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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 문학에서 가장 난해한 ‘문제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한 가지 키워드를 그의 소설 『단식광대』를 통해서 찾아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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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작가는 계속해서 ‘읽을’ 음식을 제공해줘야 했고, 읽을거리가 제공되려면 그걸 쓰기 위해서 일종의 굶기가 이루어졌다. 프루스트는 “나는 굶어죽지만 대신 태어나는 게 소설이다.”, “나는 엄마벌이다. 나는 가만히 있고 결국 내 작품이 내 등허리를 파먹고 대신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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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생리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에 가장 충실한 행위가 아니다. 먹기야말로 가장 철저하게 질서화 되어있고, 가장 철저하게 문화화 되어 있으며, 그러한 점에서 먹기의 질서는 언어처럼 이미 법칙화 되어 있다. 자유로운 제도화된 음식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안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화된 것은 ‘먹기’ 가능하지만, 비제도화 된 것은 ‘굶기’, 즉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식광대가 죽음에 이를 때까지 제도화된 ‘먹기’를 거부하고 ‘굶기’를 했던 것은 비제도화 된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서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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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식광대가 먹고 싶어 했으나 끝끝내 먹지 못한 ‘맛있는 음식’은 소설이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대상’이라 볼 수 있다. 또 맛있는 음식을 얻기 위해 단식광대가 실행한 ‘굶기’라는 방법론은 소설이 실제로 드러내고자 하는 실체를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에 비교 된다. 그런데 먹기라는 것이 음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듯이, 언어도 의미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언어는 의미가 주어짐으로써 의미현상이 된다. 그러나 제도화된 의미법칙에 따라 표현되는 언어는 그것이 배제하고 있는 실체를 표현할 수 없고, 표현된 것은 단지 ‘무의미한 것’으로 드러난다. 이렇게 볼 때, 단식광대가 기존의 음식 중에서는 맛있는 음식을 찾을 수가 없어서 ‘먹기’를 포기하고 ‘굶기’를 행하여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게 됐듯이, 카프카는 ‘의미 굶기’를 통해 제도화 된 의미법칙에서 배제된 ‘어떤 대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결국 ‘의미’의 거부가 이루어져야 진정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어떤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