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셋 - 사랑으로 풀어내는 웃음보따리
'원샷'에 울었다
저는 스물 다섯된 미혼인 직장여성입니다. 이종환 아저씨도 술 좋아하시죠? 저희 집안은 예로부터 술 때문에 되는 일이 없었던 집안입니다.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또 그 대를 이은 아들들, 그에 버금가는 사위들... 이렇게 남자들은 모두 술 하면 한 가닥씩 합니다. 집안의 남자들만이 술을 과하게 마시는데 그 사이에 몇 번째 유전자가 반항을 했는지 돌연변이가 하나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돌연변이가 바로 접니다. 딸 셋 중에 둘째 딸인 제가 그 대를 이어 열심히 마시고 있으니까요. 친구들도 역시 끼리끼리 모인다고 제 주변에서 술 못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들었지요. 그 절친한 친구들의 혼삿길이 막힐까봐서 이름을 밝힐 수는 없지만, 몇 명의 친구들 얘기를 잠깐 하겠습니다. 레몬소주는 약하다며 "아저씨, 여기 글라스 아나 주세요."하며 맥주컵으로 레몬소주를 마시는 서XX양. 유성에서 나이트, 단란주점을 거치며 한참을 놀다보니 너무 늦은것 같아 집에 가려고 택시를 잡으려고 보니까 날이 훤한 것 같은데 버스가 불을 켜고 다니더라는 송XX양. 벌써 새벽이었던 거지요. "술을 마시면 술이 나고 그래서 내가 곧 술인기라."하는 임XX양. 이 친구들이 저와 술로는 쌍벽을 이룬답니다. 우리는 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합창했고, 남자보다 술을 좋아해서 회식때는 물론이고 가끔은 점심때도 반주로 소주 몇 병을 합니다. 당연히 저에게도 기회는 오지요. 어른들이 권하는 거라서 예의상 다 받아서 마십니다. 이렇게 음주근무를 해도 일 잘하고 은행 볼일 다봅니다. 두 분이 믿으실지 모르지만 이 모두가 실화입니다.
졸업후 몇 년을 술과 더불어 살아왔다고 해도 뭐 별로 문제가 없었습니다. 취해서 집 못 찾아온 적도 없구요. 술주정을 하거나 추태를 보인 적도 없습니다. 술은 역시 술맛을 아는 사람이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중에 한 명입니다. 그런데 어는 날 제가 한 남자를 만났습니다. 우린 서로 한눈에 삐리릭 했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 운명의 장난이란 말입니까? 이 사람은 술을 거의 못하는 거예요. 거기다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물었지요.
"어떤 여자가 싫으세요?" 그랬더니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하는데...
"저는 술을 안 좋아해서 그런지 술을 마시는 여자가 제일 싫더라구요. 특히 남자보다 더 잘 마시는 여자 있지요. 그런 여자는 웬지 여가로 안 보여요. 선화씨는 제가 싫어하는 타입은 아닌 것 같군요."
이를 어쩌면 좋담... 그 자리에서 '저는 소주 두 병이 기본이에요. 호호호.' 그 얘기는 차마 못하겠더라구요. 그때부터 저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사람 친구들과 술자리가 생겨도 술은 생전 처음 대하는 양 고개를 돌려야 했고, "술 한 잔 하세요?"하고 친구들이 권해도 한 잔 받아만 놓고 아무리 군침이 고여도 마시지 못하고 잔을 들었다놨다 하기를 여러 번... 그러다가 운좋게도 "요즘에 술 못하는 여자가 어딨어요? 반잔만 해봐요."하고 권하면 못 이기는 척하며 일단 인상을 쓰고 반잔만을 홀짝 마시고 그렇게 달디단 술을 "아이 써!"하면서 술잔을 내려놓곤 합니다. 그런 모습을 애처로운 듯 쳐다보는 그 눈빛도 싫지는 않더군요. 한번은 저도 모르게 습관대로 '원샷'하다 놀라서 잔을 내려놓은 적도 있습니다. 개버릇 남 주겠습니까... 이러다 보니 절 술 한 잔도 못하는 여자로 알더라구요. 제 심정이 어땠겠어요? 안주 좋겠다, 술도 공짜로 마음껏 제공되겠다... 그 좋은 자리에서 안주만 집어먹어야 하는 이 술꾼의 심정은 그야말로 술 마시고 난 다음날보다도 더 속이 쓰렸습니다.
