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지중해 신화와 전설(그리스 신화와 영웅들)
- 사진 자료 및 참고 자료는 제가 편집해 올린 것입니다.
1. 그리스 나라의 개요
고대문명
문화와 문명이라는 말은 흔히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두 낱말을 대비시켜 비교적 물질기술에 의존하는 인간사회의 편리를 위한 발전적 소산은 문명(Civilization)이라 하고, 이에 반하여 인간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활동으로 정신에 의존하는 바 큰 성과를 문화(Culture)라 하는 견해가 있다. 구체적으로 문화는 예술.도덕.종교.학문 등 인간의 내적 정서 활동의 소산을 가리키고, 주로 언어와 얽혀 있다. 문명은 문자 그대로 도시를 만들어 시민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의 독일 문화철학에서는 문명에 대비하는 문화상위론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독창적인 정신 소산을 문화라 하며, 현실적 인간 생활 영위에 요구되는 합리적 수단을 문명이라 본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인류발달사에 있어서는 야만, 미개에 이어지는 단계를 문명이라 일컫고 있다. 그리스에는 구석기시대에도 주민이 있어 문명을 지닌 흔적이 있고 신석기인은 어디서 왔는지 잘 모르나 기원전 3000년 청동기시대에 들어가 2000년간 융성한 에게 세계를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그리스의 초기 문화와 문명은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 후반까지 이뤄진 크레타를 중심으로 한 미노아 문명(기원전 2200~1400)이다. 그리스 본토 문명(기원전 1600~1200)과 구분되는 키클라데스 문명도 특징적이다. 이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의 빛나는 유물, 예컨대 옥제품이나 대리석 조각상, 항아리 등의 발굴로 입증되었으며 미노아 문명이나 헬라스(미케네) 문명과는 다른 특징과 개성을 가지고 있다.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기원전 1600~1400)에 이르러 상류사회는 매우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궁전과 정원, 대리석 층계로 이은 웅장한 고층건물, 발달된 위생시설을 갖춘 거실, 침실, 광 등을 미로형으로 배치하였다. 상쾌한 채색벽화는 이 시대 사람의 모습과 습관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발굴자 에반스는 멋들어진 한 여인의 프레스코 초상회에 '파리의 여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궁전, 가옥 및 무덤에서 출토된 수많은 귀중품, 생활용품, 상아조각상, 광택 있는 홍색 고급토기, 정교한 금동제 기물들, 석각인, 반지 등은 그들이 누린 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는가를 뒷받침한다. 부유하고 쾌활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락으로서 장기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운동경기를 즐겼으며 왕과 여러 신, 특히 뱀여신을 숭배하였다. 이들은 동방의 이집트, 아시리아 등과의 교역과 접촉으로 해외문명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켰다. 이집트의 기념비적 문명과는 달리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을 주제로 장식적 예술을 창안하였으며 그 문화는 인근의 섬들과 그리스 본토로 전파되었다. 테라(산토리니) 섬 유적, 특히 아크로티리 도시의 출토물은 크레타 유적과 맞물려 플라톤의 대화편(기원전 4세기)에 나오는 아틀란티스의 실체라고 추리하는 견해도 거듭 나오고 있다.
한편 청동기시대 초반, 크레타와 주변 섬에 관련이 있는 인종과 소아시아인들이 그리스 본토로 침투 혹은 침입하였다. 청동기시대 중반 기원전 2000년 직후에 그리스 본토는 두 차례의 침입을 받게 되는데, 현재 그리스인의 선조가 되었다고 생각되는 북방 코카서스의 아리안 인도족이 들어와 점차 융화되었다. 초기 그리스인은 에게인의 주류를 형성하고, 크노스스에 나라를 건설한 후 점차 섬을 넘어 그리스 본토, 소아시아, 시리아,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서방으로는 리파리 제도, 이스키아, 남부 이탈리아로 뻗어나가 기원전 8~7세기 그리스 식민도시를 크게 확산시켰다. 본토인은 크레타의 성숙한 미노아 문명의 영향을 받아 점차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키고 미로식 궁전은 성채로 변천하였다. 그러나 내부 장식벽화, 작은 조각품, 금속공예, 항아리 등은 크레타의 그것과 유사하며 흔히 미케네 문명으로 불린다. 시기적으로는 대략 기원전 1600~1100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문명의 후반기인 기원전 1400~1100년은 그리스의 영웅시대라 하며 아가멤논 왕의 세력권 아래 있던 미케네는 연합군을 편성하여 트로이 전쟁을 감행하였다. 트로이가 함락되고 얼마 되지 않은 청동기 말기에 미케네족은 멸망하고 많은 도시가 파괴 소각되었다. 멸망의 일부 원인은 먼 혈연의 도리스인이 일리리아인의 대이동에 밀려 침입하였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북방에서 새로운 그리스족이 내려오게 되었다. 이것을 헤라클레스 후예의 귀환이라 부르는데, 이들이 갑자기 토착문화를 덮치면서 문화 수준이 하락하고 건축, 항아리 모양등이 완연히 달라졌다.
******************************************************************************
트로이아 전쟁(참고자료)
[〈불타는 트로이〉, Johann Georg Trautmann의 18세기 유화 ]
그리스측 주장
이 전쟁의 유래는 ‘퀴프리아’에 상세하게 나와 있다. 제우스는 너무 증가한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질서의 여신 테미스와 머리를 맞대었고, 결국 큰 전쟁을 일으켜 인류의 거의 대부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결의를 다졌다.
