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황대선원을 찾았을 때, 스님은 산자락에 새롭게 조성한 불상 아래 조용히 홀로 앉아 있었다. 멀리서 인사를 하자 스님은 가벼운 손짓으로 가까운 자리를 청했다. 스님과의 인터뷰는 황석산자락에서 진행됐다.
활산(活山) 성수(性壽)스님. 올해 세수 여든여섯으로 1994년 원로의원으로 선출된 최고령 원로의원이다. 서울 법수선원에 이어 함양 황대선원, 2년 전에는 여든넷의 고령에도 산청에 해동선원을 개설하며 선지식으로서 길을 걷고 있다. 입동(立冬)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지리산 자락 황석산 황대선원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을 친견했다. 마침 엿새후면 100여개 선원에서 2000명 이상의 스님들이 동안거 결제에 들어가고 선방을 갈 수 없는 수많은 불자들은 각자의 생활현장에서 산사의 선방대중 못지않은 정진을 다짐한다. 때가 때이니만큼 스님의 한 말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어 야외법당에서 좌선삼매에 든 스님을 깨웠다.
“사자새끼는 어미 물어죽일 수 있는 용기 있어야”
발심하면 바른 스승 만나 묻고 닦는 게 순리
道 해결 못하면 맞아 죽을 각오로 정진해야
“말로 해서 되는 게 아니야. 회초리 석단을 이고 와서 천대를 맞고 나서 해야지.”
석 달간 용맹정진에 들어가는 선방 대중과 재가불자들을 위해 청한 한 말씀에 대한 스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돌아왔다.
“도(道)를 배우는 데 전력하지 않고 도를 닦는데 전력하거든. 고려시대에는 세인들이 스님들을 ‘을축갑자(乙丑甲子)’라 했어. 배우지도 않고 거꾸로 간다는 말이야. 선방에서 입선하는 게 문제가 아니야. 도를 배워야 해. 도가 뭔지 알고 해야지.”
묻고 답하는 가운데 익힐 것은 익히고 버릴 것을 버려야 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알음알이로 무턱대고 용맹심만 자랑해서는 세월만 낭비한다는 지적이다.
유교적 풍습이 진한 집안에서 성장한 스님은 어린 시절 ‘햇노인’으로 불렸다. 서너 살 때부터 학자들이 많은 동네에서 성장하며 어른들로부터 고담성어 듣기를 즐겼지만 공부는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곱 살 때부터 지개를 지고 나무를 해 날라야 했다. 장에 나가 나무를 팔아 아버지 반찬을 사들이며 고사리 같은 손은 투박하게 변해갔지만 마을 어른들로부터 들은 원효대사 같은 선지식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9살이 돼서야 스님은 그 꿈을 펴기 위해 각서를 쓰고 집을 떠났다.
“마을 사람들 볼 낮이 없으니 가려면 나를 죽이고 가라”는 백형(伯兄)의 입장을 저버릴 수 없어 내린 결단이었다. 마음에 속 깊이 자리한 ‘원효’를 찾아 ‘도’를 찾아 전국 산사를 누빈 끝에 천성산 내원사 조계암에서 후에 은사가 되는 성암스님을 만났다.
도를 찾기 위해 온 총각을 성암스님은 아무 말 없이 방을 한 칸 내 주었고 성수스님은 그 곳에서 홀로 수행을 계속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후 성암스님에게 불려 나가 ‘초심’ ‘발심’ ‘자경문’을 각각 한나절씩 사흘 만에 모두 외우고, 다시 40일 만에 10만 독(讀)을 마치자 정암사 적멸보궁으로 이끌어 10만배를 하게 했다. 말 없는 가운데 제자로 인정한 것이다.
“(은사 성암스님) 그 어른도 11살 때 사서삼경을 마친 분이야. 자기 자신도 특이한 사람인데 (성수스님 자신을 지칭하며) 그런 놈 보기 드물었거든. 나 때문에 (은사스님도) 내원사를 내 놨어.”
조계암에서부터 스님은 5년여 간 다섯 가지 풀로 끼니를 해결하며 정진을 계속했다. 약초 캐러온 마을 노인으로부터 해방됐다는 얘기를 듣고 토굴을 나섰다. 수소문하여 다시 만난 은사에게 스님은 마치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지듯이 “골치 아픈 절 주지는 그만 하시고 ‘스님주지’나 하시라”고 쏴 붙이고 해인사로 발길을 옮겼다. “새로 총림을 열게 됐으니 거기 가서 배우라”는 은사의 배려가 있었다. 하지만 ‘도’를 찾기 위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앞서 스님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지식들과 도를 넘는 대화로 상하의 격을 깨뜨리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스님은 ‘도를 배우겠다’며 공양주 소임을 거부해 도감 구산스님, 도총섭 청담스님, 부조실 인곡스님 등을 곤혹스럽게 하던 끝에 조실 효봉스님에게 불려갔다. 우여곡절 끝에 7일안에 도를 해결하겠다는 각서를 쓰고 상선원인 퇴설당에 들었다.
“도를 해결하지 못하면 조실 주장자로 맞아 죽어도 이의를 달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으니 바쁘잖아. 죽을 날이 7일밖에 안 남았으니.”
