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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날리는 남자의 마음」(소설가 성석제) 2009년 5월 14일_열세번째 |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내 친구 마곤대는 오토바이를 미치도록 좋아한다. 그가 1450CC 엔진의 멀리다비두스(Merly-Davidus) 투어링 오토바이를 가지게 된 건 오래되지는 않았다. 이 최신형 더블 V자 방식 엔진을 장착한 오토바이가 나오기 전 그는 830CC 클래식 엔진의 중고 멀리다(멀리다비두스의 애칭)를 타고 다녔다. 중고품이든 신품이든, 새로 개발된 엔진이든 백 년 전의 엔진이든 멀리다비두스에는 특유의 엔진 음이 있다. 곤대의 표현을 빌리면 정지 중에는 “끄릉 끄릉 끄릉 끄릉” 하고 야수의 심장이 헐떡이는 소리를 낸다. 일단 달리기 시작하면 “끄으으응 끄으으응 끄으으…” 한 뒤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이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먼 곳으로 가 버리고 없기 때문이다.
1998년 1월에 1450CC 신형 엔진을 단 멀리다비두스 투어링 오토바이가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는 새로운 세기가 개막하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오토바이를 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그 즉시 새 오토바이를 사는 데 드는 돈을 담을 수 있는 큼직한 가방을 마련해서 작업실 입구에 놓아 두었다. 그때부터 작업실에 들어올 때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이란 돈은 몽땅 그 가방에 털어넣었다. 2년 가까이 최소한만 먹고 자고 최대한, 때로 미친 듯 일하며 돈을 가방에 몰아넣은 결과 마침내 그는 20세기의 마지막 추석 하루 전날에 목표액을 채울 수 있었다.
오토바이를 가지러 가던 날, 그는 아끼느라 잘 입지 않는 순면 속옷을 입고 그 위에 오토바이의 진동을 고스란히 전달받을 수 있는 얇은 스판 바지와 몸에 착 들러붙는 검정 민소매 티셔츠를 입었다. 또 가죽 바지와 가죽 재킷을 겹쳐 입고 롱부츠를 신었다. 마지막으로 일 년에 몇 번 꺼내 보지도 않는 명품 바바리코트를 걸쳤다. 큼직한 스포츠 시계를 차고 가죽장갑을 끼었으며, 목에는 붉은 머플러를 둘렀고, 머리에는 멀리다비두스의 상표가 선명한 수건을 모자처럼 동여맸다. 그리고 한쪽 손에는 돈가방을, 한쪽 손에는 헬맷을 들었다. 그런 차림으로 오토바이 가게가 있는 곳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는 데는 쓰면 눈에 뵈는 게 없는, 얼굴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는 시커먼 스포츠 고글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가방째 돈을 넘기고 오토바이 가게 주인이 돈을 확인하는 동안 오토바이 구석구석을 살폈다. 열쇠를 돌리고 시동을 걸자 “끄릉 끄릉” 하고 어린 멀리다비두스 새끼가 터뜨리는 울음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목이 메었고 거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주인이 남는 돈이라며 넘겨 주는 지폐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 그는 오토바이를 끌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큰길까지 나왔을 때 그는 정신을 차리고 이십 년 가까이 오토바이를 타 온 사람답게, 아니 국내에서는 몇 안 되는 1450CC 멀리다비두스 투어링 라이더로서 자신의 차림을 세세히 확인했다. 그리고 바바리코트 단추를 아래쪽만 세 개 풀어 달릴 때 바람에 코트 자락이 최대한 휘날리게 한 뒤 헬맷을 썼다.
그가 오토바이에 올라 큰길에 들어서자 다른 오토바이들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250CC 미만의 오토바이였고 그와 같은 골목에서 나온, 피자를 배달하는 49CC 엔진을 단 소형 오토바이도 있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듯한 특유의 소리를 내는 멀리다비두스 앞에 다른 오토바이들은 물론 승용차들도 몸을 낮추고 있는 것처럼 그는 느꼈다. 그는 엔진의 회전 속도를 가볍게 높였다 낮췄다 해 가며 신호가 바뀌면 가장 먼저 출발할 준비를 했다. 신호가 바뀌자마자 멀리다비두스는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면서 앞으로 뛰쳐나갔다. 출발도 가장 빨랐지만 가속력도 가장 뛰어났다. 곧바로 그의 목에 걸려 있는 머플러가 벗겨질 듯 펄럭이기 시작했다. 고글이 바람의 압력에 눌리면서 얼굴이 찌그러졌고 이윽고 그 압력은 얼굴 전체로 느껴졌다. 그는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렸다. 그의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옆에서 어깨를 나란히 할 존재도 물론 없었다. 그가 의도하고 예상한 대로 코트 자락은 찢어질 듯 펄럭이며 그의 허벅지를 때렸다. 고통이 심해질수록 그의 만족감은 높아 갔다. 그는 단추를 하나 더 풀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다음 신호가 붉은빛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오토바이를 멈추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한참 뒤에 차들이 달려오고 있었고 그 사이를 숨바꼭질하듯 오토바이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려 아스라이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의외로 오토바이였다. 짐 싣는 시렁이 달려 있는 퀵서비스 오토바이로 잘해야 125CC나 될 듯했다. 애앵 끼이익, 하고 경망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 오토바이가 멈추고 난 뒤 끼긱, 끽, 캑 하고 다른 오토바이들과 차들이 멈추어 섰다. 그는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다른 차든 오토바이든, 푸른 가을 하늘을 지나가는 비행기고 낙엽이고 뭐고 무관심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 서 있던 오토바이에 탄 사내가 자꾸 그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저씨, 아저씨! 아, 아저씨!”
그는 천천히 목을 꺾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반쯤 돌렸다. 왜요,라거나 뭐야, 하는 소리를 낼 생각도 전혀 없었다. 그냥 한번 바라보아 주었다. 사내의 다음 질문은 보나마나였다. 오토바이가 몇 CC짜리냐, 어디 제(製)냐, 얼마나 하느냐 하는 따위의 속되고 저급한 질문이 쏟아져 나올 것이었다. 그런데 사내는 손가락으로 그가 지나온 길을 손가락질하며 “저기요, 저기!” 하면서 뭐가 급한지 본론을 꺼내지도 못했다. 그는 지금 달린 속도가 시속 2백 킬로미터를 넘었느냐는 또 다른 수준 이하의 질문인 줄 알고 약간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아, 왜애… 요?”
사내는 그제서야 말문이 터진 듯 자신이 타고 있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처럼 재빠르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아저씨, 아저씨 바바리 주머니에서 돈이 나와서 바람에 다 날아갔어요. 길 가던 사람들이 그거 줍느라고 난리가 났는데 그거 몰랐어요? 돈을 왜 바바리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안주머니 없어요? 바지 주머니는? 지갑은? 그냥 한번 그렇게 해 본 거예요? 돈자랑하고 싶어서… 요?”
그는 뭐라고 대꾸를 하려 했다. 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신호가 바뀌면서 오토바이들이 왱, 오앵, 바아앙 하면서 앞으로 튀어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있어야 할지 따라가야 할지 망설이다가 비명을 질렀다.
“애고고, 내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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