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의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주체의 출현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는 당연히 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관심 중의 하나였다. 일직선적 시간관에 따르면 과거를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나타나고, 다시 현재를 원인으로 미래가 나타난다. 주체가 먼저 있고 주체의 작용으로 사건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에 따르면 애초에 주체가 존재한 것이 아니다. 주체는 사후작용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여기 세 명의 죄수가 있다. 간수 한 명이 와서 세 개의 흰 원반과, 두 개의 검은 원반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죄수들의 등에 흰 원반을 각각 하나씩 붙였다. 죄수들은 자기 등에 붙은 원반을 볼 수는 없지만, 상대방의 등에 붙은 원반이 무슨 색인지 알 수 있다. 간수는 죄수들에게 자기 등에 붙은 원반이 무슨 색인지 가장 먼저 맞춘 사람을 내보내 주겠다고 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세 죄수는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자기 등 뒤에 흰 원반이 있다고 맞출 것이다. 어떻게?
당신이 죄수 A라 가정해보자. 그리고 ‘내가 만약 검은 원반을 등 뒤에 붙이고 있다면’ 이라고 가정한다. 우선 B의 입장이 되어 자신의 등 뒤에 검은 원반이 붙어 있다고 가정하면, 죄수 C는 즉시 달려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다. 그렇다면 죄수 B의 등 뒤에는 흰 원반이 달려 있는 것이다. 다시 죄수 C의 입장에서 가정해보자. 나(죄수 A)의 등 뒤에 검은 원반이 있고, 죄수 C의 등 뒤에 검은 원반이 있다고 가정하면, 죄수 B는 즉시 달려 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가만히 있다. 그러면 죄수 C의 등 뒤에 검은 원반이 있다는 두 번째 가정은 잘못된 것이다. 죄수 C의 등 뒤에는 흰 원반이 있는 것이다. 결국 내 등 뒤에 검은 원반이 있다는 가정에 따르면 두 죄수가 모두 스스로가 흰 원반임을 알고 달려 나가야 하는데, 나가지 않고 있다는 것은 바로 내 등 뒤에 검은 원반이 있다는 가정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등 뒤에는 흰 원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간적인 흐름은 죄수 상호 간의 응시-이해-결론의 순서로 진행되지만, 논리적인 흐름은 결론이 이해에 확신을 주고, 이해는 다시 응시에 확신을 주는 순서로 진행된다. 즉 내가 검은 원반을 갖고 있다는 가정(이해)이, 결론에 의해서 확신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라캉이 말하는 논리적인 시간이다. 이처럼 사건이 있을 때 주체는 가장 마지막에 나올 수밖에 없다. 주체가 있기 때문에 말이 있는 게 아니라, 말이 있기 때문에 주체가 있는 것이다. 즉, 당신이 나를 꽃이라 부르는 순간 나는 당신에게 꽃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