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아, 땡기고 싶어라!
제남자 친구 얘기예요. 저흰 스물 여섯 동갑내기구요. 대학 3학년 때 설악산 수학여행에서 만났지요. 전 여대에 다녔기 때문에 딴 학교 남자아이들이랑 단체로 조인트해서 갔는데, 그때 그 애랑 한 조였어요. 여행 처음부터 끝까지 조단위로 움직였는데, 뭐 밥도 조끼리 먹고, 어디 다닐 때도 그랬고, 그러니까 싫든 좋든 어쩔 수 없이 4일 내내 같이 다닐 수 밖에 없었지요. 근데 이 인간이 어쩌나 저한테 추근대던지. 짜식 눈은 높아가지고... 제 머릿결이 좋다는 둥. 자긴 저처럼 화장 안해도 예쁜 여자만 보면 가슴이 벌렁벌렁 한다는둥, 다른 친구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으니까요. 여행 마지막날 밤. 나이트 갔었지요. 근데 이 인간, 제 옆에 껌처럼 딱 달라붙어서 부어라 마셔라 혼자서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더니, 급기야는 알코올 냄새 푹푹 풍기면서 쉰소리를 하더군요.
“지연아, 우리 부르스 추자. 응?”
나참 가가 막혀서. 제가 합격 통지서 받고 나서 젤 먼저 결심한 게 뭔지 알면 감히 이런 막말은 못하죠. 뭐냐구요? 장학금? 흠, 꿈도 안꿔요, 그럼 미팅? 이미 중학교 때 두루두루 섭렵했어요. 그럼 도대체 뭐냐구요? ‘절개 지키는 여자, 지조있는 여자가 되자.’ 고등학교 졸업반 때 대입시험 끝나고 그간 공부하느라 쌓인 스트레스 몽창 날려 보내준다면서 언니가 데려간 그곳, 나이트에서 전 봤지요. 그때 언니 친구들 몇명도 함께 있었는데, 저번에 언니 성적표 몰래 훔쳐봤더니 별로 공부 때문에 힘들었을 거 같지도 않은데 뭐 그렇게 맺힌 게 많았는지, 정작 그날의 주인공인 전 제쳐두고 언니 혼자 올 무대를 누비더군요. 뭐 거기까진 괜찮았어요. 근데 드디어 부르스 타임! 그쯤하고 자리로 돌아올 줄 알았던 우리 언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열이 솟구치는지... 대근 오빠가 선전하던 ‘힘과 정열을 그대에게’그 드링크를 마셨는지 어쩐지 아무튼 남자친구들 3명과 번갈아 가며 땡기더군요. 아무리 그냥 친구 사이라지만 그래도 남잔대, 외간 남자 품에 덜퍼덕 안겨서 스텝 밟으면서 빙글빙글 도는 언니 모습에 순진한 전 충격을 받고 말았지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어니한테 물었어요.
“언니, 아까 춤출 때, 영민 오빠(언니애인)한테 미안하지 않았어?”
“영민이? 뭐가?”
“사랑하는 사람 놔두고 딴 남자 품에 안겨서 춤추는데, 죄책감 같은 거 없었냐고?”
“얘가 무슨 소리야. 그동안 앉아서 책만 보더니 얘가 책이랑 현실이 구분이 안되나 보네. 내가 무슨 조선시대 춘향이니? 춤도 내 맘대로 못 추게. 나랑 난 지금 여기 1991년 자유 대한민국 서울에 있는 거라고 , 알았어?”
전 그때 결심했죠. 언니랑 차별화 하자! 절개 있고 지조 지키는 여자가 되기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이 춤 저 춤 심지어 막춤까지 다 춰도 절대로 부르스만큼은 아무하고나 추지 말것. 딱 한 남자, 내 모든 것을 줘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내 남자하고만 찐하게, 끈적하게, 그리고 느끼하게 땡길 것! 20세기 새롭게 부활한 논개인 제가 처음 본 그 인간하고 부둥켜안고 부르스? 어림없는 소리지요. 그랬더니 이 인간 횡설수설하면서 옆 테이블로 건너가더니, 그쪽의 술을 축내기 시작하더군요. 즐거운 추억이 되었어야 할 여행이 완전히 망가져 버리고, 거기에다 K대학과 S여대 조인트 사상 최고의 추한 커플로 뽑혀,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맨 앞자리 지정석에 나란히 앉아, 사회자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노래로 함께 노래 제끼는 망신도 당했지요.
