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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들이 고생이 많다」(소설가 김이은) 2009년 7월 29일 |
이건 정말 안 웃기는 이야기다. 열흘쯤 전, 나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외식을 했다. 메뉴는 소갈비. 증권사에서 기업투자를 담당하는 남편은 식사 내내 요즘 진행하고 있는 자신의 일에 대해 얘기했다. 라오스에 투자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라오스 군정부의 고위 인사와 얘기가 잘 돼 싼값에 땅을 사들여 그 땅을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일본의 기린은 라오스의 쌀을 헐값에 사들여 과자를 만들어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남편은 밥을 먹는 내내 그 이야기에 열을 올렸고, 나는 그런가 보다… 하면서 열심히 밥만 먹었다. 나로서는 뭔지 잘 알 수 없는 얘기인데다 그 얘기를 듣느라 고기가 맛이 어땠는지, 또 원산지가 어딘지 기억도 안 날 판이었다. 문제는 그 날 새벽에 발생했다. 갑자기 배가 뒤틀리듯 아파 잠이 깼다. 물이라도 마시려고 일어나는데 하늘이 노래지고 어지러우면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집 근처 병원 응급실로 직행했다. 병명은 급성 장염. 입원하라는 의사 처방에 수속을 밟으면서 나는 내가 먹은 고기의 원산지를 확인해 둘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암튼. 그렇게 나는 때 아닌 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일주일을 굶지 않을 정도로 죽만 먹으면서 꼬박 누워 지냈다. 낮에도 누워 있고 밤에도 누워 있자니, 밤이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배가 뒤틀리면서 아프면 진통제를 맞고 또 누워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마치 동물처럼 귀가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더운 밤이라 병실 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 두었다. 칠층 높이 창문을 타고 소리들이 넘어 들어왔다. 구급차가 들락이는 소리, 사람들 말소리, 밤벌레들이 날아드는 소리, 더운 바람이 나뭇잎들을 살짝 건드리는 소리에,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듯한 잠든 사람들의 지친 콧소리까지. 긴 밤을 뒤척이고 있자니 어쩐지 우울해져서, 나는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다른 생각도 할 겸 병원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꼽아 보기로 했다. 뭐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복장이었다. 약하게 풀을 먹인 환자복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몸매를 확실하게 통자로 만들어 준다. 제아무리 글래머라도 환자복 앞에선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환자복을 받아 입으면서 과감하게 브라를 벗어 버렸다. 브라를 착용해 본 일부 남자들을 제외한 지구상의 모든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브라가 여자에게 어떤 것인지 말이다. 그 탄생부터가 다분히 남성주의적인 사고방식에서 시작된 브라지만, 그걸 알고도 늘 입고 다녀야 하는 게 아주 오랫동안 여자들의 숙명이었다. 나는 갑갑하고, 조이고, 심장을 누르고 있던 브라를 벗어 버리고는 온 병원 안팎을 활보하고 다녔다. 뭔지 모르게 우쭐해지고 어깨가 쫙 펴지는 기분이 들어 신이 날 지경이었다. 우선 사방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위아래로 막힘없이 통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노브라인 채로 대로변에 있는 식당과 커피숍도 드나들었다. 보란 듯이 가슴을 쑥 내밀고 당당하게 걸어다녔다. 별 이유도 없이 자유로워진 기분이었다. 병원 생활의 장점은 하나 더 꼽을 수 있다. 바로 정신의 정지 상태다. 일주일 내내 병원에 있으면서 처음엔 책도 읽고 퇴원 후에 해야 할 일도 생각하고 했지만, 하루이틀 지난 뒤엔 그마저도 놓아 버렸다. 일부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몸만 쉬고 있는 게 아니라 정신까지도 멍 때리게 되는 거. 그래서 몸도 맘도 온전히 정지 상태가 되는 거. 그야말로 나는 먼 하늘만 바라보면서 멍, 때리고 있었다. 나는 오만 가지 생각에서 벗어나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의 상태가 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라. 그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무위라니. 우리가 이 복잡한 도시에 살면서 평생 동안 몇 번이나 무위의 상태를 경험해 볼 수 있겠는가. 큰돈을 주고, 많은 시간을 들여 여행을 가도 우리는 뭔가 하나라도 얻어 오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독려하고 재촉하게 되는데 말이다. 퇴원하면서 내 마음 속에는 ‘무위자유’란 말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비록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서 떼는 걸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마음만은 아주 오랜만에 포상 휴가를 받은 기분이었다. 그걸 뒤집어 생각해 보니, 이랬다. 내가 이 도시에서 살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면서 쉬지도 못하고 힘이 들었었구나, 하는 생각. 몸에 병이 찾아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더니…. 이 시간이 내게 필요했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 나뿐이겠는가. 오늘, 여기를 사는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이다. 살아내느라 누군들 힘들지 않겠는가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니들이 고생이 많다.~’ 아니겠는가. 그러니, 가끔 병원 생활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그렇게 간혹 쉬어야 또 살 수 있지 않겠는가. 안 되면?… 뭐… 할 수 없고. 내가 읽어봐도 정말 안 웃기는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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