“天下萬物 無非禪이요, 世上萬事 無非道”
“도야 이 놈의 자식아! 네가 안나오면 내가 죽고 네가 나와야 내가 산다” 그렇게 도를 구하기 위해 ‘악’을 쓰던 엿새째 펄펄 끓던 열이 내리면서 ‘철’이 났다. 찾아가 “도를 가져왔다”고 고했지만 되돌아 온 효봉스님의 답은 만족할 수 없었다. “그게 아닐 세.” 하지만 스님은 물러서지 않았다. 성수스님이 대뜸 “효봉 네 것 내놔라”하며 달려들었다. “그럼 못 쓴다“며 효봉스님이 타일렀지만 스님은 “천하만물 무비선(天下萬物 無非禪)이요, 세상만사 무비도(世上萬事 無非道)”라고 답을 할 정도로 배움을 위한 문답을 늦추지 않았다.
“사자새끼는 어미도 물어 죽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돼.” 스님은 당대의 선지식들을 찾아 이렇게 몸을 익혀가며 수행을 계속, 70여년의 올곧은 길을 걷고 있다.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데 믿는다는 것을 번역하면 ‘따라간다’는 말인데 따라간다는 말도 중국말이야. 우리말로 완전히 바꾸면 부처님 본보러 가는 거야. 앉는 것부터 부처님처럼 반듯하게 앉고…. 정구업진언의 진언(眞言)만 제대로 해도 불교를 제대로 아는 계기가 돼. 참말만 하라 이거야. 지혜로운 말, 참 말만 잘해도 집안이 화목하게 돼.”
스님은 불교가 무엇인지, 절이 뭐 하러 가는 곳인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알고자 발심하면 바른 스승을 만나 올바로 묻고 닦는 것이 순리인데 참선의 참(參)자 선(禪)도 모르면서 가르치고 닦으려고만 하는 이들이 아직도 많다고 안타까워했다. 다자탑전분반좌(多子塔前分半座).영산회상거염화(靈山會上擧拈花).니련하반곽시쌍부(泥連河畔槨示雙趺). 부처님이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 이야기를 하며 스님은 인도의 유마거사, 중국의 방거사, 한국의 부설거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0여 채의 건물 뒤편 황석산 자락에 새로 모신 불상 앞에서 좌선 삼매에 들었던 스님을 생각하며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들어갈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禪法滿十方(선법만시방)’ 스님에게 끝없이 묻고, 스님이 그런 중생들에게 들려주려 했던 것이 천지에 가득했던 것인가.
성수스님은…
전계대화상 역임한 최고령 원로의원
1923년 경남 울주에서 태어나 성인들의 얘기를 많이 들으며 성장한 성수스님은 원효대사와 같은 선지식을 마음에 두고 집을 나섰다. 1년여 간 전국 산하를 누비던 끝에 천성산 내원사 조계암에서 성암스님을 만나 1년간 홀로 정진한 후 수행납자의 길에 들어섰다.
초심.발심.자경문을 각각 한나절씩 사흘 만에 모두 외우고 다시 40일 만에 10만 독(讀)을 마치고 태백산 정암사 적멸보궁을 10만 배 기도에 들어갔다. 인근 원효대사가 정진한 곳으로 알려진 토굴터에서 홀로 정진하다 해방이 된 후 내원사로 돌아왔다.
1944년 내원사에서 성암스님을 은.계사로 득도.수계, 1948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한 후 전국 선원을 찾아 정진했다. 조계사 범어사 해인사 고운사 표충사 주지, 총무원장 소임을 맡아 가람수호와 불교발전에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도 수행자의 길에 소홀함이 없었다.
김현욱 서울시장 당시 그에게 신도회장 제의를 하여 서울시내 모든 구청장을 부회장으로 위촉을 시도하는 등 사회지도층과의 긴밀한 유대를 통해 불교발전을 이끌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부처님오신날 명칭 공인에 앞장서 그 날을 ‘잔칫날’로 인식을 새롭게 심기도 했다.
1994년 이후 현재까지 최고령으로 원로의원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2005년 말에는 전계대화상에 위촉되어 최근까지 그 소임에 정성을 다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안된다’ ‘묵은 땅에서는 새 사람이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서울 법수선원을 비롯한 선원 개설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함양 황대선원을 열고 정진하는 하는 가운데 2년 전 84살에 산청에 해동선원을 개설, 세 번째 선불장(選佛場)을 연 것을 비롯해 지금까지 70여 동의 건물을 새로 지으며 가람발전에도 힘을 기울였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다.
“30여 년 전 경봉스님이 ‘명인도사가 쉽지 않고 흔치도 않은데 성수 자네가 금년내로 오십년 지도한 결과를 내 보이라’ 하면서 등을 세 번 두드려 준 것”이 인연이 되어 평생을 명안종사를 배출하는 선원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10여동의 건물을 갖춘 황대선원 터를 최근 5000여 평까지 늘리고 야외법당에 불상을 새로 모셨다.
함양=김선두 기자 sdkim25@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 2476호/ 11월1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