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의 감성사전
공중전화
동전 몇 푼을 집어 넣으면 그리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한 컵씩 마실 수 있는 음성 자판기. 전신전화국에서 관리하며 주로 사람들이 많이 내왕하는 장소에 설치되어 있다. 약속의 징검다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후진국에서는 고장을 빙자하여 서민들의 땀 내 나는 동전을 갈취하는 노상강도로 돌변해 버리기도 한다.
붕어
자연이 문명의 탁류에 휩쓸려 허우적거리고 있는 인간을 자연 속으로 낚아 올리기 위해 가장 널리 사용하는 미끼.
가을
영혼마저 허기진 시인의 일기장 갈피로 제일 먼저 가을이 온다. 고난의 세월 끝에 열매들이 익고 근심의 세월 끝에 곡식들이 익는다. 바람이 시리고 하늘이 청명해진다. 사랑은 가도 설레임은 남아 코스모스 무더기로 사태지는 언덕길. 낙엽이 진다. 세월도 진다. 더러는 소리 죽여 비도 내린다. 수은주가 떨어지고 외로움이 깊어진다. 제비들이 집을 비우고 국화꽃이 시든다. 국화꽃이 시들면 가을이 문을 닫는다. 허기진 시인의 일기장 갈피로 무서리가 내린다. 가을이 끝난다. 가을이 끝나도 외로움은 남는다.
영혼
우주 무임 승차권.
재
불에다 살과 뼈를 모두 주었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을 때는 존재의 아름다움도 알지 못했다. 지금은 실날같은 바람 한 가닥에도 환희로 전율하는 존재의 미립자로 남았다. 비로소 무소유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안개
떠도는 물의 혼백.
역사
과거를 비추는 미래의 거울이다. 인간이 얼마나 오래도록 자기들끼리의 처절한 투쟁을 계속했는가를 기록해 놓은 시간의 유물이다. 역사는 조작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역사는 비록 감출 수는 있어도 지울 수는 없는 고행의 흔적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일수록 자연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한다. 궁극적으로 역사는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기록된 반성문이다.
거품
공허의 무정란.
대금산조
소리 죽여 흐르는 통곡의 강물이다. 피울음을 삼키면서 돌아보는 세월이다. 세속을 등지고 마주 앉은 적막강산. 구름은 소리를 따라 하늘 언저리를 떠돌고 숲들은 달빛 아래 숨을 죽인 채 새들을 잠재운다. 대금 하나로 이세상 모든 한을 잠재우고 대금 하나로 이세상 모든 혼을 선계에 이르게 한다. 풍류의 도다.
인생
인간답게 살기 위해 끊임없이 걸어가야 하는 비포장도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