 다니는 배는 천둥과 같은 소리를 내며 날고 폭발해서 조각조각나서 땅에 떨어진다. 개나 고양이 새끼를 붙잡아 공중에서의 울음소리를 듣는
사람도 있다. 최후의 실험 이야기는 거리낌없이 동물을 학대하는 자연학자의 무신경한 면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어이없는
이야기이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 드래곤(연을 나타내는 현대의 독일어 드레첸은 이 이탈리아어에서 유래되었다)이라고 불리는 연에 폭죽을 붙여 벼락을
흉내낸 일은 그로부터 200년 후의 프랭클린의 실험을 알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느껴진다.
바람이 강한 날에는
연을 날리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고 벼락이 치는 날에도 당연히 연을 날리지 않겠지만, 만약 프랭클린과 같이 그것을 실행했다면 일부러 폭죽 등을
장착할 것가지 없이 벼락이 그곳에 치게끔 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끝에 바늘을 연결해야 하고, 그 결정적인 차이에 의해
프랭클린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지만, 만의 하나 포프타의 연에 바늘이 연결되어 있어서 벼락이 떨어졌다고 해도 18세기의 연 실험과 같이 해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벼락의 정체를 화로나 화덕의 불로 간주하거나, 벼락은 벼락 그 자체라고 일체의 설명도 거부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200년의 세월은 무익하게 지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호박이나 유황이나 유리를 마찰시킴으로 인력과 척력이 신비한
교착을 반복하는 불가사의한 현상과 같은 지상의 정전현상에 '전기'(일렉트리시티: 호박을 타타내는 그리이스어의 일렉트론에서 유래한 말)라는
이름을 부여했고, 그 배후에 묘한 유체의 존재를 가정하는 사고의 틀이 프랭클린 등장까지 이미 성립되어 있었다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지상을 향하여
수직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벼락과 지상 생활 평면에서 인정되고 있었던 전기 유체가 연을 매개로 해서 직교성의 충돌을 이룬 사건이야말로
필라델피아의 실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연에 불꽃을 매달고 공중에서 폭발시킨 취향은 17세기
중반의 영국에는 자주 있었다고 '비행의 고대사'의 저자 베르트르트 라우파는 지적하고 있다. 실제로 필라델피아의 실험이 사람들이 모르는 가운데
성공을 거두기 3년 전인 1749년에도 글라스고 대학의 천문학 교수 알렉산더 윌슨이 '전기 실험용 도선을 부착한 4, 5개의 종이연을 세로로
이어서' 연을 날렸다고 한다. 900미터 상공의 구름 온도를 측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인의 이 지적은 프랭클린의 실험으로부터
26년이나 지난 다음의 일로, 콜럼부스의 달걀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 실험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기 유도용
바늘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비오고 벼락이 치는 날에 제우스의 변덕을 조용히 기다리며 조바심내는 것을 두 번 다시 경험할 필요가 없었다.
자택의 안락의자에서 편안히 쉬면서 번개를 유도하는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다. 같은 해 9월에 그는 마당에 철봉을 세우고 거기에 도선을 연결해서
실내에 있는 벨에 연결시켰다. 이렇게 하면 벨소리로 벼락이 그곳에 내리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도 한번밖에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1753년 9월 프랭클린이 실내에 벼락의 전기를 끌어들이는 실험의 상세한 내용을 보고하는 편지를 런던에 보낸 직후에 비참한
소식이 왕립협회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과 거의 같은 장치를 만들어 실내의 검전기에 벼락을 유도하려고 했던 페테르부르크의 자연학자 리히만이
불꽅에 맞아 즉사한 것이다. 그 보고가 프랭클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유명한 연
실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마찰 이외에 전기를 모으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고, 또 하나는 벼락에 의한 재해를 방지하는 방법을 알아낸
것이다. 후자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프랭클린은 필라델피아의 마을에 1752년 사상 최초로 피뢰침을 세웠다. 이후 유럽 각국에서
피뢰침은 실용화되어 취미로만 했던 전기 연구가 마침내 공익에 도음을 주게된 것이다. 그러나 각 종파의 성직자들은 이 설비에 대해 반대했다.
벼락은 하나님의 뜻으로 벌을 받아도 어쩔 수 없는 못된 사람이 있는 장소에 떨어지는 것인데, 피뢰침으로 본래 피해를 받을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게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종두레 의해 천연두를 예방하려고 한 젠나 등이 나중에 반종두론자에게 받은 비판에도 쓰였다. 질병도 신이
인간에게 내린 벌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랭클린은 너무나도 심각한 성직자의 항의를 풍부한 재치로 가볍게 흘려보냈다. 그는
18세기 중반까지 벼락 사고 대부분이 교회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는 오래된 고딕 건축 교회를 제외하면 높은 건물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프랭클린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인해 마침내 교회측도 피뢰침 설치를 인정했다고 한다. 분명 교회에
떨어진 벼락은 피뢰침을 설치하지 않은 성직자에 대한 주님의 노여움이었을런지도 모르는 것이다. 프리니우스 이래 우연 사상의 대표격이었던 낙뢰
현상은 프랭클린의 교묘한 장치에 의해 천지간의 방전작용으로서 받아들이게 되었고, 라이덴병에 축적된 강력한 전기는 새로운 실험에 응용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인류가 또 하나의 중요한 실험을 만나지 않았다면 역시 전기 현상은 실험을 흥미나 취미로 하는 사람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요한 실험은 개구리에 관한 것으로, 보통은 생각할 수 없는 우연이 그 발견의 계기가 되었다. 다음 장에서는 이탈리아의 연구가 갈바니가 겪은
불가사의한 사건을 다루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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