우린 매일 만나다시피 했어요. 그러면서도 알코올이 그리워지더군요. 어쩌다가 그 사람이 약속이 생겨 못 만나는 날에는 친구들을 불러내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지방으로 며칠 출장을 가시게 되었는데 이 철없는 딸이 이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넘기랴... 그 사람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습니다.
"저 오늘은 아파서 못 만나겠어요. 으실으실 추운 게 집에 가서 좀 쉬면 나으려나 어떡하지요?"
물론 그 사람은 당연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집에서 쉬라고 했고,전 속으로 쾌재를 불렀죠. '아흐!!! 술이 나를 부른다.'그리고 집엔 전화를 해서 동생에게 당부를 했지요. "만약에 그 사람한테 전화 오면 나 아파서 잔다고 그래 알았지?" '이 정도면 뭐 완벽하지' 속으로 자만하면서 제 술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 "아 마셔,마셔.부어라 마셔라, 원샷! 원샷!"이러면서 알코올에 흠뻑 취해 집에 돌아와서는 화장도 지우지 못한 채 옷도 그냥 입고 쓰러져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엄마는 저를 아주 섬뜩할 정도로 흘겨보시는 거예요. 어제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와서 화가 나셨나보다 했는데 동생이 그러더군요. 그 사람이 집에 전화를 했었다구요. 동생은 시키는 대로 아파서 잔다고 했는데, 늦은 밤에 도저히 걱정이 된다며 과일을 사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는 거예요. 사색이 된 엄마는 아파서 자는데 그냥 과일이나 먹고 가라는 만류에도 "아니, 얼마나 아프기에 그럽니까.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면서 방에 들어섰답니다. 그 방안에는 지우지도 않아 번져 있는 화장에 대자로 뻗어 있는 무방비상태의 몸, 입을 있는 대로 벌리고 숨을 헉헉거리며 자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는 그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더니 잠깐 긴장하는 듯 움찔 하더래요. 그러더니 늦었으니 간다면서 획 가버렸답니다. 세상에 어찌 이런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동안 그 좋은 술 다 마다하고 그렇게 공들여 탑을 쌓았건만 한번의 실수로 저는 이쯤 되니 이판 사판 공사판의 뻔뻔함으로 밀어 붙이기로 하고 전화를 했습니다.
"어제 왔었다면서요?"
"선화씨, 이럴 수가 있습니까? 술은 입에도 못댄다고 하더니 술에 곯아떨어져요? 게다가 나를 속이고 술을 마셔요?"
어쩌구저쩌구 일장연설을 하더라구요. 하지만 다행히도 헤어지자는 말은 안했습니다. 그저 술 마시는 거 좀 자제하고 이제부터는 모든걸 솔직히 얘기하기로 약속을 했지요. 하지만 그 후부터는 친구들과 모임중에는 꼭 호출기가 몇번은 울려댑니다. 첫 번째 통화에는 "저 한잔도 안 마셨어요." 두 번째 통화에는 "딱 한 잔 마셨어요. 일찍 갈 거예요." 세 번째 통화에는 "딱 두 잔 마셨어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네네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호출이 와도 전 전화를 못합니다. 너무 즐겁거든요. "야야 마셔 마셔, 내가 뭐 무서워서 못마시냐 마시자 마셔. 아줌마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이놈의 술 때문에 참 많이도 싸웠습니다. 정말 술과의 전쟁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술 마신 다음날 해장국을 사주며 걱정해 주고 조금씩 이해해 줍니다. 그리고 저 또한 술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구요. 소주 한 병만 마시기로요. 우리의 사랑은 술로도 깨어질 수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술만큼 친하게 엮어주는 게 또 어딨겠습니까? 그 대신에 가족과 주변에 결코 피해는 주지 말야야겠지요.
폭주가 여러분! 술은 마시되 다른 애주가가 욕먹지 않도록 조심해서 마십시다. 술과의 전쟁이란 얘기가 요즘 많이 들리는데 그 얘길 듣고 기세등등하게 웃고 있을 한 남자 얼굴이 그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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