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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이 형」(시인 김두안) 2009년 7월 2일_마흔일곱번째 |
대나무 울타리가 보입니다. 댓돌 위에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놓여 있습니다. 작고 고요한 집은 커다란 귓바퀴 같아서 팔꿈치를 벌떡 세우고 금방 일어설 것 같습니다. 그가 서울 맹인학교에서 안마와 점자를 배워 돌아오고 마당에는 애달픈 라디오 소리만 쌓여 갑니다. 그는 오늘도 막배 올 시간에 어김없이 부두로 나갑니다. 가파른 골목을 가만가만 두드리는 소리 들립니다. 귀밝은 지팡이가 먼저 골목을 꺾어 돌아가고 싱글벙글 그림자 뒤따라갑니다. 허연 눈동자를 몇 번 해에 비춰보고 분명 뭔가 보았다는 듯 서둘러 지팡이를 재촉합니다. 대숲이 흔들리고 골목 똥개들 컹컹 짖습니다. 소문난 기와집 목련나무 가지 담장 너머로 찬밥 한 공기 건네줍니다. 마을 어귀 그물 꿰매는 아낙네들 술잔에 흥겨워 그를 불러 세웁니다.
어이 총각! 거시기에 털났으까 잉- 혹시 또 알아, 올봄에 눈먼 처녀라도 하나 섬에 떠밀려올지 아따 이 사람들아- 둘 다 눈멀먼 안 돼제, 홀딱 벗고 자다 날샌지도 모르먼 쓰것는가 화끈거리는 농담 소리 시궁창 민들레꽃을 훌쩍 뛰어 넘어갑니다.
부두를 배회하는 갈매기 소리 들립니다. 그가 슈퍼 간판 밑에 걸터앉아 싱글벙글 웃습니다. 발뒤꿈치를 구르며 눈먼 눈으로 바다를 쳐다봅니다. 하얀 천신호가 죽섬을 희미하게 돌아옵니다. 두근거리는 뱃소리 점점 가깝게 들립니다. 썰물 거슬러와 가슴을 쿵 부딪칩니다. 한바탕 부두가 술렁거립니다. 젖은 발소리들 철썩철썩 마을을 향해 사라집니다. 그는 발소리가 지나칠 때마다 텅 빈 소라 껍데기처럼 귀를 기울입니다. 이 발소리도 아니라고, 세차게 얼굴을 털어냅니다. 노을을 첨벙첨벙 건너가는 발소리. 그의 얼굴에 쓸쓸한 파문이 번집니다. 누굴 기다리느냐고 물으면 턱을 절레절레 흔듭니다. 그런 게 아니라고, 가슴께에 웃음을 파묻습니다. 부두를 가만히 밀어내며 막배가 떠나갑니다. 뱃고동 소리 섬 깊숙이 파고듭니다. 거품길이 지워지고 이제 부두에는 긴 그림자 하나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까마득히 멀어지는 발소리 컴컴하게 더듬고 있습니다. 지팡이로 힘껏 부두를 몇 번 두들겨 볼 뿐 그는 서울에서 만났던 그 지팡이 소리 기다린 적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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