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우리 모두는 매일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 무엇에 미치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서로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 자신도 편집증과 정신 분열에 사로잡혀 있음을 느낀다. 게다가 나는 너무나 민감해서 현실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다. 나는 그 점을 알고 있기에 그 광기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내가 하는 모든 일의 동력으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성공하면 성공할 수록 나는 더 미쳐가고 미치면 미칠수록 내가 설정한 목표를 더 잘 달성하게 된다. 광기는 각자의 머릿속에 숨어있는 사나운 사자이다. 그 사자를 죽이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의 정체를 알고 그것을 길들여 마차에 매달리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순치된 사자는 어떤 선생, 어떤 학교, 어떤 마약, 어떤 종교보다도 우리 삶을 훨씬 더 높이 끌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광기가 힘의 원천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위험하다. 때때로 가속도 붙은 마차가 모든 것을 박살낼 수도 있고 극도로 흥분한 사자가 자기를 조종하려는 사람에게 덤벼드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구
무한대에서와 마찬가지로 무한소에서도 우리는 구와 마주치게 된다. 행성이 구이고 원자, 소립자, 쿼크도 모두 구이다. 이 구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기본적인 힘의 지배를 받는다.
1) 만유 인력 : 우리를 땅에 붙어 있게 하고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달이 지구의 둘레를 돌게 하는 힘. 2) 전자 기력 : 전자가 원자핵 둘레를 돌게하는 힘. 3) 강한 상호 작용 : 그 원자핵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을 결합하는 힘. 4) 약한 상호 작용 : 그 소립자를 구성하는 쿼크들을 결합하는 힘.
무한소와 무한대는 그 기본적인 힘들로 결합된 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보면, 그 네 가지 힘이 합쳐져 단 하나의 힘을 형성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죽는 날까지 그 힘들을 통일적으로 설명하는 <대통일의 법칙>을 찾아내고 싶어했다.
노인
아프리카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보다 노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노인은 많은 경험을 쌓았기 때문에 부족의 나머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갓난아이는 세상을 경험해 보지 않아서 자기의 죽음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갓난아이의 죽음을 슬퍼한다. 살았더라면 아주 훌륭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 아기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노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쨌든 노인은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향
인류의 위대한 모험은 대부분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루어졌다.
옛부터 사람들은 불덩어리가 잠기는 곳이 어디인가 궁금해 하면서 태양의 운행을 쫓았다. 율리시즈,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틸라 등 모두가 서쪽에 그 답이 있다고 믿었다. 서쪽으로 떠나는 것, 그것은 미래를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태양이 <어디로 가는지>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그것이 <어디로 부터>오는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르코폴로, 나폴레옹, 밀보 르 오비(톨킨의 “반지의 주인”에 나오는 주인공 가운데 하나) 등은 동쪽으로 갔던 인물들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시작되는 동방이야말로 발견할 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모험가들의 상징 체계에는 아직 두 개의 방향이 남아 있다. 그 방향들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북쪽으로 가는 것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한 장애물을 찾아가는 것이다. 남쪽으로 가는 것은 휴식과 평온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발가락
아메리카 인디언과 중국인들 사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20진법의 수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스물을 한 단위로 해서 수를 센다. 손가락과 발가락의 개수를 합하여 셈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런 셈법이 나왔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10진법을 셈법으로 삼았다. 발가락을 무시하고 오로지 손가락만을 세었기 때문이다.
빛과 어둠
우주 공간은 캄캄하다. 별빛은 반사시킬 벽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선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소진되고 만다. 언젠가 우리가 우주의 깊숙한 곳에서 희미한 빛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우주의 경계가 되는 한 모퉁이에 도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삼각형
평범하기가 때로는 비범하기보다 어렵다. 삼각형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삼각형에는 대개 이등변 삼각형, 직각 삼각형, 정삼각형 따위의 이름이 붙어있다.
정의된 삼각형의 종류가 하도 많아서 특별하지 않은 삼각형을 그리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특별하지 않은 삼각형을 그리자면, 가능한 한 길이가 같은 변이 생기지 않도록 그려야 할 터인데 그 방법은 확실치 않다. 평범한 삼각형은 직작이나 둔각을 가져도 안 되고, 크기가 같은 각이 있어도 안 된다. 자크 루브찬스키라는 학자가 진짜 <평범한 삼각형>을 그리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에 따라 우리는 평범한 삼각형을 생각해 냈다. 그 방법에 따라 우리는 평범한 삼각형을 아주 정확하게 그릴 수 있다. 정사각형을 대각선 방향으로 잘라 삼각형 두 개를 만들고, 정삼각형을 높이 방향으로 잘라 역시 두 개를 만든다. 정사각형을 잘라 만든 삼각형과 정삼각형을 잘라 만든 삼각형을 나란히 붙여 놓으면 평범한 삼각형의 한 표본을 얻게 된다.
승리
승리 뒤에는 언제나 견딜 수 없는 허망함이 찾아오고 패배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열정이 솟아나면서 위안이 찾아온다. 그것은 왜 그런가? 아마도 승리가 우리로 하여금 똑같은 행동을 지속하도록 부추기는 반면, 패배는 방향 전환의 전주곡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패배는 개혁적이고 승리는 보수적이다.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막연하게나마 느끼고 있다. 영리한 사람들은 가장 멋진 승리를 거두려고 하지 않고 가장 멋진 패배를 당하려고 노력했다. 한니발은 로마를 눈앞에 두고 발길을 돌렸고, 케사르는 로마력 3월 15일 원로원 회의에 나갈 것을 고집하다가 브루투스의 단검을 맞고 죽었다. 이런 경험들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실패는 이르면 이를수록 좋고, 우리를 물이 없는 수영장에 뛰어들게 해줄 다이빙 대는 높으면 높을 수록 좋다. 명철한 사람의 삶의 목표는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참패에 도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승리로부터는 결코 배울 게 없고, 실패를 통해서만 배우기 때문이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中 - 베르나르 베르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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