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일행은 북경의 선무문 안 상방에서 그리고 한 번은 열하의 선무문 안 상방에서 코끼리를 직접 볼 기회를 가졌었다. 연암은 서적이나 소문으로만 듣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동물을 직접 보고 매우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상기에 코끼리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는 등 그 충격어린 애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이빨도 다 아래로 드리워져 막대기를 짚은 것만 같고, 갑자기 앞으로 향할 때는 환도를 잡은 것 같기도 하며, 갑자기 마주 사귈 때는 예자같이도 보여 그 쓰이는 법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당 명황 때에 코끼리 춤이 있었다는 말이 사기에 있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의심을 했더니, 이제 보아 사람의 뜻을 잘 알아먹는 짐승으로는 과연 코끼리 같은 짐승은 없었다.
“승정 말년에 이자성이 북경을 함락시키고 코끼리 우리를 지나갈 때에 뭇 코끼리들은 눈물을 지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대체로 코끼리는 꼴은 둔해 보여도 성질은 슬기롭고, 눈매는 간사해 보이면서도 얼굴은 덕스러웠다. “코끼리는 새끼를 배면 다섯 만에 낳는다.” 혹은 “열두 해 만에 낳는다.”한다. 해마다 삼복이면 금의위 관교들이 의장 깃발을 늘인 노부로 쇠북을 울리면서 코끼리를 맞아 선무문 밖을 나와 못에 가서 목욕을 시킨다. 이럴 때는 구경꾼이 늘 수만 명이나 된다. |
코끼리의 지혜와 재주, 그리고 충성심 등이 두루 망라되어 있다. 물론 연암의 관심이 이런 신기한 이야기들에서 멈출 리가 없다. 그의 상상은 훨훨 나래를 펴 코끼리를 통해 천지자연의 원리를 사유하는 장으로 나아간다. 그 구체적 결과물이 <상기>이다. 오히려 초월적 존재를 초월한 코끼리.
코끼리는 범을 잡고, 범은 쥐를 잡으나 코끼리는 오히려 쥐에게 잡힌다. 그러니 이 셋의 관계를 하나의 척도로 재단하려 한다면 필연코 궤변에 빠지고 만다. 즉 이들의 관계에서는 하나의 척도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조건의 네트워크에서 만남에 의해 척도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상대주의로 판단하게 되면 모든 가치를 부정하게 되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허무주의적 사유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절대주의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의 척도나 이치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궤변이 됨은 코끼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연암은 자신의 사유를 그 사이에 놓고 있다. 이는 관계나 배치 속에서 가치나 이치가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유는 만남에 의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고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만나야 하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코끼리에 대한 상상을 통해 ‘주역’의 오묘한 원리를 엿보는 것, 이것이『열하일기』가 자랑하는 명문 <상기>의 결말이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요점은 간단하다. 세계를 주재하는 외부적 실체란 없다. 고정불변의 법칙 역시 있을 수 없다. 무상하게 변화해 가는 생의 흐름만이 있을 뿐! 그런데도 사람들은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이거야말로 번뇌를 자초하는 꼴인 셈이다.
만물이 만들어내는 무수한 차이들, 거기에 눈감은 채 한 가지 고정된 형상으로 가두려는 모든 시도는 헛되다. 비유하자면, 그건 “화살을 따라가서 과녁을 그리”는 꼴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