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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께 큰절 하고」(소설가 정미경) 2009년 6월 10일_서른한번째 |
“많이 울었지?”
아들을 훈련소로 보낸 날, 선배 Y가 전화를 했다. 울긴요, 했지만 말과 달리 눈물이 금새 주르르 흘러내렸다.
“밥은 안 넘어갈 테고 칼국수 사 줄 테니 나와.”
해가 설핏하게 지는 시간이었다. 자식놈 생각하니, 국수는커녕 물 한 모금 삼킬 마음이 없었다. 몇 번이나 권하는 걸 마다하고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훔쳐냈다. 월말이 되자 카드 대금청구서가 날아오는데 술집으로 추정되는 상호들이 줄줄이 찍혀 있었다. 아무리 입대가 충격이로되 엄마 카드에 손을 대다니. 앞서거니 뒤서거니 날아오는 청구서마다 찍힌 걸 다 합하니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다. 슬픔을 일시에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구나. 원래 수업 빠지고 도망가면 남은 녀석들이 혼나는 것처럼, 집에 있는 나머지 하나를 불러 앉혔다.
“얘. 무슨 이런 법이 있니? 얘네들은 빈손으로 친구 송별회 나와서 진탕 마시고 간 거야?”
“다들 바쁜데 나와 주는 것만도 고맙죠. 원래 그런 법이에요.”
그것도 몰랐느냐는 투다. 별 쓰잘데기 없는 법을 하나 배운 비용치고는 너무 과하다. 눈물로 써서 특급우편으로 부치던 편지를, 이를 갈며 써서 보통우표를 붙여 보냈다.
아가, 그 안에서 홍익인간이 되어 나오너라…. 교훈조의 편지를 쓰다 보니, 슬픔에 눈 멀어 잠시 잊고 있던 풍경들이 영화처럼 떠올랐다. 양말 뒤집어 벗어놓기, 속옷 아무데나 던져놓기, 한 번도 닫은 적이 없는 치약 뚜껑, 컵라면 먹은 빈 그릇 침대 밑에 감춰 두기, 벽지에 코딱지 붙여 놓기, 서랍은 빼놓고 장롱 문은 죄다 열어 놓고 학교로 달아나기…. 정말이지 끝이 없었다. 그래. 군대 안 갔으면 어쩔 뻔했냐. 빡세게 고생하고 철들어 나오너라. 네가 긁어 놓고 간 술값은 국립대학 수업료 낸 셈 치겠다.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당사자가 들으면 화를 내겠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제대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저로선 소회가 남달랐는지 ‘사랑하는 부모님’으로 시작하는 긴 편지를 써서 보내왔다. 비싼 수업료 내가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외치고 싶었던 내 소박한 꿈은 이대로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인가. 대략의 편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엄마 손에 꼭 롤스로이스 키를 쥐어 드릴게요.(이런 약속이 적힌 편지가 서랍에 도대체 몇 장이던가. 이미 명차가 다섯 대, 노후를 보장해 줄 빌딩이 두 채, 완두콩만 한 다이아몬드 반지까지. 철없이 좋아했는데, 확정일자가 없는 이런 약속보다 오늘 홍삼 캔디라도 한 통 받아 먹는 게 낫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쳤다) …병장이 되고 보니 저도 많이 편해졌어요. 내무반에서 내 맘대로 방귀를 뀌다 보니, 늘 춥고 어두운 복도로 나가 해결해야 했던 이등병 시절이 떠오르네요. 참, 후임들이 얼마나 착한지 몰라요. 누워 있으면 얼음을 동동 띄운 물에 스트로를 꽂아서 입에 대주고 양말을 거꾸로 벗어던져 놓으면 가지런히 개켜 놓는답니다.(엄습하는 이 불안감의 정체는 뭘까?) 요즘 저는 거의 산유국의 왕자처럼 지내고 있어요. 사랑하는 엄마. 그러니 저에 대해선 너무 걱정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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