“영감, 왜 불러, 뒤뜰에 매어놓은 병아리...”
‘으윽!’ 그러나 악몽은 끝나지 않아어요.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거의 매일 학교 앞에 찾아와서 절 기다리고, 집에 전화하고 정말 괴롭더라구요. 그래서 그랬죠.
“난 싫다. 너 가라.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자가 너 처럼 끈적대는 남자다. 이제 곧 여름인데, 너만 봐도 난 숨이 턱턱 막힌다. 가라."
참, 여기서 빠뜨리고 넘어가면 안되는 아주 중요한 얘기 하나가 있습니다. 이 인간 외모요, 제가 왜 그리도 이 인간을 거부했는지 아마 절 이해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무지 튀는 얼굴이거든요. 그렇게 잘생겼나구요? 그랬음 제가 왜 그렇게 튕겼겠어요. 그럼, 별로 잘나지도 못한 이 남잘 미남미녀 넘쳐나는 세상에 그렇게 확 튀어 보이게 하는 게 뭐냐구요? 있죠. 점이요. 점 없는 사람 어디 있냐구요? 사실 저도 점 많아요. 콧등엔 수도 없이 많고, 왼쪽 허벅지에도 만만치 않아요. 점이 새끼를 치는지 매년 늘어나는 추세구요. 근데 왜그러냐고요? 점도 점 나름이고, 그 위치나 빛깔도 중요하지 않겠어요?이 인간 오른쪽 코 옆에 이따만한 꼭 제 엄지손톱 2개 뭉쳐 놓은 것만한 대빵 큰 왕점이 있지요. 색깔도 불그스름한 게 이마에 흰 끝 하나 질끈 동여매년 영락없는 조선시대 머슴이죠. 그런데 이 인간 술 몇 잔 걸치고 이러더군요.
"내가 이 점 때문에 그렇지 나도 이 점만 없으면, 톰크루즈, 케빈코스트너가 울고 가는 얼굴이라고. 이 점 나도 빼고 싶다구, 그치만집안 어른들이 이 점이 복점이라고 절대로 얼굴에 칼대면 안된다고 그러셔서 나도 힘들단 말이야. 응? 내가 이래봬도 우리집 4대독자 장손이거든, 4대독자 4대독자라구...."
"참, 누가 물어 봤냐고, 누가 물어 봤어?"
추근대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고놈의 머슴 점이었어요. 그렇지만 남의 외모 가지고 그러는 건 지성인이 할 일이 아니잖아요. 그 말만은 삼가했죠. 근데 그렇게 싫다고 무안을 주고 타박을 하고 본척도 안해도, 어찌나 꿋꿋한지 질기기가 말가죽, 뻔뻔하기가 완전 콘크리트 바닥이었어요. 무조건 제가 좋대요. 첫눈에 반한단 말을 이제야 믿게 되었대요. 그러면서 자기랑 안 놀아줘도 좋으니까 그냥 못 오게만 하지 말라는 거였어요. 인정 철철 흘러넘쳐 주체 못하는 저, 마음속 비단 같은 저가 어떻게 이 불쌍한 인간을 내치겠어요.
"그래, 니가 아무리 불쌍을 떨어도 내 맘은 변할 리 없으니까, 니 맘대로 해라. 니 차비들이고 니 학점 펑크내서 졸업 못하면 니 손해지뭐. 내가 알 바 아이다. 대신 내 눈앞에서 걸리적거리지만 말아."
이렇게 말해 버린게 저의 실수였어요. 그것도 하루, 이틀, 같은말도 한두 번이지 이젠 그 인간 얼굴이 아니라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부르르 떨릴 만큼 지겹더군요. 그래서 잔인한 여자가 되기로 했죠.
"나, 딴건 어떻게든 다 참을 수 있는데, 너랑 다니면 꼭 내가 하녀가 된 기분이 들어서 싫어. 공주는 왕자랑 놀고, 머슴은 하녀랑 일하고, 너랑 나랑 다니면 사람들이 뭐라겠어. 그럴거 아냐, 방자랑 향단이가 끼리끼리 다닌다고...."