올림푸스에서는 인간의 아들 펠레우스와 티탄 족의 딸 테티스의 혼담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하자 화가 난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 바치라는 헤스페리데스의 황금 사과(불화의 사과)를 신들의 자리에 보냈다. 이 제물을 놓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이 격렬한 대립이 벌였고 제우스는 이 사과가 누구에 적합한 지를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파리스의 심판)
세 여신은 모두 가장 아름다운 옷차림을 하고 파리스 앞에 섰다. 헤라는 세계를 지배할 힘을, 아테나는 어떠한 전쟁도 승리를 할 수 있는 힘을, 아프로디테는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각각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파리스는 젊었기 때문에 부와 권력을 제쳐두고, 사랑을 선택하였고 아프로디테의 권유에 의해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왕비 헬레네를 빼앗아 갔다. 파리스의 여동생이자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만이 이 사건이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으나 아폴론의 저주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메넬라오스는 형인 뮤케나이의 왕 아가멤논에 그 사건을 말하였고, 또한 오디세우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서 헬레네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파리스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기 때문에,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오디세우스는 헬레네 반환과 트로이를 징벌하기 위해 원정군을 조직했다.
이 전쟁으로 신들도 편이 갈라져 헤라, 아테나, 포세이돈이 그리스를 편들었고,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가 트로이를 편들게 되었다.
페르시아측 주장
페르시아측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페르시아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지중해를 건너간 여성들은 사실 납치혼의 피해자들이었고 신화속 파리스가 헬레나를 트로이로 데려간 것도 그 납치혼의 보복이었다는 주장이다.
전설속의 여신 이오는 사실 포이니케 사람들이 헬라스의 아르고스에서 이오를 납치한 것에서 시작되었고 헬라스측도 이에 보복해 포이니케의 영토인 튀로스에서 공주 에우로페를 납치했다고 한다. 그 뒤 그리스인들이 메데이아 공주를 납치하는등 보복 납치혼으로 신경전을 일삼다가, 일리온(트로이)의 왕자 알렉산드로스(파리스)가 보복 목적으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에서 헬레나를 납치했고 이것이 악화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는 주장이다.
******************************************************************************
이 시대에 특기해야 할 유물은 크레타와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서판이다. 크레타에는 초기 청동기시대에 그림표기가 있었으며, 중기에는 드물지만 상형문자가 나타나는데 말기에는 2획문자로 선문자 A(기원전 2000~1500)와 선문자 B(기원전 1500~1100)가 등장하였다. 크노소스에서 출토된 선문자 B는 1952년 벤트리스가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문자는 초기 형태의 그리스 문자이다. 서판의 기록은 영구적 문서가 아니고 그때 그때에 기록해 둔 비망록 정도에 불과한데, 기원전 1400년경의 화재로 점토서판이 구워지는 바람에 후대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밖에 기원전 1200년경 불에 탄 본토 도시 퓰로스의 서판은 유일하게 글씨가 쓰여진 점토판으로 대량 출토되었다. 기원전 11세기부터 역사시대에 들어가기까지의 기간은 단지의 무늬에 연유하여 기하학기로 부르며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이 무늬단지는 500년간의 암흑시대에 드물게 남겨진 유물이다. 기원전 8세기경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암흑시대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페니키아에서 들어온 알파벳 문자가 보급되어 다시 예술, 철학, 서사시(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듀세이아)가 정착하여 고전문화가 가꾸어졌다.
각 도시마다 독자적인 화폐가 주조되고 나아가 자체적으로 달력을 갖게 되었다. 일단 외침을 받으면 국가 간에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올림파아 축제기간이나 질병 등의 극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중지하는 슬기로움을 발휘하였다. 열정적이고 전투적인 분립주의는 폴리스의 정치활동의 중요한 특성으로 나타났고, 빈약한 영토에서 발전된 정치제도는 앞서 존재한 그 어떤 것보다도 개방적이고 시민 개개인의 광범위한 참여를 요구하였다. 단 이러한 모든 시민(여자.어린이.노예는 제외)의 참여는 오직 소규모 정치단위들 속에서만 가능하였다. 이러한 문화는 특히 아테네와 그 주변지역에서 크게 융성하였고 기원전 5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다.)
그리스는 서구문명의 발상지이며, 서구의 지성사는 바로 이 그리스인과 더불어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앤드루스는 그의 저서 '고대 그리스사'의 권말에서 "대다수 그리스인들이 그들 문명의 독특한 장점이 자유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 생각에 동의하길 주저할 까닭은 없으며 또 그 자유의 현상을 그리스인들이 의도하였던 정치영역에만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스는 우리가 같은 공기를 호흡할 수 있는 세계이다. 그 세계의 걸작품을 바라볼 때는 물론이고 일상적 사항을 볼 때조차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큼 우리 세계와는 판이한 것이면서도, 그들을 움직였던 문제들이 오늘날의 문제와 대체로 같은 범주에 속한 것이라고 느낄 정도로 두 세계는 서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에 대한 연구는 그저 기원을 알고자 하는 호고성 탐구에만 그칠 일이 아니다. 호메로스와 헤로도토스, 유리피데스와 플라톤은 우리를 경탄하게 하고, 나아가 현 세계에 대한 우리의 통찰력을 보다 예리하게 다듬어 줄 수 있는 힘을 여전히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맺음말은 서구인의 의향이며 우리에게는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서구문화를 받아들인 지 이제 100년이 넘고 더구나 지나치게 빨리 돌아가는 현대화 물결에 휩싸여 온 지난 반세기를 돌아볼 때 지금의 우리에게도 적절하고 의미있는 충언으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