그 순간 자기 코 옆의 점을 어루만지던 그 친구 표정을 보지 내가 너무 심했구나, 후회도 됐죠.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친구 무슨 죄가 있겠어요. 죄라면 지 주제를 모르고 눈만 높았다는 거지요. 그리고 마음속 한편에선 엄마에게 기쁨의 원망을 했죠. '엄마는 왜 날 이렇게 이쁘게 나가지고 여러 인간 괴롭게 하는거야, 응--?' 그때 받은 충격 탓인지, 거의 매일 출근부에 도장찍던 그 친구 한동안 연락이 없었어요. 그래 나가 좀 가혹하지 했어도, 뭐 어쩔 수 없는일이었잖아요. 근데 몇 달 후에 나타난 이 인가, 꽃 한 다발 사들고 교문 앞에 서 있는데 그만 전 모르고 지나칠 뻔 했어요. 그 쪽에서 먼저 절 안 불렀으면 말이죠. 왜냐구요? 이 남잔 이 남자답게 이 남자의 심벌 불그레죽죽한 이따만한 왕 점이 없었거든요. 언제 그런게 붙어 있었냐는 듣 코 옆이 반들반들 한게. 진짜 완전 딴 사람인 거 있죠. 그때 술 먹고 한소리, 영 쉰소리 아니었나 봐요. 진짜 톰 크루즈 뺨치게 잘생겼더군요. 사실 만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남자가 키도 180cm가 넘고, 제격도 단단하고 K대학까지 들어간 걸 보면 머리도 웬만큼 되는 거 같고, 참, 고놈의 머슴 점만 아니었음 뭐 어떻게라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맘도 있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그 남잔 머슴에서 순식간에 왕자님이 되어 원래부터 공주였던 저랑 좋은 물에서 배영, 접영, 때론 싱크로나이즈드까지 하면서 잘 놀았죠. 이 남자, 그때 제 말에 충격을 받고 며칠 밤낮을 고민했대요. '집안을 택하느냐, 사랑을 택하느냐.' 점을 지 맘대로 뺐다간 집안어른들 후환이 두렵고, 그렇다고 그냥 두자니 절 놓쳐 못 살 거 같고.... 그러다가 과감히 집안을 버리고 사랑을 택하기로 결심했대요. 뭐 무슨 영국의 어느 왕도 나라를 포기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택했대나, 그러면서 남자에게 사랑만큼 중요한 게 어딨냐고, 자기는 지짜 진정한 사랑을 아는 이 시대 마지막 남은 유일한 로맨티스트라는 등.... 지가 지 얘길 하면서 혼자 감동을 받는 눈치더군요. 그냥 놔두면 어디까지 올라갈지 몰라 약간 찬물을 뿌렸죠.
"근데 너 얼굴에 칼대면 집안에서 쫓겨난다며? 아무리 내가 좋아도 너 4대독자 장손이잖아?"
"그래, 그래서 그거 때문에 고민하다 알아봤더니, 요즘은 칼 안대도 점 뺄 수 있다고 하잖아. 진짜 좋은 세상이야. 나 이거 레이저로 점 뺀 거야, 감쪽같지? 히히히."
얼마 전 일이에요. 평상시엔 청바지만 입고 다니던 애가 무슨 일인지 양복을 쫙 빼 입고 나왔더군요. 그 탓인지, 그날 따라 자꾸만 어색해지려는 분위기를 제 딴엔 한번 띄워 보려고, 별로 웃기지도 않은 얘길 해 놓고 혼자 푸하하하 오버를 하고 있는데, 얘가 갑자기 심각한표정으로 말하더군요.
"지연아, 우리 부르스 출래?"
"짜식, 유머라는 게 겨우 이 정도니..., 나나 되니 너랑 놀아주지. 쯧쯧."
불쌍해서 그냥 웃어줬죠.
"됐다. 됐어. 무지 웃낀다. 근데 너 제비니? 왜 나만 보면 부르스 타령이냐? 일어나, 나가자. 나 배고파."
"바보야, 앉아. 나 지금 너한테 프로포즈한 거란 말야. 니가 그랬잖아. 넌 아무하고나 부르스 안 춘다며? 딱 한 사람, 난 어때?"
그날 밤, 우리 둘 무지하게 땡겼조. 본전 확실하게 뽑고 나왔어요. 이 좋은 걸 모르고 그 동안 왜 지조 운운하면서 외면했느지.... 한 남자 넓은 가슴에 철퍼덕 안겨서 스테이지를 몇 바퀴 돌고 나니, 참, 세상이 달라보이데요. 참 좋드만요. 저희 가을에 결혼해요. 그리고 약속했어요. 결혼하면 부부 볼륨댄스반에 등록하고 함께 다니기로요. 근데 큰일이에요. 이젠 길 가다가도 스텝 밟기 괜찮겠다 싶은 뮤직만 흘러나오면 마음이 심란해요. 아, 또 땡기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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